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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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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도올 스타일이 잘 안 맞는다고 느꼈는데, 끝까지 읽고 난 지금 많이 배웠다는 생각이 든다. 불교 용어를 잘 모르니 좀 어렵기도 했다. 용어와 그의 스타일에 익숙해지면 읽는 재미도 있다. 불교에 대해 잘 모르는 초심자가 읽어도 괜찮을 것 같고, 많이 접해본 사람은 조금은 색다른 시각을 만날 수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 


책은 도올이 반야심경을 만나게 된 계기-그의 젊은 시절-부터 시작해서 조선 불교 및 선사들 이야기, 초기 불교 역사를 거쳐 책의 절반이 지나서야 본론인 반야심경 이야기에 들어간다. 도올만큼 재가 많은 사람이 흔치는 않으리라. 또한 그만큼 일반 대중들과 소통을 갈구하는 지식인도 많지 않으리라. 이 책은 그의 이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반야심경>은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줄임말로서, "반야"는 "지혜", "바라밀다paramita"는 "극치, 완성"을 뜻한다(187 페이지). 반야심경에는 우리가 많이 들어 알고 있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구절도 나오고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의 구절도 나온다. 반야심경의 제일 마지막인 이 문구의 산스크리트어 원래 발음은 "가떼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로서 뜻은 "건너간 자여, 건너간 자여! 피안에 건너간 자여! 피안에 완전히 도달한 자여! 깨달음이여! 평안하소서!"라고 한다(238 페이지). 이 부분에 대해 도올은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이 주문은 종교적 주술로서 해석되면 곤란합니다. 여기 숨은 주어는 당연히 관세음보살입니다. 건너간 자, 지혜의 완성에 도달한 자는 관세음보살입니다. 관세음보살이 누구입니까? 나는 이 텍스트의 첫머리에서 이 <심경>을 읽고 있는 바로 여러분 자신이라고 설파했습니다. 이 <심경>은 궁극적으로 내가 나에게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관세음보살이 누구입니까? "나"가 누구입니까? 이 나는 바로 보살혁명, 새로운 반야혁명의 주체세력입니다. 보리 사바하! "깨달음이여! 평안하소서!"라는 뜻은 보살혁명의 주체세력들에게 바치는 헌사eulogy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주문을 외우면서 바로 여러분들의 시공간 속에서 새로운 보살혁명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야"의 궁극적 의미이겠지요. (238페이지)


"보살"은 "보리살타Bodhisattva"의 준말로서 "보리"는 지혜, 깨달음, "살타"는 본질, 실체, 마음 등의 뜻을 갖는다. 결국 보리살타는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람", "그 본질이 깨달음인 사람"을 의미한다(162 페이지). 여기서 "혁명"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출가한 비구 중심의 소승 불교에서 벗어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대승 불교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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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를 사랑한 스파이 - 첩보소설로 읽는 유럽현대철학, 모든 철학은 삶속에 있다
이종관 지음 / 새물결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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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과 표지만 보고 오해한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이 책은 외국 소설인 모양이다, 두 번째, 이 책은 소설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둘 다 틀렸다. 이 책은 국내 철학자가 쓴 소설을 빙자한 철학 이야기이다. 소설로 치자면 완전 B급이다. 읽으면서 '아 유치해'를 연발했고, 나오는 과학에 대한 논설을 읽으며 역시 '과학에 대해 잘 모르는 철학자'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철학에 대한 논설만 참으면 읽을만 했다. 'B급 소설'이 읽는 재미는 있지 않은가. 중간중간 나오는 사진들이 그러한 읽는 재미를 더해줬다. 그러다가 점점 이거 얘기가 이상한 데로 빠진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뒤통수를 맞았다. 에필로그까지 읽은 지금, '허허 이거 대단한데? 이종관 선생님 애쓰셨구나' 하는 생각.


