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 Once Upon a Time in America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위대한 예술작품을 보고 나면 한없이 숙연해지다가 갑작스레 카타르시스가 휘몰아치는 순간이 있다.

가끔 베토벤의 음악을 듣듯, 고호의 그림을 보듯, 도스토예프스키 책을 읽듯, 그런 영화들이 있다.

아주 가끔 찾아오는 순간이지만 그 순간은 너무나도 황홀해서 장엄해지기 까지 한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대학시절 선배 연구실에 가면 24시간 무한반복으로 이 영화의 ost가 흘러나오곤 했다.

영화 동아리 회장직을 넘겨주며 후배들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하나 남겼는데,

그게 또 바로 이 영화의 대형 포스터 판넬이었다.

작년에 우연히 가게된 엔니오 모리꼬네 콘서트에 입장하자 막 연주하고 있었던 음악도 바로 이 영화의 ost.

 

이 영화는 보고 나면 예의 하는, '재미있다' '잘만들었다' 뭐 이런 말보다는, 그냥 '좋다' 혹은 '침묵'이 더 어울릴법한 영화다.

 

처음으로 이 영화를 제대로 된 복원판 필름 프린트로 스크린에서 227분짜리 버전으로 보고 나니 든 생각은.

그동안 이 영화의 반도 못봤구나...

자고로 영화는 극장에서, 더군다가 이런 마스터피스는 꼭 극장에서 봐야한다.

VHS는 말할것고 없고, DVD나 BLUE-RAY로는 이 섬세한 필름영화의 질감은 절대 느낄수 없는 법이다.

특히, 세르지오 레오네처럼 화면비가 시네마스쿠프일 경우는 더더욱 그렇고 말이다.

 

이 영화는 4시간여에 걸쳐 숨한번 쉬지 않고 경탄하며 관객들과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종교의식처럼 경배하며 찬미하며 관람해야만 제대로 본 것이다.

아니, 평생을 두고두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여러번 봐야 할 영화라고나 해두자.

 

30대 중반 이 힘든 시절에 본 이 영화의 감상의 결은 '권력과 사랑'으로 모아졌다.

첫사랑 데보라를 향한 누들스의 여정이 이 영화의 전부인 것이다.

어리지만 당찬 데보라는 첫 만남부터 누들스에게 '권력을 가질것'을 종용한다.

 

'난 당신이 맘에 들지만, 내가 찾던 그런 남자가 못 될것 같네요. 자신을 한번 둘러보시죠?'

 

누들스는 어쨋든 데보라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인생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신념에 대한 순수를 지킨다.

하지만 이 모든게 죽마고우 맥스와의 만남으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맥스는 누들스를 번번히 데보라에게서 훔쳐내어 갱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러다. 누들스는 친구에게 버림받고, 애인까지 뺏기고 쓸쓸히 살아가는 인생을 살게 된다.

 

왜 누들스의 인생은 이토록 잔인했던 것일까.

 

 

영화 초반에 누들스가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아지트로 활용하는 화장실에서 몰래 보는 책이 나온다.

바로, 사회주의 소설가 잭런던의 '마틴 에덴' 이다. 이 책의 내용은 빈민층의 남자가 상류층의 여자를 사랑해서 그 여자를 갖기 위해 소설가로 성공하려는 잭 런던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권력을 가지려 한다' 바로 이 영화의 전체 플롯이자 테마를 소설로 보여준다.

 과연 누들스는 데보라를 가질수 있을까?...

 



 

누들스는 친구 뚱보의 레스토랑 창고에서 발레 연습을 하는 데보라를 몰래 훔쳐본다.

데보라는 '곡물창고'에서 '축음기'를 틀고 '발레'를 하고 있다.

누들스는 화장실 구멍으로 몰래 훔쳐볼수 밖에 없다.

데보라도 그런 누들스의 시선을 즐기며 슬쩍 미소를 보내고, 나신을 보여주기 까지 한다.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이자 수많은 남성들을 눈물짓게 한 제니퍼 코넬리의 환상적인 자태가 보여진다.

 



 

하지만 누들스는 데보라에게 바퀴벌레 취급을 받는다.

'넌 더럽고, 역겨워. 화장실 벽이나 기어다니는 바퀴벌레쯤 되는거지. 너가 뭐라고 생각해? 니 꼴이나 보셔!'

좋다고 은근슬쩍 보여줄뗀 언제고, 바로 튕기는 이 팜므파탈 데보라 같으니.

근데 이런 여자 너무 멋지다...흑.

 



 

이 영화에선 그래서 그런지 유난히 일명 거울씬이 많이 보인다.

라깡의 거울단계까진 가진 않더라도, 거울을 보며 내가 뭘까? 내가 왜 이렇게 살까?

뭐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감정을 보여주는데 아주 그만인 씬이다.

영화 초반에 금고에 돈이 없자 뉴욕을 떠나려다 거울을 향해 걸어간다.

거울에 비친 누들스는 백발의 노인이다. (최고의 명 트랜지션 중 하나.)

이 영화 전체가 누들스 자신의 인생. 혹 미국이라는 나라를 만들어낸 경제부흥기의 주역인 한 인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하여간. 데보라에게 한방 맞은 누들스는 거울을 보며 우울해 한다. 친구들은 뻐기느라 바쁜데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데보라를 가지기 위해선 어떤 내가 되어야 할까?

이제 범죄의 세계로 슬슬 빠져들어간다. 이민자 출신 빈민인 그의 성공은 이길밖엔 없었으니까 말이다.

 



 

이제 슬슬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어깨에 힘 좀 주게 된 누들스는 용기를 내어 당당히 데보라 앞에 섭니다.

데보라는 남들 다 교회가는 감사절에 뭐하냐며 그분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며 자리에 앉히고 성경문구를 읽어줍니다.

바로 연인들의 성서파트. 아가서 죠.

아가서 4장 1절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아가서 4장 3절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데보라의 은근슬쩍 고백에 누들스는 한껏 들뜬다.

허나, 바로 데보라의 한방 "작년 12월 이후로 씻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제부턴 데보라의 고백, 혹은 데보라의 시가 이어진다.

"그의 눈은 비둘기 같고, 그의 몸은 환한 아이보리 같고, 그의 다리는 대리석 조각같고,



 

그러다 다시한방을 날린다.

"팬티는 더러워서 난리가 나있지만 말이다"



 

다시 감동의 싯구. "허나 그는 사랑스럽구나"



 

다시 한방. "그렇지만, 그는 양아치일뿐,그는 내 사랑이 될수 없으니 안타깝구나"



 

데보라는 누들스에게 '넌 참 멋져. 아마 널 사랑하는 거 같아. 하지만 내 짝이 되기엔 아직 부족해. 분발해라'라는 고백을 한거다. 이런 고백을 받은 어떤 남자가 그 말을 듣지 않으리...

게다가 키스가 이어지는데 말이다... 코넬리 넘 멋져... 흑...

 



 

하지만, 친구인 맥스가 판을 깬다. 어찌할줄 몰라하는 누들스.

역시 강한 데보라. "가봐. 니 엄마가 부르잖니" 타고난 팜프파탈이다!



 

결국, 누들스와 맥스는 동네 양아치패들에게 한방 당한다다. 이제 당했으니 갚아주러 가야지.

사랑이냐? 폭력이냐? 혹은 데보라냐? 맥스냐? 혹은 여자냐? 우정이냐? 뭐 이런 갈림길에 선다...



 

금방 올게... 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얻어터진 누들스는 데보라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사정한다.

허나 데보라는 눈물을 참으려 문을 굳게 닫는다. 거봐,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데, 맘 돌아서면 끝이야.

어설픈놈!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스틸컷. 포스터 이미지로도 쓰였다.

누들스는 맥스와 함께 비즈니스를 하며 제법 어깨에 힘주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 동네 갱들에게 막내가 당한다.



 

막내는 누들스에게 한마디 남긴다. ' 나 미끌어진거 같아'

가장 힘이 없고, 작고, 어렸던 막내는 차마 도망갈수 없어서 죽음을 맞이 한 것이다.

이 세상의 생리가, 아니 특히 이 갱들의 세계는 무자비한 곳이다.

누들스의 인생이 앞으로 이렇듯 미끌어질거라는 묘한 암시를 주고 죽어간다...



 

결국, 누들스는 복수를 하고 빵에 간다. 친구들을 남긴채.



 

 

빵에가서 살다온 누들스는 금주법 시대에 한몫 잡고 있는 친구들에게 돌아간다.

나오자 마자 맥스는 응축을 풀게 해준다. 여자한테 거기 잡히면 끝이라니까...



 

친구들은 뚱보의 레스토랑 한편에 비밀 바를 차려놓고 대박을 내고 있었다.

왼쪽에 렘피카의 그림이 보이는가?

열정과 관능의 팜므파탈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렘피카가 1930년대 초반에 주목받기 시작한 작가였으니 고증에 충실했다라고 볼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의도적으로 대마이에 툭하고 그림을 미장센으로 활용하고 있다.

열정의 화가. 렘피카. 상류층 여성들을 독특한 화법으로 그려낸 그녀는 관음증, 그룹섹스, 동성애등 파격적인 소재를 그려내 유명해진 그녀는,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지만 항상 망명자로서 불안과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암울한 어둠이 있던 화가였다.

맥스의 삶이 앞으로 그러할 것이고, 이들 모두 그런 상류층을 꿈꾼다는 걸 아주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드디어 데보라와의 재회.

그런데 이번엔 데보라 뒤 그림을 '아담과 이브'를 걸어놨다.

아담인 누들스는 이브인 데보라의 유혹에 넘어가 사과를 따 올것인가?

데보라는 여전히 차갑고 뜨거운 팜므파탈이지만, 뭔지 모를 거리감이 있다.

아마도 세상의 때가 덜묻은 누들스는 여전히 순진한  소년이고, 데보라는 조금은 타락한 성녀가 아닐까?



 

어린소녀역의 제니퍼 코넬리의 환상적인 외모와 표정에 못미치는 성인역의 데보라는 늘 실망이다.

이렇게 크면 안되잖아...

어린 데보라의 눈빛이 있지만 뭔가 세상에 찌든 여인이 되어 있는듯 하다. 절묘한 캐스팅이다.

이번에도 맥스가 누들스를 부르자 "가봐, 엄마가 부르잖니" 라며 예전 대사를 쳐추시는 센스를 보인다.



 



이리하여 누들스는 다시 출소첫날 범죄의 세계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다.

조 페시 형님 깜짝 출연하신다.

다이아 훔치러 가서 맥스는 주인의 아낙을 범한다.

데보라와 전혀 다른 창녀같은 그녀에게 말이다. 누들스는 데보라의 순수를 차마 범할수 없어 이렇게 푸는건가.

점점 누들스의 사랑이 꼬여만 간다.

 



 

여기서 참 묘한 시선이 등장한다. 당한 이 여인네는 뭔가 아픔보다는 환희에 찬 얼굴을 하고 있다.

레오네의 모든 작품에서 여성들은 항상 이렇게 남성들에게 당하고 약간은 그걸 즐기고 있다.

레오네는 분명 여성에게 된통 차인 아픈 사랑의 상처가 있을거다.

이런식으로 밖에 풀지 못하는 남성들을 줄곧 그리니말이다



 

경찰청장이 나와 노조 시위진압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한마디 던진다.

"에, 그건 과잉진압이 아닙니다.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조치를 취한것이죠..."

1930년대 미국이나 지금 이땅이나 권력자들의 꼼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리 변함이 없을지...



 

그리하야, 이들은 4녀 끝에 득남해 좋아라하는 경찰청장의 아들을 바꿔치기 하는 테러를 저지른다.

