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은 뜻밖의, 정말 의외의 책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 책을 만나는 순간 그 기쁨과 희열은 비할 수 없이 크다. 알라디너라면 그러한 책을 만난 적이 한 번 쯤은 있을 것이라 여긴다. 내게도 그런 책이 있다. 밀도 있고, 정렬적이며, 정성을 들였고, 온 힘을 쏟아부었구나 싶은 이 책이다. 사적으로 매우 귀하여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책, 바로 「생태주의 시학」이다.

 

생소한 제목의 책이지만 내용은 그만 감동을 금할 길이 없었다. 몇몇 우리의 시인들은 이미 생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걱정과 우려로 그들의 아픈 가슴을 시로 써 나아갔다. 지극히 대중성을 지닌 시들이지만 실제로는 대중적이지 못한 시들이 많다. 당시에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지만 어쩌면 그 제목들은 어디선가 들어보았음직 한 것들이기도 하다. 물론 별로 널리 읽히며  팔려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시가 그러했듯, 이 책 역시 별로 알려지지는 않은 듯하다. 10년이 지났지만 리뷰하나, 아니 페이퍼하나 없다. 이유는 자명하다. 저자가 돈벌이가 되지 않는 내용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자본주의가 아닌 생태주의가 우리들의 뇌리 속에 뼛속 깊이 자리잡지 않은 탓이던가, 이토록 아름다운 책은 알려지지 못한 채 조용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생태, 친환경을 외치는 사회에 살고 있고, 썩은 물과 공기를 마시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에 큰 관심이 아직은 없는 것이다. 그러하다보니 각 국가의 정책은 자본 중심이고 우리의 건강에 관심을 줄 여유가 없다. 이에 홀로 고독한 경종이라도 울리듯, 저자는 외롭고 쓸쓸한 생태주의를 노래한 시인들의 시를 정밀하게 분석해낸다. 역시나 고독하게..아, 시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런 것이었구나 싶은 감동의 물결이 가슴에 밀려온다. 모름지기 책이란 이처럼 저자의 땀과 피나는 노력과 정렬, 그리고 자신의 진정성을 가득 담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아니 독자로하여금 그것들을 느낄 수 있도록해야 한다. 사람들은 시를 어려운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이 책은 그러한 관념을 산산히 부서주거나 혹은 역시나 겁나게 어려운 것이 시라는 생각을 더욱 공고히 해주거나!  어쨋거나 친환경이니 에코이니 하는 말은 이제 인문학의 영역으로 들어와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최근, 서울의 하늘은 평소의 하늘, 평소의 공기가 아니었다. 황사와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었고 그 공기는 우리들의 폐 속으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숨을 쉬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의 대기가 숨쉬기에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더 과거에는 황사를 으레 그려니 했고 지금처럼 그리 폐해가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몇일 전의 공기는 정녕 최악이었다.

 

자연보호는 초중등학교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말이고, 매체는 에코, 그린, 혹은 친환경을 외치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낸 슬로건일 뿐, 그 내면은 마케팅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알고보면 환경에 해악을 끼칠 수 밖에 없는 상품에 기업은 죄다 그런 수식어를 가져다 붙이고 있으며, 정작 알아보아야 할 우리는 기업이 환경을 위해 애를 쓰는 줄로 안다. 학교도 기업도 말로는 자연보호를 외치지만 우리가 진지하게 자연을 생각해 본 적이 과연 있던가. 자연보호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전두엽을 손상시켜 인지능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고, 치매 혹은 암을 유발시킨다는 초미세먼지를 우리의 자녀들이 마시게 했다. 기성세대는 공범이나 진배없다.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물과 공기를 더럽혀왔으니 말이다. 아니 의식의 부재로 되려 오염을 부추겨왔다. 사실은 국가도 기업도 국민도 모두 공범인 것이다. 그러나 영문도 모르고 자신을 해치는 공기를 마시고 있는 저 어린 아이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조만간 중금속으로 가득 한 미세먼지가 한반도를 강타할 것이라 한다. 그들에게 이제는 생화학전용 방독면을 권해야 할 때가 온 것인가. 그들의 조상들이 만들어 낸 오염으로 찌든 공기가 폐로 들어가 그들의 온 몸을 병들게 하고 말 것이니 말이다.

