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노 오사무 등 일부 지식인 사이에서는 1950년대 후반부터'시민'이라는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움직임이 있었다.그러나 시민을 프티 부르주아와 동의어로 보는 공산당 주변의 인식은 뿌리가 깊었고,이말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았다.그러나 안보 투쟁 속에서 공산당의 권위가 실추되고 노동자나 농민에 의존했던 기존 조직으로부터 독립된 운동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말로서 시민이 사용되어 갔다.
이런 시민은 안보 투쟁 속에서 나타난, 자립과 연대가 동시에 실현되는 상태를 표현한 말이었다.정치학자 후쿠다 간이치는 당시의 좌담회에서 개인이 자발적으로 조직을 만들고 연대를 낳는 감각이 안보 투쟁에서 생겨났다고 말하고,"궁극적으로는 일인 일당이 된 것이며, 그것이 시민정신이다"라고 말했다.에토 준도 자립과 연대를 겸비한 새로운 시민적 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햇다.
이런 시민이 기존 조직에서 독립된 상태를 표현한 말이 무당파 無黨派였다.쓰루미 슌스케는 "총평도 공산당도 사회당도 국민회의도, 거대 조직의 간부는 지도력을 잃고,회원들의 감정과 사상은 조직의 자리를 넘어서 국민적 규모를 지닌 무당무파의 흐름을 향해 흫러가고 있다."라고 말하며, 목소리 없는 목소리의 모임에 모인 사람들에 대해"자유롭게 모인 시민들이 자기들 스스로 새롭게 질서를 만들 수 있다는 ,인민 정부의 한 모형을 거기서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라고 평한다.
쓰루미가 여기서 쓴 "무당파"라는 말도,당시에는 그리 사용되지 않았다."무당파층"이라는 말이 신문의 표제 등에 정착한 것은 1977년이라고 여겨진다.그때 이 말은 "지지정당 없음"이라고 회답하는 사람들에, 정치적 무관심층을 포함해서 표현하게 되었다.그러나 1960년에 쓰루미가 "무당무파의 시민"이라는 말을 썼을 때는 다른 의미를 나타냈다.
그리고 이런 시민은 내셔널리즘과 모순되는 존재가 아니었다.p.631
요시모토는 자기 자신의 죄책감에서 해방되고자, 전후 사상이 쌓은 공적인 것의 논리를 해체했다. 고도 경제 성장 속에서 혁신 내셔널리즘이 퇴조하고 전후사상의 윤리적 기반이었던 전사자의 기억이 희박해지는 와중에, 사적인 것의 우선이야말로 전후 민주주의라는 인식이 이윽고 광범위하게 유포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마루야마 등이 중창한 민주와 애국의 결합이 다시 절단되었다.p.785
즉 이 책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새로운 시대를 향한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은,전후사상이 '민주'와 '애국'이라는 내셔널리즘의 말로써 표현하고자 시도해 온 이름 없는 것을, 말의 표면적인 상이점을 구별해서 받아들이고, 그것에 현대와 어울리는 형태를 부여하는 바꾸어 읽기를 하는 것이다.그것이 달성될 때, 전후의 구속을 진정으로 넘어설 수 있다.그리고 이책을 통독한 독자는 이미 그것을 위한 준비 작업을 마쳤다고 할 수 있다.p.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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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중국사는 명청시대사, 한국사는 조선사,일본사는 전국시대사에 집중하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그것을 역사공부라 여기고 살았다. 1955년을 전후로 한 일본과 청이후 현재 중국과 1945년 이후 한국은 등 현대사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지나치게 무지하고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외면하는 일이 많았다. 그것을 크게 반성하고 깨닫게 해준 책이 이것이었다. 현대에 살아가는 사람이 과거에 사로잡혀 현재를 외면하며 사는 격이었다. 이런 일이 비단 나만의 개인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