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단어의 위치에 신경 써라

문장성분을 제대로 갖춰 온전한 문장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이들 성분을 순서에 맞게 잘 배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장성분의 위치가 잘못되면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심한 경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므로 수식 관계를 잘 살펴 단어나 구절을 적절한 곳에 두어야 한다. - P102

주어와 서술어 사이가 너무 멀어서도 안 된다. - P102

15

수식어는 수식되는 말
가까이에



‘아름다운 그녀의 웨딩드레스라고 하면 무엇이 아름다운 것일까? 만약 웨딩드레스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녀의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라고 하는 것이 낫다. 이처럼 글의 흐름상 수식어는 바로 뒷말을 꾸미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 P104

진정한 효의 의미를 아는 젊은이라면 이 같은 부모의 마음을 깊이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진정한‘이 수식하는 것은 ‘효‘가 아니라 ‘의미‘이고, ‘이 같은‘이 수식하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마음‘이다. 이들 단어를 수식되는 말 가까이에 놓아야 의미가 확실해지고 문장이 부드러워진다.

→효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젊은이라면 부모의 이 같은 마음을 깊이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 P105

재정안정을 위해 새로운 제도를 추진하고 있으나 일부는 도입이 아예불투명한 상태다.

‘아예‘가 수식하는 것은 ‘불투명한‘이 아니라 ‘도입‘이므로 그 앞에위치해야 한다.

→재정안정을 위해 새로운 제도를 추진하고 있으나 일부는 아예 도입이 불투명한 상태다. - P106

정부는 개인정보를 보호한다는 관점에서 고액 납세자의 이름과 주소를 공개하는 제도를 폐지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개인정보를 보호한다는 관점에서‘가 ‘고액 납세자의 이름과 주소를 공개하는 제도‘를 수식하는 것처럼 보여 어색하다. ‘폐지하는앞으로 가야 한다.

→정부는 고액 납세자의 이름과 주소를 공개하는 제도를 개인정보를보호한다는 관점에서 폐지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 P107

16

주어와 서술어는
너무 멀지 않게


"부모는 학생이 수능 점수가 좋지 않다고 실망하지 말고 자기적성에 맞는 학과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부모는 ~도와야 한다)에서 보듯 겹문장일 경우 전체 문장의 주어가 서술어와멀리 떨어져 있으면 어느 서술어와 호응하는지 판단하기 힘들다. - P108

시민들이 사고로 숨진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물 앞 계단에 촛불을 늘어놓으며 애도를 표시하고 있다.

‘시민들이‘와 ‘애도를 표시하고 있다‘ 사이에 긴 수식어가 있어 읽기 불편하다. ‘시민들이‘를 ‘건물 앞 계단에‘ 앞에 두는 것이 부드럽다.

→사고로 숨진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시민들이 건물 앞 계단에촛불을 늘어놓으며 애도를 표시하고 있다. - P109

기자들이 18일 오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법에 출두하는정치인을 취재하고 있다.

읽다 보면 언뜻 기자들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로 비칠 수있다. 목적어가 길기 때문에 주어 ‘기자들이‘를 서술어 취재하고있다‘ 바로 앞에 두는 것이 좋다.

→18일 오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법에 출두하는 정치인을 기자들이 취재하고 있다. - P109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간에 최고경영자가 권위가 손상받는 일 없이회사 경영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최고경영자가‘와 ‘권위가‘가 나란히 붙어 있어 읽기 불편하다. 최고경영자가‘를 서술어 가까이에 두는 것이 자연스럽다. 요령을 부려 ‘권위가 손상받는 일 없이‘를 ‘권위 손상 없이‘로 해도 된다.

→1.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간에 권위가 손상받는 일 없이 최고경영자가 회사 경영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간에 최고경영자가 권위 손상 없이 회사 경영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P110

제6장

적확한 단어를 선택하라

비슷한 단어를 혼동해 쓰는 경우가 많다. ‘부문‘과 ‘부분‘, ‘조종‘과 ‘조정‘처럼 모양과 뜻이 비슷한 한자어의 개념을 정확히 모르고 사용하는 예가 적지 않다. - P115

적확한(꼭 맞는)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어휘력이 밑받침돼야 하지만 궁금할 때마다 사전을 찾아보는 습관을 들이면 도움이 된다. - P116

18

비슷한 한자어
구분하기


•일절 일체

안주 일절, 외상 일체 사절!

일절(一切)은 ‘아주‘ ‘전혀‘ ‘절대로‘의 뜻이다. ‘
(중략) 일체(一切)는 ‘모든 것‘ 또는 ‘모두 다‘를 의미한다. (중략) 한자는 같으면서도 일절‘과 ‘일체‘로 차이가 나는 것은 ‘‘切이(가) ‘끊을절‘ ‘모두 체‘의 두 가지 뜻으로 달리 읽히기 때문이다.

→안주 일체, 외상 일절 사절! - P117

•운영·운용

새 정부의 경제정책 운영이 일관성이 없어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

운영(運營)은 조직이나 기구·사업체 등을 경영하는 것이며, 운용(運用)은 무엇을 움직이게 하거나 부리는 것이다. 정책·제도·법인력 등에는 ‘운용‘이 어울린다.

→새 정부의 경제정책 운용이 일관성이 없어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 - P118

• 참석 · 참가 · 참여

이번 행사에는 세계 20여 개국에서 300여 명의 예술가가 참석했다.

‘참석‘은 비교적 작은 규모의 모임이나 회의에 함께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행사 · 대회 등 규모가 큰 것에는 ‘참가‘가 어울린다.
‘참여‘는 ‘현실 참여‘ ‘경영 참여‘ 등에서처럼 어떤 일에 끼어들어 관계하는 것으로 추상적인 형태의 활동까지 포함한다.

→이번 행사에는 세계 20여 개국에서 300여 명의 예술가가 참가했다. - P119

•주인공 · 장본인

최고 인기 여배우의 마음을 사로잡은 행운의 장본인이 누구인지 세인들의 관심이 대단했다.

사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긴 하나 장본인張本人)은 부정적인곳에 주인공(主人公)은 긍정적인 곳에 잘 어울린다.

→최고 인기 여배우의 마음을 사로잡은 행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세인들의 관심이 대단했다. - P120

•당사자, 주역

그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어 낸 당사자다.

당사자는 어떤 일이나 사건에 직접 관계가 있거나 관계한사람이란 뜻이다. (중략). 주역(主役)은 주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사건 해결의 주역들‘ ‘그는 팀이 우승하는 데 주역이 되었다‘ 등처럼 사용된다.

→그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어 낸 주역이다. - P120

•반증 · 방증

절제되지 않은 언어로 상대방의 감정이나 건드리려 하는 건 자신의 논리가 빈약하다는 반증이다.

반증(反證)은 반대되는 증거이며, 방증(傍證)은 주변 상황을 밝힘으로써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중략) ‘방중‘의 경우 ‘증거‘로 바꾸어도 뜻이 통한다.

→절제되지 않은 언어로 상대방의 감정이나 건드리려 하는 건 자신의논리가 빈약하다는 방증이다(증거다). - P121

• 배상. 보상

다른 건물이 들어서 조망권·일조권을 침해당하면 이에 대한 배상을 받을 수 있는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배상(賠償)은 불법행위로 인해 발생한 손실을 물어 주는 것이고,
보상(補償)은 적법행위로 인한 손해를 물어 주는 것이다. (후략)

→다른 건물이 들어서 조망권 · 일조권을 침해당하면 이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 P123

•곤욕·곤혹

지나치게 복잡한 입학 전형 방식이 학생과 부모들을 곤욕스럽게 만들고 있다.

곤욕(困辱)은 심한 모욕을 뜻한다. ‘곤욕을 치르다‘ ‘곤욕을 겪다‘
등의 예로 쓰인다. 곤혹(困惑)은 곤란한 일을 당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후략)

→지나치게 복잡한 입학 전형 방식이 학생과 부모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 P123

• 시험·실험

평화헌법을 보유한 일본이 군대 및 전쟁에 대한 태도를 바꾼 데는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실험발사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

‘시험‘과 ‘실험‘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시험(試驗)은 주로 행위를 뜻하는 명사 앞에 붙어 시험 삼아 무엇을 해 볼 때 쓰인다. 실험(實驗)은 행위를 뜻하지 않는 명사 앞에 붙어 과학 부문에서 어떤 현상을 조사·관찰하거나 새로운 방법·형식을 사용해 볼 때 쓰인다.
(생략)

→평화헌법을 보유한 일본이 군대 및 전쟁에 대한 태도를 바꾼 데는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가(발사실험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 P124

19

비슷한 순우리말
구분하기

• -든지, -던지

어젯밤에 술을 얼마나 마셨든지 아무 기억도 안 난다.

‘-든지‘는 선택, ‘-던지‘는 과거 회상을 나타낸다. ‘-든‘, ‘든지‘
‘든가‘ 등 ‘든‘이 들어간 것은 선택, ‘-던‘ ‘-던지‘ ‘-던가‘ 등 ‘던‘
이 들어간 것은 과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된다.

