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천재‘로 불리는 피카소

알고 보면
선배의 미술을 훔친 도둑놈? - P244

‘미술 천재‘ 하면 떠오르는 그 이름, 파블로 피카소, 그의 작품을 보면한시도 멈추지 않는 변화무쌍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죠. 정말 천재라고추앙받을만합니다. 앗, 그런데 충격적인 속보가 있습니다! 알고 보니 그가 어느 선배의 아이디어를 슬쩍슬쩍 훔쳤다고 합니다. - P245

야수주의 리더 마티스, 입체주의 리더 피카소. 실제 둘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살고 있었습니다. (중략). 바로 ‘아방가르드 선도자‘입니다.
둘은 절실하게 저 타이틀을 원했습니다. 20세기 새로운 미술 창조를선두에서 이끄는 리더가 되고 싶었던 것이죠 - P246

홍코너~마티스!

 (전략). 단연 세잔이었습니다. 전에 없던 혁신적 표현을 담은 세잔의 그림은 마치 새로운 회화 창조를 위한 비밀이담긴 보물상자 같았습니다. 너도나도 세잔의 유산을 먼저 발굴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죠. 그 와중에 세잔이라는 거대한 고지를 선점한 자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앙리 마티스입니다. - P246

마티스 본인의 마음에는 썩 들지 않았던 작품, 공개한 후에도 많이 걱정했던 작품, 그림의 모델이었던 자기 부인마저 말렸던 작품 <모자를 쓴 여인>입니다. 당시 그만큼 미친 척하고 파격적인 시도를 했던 작품입니다. 무엇이 파격일까요? - P247

 때때로 ‘자연에서 본 색‘과 다른 색을 썼던 세잔, 고갱, 반 고흐의 작품에서 마티스는 힌트를 얻었습니다. <모자를 쓴여인>은 그 힌트를 극단적으로 작품 전체에 적용한 것입니다. 자연에서 본 색이 아닌 자신이 느낀 색을 표현하겠다고 생각한 거죠. - P248

청코너~ 피카소!

마티스가 존재감을 과시하던 그때, 열두 살 어린 피카소는 뭘 하고 있었을까요?  - P248

그런 피카소가 살롱 도톤 전시회에 걸린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을 보고 지적 충격을 받습니다. ‘그림을 이렇게 그릴 수도 있다니!‘ 그리고 마티스의 그림을 통해 지금껏 자신이 그렸던 그림들이 매우 구식이었다고 깨닫게 됩니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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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물의 얼굴을 보고 나오미는 놀라서 흠칫 발을 멈췄다. 잘아는 얼굴이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표를 보고서야 ‘닛타‘라는 성씨가 생각났다.
닛타는 나오미를 보자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더니 다시 표정을 환하게 가다듬고 조지 화이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 P52

전화를 끊고 뭔가 메모한 뒤, 그는 나오미가 돌아온 것을 눈치챘는지 "오랜만이에요"라면서 돌아보았다.
나오미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 몇 년 전과 똑같이 형사라고생각되지 않는 세련되고 기품 있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 P53

"이번의 무모한 수사에 대해서는 이나가키 경감님께서 얘기 해주셨지만, 설마 벌써 시작했을 줄은 몰랐네요. 더구나 이 플로어 카운터에 와 있다니. 저희 호텔로서는 특히 중요한 곳이라는건 알고 있나요?"
"알고 있죠. 리뉴얼하면서 이 특별 카운터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그렇다면 꼭 경험해보자고 생각했어요. 구가 씨와 몇 차례 리허설을 했는데 합격점을 받았습니다." - P54

"아차, 고객님이라고 해야지. 영어보다 우리말이 훨씬 더 어렵다니까."
"그런가요? 전화를 끊기 직전에는 어떤 말을 하셨지요?"
엇, 하고 당황한 듯 닛타는 눈이 큼직해졌다.
"천만에요. 라고 하셨어요." 나오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투를 쓰면 안 됩니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라고 하는 게 좋아요. 그리고 그 전에 수영장을 이용할 경우에는, 이라고 했는데 역시 예의에 어긋납니다. 수영장을 이용하실 경우에는 저희에게 말씀해주십시오, 라는 게 제대로 된 응대예요." - P55

"아니, 닛타 씨는 내일부터 1층 프런트에 서게 될 테니까 담당자는 다른 사람이 될 거야. 이쪽 플로어는 다른 형사분이 교대로 투숙객으로 위장해 감시에 나서게 되지. 닛타 씨 외에는 프런트클러크로 위장할 수 있는 형사분이 없는 모양이니까." - P56