어청수에게 이 방법 하실분 누구 하실분 없나?

근데 독특한 씬연출이다. 온 세트와 의상과 소품을 화이트로 도배를 했다.

1930년대라고 하기엔 뭔가 포스트포더니즘 스럽지 않은가?

아주 유쾌하고 빠른 템포에 게다가 음악은 베토벤이다. 바로 그 유명한.... 

그렇다. 아마 큐브릭의 '클락웍 오렌지'에 대한 오마주 가 아닐까 싶다.  



 

이런 극단적인 직부감 샷은 레오네 영화에서 아마 이 샷이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싶다. 큐브릭에게 경배를~



 

이들의 소굴에 아까 그 당한 여인네가 고급 창녀로 들어온다.

그래놓곤 맥스에게 꼬리를 친다.

이 여인네의 캐릭터는 아주 단순한 창녀캐릭터로 데보라의 성녀캐릭터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허나 마지막엔 아주 극단으로 반전을 주지만 말이다.


 


 






누들스는 데보라를 화려한 레스토랑에 데려간다.

어디서 많이 본 씬 아닌가? 그렇다.

김유진 감독의 '약속'에서 박신양이 전도연을 레스토랑에 데려가면서 이렇게 전 테이블을 예약해 구애를 했다.

레오네가 그의 영화에서 꾸준히 말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비극성이 단적으로 보여지는 씬이 아닌가 한다.

누들스는 갱스터로 성공도 했고, 이젠 이렇게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려서 데이트를 할 만큼 성공한 권력자다.

그토록 원했던 누들스의 첫사랑이자 순수와 구원의 여신 데보라는 과연 넘어갈 것인가?

 



 

누들스는 이렇게 궁전같은 레스토랑 앞 화려한 해변가에 양탄자를 깔아놓고 샴페인을 마시며 구애를 한다.

이미 세상을 더 알아버린 데보라는 어릴쩍 꾸질꾸질했던 뒷동네 양아치 누들스가 이정도 성공한 것만으로 만족할수 있을까?



 

여기서 감동적인 프로포즈 씬이 시작된다.

"빵에서 매일밤 성경을 읽으며 당신 생각을 했었지"

데보라는 역시 누들스의 성모 마리아였던 게다.



 

눈물나는 프로포즈가 시작딘다

어릴적 데보라가 누들스에게 고백했던 바로 그 '아가서'를 인용하면서 누들스가 데보라에 대한 맘을 고백한다.

 

(아가서 7장2절)
[너의 배꼽은, 섞은 술(개역:포도주)이 고여 있는 둥근 잔 같구나

 



 

(아가서 7장 2절)

[너의 허리는 나리꽃을 두른 밀단 같구나]



 

(아가서 7장 8절)

[그대의 가슴은 포도 송이,]

 




(아가서 7장8절)
[그대의 코에서 풍기는 향내는 능금 냄새]

 



 

"이 모든게 내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고 있지?"

싯구를 통해서 사랑을 고백하고 고백하는 이 둘의 사랑은 참 안쓰러우면서도 짜릿하다.

게다가 성경문구로 표현하다니. 아, 성경문구가 작업의 수단이 될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고마운 작품...

감독은 누들스를 끝까지 비열한 권력게임을 거부하는 순수를 간직한 남자로 그려낸다.

후에 맥스를 경찰에 고발하면서 까지 구원을 찾는 인간이 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데보라의 거절. "전 헐리우드에 갈거에요. 건달 싸모로 만족할순 없는걸요. 알잖아요"

아,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사랑에서 시작하는게 아니라 이별에서 시작하는 법.

이제 이 둘의 안타까운 사랑은 파멸로 향해가려는가?


 


 






여성들이여, 사랑에 거절당한 남자의 고통을 아는가?

누들스의 구원의 여신인 데보라와 이렇게 파멸을 맞는다.

'너의 맘을 가질수 없으면 너의 몸이라도 갖겠어!'

이 심정은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행해본, 혹은 행하고픈 충동을 느끼는 감정이다.

레오네의 영화에서 유난히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이 자주 등장한다. 아마 거의 모든 영화에서 일것이다.

페미니스트 평론가들에게서 지탄을 받는 이유이기도 한데.

레오네의 영화에 나오는 모든 주인공들은 여성들에 대한 폭력적인 구애로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을 풀고 있다.

[석양의 건맨]에서 나오는 회중시계속 옛 연인의 배신도 그러하고,

[원스어폰어타임인더웨스트]에서 유혹하는 여인은 '전 목욕물만 있으면 어디든 좋아요'라 한다.

아마도 레오네 자신은 사랑에 대한 아주 깊은 배신 혹은 상처로 인해 여성에 대한 동경과 애증이 가득한 삶을 살았음이 분명하다. 



 

이 씬에 대해 찬성하지는 않지만, 십몇년간 빵에서 데보라만 그리며 살았던 누들스에게 이 거절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 씬의 감정에는 동의한다.

관객이 불편해 할만한 장면연출을 하면서도 그 감정에 푹 빠져서 수긍하게 만드는 그 절묘한 선타기란....



 

맥스는 누들스에게 여자에게 빠지면 비스니스에 방해되니 정신차리라 호통을 친다.

정작 자신은 교황이 앉던 의자(맥스 뒤에 보이는 화려한 의자다)에 앉아 권력에 대한 꿈을 꾸면서 말이다.

누들스도 질수 없다.

"너도 캐롤이랑 살면서 내게 그런말 할 형편이 되냐" 그러자 맥스는 이 여자에게 갖은 욕설을 하며 내보낸다.

큰 건 하자는 맥스의 제안에 누들스는 "편히 해변에서 쉬고싶네"라며 나가 버린다.



 

이렇게 이둘은 마이애미 해변에서 망중한을 보낸다.

헌데 난리가 났다. 바로 금주법이 풀린것. 이제 이들의 사업은 끝장이다.

맥스와 누들스에게 달려드는 여성들의 자세연출을 보라.

아, 역시 남자는 권력이 있어야 ...



 

맥스가 엄청난 건을 터드리려고 하자 이 여자는 누들스에게 검은 제안을 한다.

"맥스를 죽이기 싫으면 경찰에 고발해요. 빵에 가더라도 사는게 낳잖아요..."

캐롤은 영화내내 누들스와 앙숙이었다. "이번만 같은 편이 되어봐요. 뒤엔 다시 앙숙으로 돌아가죠"

섣불리 결정을 못하는 누들스를 몰아치는 캐롤의 연기가 발군이다.

친구 맥스를 경찰에 고발하는게 누들스에겐 친구를 선의 길로 인도하는 지저스가 되는건가?

아니면, 누들스는 혈육같고 아버지같던 동지를 팔아먹는 유다가 되는 건가?

누들스에게 연인을 고발하라고 설득하는 캐롤은 성모 마리아 인건가?

아니면 또 하나의 함정을 파고 누들스를 끌어들이는 악녀 마리아 인건가?

이렇듯 레오네의 캐릭터들은 시시때때로 선과 악의 묘한 경계에서 고뇌하곤 한다.

물론, 관객도 선뜻 절대악, 절대선에 대한 판단을 내릴수가 없다.

그저 인간은 상황에 따라 선하기도, 악하기도 하다는 것뿐...

 



 

이렇게 금주법을 애도하는 금주법 장례식을 치룬다.

이제 경제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금주법을 만들고, 갱들과 연합해 떼돈을 벌어 미국의 경제부흥을 일으킨 시대가 끝나가는 것이다.

물론 맥스와 누들스를 비롯한 이 "옛날옛적미국갱들"의 시대도 끝나는 것이고 말이다.

이 날, 이 친구들은 남은 술을 처분하기 위해 마지막 선적을 하기로 했고, 누들스는 그걸 경찰에 제보한다.

이들 친구들간의 우정도 이날로 장례식을 치루는 것이다.

아니러니하게도 여기에 국화를 건네는 이 짝눈과 눈썹 이 둘만 죽음을 맞게 된다. 이날 밤에 말이다.

그것도 친구인 누들스의 제보와 보스인 맥스의 음모로 말이다.

레오네는 참 이런 다중적인, 혹은 아주아주 섬세한 디테일을 4시간에 걸친 러닝타임 내내 선보인다.

쩝. 할말이 없는 거장이다.

아마 봉테일도 분명 무릎꿇고 울고 갈거다.



 

맥스는 이렇듯 이 둘 친구와 누들스를 바라보며 알듯 모를듯한 표정을 짓는다.

저 뒤에 렘피카 그림 역시 이번에도 확 눈에 띄게 보여준다.

열정과 관능의 여인이지만 냉정하고 비정한 여인.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성녀이자 창녀인.

데보라와 캐롤도 있지만, 누들스에게 진짜 연인은 바로 이 맥스다.

그 핵심엔 맥스가 있다.  가슴에 꽂힌 국화꽃 또한 맥스가 오늘 서류상 죽는 날이 될꺼라는 디테일.



 

그리하야, 자 다시 이 영화의 오프닝으로 돌아가보자.

아편굴에서 마약을 하는 누들스의 귀에 전화벨이 줄기차게 울리고,

그 벨은 이 장례식 파티장으로 울리고,

누군가 전화를 드는 걸로 울리고,

마침내 경찰서에서 울리는 걸로 맺는다.

관객들은 도대체 저 전화가 뭐야? 라는 호기심과 궁금함을 가지고 이야기에 빠지게 되고,

3시간 30분을 기다려서 아. 이게 누들스가 맥스 제보하는 전화였구나. 라는 해답을 얻게한다.

참 과감한 플래쉬백 편집법이다.

어쨋든, 시체발견현장에서 누들스는 불에 타버린 맥스를 보고, 아 저게 맥스가 아니구나 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노인이 된 현재의 누들스가 도대체 맥스는 어디간거야 라는 추적의 플롯 또한 힘을 받게 된다.

 

굴러굴러 찾아간 맥스는 노인요양소에서 할망구가 된 캐롤을 만난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볼보며 쓸쓸히 살아가는 캐롤. 그녀 역시 창녀로 나왔지만 성녀의 인생을 살고 있는것.

그런데 병원 창립자 사진 중앙에 떡하니 '데보라'가 보인다.

데보라는 그렇게 누들스에게 사진속 프레임의 추억으로 존재하는, 가질수 없는 그런 이미지일 것이다.

 



 

노인이 된 누들스는 데보라를 찾아간다.

브로드웨이에서 스타가 된 데보라가 분장을 지우고 있다.

이 둘 사이에 멀리 떨어진 거리를 보라. 그 사이엔 거울과 의자가 떡하니 가로 막고 있다.

조명은 또한 데보라를 향해 비추고 있다.

뭔가 진실을 밝히고 싶은 누들스의 심정을 전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데보라의 뒤에 보이는 포스터 보이는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다.

'나이도 그녀를 어쩔수 없었네' 라는 홍보문구.

황금과 젊음에 대한 욕망속에서 살다가 결국엔 파멸하는 클레오파트라의 비극적인 삶이 바로

데보라의 삶. 혹은 물질 자본주의를 탐하며 평생을 살아가는 미국시민들의 안타까운 운명일 것이다.

 



 

데보라는 묵묵히 분장을 지운다.

가면을 쓰고 평생을 살아왔던 인생을 지우듯.

누들스에 대한 죄책감을 벗어가듯,

광대가 되어 대중들의 인기를 먹고 살았던 인생을 후회하듯,

데보라는 누들스에게 "추억은 추억으로 남기자"라고 한다.

누들스는 진실을 원한다. "도대체 내게 초대장을 왜 보냈지?"

"왜 맥스의 애인이라는 걸 말 안하는거냐구!"

