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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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부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 부제는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이다. 책의 제목과 부제만으로 판단 할 때는 저자가 매우 격한 감정을 쏟아 부을 것만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는다. 저자는 ‘선비정신’이라는 용어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조선의 지배세력이었던 선비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역사적인 증거물들을 통하여 명쾌하게 시도하고자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평가의 기준설정이다. 

 

 




올바른 평가의 기준은 왜 중요한가? 

  

 이 책은 국민들의 ‘선비’라는 용어 인식을 역사의 구조 속에서 파악하고 그 용어에 대한 국민적 이해를 바탕으로 서술함으로서 ‘선비’라는 용어에 대한 정확한 정의와 실상을 독자들에게 알리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비’라는 대상을 평가해야하고 그 평가를 위해서는 평가의 객관적 근거를 장치해야 했다. 저자는 이 평가의 기준장치를 매우 명료하게 설정하고 있으며 그 근거는 지극히 개관적이고 합리적이며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 어느 내용보다 가장 값진 소득이 바로 ‘평가 기준’이라는 바로 이 대목이라 여겨진다. 




 바른 평가의 기준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편견은 평가의 오류를 낳는다. 오류는 당사자에게만 해당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본질이 숨어있다. 단순히 개인적 범주에서 판단과 정의가 감금된 상태라면 위험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 개개의 인식이 타자의 인식에 영향을 끼치고, 결과론적으로 그의 사고와 행동까지도 지배할 수 있는 동기요인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책을 저술하는 주체이다. 시중에 출시되어 읽히는 도서들을 저술한 주체가 역사이든 인물이든 그 어느 팩트에 대한 평가의 적절한 기준을 갖추고 있지 못할 때, 그 결과물은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독자들은 그 영향으로 바르지 못한 인식의 주체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수많은 과정들이 세대를 거듭한다면 어떤 또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일까... 단순한 오류의 문제를 넘어 왜곡이라는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이는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고 나라 전체에도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선비’라는 용어에 대한 올바른 평가의 부재가 가져온 결과물들을 저자는 이 책에서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선비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자신이 속한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에 어느 정도 충실했으며, 보다 나은 가치의 창출을 위해 얼마나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가. 물론 이는 해당 인물의 시대적 기준에 의거한다. 

2. 인물의 삶이 시공을 초월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선의의 보편적, 표본적 의미를 지니는가. 현재와 관계하는 역사성을 관찰하는 것이다. 

3. 인물의 직책, 지위에 부여된 기대에 얼마나 잘 부응했는가. 저자는 이를 인간 본연의 책임감과 해당 능력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상의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면서 이는 보편적인 평가의 기준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저자가 제시한 이 보편적인 세 가지 기준에 의거하여 역사의 인물을 바라보고 평가하여 저술한 관련도서들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는 개인적으로 매우 회의적이다. 이 책이 수많은 교양 역사서들과 차별되어야 하며 별점 다섯을 받아 마땅한 이유는 그 평가의 기준을 명료하게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그를 근거로 이해할 수 있도록 장치했다는 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높이 살만한 부분이라 하겠다. 




‘선비’라는 용어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한 이유 

최근 미국을 위시하여 경제 열강들이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만난 대한민국은 경제력의 한계에 봉착했고, 이를 수용하는 입장에 있다. 이는 마치 청나라에게 조선의 국왕이 한 겨울 얼어붙은 땅 바닦에 피를 흘리며 머리를 찧던 사건, 즉 병자호란이라는 굴욕적인 수치를 맞본 조선이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정체성이 흔들렸던 당시의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국민들이 한미 FTA를 반대하는 이유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시대적 상황이 이러한 때에 대한민국의 출판계,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양서들의 저자들은 ‘선비정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잃어버린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정체성의 일환으로 삼고자 해왔다. 

 

 ‘선비정신’이라는 용어는 엄밀한 의미에서 유교의 부흥과 그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말이기도 하다. 유교는 조선을 지배해온 강력한 이념임을 부인 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의 전통 문화적 요소로서 배제할 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교의 부흥’이라는 공식은 과연 현대의 우리에게 적합한 성질의 것이냐가 문제인 것이다. 