→어젯밤에 술을 얼마나 마셨던지 아무 기억도 안 난다. - P126

• 붙이다. 부치다

기득권 계층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중요 사안을 국민투표에 붙이는 등개혁 정책을 밀어부쳤다.

‘붙이다‘는 떨어지지 않게 하다. 관계를 맺게 하다, 말을 걸다, 뺨을 때리다 등의 뜻이 있다. ‘부치다‘는 힘이 미치지 못하다, 편지나 물건을 보내다, 의논 대상으로 내놓다, 논밭을 다루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후략)

→"기득권 계층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중요 사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는 등 개혁 정책을 밀어붙였다. - P128

•탓 · 덕분. 때문

특소세가 내린 탓에 그나마 매출이 조금 늘었다.

‘탓‘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때, ‘덕분(德分)‘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때 쓴다. ‘때문‘은 두 경우 모두 사용할 수 있다.

→1. 특소세가 내린 덕분에 그나마 매출이 조금 늘었다.
2. 특소세가 내린 때문에 그나마 매출이 조금 늘었다. - P131

• 결단 결딴

정부가 빨리 결딴을 내리지 않으면 우리 경제가 결단나게 생겼다.

결단(決斷)은 결정적 판단이나 단정을 의미하는 한자어다. ‘결단‘
은 아주 망가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정부가 빨리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우리 경제가 결딴나게 생겼다. - P132

20

조사 정확하게
사용하기


조사는 그 말과 다른 말의 문법적 관계를 표시하거나 그 말의 뜻을 도와주는 품사다. 크게 격조사 · 접속조사 · 보조사가 있다. - P134

보조사는 문법적 구실보다는 단어의 섬세한 의미를 전달하는 조사다. 글 쓰는 사람이 전달하고자 하는 섬세한 뉘앙스를 간단하고도 함축적으로 표현해 내는 역할을 한다. - P134

•공부를 잘한다 : 단순히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만 나타냄.
•공부는 잘한다: 다른 것은 못하지만 공부 하나는 잘한다는 의미를 내포.
•공부도 잘한다: 다른 것도 잘하고 공부도 잘한다는 의미를 가짐. - P135

그녀와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다.

‘생각할 수가‘보다 ‘생각할 수조차‘가 예상하기 어려운 극단의 경우임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다.

→그녀와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 P135

막내도 출가시키고 나니 몹시 허전하다.

하나 남은 마지막임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막내도‘보다 ‘막내마제‘가 적당하다.

→막내마저 출가시키고 나니 몹시 허전하다. - P136

04

문장은
짧게

(전략). 아무리 잘 짜인 문장이라하더라도 길면 사람의 호흡과 일치하지 않으므로 읽어 내려가기힘들고 지루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문장이 길어서 좋은 점은 거의 없다. (중략).
한 문장은 딱히 몇 자가 돼야 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30자나 50자 이내가 적당하다. 길어도 60자를 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 P39

한 문장에 너무 많은 내용을 집어넣으려 하지 말고 한 가지 내용만 담는다는 생각으로 짧게 끊어 쓰는 것이 좋다. 긴 듯하거나 복잡하다 싶으면 두세 문장으로 나눠 써야 한다. - P39

많은 수험생이 전공과 대학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인기학과나 소위 명문 대학을 중시해 진학하는 경향이 짙으며, 특히 최근에는 취업난 때문에 졸업 후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학과 선호도가 분명해지고 있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전공을 선택해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의 경우 전공 공부에 흥미를 갖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례가 많다.

이처럼 문장이 길면 끝까지 읽어 내려가기 힘들고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다 읽고도 무슨 말인지 몰라 다시 한 번 읽어야 하는수고를 끼칠 수 있다. 적당한 길이로 끊어 메시지를 나누어 담는것이 바람직하다.

→많은 수험생이 전공과 대학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인기학과나 소위 명문 대학을 중시해 진학하는 경향이 짙다. 특히 최근에는 취업난 때문에 졸업 후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학과 선호도가 분명해지고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전공을 선택해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의 경우 전공 공부에 흥미를 갖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례가 많다. - P40

정보서비스 · 전자상거래 · 홈뱅킹 등 수용자의 다양한 정보 욕구를 충족시켜 줄 쌍방향 데이터 서비스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방송·통신 융합에 따른 데이터 서비스 개념을 정립하고 새로운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하며, 기술 개발 및 표준형 수신기의 생산 산업화를 조속히 이루어야 한다.

어렵고 딱딱한 내용일수록 짧게 끊어 쓰는 것이 좋다. 두세 문장으로 분리해 메시지를 나누어 담으면 훨씬 읽기 편하고 의미를파악하기 쉽다.

→1. 쌍방향 데이터 서비스는 정보서비스 · 전자상거래 · 홈뱅킹 등 수용자의 다양한 정보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 이러한 서비스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방송·통신 융합에 따른 데이터 서비스 개념을 정립하고 새로운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하며, 기술 개발 및 표준형 수신기의 생산 산업화를 조속히 이루어야 한다. <두 문장>
2. 쌍방향 데이터 서비스는 정보서비스·전자상거래 - 홈뱅킹 등 수용자의 다양한 정보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 이러한 서비스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방송·통신 융합에 따른 데이터 서비스 개념을 정립하고 새로운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이와 함께 기술 개발 및 표준형 수신기의생산 산업화를 조속히 이루어야 한다. <세 문장> - P42

05

‘그녀‘는아름답지 않다

‘그녀‘라는 말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일찍이 서양 문학을 접한 일본 문인들은 영어의 ‘she‘를 번역하는 말로 ‘가노조‘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다. - P205

그러나 이를 두고 이후 여러 차례 논란이 인다. 그 바탕에는 우리말에선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그‘를 쓰기 때문에 ‘그녀‘가 필요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녀‘는 또 ‘우리말(그)+한자어(女)‘
로, 이렇게 결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 P205

‘그남(男)‘을 가정해 보면 ‘그녀‘가 얼마나 어설픈지 알 수있다. - P206

물론 ‘그녀‘에 대해 크게 이의를 달 필요가 없다는 사람도 있다. 세월은 흘러 더욱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이제 와서 사용하지 않을 순 없지만 남용하지는 말아야 한다. - P206

08

‘처녀출전‘은 있는데
‘총각출전‘은 없나요?

주로 스포츠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로 ‘처녀출전이라는 것이있다. 처녀출전이 있으면 당연히 ‘총각출전‘이 있어야 한다. 스포츠는 처녀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총각들도 스포츠를 한다. 그러나참 희한한게 총각출전이라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질 못했다. - P211

이런 조어가 만들어진 것은 영어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 처녀림(virgin forest), 처녀비행(maiden flight),
처녀항해(maiden voyage), 처녀연설(maiden speech) 등이 영어에 있는 표현이다. - P212

여성의 성적·신체적인 면을 이용한 이런 표현이 남성 중심적 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서다. 한마디로성 차별적인 표현이다. ‘처음 출전‘ ‘첫 우승‘ ‘최초 비행‘ 등처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표현인 ‘처음, 첫, 최초‘를 사용해도 의미를 전달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 P212

10

접속사가 없어야
좋은 문장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로마 최고의 정치가이자 장군이며 문필가이기도 했던 율리우스 시저(이탈리아어 카이사르)가 소아시아 젤라에서 파르나케스와벌인 전투에서 승리한 후 원로원에 보낸 전문이다. 이 말은 영원한 명언으로 남아 있다. - P216

 간단명료하게 작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 말할 때처럼 군더더기가 많아서는 좋은 문장이 될 수 없다. 군더더기가 있느냐 없느냐는 글 쓰는 능력을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 P217

특히 일이 순서대로 진행될 때는 접속사가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 P217

접속사가 남용되는 것은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에서뿐만이아니다. 단락과 단락을 연결할 때도 ‘그런데‘ ‘그리고‘ ‘그래서‘ ‘한편‘ 등 불필요하게 접속사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글쓰기 경험이 부족한 사람의 글을 유심히 보면 단락의 맨 앞에는 여지없이 접속사가 나온다. - P218

가능하면 접속사 없이 글을 쓰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접속사없이 각 단락과 문장을 부드럽게 연결하도록 노력해야 글쓰기가 발전한다. - P218

16

‘삼가하다‘를
삼갑시다


자주 쓰면서도 틀리기 쉬운 단어가 ‘삼가다‘다. ‘조심하다‘ ‘지나치지 않도록 하다‘ ‘금지하다‘의 뜻으로 흔히 사용하는 말이지만 ‘삼가하다‘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 P231

기사에서도 "단식 중인 그는 이날부터 외부인의 방문도 받지않고 언론 접촉도 가급적 삼가할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섣부른 투자는 삼가할 것을 조언하고 있다" 등처럼 ‘삼가하다‘ 형태로 잘못 쓰는 예가 있다. - P231

