과학자처럼 사고하기 - 우리 시대의 위대한 과학자 37인이 생각하는 마음, 생명 그리고 우주
에두아르도 푼셋 & 린 마굴리스 엮음, 김선희 옮김, 최재천 감수 / 이루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과학의 지향점은 어느 곳인가?

        -독자들에게 과학적 소양을 기대하고 있는 과학자들-


우리는 과학자들을 일반적인 생활과 거리감이 있는 존재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은 과학자들이나 하는 것 혹은 우리는 과학을 잘 알지 못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과학’이라는 용어는 기술적 접근을 바탕으로 한 배타적 본질을 다루는 성질의 괴리감을 가진 용어이다.


그러나 이 책이 피력하고자하는 것은 과학 그 자체가 아니다. 이 곳에 등장하는 모든 과학자들은 각 분야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놓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의 과학적 성과를 알리고 싶어서 인터뷰에 응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이들을 과학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싶어서이다. 과학과 생활 영역이라는 장벽을 허물어버리고 독자들에게 과학적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과학적 소양'을 기대하는 그들의 진실된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결코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다.


과학자들이 소망하는 바는 사유의 과학이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의 우리는 과학을, 과학의 사유를 오로지 과학자들에게만 맡겨왔던것 같다. 과학이 전문가들의 과학적 기술만을 필요로 하는 배타적인 성향을 가진 분야였기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배타성을 지닌 과학적 기술이 아니라 과학적 사유이다. 사회가 올바른 과학적 소양을 지니지 못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결과물이 가지는 진실들을 우리는 현대에 목도하고 있질 않은가...


 과학자처럼 사고하기’는 현대의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타자와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는 연구결과들을 쏟아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과학자 당사자들이 과학적인 사고라는 매체를 통하여 인류를 위해 과학적인 소양이 무엇인가를 또한 보여주려 한다. 비록 과학이라는 분야에서 출발하고는 있지만 이는 정치, 경제, 교육, 윤리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를 움직여가는 모든 것들의 작동원리와 부합하게 마련이다. 왜냐면 진리는 어느 한 분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영역을 불문하고 통섭의 기능을 하는 핵심의 한 축이 과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과학자는 아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다수가 과학적 인식과 소양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가치평가는 과학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소양을 갖춘 대중들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우리는 달걀을 낳을 수는 없지만 그 달걀이 상했는지는 판단 할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이다.



과학의 눈부신 편리함에 인류가 도취되다-과거 과학의 목적


과거 과학의 지향점이 어느 곳을 향하고 있었는지는 현대의 과학적 진실들을 돌아본다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과학이 그동안 수많은 문제점들을 일으키게된 배경에는 서구의 기계론적 자연관이라는 철학적 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즉, 과학이 자라온 환경의 영향을 벗어 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과거 과학이 자라온 환경은 인류에게 큰 기여를 한 바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못지않게 큰 허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허점들은 인류에게, 지구에 부정적 영형력을 행사해왔던 것이다.


 그동안 서구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실용적 기술로 전이되었고, 인류의 역사, 사회, 경제 및 교육등 모든 분야의 작동원리가 되어왔다. 우리는 이것을 ‘발전’이라 명명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 발전이 거듭될수록 ‘인간다움이 무엇인가?’라는 의문과 인간의 정체성에 위협을 가져오면서 과학적 소양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다. 어쩌면 인류는 과학이 끈임 없이 제공해온 그 눈부신 ‘편리함’에 취해왔던 것은 아닌가... 인간은 어쩌면 정치력, 권력, 경제력, 곧 타자들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데 그 가치를 부여했고 과학 기술은 그들의 시종노릇을 해왔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바탕으로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이랄 수 있다.



과학적 사유의 중요성

 

모든 것의 판단에 앞서 가치 평가의 기준은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과학과 그 기술에 대한 평가 역시 예외가 되어서는 안된다. 지난 200 여 년 간의 과학기술이 걸어온 발자취가 이를 반증하고 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그 당위성과 조건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과학적 소양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떻게’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사유의 방식이 중요하다 하겠다. 성과물이 지향하는 방향은 사유의 방향과 일치하게 마련이다. 인문학적 소양과 더불어 과학적 소양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있는 것이다.


