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에르도사인은 지금 이 끔찍한 상황에서 자기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점성술사밖에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여태껏 공들여 펼쳐놓은 상상의 세계는 연기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점성술사는 돈이 있을지도 모른다. - P43
점성술사는 숲으로 둘러싸인 별장에 살았다. 그리 높지 않은 건물이었지만 나무 위로 솟아오른 붉은색 지붕 때문에 먼 곳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 P44
에르도사인은 인동초 꽃을 입에 물고 점성술사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 그래도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로 소풍이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는데, 점성술사의 집이 시야에 들어오자 마음이 더욱 설레기 시작했다. - P44
에르도사인은 생각했다. ‘지금 대리석으로 만든 노와 금실로 짠 돛이 달린 배가 있다해도, 바다가 일곱 가지 화려한 빛깔로 물든다 해도, 달빛이 은은히 내려앉은 곳에서 백만장자 아가씨가 내게 키스한다 해도, 내 슬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야. 아니, 지금 무슨 생각을하는 거지? 하지만 도시보다는 여기에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여기에는 최소한 실험실 정도는 있잖아? - P45
"에르도사인, 이 친구가 바로 아르투로 아프네르입니다." 사석에서 점성술사는 이 남자를 ‘우울한 기둥서방‘ 이라고불렀다. 보통 때 같았으면 우울한 기둥서방에게 무슨 말이라도 건넸을 테지만 지금 에르도사인은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 P46
점성술사가 지휘봉을 들고 미국 지도가 걸린 벽 쪽으로 걸어가자 우울한 기둥서방도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도 앞에 멈춰 선 점성술사는 푸른색으로 채색된 카리브해 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 P46
점성술사가 입고 있는 노란 외투는 스님의 법의처럼 보였다. 점성술사는 이어서 우울한 기둥서방에게 물었다. "저들이 사람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인다는 사실을 알아요? "네, 전문(電文)에서 읽었어요." 우울한 기둥서방이 말했다. - P47
"KKK단은 수백만 명의 사람을 끌어들였는데..." 아프네르가 흥분해서 불쑥 끼어들었다. "그 드래곤이라고 하는 자들, 이름만 그럴싸하지 죄다철도나 사기죄로 줄줄이 감옥에 들어간 판에…점성술사는 못 들은 척 하던 말을 계속했다." - P48
점성술사는 그러고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우리 비밀 조직은 회원들의 기부금이 아니라, 각 세포조직마다 설치될 사창가를 통해 나오는 자금으로 운영될 겁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런 고전적인 결사가 아니라 초현대식 조직이에요. 우리 조직의 구성원들은 모두 동등한 경제적 권리를갖게 될 것이고, 또한 각종 소득 및 수익을 공평하게 분배받을겁니다. (후략)." - P49
벽에 걸린 시계가 다섯 시를 알렸다. 에르도사인은 이제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저, 죄송한데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상의하려고 왔거든요. 혹시 600페소 정도 가지고 계세요? 점성술사는 지휘봉을 놓고 팔짱을 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저, 내일까지 제가 다니던 제당 회사에 600페소를 갚지 않으면 전 감옥에 가게 됩니다." - P49
"우리 회사 경리과 직원들 일하는 거 보면 한마디로 엉망이에요. 우리가 수금을 못 해왔다고 하면 경위를 확인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게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가타부타 한마디 말이 없어요. 바로 그 점을 이용해서 수금한 돈을 일단 주머니에 챙기고 회사엔 못 받았다고 거짓말하는 거죠. 그리고 내가 써버린 돈은 다음에 수급한 돈으로 메우는 식으로요." 예르도사인은 삼각형의 정점에서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고, 나란히 앉아 있는 우울한 기둥서방과 점성술사는 이따금 서로눈빛을 교환했다. - P50
"혹시 돈을 훔칠 때 쾌감 같은 건 못 느꼈어요?" "아뇨, 전혀..... "그런데 구두는 왜 그리 낡아빠진 걸 신고 다녀요?" "어디 돈이 있어야지요...………." "아니, 그럼 빼돌린 돈으론 뭘 했어요?" "그 돈으로 구두를 살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 P51
정신이 나갔던 건지 아니면 귀신에 홀렸던 건지, 에르도사인은 마치 그 돈을 탕진하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던 것처럼 엉뚱한 데만 골라 돈을 써댔다. 예를 들어별로 먹고 싶지도 않은 과자를 사거나, 또 구경 한번 못 해본게 요리나 거북이 수프, 개구리 튀김 요리를 사 먹고 다녔다. - P51