 

동양에서는 이미 2500년 전 자연으로의 회귀를 외쳤고, 서구에서는 그 족보를 들추면 니체를 만날 수 있다. 니체는 정신 뿐 아니라 육체의 중요함을 설파했다. 육신이 병들면 그 정신이 온전할 수 있겠느냐 외쳤던 것이다. 동양은 본디 천지인을 하나로 인식했으니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서구도 자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고 동양보다 더 자연을 생각하는 언론과 단체가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글쎄올시다 이다. 자연의 파괴는 산업혁명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노동력이 아닌, 기계의 힘을 이용하던 그 시점부터 자연의 파괴는 시작된 것이다.

 

이 책으로 니체는 정신만을 유독 지나치게 강조하는 서구의 사상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플라톤 이후 서구는 정신세계의 정수라고 일컫는 이데아의 사고속에서 같혀 살아왔다. 상대적으로 물질 세계를 경시했고 열등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렇게 철학이 정신의 미학에 도취되어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물질(자본)을 숭상하는 서구의 이율배반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서구의 기형적 철학에 염증을 느껴던 것일까. 니체는 그 결과 편협된 사고의 불균형을 이제는 바로잡아야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서구는 도대체 왜 하.늘.을 날아다니는 독.수.리.만을 강조하고 주입시키냐고 반기를 들었다. 대.지.를 제 몸뚱이라로 기어다니며 인식하는 나의 친구 '뱀'을 홀대하지 말라 외쳤다.  짜라투스트라는 독수리의 눈과 뱀의 몸뚱이리가 조화를 잘 이루어야한다고 일갈했던 것이다. 니체에게 대지는 치유의 대지였다. 당시 서구는 짜라투스트라의 이러한 직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 깊은 감명을 받은이가 있었으니, 바로 Richard Strauss였다.  

자본주의가 피도 눈물도 없는 이념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양산해온 주범이며, 불평등의 최고 기여자라는 점도 그러하지만, 우리가 마시는 물과 공기를 오염시킨 주범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물론 있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목숨보다 돈을 더 소중하고 귀중히 여기는 이념' 이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돈을 가장 숭상하는 이념'이다. 국가와 기업은 대중 앞에서는 사회로의 환원과 재분배 그리고 평등을 강조하지만 뒤로는 귀중한 돈을 쫒는다. 신을 숭상하는 종교는 사실은 역시 돈을 숭배한다. 물론 종교가 죄다 그렇다는 말 아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집단인 각 국가와 각 종교의 작동 원리는 알고보면 자본주의, 즉 돈이다.

 

생명은 물과 공기에서 온다고 했다. 과학자 ‘밀러’와 그 동료  ‘유리’라는 두 냥반은 물, 메테인, 암모니아, 수소를 사용한 실험을 했다. 일주일 간의 실험 끝에 그들은 탄소가 유기물로 합성된 사실을 알아냈다.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이 합성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중 미소량의 탄소가 아미노산의 한 형태라는 것이었다. 아미노산이 무엇이던가. 살아있는 세포의 단백질을 합성하는 생명의 중요 물질이 아니던가. 우리 신체내의 DNA는 아미노산을 특정한 위치에 배치시켜 단백질을 만들어내게 한다. 그렇다면 아미노산의 결핍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자명한 일이 아니던가.

 

원시 대기에서 그런 아미노산의 발생을 매개했던 것은 바로 물과 공기가 핵심이었다. 이제 생명의 근원인 그 물과 공기가 오염될대로 오염되어 더 이상 마실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공기도 곧 우리를 질식 시키려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물을 병에 담아 팔고 사기를 20여년 이상 해왔다. 기업은 그렇게 물로 돈을 벌고 있다. 우리가 마실 수 없는 오염수가 더 증가하고 지독해질수록 기업은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일 것이다. 사실 물이 기름 값과 다름이 없는 가격이 아니던가. 이대로라면 앞으로 더 비싸질 것이 뻔하다.