"우지하라 씨에게는 그런 내용이 이미 전달되었습니까?
"응, 전달했어."
"놀라지 않았나요?"
그야 당연히, 라고 구가는 입가를 풀며 웃었다.
‘상당히 놀라더라고 지난번 사건 때 우지하라 씨는 여기 없었지만 누구에겐가 이야기를 듣고 형사를 프런트에 세우다니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내심 어이없어졌던 모양이야 그런데 그것과 비슷한 사태가 일어나고 게다가 이번에는 자신이 형사와 한조가 되라는 지시를 받았으니 당황하는것도 당연하지" - P57

"또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어요." 로비를 둘러보고 닛타가 절절한 어조로 말했다. "이 유니폼을 입고 야마기시씨와 함께 있게 될 줄이야."
"완전히 동감이에요." 나오미가 응했다. "반갑다, 라는 태평한말을 쓸 마음은 들지 않는군요. 요즘에도 생각하기만 하면 몸의떨림이 멈추지 않을 때가 있어요." - P59

나오미는 가슴을 살짝 뒤로 젖히면서 입을 열었다.
"컨시어지는 어떤 곤란한 요청에도 결코 노라고 말해서는 안되고 도망쳐서도 안 되기 때문이에요. 이런 일에 냉큼 휴가를 내버린다는 건 너무 무책임하죠. 우리를 기대하고 찾아주시는 고객님도 계실 텐데. 다만 나 이외의 다른 컨시어지는 아직 경험이부족한 데다 지난번 사건을 잘 모르고, 당연히 경찰의 잠입 수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모르죠. 그런 직원을 긴요한 컨시어지 데스크에 세워둘 수는 없잖아요. 결국 내가 맡는 수밖에 없어요." - P60

닛타는 입술을 깨물며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범인이 나타날 일시와 장소를 정확히 적었으면서 왜 범인의정체는 밝히지 않았는지, 밀고자가 노리는 게 무엇인지, 아직 밝혀진 게 없어요. 그래도 경찰로서는 무시할 수가 없죠. (후략)." - P61

닛타는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로비를 둘러보았다.
"듣기로는 이 호텔에서 개최되는 카운트다운 파티가 아주 특이한 취향으로 공들여 만들어졌다던데요?"
"맞아요. 다행히 호평을 얻어서 재방문 고객님이 아주 많죠.
구가 매니저님에게서 설명을 들은건가요?"
"잠깐 얘기도 들었고, 티켓도 봤어요. 파티를 예약한 투숙객에게는 체크인 때 그 티켓을 건네줘야 한다고 해서." - P61

"단순한 코스튬 파티가 아니에요." 나오미는 집게손가락을 휘휘저었다. "참가자 전원이 얼굴을 가린다는 게 약속 사항이에요"
"그야말로 가면무도회군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네. 그 파티, 뭐라고 했죠? 뭔가 꽤 기다란 이름을 붙였던데." - P62

5

(전략).
가슴에 단 이름표에 시선을 던지고 흠칫했다. 우지하라, 라는 글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상대도 닛타의 가슴팍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을 향해왔다. "구가 매니저님은 어디 계시지요?" - P63

우지하라가 작게 헛기침을 한 뒤에 숙박표를 집어 들고 남자손님에게로 갔다.
"구사카베 도쿠야 고객님이시지요."
"응. 맞아요."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부터 4박, 로열스위트를 이용하시는 것으로 괜찮겠습니까?"
"좋아요." - P64

"구사카베 고객님, 결제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현금입니까, 아니면 신용카드로 하시겠습니까?" 구사카베가 숙박표 기입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지하라가 물었다.
신용카드로, 라고 말하면서 구사카베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중략).
로열스위트에서 4박이라면 요금은 백만 엔이 넘게 나온다. 이런 고액을 떼어먹고 도망가서는 곤란하기 때문에 호텔 측으로서는 예치금을 받거나 신용카드를 복사해두는 것이 통례다. - P65

최상층만 가입할 수 있는 블랙카드였다. (중략).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쪽이 객실 키입니다. 구사카베 고객님, 저희 호텔 이용은 처음이십니까."
"그렇습니다." - P66

"잘 알겠습니다. 아, 자네가 고객님의 짐을 방까지 옮겨드리도록 해." 우지하라가 말했다. 그 ‘자네‘라는 게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닛타는 한순간 깨닫지 못했다.
"아니, 됐어요. 내가 직접 들고 갈 테니까." 구사카베는 가방을들고 엘리베이터 홀로 향했다. - P67

우지하라는 차가운 눈빛으로 구가를 보았다.
"일반적인 수속이라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오버부킹이나 더블부킹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하죠? 혹은 워크인의 고객님이 나타났을 때는?"
"1층 프런트라면 모르지만 이쪽 카운터에서는 그런 일은 있을수 없죠."
"그건 모를 일입니다. 만에 하나라는 게 있어요." - P69

