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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해전 - 태평양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의 진실
조너선 파셜.앤서니 털리 지음, 이승훈 옮김 / 일조각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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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본 책 중 가장 좋은 전쟁사 번역이다. 역자는 원저의 주에 더해 일본 원전 등을 찾아 역자 주를 붙였는데, 그 노력이 정말 대단하다. 원저의 실수를 바로 잡고 좀 더 풍부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주고 있다. 용어 선택에도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데, 좀 전문적인 용어가 튀어나올 때도 있어 일반 독자들에게 어려울 수도 있지만 용어 설명을 뒤에 부록으로 넣어 배려했다. 일본 인명도 일일이 한자를 찾아서 넣는 수고를 했다. 저자인 파셜은 2005년에 나온 본인의 책보다 이 번역서가 더 뛰어난 책이라는 추천을 한다. 여러 모로 볼 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번역 자체도 매끄럽고 좋다. 번역투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전쟁사 번역가가 생긴 것이 너무나도 기쁘다. 이 책이 통사나 전쟁의 큰 흐름을 다룬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투만을 다루었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에게는 시간을 쓸 유인을 찾기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아쉽다. 미드웨이 해전에 관심 있는 모든 이에게 추천한다. 또 일본인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싶은 이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태평양 전쟁 초기, 항공기를 이용한 해전의 양상에 대해 알고 싶은 이에게도 추천한다. 


책 속 한 구절:

... 고위층 내부에서 3개월간 밀고 당긴 끝에 함대는 좋게 표현해서 가치가 의문스러운 목표를 달성하려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곧 출항할 예정이었다. 작전계획은 어처구니없이 복잡했고 각 부대는 상호지원이 전혀 불가능하게 배치되었으며 일정은 지나치게 빡빡했다. 제대로 된 참모장교라면 미드웨이 작전의 도상연습이 충분하지 않았고 훈련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는 점도 지적할 것이다. 작전계획에는 예측하지 못햇던 항공모함 2척의 부재도, 산호해 해전의 전훈戰訓도 반영되지 않았다. 나구모의 지각 출항에 따라 미드웨이 공격함대의 위치와 일정을 변경하지 않은 것 같은 눈에 뻔히 보이는 실수가 이 모든 것의 대미를 장식했다. 지하야 마사타카는 연합함대에 대해 쓴 책에서 이 모든 실수를 간결하게 요약했다. "진인사대천명은 이 경우에 맞는 표현이 아니다." 이 불길한 암운 아래에서 기동부대는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을 향해 이틀 뒤 출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28~129 페이지)


미일 양국 항모 설계의 차이에 관해:

... 기본적으로 격납고 설계에 영향을 주는 두 가지 변수는, 폐쇄형으로 설계할 것인가 개방형으로 설계할 것인가(달리 말하면 외기에 쉽게 개방되는가 아닌가)와 비행갑판에 장갑을 두를 것인가 말 것인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항공모함을 운용한 주요 3국은 이 문제에 대해 각각 다른 철학을 채택했다. 영국 항공모함은 격납고를 창고, 대기실, 기타 구획으로 둘러치고 위에 장갑 비행갑판을 얹었다. 장갑 비행갑판은 함의 종강도縱强度longitudinal strength 중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조선용어로는 강력갑판强力甲板strength deck이라고 한다). 영국 방식은 격납고를 직격탄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심각한 단점도 있었다. 첫째, 함의 구조물 상부에 무거운 장갑을 얹으므로 갑판의 크기와 함의 높이가 제한된다. 따라서 한 격납고 위에 다른 격납고를 쌓는 복층형 격납고는 설계가 불가능하다. 복층 격납고 위에 장갑 비행갑판을 설치하면 상부 무게가 수용 불가할 정도로(당연히 함의 안정성과 복원력을 해친다.)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통로가 강력갑판을 뚫고 지나가야 하므로 엘리베이터 통로의 수와 크기도 제한되었고 이는 비행기 운용능력과 빠른 발진준비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영국은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항공모함에 탑재할 수 있는 비행기 수가 적었다. 미국이나 일본의 정규 항공모함이 60~100기를 운용한 데 반해 영국 해군의 정규 항공모함은 48기 정도를 운용했다.