 

우리의 처지가 이러하니 압축 공기주머니를 구매해야 할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가정집에 공기 정화기가 대세인 요즘이다. 앞으로는 개인 휴대용 공기 정화기 가지고 다니거나 공기 주머니를 차고 다닐밖에... 과연 양질의 공기를 얼마에 팔고 사게되는 것일까... 양질의 물과 공기가 더욱 희박해지고 고갈 될수록 그 값은 점점 더 비싸질 것이다. 물과 공기를 살 돈이 모자란 사람들은 중금속이 가득한 썩은 물과 공기를 마시며 그렇게 죽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마치 돈이 있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은하철도 999를 타지만 그 고층 도시의 아래, 지독하게 오염된 곳에서 거리의 서민들은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던 그 은하철도 999말이다.

 

얼마 전의 언론 기사에 의하면 인도 인구의 절반이 질 나쁜 공기의 덕분에 3년의 수명이 단축된다고 한다. 이는 인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의 세상이 이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어도 좋단 말인가....혹자는 말할 수 있다. 굶어 죽으나 썩은 물과 공기를 마시고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가 아니던가? 라고 말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해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염수를 마시고 사는 물고기들의 몸이 변형되어 찌그러진 상태로 태어나고 돌연변이가 태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방독면을 착용하거나 압축 공기주머니를 몸에 지녀야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가 살아야하는 것인가? 나아가, 우리의 자녀들이 앞으로 생산하게 될 미래의 우리 후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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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5-02-27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운 챠트랑님 잘 지내시지요?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요즘 생수를 사먹는 것은 너무나 당연시 되어 버려서,
갑자기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물을 사먹는 나라도 있다고 했을 때 다들
와아- 하고 웃어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해지지 않는 세상이 되어가네요.

그리고 사람이란게,
당연하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그 당연했던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나봐요.
저는, 가끔이라도 차트랑님이 이렇게 글을 올려주시는 자체가 안심이 됩니다. ^^

차트랑 2015-03-04 01:51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오랫만입니다
염려해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있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요...

저는 북플을 하지 않아 소식을 제때 받지 못해
답이 늦어진 점 양해바랍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고향길에 올랐다.

자주 그리고 또 자주 찾아보아야하는 곳이지만,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은 일이 바로, 고향길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고, 부모님께서 살아계신 곳이며, 나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고향이다. 나이가 어려서는 그 뜻을 잘 모르다가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서부터 아련한 단어로 변해가는 것이 고향이라는 단어인 것이다.

 

아버지를 뵈니 이제는 젊은 시절의 패기와 사내다움의 듬직함은 어디론가 사라져있고, 어깨는 연약하며, 시들어가는 꽃처럼 안타깝기만하다. 인생은 그런 것, 태어난 모든 것은 그 시기를 다하면 이처럼 쇠약해지고 나약해지는 법, 나도 때가 되면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가리라... 그러나 그 입가의 미소는 그 어느 꽃보다 더 포근하고 더 아름답지 않은가...그 여유있고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가 유일한 위안이 되어준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 생각났다. 당시 깊은 산골짜기의 시골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만 학교에서 늘 문제를 일으키는 놈은 다름 아닌 공책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우개가 주범이었는지도, 아니면 빈곤이 주범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공책에 글씨를 실수라도 하게되면 지우개가 없는 아이들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지우곤했다. 지우개가 있는 친구들이라고 크게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공책의 구멍이 바로 그 결과였다. 누가 더랄 것도 없이 공책도 지우개도 모두 저질이었다.  

 

침을 발라 연필자국을 지워보겠다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의 결과물, 질 떨어지는 공책의 종이가 수분의 힘을 견디지 못했다. 그만 촌놈들의 몸에서 때가 밀려나듯 시골 촌놈들의 손가락에 공책의 살점들이 벗겨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 쪽의 노트가 휑하니 들여다 보인다.