우지하라가 다시 명함을 내밀었다. 받아서 들여다보니 프린트 오피스 어시스턴트 매니저 우지하라 유사쿠‘라고 적혀 있었다.
"그쪽 명함도 주시겠습니까?" 우지하라가 말했다.
"명함? 아, 죄송합니다. 탈의실에 두고 왔어요. 경찰 배지라면 휴대하고 있는데………."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 P70

다.
우지하라는 턱을 쓰윽 치켜들고 닛타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
"그게 좋아요. 이발을 하고 유니폼만 입으면 누구라도 호텔리어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앞으로도 주의하세요."
"네, 주의하겠습니다." 닛타는 대답했다. 얼굴을 홱 돌리며 혀를 끌끌 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꾹 참았다. - P71

(전략).
"어떤 방식입니까?" 닛타가 물었다.
"기본적으로 프런트에 있을 때는 내 지시에 따라주세요 접객을 비롯한 업무는 내가 할 테니까 닛타 씨는 일절 관여하지 마시고요. 내가 없을 때는 절대로 프런트에 서지 말 것. 프런트에 걸려 온 전화는 받지 말 것. 함부로 고객님에게 말을 거는 것도 금지합니다. 아시겠습니까?" - P71

맞은편 자리에서 모토미야가 입을 삐죽거렸다.
"요즘에는 어디를 가든 다 금연이니까 그건 이해하겠는데 아예 흡연실까지 없애버리는 건 대체 뭐야 호텔 쪽에는 흡연 가능한 객실이 있는데 직원은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장소가 없다는 건좀 이상하잖아?"
"유니폼에 냄새가 배어서 근무 중에는 금연이에요. 냄새에 민감한 고객님도 많으니까요." - P74

오늘은 12월 28일이고 31일까지는 사흘 동안의 여유가 있는데 이렇게 일찍 잠입해봤자 별 의미도 없는 거 아니냐고 닛타는 말했었다. 하지만 되도록 빨리 익숙해지는 편이 좋다, 라는 것이 이나가키에게서 내려온 지시였다. - P75

보고를 들으면서 닛타는 내심 놀랐다. 통상 호텔 측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고객의 프라이버시에 관한 자료는 제출해주려 하지않는다. 이번에 이렇게까지 수사에 협조적인 것은 호텔 측이 본격적으로 위기감을 품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 P76

"밀고장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범인이 무슨 이유로이 호텔을 찾아오느냐는 것이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모토미야가 말했다. "밀고자는 어쩌면 그 이유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P77

"혹시 이런 얘기인가?" 세키네가 대답하기 전에 닛타가 말했다. "범인은 이즈미 하루나 씨 외에도 꼭 죽여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 살인을 12월 31일에 이 호텔에서 실행하려고 마음먹었다. 즉 이건 연쇄살인 사건의 일부다. 그런 거야?" - P77

"12월 31일 밤에 최고급 호텔에서 살인이라니. 세상에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할 자가 있겠느냐고 웃어넘기고 싶기도 해. 하지만 이번 사건은 애초부터 엉뚱한 점이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우리 쪽도 엉뚱한 수사 방법으로 대항하는 것이지." 진지한 눈빛을옆자리의 모토미야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네, 전혀 있을 수 없는 얘기는 아닙니다." - P78

"밀고장에는 단순히 이 호텔에 나타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카운트다운 파티장에 나타난다고 일부러 콕 집어서 밝히고 있습니다." 와타베라는 베테랑 형사가 말했다. "그 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것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P79

"호텔 코르테시아도쿄 새해 카운트다운 매스커레이드 파티 나이트 너무 길어서 간단히 ‘매스커레이드 나이트‘라고 줄여서 쓰고 있습니다. (후략)."
(중략).
"이미 300명 이상이 신청했습니다. 이런 파티가 있다는 것을알지 못한 채 체크인했던 투숙객이 나중에 신청하는 일도 적지않다고 합니다. 예년의 실적을 통해 추산해보면 앞으로 100명이상이 막판에 예약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 P80

"몇 군데로 영역을 나눠서 재즈 연주, 마술쇼, 서커스 등을 하게 됩니다. 맥주, 와인, 칵테일은 무한 제공, 그리고 가벼운 먹을거리도 준비한답니다. 일반 입식 파티와 다른 점은 참가자 전원이 코스튬을 한다는 것입니다." - P80