 조선의 유교를 현대에 부흥시키는 목적이 단순히 ‘우리 역사적 사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타당성을 부여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고 저자는 생각하고 있다. 왜냐면 선비에 대한 저자의 평가기준으로 볼 때 유교는 우리 역사에서 실패작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유교라는 조선의 지배이념을 새롭게 이해해야 할 필연성의 재조명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 연유에서 유교의 가르침을 받들며 조선을 지배해왔던 조선의 선비를 보편적이면서도 엄정한 평가의 기준으로 재해석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현대의 대한민국이 유교를 어떻게 부활시킬 것 인가하는 방향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의 의미를 단순히 우리의 것이라는 미시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때 다시 한 번 국가적인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저자는 독자들에게 경계하고자 한다. 







저자 계승범, 재귀준거의 딜레마를 마주하면서도 조선 선비의 진면목을 드러내다... 




이 책을 통해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좀 더 넓은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선비라는 인물을 조선이라는 영토 안에 가두어둔 채 미시적인 안목으로 서술한 수많은 교양서들과는 달리, 저자 계승범은 조선의 성리학을 거슬러 중국이라는 대륙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본다. 이 책을 읽은 후의 독자들은 분명히 조선에 한정된 미시적 역사인물로서의 선비가 아니라 조중관계 속에서 거시적 선비의 모습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유교의 본고장인 중국의 공자, 맹자, 노자의 가르침이 중국에서의 유교와 사회와의 관계하는 방식과 대조적으로 조선에서 공맹노자의 가르침을 선비들이 이용하고 있는 방식이 얼마나 다르며 심지어 그 얼마나 통탄스러운 것이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과연 공맹노자께서 자신들의 학문을 이용, 대중을 혹은 국왕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면 조선의 선비들에게 과연 무어라 말했을까...마치 이 상황은 변질된 막시즘에 저항하며 칼 막스 스스로가 막스주의자이기를 거부한 상황과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은 아닐까... 

 

 후대의 우리들은 존경해 마지않는 조선의 거룩한 선비들이 과연 그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어떤 행동을 했고 그들의 언행이 조선 사회에 끼친 결과물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막연한 개념의 선비’가 아니라 ‘분명하고도 또렷한 조선 선비’의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이 지배했던 조선의 진면목을 조목조목 따져 간다. 저자의 일목요연한 글을 읽으면서 실망을 금치 못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슬픔을 느끼는, 혹은 배신감이나 분노를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수많은 역사관련 저자들이 밝혀내기를 꺼려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 가지, 혹은 단편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선비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왜곡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라더라도 말이다. 하여 이제 '선비'라는 명제를 그 누군가는 다루어주어야 하며, 어쩌면 치명적인 아킬레스건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스스로의 치부를 공개하는 일에는 그만한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니 말이다. 때론 욕먹을 각오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통은 우리의 과거, 즉 현재와 분리할 수 없는 우리들의 역사를 바로보기 위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일종의 재귀준거이다. 한 나라의 역사를 다루는 학자로서 재귀준거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저자의 고뇌를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조선 선비들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고 평가함으로서 미래를 향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들에게 문제점과 개선점을 극명하게 제시해주고자 하는 저자의 뜻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한 마디가 있다, "그대가 걸어온 발자국을 되돌아보라, 그리하면 그대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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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2-02-22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자격지심은 기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준에 맞게 실천하는 것이죠.
 
조선의 정쟁 5 - 시파와 벽파 - 사도세자의 눈물
신봉승 지음 / 동방미디어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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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을 등에 업고 임금이 된 영조에게는 아킬레스건과 같은 것이 두가지 있었다. 하나는 모친이 궁녀의 세숫물을 떠다 바치는 신분인 무수리 출신으로 당시 비천한 신분이었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종의 독살 사건이었다. 

이 두 가지 아킬레스건은 영조가 죽는 그날까지 영조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사실상 택군되어 경종이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제로 책봉되도록 경종에게 압박을 가한 것이 노론이었던 것이다. 경종은 노론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역모로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경종 곁에는 이렇다할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소수의 남인들이 이를 경계했으나 사실상 남인들은 권력의 밖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다. 

결국 경종은 의문을 남긴채 죽음을 맞이한다. 연잉군이 임금이 되다. 영조는 임금도 갈아치울 수 있는 노론의 힘을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고심끝에 탕평책을 들고 나선 것이다. 비천한 무수리 출신의 자신을 임금의 자리에 앉힌 노론과 경종 독살설은 영조로하여금 군주로서의 힘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중 사도세자가 태어났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극진히 사랑했다. 자신의 뒤를 이을 군주감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사도세자는 명석했다. 그러나 세자가 자라면서 경종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이는 영조와 노론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아킬레스건은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던 영조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사도세자는 경종의 독살설을 믿는 모양이었다. 동시에 노론의 택군에 의하여 자신의 아버지가 임금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그리하여 가증스럽고 위험한 노론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소론쪽으로 기울게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한편 영조는 소론 편을 들며 자신의 약점을 꿰뚫고있는 사도세자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노론에서도 사도세자를 죽이고 싶어했다. 결국 영조와 노론에 의하여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사망하게 이르른다. 이른바 임오화변이 그것이다. 