 

지우개의 사정은 때밀이와는 달랐지만 이도 큰 차이는 없었다. 힘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고사리 손을 가진 초등 1학년 생들의 생각과 결과는 전혀 원치 않는 것이었다. 이는 침바른 손가락보다 훨씬더 비극적인 결과를 간간히 초래했다. 어느 순간, 북~하고 공책의 한 면이 찢어져버렸으니 말이다. 연필 글씨 하나를 수정해보겠다고 애쓰다가는 공책을 찢어먹은 시골 어린 촌놈의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표정...어이가 없는 멍한 그 표정 말이다...

 

이는 비단 공책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게는 미술시간에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문제는 손가락의 침도 아니요 지우개도 아닌, 바로 크레용이었다. 수업시간에 공책에 침발라 발생하는 일만으로도 스트레스인데, 즐거워야할 미술시간마저도 그러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크레용은 6색갈, 도대체 어떤 색으로 그림을 그려야할까. 빨강, 파랑, 검정, 하양, 노랑 그리고는 하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곱색갈 무지개도 그려낼 수 없는 이 색갈부족의 크레용은 색갈만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재질이 나빴던지 단단하기가 무슨 나뭇가지같았던 것이다.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려면 손에 여간 힘이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단단히 마음먹고 색칠을 할라치면 그만 크레파스가 먹질 않는 것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색갈이 부족한 것도 불만 가득한 일인데 아 이넘의 크레파스가 도화지 위에 먹질 않네.

 

질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였던 도화지의 살점들이 때 밀리듯 크레파스에 뭍어나온다. 때로는 도화지가 되려 크레파스를 먹고 있었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놈이 나 하나면 이 얼마나 억울하고 창피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반에 나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죄다 그런 놈들 투성이다. 크레파스를 이리 돌리고 저리돌려가며 겨우겨우 그림을 도화지 위에 채워가다가는 미처 다 채우지도 못하고 종이 울리는 것이었다. 미술시간을 겨우 마친 아이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하다. 즐거운 그림 그리기시간이 아니라 크레파스와 한바탕 시름을 한 것이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하루하루 쌓여가자 나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도 미술이 들어있는 날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폭발을 해버린 것이다. 무슨 큰 건수라도 잡은 냥,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버지 앞에 당당하게 선 것이다. 평소 아버지 앞에서 힘도 못쓰던 촌넘이 그날은 그렇게 단단히 용기를 낸 것이다.

 

이유를 모르고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보시는 아버지께,

 

"아버지~! 저 크레용 바까주세요~!"

"아내 왜?"

제 크레용으로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요! 하도 단단해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러냐? 얼마짜리루?"

"오십원 짜리요!"

오십원씩이나??

 

아버지의 반응은 당시 우리집 가정의 형편을 정확하게 대변해주고 있었다.

 

같은 반에는 선장의 아들이 하나 있었다. 대부분 농사를 짖는 집안의 아이 들어었지만 그 친구의 아버지께서는 엔진이 달려있는 큰 배를 운용했던 모양이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세상에 듣도보도 못한 크레파스를 가지고 학교에 왔다. 색갈들은 셀수도 없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크레용이 아니었다.

 

부드럽기는 이루 말할 수 없어서 도화지 위를 날아가듯 스쳐가듯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손이 가는대로 색갈을 내주는 이 신비한 크레파스, 그 색감이 주는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을 가진, 바로 파스텔이었던 것이다. 무지렁이 촌놈들이 파스텔을 처음 보고는 눈들이 똥그래가지고, 빙 둘어서서 그 친구가 조심스럽게 다루는 그 파스털의 색감에 감탄을 금치 못하곤 했다. 입이 딱 벌어지는 순간인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넘...이 친구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에 담겨있는 그 부러움 가득한 감정...그 오묘함은 파스텔보다 더 또렷하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께 떼를 써서는 열두가지 색을 가진 크레파스를 가지게 되었다. 그 값은 무려 오십원이었다!! 무지개를 그릴 수 있고, 도화지위에 색감이 먹히는 크레파스 말이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의 값이 오십원이었다. 시내버스의 요금은 15원 혹은 20원. 지금 생각해봐도 대단한 가격의 크레파스는 아니었다. 그러나 짜장면 한 그릇 값의 크레파스를 부담없이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핵교) 5-6학년이 되니 담임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다.