"새해 카운트다운 파티는 어떤 호텔에서나 다 하고 있거든요. (중략). 모르는사람들끼리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상당히 재미있게 진행되는모양이에요. 다만 코스튬과 가면 쓰기는 자정까지예요. 카운트다운을 시작해서 제로가 된 순간에 참가자 전원이 일제히 자신의 맨얼굴을 드러냅니다. (후략)" - P81

"그 파티, 예약제라고 했지? 참가자 목록은 입수할 수 있겠나?" 이나가키가 닛타에게 물었다. - P81

"참가자 대부분은 투숙객이잖아. 가명이라면 카드가 아니라 현금으로 결제하겠지. 그걸 단서로 잡는 것만 해도 목록 체크는 쓸데없는 일은 아니야."
"네, 알겠습니다."
"이미 체크인한 사람 중에 12월 31일 밤까지 계속 투숙하는손님은 어느 정도나 되지?" - P82

(전략). "또 한 명 남자 손님이 체크인했습니다. 오늘 밤부터 4박입니다. 게다가 로열스위트."
와아, 라고 탄성을 올린 것은 세키네였다. 벨보이로서 로열스위트에 가본 적이 있어서 그 호화스러움을 잘 아는 것이다.
"그런 넓은 방을 혼자서 쓴다는 건가?" 이나가키가 물었다.
"예약 내용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나중에 일행이 합류할지도 모르지요. 신용카드를 복사하도록 내준 것을 보면 가명은 아닌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파티에는 아직까지는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 P83

"아 참, 그렇지. 피해자는 임신 중이었지만 범인이 꼭 남자라고는 할 수 없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선입견은 버리도록 한다. 이 호텔을 찾아오는 사람 모두가 용의자라고 생각하도록.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후략)." - P84

7

(전략).
"피해자가 야마가타 출신이라는 건 지난번에 얘기했었지? 그래서 일부러 야마가타까지 출장을 나갔던 젊은 형사가 귀가 솔깃한 정보를 보내줬지 뭐야. 이즈미 하루나 씨의 중고등학교 때친구가 거의 같은 시기에 도쿄에 왔다는 거야. 도쿄의 대학에 진학한 거였어. 그 어렵다는 닛타 씨의 모교야. 게다가 의학부." - P85

"상당히 친한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라고 대답하더라고.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 되면서부터 친해졌고 졸업 후에는 같은고등학교에 들어갔어. 이즈미 씨가 그녀의 집에 자주 놀러 오기도 한 모양이야. 학교 성적도 엇비슷해서 시험 답안을 함께 맞춰본 적도 많았다. 단지 도쿄에 올라온 뒤에는 생활 패턴이 달라서점점 왕래가 뜸해진 모양이야. 의대생과 전문학교에 다니는 사회인이었으니 시간을 맞추기가 좀 어려웠겠지." - P86

"딱히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동아리 활동도 안했고, 적극적으로 남들 앞에 나서는 타입이 아니라서 점심시간 같은 때는 주로 책을 읽는 일이 많았대."
"남자를 사귄 적은?"
"자신이 아는 한 그런 일은 없었고, 아마 절대로 없었을 거라고 했어. 상당히 자신 있는 말투였으니까 틀림없을 거야." - P87

"옷차림은 보이시했지만 결코 여자애다운 것을 싫어한 건 아니라고 했어. 웬만한 장식품이나 필기도구 같은 것은 오히려 소녀 취향이었대."
"양면성이 있었다는 뜻일까요?" - P88

"학업을 포기할 만큼 애견미용사가 되고 싶었을까요? 그렇다면 굳이 대학에 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바로 그 점인데, 레지던트 친구의 말에 따르면 뭔가 좀 이상하더라고."
"왜요?"
"자신이 기억하는 한, 하루나에게서 애견미용사가 되고 싶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는 거야. (후략)." - P89

"역시 그렇군. 나도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피해자의 입에서 이호텔 이름을 들었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 증거 수집팀 친구들도 피해자의 방을 샅샅이 훑어봤는데 이 호텔과 관련된 것은전혀 안 나왔다고 하더라고, (후략)." - P91

"노세 씨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실은 저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어요. 살인을 저지른 인간은 여열이 식을 때까지 되도록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게 마련이잖아요. 파티장이라는 화려한 자리에 나온다는 건 반드시 그럴 만큼 중대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죠."
"동감이야. 게다가 나는 처음부터 이 사건에서 독특한 냄새가난다고 느꼈어." 그렇게 말하며 노세는 자신의 코를 손끝으로 튕겼다. - P92

"요컨대 이즈미 하루나 씨를 살해한 것이 이 범인에게는 첫 번째 살인이 아니었을 거라는 말씀이군요."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아." - P93