누들스는 그렇게 배신을 당했으면서도 데보라에 대한 순수를 믿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내게 왜 그깟 사실 하나 이야기 못하는거니?'

'날 생각한다면, 진실을 말해줘야 하는거 아니니?'

캐롤이 누들스에게 맥스의 제보를 하라고 했듯,

데보라는 누들스에게 맥스를 만나지 말라고 설득한다.

데보라는 친구의 소중한 우정과 애잔한 추억을 지키고픈 성녀인가?

아니면, 친구의 애인이 된 자신에 대한 변명과 애인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지키려는 창녀인가?

누들스에게 구원의 천사였고, 순수의 표상이었던 성녀 데보라는 이렇게 비참한 말로를 살고 있다.

최고의 스타가 되었고, 최고 권력자의 여인이 되었지만 데보라는 웃음과 몸을 팔고 살았던 창녀가 된 것이다.

 



 

"나도 이제 늙었다구요. 어쩔수 없잖아요. 젖과 꿀이 흐르는 곳에 안착할수 밖엔 없었다구요"

누들스에게 던지는 이 대사는 과연 진실인가. 아니면 이 또한 변명일 뿐인가.



 

그토록 말렸건만 누들스는 파티장에 온다. 놀란 데보라의 표정.

이전에 맥스가 교황의 의자에 앉았던 걸 기억한다면, 이 씬에서 주교가 내왕하는 이 신의 미장센 또한 이해가갈터. 황금으로 치장된 인테리어며, 수많은 천사와 성자 조각상들, 게다가 주교까지 아부하러 오는 그런 교황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오른편엔 휘장을 두른 장교가 서있다.

종교과 군대를 등에 업고 스타 데보라를 가운데 둔. 바로 미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보여주는 미장센이다.

 



 

맥스와 누들스는 이렇게 참으로 안쓰러운 해후를 한다.

그냥 만나지 말았으면 좋을것을...

맥스는 누들스의 여인인 데보라를 가졌고, 친구들을 배신하고, 아니 누들스를 이용해서 새 신분을 얻어

정치권력의 정점까지 올라가 이렇게 화려한 황금으로 둘러싼 노년을 맞고 있다.

누들스는 친구들을 배신하고 죽였다는 죄책감에 여생을 고통속에 보냈고, 유일한 사랑 데보라를 놓쳤다는 아픔에 눈물속에서 살았다.

"나를 죽여주게"

"그럴순 없네. 우린 참 많은 나쁜짓을 했지. 살인강도방화강간.

 우리에게 의뢰한 많은 이들이 있었지. 어떤건 했지만 우리가 해서는 안되는 일은 하지 않았어.

 너가 건드린건 우리가 절대 손대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었어."

이민자 이탈리언 갱들을 통해 경제부흥을 했고, 그들을 배신하고 소탕하며 그 부를 독점했고,

노조와 손 잡고 정치권력을 얻어 갖은 권모술수로 민중들의 피를 빼먹으며 이렇게 황금궁전에 사는것.

그건 우리가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는 누들스의 회환어린 고백.   



 

끝내 맥스는 누들스에게 용서받지 못한채, 죄책감을 덜지 못한채

쓰레기 차속에 몸을 던진다.

영화초반에 누들스가 경찰에 도망가면서 지나가던 마차에 몸을 숨겼던 씬과 묘하게 피드백되는 씬이다.

화려한 파티를 뒤로한채, 자신의 비리가 까발려져 정치생명이 끝나는건 견딜수 없기에

그렇게 맥스는 쓸쓸한 인생을 정리해 버린다.



 

맥스가 실린 쓰레기차가 지나나고 나서,

흥청망청 술과 마약을 하며 노니는 젊은이들이 무심하게 지나간다.

미국을 만들었던 선조들의 시대가 가고 그 풍요를 이어받은 새 시대가 다가오는 것이다.

이 젊은이들에겐  황홀하고 즐거운 파티이겠지만, 그걸 바라보는 관객은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안에 분명 또다른 누들스와 맥스, 데보라와 캐롤이 있을거구, 이들의 말로 또한 눈에 훤히 보이는 것이기에.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속성이란 그런 태생을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기나긴 4시간여의 대 서사시는 끝을 맺는다.

친구를 배신하고 고통을 참을수 없어 아편굴에서 마약을 하며 껄껄대고 웃는 누들스의 얼굴에서 프리즈된다.

누들스처럼 살아온 미국인들은 과연 지금 행복한가?

당신은 지금 황금궁전에 살아서 행복한가?

이래도 권력과 돈만 탐하며 살고 싶은가?

그냥 이렇게 한바탕 헛헛하며 웃으며 마음 편하게 살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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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권지예, 김경욱, 김선우, 김애란, 김연수, 김영하, 김별아, 김종광, 김중혁, 문태준, 박민규, 박성원, 박현욱, 박형서, 심윤경, 윤성희, 이기호, 전성태, 정이현, 조경란, 천운영, 하성란, 한강

 

yes 24 에서 공지영, 신경숙, 은희경 3인방을 제외한 한국의 젊은 작가 투표 후보로 뽑았던 이들의 이름이다.

 

이들중,

김선우와 문태준은 내겐 '닥수본' (닥치고 수집하게 하는 본좌)이었고,

김영하와 박민규는 '생약부' (생각보다 약간 부진한)였고,

정이현과 김애란, 권지예는 '포3방' (포스트 삼인방)이었다.

 

헌데. 이들 중 단 한권의 책도 아직 내게 없고,

단 한권의 책도 빌려보지 못했지만, 늘 읽고싶었던 작가가 있다.

 

바로 조경란이다.

내게 그녀는 몇번이나 서점에서 들었다 놨다,

몇번이나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그대로 반납했다 하는 묘한 작가였었다.

어제까지는...

 

폭염 주의보가 내린 어제, 나는 그녀의 강연회에 다녀왔다.

첫인상의 그녀는... 한미모 한다...

 

 

 

"제가 강연날을 잘못알았어요. 다음주쯤인줄 알았는데...

 이 자리에 참 힘들게 왔어요. 찾아오기도 힘들었지만 그것보단 저 지금 마감중이거든요.

 이바닥 용어로 잠수탄다고 하죠. 핸드폰 끄고 집에서 가족들하고 말도 안한채 내내 글만 쓰거든요.

 집필중에 이렇게 밖에 나오기는, 게다가 강연을 하러 나오기는 제 인생에서 최초예요.

 지금 실은 어떻게 하면 에너지를 덜 뺏기고 얼렁 가서 글 쓸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그렇지. 무릇 작가는 그녀처럼 일단 이야기에 빠져서 쓰게 시작하면 세상과 단절한채 절대고독의 시간이 필요한거야.  난 지금 세상속에 살고 있는건가, 이야기 속에 살고 있는건가?

 

"퀴즈 하나 내죠. 아래의 링을 맨 왼쪽에서 맨 오른쪽으로 옮기는 방법엔 뭐가 있을까요?"

 



 

머뭇머뭇한다. 이런 아이큐 테스트나 퀴즈 같은거 머리 아프다. 근데 왜 이런걸 하는거지?

몇몇이 대답을 하고. 결국 답을 알려준다.

 

"하노이의 탑이라는 겁니다. 심리학 책에서 자주 볼수 있는 놀이죠.

 소설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걸 해결해 나가는 것. 그게 소설이죠"

 

그렇지! 저건 나도 아는거야.

최근에 본 작법책에서 봤어. '인간행동의 단계' 였었나.

 

1. 설정. - 인물의 일상, 평범한 세계, 인물의 응축 소개.

2. 문제발생. - 평범한 세계를 뒤흔드는 선동적 사건발생.

3. 해결책 -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한 세계로 가기 위한 목적의식 생성.

4. 행동 - 특별한 세계에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동,

5. 위기 - 족쇄와 적의 방해때문에 생각지도 않았던 새로운 목적의식 생성.  

6. 새로운 결정 - 대반전. 1 설정의 인물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어떤 변화된 결정으로서의 절정. 

7. 여파 - 새로운 인물의 세계.

 

뭐 이런거 말이지. 그래 소설도, 결국엔 이야기니까 스토리텔링은 결국 같은거잖아.

근데, 요즘 저 일곱단계때문에 글을 쓸때 자꾸 가슴으로 안쓰고 머리로 쓰고 있어서 참 슬퍼.

그냥 용감하게 쓸때가 좋았는데, 왜 저런건 알게되서 이렇게 날 괴롭히는 거야.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 하는 것은, 작가는 왜 쓰는가? why i write? 입니다. "

 

아... 정말 듣기 싫은 질문. 하지만 아직도 딱히 정확하게 대답할수 없는 질문.

넌 왜 쓰니? 난 왜 쓸까?

쓰지 않으면 삶의 의미가 없나? 쓰는게 행복한가? 써서 유명해질려 하나? 써서 돈벌려고 하나?

 

난 그냥. 쓰고 싶으니까 쓰는거다. 쓰고 싶지 않으면 아마 쓰지 않게 될 거야.

그냥. 지금은 쓰고 싶은거야. 써야만 하니까가 아닌. 가슴속에서 막 쓰라고 시키니깐.

 

 

 

"제 개인사 아시죠? (침묵) 제가 별로 인기가 없나 보네요. 살짝 말씀드리죠.

 제 <국자이야기>라는 단편집이 나왔을때 질문이 '정말로 봉천동에 사세요?' 였어요.

 다음 소설이 나오자, '아직도 봉천동에 사세요?' 였구요,

 최근작에는 '계속 봉천동에 사실건가요? 였죠."

 

그녀의 책을 읽지 않았으니 알수가 없군. 그래 이 단편집에 <나는 봉천동에 산다>라는 게 있었지.

봉천동이 뭐 어때서. 내 예전 그녀도 봉천동에 살아서 그동네 정말 뻔질나게 갔었지.

봉천동의 밤늦은 놀이터의 파스라한 가로등불,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가던 여름밤 불어오던 슬픈 내음.

아마 그녀는 지금 봉천동에 살지 않을꺼야. 잘 나가는 변호사랑 아기를 낳았으니 말이야.

아, 서울대 입구 버스 정류장 노천에 있던 삼겹살집의 지글거리는 불판이 떠오른다.

 



 

"전 신촌이나 홍대에 잘 가지 않아요. 저 올해가 마흔인데, 딱 마흔되니까 파릇한 청춘들이 보기가 싫더군요.

 제게 청춘은 조금 특별했기에 그랬을거에요. 제게 청춘은... 청춘은...

 저는 청춘이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 청춘들을 보면 그들이 누리는 그 모든것들이 생각나네요. "

 

마흔이라... 왜 작가들은, 아니... 성공한 작가들은... 다들 나이에 비해 참으로 아름다울까.

에쿠니 가오리가 그랬고, 은희경이 그랬고, 김선우가 그랬고, 이지민도 그랬고, 정이현도 그렇고...

아마 평생을 슬픔과 행복을 줄타듯 살아왔기에 생에 대한 관조같은게 생겨서 그런건 아닐까?

그들은 내가 꿈꾸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즐거운 삶, 노인처럼 여유있고 지혜로운 생을 버텨내왔을까?

 



 

"전 스무살부터 스물다섯까지 집에만 있었어요.

 요즘엔 히키코모리라고 하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시에 실패한 뒤 집에서 나가질 않았아요.

 어디가 아픈것도 아닌데, 그냥 집에만 있으니 제 동생들도 맏언니인 저를 소개하기를 꺼렸죠.

 부모님은 뭐 말할것도 없구요."

 

내 동생들은 나를 어떻게 소개할까?

