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리즈
김사업 지음 / 불광출판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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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이란 제목이 좀 잘못 붙여진 느낌이 든다. 이 책은 불교 신도들에게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눈높이에 맞추어 쉽게 설명하는 책이다. 물론 불교 교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되지만, 지속적으로 나오는 불교 용어들이 설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안 와 닿을 때가 있다. 


불교는 이 세상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식이 받아들이는 만큼만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철학적으로 매우 매력적이다. 흥미로운 인식론과 심리학 이론이기도 하다. 물론 종교이기도 하다. '말나식末那識'과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용어가 기억에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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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19 1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루 욘더님
추석 연휴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ʕ ̳• · • ̳ʔ
/ づ🌖 =͟͟͞͞🌖
해피 추석~

blueyonder 2021-09-20 10:11   좋아요 1 | URL
scott님 행복한 추석 연휴 보내시기 바래요~ 감사합니다! ^^
 















  인도에서 공사상을 선양해간 중관파의 시조 용수는 그의 저작 <인연심론석>에서 윤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윤회란 이전 생의 오온(정신과 육체)을 원인으로 하여 또 다른 오온이라는 결과가 생한다고 하는 태어남의 반복을 뜻하지만,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옮겨가는 것은 티끌만큼도 없다."

  인과관계에 의한 새로운 오온의 이어짐은 있으나, 아뜨만과 같이 다음 생으로 변함없이 영속하는 연속체는 없다는 말이다. (200 페이지)

  부파(=소승) 불교가 이상으로 하는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은 지혜에 의해 모든 번뇌를 끊은 결과, 육체와 정신이 완전히 소멸하여 이 세계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반면 대승불교는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을 이상으로 한다. 그것은 지혜에 의해 모든 번뇌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윤회의 세계에 있더라도 물들지 않고,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 세계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열반의 경지에도 집착하지 않는 그러한 열반이다. 단적으로 말해, 윤회와 열반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열반이다. (206~20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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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모든 것에 자성이 있다면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없이 일체는 항상 그대로 있게 된다. 따라서 자연의 변화라든가 눈앞에 펼쳐지는 생멸 현상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자성을 인정하게 되면 불교의 기본 교리인 무상無常도 부정되며, 중생은 아무리 수행을 해도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과오도 범한다. 자성인 고苦와 번뇌를 무슨 수로 없앨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용수는 『중론』 제24장 제14게송에서 이렇게 말한다. "공이 타당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타당하다. 공이 타당하지 않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타당하지 않다." (180~181 페이지)


자연의 변화는 자성이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인데, 논리적으로 볼 때 꼭 그렇지 않다는 생각.


  하지만 이 색즉시공의 길 끝에서 공즉시색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한순간에 저절로 이루어진다. 색즉시공은 대사일번大死一番, 즉 한번 내가 크게 죽는 길이다. 본인이 자진해서 움켜쥐고 있던 모든 것을 철저히 놓아버리는 것이며, 백지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철저하고 완전하게 죽는 것에 의해 도리어 모든 것이 참된 진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이것을 선에서는 절후소생絶後蘇生이라고 한다. 공즉시생은 절후소생에 해당한다. 

  중생인 우리는 색즉시공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공즉시색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과거의 내가 죽지 않고는 만물은 진실한 모습으로 되살아나지 못한다. (183 페이지)


종교는 모두 '내'가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에서도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나야(born again) 한다고 말한다. 배경이 되는 철학은 다르지만, 겉모습의 결론은 같다. 하지만 뉘앙스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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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 <죽지 않는 사람들>은 불사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로마 시대의 군단장이었던 주인공 마르코 플리미니오 루포는 불사의 강 하구에 있는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곳을 찾아 나선다. 갖은 고초 끝에 드디어 그는 강물을 마시고 불사의 인간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이집트의 불락 교외에서 <아라비안나이트>의 어떤 이야기를 필사했고, 사마르칸트 감옥 마당에서 수없이 장기를 두었으며, 보헤미아에서 점성학을 연구하며 수많은 생을 살게 된다(<알렙>, 민음사, 1996, 13~35쪽).

  불사의 삶을 찾고자 한 것은 진시황만은 아니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미라가 되어 거대한 피라미드 속에서 사후의 시간을 보내고자 했던 것도 잘 알다시피 불사와 영생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다. 영원성에 대한 플라톤의 철학적 꿈으로부터 레닌의 방부 처리된 시신까지 모두 이 불사의 삶에 대한 욕망의 산물이다. 영생이야 불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을 향하여 생명의 길이를 늘리는 것 또한 이런 욕망과 다르지 않음을 안다면, 수명을 연장하고 노화를 방지하려는 현대 과학자들의 집요한 노력 역시 '영생'이라는 '종교적' 단어와 공명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보르헤스가 말한 루포의 불사의 삶이란, 생각해보면 '윤회'라는 관념과 거의 비슷한 것이다. 불락에서 <아라비안나이트>를 필사하다 사마르칸트에 가고, 다시 보헤미아에 가서 점성학을 연구하는 완전히 다른 삶을 천 년 이상의 세월 동안 이어가는 것은 그 상이한 삶 사이에 '죽음'이라는 사건을 끼워 넣으면, 우리가 익히 아는 윤회하는 삶이 된다... 사실 윤회 안에서 죽음은 결코 삶의 중단을 뜻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죽음'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삶에서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변환의 문턱일 뿐이다... 보르헤스는 말한다. '죽음에 대한 관념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사실 불사의 존재'라고. 컴컴한 어둠 앞에서 느끼는 공포 때문에, '죽음'이란 두려운 관념 때문에 우리는 죽는 것이라고. (201~202 페이지)