"그 사진 말인데요, 왜 몰래 숨어서 찍었을까요? 밀고자는 이즈미 하루나 씨가 살해된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을까요?"
노세는 입을 시옷 자로 하고 머리를 내저었다.
"글쎄 나도 그걸 모르겠다니까. 범인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밀고자에 대해서도 전혀 손에 잡히는 게 없지 뭐야. (후략)." - P94

 노세가 말했다. "혹시 이 밀고자는 원룸 안의 상황이 다 보였다는 건가?"
"네, 그것밖에 없겠죠. 사체가 발견되었을 때, 원룸 창문은 어떤 상태였지요? 특히 커튼은? 완전히 닫혀 있었던가요?" - P95

8

컨시어지 데스크 업무는 오전 8시에 시작된다. 나오미가 오픈준비를 하고 있는데 프런트 클러크 유니폼을 차려입은 닛타가다가왔다. - P97

"아차, 실례." 그는 급히 호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냈다. 잠깐만 어리광을 피워도 금세 이런 지적을 받고 만다.
"그래서요? 프런트에 서고 싶은데, 왜 그러고 있어요?"
닛타는 코끝을 엄지손가락 끝으로 튕겼다. "나 혼자 프런트에 서지 말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누가요?"
"어제 했던 이야기에 등장한 우지하라라는 사람" - P98

"칭찬해드린 건데? 어쨌든 앞으로 계속 그 사람과 함께 지낼생각을 하니 우울해지네요. 범인이 카운트다운 파티니 뭐니 할거 없이 좀 더 빨리 나타나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냉큼 체포해버리고 철수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닛타 씨, 나한테 하소연하려고 오신 거예요?"
"아, 하소연은 그냥 서론이죠. 실은 연락 사항이 있어요." - P99

"만일 그 사람이 이곳에 들른다면 어떤 내용의 상담을 했는지나중에 좀 알려줄래요? 12월 31일 밤까지 투숙하는 손님에 대해서는 철저히 정보를 수집해두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어서요."
"살인 사건의 범인이 컨시어지에게 볼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 P100

"상담 내용에 따라 달라지겠죠. 프라이버시 문제도 있으니까."
닛타가 다시 얼굴을 가까이 댔다. "알고 있어요? 지금 비상사태라고요."
"잘 알죠. 하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 문제예요. 고객님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다만, 이라고 나오미는 말을 이었다. - P100

이 사람은 손님을 상대할 때 외에는 표정이나 말투에 거의 기복이 없다.
"로열스위트의 고객님이 컨시어지 데스크의 이용시간을 물어본 모양이던데요. 12월 31일 밤까지 투숙하시는 분이니까 뭔가 상담했을 경우에는 그 내용을 알려달라는 얘기였어요."
우지하라의 눈이 안경 렌즈 너머에서 가늘어졌다. "설마 그러겠다고 하지는 않았겠지?"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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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에르도사인은 지금 이 끔찍한 상황에서 자기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점성술사밖에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여태껏 공들여 펼쳐놓은 상상의 세계는 연기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점성술사는 돈이 있을지도 모른다. - P43

점성술사는 숲으로 둘러싸인 별장에 살았다. 그리 높지 않은 건물이었지만 나무 위로 솟아오른 붉은색 지붕 때문에 먼 곳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 P44

에르도사인은 인동초 꽃을 입에 물고 점성술사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 그래도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로 소풍이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는데, 점성술사의 집이 시야에 들어오자 마음이 더욱 설레기 시작했다. - P44

에르도사인은 생각했다.
‘지금 대리석으로 만든 노와 금실로 짠 돛이 달린 배가 있다해도, 바다가 일곱 가지 화려한 빛깔로 물든다 해도, 달빛이 은은히 내려앉은 곳에서 백만장자 아가씨가 내게 키스한다 해도,
내 슬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야. 아니, 지금 무슨 생각을하는 거지? 하지만 도시보다는 여기에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여기에는 최소한 실험실 정도는 있잖아? - P45

"에르도사인, 이 친구가 바로 아르투로 아프네르입니다."
사석에서 점성술사는 이 남자를 ‘우울한 기둥서방‘ 이라고불렀다. 보통 때 같았으면 우울한 기둥서방에게 무슨 말이라도 건넸을 테지만 지금 에르도사인은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 P46

점성술사가 지휘봉을 들고 미국 지도가 걸린 벽 쪽으로 걸어가자 우울한 기둥서방도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도 앞에 멈춰 선 점성술사는 푸른색으로 채색된 카리브해 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 P46

점성술사가 입고 있는 노란 외투는 스님의 법의처럼 보였다.
점성술사는 이어서 우울한 기둥서방에게 물었다.
"저들이 사람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인다는 사실을 알아요?
"네, 전문(電文)에서 읽었어요."
우울한 기둥서방이 말했다. - P47

