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병'이란 말이 이젠 너무 익숙한 그런 시간에 살고
있다.
'마음의 병'을 겉으로 내보이고 서로 위로를 받으면서 고쳐가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분노와 우울의 극단적 결과로 잔인한 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그런 시간에 살고 있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마음의 병은
분노로 표현된다. 마음을 지키지 못할 뿐 아니라 삶과 정신의 피폐까지 이어지는 그런 삶도 있다.
특정한 이도 아니고. 특정한 장소도 아닌 그저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간혹 보이는 현실이기도 하다.
빈틈없이 빡빡하고, 나도 모르게 경쟁의 시대로 등떠밀어지는
지독한 현실을 살아 갈수록, 언제부터인가 좋은 말보다는 짜증과 분노가 더 자주 나오는 나를 발견한다. 이것이 분명 마음이 다쳐서 표현하는 것중의
하나이겠지만 정작 본인은 마음이 다쳤다는 생각은 못할 경우가 많다.
먹고 살기 바쁜데 누가 마음까지 다독이냐..라는 생각이
앞서는것을 보면 이것조차, 즉 마음을 되돌아보는 것조차 사치라고 여기는 삶의 여유가 없는 탓일까?
누군가는 그런다. '마음을 다스리면 된다'고...
마음을 다치는 이들이 있지만, 마음을 다독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 양쪽의 선택길에서 나는 매번 결정을 주춤한다.
뭔가 어긋나는 느낌은 있는데, 해결을 하자니 그게 문제가
되는건가라는 생각이 들때도 있고,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이건 뭔가 아닌데라는 두려움같은..느낌도 있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
가장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자세이겠지만. 결코 쉽지는 않다.
머리로는 상황을 알면서도 깊이 박혀있는 마음의 상처를 결코
치유할 생각을 못한다. 아니 안한다.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굳이 내가 먼저
마음을 다스려야 하나?라는 원망의 마음이 우선시된다.
알고 있으면서 못하는 것, 안하는 것...아마 이 조차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일것이다.
그래도 나는 늘 해결을 찾고 싶어한다.
마음의 혼란함으로 원망의 말이 더 많아지는 나로서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을 찾고 싶다.
마음을 왜 다치는지. 왜 단단하게 잡지 못하는지를 알면서도 쉽게
용납할 수 없는 나와 내 내면의 갈등은 끝이 없다.
<다산의 마지막 공부>를 읽으면서 늘 노심초사하는 이
좁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다스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심경>
<다산의 마지막 공부>는 <심경>을
이야기한다.
다산 정약용, 퇴계 이황, 그리고 정조는 마지막까지 읽었다는
책이 <심경>이다.
중국 송 시대 학자인 진덕수가 편찬한 책으로
<심경>은 이름 그대로 ‘마음’에 대해 다룬 유교 경전이다. 중국 학자의 책이지만 오히려 조선의 선비들이 더 철저히 연구하고 이에
관한 저술을 더 많이 남겼다고 한다. 퇴계는 서른 무렵 이 책을 접한 다음 마지막 순간까지 매일 새벽마다 이 책을 읽었고, 다산 정약용은 방대한
학문체계를 정리하며 <심경>을 공부의 마지막 경지로 여겼다고 한다. 또한 조선의 국왕들은 <심경>을 통해 군주로서의
마음가짐을 잡는 책이었다고 하니 그 깊이가 정말 궁금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책은 제목처럼 다산의 이야기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심경>에 대한 연구이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을 대표하는, 조선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런 다산이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이 바로 <심경>이고, '유교 경전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심경>이기에
당대 학자가 그 속에서 찾았을 그 무엇을 독자들 역시 함께 찾아보는 묘미도 기대해본다.
퇴계와 다산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학문의 마지막 과정으로
이 책, 즉 '마음'을 선택했을까?
학문을 연구하는 이들이 왜 마직막에는 마음에 중점을
두었을까?
마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얘기를 저자가 이렇게 말한다.
