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벨리는 양자역학 코펜하겐 해석의 반실재론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관찰자가 관찰할 때 양자 계의 상태를 나타내는 파동함수의 붕괴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파동함수의 붕괴를 통해 가능한 여러 상태의 하나가 실현된다. 이 책에서 로벨리는 양자 계가 고립 상태를 벗어나 외부 계와 상호작용을 할 때 파동함수가 붕괴된다고 말한다. 즉, 파동함수의 붕괴에 필요한 것은 특별한 ‘관찰자’가 아니라 단 하나의 미시 입자여도 된다. 이런 식으로 로벨리는 관찰자라는 특수한 존재를 제거하여 물리학의 ‘객관성’을 복원하고자 한다. 관찰자라는 ‘인간’을 전제하지 않는 로벨리의 관계론적 해석은 코펜하겐 해석보다 좀 더 객관성을 띠는 것처럼 보이며, 실재의 ‘본성’에 접근하는 느낌을 준다.
이 해석의 문제는 이렇다. 상호작용(‘관계’)이 파동함수를 붕괴시키므로 A라는 양자 계가 B라는 입자와 상호작용을 하면 A의 파동함수는 붕괴한다. 하지만 아직 상호작용을 하지 않은 C라는 입자에게 A와 B가 결합된 양자 계의 파동함수는 붕괴하지 않았다. 책에 있는 예를 들어보자(내가 살짝 변형한 예이다). 로벨리 버전의 슈뢰딩거 고양이는 양자 계가 야기한 독극물 병의 깨짐/안 깨짐에 따라 죽어있거나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수면제 병의 깨짐/안 깨짐에 따라 잠들어있거나 깨어 있다. 자, 이제 내가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관찰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잠들어 있음을 확인했다고 해보자(수면제 + 고양이 양자 계의 파동함수 붕괴가 일어났다). 하지만 아직 고양이를 관찰하지 않은 내 친구에게는 수면제 + 고양이 + 나로 이루어진 양자 계의 파동함수 붕괴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다. 이 양자 계는 ‘수면제 병 깨짐/고양이 잠듦/내가 관찰함’과 ‘수면제 병 안 깨짐/고양이 깨어 있음/내가 관찰함’, 이 두 양자 상태가 중첩된 상태이다. 나에게는 파동함수가 붕괴하여 잠든 고양이 또는 깨어 있는 고양이 둘 중의 하나가 실현된 상황이지만, 내 친구에게는 아직 둘 다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친구에게 나는 두 명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로벨리가 얘기하는 관계론적 양자역학 해석은 극단적 반실재론이다. 로벨리의 설명을 옮겨본다.
대상 A의 속성이 대상 B에 대해서 실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꼭 대상 C에 대해서도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속성이 한 돌에 대해서는 실재할 수 있지만 다른 돌에 대해서는 실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죠. (103 페이지)
차라리 관찰자를 상정한 후 물리학은 자연과 관찰자의 상호작용을 기술한다는 코펜하겐 해석이 훨씬 더 성숙하다는 생각이 든다. 로벨리는 관찰자를 제거함으로써 좀 더 객관적인 양자역학을 만들고자 의도했지만 내겐 이러한 자연이 이상해 보인다. 사실 예전에는 로벨리의 해석이 그럴 듯하다고 여겼었는데, 다니엘손의 <세계 그 자체>를 읽은 후인 지금은, 물리학이 실재 자체를 다룬다는 착각에 로벨리가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사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그렇다. 모형을 다루면서 그 모형을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모형은 실재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모형이 실재는 아니다. 한물 간 것처럼 생각됐던 코펜하겐 해석이 심오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한다. 다음은 책에 인용된 보어의 글이다.
양자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에 대한 추상적인 설명만이 있을 뿐이다. 물리학의 임무가 자연이 어떤지 기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리학은 자연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다룰 뿐이다. (55 페이지)
스몰린은 로벨리와는 반대로, 완전히 실재론적인 해석을 밀고 나갔다. 아직 물리학자들 간에 합의는 없고, 나도 더 생각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