어디가 모자른 것도 아닌데, 몇년째 글쓴다고 돌아다니는거 같긴 한데 딱히 뭐 성과도 없으니 말이다.

우리 오빤... 음... 백수야.

혹은 우리 오빤... 흠...  대학 조교야.

혹은 우리 오빤... 흠... 딴 얘기하자. 가 아닐까?

 

 

"그 6년간의 청춘. 사람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그 청춘이 제겐 없었어요.

 근데 후회는 하지 않아요. 그 시절이 없었으면 지금의 저는 아마 없지 않았을테니까요.

 6년간 딱 세가지만 했어요.

 밥먹고, 자고, 책읽고..."

 

대학입학부터 대학졸업까지 이십대 초중반의 청춘의 순간.

문득 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면 대부분 이때야.

술과 담배. 첫 키스와 첫 섹스. 첫 연애와 첫 이별.

어두컴컴한 동아리방과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울었던 연극무대위.

하얀 도서관의 창을 비추는 한줄기 햇살과 푸른 뒷동산의 조용한 벤취.

 



"그렇게 책을 읽다보면 내 인생에 대한 해답이 어딘가 있지는 않을까 한거죠.

 가족들과 말도 안하고, 먹고 자고 일어나 앉은뱅이 책상 슬쩍 들고 제 방으로 들어가 철퍼덕 앉는거죠.

 그래서 제가 지금 봉천동에 사는 거에요.

 그런 저를 묵묵히 아무말 않고 지켜봐줬던 부모님과 동생들. 참 고맙죠?

 앞으로 제 평생 가족들을 모시며 살아야죠. 뭐 실은 여전히 그들이 저를 받들고 사는 모양이지만요.

 아마 계속 봉천동에서 가족들하고 같이 살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먼 그들. 바로 가족이야.

글을 쓴다는 것, 아니 어떤 예술이던, 뭔가 보이지 않는 걸 하는 이의 가족은 괴로울꺼야.

남들처럼 살지 않는 이들은 항상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하는거니까.

믿음. 그거 하나지. 징글징글한 핏줄이니까. 남들이 뭐라해도 가족만은 나를 믿어주는 거야.

힘들고 어려워본 이는 알꺼야.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니 세상엔 가족밖엔 없는거라는 걸 말이야.

 



 

"작가들은 거울을 잘 들여다 보지 않아요. 저도 그렇고요.

 결국 글쓰기라는건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라 실제 얼굴도 그닥 보기 싫게 되더라구요.

  하지만, 언제까지 계속 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피해만 다닐수는 없어요.

 어느순간엔, 얼굴앞에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휙하니 들고 빤히 들여다 봐야 하는거죠."

 

매일아침 거울을 보긴 하지만, 그리 오래 보진 않아. 그냥 휙 스쳐갈뿐이지.

얼마전에 어떤 선배한테 장시간 인생상담을 받았는데, 그 결론도 결국엔.

'너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 봐라' 였어.

재미보다는 의미를 먼저 생각하는 지금의 나는

영화인보다는 문학가, 현장인보다는 기자나 교수에 어울리는 짓이라는 거였어.

그래 묵묵히 모든걸 인정했어. 난 공부하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걸 즐기지.

헌데 말안한게 있는데, 실은 글쓰고 만드는것도 못지 않게 즐긴다는 거야.

'뭐가 재미있을까?' 가 아닌 '이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주로 고민한다는 건 분명 바꿔야 하는 걸꺼야.

그래, 요즘엔 뭔가 터질듯한 뜨거운 감정이 부족해. 역시 연애가 부족한건가?

 

"작가는 스스로에게 대답하기 참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해 계속 생각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구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그게 글쓰기고, 바로 인생일꺼야.

물론 질문을 던지지 않는 이들도 있겠지. 

질문을 할 여력이 없는 이들, 혹은 하나의 질문을 바라보며 사는 이들말야.

허나 답을 찾지 않는 이는 없을꺼야.

단지 정답이 하나라는 사람과 정답은 여러개라는 사람이 있겠지만 말야.

절대불변의 답이 있을까?

류노스케가 '라쇼몽'에서 말했듯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게 진실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거니 말이야.

 



 

"독서는 어떻게 하시죠? 길을 오가며 버스나 지하철에서 보시나요?

 독서는 조용한 도서관이나 방에서 앉아서 혹은 누워서 차분히 보는게 좋은거 같아요.

 할수 있는 한 최고의 집중력을 가지고 뭔가 이 안에서 찾아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말이죠.

 그냥 슥슥 즐기며 보는게 아니라 집중하며 사고하면서 오감을 이용해 상상력을 발휘해보는 거죠.

 그냥 일반적인 독서는 무언가를 배우는 행위에요. 지식이나 정보 그런거 말이죠.

 하지만 적극적인 독서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행위에요. 소설쓰기의 첫 시작인거죠. "

 

싸부가 던지신 말씀이 있어.

글을 많이 쓰지는 않더라도, 독서량은 엄청 늘려야 해! 최소한 하루에 두세권 정도씩 말이지.

솔직히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하루에 두세권은 불가능해. 하루에 한권이면 모를까.

헌데 것도 하루에 한권을 떼려면 집중을 해서 4-5시간을 봐야 하지.

굳이 슬로우 리딩 독서법을 하는 건 아닌데, 그냥 느려.

이렇게 한 10년 정도 읽어가면 하루에 두세권 읽어낼수 있겠지만, 아직은 안되더라구.

 



 

소비하는 독서와 창조하는 독서가 아닐까 해.

문화는 소비하는 게 있고 창조하는 게 있다고 하지. 바로 작가는 창조적인 문화소비를 해야 하구 말야.

싸부가 영화를 볼때 한번도 끊지 않고 씬리스트를 적는 일명 척추뽑기 라는 걸 끊없이 하라고 했어.

곰곰히 해보니 말야. 척추 데이타가 쌓이는 것도 좋지만, 영화를 엄청난 집중력으로 보게 하더라구.

절대 끊으면 안되니까. 단 한씬, 단 하나의 인물도 놓칠수 없기에 발휘할수 있는 최고의 집중력이 필요했어.

그러고 나면 그렇게 본 영화는 온 몸으로 흡수한 포카리 스웨트같다고 해야 하나 짝짝 머리속에 박히지.

 

그런데 이제봤더니, 영화뿐 아니라 소설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모든 예술을 볼때

아니,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집중해서 살아내고, 집중해서 머리속에 넣으며 느끼라는 거 같아.

 

몰입과 집중. 누구든 그렇겠지만 글쓰기도 얼마나 몰입을 잘하고 얼마나 집중을 깊게 하느냐의 승부같아.

지금까지 나의 독서는 뭔가 발견해야 하는건데, 뭔가 배우려고만 하진 않았나?

몰입해서 인생을 살아내며 발견하려 하고 있는가?

 

 

 

"제 인생의 원심력은 고민과 불안과 두려움이에요. 

 아마 작가가 글을 쓰는 건 이 두려움 때문 아닐까요?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영혼의 활쏘기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해두죠.

 방황하며 살아가던 제가 간신히 귀하게 찾은 길이 바로 글쓰기 였으니까요.

 저는 글쓰기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에요.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하지만 불안은 작가의 영혼만은 살찌울꺼야.

인생이 편안하고, 걱정없고, 자신감 넘치고, 만사형통이면 얼마나 인생은 불행할까.

작가는 슬픔이라는 별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하잖아.

세상을 느끼는게 예민한 사람들이라 모든 감정과 사고의 파고가 커서 불안과 강박 또한 큰걸꺼야.

 

첫 문장이 나올때까지의 그 엄청난 두려움.

나를 들여다 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에 대한 두려움.

 

어쩌면 이렇게 시나리오를 쓰지 않고 잡문만 쓰는 나도 두려움과 싸우는 중인거 같아.

이제 나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변화해야 할거 같아.

 

두려움을 떨치고 용기내서 글을 쓰는것 말야.

삶의 일부분이었던 글쓰기를 이제 삶의 대부분으로 바꿔야 할듯 해.

하루에 영화를 두세편 보면서 난 그래도 영화룰 보고 있어 라고 도망가지 말고.

책을 뒤적거리며 난 그래도 책을 읽고 있잖아 하며 도망가지도 말고,

스터디에서 동료들에게 위안을 얻으며 그리 나쁘지 않잖아 하면서 도망가지도 말고,

술잔을 기울이며 좀만 기달려봐 하며 뻐기면서 도망하지도 말고 말이야.

 



 

"폴 오스터 아시죠? 만약 처음 읽으신다면 뉴욕 3부작을 추천해요. 엑기스가 있는 책이죠.

 폴 오스터가 여덟살때 엄청난 야구광이었다고 해요.

 뉴욕 자이언츠에 윌리라는 강타자의 팬이어서 어느날 싸인을 받으려 락커룸에 갔었어요.

 윌리를 보고 폴은 싸인해주시죠? 라고 했고, 폴은 그래 해줄께, 펜을 다오 라고 했어요.

 윌리는 가방을 뒤적여도 펜이 없자 뒤에 서 있던 부모에게 펜좀 빌려줘요 라고 했다고 해요.

  허나 부모도 마칭 펜을 가진게 없자, 윌리가 그랬데요. 얘야 난 싸인을 해주고 싶지만 펜이 없구나.

  폴은 그 순간 뜨거운 눈물을 펑펑 흘렸고, 아마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눈물이었다고 해요.

  그 뒤부터 폴은 언제어디라도 주머니에 펜을 넣고 다녔다고 해요. 그러다가 작가가 되었구요,.

  주머니에 펜이 들어있으면, 쓰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큰 거죠"

 

스모크에서 담배연기의 무게에 대해 이야기 하던 폴 오스터.

주머니에 펜과 노트를 항상 넣고 다닌지는 꽤 되었는데 아직 작가가 되지 못했어.

바위같은 노트북까지 항상 메고 다녀보지만 늘 펴면 서핑만 하다 돌아가.

쓰고 싶은 유혹이야 항상 있지. 쓸수 있는 용기가 없으니 문제지.

가끔 제작자나 감독들이 써논 책 있나고 할때 어리버리 대답하곤 해.

그때 주머니에 책이 들어 있으면 계약서에 싸인을 할수 있는 건데 말야.

뜨거운 눈물을 아직 덜 흘려서 그런걸까.

주머니엔 왜 아직 책이 없을까?

 



 

" 프루스트는 그밖의 다른 일에서는 그만한 만족을 못해서 글을 쓴다고 하고,

  서머셋 몸은 원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안하면 안되니까 글을 쓴다고 하고,

  헨리밀러는 강제적이지만 즐거우니까 쓴다고 하고,

  사르트르는 내 자신의 자유를 위해 쓴다고 하고,

  이청준은 욕망 때문에, 세상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쓴다고 하고,

  신경숙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쓴다고 해요.

   여러분은 왜 쓰시나요?"

 

그럼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해.

그러기 위해선 우선 써야 해.

써봐야 이게 행복해서 그런지, 자유로워서 그런지, 복수을 해서 그런지 만족해서 그런지 알수 있어.

철저한 자기검토가 필요해. 그밖에 뭐가 필요하겠어.

 




 

"어느날 마로니에 공원을 걷는데 갑자기 비둘기가 제 발 밑을 후다닥 하면서 스쳐 지나갔어요.

 후다닥 이요.

 만약 그 비둘기가 제 발밑을 스쳐가지 않고, 제가 밟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인생이 일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인생엔 평범한 삶이 전도되는 아주 특별한 순간이 찾아와요.

 그 순간을 포착할수 있는 사람은 작가가 되는 거죠. 빵봉지가 날아가는 순간 말이에요."

 

번쩍하고 황홀한 순간이 있어.

