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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詠井中月  영정중월

                                                     이규보 李奎報
      

              山僧貪月色 산승탐월색
             어느 스님 하나가 달빛을 탐내어


              幷汲一甁中 병급일병중
              우물에 비친 달을 병속에다 길었네 
  

              到寺方應覺 도사방응각
              절에 당도하면 응당 깨달으리
 

               甁傾月亦空 병경월역공
               병을 기울이면 달 또한 空이라는 것을



우리나라 오언절구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평가받고 있는 고려 이규보의 작품이다. 

우물과 달 그리고 하나의 병을 통해 반야심경의 空을 꿰뚤어낸 이 작품은 과연 그런 평을 듣기에 모자람이 없다하겠다. 
'김춘수도 이런 시는 써내지 못했다', 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말이다.
과연 천재의 작품이다.


한편, 이규보라는 인물을 접할때마다 늘 함께 따라다니는 이가 또 있으니 다름아닌 조선의 이덕무이다. 이규보의 뒤를 늘 따르는 그림자라고나 할까....

이덕무는 대 선배 이규보의 글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추졸하고 산만하여 명실이 꼭 맞지 않는다.'

이덕무의 이 평가는 분명 문제가 있어보인다. 이규보의 작품이 추졸하고 산만하다니.... 이는 이규보의 글을 접한 사람이라면 부당한 평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덕무는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평가를 내렸을까.

이덕무는 내가 좋아하는 반남 박씨, 사렴의 아들이다. 이덕무에 관해서야 두말할 것도 없지만 문자학, 명물학, 전장, 풍토, 금석, 서화에 통달했다, 라고 써있는 조선의 천재 아니던가. 그의 글은 청나라에까지 알려질 정도였으니 글발로 이규보 못지 않은 국제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규보의 글을 '추졸하고 산만하다' 라고 평했단 말이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덕무의 평가는 이규보의 글을 저격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인물됨을 저격한 것으로 보인다.

글로만 본다면 어찌 이규보의 글을 '추졸고 산만하다'고 말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명실'이라는 말로는 능히 이규보를 평가할 수 있는 말이다.
글공부를 한 사람으로서 행적이 바람직 하지 못했던 이규보를 평가하기에 부적절한 말은 아니라고본다.

이덕무는 ‘명실이 꼭 맞지 않는다’라는 평으로 이규보의 글과 그 행동이 전혀 들어맞지 않았음을 설파한 것이다. 이덕무는 개인의 인품 혹은 인물됨을 그의 예술과 별개로 간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예술과 예술가 개인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 것일까. 개인의 인격 또는 도덕과 관계한 평가는 예술가를 바라보는 개인마다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한 부분을 중시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있으리라.
이덕무는 이규보의 행실에 더 무게를 두었던듯 싶다. 
사적으로 이덕무의 입장과 같다.


제 아무리 좋은 글과 말을 남겼다 한들, 자신이 남긴 말 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먼 삶을 살았다면 그 귀한 언어의 가치는 거품처럼 사라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말(言)에도 주인이 있다, 는 말이 있다. 
동의하는 바이다. 
말보다 행동이 그 사람을 더 잘, 더 정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빼어난 작품을 읽으며 늘 그늘이 뒤따르는 것은 이런 이유가 있음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 뒤에는 떼어낼 수 없는 그림자가 있다, 라고....

나 역시 양인(陽刃) 仲秋의 庚金에게 그 댓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으니 꼭 이규보를 탓할  주제는 못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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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의 우두머리 오두인을 오늘 밤 삼경내로 친국하고,
나머지는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라!' 상의 명이 떨어졌다.
승지가 아뢰었다, '80여명을 귀양보낸 적이 있습니까?'
'100명이라도 죄가있으면 그렇게할것이다', 상이 답했다.

박태보공은 오두인에게 말하기를,  '이 상소를 짓고 쓴 것은 진실로 제가 한것이니 , 
상께서 물으시거든 바른대로 아뢰소서', 했다.

집필했다는 박태보를 잡아들이고, 형구를 준비하라!' 
상이 불호령을 내리니 내관이 숨이 차도록 뛰어와 아뢰기를,
'밤이 늦어 준비가 불가하옵니다.' 하였다.