  미 해군은 항공모함에 장갑 비행갑판을 탑재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고 격납고 갑판이 강력갑판 역할을 하는 설계를 도입했다. 이 설계에 따르면 구조상 비행갑판 무게가 가벼워지고 격납고를 둘러싼 격실들이 없어도 되기 때문에 미국 항공모함의 격납고는 상대적으로 넓었다. 더욱이 격납고는 금속제 접이문으로 외부환경을 차단하되 양현 여러 곳에서 개방되어 있었다. 접이문은 유증기나 빛을 완전히 차단할 정도로 단단히 닫히지는 않았으나(따라서 완전 등화관제를 할 때 문제가 되었다.) 문을 열면 격납고를 완전히 개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 항공모함은 필요하다면 격납고 안에서 비행기 급유와 시운전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폭발물처럼 격납고에 있는 위험물은 양현의 열린 곳 밖으로 밀어내 신속하게 투기할 수 있었다. 비장갑 비행갑판은 비교적 수리하기 쉬웠지만 폭탄을 맞으면 아래의 격납고를 보호할 수 없었고, 간혹 미 해군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특히 전쟁 말기의 가미카제 공격). 장갑 비행갑판과 비장갑 비행갑판의 이점에 대한 논쟁은 끝이 없지만, 결론적으로 미 해군은 항공모함이 전력투사 자산이며 적절한 수의 탑재기 없이 전력투사는 불가능하다는 기본명제에 충실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미 해군은 항공모함 설계에 위험이 따르더라도 이를 기꺼이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함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우리는 미 항공모함이 태평양 전쟁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설계방침은 미 해군과 영국 해군 설계철학의 가장 나쁜 점만을 취사선택했다. 그러나 전쟁 전에는 이 점이 눈에 띄지 않았다. 일본 항공모함 설계자들은 영국 해군처럼 폐쇄 격납고를 선호했다. 하지만 일본 정규 항공모함 대부분은 적절한 수의 비행기대를 운용하기 위해 상부와 하부 격납고로 이루어진 복층식 격납고를 가졌다. 동력 환풍장치와 군데군데 있는 현창을 빼고 격납고는 외부와 차단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 해군은 격납고 안에서 비행기에 급유작업을 하면서도 시운전을 실시하지 않았다. 손상통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방식은 잠재적으로 매우 위험했다. 깡통 안에서 폭죽을 터뜨릴 때처럼 폐쇄공간에서 일어나는 폭발은 폭압을 증폭하는 효과가 있다. 일본 항공모함 격납고에서는 이런 현상이 발생하기 쉬웠다. 

  이 시기의 일본 해군 함선은 상부에 과도하게 몰린 무게와 [이로 인해 일어난] 안정성 문제에 자주 시달렸다. 더욱이 일본 항공모함은 복층 격납고로 인해 높이가 상당히 높았다. 복층 격납고 설계는 상부구조물의 무게를 최소한으로 유지해야 함을 뜻했으므로 영국이 채택한 장갑 비행갑판은 처음부터 논외 대상이었다. 서구인에게 허술해 보일 만큼 가로세로로 올린 지지대로 지탱하는 포좌와 구멍이 숭숭한 돌출부의 바닥 등은 모두 상부구조물의 무게를 줄이려는 시도였다. 요약하자면, 일본 항공모함은 구조적 관점에서 미덥지 못했고 전투손상을 감내하면서 기능을 유지할 대비를 갖추지 않았다. 아카기나 가가처럼 상대적으로 튼튼한 주력함의 선체 위에 건조되지 못한 히류와 소류는 이 취약점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일본 해군도 이러한 취약성을 어느 정도 인지했다. 예를 들어 신형 쇼가쿠급의 설계에서는, 실제 설계 의도대로 작동하지는 않았지만, 폭발이 일어나면 바깥쪽으로 날아가 내부 발생 폭압을 배출하도록 설계된 격벽들이 격납고에 있었다. 근본적으로 일본 항공모함의 취약성은 일본 해군이 지나치게 공격에 치우친 태도를 취했다는 데에 기인한다. 일본 해군은 미 해군만큼이나 세력투사 개념을 열렬히 신봉했다. 그러나 방어를 경시한 설계철학 덕분에 일본 함선은 상대방 함선에 비해 손상에 몹시 취약했다. 이 약점들은 적에게 궤멸적 타격을 받고 나서야 상상을 초월할 만큼 끔찍한 민낯을 드러내게 된다. (364~36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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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01-24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lueyonder 2020-01-24 20:19   좋아요 0 | URL
초딩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니미츠 - 별들을 이끈 최고의 리더 KODEF 안보총서 54
브레이턴 해리스 지음, 김홍래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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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상대한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해군 제독 체스터 니미츠의 전기이다. 20세기 초 및 전쟁을 거치며 변모하는 미국 해군의 역사를 한 인물을 따라가며 읽는 것도 색다르고 재미있다. 니미츠란 인물을 통해, 인생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를 배우고 생각하게 한다. 