소설이 처음 출간된 때는 1995년이다. 소설도 '우루과이 라운드'에서 시작한다. 우루과이 라운드 기억하는 분도 별로 없을 것 같다. 읽은 책은 2015년에 재발간된 판이다. 오래된 책이지만 다루는 문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오히려 더욱 심화됐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읽으면서 별점을 생각했는데, 처음에는 2개였다가 마지막에 4개로 올라갔다. 그래서 평균인 3개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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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쓸모
김경윤 지음 / 생각의길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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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강연을 엮은 책이라 잘 읽힌다. 주말에 진득히 앉아 읽으면 끝낼 수 있는 철학 입문서이다. 저자는 일산 자유청소년도서관 관장이며 청소년, 학부모,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동서양 철학자를 한 명씩 골라 그들의 삶과 시대를 살펴보고, 관통하는 주제를 톺아보며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성찰하고 있다. 총 5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공자와 플라톤을 다루는 1강, 맹자와 루소를 살펴보는 2강은 정치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3강은 노자와 스피노자를 통해 펼치는 신론이다. 4강은 장자와 디오게네스의 삶에서 배우는 자유론, 한비자와 마키아벨리를 다루는 5강은 군주론, 법치주의에 대한 강의이다. 


새로운 정보도 있었고 나름 재미있었다. 예를 들면, 저자는 공자를 평민이면서 귀족이 되고자 갈망한 사람으로 기술한다. 또한 화이부동(君子 和而不同)을 (계급적) '조화를 추구하고 평등을 거부한다'고 해석한다. 노자와 스피노자를 다루는 3강은 기대와 달리 조금 실망스러웠다. 노자와 스피노자가 이렇게 간단했던가?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장자와 디오게네스를 다루는 4강이었다. 몇몇 구절을 다음에 기록한다.

인문학의 최종 목표는 인문학을 버리는 겁니다. 지식을 버리는 것이지요. 아는 것을 자기 삶으로 증명해내는 겁니다. 딱 그만큼이 인문학입니다. (187~188 페이지)
디오게네스가 원래부터 가난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디오게네스의 노예가 도망을 쳤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노예가 도망쳤는데 왜 안 잡느냐고 물었죠. 디오게네스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노예는 나 없이도 잘 사는데, 내가 노예 없이 못 산다면 누가 노예냐?"라고 되물었답니다... 그래서 노예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 '위대함'은 아무나 못하는 것을 하는 게 아니라, 아무도 안 하는 것을 하는 능력입니다. (201, 202 페이지)

장자의 아내가 죽자, 혜시가 조문을 갔다. 장자는 마침 두 다리를 키처럼 벌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것[삶과 죽음]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운행하는 것과 같지. 저 사람이 우주라는 큰 집에 누워 편안히 자고 있는데, 내가 크게 소리 내어 곡을 한다면, 그것은 명()을 모르는 것일세. 그래서 곡을 멈춘 것이라네." (203 페이지)

디오게네스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물욕에 집착이 심하면 허약해진다. 그리고 스스로 결박을 한다. 언제든지 죽음을 생각해보는 사람만이 참된 자유인이다. 이미 죽음을 예감해본 사람은 어떤 욕망도 그를 노예로 할 수 없고 그 아무 것도 그를 결박하지 못하니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아시나요? 죽음을 기억하라!....[이] 정신을 다르게 표현하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되겠네요. 오늘을 살아라! ...

...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은 그것 때문에 우울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언젠가 죽는데 그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니까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자기답게 살라는 말이지요. (204~205 페이지)


저자는 '들어가며'에서 철학의 쓸모를 '물음이고 의문'이라고 말한다.  

... 철학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물음이 끝나는 곳에서 철학의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물음이 시작되는 곳에서 철학은 발원합니다. 그리하여 철학은 물음입니다. 좋은 답을 얻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 잘 묻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러면 철학의 쓸모는 무엇일까요? 너무나 당연히도 철학의 쓸모는 물음이고 의문입니다. 철학은 상식의 확인이 아닙니다. 다수가 동의하는 것을 따르는 합의도 아닙니다. 차라리 철학은 상식에 대한 반격이고, 다수결에 대한 의문이며, 진리에 대한 회의입니다. 이 물음의 대상에서 권력도, 재력도, 심지어 진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에 질문할 수 있는 것이 철학입니다. (6 페이지)


책을 다 읽고 나니, 장자를 더 읽고 싶어졌다. 나는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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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모르텔 2019-01-22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의 쓸모... 잘 읽고 갑니다.