‘삼가다‘를 ‘삼가하다‘로 쓰는 이유는 동사의 기본형이 ‘-하다‘
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삼가다‘의 발음이 어렵기 때문이다. ‘삼가다‘를 활용한 ‘삼가니‘ ‘삼가고‘ ‘삼가서‘ ‘삼갑시다‘보다 ‘삼가하다‘를 활용한 ‘삼가하니‘ ‘삼가하고‘ ‘삼가해서‘ ‘삼가합시다‘가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발음하기도 쉽다. - P232

이러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삼가다‘를 표준어로 삼고 있어 ‘삼가하다‘로 쓰면 틀린 말이 된다. ‘나가다‘ ‘오다‘ ‘막가다‘처럼 기본형이 ‘삼가다‘이기 때문에 그 활용은 ‘삼가+고(니/면/서/자/라/주십시오)‘ 등으로 해야 한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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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고통의 급증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와 대화를 할 때면 대화 내용이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 비디오게임으로 흘러갈 때가 많다. 부모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대개 몇 가지 공통적인 패턴으로 귀결된다. 하나는 ‘끝없는 갈등이다. - P43

나와 대화를 나눈 대다수 부모가 하는 이야기는 병원에서 진단받은 정신 질환에 관한 것이 아니다.  - P43

남자아이는 대개 소셜 미디어보다는 비디오게임 (그리고 때로는 포르노)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간혹 게임을 하던 단계에서 게임 중독에 가까운 단계로 전환할 때 특히 문제가 심각해진다. - P44

이야기의 패턴이나 심각성 정도에 상관없이 모든 부모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진퇴양난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다. 대다수 부모는 자녀가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를 보내길 원치 않지만, 세상 자체가 확 바뀌어 그 물결에 저항하는 부모는 자녀를 사회적격리 상태로 내몰게 된다. - P45

이 장의 나머지 부분애서는 뭔가 큰잉이 일어나고 있으며, 2010대 초반에 젊은이들의 삶에 일어난 변화가 그들의 정신 건강을 급격히 악화시켰다는 증거를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데이터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 어떤 의미에서 자녀가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갔다고느끼고 이제 그들을 되찾아오려고 애쓰는 부모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기로 하자. - P46

해일이 밀려오기 시작하다

2000년대에는 청소년에게 정신 질환 위기가 임박했다는 징후가 거의 없었다.² 그러다가 갑자기 2010년대 초반에 상황이 확 변했다. 모든 정신 질환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 P46

1장 고통의 급증


2. 이 진술에서 벗어나는 예외는 미국 십대 청소년의 자살률이다. 자살률은 2000년대 초반에 전반적으로 감소하다가 2007년에 최저점을 찍었다. 2008년부터 전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지만, 2010년이 지나기까지는 2000년대 초반 수준을 넘어서진 않았다.
자살률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더 먼 과거를 살펴보면, 1950년대 이후부터, 시기에 따라 기복은 있었지만 미국 청소년 사이에서 우울증과 불안을 비롯해 그 밖의 정신 질환 발생 비율이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2010년대 초반의 ‘하키 스틱‘ 커브와 같은 추세는 나타난 적이 없었는데, 그러한 증가추세는 이장과 이 책 전체에서 보게 될 것이다. Twenge et al. (2010) 참고. - P441

그림 1.1에서 2012년경부터 주요 우울증 에피소드 비율이 갑자기 크게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림 1.1과 뒤에 나오는 대다수 그래프에 음영 표시를 추가했는데, ‘아동기 대재편‘이 일어난 시기인 2010~2015년에 뭔가 괄목할 만한 일이 일어났는지 판단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절대적 수치(2010년 이후에 증가한 발병 건수)로 보면,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보다 훨씬 크게 증가했고, 하키 스틱 모양의 증가 양상이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P48

3. 2021 Substance Abuse and Mental Health Services Admin-istration (2023)014. - P441

그림 1.1에서 2012년경부터 주요 우울증 에피소드 비율이 갑자기크게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림 1.1과 뒤에 나오는 대다수 그래프에 음영 표시를 추가했는데, ‘아동기 대재편‘이 일어난 시기인 2010~2015년에 뭔가 괄목할 만한 일이 일어났는지 판단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절대적 수치(2010년 이후에 증가한 발병 건수)로 보면,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보다 훨씬 크게 증가했고, 하키 스틱 모양의 증가 양상이 훨씬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은 애초에 여자아이들보다훨씬 낮은 수준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상대적 비율(내가 항상 기준선으로 사용하는 2010년 이후의 비율 변화)로 보면 증가 비율은 양성 모두 약150%로 비슷하다. 즉, 우울증 발생 빈도는 약 2.5배나 증가했다. 이러한 증가 추세는 모든 인종과 사회 계층에서 나타났다.⁴ - P48

4. 인구학적 변화에 관한 주석: 2010년 이후에 성별이나 성적 지향성, 사회 계층에 상관없이 미국의 모든 집단에서 청소년 정신 질환이 증가하는 추세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전반적으로 오랫동안 흑인 십대는 백인 십대보다 불안, 우울증, 자해, 자살 비율이 낮았지만, 양 집단 모두 2010년 이후에 그 비율이 크게 증가했다. 절대적인 증가는 백인십대에서 더 크게 나타난 반면, 상대적 증가(비율)는 흑인 십대에서 더 크게 나타났다(더 낮은 기준선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사회 계층에 초점을 맞춘 데이터는 드물지만, 우울증 발생은 모든 계층에서 비슷한 추세가 나타났는데, 2010년부터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LGBTQ 십대는 이성애자 십대에 비해 앞의 모든 사례에서 상당히 더 높은 비율을 보고한다. 하지만 2010년 이후에 LGBTQ 십대의 자해와 자살 비율이 증가했다는 결정적 증거는 없다. 이 통계 수치와 추가 내용에 관한 출처는 온라인 부록 내용, 특히 Adolescent Mood Disorders Since 2010: A Collaborative Review 링크를 참고하라. - P441

급증의 근본 원인


2010년대 초반에 십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누가 언제부터 무슨 일로 고통을 받았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급증의 원인을 확인하고 그 물결을 되돌릴 잠재적 방법을 찾으려면, 이 질문들에 대해 정확한 답을 알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P48

 첫 번째 단서는 정신 질환증가가 불안과 우울증과 관련된 장애에 집중되었다는 점인데, 정신의학에서 이들 장애는 뭉뚱 그려서 내면화 장애internalizing disorder로 분류한다. - P49

반대로 외면화 장애는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그 증상과 반응을 다른 사람들을 향해 밖으로 표출할 때 나타난다. 행동 장애, 분노 조절장애, 폭력 성향과 과도한 위험 감수 성향 등이 이에 포함된다. 나이와 문화, 국가에 상관없이 내면화 장애는 여자아이와 여성에게서 더높은 비율로 나타나는 반면, 외면화 장애는 남자아이와 남성에게서더 높은 비율로 나타난다.⁶ - P49

6. Zahn-Waxler et al. (2008). - P442

 우울증과 불안을 나타내는 선은 나머지 진단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시작하여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나 다른 진단들보다 더 크게 증가했다. 2010년대에 대학교 캠퍼스에서 증가한 정신 질환은 거의 다 불안 그리고/또는우울증 증가가 차지한다.⁹ - P49

9. 그림 1.2에 나타낸 각 정신 질환의 진단 비율은 증가하고 있지만, 100% 이상 증가한것은 내면화 장애 세 가지뿐이다.(섭식 장애인 신경성 식욕 부진은 불안과 관련이 있어 내면화 장애로 분류된다.)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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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 P11

너는 걷다 지친 듯 여름풀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작은 새 두 마리가 나란히 상공을 가로지르며 날카롭게 울었다. 침묵 속에서 푸른 땅거미의 전조가 둘을 감싸기 시작한다 - P12

"도시는 높은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어." 너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침묵의 밑바닥을 뒤져 말을 찾아 온다. 맨몸으로심해에 내려가 진주를 캐는 사람처럼. "그다지 큰 도시는 아니야. 하지만 한눈에 다 들어올 만큼 작지도 않아."
네가 그 도시를 입에 올린 건 이번이 두번째다. 그렇게 도시에는 사방을 둘러싼 높은 벽이 생겼다. - P12

"진짜 내가 사는 곳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 안이야."
너는 말한다.
"그럼, 지금 내 앞에 있는 너는 진짜 네가 아니구나." 당연히 나는 그렇게 묻는다.
"그래.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 대역에 지나지 않아, 흘러가는 그림자 같은 거야." - P13

"아니. 아무나 자유롭게 들어가진 못해. 그곳에 들어가려면 특별한 자격이 필요해. 하지만 너는 들어갈 수 있어. 네게는그 자격이 있으니까."
"특별한 자격이라는 게 뭘까?"
너는 가만히 미소 짓는다. 하지만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곳에 가기만 한다면, 나는 진짜 너를 만날 수 있는 거지?" - P14