과거, 과학은 지식의 결정체라고 생각해왔다. 인류를 위해 헤아릴 수 없는 이익을 가져다 주리라고 믿어왔지만 그 믿음은 현재 옳았는가? 지구의 한편에서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수없이 많은 인간의 생명들 병들거나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과학이 인류를 위해 공헌한 것은 무엇인가. 첨단 무기인가, 첨단 기술인가. 철저한 빈부의 격차인가.

 이 뿐이 아니다. 앞으로 기대되는 과학의 성과물들이 인류의 미래와 어떤 관계를 맺어갈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자연을 단순히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유의 방향성은 이제 유기적인 자연관으로 선회해야 할 것이다.


노화의 연구에 일생을 바치고 있는 커크우드는 ‘인간의 삶에 생물학적 한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의 수명에 앞으로 비약적으로 늘어갈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말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 또한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 눈먼 시계공’을 저술하여 우리들에게 익히 잘 알려진 도킨스와의 인터뷰를 만나면 과학적 사유의 중요성이 좀 더 분명해진다. 그에 따르면 아주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소수의 생명체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생명체들이 인류 발생 이전의 세계에 살기위해 적응해왔다.


 그러나 인간의 출현과 그 테크놀로지는 세계의 생명체계를 급격하고 변화시키고 있다. 이 급격한 변화는 늘 모든 생명에 위협이 되어왔다. 인간은 자연적인 급변못지 않은 변화를 지구에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구에에로는 우리의 조상이 박테리아였다고 단언한다. 과연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해본적이 있던가...우리들에게 과학적 사유가 정말 중요한 이유들이다.


 

과학자처럼 사고하기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의 생각


매우 인상적인 등장 인물 중 하나이며 흔히 인류학자라고 명명하는 로버트 새폴스키는 신경학, 신경과학, 생물과학등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과학자이다. 푼셋의 새폴스키와의 인터뷰는 강렬하게 다가온다. 지극히 과학적인 사고를 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지만 그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이해하는 통로’라는 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이는 ‘인권과 물권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구달의 생각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달은 일생에 걸쳐 침팬지를 연구한 인물로 국내의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과학자이다. 이들은 서로 전혀 다른 분야의 과학적 사유를 하고 있지만 인류를 위한 공통된 견해 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폴스키는 ‘톡소플라즈마’가 쥐에게 작동시키는 원리를 인간은 아직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고 한다. 인간이 왜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구달은 ‘ 연구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 것은 비로 인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물권과 인권의 동시에 인정하는 구달은 인간을 동물계에서 분리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동물은 우리의 일부로 여길 때 인간의 과학적 사유는 기존의 그것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새폴스키와 구달이 설명하는 도구는 비록 서로 다르지만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에 못지 않게 동물행동학과 영장류동물학을 연구 해온 조르디 사바테르 파이는 연구를 통해 동물들이 자의식과 문화를 가진 존재임을 증명했다. 그는 일차적으로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지금까지의 것과는 달라져야 함을, 자연주의자로서 인간의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그토록 깊은 과학적 연구를 해온 세계적인 명사들이 자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서는 것일까?

일일이 다 거론할 수 없는 목차에 수록된 과학자들의 견해는 매우 고무적이다 못해 서양사상의 새로운 흐름을 감지하기에 충분한 근거자료가 된다. 비교동물학자 윌슨에 따르면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들은 진화하는 과정에서 환경에만 적응해 온 것이 아니라 공생을 통해 서로에게 적응하여 진화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서구의 사상적 흐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기존의 인간의 부정적인 활동은 그들이 적응해온 자연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새로운 종의 멸종에 일조하는 방식의 인간적 행위에 대한 타당성을 고찰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코자 하는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과학의 미래 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에 큰 의미를 부여할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겠다. 어느 종의 멸종은 어쩌면 인류의 멸종과 무관하다고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과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형성해온 서구 사상은 종래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띄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관의 변화라고도 볼 수 있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생존하기 위해서 상호 에너지의 흐름을 요구한다. 이러한 사고는 매우 중요한 인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서구의 과학계에서 불어오는 철학적 흐름의 변화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다.