blueyonder 2019-01-29 12:37   좋아요 0 | URL
방문과 댓글 감사합니다~^^
 
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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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삶의 과정이 가속화된 이유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은 착각이다... 온갖 삶의 가능성들을 실현한다고 자연히 충만한 삶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주 짧은 이야기라도 고도의 서사적 흥미를 자아낼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극히 짧은 삶도 충만한 삶의 이상을 달성할 수 있다... 문제는 오늘날 삶이 _의미 있게 완결될_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삶이 분주하고 초조해진 원인이다... 인생은 더 이상 단계, 완결, 문턱, 과도기 등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의 현재에서 또 다른 현재로 바삐 달려갈 뿐이다. 그들은 그렿게 나이를 먹어가지만 늙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불시에 끝나버리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오늘날 죽는 것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어려워진 것이다. (14페이지 이후)

가속화는 오직 시간에서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이 소멸할 때만 가속화로서 지각된다. 가속화가 그 자체로서 주목의 대상이 되고 문제적으로 되는 것은 바로 시간이 무의미한 미래를 향해 휩쓸려가는 때뿐이다.
신화적 시간은 한 폭의 _그림_처럼 고요히 놓여 있다. 반면 역사적 시간은 일정한 목적을 향해 진행되는, 혹은 내달리는 _선_의 형태를 띤다. 이 _선_에서 서사적인 긴장 혹은 목적론적 긴장이 사라져버리면, 선은 방향 없이 _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점들_로 흩어진다. 역사의 종언은 시간을 점의 시간으로 원자화한다. 신화는 이미 오래전에 역사에 밀려났다. 이에 따라 정적인 그림은 전진하는 선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제 _역사/이야기_Geschichte는 정보에 밀려나고 있다. 정보들은 서사적 길이나 폭을 알지 못한다. 정보들은 중심도 없고 방향성도 없으며, 우리에게 물밀 듯이 닥쳐온다. 정보에는 _향기가 없다._... 정보는 원자화된 시간, 즉 점-시간의 현상이다. (42페이지 이후)

점들 사이에서는 필연적으로 공허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 반면 신화적 시간이나 역사적 시간은 어떤 공허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림과 선에는 간극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점들 사이에서만 비어 있는 사이공간이 생겨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간극들은 권태의 원인이 된다... 그리하여 점-시간은 비어 있는 간극을 제거하거나 단축하고자 하는 강박을 낳는다. 간극이 _오래 지속되지_ 않도록(독일어로 지루함은 ‘오랜 지속lange Weile‘이다--역자) _센세이셔널한 일들_이 더 빨리 일어나게 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장면과 장면, 또는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 히스테리적이라고 할 정도로 가속화된다... 원자화된 시간은 서사적 긴장이 없는 까닭에 사람들의 주의를 지속적으로 묶어두지 못한다. 그 대신 인간의 지각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 또는 노골적인 것을 공급받는다. 점-시간은 사색적인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43페이지 이후)

근대의 지향은 앞으로 쏘기Projektieren이다. 근대는 목적 지향적이다. 근대의 걸음걸이는 목표를 향한 행진이다... 바로 진보의 목적론, 즉 현재와 미래 사이의 차이가 가속화의 압력을 낳는다... 목적론의 부재로 인해, 후근대, 즉 포스트모던의 시대에는 완전히 다른 운동 형식과 걸음걸이가 나타난다. 전부를 포괄하는 지평, 모든 것을 지배하는 목적, 모두가 그리로 행진해야만 하는 목표지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지그문트 바우만은 산책과 유랑을 후근대의 특징적 걸음걸이로 부각시킨다. 그러니까 근대적 순례자의 후예는 산책자와 방랑자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사회에서는 산책의 유유함도, 떠도는 듯한 방랑자의 경쾌함도 찾아보기 어렵다. 조급함, 부산스러움, 불안, 신경과민, 막연한 두려움 등이 오늘의 삶을 규정한다. (60페이지 이후)