니미츠는 매우 성실하고 똑똑하고 겸손한 인물이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대통령이 직접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선택했다는 니미츠, 그의 존재는 미국에게 큰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확실히 하늘은 크게 쓰일 사람에게는 시련을 주는 것 같다. 니미츠는 젊었을 때, 지휘하던 구축함의 좌초로 인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며 그 이후 한직을 맴돈 적이 있다. 그는 남들이 원치 않던 잠수함의 함장을 하게 되었지만, 그 기간 동안 초기 잠수함의 성능 개선 및 사용 방안에 대해 고민했으며 잠수함의 디젤 엔진 개발에 큰 역할을 했다. 


성실히 맡은 바를 다하는 사람에게, 언젠가 다시 기회는 온다. 결국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신뢰와 관용의 리더십으로 해군을 이끌어 거대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자신이 고른 부하에게 일을 믿고 맡기는 스타일이었으며, 한 두 번의 실수는 관대하게 넘어갔다. 그 자신이 사관학교 시절 금지된 맥주를 반입하다가 우연히 다른 장교에게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교가 모른 척 넘어간 일에 큰 교훈을 얻은 것 같다. 


책 속의 몇 구절을 옮긴다. 첫 부분은 니미츠가 1920년 진주만에 기지를 둔 14잠수함분대 사령관에 임명되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스튜어트 머리Stuart S. Murray 함장]는 자신의 R급 잠수함을 다른 잠수함 옆에 계류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가장 긴 잠수함이었던 R급 잠수함은 그 길이가 미식축구 경기장 길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86피트(약 57미터)인 반면, 출력은 상당히 부족했기 때문에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함수가 다른 잠수함을 들이받지 않으면 함미가 부딪치곤 했다. 함미가 부딪칠 경우, 보통 프로펠러의 날개가 휘어졌다... 그는 ... 니미츠에게 사고를 보고해야만 했다. 니미츠는 그의 보고 내용을 관대하게 받아들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처음에는 휘하 잠수함 지휘관들 모두를 믿고 기회를 준다네. 함미 한 번과 함수 한 번, 혹은 함미 두 번이나 함수 두 번 정도는 괜찮아. 하지만 그 기회를 모두 쓰면 그때는 책임을 물을 걸세. 자네는 아직 기회를 절반밖에 쓰지 않았어. 함미 한 번의 기회를 쓴 셈이지. 그러니 이제 배로 돌아가서 나머지 기회마저 써 버리지 않도록 노력하게."

  신뢰와 관용의 리더십, 이것이 전형적인 니미츠의 지휘 방식이었다. 머리(1956년에 해군 대장으로 퇴역했다)는 니미츠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사고를 내지 않고 다른 잠수함 옆에 나란히 계류하는 방법을 익혔다. (89~90 페이지)


미드웨이 해전에 암호해독으로 커다란 공을 세운 로슈포르는 해전 이후, 억울하게 다른 보직으로 교체됐다. 그의 인품을 알 수 있는 일화.


  진주만에 있는 로슈포르의 책상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걸려 있었다.

   "누가 명성을 얻게 될지 신경 쓰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이든 달성할 수 있다." (252~253 페이지)


남의 험담을 결코 하지 않았던 니미츠가 예외적으로 했던 맥아더에 대한 언급.


  니미츠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 맥아더에 대한 개인적 생각을 결코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일으킨 반목이 지속되기를 원치 않았다. 한 친구가 맥아더에 대해 논평해달라고 강요하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단지 "그는 기억력이 아주 좋네"라고만 말했다. 하지만 미래의 역사학자를 위해 니미츠는 모종의 암시를 남긴 것인지 모른다. 한번은 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 레이턴이 맥아더의 사진을 액자에 끼워 책상 위에 올려놓은 이유를 물어보자, 그는 잠시 경계심을 늦추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나에게 주피터 신처럼 벼락까지 쳐가며 요란하게 떠드는 멍텅구리가 되지 말라는 점을 상기시켜주거든." (320 페이지)


니미츠는 악담도 농담처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그는 농담을 매우 잘 했다고 한다).