점성술사가 옆에 앉은 우울한 기둥서방에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1000페소 정도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구상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착수금인 셈이죠. 에르도사인,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가 해드릴 수 있는 돈은 300페소 정도뿐이군요. 하지만 당신 스스로 곤경에 빠진 겁니다. 안 그래요?" - P52
에르도사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는 부들부들 떨며 모자챙을 꽉 움켜쥐었다. (중략). 우울한 기둥서방은 자세를 바로하더니, 통통한 손으로 턱을 괴고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차분하게 말했다. "진정하고 앉아요, 친구. 내가 600페소를 드리죠." - P54
그때 점성술사가 끼어들었다. "자자, 그럼 우리 이렇게 합시다. 내가 300페소, 당신이 300페소를 내놓는 게 어때요?" "아닙니다. 그건 우리 사업에 꼭 필요한 돈이니 그냥 갖고계세요. 전 당장 쓸데가 없으니 괜찮아요. 게다가 여자 세 명이계속 돈을 벌어주고 있으니까요." - P55
말할 틈을 노리던 점성술사가 끼어들었다. "나죠. 그런데 그 문제라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요. 하지만 당신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말하고 싶지 않은, 아니 말 못 할 그런 일이 있을걸요." "그 돈은 회사에 언제쯤 갖다 줄 겁니까" "내일이요." "그러면 지금 수표를 써드리죠. 오전 중에 현금으로 바꿀 수있을 겁니다." - P56
에르도사인의 마음을 눈치챈 아프네르는 책상 옆에 앉아 있던 점성술사를향해 말했다. 당신의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무엇보다도 구성원들의 복종심이 제일 중요하겠죠?" - P57
점성술사는 우울한 기둥서방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잠시 무슨 얘기를 나눈 다음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점성술사는 두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에르도사인이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몸집의 점성술사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 P59
우울한 기둥서방
(전략). 그 순간 에르도사인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엉뚱한 질문이튀어나왔다. "돈도 그렇게 많이 벌면서 왜 그런 기둥서방 노릇을 계속하는 거죠? 이 말을 듣자 아프네르의 얼굴엔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봐요, 친구. 그런 기둥서방 노릇은 아무나 하는 줄 알아요? 그 여자들이 알아서 매달 2000페소나 바치는데 내가 왜 이일을 팽개치겠어요? 당신 같으면 그렇게 할 것 같아요? 절대로아닐 겁니다. 내 말이 틀려요? - P59
에르도사인은 쓸데없는 말을 했구나 싶었지만 이미 돌이킬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기둥서방이 입을 열었다. "내 말 잘 들어요. 만약 내일 의사가 나한테 와서, 지난 4년동안 내게 30000페소를 벌어다 준 스페인 출신 여자가 일주일안에 죽을 거라고 말했다고 칩시다. 그래도 난 그녀에게 계속 일을 시킬 겁니다. 남은 엿새간 일하고 마지막 이레째 되는 날죽도록 말입니다." - P60
"불쌍하지도 않냐고? 이봐요, 친구. 그런 여자들을 동정할필요는 없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납고 가장 지독한 여자들이 바로 몸 파는 여자들이에요. 그런 표정으로 날 보지 마시구려. 그런 여자들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후략)." - P60
"(전략). 분명히 말하지만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잽니다. 이해가 안 가면 원시시대의 야만적인 부족들을 한번 생각해 봐요. 여자들은 밥하고 빨래하고, 하여간 안 하는 일이 없습니다. 반면에 남자들은 사냥을 나가거나 싸우는 일이 전부죠. 지금이라고 다른가요. (후략)." - P61
"(전략). 이 말을 잘 살펴보면 그런 여자들의 심리를 잘 알 수 있어요. 사실 보통 사람들은 물론이고 소설가들조차 모르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는 셈이죠. 프랑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혼자 사는 매춘부는몸을 팔지 않는다.‘¹³" - P62
13) ‘창녀는 자기가 벌어 먹이는 남자가 있어야 비로소 몸을 판다.‘ 라는 의미. - P418
달콤한 오후의향기에 취한 듯 에르도사인은 입을 벌린 채 멍한 시선으로 아프네르를 쳐다보았다.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그가 아득히 멀게만 보였다. 에르도사인이 물었다. "어쩌다 그런 생활을 하게 됐어요?" "그때만 해도 아주 젊었을 때죠. 당시 난 스물세 살이었고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교수였어요. 이래봬도 난 수학 교수였단 말입니다." - P63
"(전략). 물론 지금은 내 말이 많이 생소하겠지만, 조만간 잘 알게 될겁니다. 만약 내 말에 동의할 수 없다면, 포주 한 명이 여자 일곱을 거느리고 있는 현실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레포요라는 이탈리아 놈은......, 지금은 한물갔지만 한창 잘나갈 때는여자를 무려 열한 명이나 거느렸죠. 스페인에서 온 훌리오란자는 여덟 명 정도 데리고 있었고, 프랑스 놈들은 대부분 최소한 세 명 정도는 거느리고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여자들끼리 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낸다는 겁니다. (후략)." - P65