그 도시에 가고 싶다고, 나는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그곳에서 진짜 너를 만나고 싶다고. - P15

나는 그 도시에서 진짜 너와 만나는 상상을 한다. 도시 외곽에 아름답게 우거진 드넓은 사과나무 숲과 강에 놓인 세 개의돌다리와, 보이지 않는 밤꾀꼬리의 지저귐을 마음속에 그린다. 그리고 상상한다. 진짜 네가 일하고 있는 작고 오래된 도서관을
"너를 위한 장소는 늘 그곳에 마련되어 있어." 네가 말한다. - P15

"꿈 읽는 이‘가 될 거야"라고 너는 소리 낮춰 말한다.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그 말에 나는 무심코 웃고 만다. "저기, 나는 내가 꾼 꿈도제대로 기억 못해. 그런 인간이 ‘꿈 읽는 이‘가 되기란 상당히 어려울 텐데." - P16

"어째서인지, 너는 모르겠어?"
나는 안다. 그렇다, 내가 지금 가만히 어깨를 안고 있는 것은 너의 대역일 뿐이다. 진짜 너는 그 도시에 살고 있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아득히 먼 수수께끼의 도시에. - P17

2

이 실제 세계에서, 나와 너는 조금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아주 멀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충동적으로 곧장 만나러 갈수 있을 정도로 가깝지도 않다.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한 시간 반쯤 걸려야 네가 사는 도시에 다다를 수 있다. - P18

나는 바다 근처 조용한 교외 주택가에 살고, 너는 훨씬 크고번화한 도시 중심부에 살고 있다. 그 여름,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너는 2학년이다. - P18

네가 우리 동네에 올 때면 주로 단둘이 강가나 바닷가를 산책한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너희 집 근처에는 강이 흐르지 않고 물론 바다도 없기 때문에, 너는 우리 동네에 오면 제일 먼저 강이나 바다를 보고 싶어한다. 그곳을 가득 채운 자연의 물-너는 그것에 마음이 끌린다.
"물을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져"라고 너는 말한다. "물이 내는 소리를 듣는 게 좋아." - P19

물론 내가 신체적 욕구를 품지 않았던 건 아니다. 열일곱 살의 건강한 소년이 아름답게 가슴이 부푼 열여섯 살 소녀를 앞에 두고, 하물며 그 부드러운 몸에 팔을 두르면서 성적 욕구에 휩싸이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좀더 나중으로 미뤄도 되리라고, 나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 P20

그런데 그렇게 이마를 맞대고서 우리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나눴을까? 지금 와서는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화제를 하나하나 가려내기가 불가능해진 것이라. - P21

주로 네가 도시의 큰 틀을 말해주면 내가 그에 대해 실제적인 질문을 하고 네가 대답해서 보충하는 식으로 도시의 구체적인 세부가 결정되고 기록되어갔다. 그 도시는 원래 네가 만들어낸 것이다. 혹은 네 안에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 P21

3


가을, 짐승들의 몸은 다가올 추운 계절에 대비해 눈부신 황금색 털로 뒤덮인다. 이마에 돋은 외뿔은 희고 날카롭다. 그들은 차가운 강물에 발굽을 씻고, 가만히 고개를 뻗어 붉은 나무열매를 탐하고 금작화 이파리를 씹는다.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 P22

한순간 모든 것이 조각상처럼 고정된다. 움직이는 건 바람에 부드럽게 나부끼는 황금색 털뿐이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보는걸까? 짐승들은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허공을 응시하고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뿔피리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뿔피리의 마지막 울림이 허공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지면, 그들은 앞발을 가지런히 모아 몸을 일으키고, 혹은 기지개를 켜서 자세를 가다듬고는 일제히 걷기 시작한다. - P23

도시를 둘러싼 벽에는 문이 하나뿐이다. 그 문을 여닫는 일이 문지기의 소임이다. 두꺼운 철판이 가로세로로 박힌, 육중하고 튼튼해 보이는 문이다. - P24

문지기는 매우 억세고 우람한, 그러나 자기 일에는 지극히충실한 사내다. 정수리가 뾰족한 머리를 말끔히 깎았고 얼굴도 매끈하다. 매일 아침 커다란 냄비에 물을 끓여서 크고 날카로운 면도칼로 공들여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는다. - P24

문 양쪽 벽에는 여섯 개의 망루가 있다. 오래된 나선형 나무계단이 있어 누구든 올라갈 수 있다. 망루에서는 짐승들의 서식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보통 때는 아무도 그런 곳에 오르지 않는다. 도시 주민들은 짐승들의 생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하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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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전략).
시선을 멀리 옮기자 작은 섬을 성큼 건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대한 다리의 실루엣이 보였다. 거인의 다리 같은 교각은 섬의 한복판 언저리를 짓밟듯이 우뚝 서 있었다. 그 교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묘하게 각진 건조물이 달빛을 받아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 P7

한밤에 세토내해를 나아가는 작은 배에서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만큼은 진심으로 피하고 싶었으므로, 사기누마는 선배의 착각을 점잖게 정정했다.
"그게 아니라, 저기 은색으로 빛나는 건물 말이에요."
"엥, 은색? 어디 어디?"
기타자키는 자신의 자랑거리인 리젠트 머리 아래에 오른손을 펴서 붙이고는 어두운 바다에 시선을 모았다. 큰 도시의 중학교에서는 이미 멸종됐다는 소문이 도는, 리젠트 머리의 불량 학생. - P8

그러자 기타자키 뒤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요코시마섬에 있는 은색 저택이라. 그럼 주몬지 저택이겠지. 주몬지건설 사장이지은 희한한 저택 말이야." - P9

 지금은 세기말에 가까워진 1995년 3월이다.
.
일본의 거품경제가 꺼지고 몇 년이 지난 올해 한신 · 아와지 대지진이 발생해 몇천 명이 목숨을 잃는가 싶더니, 얼마 전에는 도쿄 지하철에 사린이라는 맹독이 살포돼 세상을 벌벌 떨게 했다. 그렇듯시대가 격동하는 가운데, 오카야마현 가사오카시에 사는 중학생 3인조-그중 두 명은 다음 달에 고등학생이 되지만—는 무슨 이유로 한밤중에 몰래 배를 타고 바다를 나아가고 있는 걸까. - P9

"그런데 지금 저희가 향하는 섬은 그 희한한 저택이 있는 섬이 아니죠?"
"응, 거기는 아니야. 우리 목적지는 더 작은 섬. 오카야마에서도 손꼽히는 부자가 소유한 그야말로 아득히 먼 바다의 외딴 섬이지." - P10

‘그랑께‘는 오카야마 지역에서 애매한 긍정을 의미하는 사투리다. 사기누마도 이쪽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이 말의 올바른 사용법을 익혔다. - P10

"아냐, 아냐, 문제없어. 섬은 개인 소유라도 바다는 우리 모두의것이니까."
과연, 하고 한순간 수긍할 법한 논리지만 어디까지나 궤변 아닐까. ‘한밤중에 남의 섬에서 낚시하는 행위‘는 역시 도의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사기누마가 불안을 감추지 못하자 이번에는 기타자키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럼, 걱정 붙들어 매. 그 섬에 건물이라고는 아무개 씨라는 부자가 지은 별장 한 채밖에 없으니까. 왜,
그 아무개 씨 있잖아. 오카야마에서 유명한 출판사를 경영하는." - P11

"걱정할 것 없다니까. 사이다이지 가문 사람에게 들킬 염려는 없어. 애당초 그 가문의 별장은 섬 남쪽에 있는걸. 우리는 섬 북쪽에서 낚시할 거고. 그쪽은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라 낮이든 밤이든 아무도 가까이 안 와. 내가 보장할게."
참으로 용기가 넘치는 말이다. 하지만 오가와라 선배의 보장에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P12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하며 사기누마는 작은 섬을 가리켰다. "오가와라 선배, 혹시 저 섬이 저희 목적지인가요?"
"응, 혹시라는 말을 붙일 것 없이, 저 섬이야. 틀림없어. 저게 비탈섬이야."
"흠, 비탈섬이라. 그냥 평범하네요."
그건 그럴 것이다. 세토내해의 외딴 섬이라고 해서 하나같이 ‘옥문도‘니 ‘악령도‘ 같은 불길한 이름이 붙어 있을 리 없다(*옥문도와 악령도는 일본의 추리작가 요코미조 세이시가 쓴 장편소설 제목이자, 소설에 등장하는 섬이다) - P13

이리하여 남자 중학생 세 명이 경쟁하는 심야 낚시 대회의 막이 올랐다. - P15

첨벙!
뒤쪽에서 느닷없이 커다란 물소리가 들렸다. 물론 바다 위에 있으니까 파도 소리는 끊임없이 들린다. 하지만 단순한 파도 소리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벼랑 쪽에서 들린 듯했다. 배와 벼랑 사이에 펼쳐진 아무것도 없는 해수면에서 갑자기 요란한 물소리가 난 것이다.
그 순간, 사기누마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나 누가 있는것은 아닐까 걱정됐다. 사기누마 일행은 허가 없이 어획 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섬사람에게 그 장면을 적발당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것이 사기누마의 꾸밈없는 진심이었다. - P16