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히 구속되어 있지 않거나 의무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를 주는 것은 해방이나 이탈이 아니라 편입과 소속이다. 그 무엇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롭다frei, 평화Friede, 친구Freund와 같은 표현의 인도게르만어 어원인 ‘fri‘는 ‘사랑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나 연인에게 속해 있는‘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묶여 있지 않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묶여 있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적 어휘다. _받침대_ 없이는 자유도 없다.
오늘의 삶은 받침대가 없는 까닭에 쉽게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시간의 분산은 삶의 균형을 깨뜨린다. _삶은 어지럽게 날아다닌다._... 따라야 할 시간 규정이 사라진 결과, 자유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 상실 상태가 초래된다. (61페이지 이후)

후근대에서 시간의 분산은 단순히 삶과 생산과정의 가속화가 더욱 첨예해진 탓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패러다임 전환의 결과이다. 본래 가속화란 _근대_ 특유의 현상이다. 가속화는 단선적이고 목적론적 발전과정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가속화는 특정한 서사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탈서사화는 가속화된 전진의 드라마를 해체하여 방향을 상실한 난비亂飛로 만들어버린다. 가속화의 드라마는 무엇보다도 사건과 정보의 전달 속도가 광속에 도달함으로써 종언을 고한다. (62페이지 이후)

삶을 더욱 충만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들의 수가 아니라 지속성의 경험이다. 사건들이 빠르게 연달아 일어나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것은 싹트지 못한다. 충족과 의미는 양적인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긴 것과 느린 것이 없이 빠르게 산 삶, 짧고 즉흥적이고 오래가지 않는 체험들로 이루어진 삶은 "체험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한들 그 자체 _짧은_ 삶일 뿐이다. (65페이지 이후)

우리가 전적으로 목표에만 집중한다면, 목표 지점에 이르는 공간적 간격은 그저 최대한 빨리 극복해야 할 장애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순전히 목표 지향적인 태도는 사이공간의 의미를 파괴한다. 이로써 사이공간의 의미는 독자적인 가치라고는 전혀 없는 복도로 축소된다. 가속화는 사이공간의 극복에 필요한 사이시간을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시도이다. 이에 따라 길의 풍부한 의미는 사라진다. 길에서는 더 이상 향기가 나지 않는다. 아니, 길 자체가 아예 사라진다. 가속화는 세계의 의미론적 빈곤을 초래한다. 공간과 시간은 더 이상 많은 _의미_를 지니지 못한다. (69페이지)

현재화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_현재성에 파괴적으로 작용하는_ 사이공간과 사이시간 들은 폐기된다... 세계가 온통 _여기_가 되어버림으로써 _저기_는 제거되고 만다. 여기와 저기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알려진 것과 미지의 것을, 친숙한 것과 낯선 것을 분리하는 문턱이 사라진다... 간격은 지각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구조화한다. 전환기와 단계를 통해 삶은 일정한 방향, 즉 의미를 획득한다. 간격이 없어짐에 따라 생겨나는 것은 지향점 없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는 잘 정의된 단계가 없는 까닭에 하나의 단계를 잘 마무리하고, 이를 다음 단계에 의미 있게 연결시키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수많은 연결 가능성으로 이루어진 공간에는 연속성이란 것이 없다... 단선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즉 운명의 시간은 폐기된다. (70페이지 이후)

들길은 어떤 _목표_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들길은 오히려 사색적으로 자기 안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사색적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왕복운동은 길을 목표에서 해방시키지만, 그렇다고 산만성의 파괴적 힘에 내던져버리지도 않는다. 들길에는 뭔가 독특한 집중성이 내재한다. 들길은 뻗어가지 않고 머물러 있다. 들길은 방향이 정해져 있는 시간, 경련하는 노동의 시간을 잠잠한 지속성으로 만들어준다. 사색적 머무름의 장소로서 들길은 어떤 목적이나 목표도 필요하지 않은 거주의 이미지, 신학이나 목적론이 없어도 괜찮은 그런 거주의 이미지가 된다. (111페이지)

세계는 "땅과 하늘, 신적인 존재와 유한한 인간"의 "윤무"이다... 윤무는 모든 시간적, 공간적 분산을 방지한다... 세계의 엄격한 대칭적 구조는 시간적인 차원에서 시간이 멈추어 서 있는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111페이지 이후)