같은 노론 중에서도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쪽이 벽파, 임오화변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쪽이 시파, 이렇게 또 양분된다. 사도세자의 빈은 골수까지 노론  출신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사위를 죽이는데 침묵으로 동조한다.  흔히 사도세자의 정신 병력이 도가 지나쳐 세자가 죽음에 이르를 수 밖에 없었다는 혜경궁의 주장은 대부분 날조된 것이다. 한중록은 자신의 가문인 풍산홍씨의 멸문을 막기위한 일종의 체스쳐였다.  

장헌세자가 자신의 정신병 때문에 죽었다면 정조는 왜 임오의리를 내세워 관련자들을 숙청했을까. 이는 아버지 장헌세자의 죽음을 억울하며 모략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는 하나의 강력한 증거이다. 사위를 죽은 홍인한은 정조에게는 외할아버지이다. 그런 외할아버지및 관련 홍씨 집안을 거의 씨가 마르도록 처단한 것이 정조의 조치였다. 임오의리는 바로 시파의 힘이 커졌다는 뜻이기도하다. 

노론 벽파는 정조를 죽이기위해 살수를 보내기도했다. 세상에나 임금을 죽이기 위해 신하들의 무리가 살수를 보냈다는 이야기는 동서고금 그 어느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경우가 아니던가. 그만큼 노론의 힘이 강성했고 임금의 힘이 약했던 군약신강의 대표적인 나라가 조선이었던 것이다. 드라마에 등장했던 전흥문이라는 힘잘쓰는 인물은 노론의 홍계희가 그의 아들들을 포함시켜 계획한 정조 암살단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정조는 고독했다. 주변에는 온통 노론세력 뿐, 자신을 위해 일할 인물들이 부족했다. 그러나 채제공과 같은 명 재상이 있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정조는 노론 벽파의 끊임없는 위협을 받으며 정치를 펴 나갔다. 조선에 마지막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대 개혁의 단행을 앞두고 정조는 또다시 의문사한다. 

그리하여 정조가 일생을 통해 일궈놓은 조선의  마지막 희망의 불씨가 꺼져버렸다. 노론의 골수 대표 정순왕후는 정조의 모든 개혁을 뒤집어 놓는다. 영조 최대의 실수가 바로 정순왕후를 비로 들인 것이거나 골수 노론인 정순왕후를 정조가 처단하지 않은 것이거나.... 

진정 백성을 위해 변화를 단행했던 조선의 임금 중에는 대왕 세종과 영정조가 고작이다. 그러한 영정조의 개혁은 조선의 마지막 불씨나 다름없는 성과였지만 그 모든 불씨들 노론들은 짖밟아 꺼버렸다.  

시파와 벽파는 고독했던 장헌세자에 대한 의견의 차지가 가져온 결과였다. 결국 정권을 잡아 권력을 장악하려는 노론들의 입장 차이었던 것이다. 백성을 위해 군신이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그럴 겨를이 없었던 것이 조선이었고 백성들만 새우등 터지던 시대가 조선이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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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정쟁 3 - 남인과 북인 - 아버지와 아들
신봉승 지음 / 동방미디어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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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희대의 반항아 정여립이 반란을 주도했다는 보고가 접수됐다. 이는 물론 치밀하게 조작된 정치적 음모였다. 서인이 동인을 정치적으로 제거하려는 음모였던 것이다. 서인 정철은 정여립 모반사건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역모와 관련되었다고 여겨지는 조선의 백성 1000여명을 죽음으로 다스린다. 

정철의 가사는 교과서에서도 배우는 문학작품을 남긴 장본인이지만 그 성정은 불과 같은 인물이었다. 기축옥사를 담당하면서 너무나도 죄없는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동인들은 그러한 정철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게된다. 이른바 세자 건저문제로 정철을 앞세워 그를 함정으로 몰아 넣은 것이다.  