사기누마는 물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그것을 보고 한순간 돌고래인 줄 알았다. (중략) 그렇게 생각한 순간, 허여멀건한 생물은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 삼아 두 손과 두 발을 격렬하게 버둥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서 그래도 필사적으로 뭔가를 붙잡으려는 듯한 동작, 사기누마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돌고래가 아니다! - P17

"으아아, 피해, 피해!"
세 사람은 양쪽으로 갈라지듯 일제히 펄쩍 물러났다. 선수 쪽에 오가와라, 선미 쪽에는 사기누마와 기타자키. 이로써 배 한복판에 텅 빈 공간이 생겼다. 공중에서 떨어진 수수께끼의 생물이 배 한복판에 세게 충돌했다. 쿠웅, 중량감 있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배가바닷속에 가라앉을 것처럼 아래로 쑥 꺼졌다. - P17

 둘 다 목숨에 지장은 없는 모양이었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린 사기누마는 "저도・・・・・・ 어푸푸...... 괜찮아요" 하고 어둠에 대고 힘껏 대답했다. 그때,
몇 미터 앞쪽에서 떠내려오는 물체가 보였다. 어두컴컴한 바다에서 몹시 선명하게 보이는 흰색 물체, 사기누마는 깜짝 놀라 개구리헤엄으로 열심히 그 물체에 다가갔다. 하얘 보인 것은 인간의 등이었다. 흰옷을 입은 사람이 달빛을 받으며 어두운 해수면을 떠다니고 있었다. - P18

"이. 이봐요. 정신차려요."
사기누마는 상대의 등에 팔을 두르고 얼굴을 해수면에서 꺼냈다. 그제야 그가 남자임을 깨달았다. 등 뒤에서 끌어안은 자세라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체격에서 어쩐지 남자라는 감이 왔다. 남자는 힘없이 축 늘어진 상태였다. 자기 힘으로 헤엄칠 수는 없을 듯했다. 그냥 기절한 걸까, 아니면 설마. - P19

"응? 뭐지, 저건?
사기누마는 바닷속을 유영하는 거대한 뭔가를 시야 가장자리로 포착하고 깜짝 놀랐다. 놀란 나머지 숨을 내뱉는 바람에 일단 해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거칠게 숨을 쉬고 있자니 어디선가 오카야마사투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용이다. 용...... 용이 있어!"
오가와라일까, 아니면 기타자키일까. 설마 흰옷을 입은 남자는아니겠지만, 그나저나 ‘용‘이라니 무슨 소리일까? - P20

1장
저택이 있는 섬

(전략).
"어디 보자, 벤텐마루호, 벤텐마루호. 아, 혹시 이건가."
(중략)
"실례합니다. 벤텐마루호의 선장님 계세요? 야노 법률 사무소에서 나왔는데요."
그러자 조타실에서 한 명이 갑판으로 나왔다. 힘깨나 쓸 것처럼 생긴 상고머리 남자다. 기름 얼룩이 두드러지는 바지에 크루넥 셔츠를 입었다. 나이는 40대 초반일까. - P24

선장은 아하하, 하고 호쾌하게 웃었다. 그 옆에서 경칭이고 뭐고없이 그냥 ‘이 중‘이라고 불린 승려가 다시 합장하고 허리를 숙였다. "저는 도라쿠라고 합니다. 도를 즐긴다고 써서 도라쿠(道楽)."
"어, 도라쿠요?!" 도락 스님이라 그건가. 어쩐지 노는 데 정신이팔렸을 것 같은 이름이다.
"고묘지라고, 고지마에 있는 오래된 절의 주지입니다. 오늘은 비탈섬에서 거행될 사십구재 법사 때문에 섬에 가려고요. 잘 부탁드립니다." - P26

사야카는 어선 갑판에서 멀어지는 고양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고양이와 교대하듯 두 사람이 잔교에 나타났다. 둘 다 남자지만 겉모습은 몹시 대조적이었다.
한명은 몸집이 아담하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어깨에 멨고, 적갈색 치노 팬츠에 노란색 셔츠, 그리고 녹색 블루종을 입었다. 차림새가 너무 다채로워 한낮의 잔교에 나타난 걸어 다니는 신호등‘ 같았다. 작은 몸을 최대한 크게 보이려고 어깨를 흔들며 걷는 모습이 약소한 야쿠자를 연상시켜서 오히려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 P27

잔교 가장자리에 다다른 젊은 남자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콘크리트 지면을 구둣발로 박찼다. 다음 순간"으랏차!" 하는 엄청난 기합과 함께 남자는 출항한 어선을 향해 힘껏 점프했다. 그야말로 홀딱반할 듯한 점프였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호리호리한 몸이 한순간허공을 날았고, 두 다리가 잔교와 어선 사이에 검은색 아치를 그렸다. 절망적으로 느껴졌던 거리도 그의 점프력 앞에서는 아무것도아니었다. 남자는 벤텐마루호의 뱃전을 가뿐히 뛰어넘어 구두 뒷굽이 닿는 소리와 함께 갑판에 착지했다. - P29

수수께끼의 오버런 남자는 선장이 던져 준 구명 튜브를 잡고 무사히 배 위로 올라왔다. 흐트러진 긴 머리가 이마에 들러붙었고, 정장도 구두도 흠뻑 젖었다. 선글라스는 남자의 코 위에 간신히 삐딱하게 걸려 있었다. 솜씨 좋은 킬러 같았던 겉모습은 이제 양동이의 물을 뒤집어쓴 옛날 옛적 희극 배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P30

"이봐요. 선장님. 이상하다 싶었으면 기다려야죠. 저를 내버려두고 출항하다니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 약속 시간에 10분 늦었다고요?! 아. 그건 그러니까, 실은 제가 탄 마린 라이너가 브레이크고장으로-"
(중략).
"어, 그게 뭐였더라.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쨌든 제가 탈 배가눈앞에서 떠나는 걸 보고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했는지 아세요!"
(중락).
 "하지만 선장님,
말씀드리는데 배에 더 타기로 한 사람은 ‘한 명‘이 아닙니다. 정확하게는 ‘두 명‘이에요. 저랑 저기 저 사람이요." - P32

남자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씩 웃으며 설명했다. "그의 이름은 쓰루오카 가즈야. 사이다이지 가문의 사십구재 법사에 참석하기로 한 사람 중 한명이지.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배를 타야해."
그가 예상 밖의 이름을 꺼내서 사야카는 저도 모르게 놀라움에찬 목소리를 흘렸다.
"어, 쓰루오카 가즈야라니, 저 사람이?!"
"그래. 그러고 보니 당신은 변호사랬지. 그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군." - P33

"보다시피 사립탐정이야. 오카야마의 ‘고바야카와 탐정 사무소라고 들어 봤지?"
"......."미안, 처음 들어봤어!
사야카는 입을 다문 채 거북한 심정으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 P34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고함을 빽 지른 사야카는 상대방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뒤쪽 갑판을 가리켰다. "그건 그렇고,
쓰루오카 씨와 같이 안 있어도 돼요? 저 사람을 무사히 섬까지 데려가는 게 당신 임무죠?"
"맞아. 하지만 이런 조그만 어선에서 잃어버릴 리도 없잖아.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는 바캉스나 마찬가지야. 의뢰인에게 노고를 위로하는 말과 보수만 잘 받으면 돼." - P36

다카오는 그렇게 말하고 10엔의 가치도 없는 윙크를 날렸다. 그리고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그런데 나도 당신한테 물어보고싶은 게 있어" 하며 사야카에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사이다이지 고로 씨의 유언장은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지? 당신이 그걸 사람들앞에서 낭독하는 건가?"
진지한 얼굴로 묻는 다카오에게 샤아카는 ‘부르는 게 값이라면100만 달러‘의 윙크로 답했다.
"미안해요. 변호사에게도 비밀을 엄수할 의무가 있거든요." - P37

그렇게 얼버무리고 넘어가기는 했지만, 탐정이 짐작한 대로다.
이번에 사야카가 비탈섬으로 가는 이유는 두 가지. 먼저 사이다이지 가문의 고문변호사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망한 사이다이지 고로 씨의 유언장을 섬의 별장에서 전달하는 것, 그리고 유족 앞에서유언장을 낭독하는 것이다.
(중략).
그 증거로, 고로 씨의 장례식은 오카야마현에 연고가 있는 수많은 경제인, 문화인, 정치인 및 본격 미스터리 작가 등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이벤트로 성대하게 거행됐다. 그리고 참석한 유족은 예외 없이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장례식이 끝나면 유족의 관심은 반드시 상속 문제로 옮겨 간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핵심을 쥐고 있는 것이 바로 고로 씨가 남긴 유언장이었다. - P38

그리고 오늘 모인 유족들 앞에서 유언장을 개봉하는 중대한 역할을 맡은 사람이 다름 아닌 사야카의 아버지 야노 고조 변호사다.
고조는 기합을 넣듯이 가슴을 세게 한 번 친 후에 사야카를 데리고 거실 한복판으로 나아갔다. 유족들 앞에 꿇어앉아 일단 영정사진에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갈색 봉투를 꺼냈다. 이때 고조는 전에 없이 긴장한 표정이었다. 실은 고조 본인조차 유언장의 내용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 P39

고조는 바싹 마른 입술을 열심히 움직여 편지지에 적힌 내용을유족들 앞에서 읽었다.