'내 친히 국문하겠다!' 
상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태보가 잡혀오자,
'네가 어찌 임금을 없신여기는가? 전에도 나를 거스르고 힘들게 해던 놈이 네가 아니더냐?', 상이 소리쳤다.
'저는 임금을 없신 여기지 않았사옵니다. 중궁을 위한 것이 곧 전하를 위한 것이옵니다', 태보가 답했다.
'이런 독한 물건은 바로 베어도 안될것이 없다. 원정을 받지 않을 것이니 바로 엄형에 처하라!!'  상이 일갈했다.
'그리하오시면 폐단이 클것이옵니다!' 
우의정 김덕원이 아뢰었으나 임금의 불호령에 장 치는 소리가 향교동에까지 들렸다.

 골육이 깨지고 유혈이 낭자했으나 태보공은 신음소리 한마디 내놓지 않았다.

'이런 독한 물건이 무슨 일은 못하리오!!' 태보공은 안색하나 바뀌지 않았는데 상은 노발대발했다.
이 날, 태보는 날이 새도록 장을 맞았다.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자 숙종은 압슬형을 명했다. 
무릎을 망가트릴 요량이다. 
무릎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태보는 의연했다. 
뼈가 깨어지는 순간에도 태보는 비명 한마디를 내놓지 않았다. 
이미 태보는 죽을 작정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을 느끼는 이는 형을 받는 태보가 아니라 형을 가하는 숙종이었다. 
지친 숙종이 형벌의 강도를 높이고자 말했다, '낙형을 가하라!!.'
'네가 오늘 살것같으냐, 온 몸을 두루 지져라!!' 
숙종의 독기가 오를대로 올라있었다.

 조선의 형법에 낙형을 발바닦만 지지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박태보를 거꾸로 매달고 옷을 찢은 후 맨살을 지지게했다.
숙종은 박태보 몸의 한 쪽만 지지면서 나머지 한쪽도 지지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태보는 의연했다.

불에 달군 인두를 번갈아가며 전신을 지지니 살이 타는 냄새가 국문장을 가득메웠다. 
그 누구도 과연 눈을 뜨고는 차마 보지 못할 순간이고 참혹한 장면이었다. 
상대가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라도 말이다. 

 태보의 전신을 빈틈없이 지지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한 나장이, 
'법에는 발바닦만 낙형하는 줄 아뢰옵니다' 라고 주저주저 아뢰자,

'그럼 두 발을 두루 지지라!'
숙종은 자신의 명이 초법적인 형벌이라는 점을 몰랐을리 없다. 
끝내 태보를 죽일 작정이었다.

 숙종은 태보의 전신을 26 차례 지지고 압슬을 가했다. 
그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숙종은 또 장을 치라 명했다.
(여기서 26차례라 하는 것은 전신 지지기를 26차례 했다는 뜻이다. 전신에 인두가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한다)

 

다시 장을 받자
태태보는 신음을 참으며 견디고 있었으나 살가죽은 견디지 못하고 터져 살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래도 태보는 안색을 바꾸지 않았다. 
태보가 의연할 수록 숙종의 분노는 더욱 고조되었다. 
'나장은 무엇하는가, 장을 더 세게 치라!!!! 숙종이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그 혹독한 매질에 결국 태보의 정강이 뼈가 몸 밖으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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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 己巳年, 潘南 朴, 태보는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를 직접 작성하여 승정원에 제출했다. 
연합 상소였다. 
오두인은 벼슬이 가장 높았고 상소 대표자가 되었다. 

 상소를 올린지 꽤 오래도록 답이 없다가는 해질녘 황혼이 깃드는 시각,
숙종은 갑자기 승지 이서우를 불러 상소를 읽게했다.

 상소는 '전 판서 신 오두인~ ' 으로 시작하여 '신 등은 서러워 울며 아뢰옵니다!'로 끝을 맺고 있었다.
상소의 내용은 인현왕후의 남편이 되는 숙종에게 본 처인 인현왕후를 내치지 말아달라는 읍소였다.
즉, 당신의 마누라를 당신께서는 내치지 말아주세요~~ 하는 상소였던 것이다. 