...(중략)... 잃어버렸다는 것은 곧 자아를 상실한 것과
같다. 마음은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중략)...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잃고 상처를 받았기에 사람들은 작은 일에도 분노한다. 그리고 분노를 절제하지 못한다. 또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지만 가져도, 갖지 못해도 만족하지 못한다.
...(중략)... 무엇보다도 힘이 드는 것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결핍이다. 외로운 것이다... (중략)
저자는 정약용이 최악의 고난에 처했을 때 마음을 다스렸다는
<심경>에 주목을 했다. 마음을 잃어버린 시대에 정말 마음을 채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고 한다.
나는 저자처럼 큰 그림이 아니더라도 살아가는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놓치고 있는 마음의 무게를 찾고 싶었다.
그것이 상처이든, 외로움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내 속이 든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도 나에게는 눈엣가시로 보이고, 상처로 보이고 미움과 원망의 독설을 내뱉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상처라는 것은 오롯이 나만의 책임은 아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는 이는 오히려 나보다 더 좁은 세상의 삶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렇겠지라는 나에게 위로를 해본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었다.
약동 석천(若冬涉川) 당당함은 삼가고 반추하는 데에서
나온다.
거피취차(去彼 取此) 이상에 취하지 말고 일상에 몰두하라
전미개오(轉迷開梧) 껍질에 갇히지 말고 스스로의 중심을
세워라
나를 당당하게 여기고, 나를 직시하고, 나 자신을 믿는 것...
이렇게 해석해보면 될까?
[다산의 마지막 공부]를 순서대로 읽을 이유는 없겠다. 매번
번복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에 따라 끌리는 구절부터 읽어가도 충분하다.
누구든 나만의 자존감이 있고 당당함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저런 삶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의 당당함은 언제부터인가 소심함으로 바뀔 때가 있었고, 자신감 있던 삶은 위축된 모습으로 남겨질 때가
있다. 나는 분명 어른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때론 아이들보다 더 유치함을 주장할 때가 있고, 나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소심의 극치를
우길때도 많다.
나만의 소신대로 분명 잘 살고 있다고 큰소리 치지만, 매번
우왕자왕하는 마음속을 헤매는 것 역시 나이기 때문에 왜 이런 갈등속에서 매번 힘들어야 하는지 나 스스로를 보고 싶었다.
조금만 더... 의 중심이 단단하다면 삶의 어지러움 속에서
그래도 꿋꿋한 나의 중심을 더 다잡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큰 것을 따르면 대인이 되고. 작은 것을 따르면 소인이 된다는
맹자의 가르침처럼 큰 것 즉, 마음이 시켜서 하는 것은 눈과 귀를 통해 보는 작은 것보다는 훨씬 큰 결과를 얻는다는 고전 속의 가르침을 이 책을
통해서 읽어보게 된다.
마음은 하늘이 준 기관의 가운데 빈 곳에 머무르면서 외관을
다스린다고 한다. 정약용은 마음을 수양하고 학문에 증진하는 것을 대체라 했고, 대체를 따르기 위한 방법으로는 경전, 즉 인문학 공부를 통해 덕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질문과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생각을 거듭하고 사람과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는 것. 이것은 삶의 의미를 깨닫고 바른
가치관을 확립하는 것이다.
공부와 생각을 통해 덕을 쌓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중심을 잡아가는
어른의 모습이다. 많이 아는 것이 아닌 배운 것을 깊이 고민함으로써 작은 욕망과 세상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한다
마음을 안다는 것은, 즉 마음을 공부한다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 간단함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는 이 답을 너무 먼 곳에서 찾는 것 아닐까? 정리가
잘 된 글 속에서만 찾으려고 해서 그런 것 아닐까?
한동안 유심히 들었던 어느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모든 것은 평범함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고, 그 모든 것은 평범한 나에게서 일어나는 생각과 행동으로 인한 것이었다.
내가 느꼈던 이 결과가 대단한 것은 아니겠지만 [다산의 마지막
공부]를 읽으면서 같은 맥락이라는 느낌을 가져본다.