"KKK단은 수백만 명의 사람을 끌어들였는데..."
아프네르가 흥분해서 불쑥 끼어들었다.
"그 드래곤이라고 하는 자들, 이름만 그럴싸하지 죄다철도나 사기죄로 줄줄이 감옥에 들어간 판에…점성술사는 못 들은 척 하던 말을 계속했다." - P48

점성술사는 그러고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우리 비밀 조직은 회원들의 기부금이 아니라, 각 세포조직마다 설치될 사창가를 통해 나오는 자금으로 운영될 겁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런 고전적인 결사가 아니라 초현대식 조직이에요. 우리 조직의 구성원들은 모두 동등한 경제적 권리를갖게 될 것이고, 또한 각종 소득 및 수익을 공평하게 분배받을겁니다. (후략)." - P49

벽에 걸린 시계가 다섯 시를 알렸다. 에르도사인은 이제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저, 죄송한데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상의하려고 왔거든요. 혹시 600페소 정도 가지고 계세요?
점성술사는 지휘봉을 놓고 팔짱을 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저, 내일까지 제가 다니던 제당 회사에 600페소를 갚지 않으면 전 감옥에 가게 됩니다." - P49

"우리 회사 경리과 직원들 일하는 거 보면 한마디로 엉망이에요. 우리가 수금을 못 해왔다고 하면 경위를 확인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게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가타부타 한마디 말이 없어요. 바로 그 점을 이용해서 수금한 돈을 일단 주머니에 챙기고 회사엔 못 받았다고 거짓말하는 거죠. 그리고 내가 써버린 돈은 다음에 수급한 돈으로 메우는 식으로요."
예르도사인은 삼각형의 정점에서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고, 나란히 앉아 있는 우울한 기둥서방과 점성술사는 이따금 서로눈빛을 교환했다. - P50

"혹시 돈을 훔칠 때 쾌감 같은 건 못 느꼈어요?"
"아뇨, 전혀.....
"그런데 구두는 왜 그리 낡아빠진 걸 신고 다녀요?"
"어디 돈이 있어야지요...………."
"아니, 그럼 빼돌린 돈으론 뭘 했어요?"
"그 돈으로 구두를 살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 P51

정신이 나갔던 건지 아니면 귀신에 홀렸던 건지, 에르도사인은 마치 그 돈을 탕진하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던 것처럼 엉뚱한 데만 골라 돈을 써댔다. 예를 들어별로 먹고 싶지도 않은 과자를 사거나, 또 구경 한번 못 해본게 요리나 거북이 수프, 개구리 튀김 요리를 사 먹고 다녔다. - P51

점성술사가 옆에 앉은 우울한 기둥서방에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1000페소 정도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구상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착수금인 셈이죠. 에르도사인,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가 해드릴 수 있는 돈은 300페소 정도뿐이군요. 하지만 당신 스스로 곤경에 빠진 겁니다. 안 그래요?" - P52

에르도사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는 부들부들 떨며 모자챙을 꽉 움켜쥐었다. (중략). 우울한 기둥서방은 자세를 바로하더니, 통통한 손으로 턱을 괴고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차분하게 말했다.
"진정하고 앉아요, 친구. 내가 600페소를 드리죠." - P54

그때 점성술사가 끼어들었다.
"자자, 그럼 우리 이렇게 합시다. 내가 300페소, 당신이 300페소를 내놓는 게 어때요?"
"아닙니다. 그건 우리 사업에 꼭 필요한 돈이니 그냥 갖고계세요. 전 당장 쓸데가 없으니 괜찮아요. 게다가 여자 세 명이계속 돈을 벌어주고 있으니까요." - P55

말할 틈을 노리던 점성술사가 끼어들었다.
"나죠. 그런데 그 문제라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요. 하지만 당신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말하고 싶지 않은, 아니 말 못 할 그런 일이 있을걸요."
"그 돈은 회사에 언제쯤 갖다 줄 겁니까"
"내일이요."
"그러면 지금 수표를 써드리죠. 오전 중에 현금으로 바꿀 수있을 겁니다." - P56

에르도사인의 마음을 눈치챈 아프네르는 책상 옆에 앉아 있던 점성술사를향해 말했다.
당신의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무엇보다도 구성원들의 복종심이 제일 중요하겠죠?" - P57

점성술사는 우울한 기둥서방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잠시 무슨 얘기를 나눈 다음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점성술사는 두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에르도사인이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몸집의 점성술사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 P59