 
물론 이는 숙종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서인들이 남인들에게 밀려나는 상징적 사건이기에
서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중대 사안이었고,
자신들을 위한 집단행동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중전을 폐서인하는 일은 국가의 중대사이므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태클을 걸기에 그만한 명분이 있는 사안이기도 했다.
(참고로,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에 관한 괴이하고도 믿기 어려운 사건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말그대로 믿을 것들은 아니다.
폐서인을 해야하거나 사약으로 죽일 작정을 한 마당에 어찌 그들에대한 아름다운 전설들이 남아 있겠는가.
없는 죄도 만들어 덥어 씌워야 그 죄를 물어 단죄를 하는 것이니 말이다.
경우에 따라 없는 죄도 있게되고 없던 미담도 생겨나는 법이다. 박태보를 죽이기위해 죄가 만들어진 것 처럼말이다. )

숙종은 11세 되던 해에 혼인을 했는데 부인은 광산 김씨 인경왕후였다. 
김만기의 딸로 숙종에게 시집와 딸을 둘 낳았으나 모두 생존하지 못했다.
 인경왕후는 자신이 천연두를 앓다가 자식없이 일찍 유택에 들었다. 
하여 숙종은 15세에 여흥 민씨 유중의 딸 인현왕후를 맞이했다.
 인현왕후 역시 오래도록 자식을 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혜성같이 등장한 이가 바로 인동 장씨 희빈이다. 
숙종실록은 희빈 장씨를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 라고 쓰고있다. 
실록이 조선의 왕비중 유일하게 외모를 언급한 대상이 희빈 장씨였다. 
그 미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숙종은 여인과 관련하여 다양한 사건들을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숙빈 최씨와의 로맨스는 드라마로 제작될만큼 극적이었다. 
아니, 숙종의 여인들은 거의 극적인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었던 것이다.

 물론 이 외에도 숙종은 여러 비와 후궁을 두었으니 권력을 쥔 자의 이점을 마다하지 않은 임금 중 하나였다.
어째거나 남인의 여인인 희빈 장씨와의 로맨스가 달달한 만큼 서인의 여인인 인현왕후와의 서먹함은 깊어갔다.
때마침 장씨 희빈이 회임을 하더니 떡 하니 불알달린 사내를 출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간 서인들의 권력에 염증을 느끼며 이자쉭들을 어떻게 손봐줘야하나 하고 있던 찰나였고 숙종은 옳커니 했다. 
대권주자를 생산한 희빈을 중전으로 들이고 
그 아들을 세자에 책봉하여 서인들의 힘을 싸그리 잘라버려야겠다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정치 권력의 판도를 다시 뒤집어보기로 작심한 숙종은 정실부인을 내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털기로 작정하면 먼지 없는 자가 어디있겠는가. 
중전 민씨는 그렇게 티끌이 쌓여 태산이 되었고 결국 폐서인의 처지에 놓여있었다. 
바로 그 시점과 사건을 국사교과서는 기사환국이라고 칭한다.

 그 기사 환국의 불씨를 당긴 것이 바로 이 상소였던 것이다. 
죄인을 잡아들일 때는 흔히 야밤에 이루어진다. 
사극을 봐도 야밤에 군졸들이 죄인의 집안에 들이닥친다. 
요즘도 그 습성이 남아있는 것인지 검찰들은 흔히 깊은 야밤에 쳐들어가 구인(拘引)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
그날도 깊은 야밤이었던 것이다.

 1654년 태생인 반남 박, 태보는 모든 것이 다 좋았으나 시대를 잘못, 
아니 주군을 잘못 만났다고 할수 있는 인물이다. 
아버지는 소론의 영수이고 뭇 선비들의 존경을 받는 세당이었다. 
세당은 학식이 남달랐으며 절의가 있었고 무엇보다 그 품이 넓었다. 
태보는 그런 아버지 아래에서 그 아버지 못지 않은 절의를 가진 인물로 성장했다.

 태보가 35세가 되던 어느 날, 멀쩡하던 그가 하룻 밤 사이에 운명을 달리하니, 
온 세상이 함께 울었다.
태보의 주군은 숙종, 그 이름이 등골을 서늘하게 하며, 
냉정하고도 혹독하여 신하들도 벌벌떨게 하던 바로 그 임금이었다.
숙종은 환국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정권을 통제했다. 
그야말로 신하들을 생선 굽듯이 앞뒤로 맘대로 잘도 뒤집었던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인 선대 현종이 신하들에게 휘둘리며 매가리없고 허수아비 같은 임금이었던 점을 잊지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송시열은 임금을 생선굽듯 다루었던 것이다. 후에 숙종이 끝내 송시열을 죽인 것을 보면 벼르고 별렀던 일인지도 모른다.) 

 숙종은 일이 이지경이 되는 것을 좌시할 인물이 아니었다. 
 '내가 임금이 되기만 해봐라 니들은 다 죽었어!' 뭐 이런 강인함을 가진 인물이었다.