아프네르의 말을 들으니 에르도사인은 왠지 주눅이 들면서전에 점성술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울한 기둥서방이 길거리에서 여자를 보면 뭐라 하는지알아요? ‘이 여잔 5페소, 저 앤 한 10페소, 아니 20페소 정도는벌어 오겠는걸.‘ 그런답니다. 그게 다예요." - P66
"내 역할이라....... 점성술사가 돈을 모아서 주면 그 돈으로여자들을 모아 매춘 조직을 만들고 운영하는 거죠."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점성술사에 대해 솔직히 어떻게 생각해요?" "한마디로 미친놈이죠. 큰일을 할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입만 살아 나불대는 그런 위인인지도 모르죠." - P67
"점성술사는 당신을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어요. 당신 얘기만 나오면 앞으로 아주 큰일을 할 사람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 에르도사인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네, 현 사회체제를 타도하기 위해선 우선 철저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참, 하던 얘기 계속하죠. 아직 이해가 잘 안 되는 게있는데……………, 당신의 위치가 대체 어떤 건지........" - P68
"그건 현실을 몰라서 하는 말이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세상이 어떤지 알고나 하는 소립니까?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 그것도 모자라서 어린애들까지 무자비하게 착취당하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만약 자본주의 체제의 착취라는 게 무엇인지그 실상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지금 당장 아베야네다에 있는 주물 공장이나 냉동 창고에 가보든지, 아니면 유리 공장이나 성냥공장, 담배 제조창……………, 아무 데나 가보세요." - P69
"우리 같은 잔챙이들이야 기껏 여자 한둘 정도 뜯어먹고 살죠. 그런데 자본가들은 저 수많은 대중들을 갉아먹고 산단 말입니다. 그런 자들을 대체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요? 사창가 포주와 대기업 사장 중에 누가 더 잔인하다고 해야 할까요? 이건당신 얘긴데, 월급이라야 고작 100페소 주면서 정직하게 살라고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대던 게 바로 그들 아닙니까? 자기네들 지갑엔 10000페소나 들고 다니면서." - P69
"내가 원하는 거요? 이 말만은 해야겠네요. 도와주신 건고맙지만, 솔직히 말해 돈을 받고 나니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습니다. 수표 도로 드릴까요? 자, 여기 있습니다." 에르도사인은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아프네르는 경멸 어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 어서 가서 돈이나 갚아요." - P70
점성술사에게 들은 이야기였는데, 옛날에 아프네르는 어떤 카바레 댄서에게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로 정표를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다른 여자들이 지켜보는데도 주저하지 않고 자기 정부에게서 받은 비싼 목걸이를 벗어서 그에게 주었다. - P71
생애 최대의 굴욕
에르도사인은 그날 밤 여덟 시쯤 집에 도착했다. (중략). 아까 얘기했죠? 집에 도착하니 식당에 불이 켜져 있었는데, 전 문을 열자마자 얼어붙었어요. 아내가 외출복을 입고 의자에앉아 절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 P73
엘사의 충격적인 말 한마디에 에르도사인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때 대위가 끼어들었다. "오래전부터 부인을 알고 지냈는데.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데요?" "왜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엘사가 따지듯 물었다. 대위가 나서서 엘사를 거들었다. "맞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아무리 부부 사이라도 물어보지 말아야 될 게 있는 법이죠." - P74
이 침입자는 그를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지쳤다는 게 정확하게 무슨 뜻입니까?" "권태, 고뇌, 그리고 불행하고 비참한 삶…………. 혹시 지금이 성경에 나오는 고난의 시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내 친구 중에 창녀와 결혼한 녀석이 하나 있는데 만날 때마다 그 녀석이 하는 말이 있죠. 자기랑 결혼한 그 창녀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매춘부라나. 이 세상 모든 게 성경에 쓰인 대로 이루어진다나.." - P76
"물론 그러시겠지. 당신은 돈을 잘 벌 테니까. 얼마나 벌어요? 500페소 정도?" "대충 그 정도요." "그래, 그 정도면 적당하네. - P76