니미츠는 1885년 2월 24일 텍사스 주 프레데릭스버그에서 태어났다. 1947년 12월 15일 해군참모총장에서 물러난 후,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에서 은퇴 생활을 했다. 그는 1966년 2월 20일 세상을 떠났으며, 캘리포니아 주 산브루노 골든 게이트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다음은 그의 할아버지인 찰스 헨리 니미츠가 손자인 체스터 니미츠에게 해주었다는 말이다.  


"바다는--삶 자체가 그렇듯이--엄격한 선생님이란다. 바다에서든 삶에서든 잘 지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운 다음 최선을 다하고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 거란다. 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특히 더." (32 페이지)


"최선을 다하고 걱정 따위는 하지 말라"는 니미츠의 생활신조가 되었다. '니미츠'란 이름은 현재 미국 해군의 주력인 핵추진 항공모함의 1번 함 이름으로 기념되고 있다.


USS Nimitz (CVN-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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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사 2 - 광기와 망상의 폭주 전쟁과 평화 학술총서 1
일본역사학연구회 지음, 아르고(ARGO)인문사회연구소 엮음, 방일권 외 옮김 / 채륜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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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전쟁사 책이다. 1953년 일본에서 일본역사학연구회 소속 학자들이 저술하여 발간된 책인데 요즘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 번역서 1권은 2017년 12월, 2권은 19년 12월에 출간됐다. 원저는 총 5권인데, 만주사변을 다룬 1권, 중일전쟁을 다룬 2권은 번역서 <태평양전쟁사 1>로 출간됐고, 이 2권은 원저 3권, 4권의 태평양전쟁 전기와 태평양전쟁 후기를 묶은 것이다. "패망의 잿더미에서 토해 낸 일본 지성의 참회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사회주의 계열의 역사학자들이 저술한 책으로서 소련 및 중국 공산당에게 매우 호의적인 서술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패전 직후인 만큼 당시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의 관점에 의한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적 내용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일반적 의미에서의 전쟁사 책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2권은 태평양전쟁 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전반에 대해서도 서술된다. 저자들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책에 나온 다음의 첫 문단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 대 영국.프랑스 간의 제국주의 전쟁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전 세계적 규모의 독점자본주의 모순이 폭발한 것이며, 식민지와 시장을 두고 힘겨루기를 하던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대립과 분열이 발생하면서 벌어진 재앙이었다. 지구상의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희생양삼아 나치 독일이 침략하게 만듦으로써 자본주의의 누적된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 제국주의자들의 공통된 바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결과 전쟁은 뜻하지 않게 영국.프랑스와 독일의 충돌이라는 형태로 발발하였다.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의 전반적인 위기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또한 자본주의 내부의 모순이 폭발한 것은 각국 정치 지도자의 의지와 능력을 넘어서는 필연적이면서도 불가피한 현상이었으며, 그로 인해 세계대전은 발발할 수밖에 없었다. (19 페이지)


대공황과 같은 경제적 문제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이 단순한 결론을 내리는 것에는 불만을 표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사회주의에 대해 지속적으로 호의적인 평을 내리며 그 공을 과장한다. 몇 군데 예를 다음에 적는다.


1941년 크리스마스에 독일의 선전부 장관 괴벨스Paul J. Goebbels는 소련 중공업의 1/2을 포함한 지역이 독일 손에 들어왔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실제로 소비에트가 상실한 지역은 소비에트 생산액의 1/3 이상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공업생산은 오히려 상승했으며 동부의 산업시설은 소련군이 필요로 하는 전쟁물자의 90% 이상을 공급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주로 미국이 무기를 대여했지만, 그것은 소비에트가 필요로 하는 양의 4%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소비에트의 공업은 거의 독자적인 역량으로 독일과의 전쟁을 버티고 있었다. (53 페이지)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세계대전의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다. 소비에트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지켜냄으로서 인류를 파시즘에서 구원하였다. 당시 맥아더 원수조차도 "문명의 희망은 용감한 러시아군의 고귀한 깃발에 달려 있다"고 말했고, "내 평생 지금까지 무적을 자랑해온 독일군의 대규모 공격에 맞서서 이토록 효과적인 저항을 한 전투를 본 적이 없다.... 그 규모의 웅대함이야말로 역사상 최대의 군사적 성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Schuman, International Politics)며 소비에트군의 업적을 칭송했다. 실제로 일본군에게 필리핀을 빼앗기고 멀리 호주까지 도망친 맥아더가 이후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비에트군과 인민들이 승리를 거둔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335 페이지)