우울한 기둥서방

(전략).
그 순간 에르도사인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엉뚱한 질문이튀어나왔다.
"돈도 그렇게 많이 벌면서 왜 그런 기둥서방 노릇을 계속하는 거죠?
이 말을 듣자 아프네르의 얼굴엔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봐요, 친구. 그런 기둥서방 노릇은 아무나 하는 줄 알아요? 그 여자들이 알아서 매달 2000페소나 바치는데 내가 왜 이일을 팽개치겠어요? 당신 같으면 그렇게 할 것 같아요? 절대로아닐 겁니다. 내 말이 틀려요? - P59

에르도사인은 쓸데없는 말을 했구나 싶었지만 이미 돌이킬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기둥서방이 입을 열었다.
"내 말 잘 들어요. 만약 내일 의사가 나한테 와서, 지난 4년동안 내게 30000페소를 벌어다 준 스페인 출신 여자가 일주일안에 죽을 거라고 말했다고 칩시다. 그래도 난 그녀에게 계속 일을 시킬 겁니다. 남은 엿새간 일하고 마지막 이레째 되는 날죽도록 말입니다." - P60

"불쌍하지도 않냐고? 이봐요, 친구. 그런 여자들을 동정할필요는 없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납고 가장 지독한 여자들이 바로 몸 파는 여자들이에요. 그런 표정으로 날 보지 마시구려. 그런 여자들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후략)." - P60

"(전략). 분명히 말하지만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잽니다. 이해가 안 가면 원시시대의 야만적인 부족들을 한번 생각해 봐요. 여자들은 밥하고 빨래하고, 하여간 안 하는 일이 없습니다. 반면에 남자들은 사냥을 나가거나 싸우는 일이 전부죠. 지금이라고 다른가요. (후략)." - P61

"(전략). 이 말을 잘 살펴보면 그런 여자들의 심리를 잘 알 수 있어요. 사실 보통 사람들은 물론이고 소설가들조차 모르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는 셈이죠. 프랑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혼자 사는 매춘부는몸을 팔지 않는다.‘¹³" - P62

13) ‘창녀는 자기가 벌어 먹이는 남자가 있어야 비로소 몸을 판다.‘ 라는 의미. - P418

 달콤한 오후의향기에 취한 듯 에르도사인은 입을 벌린 채 멍한 시선으로 아프네르를 쳐다보았다.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그가 아득히 멀게만 보였다. 에르도사인이 물었다.
"어쩌다 그런 생활을 하게 됐어요?"
"그때만 해도 아주 젊었을 때죠. 당시 난 스물세 살이었고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교수였어요. 이래봬도 난 수학 교수였단 말입니다." - P63

"(전략).
물론 지금은 내 말이 많이 생소하겠지만, 조만간 잘 알게 될겁니다. 만약 내 말에 동의할 수 없다면, 포주 한 명이 여자 일곱을 거느리고 있는 현실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레포요라는 이탈리아 놈은......, 지금은 한물갔지만 한창 잘나갈 때는여자를 무려 열한 명이나 거느렸죠. 스페인에서 온 훌리오란자는 여덟 명 정도 데리고 있었고, 프랑스 놈들은 대부분 최소한 세 명 정도는 거느리고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여자들끼리 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낸다는 겁니다.
(후략)." - P65

아프네르의 말을 들으니 에르도사인은 왠지 주눅이 들면서전에 점성술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울한 기둥서방이 길거리에서 여자를 보면 뭐라 하는지알아요? ‘이 여잔 5페소, 저 앤 한 10페소, 아니 20페소 정도는벌어 오겠는걸.‘ 그런답니다. 그게 다예요." - P66

"내 역할이라....... 점성술사가 돈을 모아서 주면 그 돈으로여자들을 모아 매춘 조직을 만들고 운영하는 거죠."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점성술사에 대해 솔직히 어떻게 생각해요?"
"한마디로 미친놈이죠. 큰일을 할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입만 살아 나불대는 그런 위인인지도 모르죠." - P67

"점성술사는 당신을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어요. 당신 얘기만 나오면 앞으로 아주 큰일을 할 사람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군요."
그 말을 듣자 에르도사인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네, 현 사회체제를 타도하기 위해선 우선 철저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참, 하던 얘기 계속하죠. 아직 이해가 잘 안 되는 게있는데……………, 당신의 위치가 대체 어떤 건지........" - P68

"그건 현실을 몰라서 하는 말이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세상이 어떤지 알고나 하는 소립니까?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 그것도 모자라서 어린애들까지 무자비하게 착취당하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만약 자본주의 체제의 착취라는 게 무엇인지그 실상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지금 당장 아베야네다에 있는 주물 공장이나 냉동 창고에 가보든지, 아니면 유리 공장이나 성냥공장, 담배 제조창……………, 아무 데나 가보세요." - P69