그게 길거리에 나부끼는 흰 비닐봉지를 보고 느낄수도 있고,

바닥에 떨어지는 흰 깃털하나를 보고 알수도 있지.

사실 누구나 이런 특별한 순간을 느끼고 포착해.

다만 망각이라는 도구를 통해 잊을 뿐이야.

작가는 좀 더 예민하게 느끼고, 기록하고, 그걸 사람들이 알수 있는 형태로 그려낼 뿐일거야.

조심해.

항상 그 안테나를 삐쭉 세우지 않으면 언제라도 그건 훅하고 날아가 버리는 거니까.

 




 

 

 

 

"이야기는 특이한 설정, 특이한 사건, 특이한 관계 속에서 나오는게 아니에요.

 밀란 쿤데라가 그랬죠. 작가는 생으로 지은 집을 허물고 그 벽돌로 새 집을 짓는 사람들이라고요"

 

쿤데라는 세상앞에 드리운 커튼을 찢어 내는것이 바로 소설이라 했어.

우리가 사는 가짜 세상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거 말이야.

소설가란 자신의 이름이 불멸할것이라는 끔직한 야심을 품는 사람들이야.

죽어서도 살아남고 싶은 사람들인거지.

 

어릴적 너는 꿈이 뭐니 라고들 묻잖아.

그때 내 대답은 대통령이요도 아니고, 판검사요 도 아니고, 연예인이요도 아니었어.

웃지마.

나는 '죽어서도 내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요' 라고 했던거 같아.

범죄자로 남기던가, 예술가로 남기던가 둘중 하나겠지.

 

생으로 지은 집을 허물고 있나?

아니, 생으로 집을 짓고는 있나?

지금 집을 허물고 있는 거라 생각해 두자.

다 허물고 나면 벽돌을 만들수 있을테니까.

 

 

 

"작가는 두려움의 목록을 평생 만들어가는 사람이에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게 두려우시죠?

 제가 강의를 할때 처음으로 꼭 읽히는 단편소설이 있어요. '존 치버의 '다리위의 천사''라는 작품이에요.

 그 책을 보면 온 가족이 두려움을 갖고 있어요.

 높이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40층까지만 견딜수 있었던 남자는

 41층으로 회사가 이전하자 그만 회사를 그만둬 버리죠.

 그런식으로 온 가족이 다 하나씩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요. 그 두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에요.

 바로 우리들 작가의 이야기와 같은 거죠. 마침 곧 존치버의 전집이 새로 번역해 나온다고 하네요 "

 

레이먼드 카버와 함께 현대 영미소설의 최고라 불리는 존 치버란 사람 근래에 자주 나오네.

얼마전 읽은 근사한 에세이 '그들은 한권의 책에서 시작했다(정혜윤)'에서 소설가 정이현을 만든

한권의 책이 바로 이 존치버의 '다리위의 천사'였어.

그래서 내 독서 리스트 꼭대기에 적어왔었는데, 바로 다음날 또 이 책 이야기를 듣게되네.

뭔가 인연이 있을것 같아. '주홍빛 이삿짐 트럭'이라는 구판 소설이 있다고 하니 찾아야 겠어.

 

"작가는 배우라고 생각해요. 왜 배우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연기를 하잖아요.

 우리도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한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내게 다가오는 것 말이죠"

 

내게 절실한 건 뭘까. 지금 내가 가진 두려움은 뭘까. 그 리스트를 만들어 가는거야.

처절하게 절실한 이야기 말이지.

아마, 두려움을 이기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

아직은 내 안의 것을 다 털어내는 과정이니까 말이야.

 

"르노와르는 만년에 류마티스 관절염에 걸려 손에 붓을 붕대로 감고 그렸다고 해요.

 르노와르는 흰빛은 존재하지 않다 라고 했어요.

 흰눈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니 푸른색이 조금이나마 묻어 있어야 한다라는 거죠.

 우리는 수없이 많은 옷을 껴 입고 살아요. 그 옷을 하나씩 벗겨가는 게 작가의 일이죠.

 여러분의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다라는 두려움과 친밀해 지도록 고민해 보세요.

 작가의 이야기엔 작가의 색깔이 뭍어있을 수밖엔 없는 거니까요"

 

글쓰기란 광화문 한복판에 벌거벗고 서 있는 걸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어.

문득 촛불을 든 시민과 명박산성을 쌓은 특공대 사이에 벌거벗고 서서 그 둘을 바라보는 장면이 떠올라.

반대로, 너무 내 이야기를 해서 문제야. 일기인지 이야긴지 모를정도로 말이야.

 

"에세이와 픽션은 구분하셔야 해요. 이정도면 되지 않을까 하는 순간이 올꺼에요.

 그때가 위험한 때에요. 조심하시도록 하세요.

 끊임없이 질문하고 회의하고 반성해 보세요.

 뭔가 이대로 머물지 않겠다. 앞으로 나아가고야 말겠다 이런 욕망을 가져보세요. 

 작가는 주위의 사물들이 속삭이는 걸 듣고 그걸 사람들이 알아들을수 있도록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그 안엔 내 목소리도 있는 거구요. 오감을 열어놓는다고 하죠. 육감을 이용해서 소통해 보세요.

 동물이나 식물, 사물도 우리들이 이해할수 없는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구요."

 

끊임없이 질문하기. 스스로 대답할수 없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보기가 필요해.

나의 그림자를 만나는 건 참 곤혹스러운 일이야. 그래서 방어기제로 딴 짓거리를 하고있는거지.

산산히 부서트려야 해. 벽돌을 만들기 위해선 말이지.

 

"마루야마 겐지가 그랬어요.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할 이유가 없는거다 라고요.

 버틸대로 버티다 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불꽃을 튀겨보세요.

 절벽에 서서 까마득한 암흑에 아슬아슬하게 있는, 그런 불안정한 자신의 발밑을 끊임없이 바라보세요.

 글쓰는게 어려우시죠? 그건, 실제 글쓰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행복을 생각하세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 한권을 갖는다는 건 정말 큰 행복이랍니다."

 

마루야마 겐지는 다섯편의 쓰잘데 없는 소설을 쓸 시간에 제대로 된 한편의 소설을 쓰라고 했어.

시간을 충분히 들여, 완성도를 높이라는 거야.

창작이란 정신의 깊은 곳을 비집고 들어가는 거라, 불안이 뒤따르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싶고, 어울려 놀고만 싶은거라고도 했어.

소설은 오로지 혼자 써 내려가는 거니까 말이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삶을 다시 리세팅해서, 최대한 단순하게 살아야 겠다고 말이야.

최대한 약속을 적게 잡고, 아주 극도로 심플한 삶을 살면서 절대고독과 섹스를 하고 말이지.

 

먹고, 자고, 쓰고

이렇게 3가지만 해보는게 어때?

 

도대체 넌, 왜 쓰는 거야?

 

 

* 문장웹진의 편집위원으로 있는 조경란 소설가의 글을 더 보고 싶으면, 클릭!

http://webzine.munjang.or.kr/article/list.asp?pCate=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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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광대 2008-10-10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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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가 있는 원문을 보시려면 이곳으로!
 
히라노 게이치로와의 만남 행사 후기

24세, 대학 재학시절 아쿠타카와 상을 수상하며 일약 천재작가 소리를 들으며 데뷔한 한 일본의 소설가가 있다.  바로, 히라노 게이치로다. 수상작 '일식'은 무라카미 류 이후로 최초의 대학생 수상작가의 탄생이었다.  그의 이름은 무척이나 많이 들어왔다. 꽃미남 작가, 천재작가, 진지한 예술가 등이 그의 키워드 였다.
 
 이상하게 요즘엔 책을 집어들면 가장 먼저 살펴보는게 작가의 생년월일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가는 지라, 이들은 도대체 몇살인데 이렇게 성공한거야 하고 훔쳐보게 되는 것이다.  누구는 자신보다 어린 작가의 작품은 읽지 않는다고도 한다. 일견 이해는 간다. 아마 질투 때문이리라.  어린게 얼마나 알겠어, 혹은 그래봤자 비린내 나는 치기어린 낙서정도겠지 하는 시기심 때문이기도 할테구.
 
헌데, 요즘 한국 젊은 작가들에게 참 많은 도전을 받았었더랬다. '달려아 아비'의 김애란이 그랬고, '즐거운 인생'의 전아리가 그랬었다. 20대 초반이지만 이들의 글엔 힘이 있었고, 삶의 진실이 또박하게 박혀 있었다. 그래서 소설가의 나이에 대한 편견은 애시당초 집어 던지기로 했었다.
 
그런데, 히라노 게이치로는 34이다. 동갑내기. 이상하게 동갑내기라 하니 질투나 시기보다는 그냥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정서때문인지 친근함이 더한다.
 
'일식'이라는 책은 참 오랫동안 서가에 먼지만 얹혀 있은 채 잠겨져 있었다.  슬쩍 들춰봤더니 의고체의 무거운 문장에 '장미의 이름'류의 중세시대 수도사의 철학적 고뇌를 다룬 거다.  그래도 역시 일본문학 번역의 대부 '양윤옥'씨가 손을 봐서 그런지 번역이 깔끔해서 속도감이 나긴 했다.  헌데, 끝까지 보진 못했다...
 
요즘엔 통 무거운 책은 읽히지 않는다. 히라노의 제안대로 '슬로리딩'을 통해서 봐야할 책들은 점점 멀리하게 되는데, 늘 고민이다. '도스토옙스키'전집과 '니체' '푸코' '융' 뭐 이런 책들을 쌓아놓고 언제나 보려 하지만, 늘 미뤄놓게 된다. 책을 읽는 시간보다는, 읽을 책을 고르고 모으는 시간이 배는 되니 말이다. ㅠㅠ.
 
이게 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오는 것이리라. 어쩌면 글쓰기에 대한 회피로써의 그럴싸한 변명일수도 있고 말이다.
 
하여간, 히라노와의 만남은 작가와의 만남이 언제나 그렇듯 약간의 설레임과 조금의 질투심으로 시작되었다. 기분좋은 가을바람이 파고 드는 홍대의 지하 까페에서 그를 만났다. 
  

" 웹 2.0 시대엔 개인이 다양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타자와 차이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 시대가 온 것이죠.   하지만 아이러닉하게도 세상은 자본으로 단일화 되어 있습니다.   자본이야 말로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유일한 이데아죠.   그런데, 포스트 911 이후로 반미를 위한 반대파는 모두 처단해야 마땅할 테러집단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적이 탄생했습니다.
  다양성과 단일화,   즉 저는 웹 2.0 시대의 다양성을 지닌 개인의 동일화에 대한 이러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동안 전근대-근대-현대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차례로 그려보았습니다.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말이후 에고이즘으로부터 탄생한 개인화와 분리에 대해서 말입니다."
 
- 개인은 다양한데, 세상은 단일화 되어있다는 역설!
   블로그나 까페를 보면 참 다양한 생각을 가진 군상들이 자신만의 '외침'을 하며 살아간다.
   헌데, 그들은 세상속으로 들어가면 권력과 자본이라는 이데아 앞에 '침묵'하며 버텨간다.
   외침과 침묵사이, 진짜 우리의 모습은 무엇일까?
 