이상해는 동인었다. 그런 이산해는 정철에게 접근하여 정철의 경계심을 흔들어 놓은다음 선조에게 세자 건저 문제를 올리자는 의견을 내놓고는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는다. 정철이 누구던가. 한 성질하는 인물인 그는 이산해의 함정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건저문제를 선조에게 고하게된다. 

광해군을 곱지않게 생각하던 선조는 불같이 화를 내며 정철을 현장에서 파직시킨다. 때를 놓칠세라 동인들은 정철을 죽음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서인은 정철을 정법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한 쪽이 이산해를 중심으로 뭉친 일당과 죽일 필요까지야 있느냐며 온건한 노선을 택한 서애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일파인로 갈라진다.  이렇게 갈라진 서인들의 분열세포가 바로 인산해를 중심으로 한 북인이고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인 것이다. 

때는 선조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왜는 조선을 넘보기위해 철저한 준비를 해오고 있었으나 조선은 정치적인 밥그릇 싸움을 하느라고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당쟁은 조선을 전쟁이라는 비극의 상황으로 몰아가게 된 것이다. 

성호 이익이 언급하고 있듯이 조선의 당쟁은 밥그릇 싸움이었다. 자신들의 밥그릇만 채운다면 상대방을 죽이는 짓도 서슴치 않았던 조선의 위정자들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행위가 바로 옥사이며 환국인 것이다. 

서로 권력과 밥그릇 싸움을 하며 새우등 터지는 것은 백성이다.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나라에 세금을 내며 잘좀 돌봐달라는 입장에 있는 쪽이 백성아니던가. 그러나 백성들의 그런 바램은 중요치 않았다.  국왕도 위정자들도 그 어느 누구도 마음쓰지 않았던 것이 조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율곡이이가 있고 유성룡이 있었으며 남명 김육과 남명 조식 그리고 윤휴등이 있었다. 온 마음을 다해 백성을 위해 살다간 이들이 있으니 그나마 조선 백성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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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정쟁 4 - 노론과 소론 - 예학의 분쟁
신봉승 지음 / 동방미디어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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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과 소론은 같은 서인이라는 모체에서 분열한 세포이다. 노소론의 분열 시기는 숙종대의 일로 부지불식간에 사문 난적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동서인의 쟁투가 주자학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진 무리들간의 쟁투 였다면 노소론의 분열은 주자학을 신봉하던 노장 세력과 주자학에 도전장을 내민 소장 세력간의 쟁투였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이다. 

결정적인 사건은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하게 대처하자는 쪽이 노론이요 어느 정도 온정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느냐의 입장이 소론인 것이다. 숙종대의 시대는 당쟁으로 인하여 국정이 매우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권력을 중심으로 선회하는 당파간의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고 상대방에 대한 살육을  서슴없이 자행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예송에 관한 치열한 투쟁은 서인과 남인들이 서로를 살륙하는 정치적 양상을 띈다. 서인은 2차 예송 논쟁에서 승리한 남인들을 대상으로 복수극을 벌여 결국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을 죽임으로서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를 경신환국이라 한다. 서인 김석주는 허적의 서자 허견이 역모를 꾀했다고 사주하여 고변케함으로서 일대의 파란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참에 남인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여 남인의 씨를 말리자는 쪽이 노론이요 죄없는 사람까지 죽여서야 되겠느냐는 쪽이 바로 소론인 것이다.  

이 때 억울하게도 윤휴마저 사사되는 불상사가 발생하게된다. 윤휴는 서인의 영수 송시열에게 사문 난적으로 찍혀 결국 죽음에 이르르게되는데 윤휴는 끊임없이 북벌을 주장하며 군사력을 양성하고 백성들의 안전된 생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취지의 상소를 끊임없이 올려 송시열의 마음을 매우 불쾌하게 했다. 더구나 송시열과 노론들이 고집하는 주자의 편집광적인 태도를 비난했다. 이러한 태도의 윤휴가 자신에게 사상적인 도전을 하는 것으로 간주한 송시열은 결국 윤휴를 이참에 죽여버리는 것이다.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갈등은 경종의 독살 의혹과 더불어 더욱 악화되는데 영조를 등업고 정국을 장악한 노론이 소론을 지지하는 사도세자를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른다. 정조는 그러한 노론과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한 장본인들을 숙청하게된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하자 노론이었던 정순왕후는 영정조가 그토록 애써 일궈낸 조선의 바른정치 형태를 되돌려 조선의 미래에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를 입히게된다. 