세계의 전반적인 탈소여화는 사물에서 고유의 광채를, 고유의 무게를 모조리 빼앗고 그것을 제작 가능한 대상으로 격하시킨다. 사물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만들 수 있고 제작할 수 있는 대상이 된 것이다. 소여성이 물러나고 제작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존재는 소여성을 상실하고 과정으로 전락한다... 과정은 어떤 목표를 향하여 전진한다... 가속화는 순전히 기능적인 과정의 내재적 성질이다. (114페이지 이후)

결국 가속화는 불안정하다는 것, 정주할 곳이 없다는 것, 받침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가속화된 장면들과 사건들의 연속이 오늘날 세계의 걸음걸이라면, 이는 곧 받침대의 부재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119페이지)

사실 세계는 거의 대부분 인간 자신이 제작한 사물과 질서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하이데거의 세계는 인간의 개입 이전부터 언제나 존재해온, 이미 주어져 있는 그런 세계이다. 이처럼 이미 늘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 하이데거적 세계의 소여성을 이룬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는 하나의 선물이며, 영원한 반복의 세계이다. 근대의 기술로 인해 인간이 점점 더 땅에서, 대지에서 멀어져가고 동시에 땅의 강제에서 해방되어가는 상황에서, 하이데거는 오히려 "토착성"을 고집한다. 인류가 결국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탈소여화와 세계의 제작 덕택이겠지만, 하이데거는 어떤 탈소여화도, 어떤 형태의 세계 제작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이데거는 조종할 수 있고 제작할 수 있는 과정으로 탈소여화된 세계에 맞서 "만들 수 없는 것" 또는 "비밀"에 강하게 호소한다. (119페이지 이후)

신은 "만들어낼 수 없는 것," 개입하는 인간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를 상징한다. 신이야말로 제약받지 않는 자der UnBedingte이다. 세계는 탈소여화되고 전면적인 제작의 대상이 됨에 따라 완전히 신이 없는 상태가 된다. "궁핍한 시간"은 신이 없는 시간이다. 인간은 마땅히 "사물적으로 제약된 존재" "유한한 존재"로 남아 있어야 한다. 죽음을 폐기하려는 시도는 신성모독이며 인간적 간계일 뿐이다. (121페이지 이후)

니체는 "활동적 인간의 주된 결점"이라는 제목이 붙은 아포리즘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활동적인 사람들에게는 보통 고차적인 활동이 없다. 개인적 활동이 없다는 말이다. 그들은 관리로서, 상인으로서, 학자로서, 즉 일정한 부류에 속한 존재로서 활동할 뿐, 결코 개별적이고 유일한 특정 인간으로서 활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 활동적인 사람들은 돌이 구르듯이 구른다. 어리석은 기계의 원리에 따라서." (166페이지)

오직 사색적 삶을 되살리는 것만이 인간을 노동의 강제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노동하는 동물은 또한 이성적 동물과도 근친관계이다. 이성의 활동 그 자체는 일종의 노동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래도 동물 이상의 존재인 것은 사색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색하는 능력을 통해서 인간은 지속적인 것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사색적 삶은 인간을 더욱 완전하게 만드는 삶의 형식이다. "사색적 삶 속에서 추구되는 진리의 사색은 곧 인간의 완성을 이루는 것과 같다." 모든 사색적 계기가 소실된다면, 삶은 일로,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행위로 퇴락하고만다. 사색하는 머무름은 _노동_으로서의 시간을 중단시킨다. "시간 속의 활동과 일, 그리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176페이지 이후)

노동의 민주화에 이어 한가로움의 민주화가 도래해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의 민주화가 만인의 노예화로 전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니체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181페이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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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모르텔 2019-01-23 0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가로움의 민주화,,공감합니다.

blueyonder 2019-07-05 14:23   좋아요 0 | URL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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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감탄하게 된다. 이런 책이 있다니!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의 깊이가 한량없다. 첫 절반인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동양 고전을 통해 풀어내고, 나머지 절반인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본인의 감옥 경험을 통해 나눈다. 아, 인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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