엘사는 베일 사이로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의 여원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에르도사인의 마음은 갈수록 허전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허무의 늪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의식이 점점 더 희미해지면서, 이젠 외마디 비명조차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 P77
또다시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천장에 매달린 노란전등에 비친 세 사람의 얼굴은 마치 밀랍으로 만든 데스마스크 같았다. 조금만 참으면 거북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상황도 다 지나가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막상 떠나버리면 에르도사인의 고통은 더욱더 깊어질 것이다. 에르도사인이 대위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긴 왜 온 겁니까" - P78
"그렇죠? 이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일투성이죠. 예컨대 내주머니에 권총이 하나 있는데....., 왜 당신을 쏘아 죽이지 않았는지 나도 설명을 못 하겠다니까요." 엘사가 고개를 들어 테이블 끝에 서 있는 그를 노려봤다. 대위가 물었다. - P79
"사실대로 말해, 엘사, 당신은 이렇게 구질구질한 생활 말고늘 멋지고 즐거운 일이 일어나기만 바랐잖아?" "잘 모르겠어요." "알겠어요, 대위? 우리 사는 게 늘 이런 식이에요. 테이블에같이 앉아서도 말 한 마디 안 하고....……." - P80
"좋아. 우리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우리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어. 삶의 행복, 사랑의 기쁨, 결국문제는 바로 이런 거 아니었겠어? 굳이 말은 안 했지만 우린 서로가 같은 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 이제 그만 화제를 바꾸죠…………. 당신들, 앞으로 이 도시에 살 생각입니까?" - P81
대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에르도사인 씨, 우린 그만 가보겠습니다." "아, 가시겠다고....... 벌써요?" 엘사는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진짜 갈 거야?" "그래, 떠날 거야…………. 언젠가는 당신도 내 마음을......" "알아....... 당신 마음, 잘 알고 있어......." - P82
에르도사인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방구석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대위를 노려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억지로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내가 왜 당신을 개 잡듯 쏴버리지 않았는지 알아" 그 말에 두 사람은 놀란 눈으로 에르도사인을 쳐다보았다. "그건 말이야, 지금은 마음을 다 정리했기 때문이야." - P83
갑자기 에르도사인은 주머니에서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 멀찌감치 집어 던졌다. 권총은 벽에 부딪히면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 같은 놈한테 권총이 무슨 소용이야!" - P84
순간 대위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 후......, 조금만 더 참아줘요, 대위, 그 후로 난 늘 ‘모자란 놈‘, ‘덜떨어진 녀석‘ 소리를 들었어요. 그럴 때면 얼마나창피한지 내 마음이 온통 몸속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내 존재가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보다 더 하찮게 여겨졌죠……………. 화가 치밀었지만 덤빌 용기는 나지 않았어요. (후략)." - P86
대위는 조용히 에르도사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그건 당신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 용기를 시험해 보기 위해섭니다. 그러면 내가 그토록바라던 일을 성취하는 셈이니까. 내겐 천지개벽과도 같은 일이지・・・・・・ 그럼, 그만 가봐요." - P87
그때 에르도사인은 엘사도 자신만큼이나 불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엄청난 충격이 밀려들면서 의자 끝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괴로움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래서 가겠다는 거야? 정말로 내 곁을 떠나겠다고?" "그래. 이러면 우리 인생이 더 나아지는지 보고 싶어. 내 손을 봐." - P89
에르도사인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앞에 시멘트와 철근이 군림하고 있는 흉측한 도시의 모습이 나타났다. 뱀처럼 꿈틀대며 움직이는 군중 속으로 불쌍한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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