나, 사이다이지 고로는 신뢰하는 고문변호사 야노 고조 씨에게이 유언장을 맡긴다.
(중략).
둘째, 유언장을 개봉하는 자리에는 내 여동생 마사에, 3남매 에이코, 게이스케, 유코, 그리고 조카 쓰루오카 가즈야가 참석할 것.
(후략). - P40

그런 와중에 일동을 대표하듯 첫째 에이코가 의문을 제기했다.
"이게 무슨 소리죠, 야노 선생님? 그럼 ‘쓰루오카 가즈야가 발견될 때까지는 유언장을 개봉하지 마라‘는 건가요? 여기에 유족들이이렇게 모여 있는데도요?"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이건 고인의 유지이니 어쩔 수 없지않나 싶은데요." - P41

"선생님한테 말하는 거 아니에요. 더구나 쓰루오카 가즈야가 지금 어디서 뭘 하은지 모르잖아요. 연락이 끊긴 지 20년도 넘었다고요."
(중략).
"그런데 야노 선생님, 아버지의 진짜 유언장은 그 갈색 봉투에 들어 있는 거죠?"
그 말을 듣고서야 고조는 흠칫 놀라 편지지와 함께 있었던 또 다른 갈색 봉투를 허둥지둥 집어 들었다.
사야카도 아버지 옆에서 봉투 겉면에 적힌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봉투에는 남성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붓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유언장 PART 2.‘ - P42

아버지도 참 못 미더운 구석이 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보름이지났는데도 끝내 몸 상태가 돌아오지 않아서 중요한 업무를 딸에게떠맡기다니.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야카는 재킷 가슴께를오른손으로 살짝 눌렀다. 안주머니에 ‘유언장 PART 2‘라고 적힌 갈색 봉투를 핀으로 단단히 고정해 두었다. - P43

다카오는 그중에서 평평한 섬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섬 가장자리에 은색 저택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로 갔지?"
"뭐야, 그거였어요?" 사야카는 어깨를 으쓱하고 경위를 설명했다. "은색 저택이라면 주몬지 가문의 저택이잖아요. 1980년대에 거기서 살인사건이 발생한 후로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폐허 비슷하게 변했고, 결국 최근에 철거된 모양이에요. 폐허 마니아들과일부 미스터리 팬에게는 그런대로 인기 있는 건물이었지만요."
"엇, 부숴 버렸어? 그거 아쉽게 됐군." - P45

"그러고 보니 당신은 야노 고조 변호사의 딸이라면서? 그럼 우리둘 다 2대로군."
탐정은 두 사람의 유일한 공통점을 강조하며 넉살 좋게 오른손을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아무래도 당신과는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안 그래, 야노사야카 씨?" - P46

3

(전략)
"이거 굉장한걸. 떨어지면 저승길 직행이겠어. 이 벼랑, 이름이 따로 있습니까?"
그 질문에는 도라쿠 스님이 대답했다. "지역 어민들은 ‘도깨비 뒤집기 벼랑이라고 부르는 것 같더군요. 왜, 성의 석벽 중에 위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는 걸 ‘무사 뒤집기‘라고 하잖습니까. 이 벼랑은
‘무사 뒤집기‘보다 더 경사가 급해서 도깨비섬의 도깨비조차 기어오르다가 뒤집힐 정도라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은 거죠." - P48

그러자 선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아니, 늘 근처를 지나다니지만 선착장에 배를 댄 건 처음이야"라고 의외의 사실을 밝혔다. "그것도 그렇고 이 부근 바다에는 숨겨진 암초가 많아서 물결이 잔잔할 때도 안심은 금물이지. 이러다 조금만 바다가 거칠어지면 배로는 접근을 못 해. 날씨가 오늘만 같다면야 별문제 없지만." - P49

"망할 놈의 섬에 드디어 도착했네." 쓰루오카는 여행 가방을 어깨에 메며 선착장 주변에 따분해 보이는 시선을 던졌다. "흥, 정말이지 바뀐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섬이라니까."
도라쿠 스님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라, 이 섬에 처음 오신게 아니군요."
"응. 옛날에는 가끔 놀러 왔지. 일단 친척이니까. 마지막으로 온지 20년도 넘었지만, 그러는 스님은 오늘처럼 법사 같은 일로 가끔오나?" - P50

실제로 검은 턱시도 차림의 남자는 사람들 앞에서 공손하게 고개숙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 저는 사이다이지 가문을 모시고 있는 고이케 기요시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아내인 고이케 시노부고요. 잘부탁드립니다. 그럼 여러분, 저택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짐은 들어드릴 테니 저한테 주십시오." - P51

"23년 만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쓰루오카 님.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고이케 기요시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더니 쓰루오카의짐을 받아들었다. 한편 도라쿠 스님은 "이것도 수행이니까요" 하며짐 맡기길 거부했다. - P52

사실 척 보기에도 기묘한 건물이다.
사야카는 건물과 정면으로 마주섰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일까. 정면에서 보이는 부분은 옆으로 길쭉한 2층짜리 건축물이다. 건축물의 좌우 양쪽 끝부분에서 길쭉한 건물 두 동이 사야카 일행을 향해 평행으로 쭉 뻗어 나왔다. 이 부분은 단층이다. 위에서 보면 건물 전체는 가타가나의 ‘코(コ)‘ 모양일것이다. コ의 세로획에 해당하는 부분이 2층, 가로획 두 개가 단층인 셈이다. 그 단순한 형태만 보면 멋대가리 없는 학교 건물 같기도하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르다. - P53

"옥상에 있는 저 동그란 물체는 뭔가요?"
이 질문에는 고이케 기요시가 대답했다. "아아, 저거요? 뭐랄까,
전망실이기도 하고, 휴게실이기도 하고, 도서실이기도 하죠. 요컨대원형 방입니다. 네."
"원형 방이라." 다카오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저는 러브호텔옥상에 간판 대신 장식한 오브제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지, 사야카 씨?"
"그, 그렇기는요! 제. 제가 그렇게 생각할 리 없잖아요." - P54

(전략).
"네. 예나 지금이나 비탈섬에 건물은 이 ‘화장‘ 한채뿐입니다."
그 이름을 듣고 도라쿠 스님이 입을 열었다. "오, 이름이 ‘화장‘
입니까. 화강하면 화강석이죠. 듣고 보니 건물 표면을 덮은 광택 있는 돌은 분명 화강석 같군요. 어허, 이런 외딴 섬에 이렇게 훌륭한건물이 있을줄이야." - P55

하늘을 올려다보자 헬리콥터 한 대가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섬에 착륙하려는 모양이었다. 사야카는 허둥지둥 고이케 부부에게 물었다.
"이 섬에 헬기가 착륙할 수 있나요?"
그러자 고이케 시노부가 저택 부지 한복판, 그 모양의 건물에 둘러싸인 중정 부분을 가리켰다.
"중정을 헬기 착륙장으로 사용해요. 섬에 헬기를 댈 수 있는 평지는 여기밖에 없거든요."
듣고 보니 분명 고이케 시노부의 말대로였다. 잔디밭과 화단도있기는 했지만, 중정 한가운데의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콘크리트로 포장한 헬기 착륙장이었다. - P56

폭음이 멀어지는 가운데, 고바야카와 다카오는 휠체어에 앉은 노부인에게 똑바로 다가가서 깊이 고개 숙였다. 하지만 어째선지 가나에 부인과는 일절 말을 나누지 않고, 대신에 마사에한테 친근감깃든 시선을 던졌다.
"이야, 타이밍 끝내주는군요. 저희도 방금 도착했거든요. 설마헬기로 오실 줄은 몰랐지만."
"그래? 올케한테는 헬기가 제일 부담이 덜할 것 같아서. 다카자와 선생님도 찬성했어. 참, 여러분은 다카자와 선생님과 초면이지?
이쪽은 올케의 주치의인 다카자와 나오토 씨. 다카자와 선생님, 이쪽은 사립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 씨, 변호사 야노 사야카 씨, 고묘지의 도라쿠 스님, 그리고・・・・・・ 어머나, 진짜 오랜만이다!" - P58