후기 조선은 노소론의 권력 다툼으로 점철된 피의 역사이다. 오로지 권력과 이익을 위해 타자를 용서하지 않고 죽음으로 처단하는 조선을 비극으로 몰아갔다. 이것이 바로 노소론의 정체인 것이다.  

조선의 역사는 그렇다 치자. 문제는 노론의 후예들이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치를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노론의 후예들은 일제 강점기에 대대적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일제의 역사관을 가져왔다. 일제사관이 중고등부의 국사책에 기록되고 그 일제사관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주입되어 왔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노소론은 조선의 역사와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다. 현재까지 노론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암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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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정쟁 2 - 동인과 서인 - 대비의 수렴청정
신봉승 지음 / 동방미디어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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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는 당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쟁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당쟁이 조선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는 의미이다. 조선 초기의 조선은 당쟁과 거리감이 있었지만 중기로 오면서 당쟁은 조선의 산하를 피로 물들이기 시작한다. 

현대의 정치제도는 다당제를 인정하는 정치제도의 성격을 띈다. 일당 독재의 위험성을 견제하며 다양한 여론을 수렴하자는 민주주의적 성격에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동인과 서인인 어쩌면 양당제와 흡사한 모양새를 갖는다. 일당 독재보다 더 진일보한 형태의 정치 체제로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양당 체제의 형태를 보인다는 점에서 그 유익함은 종결되고 만다. 조선의 동서인은 그 출발점이 불순했다. 전랑을 추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수구세력과 신진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시작된 동서인은 한마디로 정권의 장악을 위한 도구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동서인은 다양한 여론의 수렴과 일당 독재를 견제한다는 양당제의 순기능적 장치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무리의 이익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선조대에 일본의 동태를 파악해오라는 명을 받았던 통신사로 다녀왔던 황윤길과 김성일의 경우이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황윤길은 왜의 침입을 강력히 경고한 반면 김성일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김성일이 왜에 갔을 때 왜가 조선을 침입할 것이라는 정도의 정보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윤길과 당파가 다르다하여 반대를 위한 반대를 주장했던 것이다. 김성일의 한 개인의 이러한 태도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7년간의 참혹하고도 비극적인 왜란에 대비하지 못하게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 사람의 사사로운 당파적 주장이 그토록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사실 동인의 출발점을 이루는 퇴계 이황이나 서인의 태두로 지목되는 이이 율곡은 동서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물들이다. 그 제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신구세력으로 분열하여 다툰 탓이다. 실제로 율곡 이이는 동인들로부터 서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장적 본인은 그럴 마음도 생각도 없었으며 일생을 두고 동서인들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이렇게 시작된 당파는 조선의 중기로 넘어오면서 조선의 정부를 서로를 죽이는 살육의 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 차례의 살육은 환국이라는 형태를 빌어 복수를 낳고 그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았다.  

그렇게 기득권이 권력 다툼을 하는 동안 조선의 백성을은 더더욱 비침한 생활고에 시달리고만다. 정부가 안정되지 못하니 지방의 서리들의 백성 수탈은 극에 이르게된다. 백성을 위한 정부는 부재했고 정부는 자신들의 이익권 권력을 위해 피터지는 싸움에만 열중했다. 당파를 넘어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던 윤휴는 사문난적으로 몰리고 결국에는 사사된다.  

진정한 충신에게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죽음을 내리는 것이 조선의 정부였다. 이것이 조선의 당파가 가져온 폐악이었다. 관료들이 당파에 목매고 매달리는 동안 백성의 고통은 더욱 커져갔다. 임진 왜란을 거치고도 당파의 싸움을 지속되었다. 그러다 대비도 하지 못하고 호란을 겪게되니 조선의 백성과 강하는 초토화되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비극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당파의 왜곡된 형태가 조선에 자리잡은 결과는 비극 그 자체였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당파의 순기능적 측면을 강조하려는 사학자들이 있다. 분명 당파에 목숨건 선조의 후손들일 것이다. 당파가 축을 이룬 조선의 정부는 바른 기능을 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백성들만이 고통스러웠을 뿐이다. 

조선의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편히 잠자리에 누워본 서절이 과연 존재했던가? 절대로 그런 적은 없었다.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그 불명예의 탓을 돌려도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다.  

양당제의 순가능보다 역기능에 더욱 열을 올렸던 조선 정부는 양당제의 순기능을 어떻게 이끌어아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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