 인터뷰에 등장하는 철학교수 대니얼 데넷이 지적한대로 인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존재를 알아보는 존재인데, 이는 인간이 자의식을 가진 존재임을 뜻한다고 한다. 과거 과학에 대한 올바른 인식 혹은 소양을 가지지 못한 댓가를 우리는 충분히 목도해왔다. 이제 진정한 자의식이 무엇인지를 되짚어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미래를 위한 우리의 설계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전정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고 설계할 필요가 있다. 신경학자 이나스가 말한 대로 이를 위해 과거 인간은 두뇌를 필요로 했다. 하여 인간은 올바른 미래의 예측과 설계를 위해 뇌를 지속적으로 진화시켜왔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를 바르게 설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마인드를 가진 두뇌에 의존해야 하는가.


과거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도 과학, 수학, 예술, 철학이라는 분야가 따로이 정립된 경계를 가지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다. 혹자는 이를 미개한 형태의 학문 간주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거 서양에서는, 수학자가 곧 음악가요, 건축가가 곧 예술가였다. 동양의 고전에서도 수학 및 천문학이 등장한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가. 미개한 형태로서의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최근 강조하고 있는 통섭의 학문적 소양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브레너는 이러한 현상을 명료하게 지적해주고 있다. 그는 물리학자들의 문제는 화학을 대부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학문을 다양한 분야로 쪼개어 나누어 공부하고 연구하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분야 이외의 것에는 무지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지극한 전문성을 띄고 있으므로 그 효율성에서는 불필요한 에너지의 낭비를 예방하는 듯 보인다. 즉, 집중력을 향상 시킨 연구 방법이라 하겠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 영역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소통의 부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소통의 부재는 원활인 흐름을 막아 혈관을 결국 파열시켜 그 기능을 마비시키는 의학적 이치와 다를 바가 없다는 문제점을 브레너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폐단을 가진 것이 현대의 학문이다. 같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면서도 바로 옆 라인에 사는 사람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학문의 형태라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형태의 학문이 가져오는 역기능은 좁게는 그 사회,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 공동체에 의학적 마비상태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소통의 부재가 불러오는 폐단이다. 인문학적 소양과 과학적 소양을 다르게 분류하는 것도 이제는 조심성있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철학적 사고가 과학과 예술의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듯이 인문학적 과학적 소양이 미래에 끼칠 영향력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에 등장하는 다수의 과학자들이 사실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주연은 이 책을 읽고 있는 바로 우리 독자들이다. 우리들에게 과학자들은 인류 미래를 위해 지구와 더불어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면 우리야말로 지구를 살아가는 주인공이자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아마도 지금까지 와의 사고에서 한 발 앞으로 더 나아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유기론적 자연관이 가져올 우리의 미래를 예측하고 설계하는 일은 바로 독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에서 나올 것임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분자 생물학을 정립한 브레너의 말을 인용하며 끝을 맺고자 한다. ‘생명이 가지는 무생명과의 유기적 상관관계를 무시하지 말라.’  브레너는 과학에서 비롯한 절대적 진리를 이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과학적 사유를 재장전 할 때이다. 우리는 더 이상 지구를 망쳐서는 안된다. 무생물과 생물의 진화체계는 서로 교합한다. 지구는 생명체가 존재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우리는 그런 이곳을 파괴할 것인가? 우리의 원천을 파괴할 것인가” 라는 닐슨의 강도 높은 일갈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게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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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19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이라면 경끼부터 하고 보는 분야라...ㅠ

차트랑 2012-03-19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ㅠ.ㅠ

마녀고양이 2012-03-2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기론적 자연관이라는 말씀에 절대 공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단편으로 보고 있고, 현대 사회로 나아갈수록 점점 파편화되고 있기에 그것을 제대로 통합하는 자가 미래를 예측하고 잘 살아가는 사람일거라고 생각이 드네요. 하기사 워낙 깊게 들어가니, 전문성과 다른 분야의 화합이 그리 쉽지는 않을거 같아요.