휠체어에 앉은 가나에 부인은 일방적으로 떠드는 마사에와 달리아무 말도 없다. 오늘은 고문 변호사의 대리인 자격으로 왔으니 마사보다 가나에 부인에게 먼저 인사해야 하리라. 그렇게 생각한사야카는 노부인 앞에 서서 허리를 가볍게 구부렸다.
"저어,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야노 사야카라고 합니.."
다음 순간, 사야카는 흠칫 놀라서 말을 집어삼켰다. 가나에 부인의 두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 P59

4

(전략).
고이케 부부가 중후한 두짝문을 열자 눈앞에 호사스러운 현관홀이 펼쳐졌다. 빨간 카펫을 죽 깔아 호텔의 프런트 로비가 연상되는공간이었다. 리셉션 데스크와 제복을 입은 직원이 있었다면 망설임 없이 체크인부터 해야지 생각했으리라.
"굉장하다." 감탄한 사야카는 안경을 손끝으로 밀어 올리며 소리쳤다. "호텔 같네요." - P60

딴생각하는 사야카 옆에서 마사에가 또 목소리를 높였다.
"자자,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올케부터 방으로 데려가야겠어.
올케 방은 평소 사용하던 1층 방이면 되지? 알았어. 가지, 선생님." - P62

 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에이코는 그제야 사촌오빠에게 얼굴을 돌렸다.
"오랜만이네. 가즈야 오빠.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한거야?"
(중략).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잖아. 낮잠을 자고 싶으니까 얼른 방으로 안내나 해."
"어머, 안내는 필요 없잖아. 오빠 방은 옛날부터 사용하던 그 방이야." - P63

"어머, 그쪽은 그러니까, 법률 사무소에서 나오신 분?"
"그렇습니다."
남자가 2초 만에 들통날 거짓말을 하길래 사야카는 옆에서 정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닌데요. 이 사람은 법률 사무소가 아니라 탐정 사무소 사람이에요."
"아아, 그럼 당신이 고바야카와 다카오 씨로군요." 에이코는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괜찮아요. 당신 평판은 마사에 고모한테 들었어요. 어머님이 명탐정이라면서요?" - P64

그리고 방금 올라온 계단에 두 손을 모았다. 뭐든 고마운 대상에 인사를 올리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 유코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음에 드셨어요?"
그사이 마지막으로 계단을 올라온 다카오가 두 무릎에 손을 짚은채 대답했다.
"헉, 헉, 네....... 그, 그야・・・・・・ 이렇게 멋진, 계단은・・・・・・ 찾아보기, 힘들죠....... 후우."
"이봐요. 숨을 너무 헐떡이는 거 아니에요?! 아까는 바다에 뛰어들 만큼 엄청난 점프를 했으면서."
"미안하게 됐군. 난 순발력은 치타지만, 지구력은 토끼야."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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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큐레이터인 윤범모는 10일의 사임 발표를 통해 "행정 관료들로부터 협박에 가까운 수정 요구를 받았다"며 광주시와 비엔날레 재단을비판했다. 13일에는 비엔날레 재단과 전시회를 공동 주최하는 광주시립미술관의 황영성 관장도 사의를 표명했고, 18일에는 비엔날레 재단의 이용우 대표이사가 사퇴 기자회견을 열었다. - P125

그 후에도 작가들에 의한 항의 활동이 벌어지거나, 특별전과 관련한 심포지엄에서 검열이 주제가 되기도 했는데, 홍성담은 일본 잡지 『임팩션』에 기고한 논고에서 요구를 철회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비엔날레 본전 개막식을 앞두고, 본 전시에 초대된 동료 화가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비엔날레 재단과 광주시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이 마음 아팠다. 윤장현 광주시장은 7월에 막 취임했던 터라 자신이 비엔날레 재단의 이사장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그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코미디를 연출한 것이다. - P126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도쿄도 현대미술관

이야기를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의 관장 인사로 되돌려 보자. 바르토메우 마리는 취임 이후인 2015년 12월 14일 기자회견을 열어 "모든 종류의 검열에 반대한다."고 선언함과 동시에,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에서의 사건에 관한 보도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 P126

 한 가지만 짚어두자면, 이 정도로 끔찍한 사건 중에도 그나마 유일한 구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관계자들이 한결같이 발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규제를 당한 측이야 항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쳐도, 규제한 측인 바르토메우 마리도, 윤범모도, 윤장현도, 이용우도, 설득력은 누구 하나 없을지언정 열심히 변명에 힘쓰고 있다. - P127

"그에 비하면 일본은..."하고, 애국자로서 가슴을 펴보고도 싶지만,
알다시피 일본의 사정도 스페인이나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다. 아니,
규제한 측이 사죄는커녕 경과 설명도 하지 않으며, 규제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위의 두 사례만도 못하다. 그 예로, 2015년 여름 도쿄도 현대미술관(이하 MOT)에서일어난 아이다 마코토와 아이다가(家)*의 작품 2점에 대한 ‘작품 철거요청‘ 사건을 들 수 있다.


*아이다와 그의 아내이자 역시 아티스트인 오카다 히로코, 아들인 아이다 토라지로로 구성된 아티스트 유닛. - P128

 해당 작품의 하나는, 아이다가(家) 3인이 문부과학성 교육방침에 대한 뼈 있는 농담을 서툰 먹글씨로 써내린 <격>(檄)이라는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아베 신조를 닮은 아이다가 자신의 용모를 이용해 제작한 <국제회의에서 연설하는 일본의 총리대신이라 불리는 남자의 비디오>라는 작품이다. 양쪽 모두 가벼운 웃음을자아내는 유머러스한 작품으로, 중량급의 <정복하기 위한 발가벗음>이나 <세월 오월>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내용은 가볍다. - P129

아티스트 유닛, ‘Chim↑pom(침폼)‘의 수난


도쿄도 현대미술관에서는 그 밖에도 검열, 아니 그 이상의 규제를 가하고 있다. 아이다 마코토와 아이다가(家)에 대한 작품 철거 요청‘이 화제가 되고 있던 바로 그때, 도쿄의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 Garter‘에서 개최된 아티스트 유닛 Chim↑pom(이하 침폼)의 결성 10주년 기념전 참기 어려운 것을 참아 삼가기 어려운 것을 삼가전에서 그 사실이 밝혀졌다.

* Artist-run-space. 작가가 직접 운영하는 미술 공간을 말한다.
** 참기 어려운 것을 참아. 삼가기 어려운 것을 삼가‘라는 말은 1945년 일왕의 항복 선언문 중 일부로, 현재에는 종전 선언에 대한 상징적인 문장으로 여겨지고 있다_역자 주 - P130

재미있어서 작가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그대로 옮긴다.


감사하게도 도쿄도 현대미술관이 작품을 소장해 주었고, 미술관 소장인 이 작품을 이번 컬렉션전에도 출품해 주었다. 그러나컬렉션 할 때와 전시할 때에 타진된 것은, 통칭 나베 쓰네 하우스(요미우리신문 그룹 회장, 와타나베 쓰네오 씨의 자택 맨션) 상공에 까마귀를 모은 장면을 자르기로 한 것. 속뜻은 지금까지 분명치 않지만, 지브리 전 등으로 요미우리와의 관계가 깊은 까닭이리라 짐작하며 처음에는 거부해 보았지만, 특별히 개인 공격이 목적도 아닐뿐더러 자른다고 해도 작품 전체의 콘셉트에는 영향이 없을 듯하고, 무엇보다도 귀찮았기에, 적당한 때(그가 돌아가신 후)가 오면 원래로 되돌리도록 결정하고 합의했다. 의도치 않게 ‘죽음‘이 작품에 영향을 준 이 버전이야말로, 바로 타이틀 그대로인<BLACK OF DEATH>이다. - P131

「참기 어려운 것을 참아↑삼가기 어려운 것을 삼가」 전에서는, 또 하나 놓쳐서는 안 될 설명이 있었다. <참기 어려운 기합 100연발>이라는 비디오 작품의 설명이다. 이 작품에 검열, 다시 말해 규제를 가한 것은 미술관이 아닌 국제교류기금"이다.  - P132

‘총리와 가까운 부서의 사람들로부터 직접 클레임이 들어온다‘는 말이 사실인지 어떤지는 물론 확인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베 정권의 핵심에 있는 측근들이나 그들의 안색을 살피는 사람들이, 현대의 문화예술표현에 그 어느 때보다 신경질적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 P133

한국과 일본의 예만 봐도, 현대미술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 따윈 없이, 안위를 걱정하는 데만 급급한 문화 관료의 간섭은앞으로 갈수록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아티스트와 미술관(그리고 관객)에게는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 P133

보이지 않는 컬렉션과의 싸움

오늘날의 명문 미술관들을 위협하는 요소는 검열이나 자기 규제만이 아니다. 이 시대에 특정 라이벌 출현이 그들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다. 문제는 미술관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컬렉션과 관련된다.  - P134

 수집, 보존, 전시, 연구, 교육보급을 5대 미션으로 삼는 미술관은 앞으로 특히 ‘수집‘에서 뒤처지게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되면, 이들 미술관의 수집품의 질과 양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그에 따라 권위 또힌 낮아지는 건 아닐까? - P134

