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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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만 먼저 말하자면, <공정하다는 착각>은 '현재 미국 사회의 문제'를 다룬 책이며, 이는 '현재 우리나라의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본인의 '학력/능력'보다 '사회 진출의 시기'에 따라 인생의 경로가 달라져가는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본인의 능력'으로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희망과, 그 희망을 짓밟는 정치인들의 자녀 관련 비리와 LH 사태 같은 문제가 터지지 않는 공정한 사회 그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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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불평등을 '능력(학력)에 따른 불평등'과 '세대 간의 불평등'으로 나눠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나라는 두 가지의 불평등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다만 나라마다 각각의 비중이 다를 수 있는데, 이를 결정하는 주요 인자 중 하나가 고용 정책이다. 미국은 해고가 자유롭고 해고 비용이 낮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노동 유연성이 높아서 경제 상황에 따라 대량 해고와 채용을 반복하게 되는데, 이 경우 채용 시기에 사회에서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고용될 확률이 높으며 보상 또한 크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저숙련 육체/사무 노동의 자동화가 진행되면서 사회에서 저학력자의 노동 가치는 낮아지고, 창의적 지식 노동을 담당할 고학력자의 가치가 높아지는, 학력에 의한 양극화 현상이 발생한다. 따라서 노동 유연성이 높은 나라에서는 가치의 양극화에 따라 고학력자/저학력자의 고용률 및 보상의 양극화가 진행된다.


    반면 과거의 유럽 국가나 한국과 같은 나라는 정규직의 해고가 어렵고 비용이 높아 노동 유연성이 낮은 편이다. 이 경우 경제 성장기에 채용한 노동자들을 침체기에 해고하기 어려우며, 이로 인해 두 가지의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로는 채용에 있어서 보수적인 경향을 띄게 되는데, 이는 어느 정도 검증된 고학력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중간에 이탈할 가능성이 적은 인원을 채용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게 된다. 둘째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회사 내부에서 인사 적체가 발생하며, 회사에서는 비용 절감을 위해 신규 채용을 점점 줄이는 방향으로 대응한다. 결국 앞선 세대의 쉬운 취업과 고용 안정성이 뒷 세대의 사회 진출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되어 세대 간 불평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실제로 200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서 대학 졸업자들이 정규직을 구하지 못해 한 달에 천 유로 정도로 적고 불규칙한 소득을 받으며 생활하는 이야기를 다룬 '천 유로 세대'라는 소설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뒤를 이어 우리나라에서도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널리 읽히면서 한동안 세대 간의 갈등이 화두가 되기도 했다. 2010년대 초반 유럽의 경제 위기 이후로 유럽과 우리나라는 고용 정책에 있어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경제 위기라는 현실에 직면했던 유럽은 각 나라마다 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노동 유연성을 높이고, 대신 사회 안전망 확대와 청년 고용에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을 펼쳤다. 코로나19 이전까지 유럽 국가들의 실업률 감소와 각종 경제지표 개선이 드러난 배경에는, 국제적 거시 경제 환경 자체가 개선된 영향도 있겠지만, 내부적인 경제 개혁 프로그램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경제 위기를 상대적으로 무난하게 넘어간 우리나라의 경우 고용 정책의 큰 틀이 계속 유지되어 오다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기존 정규직의 노동조건 및 고용 안정성 강화가 진행되었다. 이는 결국 우리나라 청년 취업률이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코로나의 영향을 빼고 보더라도, 그 이전부터 취업률의 감소는 두드러진 수준이었다. 20~30대 초반 세대와 그 윗세대의 정치 성향이 판이하게 달라진 이유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부동산 가격 급등에 의한 자산 차이에 더해서, 고용 안정성을 누리고 있는 세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가 갖는 현 정부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결국 현재, 특히 현 정부가 들어선 최근 3~4년 동안 우리나라 사회에서 발생한 양극화와 불평등은 학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세대 간의 차이로 인해 나타난 게 크다고 봐야할 것이다.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다루고 있는 미국 사회는 높은 노동 유연성으로 인해 능력주의와 학력에 의한 불평등이 만연한 상태이기 때문에, 책을 통해 능력주의의 폐해와 이론적 맹점을 다룸으로써 현재의 미국 사회에 대한 유효한 통찰을 던져줄 수 있다. 그러나 그 통찰이 현재의 우리나라에도 유효한 것은 아니다. 낮은 노동 유연성에 의한 세대 간 격차가 불평등의 주된 요인이 되어가는 우리나라 사회에서 '능력주의'와 '학력'의 문제를 짚는 이 책의 메시지는 결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처방이 될 수 없다.


    결론적으로 <공정하다는 착각>은 '현재 미국 사회의 문제'를 다룬 책이며, 이는 '현재 우리나라의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본인의 '학력/능력'보다 '사회 진출의 시기'에 따라 인생의 경로가 달라져가는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본인의 능력'으로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희망과, 그 희망을 짓밟는 정치인들의 자녀 관련 비리와 LH 사태 같은 문제가 터지지 않는 공정한 사회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책에서 진정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능력주의 그 자체보다는, "이 책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착각"을 심어주는 데에 일조한 추천사를 쓴 교수와 정치인들이다. 그들의 추천사는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현재 본인의 정치적 성향에 부합하는 내용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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