태보가 상소를 올린 시기도 숙종이 또다시 정권을 바꾸려고 하던 바로 그 시점이었으니, 
또 누군가를 희생시켜야하는 바로 그 시점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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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당은 은(訔)의 직계 후손으로 반남을 빛낸 최고의 인물이며, 
정쟁으로인해 두 아들을 앞세운 비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관직생활을 했으나 세당에 관해서라면 큰 의미는 없다 하겠다. 
그가 얼마나 된사람이었고 
의기가 있었으며 
훌륭한 인물이었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당의 학문은 깊고 드높아서 당대 최고봉 중의 하나였다. 
깊고 드높기만 한것이 아니라 폭도 넓었다. 

당시의 학문은 주희에 매몰되어있었고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전진했다. 
그 길은 퇴로도 없고 갈래길도 없었다. 
주희에게로 난 돌아올 수 없는 외길,
그 외통수의 길을 걸었던 것이 조선의 선비들이었고, 
늘 막다른 골목에서 서성이던 것이 조선의 학문이었다. (이런 미친...)

마치 눈가리개를 한 당나귀를 똑 닮은 조선의 유학자들에 비하면 
반남 가문의 빛나는 세당은 차원이 달랐다.
세당은 노자를 공부했고 주를 달았다.
장자도 공부했다. 남화경주해산보, 를 썼다. 
이는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금기였다.

나아가 사서에 관해서는 사변록을 저술했다. 
사변록은 교조화된 조선의 분위기에 염증을 느낀 세당의 반항과도 같은 것이었다. 
백성의 아픔은 외면하고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먹는 
조선의 실권자들에게 태클을 거는 바른 학자로서의 시위였다.

사변록은 대입 수능의 본문으로도 종종 사용되고 있다. 
왜냐? 사변록은 형이상학에 매몰된 관념론을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의 학문을 
실학이라는 현질적 도구로 승화시키려는 깊은 의도가 숨어 있는, 
그야말로 그 뜻이 갸륵한 세당의 저술이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 중 하나는 세당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아주 잘 반영하고 있는데, 
그 이름은 색경(穡經)이다. 
색경은 농사의 기법은 물론 물고기 기르는 법, 축산, 원예  등 농사 짖는 백성들에게 정말 도움되는 저술인 것이다.
 
무릇 선비라면 백성을 이렇게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조선의 냥반들이 손에 호미 한번 들지 않고, 
또한 물한방울 대지 않으면서 가만히 앉아 잘먹고 잘살았던 것은 
오로지 남의 힘을 빌린 탓이 아니던가?

그러니 백성을 귀하게 여겨야 마땅하거늘 되려 냥반들은 백성을 무시하고 학대하고 심지어 죽이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조선 정부는 이를 방관했던 것이다.

조선의 유학이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잃고 서성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세당은 
자신의 학문으로 뜻있는 식자들을 일깨웠다. 
결과적으로 편고한 학문의 최고봉이자 조선의 주희였던 송시열과 뜻을 달리할 수 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미워죽겠는 세당을 송시열이 가만 둘리가 없다. 
세당에게 사문난적, 이라는 혐의를 씌우고는 끝내 세당을 죽여버렸다. 
송시열은 숙종에게 사약을 받고 죽기 전까지 셀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는 저술을 남겼지만 
이 모든 것들은 세당의 '색경' 하나와도 견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왜냐? 그토록 입바른 소리를 하면 뭣하나, 
백성들이 환대하는 대동법 시행을 목숨걸고 반대한 장본인이 송시열이 아니던가.
송시열은 대동법 시행을 왜 반대했던가? 
냥반들의 이익을 해치고 백성들의 이익을 늘려주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열은
임금이 자신에게 대동법에관해 묻자
'백성들이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라며 현종에게 거짓을 고했다.
(왕에게까지 거짓말을 고하다니!!!! 
송시열, 정녕 네가 죽고싶은것이더냐? )


색경은 오로지 백성들의 이익을 위해 지은 저술이다. 
뛰어난 아들 둘이 눈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세당,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경을 지어 죽는 그 순간까지도 백성을 위해 글을 남겼다. 