 
 
" 중세 페스트 이후 기독교 시대는 몰락했습니다. 유럽은 흩어지게 되었죠.
  그래서 이들에겐 공통의 적으로서 마녀사냥이란게 필요했습니다.  이렇듯, 공동생활에서 몬스터에 대항하는 것, 즉 적과 싸울때는 하나가 될수 있으니까요. 세상은 이렇게 공통 가치관이 상실되면 적을 찾게 됩니다"   
  
- 20세기는 이데올로기가 적이었다. 매커시즘과 빨갱이 사냥으로 점철된 독재와 억압의 시대말이다.
     헌데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지금은 소비자본주의라는 유일한 가치관의 동일성 속에서,
     신자유주의와 무한경쟁의 정글속에서 자연도태자와 루저들의 양극화만 가열되어,
     부의 계급화 즉, 강남과 강북으로 대변되는 신계급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공정택과 주경복의 대결에서 보듯, 보수와 진보의 이름을 달고 자본과 분배의 탈을 쓰고 말이다.
     뉴라이트와 아고라, 한기총과 기장, 조선일보와 한겨레, 조갑제와 진중권 ...
    이렇게 세상은 극명하게 나뉘어져만 간다.
     MB 에겐 촛불 좀비라는 적이 생겼고, 촛불들에겐 쥐박이라는 적이 생겼다.
    게다가, 우리에겐 아직 색깔론이라는 거대담론과 지역감정이라는 토착담론까지 있다.
     우리들이 뭉치는건, 올림픽과 월드컵 뿐이다...
 
 
 
 
"이렇듯 하나의 적과 마주본 개개인인 우리. 즉 테러와의 전쟁을 하며 하나되어 싸우는 미국이 탄생했죠.   인디언, 소련, 이라크, 에일리언, 화산...   단 하나의 강력하고 유일한 적에 맞써 싸우는것. 바로 헐리웃 영화의 대박 공식과도 일맥상통합니다."
 
- 요즘 헐리웃 영화의 적은 무얼까?
  300의 적은 이교도 집단. 트랜스포머의 적은 사악한 로봇군단. 다크 나이트의 적은 조커.
  냉전시대엔 헐리웃 영화도 만들어내기 쉬웠다.
  007의 적들, 람보와 록키, 프레데터의 적들 아주 쉽고 명쾌하지 않았나.
  한동안 아랍인과 테러집단에 대한 적을 쏟아 내더니 이제는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가상의 적을 만들어 낸다.
  딱히 적을 삼을 만한 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나 '데어윌비블러드'등을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적으로 등장한다.
  미국 탄생신화의 폭력성, 허구성등을 씹어대는 자기 반영적영화가 아카데미 상을 휩쓰는 세상이 된 것이다.
  한국정부 건국의 폭력성, 친일 세력의 지배성, 레드 컴플렉스의 허구성 등을 내세운 한국영화도 곧
  각광 받는 세상이 올수 있을까?  
 
" 우리는 적이 없으면 적 같은 존재를 만들어 싸우려고 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 때문이죠. 악플러들이 '우린 하나다!'라며 뭉치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
 
 - 요즘 정부는 아주 살 맛났다. 진보세력이 무너진 판국에 딱히 적이 없었는데, 촛불이 나왔기 때문이다.
    바로, 신공안정국이 가능한 것이다. 영원한 적일것 같았던 북한과는 대통령이 오가는 사이가 되었고, 미국과는 화해협력으로 가고 있으니 딱히 꼬집어 적으로 삼기가 껄쩍 지근했던 판이다.
    반한 정서가 가득한 중국이나, 패권주의가 부활하는 일본에게는 차마 날을 세울수 없으니 국민들에게 세우는 수 밖에 없었을 터.
     요즘 유행하는 '되고송'에 따라 불러보자.
 
     수배자들은 조계사 앞에서 잠복했다가 잡으면 되고, ~
     유모차 부대는 아동 보호법 위반으로 넣으면 되고, ~
     중고등학생 부대는 학교와 부모에게 압력넣어 해산 시키면 되고, ~
     자동차 부대는 면허 정지 처분 내리면 되고, ~
     진압거부 의경은 복무 불이행으로 영창 보내면 되고, ~ 
      말 안듣는 언론은 낙하산 사장 내리 꽂으면 되고, ~
      걸리적 대는 시민단체는 공금횡령으로 털어 넣으면 되고, ~
      진보단체들은 국보법으로 깔끔하게 넣으면 되고, ~
      네티즌들은 최진실법으로 추적해서 처벌해 버리면 되고, ~
      좌편향 교과서는 수정해서 주입시키면 되고, ~
      감시는 감청법과 유전자 은행법으로 지켜보면 되고, ~
      뿔난 국민들에겐 물가상승과 경제환란으로 정신없이 하게 하면 되고,~
      뭐든지, 생각해로 하면 되고...~~ 
 
 
" 일식에서 장송까지. 근대이전부터 근대를 다뤄왔습니다.   그 동안에 책에서 tv로 정보채널이 이동해 왔습니다.    저는 커뮤니케이션의 재료를 찾고 있었습니다.    종교논란이나 연예인의 자살등에 관한 논란에서 볼수 있듯.    일방적 정보를 tv로 부터 전달받던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다양한 각자의 정보채널로 분리되었습니다.     아주 많은 작은 세계로, 자신의 작은 자기분열을 하게 된 것이죠.    음악을 록만 들었다면, 이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을수 있게 된 겁니다.    부모, 친구, 회사, 학교 등 여려개의 자신은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이런 분열로 인해서 사회는 까다로워져만 갑니다. "
 
- 앞으론 정신분열과 강박증, 우울증이 현대인의 제1 질병이 될거라 한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웹의 하이퍼 텍스트적 링크에 의한 멀티 태스킹은 이미 우리 문화가 되었다.
   아이팟으로 음악을 들으며, 노트북으로 서핑을 하면서, 잡지를 뒤적이며, 커피와 베이글을 마시며, 대화까지 하는 건 아주 평범한 일이 되었다.
 늘상 케이블의 채널은 끝없이 돌아가며, 뮤직비디오와 미드의 엄청난 커트감과 속도감, 광랜의 초고속 인터넷, 이동하며 서핑하는 와이브로, 핸드폰으로 화상통화와 서핑까지 하는 그야말로 호모 스피디쿠스라 할만하다.
   회사에선 성공을 위해 권력앞에 비굴해지고, 가정에선 가족들앞에 강해지려 애써 소통을 피하고,
   친구들과는 스트레스를 풀기위해 한없이 풀어지고, 교회에 가면 삶을 반성하며 침잠해 졌다가,
   웹에 들어와선 온갖 정보와 소통의 장에서 지킬과 하이드가 되어 선플러와 악플러를 오간다.
   그야 말로 끝없는 세포분열로 살아가는 분열적 자기 복제생산품이 되어 가는 것이다.
 
"센티멘털이라는 소설에서 현대사회를 그렸는데, 하나의 틀로 그려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작은 틀로 하나하나 그려 내보았습니다.  우연한 원나잇, 불륜 남녀, 히키코모리, 일본의 단편 하나 하나를 그려보았던 것이죠.   약간은 실험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창작을 해봤던 거였습니다"
 
- 하나의 완결된 에피소드로 구성된 미드가 영상계를 주름잡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를 받아들이기엔 관객들은 이미 너무나 세분화 되어 버렸다.
  공동의 적이 사라진 시대에 유일한 적은 나보다 자본을 더 가진자와 내 자본을 뺏으려는 자 밖엔 없을테니 말이다. 범죄 장르. 즉 사기나 강탈극이 히트할수 밖에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전 세계적인 스릴러 장르의 열풍은 바로 이것에 기인한게 아닐까 싶다.
  사기 쳐 빼앗는 쾌감을 맛 보거나, 빼앗은 범죄자를 잡아서 처벌하는 스릴을 맛보거나 말이다.
  역시, 시대를 보는 통찰력이 있는 히라노도 스릴러 로 돌아서지 않을까?
 
"문학이 인터넷 시대에 어떻게 해야 할까...  저는 최근에 글을 쓰면서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씁니다.  아마 근작 '당신이 없었다, 당신'이 예전 방식의 창작물의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막 탈고한 '절의'라는 작품은 근작 '당신이...'에서 전단계로 실험해본 최종 나의 결과물입니다. 미스테리와 서스펜스. 즉 저도 독자들이 읽어내려갈수 있는 소설을 쓰게 된 것이죠"
 
- 아이러닉하지만, 문학과 인문학이 죽었다는 한국이 그나마 순수문학만큼은 근근히 살아남아 있다.
  장르문학의 전통이 약한 탓도 있겠지만 독자 자체도 장르문학과 함께 순수문학을 아껴주고 있다는 것이다.
  헐리웃 영화와 미드에 열광하면서도 한국영화만큼은 리얼한 정서에 기댄 한국형 영화를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땅에서도 로보트가 싸우고, 고대 전사가 칼질하는 한국영화가 나와 열광하려면 웹세대의 기성세대로의 등장 즈음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상 문학상이 출간되면 하나쯤 소장해 줘야 예의라는 정서가 있는 지금의 기성세대들에게는 아직도 순수문학이 효용가치가 있는 것이다.
   히라노가 장르물을 쓰다니. 과연 어떤 작품일까 사뭇 궁금해 진다.
 
 
 
" 밸런스가 가장 중요합니다.  작가로서 저는 세가지를 늘상 생각합니다.
   뭘 하고 싶은지. 뭘 할 수 있을지. 뭘 해야 하는지.  이제 겨우 이 셋간의 밸런스를 맞출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거와, 할수 있는 거는 혼자 알수 있지만, 해야 하는 지는 독자와의 관계속에서 몸소 체험해야만 알수 있는 것입니다"
 
-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와 어떤 이야기를 할수 있는가에 대한 나름의 정리는 되었다.
   하지만 역시 나도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은 아직 혼란스럽다.
   상업영화라는 지향점에서 보자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가 가장 중요할 터인데 말이다.
   일단 만들어 봐야 알수 있다는 거다. 아무리 혼자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구상만 해봤자 답이 없다는 것이다. 관객과의 소통속에서 내가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알수 있다는 것.
    가장 핵심을 찌른 멘트였다. '뭘 해야 하는지'는 독자와의 소통을 통해서만 알수 있다는 말.
   
" 예술지상주의요?   창작 태도에 있어서는 단호하게 예술지상주의라 할수도 있습니다.   최고의 완성도를 위해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죠.   허나 예술이 이 세상의 다른 무엇, 즉 사랑, 가정, 경제, 문화, 등등... 어떤 것보다 가치있다는 것엔 동의하지 않습니다. "
 
- 타협하지 않기 위해선 우선 자기 중심이 굳게 서 있어야 한다.
  이야기에 대한 중심, 가치관에 대한 중심이 서 있지 않으면 늘상 흔들리게 마련이다.
  작품을 대하는 데 있어서 예술가적 태도. 즉 최고의 작품을 뽑아내도록 전진한다라는 그의 명제가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지금 타협하지 않고 있나?
 