"자기 집이 상위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봐~"

당연 손 드는 놈  하나없다.

"그럼 자기 집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봐~"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죄다 손을 든다.

눈치를 보는 넘도 가끔 있기는 하지만 약속이나 한 듯, 죄다 손을 번쩍 치켜들어 올리는 것이다.

"그럼 자기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을 드는 친구가 있을리 없다.

(이런 질문을 왜 했을까? 한마디로 가정 환경조사의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집이 중산층이라고 번쩍 손을 들던 넘들, 나를 포함하여 한마디로 거시기가 찢어지게 가난한 넘들이었다. 당연한 것은 서로 비교를 할 처지가 아예 되지를 못했다. 잘 사는 집안이라고 해봐야 겨우 작은 엔진 달린 통통 배를 가진 그 친구네 달랑 하나였고, 나머지는 서로 비교할것도 없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들 뿐이었으니 이런 촌놈들은 지네가 진짜로 중산층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집이 뭐가 가난한데?? 다른집이랑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옆집과 차이가 없는 가정, 바로 중산층이었던 것이다.

 

6학년이 되니 테레비가 있는 집 손들어봐, 냉장고가 있는 집 손들어봐,  하는 질문으로 바뀌었는데, 테레비가 뭔지, 냉장고가 뭔지 그 의미를 모르는 놈들에게 물어봐야 소득이 없다. 찢어지게 가난했으면서도 그것이 가난인 줄 모르고 지냈던 나의 과거는 차라리 아름다운 추억이지 싶다.

 

그렇게 나의 추억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동리는 많이도 변해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변해있고, 과거 깊은 산골의 적막함도 변해있고, 세상은 더더욱 변해있다. 오로지 변하지 않은 것는 하늘을 흘러가는 푸르른 저 구름뿐....

 

아니다. 하나가 더 있는데 그만 깜박했다. 언제나 변함이 없는 것이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어머니 아버지의 마음이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그것이다. 언제나 너그럽고 자애로운 그 마음 말이다... 결코 깜박할 일이 아닌데 자식은 늘 이렇게 깜박한다. 아름다운 그 마음에 어찌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말이다 내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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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8-04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트랑님의 글을 만날수 있어 좋네요

차트랑 2014-08-04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늘바람님,
아주 오랫만에 뵙는군요 건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가면...

 

 

이곳에서 사시는 분들이 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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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2-07-31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자꾸 사진만 올리지 말고 그 속 사연도 얘기해주시면 좋을텐데 말이죠. ^^

차트랑 2012-07-31 12:1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조선인님,
사진 속 이야기는 비밀^^
농담이구요~

일을 보러 가다가 하늘이 하도 멋지고 아름다워서
그냥 찍어본 것인데
생각보다 더 좋아서 서재에 들렀을 때 다시 보려구
포스팅을 했답니다.

저의 서재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찾아뵙고 인사올리겠습니다 조선인님~

책읽는나무 2012-07-31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요??
장소라도 얘기해주시지~~^^

차트랑 2012-07-31 12:24   좋아요 0 | URL
지나던 길인지라 이 곳이 어디인지
저도 잘 모른답니다.

여름 날의 구름이 마치 가을의 그것과 닮아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주차하고 찍은 것인데요
그곳이 어디더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을 해낼 수가 없는거에요~

저도 알 수 없는 곳...
하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추억을 준 아름답고 소박한 도시입니다.

