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의 말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나는 태생부터 긱geek이었다. 그네를 타기 전에는 가상의 스위치를 사용해 그네를 켜고, 그네를 다 타고 나면 스위치로 그네를 껐다고 한다. 기계를 보면 내부 동작을 바로 알 수 있었다. - P15

돌이켜 보면, 나는 뉴저지에서 매우 초현실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온갖 것을 뜯어 고치다 종종 엄마의 신경계를 교란시키기도 했다. 부모님은 50가지 전자 회로 모델을 만들 수 있는 프로젝트 키트를 많이 사주셨는데, 키트에 들어 있는 이런저런 부품을 서로 연결해 책에 없는 프로젝트를 만들기 시작하자 난감해하셨다. - P15

대부분의 아이들은 신문 배달을 했지만, 나는 텔레비전과 스테레오를 수리했다. - P15

학교 밖에서는 부모님이 나를 보이 스카우트와 (야구) 리틀 리그에 등록해주셨다. 나는 보이스카우트를 좋아했지만 리틀 리그는 싫어했다. 보이 스카우트를 통해 말타기부터 야외에서 생존하기 위해 안전하게 불을 다루는 법에 이르기까지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리틀 리그에서는 내가 팀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 P16

최근 많은 학생이 프로그래밍을 가르치는 방식에 불만을 표했다. 학생들은 온라인에서 정보를찾을 수 있지만, 필요한 모든 정보를 한꺼번에 찾을 수 있는 곳이 없는지 계속 질문했다. 나는 이 책이 그렇게 백과사전처럼 집대성된 자료가 되도록 집필했다. - P17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주변의 자잘한 물건을 분해하거나 수리하고 변경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기업은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DMCA, Digital Millennium Copyright Act 같은 법률을 악용해 사람들이 자신이 소유한 장치를 수리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다행히 일부 지역에서는 ‘수리할 권리‘라는 법률이 생겼다. - P18

1939년에 나온 고전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는 마법사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커튼 뒤에 있는남자에게 신경 쓰지 말아줘."라고 울부짖는 멋진 장면이 있다. 이 책은 이 마법사의 말을 듣기 싫어하고 커튼 뒤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 P18

옮긴이의 말

누구나 프로그래머가 될 수 있지만 누구나 좋은 프로그래머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P20

다뤄야 하는 분야가 많고 내용이 워낙 방대해서 번역 과정에서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많았다. 번역 원고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결점을 고치도록 지원해주신 김희정 사장님을 비롯한 책만 출판사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열심히 번역을 했지만, 혹 있을지 모르는 실수는 모두 역자인 나의 탓이다. 한편 추천글을 써주신 강유, 권정민, 박재호, 오명운, 오창훈, 이두희, 이일민, 이제현 님께도 감사드린다.


호주 브리즈번에서
-오현석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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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소 바깥에서까지 설계사를 만나려는 고객들은 대체로 인간관계에 목말라 있었고 고양이를 길렀다. 그 유연하고 버릇없는 털북숭이가 물건을 떨어트리거나 업무를 방해한다는 게 주된 이야깃거리였다. 고양이를 다른 방에 넣어두면 되잖아요? 그렇게 되물으면 고객들은 연쇄살인마라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P73

"촬영에서 이야기한 대로야. 나한테는 사무소 광고가 필요했고 릴리한테는 친구가 필요했던 거지. 서로 좋은 일을한 거야."
"면허 취소는?"
"나쁜 짓을 들키면 벌을 받아야지. 원래 그런 식이잖아." - P74

원하는 게 대체 뭐냐는 질문도 이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인공지능 설계사 직함을 그토록 쉽게 포기하진 않는다고도 했다. 그러게, 내가 바라는 게 뭘까? - P75

자율주행 프로그램이 대부분의 인간보다 유능해진 시대에이런 위험 요소를 남겨두는 건 구태라고밖에는 말할 수가없다. 그런데도 인류가 수동 조작 기능을 잃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영향력과 통제욕에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 P75

시영이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안다. 서른네 해를 살았는데 그 반응이 무슨 뜻인지 모르면 학습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고백에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게임은 내가 즐길만한 게 아니고, 나는 이미 시영에게 충분히 좋은 서비스를제공해줬다. 그래서 전략적인 퇴각을 택했을 뿐이다. 내가잘못한 것인가? - P76

. 인간관계를 최종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총점의 평균이 아니라 불합리한 과락 조건이니까. - P76

"그거. 약 꼬박꼬박 먹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정말로."
참, 사소한 이야기지만 단약을 시작했다. 개에게서 메일을 받은 날부터니까, 거의 한 달째다. 혈관에서 약의 흔적이 씻겨 나가는 게 시시각각 느껴진다. - P77