" 슬로리딩에 반대한다구요?   그렇게 하시죠. 전 책을 읽는 부류가 세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남들에게 읽지 않았다고 하면 부끄러울듯 해서 읽는 사람.    작가와 이야기와 소통하고 싶어서 읽는 사람.    심심풀이 시간 때우기로 읽는 사람.  전 두번째와 세번째에 해당합니다. 절대로 첫번째엔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책을 아직 않읽었다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 하지도, 부채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반복 읽기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또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말이죠. "
 
- 어쩌면 난 첫번째 리더가 아닐까 싶다.
   책을 읽는 시간보단, 읽을 책을 고르고 쌓아두는 시간이 배가 되니 말이다.
   독서가 라기보다는 컬렉터에 가까운데 이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서 비롯되었다.
   일년에 한권의 책을 사서 한권을 읽는 것보단, 백권의 책을 사서 두권을 읽는게 독서가이다!
   늘상 책을 사모을때면 먼지가 가득쌓인 서재를 보며 에휴 이거라도 어서 봐야 하는데 하면서도,
   다카시의 말에 따라 필이 꽂히면 그 책은 기어코 쟁겨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수입의 절반 이상은 항상 책 모으기에 쏟아 붓는데, 실상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있다.
   평생 두고두고 옆에 놓고 읽어야 할 위시 리스트들은 소장해 놓고, 아직 아리까리한 신간들은 도서관에 신청해서 받아 보는 것이다.
  이것도 탐욕일 텐데, 일주일에 두권씩 신청하는것도 밀리다 보니 대여했다가 고대로 반납하고 다음 신청서적을 빌려가고 하는게 사이클이 되어 버렸다. 집이 아니라 도서관에 컬렉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면 반납일이라는 시간의 족쇄가 있어 부채감으로 읽게 되는데, 장단이 있다.
  장점은 일단 많이 읽는 다는 것, 단점은 읽고 나서 맘에 들면 아 사서 볼껄하는 아쉬움이 남는 다는 것이다.
 어쨋든 내 손에 쥐어져 집에 마실왔다간 책들도 언젠간 곧 보기 않을까 싶다. 흔적은 남아 있을테니 말이다.
  실상 이 글을 쓰는 것도, 알라딘 모임참가 후기에 올려 당첨되면 마일리지 머니를 받게 되니 책을 살수 있다는 생각에 쓴다는 걸 고백해 두겠다. ㅠㅠ.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가?  어릴적  <금각사>를 읽으며 책 읽기에 빠졌었습니다.  학교는 가지만 공감을 못했고, 늘상 무거운 테마 '삶은 뭔가, 죽음은 뭔가'에 대해 고민하던 학생이었죠.  그 갭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랐습니다.  부자학교도 다녀봤고, 자유로운 클럽학교도 다녀봤지만 다 제겐 맞지 않더군요.  그럴때 토마스 만을 읽었습니다.  나만 인간과 사회에 갭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왜 블로그 보면 세상에서 할수 없는 말들을 하는 네티즌들이 가득하잖아요.  그렇게 차마 할수 없는 이야기를 글로 적어보자 하는 생각에서 작가가 되기 시작한것 같습니다."
 
- 왜 블로깅에 빠져들까에 대해 그리 생각해 보지 못했다.
  헌데, 막상 내가 블로깅을 시작해보니 이게 강한 중독성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뭔가 가슴속에서 뭉클하고 짜릿하고 빠글빠글한 게 생기면 이렇게 풀어내지 않고는 미칠것 같아 진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생각하거나 말로 풀어내는 것보다 이렇게 글로 풀어내다 보면 확실히 내 이야기가 되어간다. 글쓰기의 효용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소통에 대한 욕구와 표현하고 픈 욕망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금각사와 토마스 만... 아 또 보관함에 책들이 쌓이는 소리가 들린다.
 
"제 소설이 난해하다구요?  아마 난해하다면 재미없다는 말이겠죠.  재미는 독자의 자유판단입니다.  인터페이스를 연구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말하더군요.  인간은 '인지'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거라구요. 그래서 그 '인지'를 쉽게 개선하면 된다구 말이죠.  예술세계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독서 경험이 적으면 읽기가 어렵고,  독서 경험이 많으면 읽기가 쉽죠.    초딩때와 지금의 '도스토옙스키 읽기'의 차이와 같기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저도 이런 문제에 고민해 봤습니다.  어쩌면 제 책을 어려워 하는 건 인지의 무리, 즉 스트레스 때문이 아닌가 말이죠.  그래서 근작 '절괴'는 읽는데 전혀 무리 없도록 창작해 봤습니다.  계속 읽고 싶은 소설이 될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는데, 어느정도 성공했다고 봅니다."
 
-  미치너의 '작가는 왜 쓰는가'에서 보면, 소설가는 최대한 어렵게 글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 어려운 글을 포기하지 않고 힘들여 읽어내는 독자들만이 그 소설을 읽어야 할 진짜배기 독자들이고 그들이야말고 소설을 향유할수 있는 가치가 있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어느정도는 공감하는 바이지만, 자칫하면 궤변으로 들릴수도 있는 주장이라 생각된다.
  프루스트와 타르코프스키는 분명 훌륭한 예술가 이지만 그들의 텍스트를 읽을수 있는 관객만이 진정한 관객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프랑스의 문학전통과 러시아의 영화전통이 있기에 나올수 있었던 작품일것이다.
   계속 읽고 싶은 소설. 즉 계속 듣고 싶은 이야기. 이야기꾼의 가장 기본적인 미덕인 것이다.
  아... 먼지만 쌓인 '도스토옙스키 전집'...
 
" 작가는 독자가 알고 싶다(수수께끼 풀이)라는 욕망을 가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드라마에서 중간 cm으로 긴장감을 끌어가는 것처럼 말이죠.
  또한 작가는 독가자 좆기도록 해야 합니다.   헐리웃 영화의 기본 공식이죠. 항상 좆기고, 수수께끼 풀어가는 것 말이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에는 분명 뭔가가 있습니다.    전 이걸 '절괴'에 사용했죠. 성공 이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이야기의 기술은 어려운 것을 전달하고자 할때 필히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서스펜스와 미스테리. 바로 스릴러의 쌍두마차이자 이야기의 비기가 아니던가. 아 히치콕 교주님이여...
  당의정 이론. 바로 어렵고 무겁고 쓴 이야기일수록 달콤하고 쉬운 이야기에 포장해서 먹여야 한다.
   이른바 웰 메이드 스토리의 최고봉이 아닐까. 가장 단순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깊이있는 이야기를 하는것.
   고로 개인적으로 최고의 문학은 시라 생각한다.
   이야기꾼은 분명 시인의 언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 창작과정은 말이죠.   테마에 따라 문체나 스타일이 정해집니다.   뭔가 광택이 나는 윤기나는 원구 같은걸 떠올리며 말이죠.   새벽 6시에 일어나서 낮 12시에 일어납니다.   음악은 전혀 듣지 않습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면서 스푼이 떨어지는 소리를 상상하고 싶으니까 말이죠.   소설속의 소리, 소설속의 냄새 등을 작가는 느끼면서 글을 써야 합니다"
 
- 자신만의 창작과정을 셋업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아직도 이런 저런 시간과장소방법을 해보고 있는 나로선 부러울 따름이다.
  분명 확실한건, 작가마다 글이 나오는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침묵의 도서관이던, 시끄러운 까페던, 컴컴한 다락방이던 그만의 영감이 나오는 공간은 분명 있다.
  그 공간을 찾기 위해 수없이 부유하긴 하지만 그 노력은 끝없이 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작가는 밤에 쓰지만, 새벽에 쓰는 작가도 상당수 있다. 오후에 쓰는 작가도 있고 말이다.
  역시 시간대 또만 그만의 시간대가 있는데, 개인적으론 머리가 맑게 돌아가는 아침이 잘 맞는다.
  그러나 분명한건, 언제어디서든 써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을 만드는 과정이요?  단편은 구체적으로 전체적인 구상을 정하고 씁니다.  장편은 큰 부분만 정하고 쓰면서 정해 나가죠.  '절죄'는 끝을 전혀 쓰기 않고 써 내려 갔습니다"
 
- 큰 부분을 정하는 것. 그게 이야기 만들기의 핵심인터.
   이바닥 용어로 '와꾸'를 얼마나 잘 짜느냐가 스토리 텔러의 내공일텐데, 항상 고민되는 부분이다.
   늘 와꾸만 짜다 살과 옷을 입히지 못해, 뼈대만 있는 철사아트처럼 되어 있는 내 이야기들때문이다.
   어느날 밤 꿈에 아스팔트 도로에서 널부러진 머리없고, 팔없고, 다리없고, 몸통없는 캐릭터들이 좀비처럼 부슬부슬 날 따라오며 살려달라는 꿈을 꾼적이 있다.
   아 불쌍한 내 좀비들... 지금도 몇몇의 좀비들이 모니터 밖으로 나오려 피 토하고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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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광대 2008-10-10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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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movimage/90035894509
 





 

북콘서트라는 게 있는 줄은 알고 있었다.

kbs 낭독의 발견 이라는 프로그램 보면 왜 작가들이 나와서 자신의 작품을 낭독하고 그것과 관련된 뮤지션들의 공연을 보고듣고 이야기 하지 않는가. 바로 그게 북 콘서트 인 것이다.

 



 

처음엔 그냥 호기심에서 이벤트에 신청을 한 북 콘서트 였다.

초대손님중에 '정희성' 시인이 계셔서 망설임 없이 바로 신청을 했는데 당첨이 되어 다녀왔는데,

생각보다 기대 이상이었다.

 

몰랐었는데, 이 북콘서트는 평화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 '북 콘서트'의 공개방송이었다.

매주 일요일 저녁 9시 5분에 방송하는 이 프로는 작가와 뮤지션이 낭독하고 토크하고 노래하는 컨셉이다.

 

매주 '문장'에서 보내주는 나희덕의 시읽기와 김연수의 문장읽기 플래쉬가 내겐 큰 낙이었는데,

분명 앞으로 이 북콘서트도 내게 큰 낙을 주는 것중 하나가 될듯하다.

 

마침 이날은 상상마당 북 콘서트 1주년을 맞아 특집으로 tv 녹화까지 겸한 그런 콘서트였다.

지미집에 달린 eng 카메라 하며 번쩍이는 조명하며 사회자분 꽤 긴장하며 시작하였다.

 

처음 무대에 나온 이들은 힙합그룹 타타클랜.

 



 

바로 이 노래를 불렀다. 그 유명한 '워키워키 송'을 피쳐링한 노랜데, 은근짜 신난다.

자메이카 랩인듯 한데, 젊은 인디 힙합그룹이 열정적으로 노니는 모습을 보니 에너지 충전 만땅 팍팍이다.

 

몰랐는데, 이 프로그램에서 '한국문학 음악에 담다'라는 cd 작업을 진행했단다.

문학작품을 뮤지션에게 주고, 그것을 읽은 뮤지션은 영감을 받아 음악을 만들어 녹음하는 그런 프로젝트란다.

 

오호, 이 타타클랜이라는 그룹이 받은 책은 바로 손홍규 작가의 '봉섭이 가라사대'


              

 

  "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쓰는 이유는, 더는 소설을 쓰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평생 손에서 일을 놓아보지 못한 부모님 역시 더는 일하지 않아도 좋을 날이 올 것이라 믿었으리라. 때로는 사람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노예로 태어난 게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그럴 때면 나처럼 외롭고 쓸쓸하여 눈을 감고 돌아누울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만큼 견디지 않는다면, 삶을 어찌 짠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누추한 삶을 선사한 신에게 축복이 있기를!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스스로 아름다워지려 애쓰는 '사람들'에게 돌려야 한다. - 손홍규 "

 

책 제목은 익히 들어보았느나 딱히 읽을 맘이 나지 않아 내 리스트에 없던 책이다.

구수한 사투리에 순박한 미소를 가진 청년인 이 작가는 내 동갑내기였다. !!

 

한국 소설을 펼칠때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는데 바로 출생년도를 제일 먼저 보게 된다.

이제 슬슬 나이가 꽤 적지 않은데, 아직까지 딱히 내 이름으로 된 책도 없고, 내 이름으로 된 영화도 없어서 그런지 이네들은 언제 이름을 내밀었나 이런걸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내공부족 같으니라구.

 

최근에 질투를 느꼈던 어린 작가들, 김애란이 그랬고, 전아리가 그랬듯.

어리다고 덜 익거나 가벼운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젊은 작가일수록 패기가 넘치고 깊이는 기본이다.