봄인데, 너무 춥네요. 좀 있다 나가야하는데, 오늘은 두껍게 입어야지 싶습니다. ^^

차트랑 2012-03-20 17:37   좋아요 0 | URL
"통합하는 자가 미래를..."
이 말씀 상당히 공명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전문성 = 밥그릇 이라는 공식이 성립되고
그러므로 서로 이전투구인지라 수월하지 않아보입니다.
그러니 전문성이 배타적일 수 밖에 없지요.

이기론적 자연관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가 될 듯도 싶구요 ㅠ.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몽유도원 세트 - 전2권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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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 행사에서 건진 소설...아..소설은 정말 잘 안읽는데 이 책은 어쩔수가 없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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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1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참 애매합니다.ㅋㅋㅋ
김진명이 호불호가 확실하죠.
근데 저는 그닥 내꽈는 아니라고 생각해 일찌감치 접어둔 작가라죠.ㅋ

하늘바람 2012-03-19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날 것같은데요. 잘 건지셨네요

차트랑 2012-03-19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아시다시피 저는 소설이라는 분야 자체에 완전 꽝이랍니다 ㅠ.ㅠ
반값이라서 한 번 사본거죠 ㅋ

하늘바람님, 생각대로 좀 재미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찿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중용한글역주 - 도올 선생의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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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을 공부해보겠다고 덤벼든지 6개월이 지났지만 텍스트를 읽으면 읽을수록 중용에 대한 리뷰를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저 욕심에 중용의 텍스트를 싣고 있는 책만 여러 권 가진 꼴이 되고 말았다. 명심보감을 비롯 논어, 맹자, 대학등의 가르침을 깨달은 후에 중용의 가르침을 받으라 전하는 말이 있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중용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한다는 자체가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 듯 하다.


‘동양의 고전은 모든 텍스트를 암기하지 않고 논한다면 그 것이야말로 큰 글을 도둑질을 하는 것’이라고 말해준 학문이 깊은 지인의 말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는 중용을 대하는 마음을 더 무겁게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결코 중용을 가벼운 마음으로 대하지 말라는 뜻 이렸다. 하여 중용의 모든 텍스트를 암기하기 시작했지만 머리가 나쁜 탓에 그만 장구를 거듭해 갈수록 어리버리하고 만다.

 

이렇듯 감당하기 힘든 중용의 리뷰를 적을 자격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사람의 독자라도 더 중용의 큰 가르침을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는 심정으로 리뷰를 적는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중용의 리뷰는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중용의 가르침 중 학생들을 대하는 한 사람으로 매우 귀감이 되는 구절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할까한다. 중용의 첫 장구는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라는 글로 시작한다. 첫 구절의 강렬한 인상도 인상이겠지만 지금껏 해온 일과 관계가 있는 교(敎)라는 글이 그 얼마나 무게감이 있는 말인지 깨닫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중용은 위의 15글자를 통하여 性, 道, 敎를 설명하고 있다. 이 중에서 나는 교(敎)라는 말을 깊이 새기고자 한다. 하여 敎에 중점을 두다보니 장구의 시작을 거꾸로 이해할 수 밖에는 없다. 중용의 교(敎)라는 말은 첫 장구인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는 데서 처음 등장하는 말이다. 이는 ‘道를 닦으며 따르는 것 그것을 일컬어 敎라 한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구절의 뜻으로 보건대 그 敎를 이해하기 위해서 道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가 그것 인데 이는 ‘性을 따르는 것 그것을 일컬어 道라 한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또 性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 그것으로 이는 ‘天이 命하는 것 그 것을 일컬어 性이라 한다’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天이란 우주의 이치 혹은 섭리로 이해하면 될 듯 싶다.