설계사 면허를 발급받으면 협회는 전용 워크스테이션을하나씩 보내준다. 인공지능 설계에 최적화된 고급형 컴퓨터다. 물리적 보안키가 내장되어 있는데 협회의 데이터 라이브러리(데이터 회사들과 제휴를 맺고 있다. 웬만한 건 유료다)에 접근하고 전용 프로그램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게 필요하다. 게다가 보안키 일련번호는 지문처럼 신경 관계망패턴 곳곳에 찍혀 나오기까지 한다. - P78

내 출근이 하루 미뤄질 예정이라고 했다. 다큐멘터리의논조에서부터 다자 계약의 세부 사항까지, 큰 방향을 다시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거였다. - P79

"한 달만이네요. 갑자기 연락이 와서 ・・・ 놀랐어요."
출근의 부작용인지 시영은 바닷가의 카페에서 보았을때보다 안색이 더 나빠져 있었다. 내가 인사치레를 마치자마자 애완 화분 이야기를 꺼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 P80

(전략).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자연스러운 분리정책에 고마워하고 있었다. 이 일대가 400제곱킬로미터 규모의 경제특구로 묶여 있다는 건 기본소득자와 나머지의거주지역이 명확히 나뉜다는 의미였고, 특구 안에서 거의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 P81

(전략). 하지만 서른여덟살의 설계사는 그 호칭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가윤의얼굴에 쾌활한 웃음이 일었다.
(중략).
가윤은 깊게 따지지 않았다. 그냥 쉬는 데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나이가 되어가는 것이다.  - P82

"전채는 글라블락스와 오징어 세비체였습니다. 이제 바질 소스와 올리브유에 절인 건조 토마토를 곁들인 합성육스테이크가…………."
웨이터의 어깨가 허공에 사출하고 있는 홀로그램 입자는 합성육이 55퍼센트의 소고기와 35퍼센트의 돼지고기,
그리고 10퍼센트의 사슴고기로 구성되었으며 등심과 안심의 중간적인 식감이라는 정보를 추가로 알려줬다. - P84

나는 웨이터의 미소 짓는 얼굴(곡선 세 개)을 응시하다가그게 등을 돌리는 타이밍에 맞춰 고개를 돌렸다. 가윤이 익숙한 태도로 합성육 스테이크를 자르고 있었다. 나이프가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고기의 절단면으로부터 새어 나온 육즙이 달궈진 돌판에 닿아 치직 소리를 냈다. - P85

"농담이 아니라, 생각이 나서 선배님이 놀라실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까 말했지만, 사무소는 정리했고 예약도 더 안 받고 있어요. 여기 올라온 것도 그것 때문이고."
(중략).
"엠바고가 걸려 있어요. 나중엔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될걸요." - P87

동생에게 고객들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특히 두 번째 고객에 대해서는, 나는 급조한 변명을 읊으면서 티 나지않을 만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거실 어딘가에 카메라가 있는 걸까? 아니면 아파트 현관에 CCTV가설치되어 있나?
"저녁 약 안 먹었지?"
"아직."
"가져와서 거실에서 먹어." - P90

동생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씻은 다음 머리가 마르길 기다리면서 서재의 생쥐들을 구경했고, 얌전히잠들었다. - P90

릴리/ 내레이션

"이 업계 이야기부터 해보죠. 아이돌이든, 인플루언서든,
슈퍼스타든 간에 사람을 팔아먹는 업계 말이에요. - P91

릴리 / 내레이션
"진짜를 파는 거죠. 열광할 만한 진짜요. 맞춤형 인공지능과는 달리 돈을 아무리 바쳐도 갖지 못하니까, 도리어모든 돈을 퍼부을 수 있는 거. 차마 건드릴 수 없을 것 같고 억지로 말을 듣게 할 힘도 없지만, 그래도 내 말을 들어줄 듯한 거. 그게 바로 공연에 관객석이 있는 이유죠. (후략)." - P92

이모지 박사

"그 사건이 터지고 3시간이 흐른 뒤에, 릴리가 연락했습니다. ‘닥터 이모지 라이브‘ 출연 전날이었죠. 대본을 수정해야겠다고 말하지 뭡니까. 라이브 쇼지만 질문이나도입부의 멘트 같은 건 사전 합의를 거치거든요." - P94

개/ 내레이션
"인간들은 사물을 외형에 따라 판단하는 습성이 있죠. 기계들도 예외는 아니고요. (후략)." - P96

어머니

"인기가 끔찍해? 정말로 신경 쓸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것 같니? 화면에 잠시라도 안 보이면 금방 잊히는데, 그잠깐을 못 참아?" - P98

릴리 / 내레이션

"인기는 정말로 순간적인 걸까요? 말없이 잠적했다면 정말로 잊힌 채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글쎄요. 내가 느낀 건 완전히 다른 거였죠. 발밑에 관심이 쌓이면서 나를 점점 높은 곳으로 올려보내는 것만 같았어요. (후략)." - P99