... 윤회는 근본적인 죽음의 불가능성에 대한 교설이다. 거기 불사에 대한 욕망과 반대로 죽음의 불가능성 앞에서 출현하는 절망, 즉 죽어도 죽지 못하고, 죽고자 해도 죽을 수 없는 기이한 무능력에 대한 사유가 깃들어 있다. (203 페이지)

  '피안'이라는 말이 야기할 오해를 넘어서기 위해 피안 없는 차안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을 것을 가르치고, 윤회의 중단이란 말이 야기할 오해를 깨기 위해 윤회 없는 해탈이 아니라 윤회하는 삶 속에서 해탈할 것을 가르쳤던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전환은 분명 이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깨달음이란 번뇌 안에서 얻는 것이며 번뇌와 함께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부처란 중생과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중생 자신임을 설하는 것도 모두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공이란 물질이 없는 세계(무색계)에서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세계(색계) 그 자체 안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라는 개념 또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윤회하는 삶은 떠나야 할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장으로 긍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업이란 이름으로 주어진 것을 참고 견디라는 인고의 가르침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삶을 긍정할 만한 것으로 바꾸어가라는 가르침으로써 긍정된다. (212~21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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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 방정식'으로 불멸의 업적을 쌓은 에르빈 슈뢰딩거의 철학 에세이. '길을 찾아서'라는 이름이 붙은 1부는 1925년 가을, '무엇이 실재인가?'라는 이름의 2부는 1960년에 쓰였다. 이 두 기간 사이에 슈뢰딩거는 그의 이름이 붙은 방정식을 발표하고, 나치를 피해 영국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오랜 망명 생활을 했다.


같은 오스트리아인인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에 사형선고를 내렸음에도, 그는 시침 뚝 떼고 형이상학을 논한다. 사실 주요 주제인 의식과 자아의 문제가 꼭 형이상학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다. 수많은 난제에도 불구하고 이미 많은 부분은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와 있다. 철학으로 보든 과학으로 보든, 당시 뿐만 아니라 아직도 미해결의 문제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이 주제에 대해 슈뢰딩거는 그의 과학적, 신비적 통찰을 기반으로 의견을 피력한다. 그도 인정하듯이 이 주제에 대한 그의 논의는 논증에 기반한 것은 아니다. 비유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흥미로운 의견이자 통찰이지만 미완성의 느낌이 있다. 뒤의 해제를 붙인 장회익 교수의 말처럼, "진정한 보배"인지 "보배처럼 보이는 돌덩이"인지 판별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처럼 보인다. 어쨌든 슈뢰딩거의 이 짧은 철학 에세이 모음은 역사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매우 흥미로워 보인다[*].


이 에세이의 주요 주장은 별개로 보이는 자아, 의식이 사실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가 천착했다는 인도 철학(베단타 철학)의 영향이라고 한다. 삶은 죽음을 넘어 끝없이 이어지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는 내가 어제의 나와 하나의 의식인 것처럼, 나의 의식과 조상의 의식은 하나라는 것이다. 이에 더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이들의 의식도 역시 하나이다. 그가 얘기하는 이 '우주의 의식'이 감이 잡힐 것도 같고 아닐 것도 같다.


그는 1961년 1월, 73세의 나이로 고향인 비엔나에서 영면에 들었다. 그의 의식은 지금도 책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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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회익 교수는 다듬으면 보석이 나올 원석이라고 말한다.


  어떠한 자아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배후에는 물리적 사건들과 (그 특수 유형으로서) 지성적 사건들로 이루어진 무한한 사슬이 놓여 있다. 그 사슬의 하나의 마디인 자아는 그에 속하면서도 그에 역작용하면서 그 사슬을 연장시킨다. 자아는 자기 몸의, 특히 두뇌 체계의 지금 이 순간의 상태를 통해서, 그리고 교육과 전승을 통해서 조상들에게 일어난 사건들과 사슬로 연결된다. 그중에서 이러한 교육과 전승은 말, 글, 기념물, 관습, 생활방식, 새로 형성된 주변 환경에 의해 생겨난다. 이처럼 수천 개의 단어와 용어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모든 것을 통해 조상들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사슬과 연결된 자아는 단지 이 사슬의 산물이 아니다. 자아는 엄밀한 의미에서 이 사슬과 동일한 것이고 사슬의 엄밀하고 직접적인 연속이다. 이는 쉰 살의 자아가 마흔 살의 자아와 연속인 것과 같다.

  [...] 자아는 출생을 통해 비로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흡사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내게는 나의 희망과 분투, 공포와 근심이 내 이전에 살았던 수천 명의 사람들의 그것들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믿어도 좋으리라. 수천 년이 지난 후에라도 그보다 수천 년 전에, 즉 바로 지금, 내가 처음 기원한 일이 성취될 수 있다고. 내 안에서 움트는 모든 생각은 이전의 어느 조상이 가졌던 생각의 연속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러므로 실상 어떤 새로운 싹이 움트는 것이 아니라, 태고의 성스러운 생명수生命樹에 있던 어떤 싹이 예정대로 발현하는 것이다. (51~5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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