 

그렇다면 天이 命하는 性이란 무엇인가... 이는 모든 자연 속에 존재하는 실체들 각각의 성질을 뜻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 EBS에서 황제 펭귄에 대한 다큐를 방영한 적이 있다. 영하 5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그들은 꼼짝하지 않고 알을 품어 부화시키고 어린 새끼를 키우는 수고로움을 전혀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이 알을 품기 시작하여 새끼로 자라게 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은 너무나도 눈물겹고 고달픈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아마 방송을 보신 분들은 황제 펭귄에게 새끼를 키운다는 것이 그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알을 낳자마자 어미는 아빠 펭귄에게 알을 건네고 먼 바다로 나가 음식을 섭취하고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아빠 펭귄과 교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빠 펭귄은 엄마 펭귄이 돌아오는 그 날까지 무려 4개월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꼼짝도 하지 않고 알을 품는다. 음식물은 전혀 먹을 수가 없다. 아차 실수하여 알을 놓치기라도 하면 영하 50도의 강력한 추위속에서 알은 순식간에 얼어버리고 만다. 그러면 펭귄들은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알을 다시 품어보겠다고 기를 쓴다. 어디 이 뿐인가. 새끼를 또 아차 실수하여 놓치는 경우도 있다. 이 역시 순식간에 얼어버린다. 차가운 시신이 되어버린 새끼를 어미는 품겠다고 또 그렇게 애닯아 한다.

 

 어미가 먹이를 충분히 먹고 돌아오면 아빠 펭귄이 바다로 나가 음식을 섭취하고 돌아온다. 그 거리는 무려 100km가 넘는다. 일정 기간을 넘기면 아기 펭귄은 아사하고 만다. 엄마가 토해내는 음식물이 바닥이 나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펭귄들은 한계 시간대를 넘기지 않고 돌아온다. 그들에게 시계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황제 펭귄은 그토록 연속된 시련의 행위를 왜 마다하지 않는 것을까...바로 天이 命한 그 性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이치는 황제 펭귄에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성질을 부여한 것이다. 어쩌면 펭귄이 그런 삶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선택 마 저도 추호의 어김도 없는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性 이기 때문이다. 뜻이 그러하다면 주희가 그 性에 주석을 달기를, "性은 곧 理를 뜻하는 말이다"라고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는 깊은 의문이 들 뿐이다. 


 

 ‘道를 道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道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기는 하다. 물론 이는 도가인 노자의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유가의 중용에서는 분명히 道를 설명하고 있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가 바로 그것이다. 즉 天이 命한 그 性을 따르는 것이 바로 道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황제 펭귄은 도를 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어진 性을 매우 잘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에게 도란 무엇인가를 말할 차례이다. 자연의 한 존재인 펭귄에게 性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그에 합당한 性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도 역시 자식을 낳고 교육시키며 기른다. 뿐만 아니라 가족 뿐 아니라 타인을 사랑하고 도우며 中과 和를 이루려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다. 공자가 말했다시피 인간은 仁을 행해야 한다. 자식을 사랑함에 애틋하고 타인을 사랑함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어야 한다. 세상의 和를 이루는 것이 인간이 갈 길인 것이다. 그 길에는 仁, 義, 禮, 知, 信이 있다. 이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비로소 敎라는 말이 나온다.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가 그것이다. 결국 인간이 따라야 할 그 本性에 맞는 길을 가는 것 道이고 그 道를 닦으며 따르는 것이 바로 敎인 것이다. 그렇다면 敎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敎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의 敎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용의 첫 장구를 공부한 사람에게 敎란 인간 본연의 性을 충실히 따르고 행하며 갈고 닦는 것이 바로 敎인 것이다.

 

중요은 道 다음에 敎를 놓고 있다. 이 얼마나 敎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던가... 참된 敎를 이토록 의미심장하게 가르치는 고전을 또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敎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할 것만 같다. 교라는 말 속에는 엄중하고도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심연의 지혜를 가진 뜻이 담겨있으니 그 말의 아득함을 어찌 감당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 학교 내의 교권이 추락했다는 말이 최근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다. 敎의 權이 추락했다는 말은 敎에 權이라는 껍질을 하나 입혔기 때문에 생긴 말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중용에서 말하는 敎는 결코 추락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엄중함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말은 아닐런지...중용에서 가르치는 敎를 깨닫는다면 교권은 반드시 바로 설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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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06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이렇게 읽으신다는 게 어딥니까?
전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근데 글씨가 커서 좋습니다.
글씨체가 뭔가요? 폰트는 10으로 키우신 건가요?
요즘엔 글씨 작으면 잘 안 읽게 되요.ㅋ