실제로 2010년에 갤러리스트에서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이하 MOCA) 관장으로 이직한(그리고 2013년에 사임했다) 제프리 다이치는, 2012년 아트 바젤에서 열린 공개 대담에서 이렇게 투덜댔다.²⁷


아티스트나 컬렉터나, 아름답게 전시할 수 있는 사립 재단을 보유한 억만장자에게만 작품을 판다. 이러한 시대에 어떻게 해야많은 관객을 끌어들이느냐는 큰 과제다.(...) 작가에게 ‘이름 있는재단에 작품을 파는 것과, 한정된 공간에, 게다가 4~5년에 한 번밖에 전시할 수 없는 미술관에 파는 것 중 어느 쪽이 좋아?‘라고묻는다면 어떤 답이 돌아올 거라 생각들 하시는지? - P135

27 Rachel Corbett, The Private Museum Takeover, "Artnetj, 2012 618.
http://www.artnet.com/magazineus/news/corbett/jeffrey-deitch-on-private-museum-threat-6-18-12.asp - P573

. 당시엔 운영이 원활하지 않았던 MOCA의 관장이었던 다이치가 한말에는, 일면 정곡을 찌르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작품 수집의 경쟁상대가 늘었다 한들, 미술관의 권위란 높아지면 높아졌지, 지금보다 떨어질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 P135

어째서 명문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는가

왜냐하면, MoMA를 필두로 하는 명문 미술관이 명작을 소장하지 않는것을, 협의의 아트월드가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의 가치를 보증하고, 유지하고, 높이는 장치로서, 미술관의 존재와 권위는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 P136

 2015년의 리스트²⁹를 보면, 테이트 모던의 니콜라스 세로타 관장이 5위, MoMA의 글렌 라우리 관장이 7위, 퐁피두센터의 베르나르 블리스텐 관장과 세르주 라비뉴 이사장이 15위에 올라있다. 그밖에 휘트니 미술관의 아담 와인버그 관장이 9위,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베아트릭스 루프 관장이 22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의 마이클 고반 관장이 31위,
베를린 국립 미술관 내셔널 갤러리의 우도 키텔만 관장이 60위, 뉴욕 롱아일랜드시티의 MoMA PS1의 클라우스 비젠바흐 관장이 62위 등이다. - P137

29 https://artreview.com/power_100/2015/ - P573

하지만, 이들의 존재 의의는 최근 몇 년 사이 거대한 적에게 크게 위협받기 시작했다. "적이란 신흥 슈퍼 컬렉터이다"라고 한다면 "응?"하고 고개를 갸웃할 독자가 대부분일 것이다. 바로 조금 전에 "슈퍼 컬렉터가 작품을 아무리 사들여도, 명문 미술관의 권위가 떨어질 일은 없다"고 했잖아.‘ 라고 말이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고, 그것은 결코 실수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작품의 수집에 국한된 이야기였고, 미술관의 5대 미션 중 ‘전시‘에 관한 싸움에서는 명문 미술관이 불리한 상황이 맞다. - P237

관객 동원에 무관심한 미술관

2015년 11월, 미합중국 상원 재정위원회는 사립미술관 10여 개를 상대로 개관 시간, 기부금 명세와 총액, 자산평가액, 외부로의 작품 대여 등에 대한 정보공개를 요청했다. 대상은 브란트 재단의 ‘아트연구센터‘와
‘글렌스톤 미술관, 대부호인 일라이 브로드가 같은 해 9월에 막 문을 연
‘더 브로드‘ 등이다. 모두가 비교적 신설이고, 최고급 현대미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다. - P138

위 재정위원회는 10개월 전에 같은 기자가 쓴 다른 기사³¹를 읽고,
조사를 시작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부유한 컬렉터가 ‘자신의 집 뒤뜰‘에 미술관을 짓고 있다. 광고도 하지 않으며, 눈에 띄는 간판도 없고, 휴관 기관은 길다 - P138

31 "Writing Off the Warhol Next Door, The New York Times, 2015년 1월 30일 http://www.nytimes.com/2015/01/11/business/art-collectors-gain-tax-benefits-from-private-museums.html - P573

한국 최대의 미술관 ‘리움‘의 경우

일부 신흥 사립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경향은 미국 외에도 존재한다. 그 한 예로, 2004년에 개관한 리움을 들 수 있다. 한국 최대 재벌인 삼성그룹의 오너이자 한국 제1의 부호였던 이건희 회장이 서울 한남동 자택 근처에 건립해, 삼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거대 미술관이다. - P141

고미술을 전시하는 ‘뮤지엄 I‘(대지면적 4,000m², 바닥면적 15,000m²)은 마리오 보타가, 근현대 아트의 ‘뮤지엄 II‘(4,000m², 13,000m²)는 장누벨이, 기획전을 열기도 하는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와 이들 3개 건물을 연결하는 부분은 렘 콜하스라는 건축계의 슈퍼스타가 각각 설계를맡았다. - P141

하지만, 홍라영 부관장의 말을 그대로 수긍하기는 힘들다. 밋치 레일스나 피터 브란트처럼, 문화적 자산이자 경제적 자산이며, 그에 따라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는 미술 작품을, 이건희 회장과 삼성그룹이 활용하기 위해, 혹은 위장하기 위해 마련된 장소가 리움 아니었을까? - P143

루이 14세 • 오다 노부나가. 이건희의 공통점


정치적 자산이라는 것은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자산‘이라는 의미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봉건 군주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화예술을 정치적으로 유용하게 썼다. 일본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인 오다 노부나가는 차(茶)도구를 중심으로 명물을 모아,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함과 동시에, 포상으로 가신에게 수여하는 등 인심 장악의 도구로 활용했다.  - P143

 우선 군사력과 경제력이 갖춰진 이후의 일이겠지만, 문화예술을 무기 삼아 라이벌이나 신하를 심리적, 정신적으로 압박하려 한 것이다. 그중에는 중국 북송의 휘종처럼 문화예술에 몰두한 나머지 나라를 망친 우매한 왕도 있지만, 교양과 지성은 권력을 채색하는 장식이자 무기였다. - P144

고(故) 이건희 회장이 선대 이병철 회장에 걸쳐 수집한 예술 작품을 삼성그룹을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은 높다. (중략). 그룹의 구조조정실 지시로 해외 자회사들이 2,000억 원 이상의 비자금을 조성해 왔다고, 한때 그룹의 법무팀장이었던 변호사가 폭로한 것이다.³³ - P144

33 이춘재, 「삼성 구조본, 전 임원 계좌에 비자금 50억 운용」 『한겨레』, 2007년 10월 29일자.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46550.html - P574

현대미술 현장의 완만한 죽음

사건은 결국 애매한 채로 종식됐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해당 변호사가 "이건희의 아들 이재용이 <행복한 눈물>은 집에 걸려 있다‘라고 자랑한 적이 있다. 이건희 회장 일가가 자신들이 즐기기 위해 작품을 구입한 것이다."라고 진술했다는 점이다.³⁵ - P145

35 손정아, 「S Korea scandal adds to pop art cachet」, 『Finacial Times』. 2008년 2월 8일 자. http://www.ft.com/intl/cms/s/0/84df8796-d678-11 dc-b9f4-0000779fd2ac.html#axzz416T8BAb8 - P574

자기 과시욕이 강한, 아니 명예욕이 넘치는 오너는 작품을 적극적으로 공개하지만, 독점욕이 강한, 아니 미술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오너는 소극적인 것처럼 보인다. - P146

아니, 이런 표현은 정확하지는 않을 것이다. 1990년 빈센트 반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을 125억 엔(약 1,300억 원)에, 피에르 오귀스트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를 119억 엔(약 1,200억 원)에 낙찰 받았던 사이토 료에이(다이쇼와 제지 명예회장)는, "내가 죽거든 이 그림을같이 관에 넣어 화장해주게."라고 발언해 세계적으로 빈축을 샀지만,
이처럼 순수한 (그리고 비뚤어진) ‘독점욕‘ 혹은 ‘사랑‘은 오늘날에 와서는 오히려 희귀한 것이 아닐는지? - P147

컬렉션을 정치적 자산으로 여기는 미술관 오너가 늘어나면, 손해를 보는 쪽은 미술애호가와 기존의 명문 미술관이다. 지도상에는 그려져 있는데 들어갈 수 없는 땅처럼, 작품은 확실히 존재하는데 그것을 볼 수는 없다. - P147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역행?

1929년, 27세의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의 지휘 아래 개관한 뉴욕 현대미술관은, 당초 "기증 작품도 없고, 구입을 위한 재원도 없다. 즉, 컬렉션은 없다"라고 하는 상태였다.³⁷ - P148

37 大坪 健二,‘5大浣腸リチャードEオルデンバーグの言葉 (5「アルフレッドバーとニューヨーク近代美術館の誕生E, 2012.
アメリカの20世紀美術の研究」 - P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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