어찌보면 이국적이면서도
정감 가득한 곳으로
가서 살고 싶어요^^

이런 곳이 있다니...싶고
제게는 사랑스런 도시인 것은 분명합니다^^
나중에 알게되면 알려드릴게요 책읽는 나무님~
인사드리러 갈게요~

저의 서재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햇살이 참 따갑다. 하루의 온도는 또한 높아 불쾌지수도 덩달아 높아질 수 있는 하루였다. 그런데 하늘은 그렇지 않았다. 어찌나 청명한지 마치 가을 하늘을 보는 듯한 생각마저 드는 날이다. 구름은 또 어찌니 뭉게거리는지....

 

차를 멈추고 전화기의 카메라를 하늘에 들이댔다. 다른 건 몰라도 전화기에 카메라의 기능이 있으니 이런건 참 좋다. 지나다가 그냥 부담없이 찍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여름 날은 정녕 잊지 못할 것 같다.

 

 

 

일을 보러가다가 하늘이 참 이뻐서 또...멀리 보이는 구름이 참...

 

 

아마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여름 날이 될 것이다....

나에겐 지극히 사랑스러운 하루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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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8-27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달을 보셨네요^^
좋은 하루셨다니 기쁩니다
 

 

 

선생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다. 다른 때 같았으면 대전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현장을 찾아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을 텐데, 이 날은 워낙 더워 외출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햇살이 정말 뜨겁다. 잠시라도 노출시킨다면 새까맣게 타다가는 피부암에 걸리는 것은 아닐까...싶다.

 

그리하여 사무실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 후, 특별한 점심을 맛보자고 하신다. 하여 따라간 곳이 바로 콩국수집. 콩국수가 이리도 인기가 있었던가...싶을 만큰 많은 사람들이 벌써 와 계시다. 다수의 사람들이 줄 서있다.

사실 콩국수를 먹기는 하지만 즐겨하지는 않는다. 특별히 맛을 느끼지는 못하는 음식이 콩국수인데 남들이 좋다고 하니 먹는 정도... 특별하다고는 하지만 시원한 맛에 흔쾌히 먹어보자 생각하고 간 것인데....

 

콩국수를 먹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맞은 편 벽에 이런 문구가 써있다. 1월-2월에는 아예 영업을 하지 않는 콩국수집. 이런 소신있는 음식점은 또 처음본다. 비수기에 다른 메뉴라도 하시지..하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으나 주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오로지 하나...유일한 메뉴는 콩국수다.  물론 두부를 먹을 수도 있지만 메인은 아니다.

 

대전의 여러 음식점을 들러보았지만 이런 곳은 또 처음이라....난생 처음보는 음식점의 문구인지라 식후에 사진을 찍었다. 대전은 역사의 유적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소신있는 음식점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참 멋진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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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2-07-31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소신있네요.^^
분명 계절에 따라서 메뉴가 달라질터인데 말입니다.

차트랑 2012-07-31 12:1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책읽는 나무님,
말씀하신대로 그럴만도 한데요
그집 주인은 안그러신대요^^
콩국수하나에 자존심을 지키신다고 하십니다.
참 저런 콩국수집은 처음입니다^^
대전 분들 멋있어요^^

찾아주셔거 고맙습니다 책읽는 나무님

카스피 2012-07-31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정말 소신있는 콩국수 집이네요^^

차트랑 2012-07-31 12:1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카스피님~
그간 잘 지내셨지요?
제가 알라딘 서재를 비워놔서 찾아뵙지도 못했습니다.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카스피님,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라로 2012-07-31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콩국수집 아주 유명한 집이에요!!
저도 줄 서서 몇 번 사 먹었어요. 저는 그집 두부 너무 좋아하는데~~~.ㅎㅎ
1,2월 장사 안 하셔도 충분할 정도로 돈 많이 버시는 것 같아요.
저도 장사가 그렇게 잘 되면 한 겨울엔 장사 안 할것 같아요,,^^;;;

차트랑 2012-08-01 12:37   좋아요 0 | URL
어구...
유명한 집이었군요.
어쩐지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시더라구요.
두어달 놀러가도 되겠군요^^
흠...장사는 저렇게 하는 것^^

콩국수 그릇을 비워보긴 제가 처음이랍니다.
맛으로 말하자면 쵝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