차트랑 2012-03-06 14:55   좋아요 0 | URL
요즘은 저의 독서기록장에서 오른쪽 마우스로 복사해서
리뷰나 페이퍼를 작성합니다.
글씨는 한컴바탕이고요 폰트는 10입니다.
그런데 선명도가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하는 듯 합니다.
테스트를 좀 해봐야 할 듯 합니다

그리고...
용기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스텔라님
또,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든 읽으실 수가 있습니다^

2012-03-06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6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6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6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만인생 2012-03-06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용, 쉽고도 어려운 교훈 인 듯 합니다
 
신화와 인생 - 조지프 캠벨 선집
조지프 캠벨 지음, 다이앤 K. 오스본 엮음, 박중서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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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들이 꼭 읽어야 하는 작가, 조셉 캠벨


필독서라는 말도 있지만 이제는 필독가라는 말도 때론 성립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은 바로 조셉 캠벨과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신화와 인생을 번역한 이윤기선생이 이 책을 번역하지 않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만 조셉 캠벨은 참으로 멋진 생각을 가진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 어떤 현상도 조셉 캠벨의 사고 영역에 장애가 되는 일은 없다. 그것이 종교이든 철학이든 간에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모든 것들은 잘 버무려지고 융화라는 새로운 변화를 격게 된다. 그야말로 ‘化’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양성이 무시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양성을 고스란히 보존시켜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전혀 새로운 맛을 주는 사고의 소유자인 것이다. 조셉 캠벨을 우리들의 20대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열린 사고


 젊은 독자들에게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저자의 열린 사고이다. 저자는 큰 줄기의 종교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신화들을 연구해온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기독교, 불교, 유학, 도학등은 물론 일반인들로는 접하기 쉽지 않은 아메리카 부족을 비롯 아프리카의 원주민에 이르는 그들의 신화를 연구해왔다. 어쩌면 전 세계의 신화란 신화는 죄다 섭렵했는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자신 스스로 기독교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이원론적인 기독교적 이론들에 공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때로 조셉 캠벨을 지극히 동양적 사상에 물든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게 한다. 절대자와 인간의 간극인 넘볼 수 없는 종교적 금기사항을 저자는 무참히도 무너뜨린다. 이원론적 사고 혹은 사상은 기필코 대척점을 만들 수 밖에 없고, 언젠가는 반드시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구도로 이해하는 그에게 이윈론이 자리 잡을 여지는 결단코 없다. 캠벨에게는 정신적 작용력의 한계는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정말 멋진 독서법


이토록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저자가 젊은 독자들에게 주는 또 다른 유익함은 독서의 좋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캠벨이 조이스와 토마스 만 그리고 슈펭글러를 읽다보니 니체를 언급한 장면이 나오고 그렇게 니체를 읽는다. 니체를 읽으려면 쇼페펜하우어를 읽어야하고 쇼펜하우어를 읽으려면 킨트를 읽어야 한다. 칸트를 출발점으로 삼자니 매우 힘들다. 그리하여 괴테로 돌아간다. 조이스가 쇼펜하우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조이스의 시스템에서 쇼펜하우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슈펭글러의 사고 시스템과 조이스의 것이 매우 밀접하다는 점을 칼 융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이 모든 것들을 한데 버무리는 작업을 해내는 것이 캠벨의 독서방법인 것이다.


사실 동양의 고전을 읽을 때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중용을 읽다보면 대학, 논어, 주역 혹은 맹자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독서의 역량이 늘어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방식이 아니던가... 젊은 20대들에게 캠벨은 결혼 혹은 인생의 의미 뿐 아니라 진정한 독서의 방식과 그 가치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왕성한 독서력을 발휘할 수 있는 20대들에게 이 책은 매우 귀중한 깨달음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는다.

  


캠벨, 중용과 만나다...