이에 감동했던 것일까?
색경은 또한 한국사 시험에서도 제시되는 자료이다. 
아, 이런 세당의 신념을 이어받은 후세들을 교과서는 실학자 혹은 경세치용학파 라고 칭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청송심씨 온이 죽으면서, 반남 박씨와는 절대로 혼인하지 말라, 며
반남 박씨에대한 적대감 혹은 깊은 원한을 토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송심씨 노승은 '소론 선배 중 박세당을 가장 좋아한다, 고 고백했다. 
심노승은 노론이면서도 소론의 영수였던 세당의 문장과 절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당쟁을 초월하고 원한이 깊은 가문의 후손에게마저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 박세당이었던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숙연해오며, 안타깝고 안타까운 사람, 
그리고 사랑스러운 사람, 박세당이다. 
그 이름 만고에 빛나고 또 빛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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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 박, 은 (潘南 朴, 訔 )

朴訔(박은)은 박상충의 아들로
고려말 음서로 관직에 올랐고 후에 급제하였다. 
조선 개국 당시 정도전이 실권을 잡자 
외삼촌인 이색이 힘을 잃으며 자연스럽게 지방 한직을 면치 못했다.

그러던 중, 두차례 있었던 왕자의 난에 가담하여 태종의 신임을 얻었고, 
중앙에 진출, 대사헌, 병조등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으며 1422년 사망한다.

요즘 본관을 따지는 일은 아주 고리타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형적인 꼰대의 기질을 발휘하는 일인지라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일이다.
세상이 어느 때인데 본관을 따지고드냐 이거다.  
꼭 변변치 못한 혈통을 가진 자들이 본관을 따지고 조상을 운운하거늘, 
내가 그짝이 되고 말았다.

물론 지극히 옳은 말이면서도
할 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이고, 강아지도 혈통을 따지던데?  
(강아지의 혈통을 따져서가 아니라 반남 박씨가 좋다는 뜻이다.)

어째거나 나는
사적으로 좋아하는 몇몇 본관이 있으니 
바로 덕수 이씨가 첫째요 
반남 박씨가 둘째이고 
달성 서씨가 셋째이다.
차별을 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왠지 마음이 더 가는 분들이라는 얘기다.

덕수 이씨에게는 마음으로 진 빚이 있다.
바로 이율곡과 이순신이 그 두분께 말이다. 
율곡은 백성을 지극히 사랑했던 관료요 학자였고, 
순신은 다들 아시다시피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있던 나라를 구했다. 
참으로 고맙게 여기고 있는 이유이다.

달성 서씨는 유대장군이 주는 깊은 인상 때문이다. 
장군께서는 자신에게는 엄격했고 절의가 있었으며
부하들에게는 너그러웠다.
하여 그의 별명은 덕장(德將)이다. 
부하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장군은 요즘도 찾아보기 어려운데 
조선시대에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지위와 권력으로 갑질이나 할줄 알았지 
현대에도 사람 귀한줄은 모르는 시대가 아니던가. 

하물며 조선시대임에랴...조선은 사람을 물건 취급하던 나라였다. 
그러나 서유대장군은 달랐다. 
백성이자 부하였던 하급 병졸들을 그는 따듯하게 대했다. 
달성 서씨에 마음이 가는 이유이다.


반남 박씨는 대대로 절의의 대명사였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았으며 
소신과 절의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이가 있었으니 
그 이름 태보이다. 
영원히 가슴에 남아 있을 이름이다.


박은은 관직에 있을 때, 결코 갑질하지 않은 인물이다. 
죄인을 처벌하라는 명을 받고 박은은 죄인을 조사했으나 혐의가 없었다. 
박은은 무죄를 주장했다. 
이를 계기로 집정에게 미움을 사 좌천되었다.

좌의정 하륜이 치부하며 잘못을 저지르자 대사헌 박은은 이를 통렬히 비판했다.
탐욕스러웠던 하륜과는 달리 박은은 청빈하고 검소했다.

태종은 세종의 처가인 외척을 숙청하고 싶어했다. 
차기 왕이 외척에 휘둘리면 국정을 살피기 어려워진다는 점을 잘 알고있었던 것이다.
이에 동조한 박은은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제거하는데 일조한다.

심온은 억울했을 것이다.
심온은 죽으면서 후손들에게 뼈저린 유언을 남겼다. 
청송 심씨는 절대로 반남박가와는 혼인하지 말라!!!!!, 라고 말이다.

반남 박에게 불편한 심기를 가진 청송 심씨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반남 박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청송심씨에게 아무런 사심도 없다. 
또한 나는 박씨도 이씨도 서씨도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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