행인 2
"시간 낭비하지 마. 자기가 스타인 줄 아는 정신병자가한둘이야? (중략), 울면서 웃고 있네. 몸도 떨리고, 경찰을 불러야하는지 구급차를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는걸. 마약사범이 보통 어디로 가지?" - P100

릴리
"원래는 물리학계에 투신해보려 했어요. 시간을 돌리는것 말고는 대안이 없어 보였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죠. 대학교 원서를 쓰려면 집에 돌아가야 했는데, 좀 멀리 왔던 거예요. 휴대폰이 없으니 택시를 부르기도 곤란했고, 부모님에게 연락할 수도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한테 도움을 청하는 건 당연히 안될 일이었어요. (후략)."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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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음. 범인이 벼랑에서 몸을 던졌다고요......."
고바야카와 다카오는 복잡한 표정으로 가슴 앞에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비틀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인지 다트 머신 앞으로 가서 다트핀을 하나 집었다. - P216

"두 사람이 한 말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건 탐정으로서 당연한 일이겠죠. 당시 명탐정 기분이었던 저도 같은 의심을 품었습니다. 고로 씨와 쓰루오카를 의심한 건 아니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믿는 성격이었거든요." - P216

"통나무 다리 건너편은 어땠습니까?"
(중략).
"실은 그 직후부터 기억이 없습니다. 머릿속에 기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요."
"아니, 기억이 없다니요?! 왜 그런 일이?!"
"어른들에게 들은 바로는 제가 다리에서 떨어졌답니다. (후략)." - P217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당시 사이다이지 가문의 가장이었던 사이다이지 도시로 씨가 비탈섬의 별장에서 살해당했다. 범인은 섬북쪽 가장자리로 도망친 끝에 벼랑에서 바다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건만, 더 나아가 이 살인사건은 아무도 모르도록 완벽하게 은폐됐던 모양이다.
그 사실에 사야카는 끝 모를 공포를 느꼈다.  - P218

(전략).
아픈 곳을 찔린 듯 의사의 표정이 흐려졌다.
"즉, 당시 아무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말라고 선생님을 입막음한사람이 있었다는 뜻이겠죠. 누구입니까? 물어볼 것도 없이 대충 짐작은 가지만요." - P219

(전략).
"오카야마 사투리로 물어보셨군요. 당시의 선생님은." 다카오가쓸데없는 점을 확인하자 이상합니까? 하나도 안 이상한데요!" 하고다카자와는 딱 잘라 말했다.
물론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카야마에 사는 중학생 남자아이가 오카야마 사투리를 사용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 P220

"당시 아버님은 오카야마 사투리로 대답하셨군요!"
"무슨 사투리든 상관없잖습니까!"
물론 무슨 사투리든 전혀 상관없다. 문제는 그 내용이다. 사이다이지 도시로 씨가 살해당한 현장을 목격한 다카자와. 하지만 그의아버지는 도시로 씨가 병으로 죽었다고 알렸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충격과 혼란이 컸을까. 사야카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 P221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인 겁니까?"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리나마 이해한 거예요. 이게 사이다이지 가문 입장에서는 일종의 스캔들이라는 걸. 회사 사장이자 가장이기도 한 도시로 씨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으니까요. 미디어도 가만히 내버려두지는 않겠죠. (후략)."

4

이로써 23년 전에 일어났던 기묘한 사건에 관한 설명이 끝났다.
게임룸에 잠깐 침묵이 내렸다. 의사는 말을 많이 해서 피곤한 듯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 P223

"그 선대 스님은 도시로 씨의 죽음에 얽힌 진상을 알고 계셨을까요?"
"아니요, 그건 아닐 겁니다. 진상을 모른다고 장례식에 차질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요. 선대 스님은 참석자와 마찬가지로 도시로씨가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믿고 장례식에 임했을 거예요. 그런 장례식으로 고인의 영혼이 성불할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 P224

"그럼 그동안 아버님은 섬에 돌아가지 않고 선생님 옆에 붙어 계셨습니까?"
"네, 섬에는 돌아가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제 옆에만 붙어있었던 건 아니고요. 오히려 다른 환자 때문에 바빴는지, 옆 병실에드나들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허, 친아들보다 중요한 환자가 있을까요? 그 환자는 누구였습니까?" - P225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느낌에 지나지 않지만......." 다카자와는 신중하게 서론을 깔고 나서 말을 이었다. "옆 병실에 가나에 부인만 입원한 게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누군가 한명 더 있는 것 아닌가 싶었어요. 벽이 얇아서 옆 병실 환자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는데, 가나에 부인이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듯한 기척이 가끔 느껴졌습니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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