  동양의 사상을 약간을 신비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점인 아쉬움으로 남지만 ‘인간은 신성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에게서 동양의 고전인 중용의 장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용에는 ‘지성여신’이라는 문구가 있다. ‘지극한 誠은 곧 神적인이다.’라는 말이다. ‘지성여신’이라는 문구 앞에는 ‘유천하지성, 위능진기성’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오직 천하의 지성이라야만이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誠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둘을 합치면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라야만 자신의 誠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고 그 지극한 誠은 곧 神적인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얼마나 조셉 캠벨의 이야기와 흡사한 말이던가...인간은 신성으로 가득한 것을 향해 나아간다는 조셉 캠벨의 말은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중 하나인 중용의 한 장구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아파치족의 이야기는 지극히 물권을 인정하고 있다. ‘모든 사물들은 살아있고, 그 사물들은 우리의 필요를 이해하고 있다’ 내용이 그것이다. 이는 사물을 인간이라는 방향에서 출발하여 사고한 것이 아니라 사물을 주체로하여 사고한 말이다. 중용에서도 물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있다. 인권이 중요하듯이 물권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능진기성 위능물지성’이 그것이다. 천지인의 조화로움과 일원론을 주장하는 동양사상에서 물권의 중요성을 제기한다는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주장하는 서구의 사상으로는 설파하기 매우 어려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여러 가지 면에서 캠벨은 우리의 젊은 독자들에게 많은 깨달음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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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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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이 책을 모두 7개의 파트로 구분하여 제목을 붙였다. 첫 번째 글은 저자의 기철학에 대한 시론을, 두 번째 글부터 5번째 글은 저자의 논고들이고 나머지 하나는 일본어의 표기법에 관한 글이다. 첫 번째 글의 기철학 시론에서 저자는 동양사상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자 하는 사상가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의 기철학은 모든 것의 유기적인 관계의 통합, 즉 몸이라는 것의 일원화이다. 세계 질서와 문화의 다원화를 인정하는 시대적 흐름으로 본다면 다원화 속에서의 일원화라는 개념이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무질서 속에서의 질서라는 명제로 이해한다면 소통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는 기독교적 사고를 저변에 깔고 진화해온 서양철학과 대조되는 사상이며 새로운 개념으로서 김용옥의 기철학이다.

 

2번째 글부터는 자신의 논고를 수록한 글들이다. 하버드대학교의 박사과정에서 발표한 논문 뿐 아니라 각 대학에서의 연구과 언론사의 학술지에 게재한 글들이다. 이 글들은 일관된 방향성과 목적성을 분명하게 밝힌 글들로서 제목이 주는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의 성과물들이다.


결과적으로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의 내용과 전문성을 고려하여 판단한다면 첫 번 째 글은 기철학에 대한 시론을 소개한 글이라 볼 수 있고 2번 째 글(저자의 첫째 글)부터는 동양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논고들이라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깊지 않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 읽어나가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 장을 만나게 된다. 그 장은 바로 논고의 세 번 째 글인 ‘中央學界에 있어서의 中國哲學史記述의 轉換’이다.


氣哲學 試論을 이끈 장에서는 기철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는 章이라고한다면 나머지의 논고들은 동서양의 철학을 넘나드는 저자의 광범위하면서도 뿌리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저술된 논고들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특히 225쪽에서 262쪽에 이르는 ‘中央學界에 있어서의 中國哲學史記述의 轉換’은 우선 한자를 상당히 사용한 글이며 그 내용도 중국 철학과 서양철학의 유물론과 관계하는 부분이면서도 상당한 이해도를 요구하는 장이기에 일반 독자인 나에게는 읽어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의 장들은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본다. 저자는 글을 읽는 순서를 약간 재조정해주고 있다. 이점을 참고한다면 이해를 돕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 같다. 논고들의 목적은 동양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후학들에게 주는 일종의 조언이라 할 수 있다. 후학들이 고전을 어떠한 자세로 번역에 임해야하고 연구해야 할지를 자신의 주장을 실은 글들이다.