 

하여간 이 손홍규 작가의 이 소설을 가지고 타타클랜이 노래를 만들었는데,

소를 둘러싼 소설의 모티브를 따와 '소인지 사람인지 헷갈려 하는 청년'을 가사로 힙합랩을 불렀다.

 

손홍규와 타타클랜. 눈여겨 볼 이들로 추가!

 

다음은 팝 클래식 연주그룹 '콰르텟 엑스'.

 



 

리더 이름이 낯익어서 알아봤더니, 예당아트라는 케이블 채널에서 '조윤범의 파워클래식'이란 프로를 진행하는 뮤지션이란다.

 

뭐 나름 이런 책도 낸 꽤 유명한 이더라.

 

클래식이나 팝, 영화음악등을 쉽게 편곡해서 대중들에게 연주하는 그런 연주단인듯 하다.

이들 역시 꽤 유명한듯 한데 처음 들어본걸 보니 요즘 꽤 음악 안듣고 살아왔나 보다.

리더 조윤범씨는 꽤 또박또박 말을 하는게 딱 봉준호 감독 화법하고 닮았다.

듣는이가 귀가 솔깃해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쭈욱 빨려들게 하는 그런 사람인듯 느껴지더라.

 

콰르텟 엑스가 받은 책은 바로 서유미의 '쿨하게 한걸음' 이란다.

 

 하하. 이 책은 출간되자 마자 읽은 책이닷 !

'판타스틱 개미지옥'으로 눈여겨 뒀던 작가기에, 수상작이라길래 냉큼 읽어버렸다.

로맨틱 코메디를 쓰기 위해서 한동안 '칙릿'에 올인한 적이 있었는데,

올초에 '한국형 칙릿'을 읽어가던 중에 걸린 작품이었다.

 

30대 회사원 여주인공이 짤려서 빈둥대다가 도서관서 영화 평론가 공부를 시작하는 뭐 그런 내용이다.

이런 류의 상처치유 성장소설을 조아라 하지만 솔직히 '악마는 프라다'나 '쇼퍼홀릭''워커홀릭' 같은 스토리텔링과 상업성이 하모니를 이룬 작품을 더 높이 평가하기에 생각보다는 별로였던 소설로 기억에 남는다.

 

콰르텟 엑스는 이 소설을 테마로 녹음한 곡을 연주했는데,

하모니가 시작되자 마자 느낀게, 딱 '히사이시 조'군 !

 

센과 치히로나, 하울, 동막골 등에서 나올법한 그런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 나왔다.

역시나 연주가 끝나고 리더 조윤범은 영화 ost같은 느낌을 내려고 했다고 한다.

좀 더 정직하게 히사이시 조 느낌을 내려고 했다고 했으면 더 멋졌을 것을...

 

여하튼, 이들은 앵콜곡으로 역시나 모리꼬네의 '시네마 천국 테마곡'을 연주한다.

 



 

아. 작년 엔니오 모리꼬네 콘서트에서의 전율이 다시 떠오른다...

2시간에 가까운 공연시간동안 단 한마디도 안하고 연주만 딱 하고 뒤돌아 선 그 거장의 아우라란...

특히 얼마전에 모리꼬네의 음악이 너무나 멋졌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를 필름으로 본지라

작년 공연에서 그 음악을 두 귀로 직접 들었던 게 얼마나 큰 영광이었던가...

 

정말 끝내주는 음악을 가진 영화 '원스어폰어타임인더웨스트' 오프닝 씬을 보라.

 

 

엔니오의 연주모습은 언제봐도 환상이다.

 


 

이후에는 드디어 정희성 시인님 등장!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바로 싸부 김대우 감독님이 예전 대학교 시절 학교 벽에 붙어 있던 이 시를 보고 와락 눈물을 흘렸다는 그 시.

고단한 노동을 끝내고 삽을 씻으며 슬픔도 버리며 담배 한대 피우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뒷모습이 그려진다.

 

할머니와 함께 달동네 초입에 사셨다는 감독님은 늘 밤이면 창밖으로 불콰하게 취해서 비틀거리는 막노동꾼들을 보고 물었다고 한다.

 

"저들은 가난한데 왜 저렇게 술을 마시는 거에요?"

"저 사람들은 돈을 그날 그날 받아서, 밤마다 술을 마실수 있는거란다. 그리곤 돈이 떨어지니 담날 또 일을 나가야 하는거구"

"에이. 그거 아껴서 모아야지. 왜 술을 먹고 그런담"

"너도 공부한하고 놀면 저 사람들 처럼 된단다."

 

그런데, 파리 유학시절 힘든 육체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언덕에서 늘 얼콰하게 취해서 노래를 부르며 걸어올라가며 이 어릴적 에피소드가 생각나셨다고 했다.

 

 누구나 이렇게 '저문강에 삽을 씻으며' 살아간다.

직장인들이 안정적인 직장에 가정을 가졌음에도 늘 밤마다 회식에서 술에 삽을 씻듯이,

작가들도 고단한 자기와의 싸움을 끝내고 글을 쓸때면 밤마다 이불을 들척이며 삽을 씻는다.

 

이 시집 정말 발군이다. 시편 하나하나가 진주 같아서 빨리 읽어버리기가 아까운 그런 시집이다.

 

정희성 선생님이 직접 신작 시 한수를 낭독해 주셨다.

 



 

실황 영상이다. 클릭!

http://video.naver.com/2008091817272417311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

 

 

                            정희성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모래처럼

외로운 지를 알았다

나의 불온성에 비추어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안다

그리고 모든 망가지는 것들이 한때는

새것이었음을

 

하지만 나에게 무슨 영광이 있었던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세상을 바라보았으나

사람들은 내가 한쪽 눈으로만 본다고

그래서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다고

세상은 그렇게 일목요연한 게 아니라고

 

내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다른 무엇일 거라고

결코 상상해서는 안 된다고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이념을 내려놓으라고

그런데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버릴 수 없는 꿈이 있기에

 

나는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알면서도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고 우기면서

내가 더 망가지기 전에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서 그래서

나는 더 외로운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왔던 한 노시인의 이런 득도한 자기고백은 정말 사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저문강에 삽을 씻으며' 살아왔던 시인은 '망가졌음을 안다며' '희망을 버리지 않기에 외로운' 것을 노래한다.

 

신념대로 살아가기엔 세상은 너무나 유혹적이고,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다.

적당히 세상에 뭍어가라고, 대충 남들처럼 살라고, 그런게 인생이라고 다들 내게 말한다.

 

올초에 너무나 힘들어서 한나라당 선거운동원 알바자리를 놓고 잠시 고민했었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지막까지 버릴수 없는게 있더라.

내가 아니다라고 생각한 건 하지 말고 살자는 작은 존심 같은게 있는데,

만약 그 선택을 했다면 아마 엄청 큰 충격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지금도 여전히 남들은 내게 좀 영악해 지라고, 비즈니스를 좀 하고 살라고, 현실을 좀 똑바로 보라고,

그렇게 말하지만 여전히 난 꿈에서 희망을 보기에 '저문강에 펜을 씻으며' 뚜벅뚜벅 걸어간다.

 

구부정하게 등장한 한 더벅머리 청년.

바로 하이미스터메모리 라는 록커다.

정희성 시인을 너무나 좋아한다며 꼭 시 한편을 음악으로 만들게 해달라며 싸인들 부탁하는 순박한 청년.

 

이 친구는 은희경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를 테마로 노래를 만들었단다.

 

문을 두드리는 소년에 관한 노랜데, 문득 이 노래를 들으며 짤막한 단편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문 두드리는 소년> written by 상범.

 

추운 겨울밤. 바람은 몰아치고, 언 손을 호호 불며 소년이 문을 세차게 두드린다.

아무리 두드려도 문 안쪽에서는 대답이 없다.

까치발을 세우고 창문 안을 들여다 본다.

서리를 닦고 바라본 안쪽은 파티가 한창이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노인들이 샹들리어 아래에서 와인을 마시며 왈츠를 춘다.

소년은 배가 고픈지 침을 삼키곤 고개를 툭 하고 떨어트린다.

그때 저 안쪽에서 소년이 아비가 고개를 돌려 소년을 쳐다본다.

소년은 창문에 얼굴을 박고 세차게 두드려 보지만 아비는 무심히 고개를 돌린다.

뚜벅뚜벅 다가와 아비는 창문의 커튼을 닫는다.

문앞에 선 소년은 다시 문을 세차게 두드리다 지쳐 그 자리에 주저 앉는다.

소년은 언 손을 호호 녹이곤 거리를 바라본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 혼자가 아니야. 너 혼자가 아니야...’

고개를 둘러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살짝 구름에 가린 달이 드러나자 길가에 주욱 늘어선 주택앞에 모두 언손을 녹이고 있는 소년과 소녀들이 늘어서 있다.

왈츠 소리가 적막한 거리를 울린다.

 

이 노래 발군이다.

딱 듣는 순간 그림이 딱 그려지는 그런 노래. 덕분에 나도 단편 시나리오 생각거리를 하나 얻었다.

 

이날 든 생각인데,

맨날 컴퓨터에 머리박고 글 쓰거나 책 읽는 것만으로는 절대 영감이 나오진 않는다는 거다.

 

거리를 다니고, 공연에 가서 음악도 즐기고, 사람도 만나면서 세상을 느끼고,

뭔가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이미스터메모리와 함께 했던 그 고운 목소리의 여성 보컬이 누군지 궁금하다.

참 분위기 있던데 말이다. 하여간 이 청년도 주목할 뮤지션으로 찜!

 



 

마지막으로 토미키타 라는 록커가 등장했다.

커다란 선글라스에 망사셔츠를 입고 하드한 보컬을 내지르니 이거 왠 마쵸맨 인가 했는데,

막상 말을 하는 걸 보니 순박한 면도 있는 뮤지션이다.

 

이름은 들어봤다 토미키타.

토미 힐피거 때문인가, 토미 리 존스 때문인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말이다.

재미교포 출신 록커인데, 모델도 하고 '마리아 마리아' 뮤지컬에서 예수 역할도 한 배우이기도 하다.

근데 이 록커가 부른 문학 노래는 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공연을 끝내고 싸인회를 하는 작가에게 싸인들 받았다.

정희성 시인에게 '저문강에 삽을 씻고' 책을 내밀며 '싸부님이 영화감독이신데 내일 생신이라 선물로 드리려 하니 코멘트 해주세요' 라며 말이다.

 

아까 위에 말했듯 싸부가 참 좋아하는 시라 직접 시인이 싸인한 시집을 드리면 참 좋아하실듯 해서 그런건데,

역시나 선물로 드렸더니 무척이나 감동하셨다. ㅎㅎ.

물론, 나도 '돌아다보면 문득' 시집에 싸인을 받았지만 말이다.

 

좋은 책에, 멋진 음악에 참 오랜만의 나들이라 기억에 남았지만,

그것보단 역시 방구석에서 글만 쓰지 말고 좀 돌아다니자 라는 생각이 든 날이었다.

 

특히 음악. 그동안 음악을 참 멀리 했구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사운드 데이에는 홍대에 가서 인디 뮤지션들의 음악의 세례에 푹 빠져봐야 겠다.

 

물론, 매달 상상마당에서 하는 북콘서트를 꼭 챙겨볼거고 말이다.

 

책과 음악.

그리고 영화.

 

내 인생의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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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광대 2008-10-10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blog.naver.com/movimage/90035284519
이미지가 있는 원문을 보시려면 이곳으로!
 

여행과 글쓰기는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나를 찾아가는 길 로써의 글쓰기는 일종의 삶이라는 여행을 위한 것이죠.

앞이 보이지 않고, 지치고 힘들어 쓰러지고 싶은 요즘 길을 찾아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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