중국에서는 지주와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하는 장제스 정권이 내부적으로는 반혁명의 입장을 취하면서 외부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항전을 포기하고 끊임없이 타협하려고만 했다. 따라서 이러한 국민당을 움직여 1938년의 항일통일전선을 만들어낸 원동력은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와 봉건주의에 대한 반대를 결합시킨 중국 민중들의 노력에 있으며, 이를 지도한 것은 중국 공산당이었다... 1940년에 마오쩌둥이 발표한 '신민주주의론'은 이러한 새로운 민족혁명의 기본적인 방향을 밝힌 것으로, 이로 인해 전후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인민민주주의 국가들, 또한 제국주의 국가들 내의 혁명세력인 노동자.농민들과의 국제적인 연대가 기존과는 질적으로 다른 견고한 것이 되었다. (530~531 페이지) 


지금의 시점에서 이런 서술들을 읽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전황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경제에 대한 여러 통계가 나오긴 하지만, 이 책을 전쟁사 책으로는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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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6월에 있었던 미드웨이 해전에 관련된 책 2권이 최근 국내에 출간됐다.















첫 번째는 파셜과 털리의 <미드웨이 해전Shattered Sword>이다. 미국에서는 2005년에 출간되었는데, 일본측 자료를 참고하여 새롭게 미드웨이 해전을 구성했다고 당시 칭찬이 자자했다. 특히 잘못 알려진 여러 사실들을 바로 잡아 미드웨이 해전에 얽힌 '신화'를 깨는 데 일조했다. 특히, 미드웨이에서 미국 해군의 승전이 역경을 이긴 값진 승리이긴 했지만, 종종 언급되듯이 '기적'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작전 당시 제1기동부대(항모 4척을 포함한 20척의 함정)에 248대의 항공기를 보유했는데, 이는 26척(항모 3척 포함)으로 구성된 미국 항모 기동부대의 항공기 보유 숫자인 233대와 비교해 큰 차이가 없다. 더욱이 미드웨이 섬에 주둔하고 있던 115대를 포함하면 오히려 일본군이 열세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이 초래된 데에는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대표되는 일본해군 수뇌부의 작전 실패와 니미츠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대표되는 미국해군 수뇌부의 냉철한 계산이 큰 몫을 했다. 근원을 들어가 보면 이러한 작전을 세우고 수행하는 데에서도 뭔가 문화의 차이가 보이는 것 같다. 압도적 전력을 구축할 수 있음에도 이를 분산하여 막상 일선의 전투부대가 열세에 처하도록 한 데에는 지속적 승전으로 인한 상황 판단의 안이함도 있겠지만, 자신들의 가정--미국 해군은 미드웨이 환초가 공격을 당한 후에야 움직일 것임--이 잘못될 수 있음을 믿지 않은 완고함도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된다. 가정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그에 따라 재빨리 계획을 수정해야 했지만 일본 해군은 그렇지 못했다. 여기에는 권위와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권위와 체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목숨이 오가는 자리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물었을 때 누구나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니미츠 제독으로 대표되는 미국 함대는 철저히 실리적이고 실용적인 접근 방법을 취했다. 니미츠는 소중한 항모 3척으로 도박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가지고 있던 정보를 바탕으로 면밀히 계산해 본 후, 해볼만 하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출항 명령을 내린 것이다. 


파셜과 털리의 책은 무척이나 상세하게,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자그마치 848페이지). 일본 해군이 계획을 잘못 세웠다고 해서 미국 해군이 승리를 거저 얻은 것은 아니다. 승리를 얻기 위해 미국 해군은 엄청난 피를 흘렸다. 운도 따랐다.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미드웨이>는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영화라서 극화가 좀 됐다고 생각).


가장 많이 손실을 입은 이들은 뇌격기 조종사 및 함께 탑승했던 항공병들이다. 출격했던 뇌격기는 사실 거의 돌아오지 못했다. 이는 뇌격-어뢰를 이용한 공격-을 위해서는 항공기가 수면 가까이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전투기 호위가 없는 뇌격은 함대 상공을 방어하는 적 전투기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국 해군은 협력된 공격을 펼치지 못하고 허둥댔다. 그래서 전투기 호위 없이 공격한 수많은 뇌격기들이 공격을 하다가 격추됐다. 