철학과 사상의 중요성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동양의 고전은 4書 5經을 일컬으며 그 고전들은 철학사상을 담고 있다. 철학 사상을 어떻게 하느냐는 저자에게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면서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은 요체이다. 사상은 시대를 거쳐가면서 세계의 역사에 그 흔적들을 남긴다. 저자는 한국의 철학 연구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동시에 서양의 칸트, 헤겔, 니체 그리고 괴테에게 히틀러의 죄악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철학사상은 주변 사회에 영향을 끼칠 뿐만아니라 전 세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는 무기와 다름이 없다. 나아가 철학적 사상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하는 이유로 저자가 밝혀두고 있는 점은 ‘새로운 혁명적 인간학’을  향한 방향점이다. ‘무엇을 하느냐’는 사실 중요한 목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즉 누구를 위해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의 방법론에 대한 올바른 방향설정이 없는 연구가 그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경고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동양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의지가 담긴 매우 귀중한 책이라 하겠다. 고전에 대한 이해의 방법론, 인용의 방법론 즉 연구의 전반적인 방법론을 다양하고도 깊이 있는 학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전개해가는 이 책은 비단 철학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동양철학이 가지는 함의의 포괄성은 저자가 강력하게 지적하는 부분인데 포괄적이고 입체적이며 다각적인 고전의 함의를 대중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제시하는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는 본질적으로 학계에만 국한되는 한계성을 넘어선다. 연구는 학자들이 하는 것이지만 그 연구를 일반 대중들에게 적절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합목적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 책은 그러므로 우리 모두를 위한, 인류를 위해 학계가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가를 제시해주는 논고들이라 할 수 있다.

 

 잘못된 인식이 끼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잘못된 인식이 전파되어 사회로 흡수될 때 뒤따라오는 현상들은 해당 사회 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부정적 결과물을 내놓게 마련이다. 편견과 오류는 개인을 파괴하고 심지어 사회를 파괴할 수 있는 위험한 무기와 같다. 그러므로 사회와 문화가 발전할수록 철학과 사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절실히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 동서양 철학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수 전제이다.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바른 연구의 지향점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이 가치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싶다.



독자들에게 이 책이 주는 의미

동양의 고전에서 드러나는 철학은 서양의 그것 과는 매우 다르다. 인간이 존재하는 우주관이 특히 그것이다. 동양 사상의 우주관은 실체와 현상을 이원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현상을 초월한 실체에 독립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체의 초월성을 바탕으로하는 이데아론적 기하학적 사유나 절대적인 도그마에 집착하지 않는다. 서양의 찰학적 사조가  헤겔 그리고 막스에 이르기까지 플라톤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본체와 현상의 이원론적 구조가 서양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적 도그마가 그 배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의 철학은 기하학적 사유가 자리잡을 여지가 없다. 동양은 공간조차도 시간적으로 파악하는 특이성을 가진 철학이기에 그러하다. 공간적 개념의 절대성을 맹신하지 않는 탓이다. 이러한 동서양의 철학적 구조를 일반 독자들에게 파악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고를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저자는 매우 깊고 폭넓은 동서양 철학을 끌어와 논고안으로 개입시키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한자들은 한자와 자주 접하지 않는 젊은 독자에게 독서의 어려움을 줄 수고 서양 철학적 배경을 상당히 요구하는 문제도 이 책의 단점으로 작용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동서양의 철학적 배경 지식의 유무를 떠나 매우 유익한 책이 되리라 생각한다. 배경지식이 밝은 독자들이라면 가독성이 높다는 이점이 있고, 그렇지 않은 독자들이라면 자신의 독서 방향을 이끌어가는 안내서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어보신 독자들이라면 이미 알 고 있듯이 눈에 띄는 고전들과 서양철학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놓치지 않으면 된다. 책을 읽어가면서 포착한 고전과 철학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 책을 읽는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자신의 시각과 통찰력을 높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장 바람직한 독서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기철학의 이해를 돕고 나아가 ‘동양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설정하는 논고들이 후학들에게 유익하고도 큰 도움이 되어줄 수 있듯이, 이 책을 읽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독서의 방향과 방법을 제시해줄 수 있는 매우 유익한 도서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저자의 후학들은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에 매우 깊은 경지에 이른 저자의 견해를 상당부문 수용한다 한다면 올바르게 고전을 연구하고 발전시켜가는데 도움이 크리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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