성현들이 남긴 글과 그들의 행적, 또는 그에 대한 토론이 이
책에서 쉽게 읽을 수 있다. 시대를 아우르는 성현들 역시 삶과 사람 그리고 마음에 대해 늘 고민하고, 그에 대한 실천을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겼다.
저자는 수많은 고전에서 마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쉽게
풀어준다.
하늘이 사람들에게 준 것 중에 가장 공평한 것이 시간이다. 어떤
부유한 사람도,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살마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없다. 아무리 비천한 사람도,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시간 중에서 오직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오늘, 현재뿐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우리 것이라 할 수 없다. 미래 역시 아직 오지 않았다. 마치 외상처럼 당겨쓸 수도 없으니 역시 우리 것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우리의 것인 오늘에 충실해야 한다. 바로 오늘, '내면의 성실함'을 채워가야 하는 것이다.
맞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 속에서의 삶도 한정되어
있다.
그냥 이렇게 살아가도 무방하지만. 이왕 사는 삶 좀 더 생각을
깊이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싶다는 독자들이라면, 그의 삶은 아주 평범함보다는 조금 더 깊이를 갖춘, 진득함을 가진 그런 삶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이 책을 읽기 전 좁은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했다.
어찌 보면 [다산의 마지막 공부]에 서술된 마음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당연시되는, 이를테면 이론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예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왜 마음에 대해 언급을 하고, 성현들의 실천을
언급할까?
그렇다.
실천을 하기 위해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머리고 읽고
마음으로 움직이는 과정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 우리의 것이다. 그
마음을 붙잡는 것도 나 자신이며 잃어버리는 것도 바로 나인 것이다. 잃어버리기는 쉽지만 설사 잃었다고 해도 다시 찾아오면 된다. 옛 선비들이
했듯이 치열한 공부와 수양은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단지 마음을 두드리는 글을 잃으며 작은 깨우침을 하루하루 쌓아간다면,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있었던 마음이 나도 모르게 되돌아올 것이다
어떤 면으로 본다면 [다산의 마지막 공부]는 조금 어려운
책이다.
어려운 고전의 문장도 그렇고, 수많은 등장인물과 그들의
에피소드도 간략하게 언급되긴 하지만, 그 깊은 의미를 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저자가 풀어놓는 덕에 알지 못했을 고전의 묘미와 그 생각을
접하게 된다.
사실 마음공부에 핵심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워왔던 모든 것과
동일하다. 너무 간단하고 당연한 결론을 유추하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는 잠시 당황스럽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문장이 있다.
"마음은 내 것이지만 평생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라는
깨달음이다.
마음을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조절할 줄 알았다면 고민할
일이 있을까? 분노할 일이 있을까?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할 일이 있을까?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늘 씩씩하고 자신만만하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우리를 직접 경험하고
살아간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삶, 조금 더 깊이가 있는 나의 삶을
찾기 위함이라면 [다산의 마지막 공부]를 편안하게 읽어보길 권한다.
결코 급하게 읽을 필요도 없고, 문득문득 떠오를 때 한 문장씩
읽어가는 재미도 충분한 그런 책이다.
고전이 어려운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속의 깊은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함도 당연하다.
비록 눈에 보이는, 쉽게 알아듣는 문장만 보인다 하더라도 옆에
두고 잠시 손이 스칠 때 읽어보기 좋은 책이라고 생각이 든다.
마음을 잡는 것.
마음을 알아가는 것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
<심경>을 읽으면서 성현들은, 그리고 저자는 또 다른
결론을 얻었겠지만. 이 시점에서 나는 나의 마음을 들여다봤다는 것에 만족을 하고 싶다.
아니라고 감추고, 상처를 아닌 척 덮어두려던 마음에게 그래도
수고했다고. 지금 잘하고 있다고 나를, 나의 마음을 돌아봐주는 것.
이것이 지금 이 시간 [다산의 마지막 공부]를 읽고 난 후의
나의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