<미드웨이 - 어느 조종사가 겪은 태평양 함대항공전(원제: Carrier Combat)>은 이러한 뇌격기 조종사의 경험담이다. 저자인 프레데릭 미어스Frederick Mears III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항모를 상대로 출격하지는 못했다(호넷 함의 제8 뇌격비행대대VT-8 소속 신참이었으며, 출격했다면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후 솔로몬 제도에서 여러 전투에 참전하다가 1943년 6월 전사했다. 원서는 1944년에 출간됐다. 현재 미국에서도 절판인 상태인데,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겠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모 4척을 격침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의 회고록으로 국내에 출간된 것은 내가 알기로 없다. 미국에서는 엔터프라이즈 함 소속 돈틀리스 조종사였던 노먼 클리스Norman Jack "Dusty" Kleiss의 회고록 <Never Call Me a Hero>가 좋은 평을 받고 있다. 참고하시길. 마지막으로, 얇지만 좋은, Osprey 출판사에서 나온 <Midway 1942>를 다시 한 번 리스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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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sprey 출판사에서 나온 Campaign 시리즈 <Midway 1942>에는 마크 스틸이 쓴 위의 책(2010.9 출간)과 더 오래 전에 나온 마크 힐리가 쓴 책(1994.1 출간)이 있다. 플래닛미디어에서 번역 출간된 <미드웨이 1942>는 더 오래된, 마크 힐리가 쓴 책이다. 1994년 책은 예전의 "신화"적 분위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고 오류도 보인다.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가 공격을 시작했을 때 일본 항모 비행갑판에는 출격을 기다리는 공격기들이 있었다는 얘기를 예로 들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는 호넷 함에서 출격한 공격기들의 침로이다. 마크 힐리의 책은 엔터프라이즈 함과 호넷 함에서 출격한 공격기들이 동일한 방향으로 날았다고 지도에 표시했지만(<미드웨이 1942> 140~141 페이지), 호넷 함에서 발진한 공격기들은 엔터프라이즈 공격기들보다 좀 더 북쪽 경로로 날았다(마크 스틸의 책 51페이지 지도). 엔터프라이즈 공격기들은 올바른 방향인 침로 240도로 날아갔지만 호넷의 공격기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265도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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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2020-01-04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저는 Shattered Sword의 번역자 입니다. 소개해 주신 책 외에 Pacific Payback(, S.Moore, Penguin, 2014)도 추천할 만 합니다. 진주만부터 미드웨이까지 미 해군 폭격비행대의 SBD탑승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blueyonder 2020-01-05 16:05   좋아요 0 | URL
좋은 책 번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해 주신 책도 참고하겠습니다~
 


12월 31일 개봉 예정인 영화 <미드웨이>. <인디펜던스 데이>의 롤란트 에머리히[*] 감독에 에드 스크라인, 루크 에반스, 우디 해럴슨, 맨디 무어 등이 나온다. 에머리히 감독이 평소 만들고 싶어했던 인생 프로젝트라던데, 태평양 전쟁의 시작인 진주만 기습, 둘리틀 공습,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을 138분의 러닝타임에 욱여넣느라 무리했다는 얘기도 있다. 평론가들의 평은 그저 그렇지만 관객들 평은 괜찮은 것 같다. CG가 엄청 많을 것 같은데, 작은 화면으로 보면 유치해 보이지만 큰 화면으로 보면 의외로 볼만할지 모르겠다. 


비슷한 주제를 다룬 영화로는 2001년 작 <진주만>이 있다(마이클 베이 감독, 벤 애플렉, 조쉬 하트넷, 케이트 베킨세일 등 출연). 이 영화는 진주만 기습 이전의 얘기인 영국 전투에서 진주만 기습을 거쳐 둘리틀 공습에서 끝이 난다. 전투 부분의 고증이 정확하지 않아 전쟁 영화로는 별로라고 생각한다.


진주만 기습은 여러모로 볼 때 일본의 전략적, 전술적 실패였다는 평을 받는다. 일본 해군은 진주만에서 미국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키고 전쟁을 시작하고자 했지만, 미국 해군의 항모는 그림자도 못 본 채 전함만 파괴하고 진주만 기습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6개월 후 미드웨이에서 그 항모들에 의해 일본 해군 항모부대가 궤멸적 타격을 입는다. 사실 미국 해군이 일본 해군을 미드웨이에서 물리치는 얘기는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측면이 있다. 자세한 얘기는 다음의 책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기발한 대책(기책)을 선호하는 일본인들의 성향에 대해서는 <시사인>의 굽시니스트 만화가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기습을 위해 미국에게 선전포고 문서를 건네고 30분 후에 공습이 시작되도록 계획했다는 일본. 결국 선전포고 문서는 공습 개시 1시간 후에 건네졌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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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을 찾아보다가 독일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미드웨이 해전이 그의 관심을 끌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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