"우리 같은 잔챙이들이야 기껏 여자 한둘 정도 뜯어먹고 살죠. 그런데 자본가들은 저 수많은 대중들을 갉아먹고 산단 말입니다. 그런 자들을 대체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요? 사창가 포주와 대기업 사장 중에 누가 더 잔인하다고 해야 할까요? 이건당신 얘긴데, 월급이라야 고작 100페소 주면서 정직하게 살라고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대던 게 바로 그들 아닙니까? 자기네들 지갑엔 10000페소나 들고 다니면서." - P69

"내가 원하는 거요? 이 말만은 해야겠네요. 도와주신 건고맙지만, 솔직히 말해 돈을 받고 나니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습니다. 수표 도로 드릴까요? 자, 여기 있습니다."
에르도사인은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아프네르는 경멸 어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 어서 가서 돈이나 갚아요." - P70

점성술사에게 들은 이야기였는데, 옛날에 아프네르는 어떤 카바레 댄서에게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한다면 그 증거로 정표를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다른 여자들이 지켜보는데도 주저하지 않고 자기 정부에게서 받은 비싼 목걸이를 벗어서 그에게 주었다. - P71

생애 최대의 굴욕

에르도사인은 그날 밤 여덟 시쯤 집에 도착했다. (중략). 아까 얘기했죠? 집에 도착하니 식당에 불이 켜져 있었는데, 전 문을 열자마자 얼어붙었어요. 아내가 외출복을 입고 의자에앉아 절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 P73

엘사의 충격적인 말 한마디에 에르도사인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때 대위가 끼어들었다.
"오래전부터 부인을 알고 지냈는데.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데요?"
"왜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엘사가 따지듯 물었다. 대위가 나서서 엘사를 거들었다.
"맞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아무리 부부 사이라도 물어보지 말아야 될 게 있는 법이죠." - P74

이 침입자는 그를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지쳤다는 게 정확하게 무슨 뜻입니까?"
"권태, 고뇌, 그리고 불행하고 비참한 삶…………. 혹시 지금이 성경에 나오는 고난의 시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내 친구 중에 창녀와 결혼한 녀석이 하나 있는데 만날 때마다 그 녀석이 하는 말이 있죠. 자기랑 결혼한 그 창녀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매춘부라나. 이 세상 모든 게 성경에 쓰인 대로 이루어진다나.." - P76

"물론 그러시겠지. 당신은 돈을 잘 벌 테니까. 얼마나 벌어요? 500페소 정도?"
"대충 그 정도요."
"그래, 그 정도면 적당하네. - P76

엘사는 베일 사이로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의 여원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에르도사인의 마음은 갈수록 허전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허무의 늪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의식이 점점 더 희미해지면서, 이젠 외마디 비명조차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 P77

또다시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천장에 매달린 노란전등에 비친 세 사람의 얼굴은 마치 밀랍으로 만든 데스마스크 같았다. 조금만 참으면 거북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상황도 다 지나가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막상 떠나버리면 에르도사인의 고통은 더욱더 깊어질 것이다.
에르도사인이 대위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긴 왜 온 겁니까" - P78

"그렇죠? 이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일투성이죠. 예컨대 내주머니에 권총이 하나 있는데....., 왜 당신을 쏘아 죽이지 않았는지 나도 설명을 못 하겠다니까요."
엘사가 고개를 들어 테이블 끝에 서 있는 그를 노려봤다. 대위가 물었다. - P79

"사실대로 말해, 엘사, 당신은 이렇게 구질구질한 생활 말고늘 멋지고 즐거운 일이 일어나기만 바랐잖아?"
"잘 모르겠어요."
"알겠어요, 대위? 우리 사는 게 늘 이런 식이에요. 테이블에같이 앉아서도 말 한 마디 안 하고....……." - P80

"좋아. 우리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우리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어. 삶의 행복, 사랑의 기쁨, 결국문제는 바로 이런 거 아니었겠어? 굳이 말은 안 했지만 우린 서로가 같은 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 이제 그만 화제를 바꾸죠…………. 당신들, 앞으로 이 도시에 살 생각입니까?" - P81

대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에르도사인 씨, 우린 그만 가보겠습니다."
"아, 가시겠다고....... 벌써요?"
엘사는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진짜 갈 거야?"
"그래, 떠날 거야…………. 언젠가는 당신도 내 마음을......"
"알아....... 당신 마음, 잘 알고 있어......." - P82

에르도사인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방구석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대위를 노려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억지로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내가 왜 당신을 개 잡듯 쏴버리지 않았는지 알아"
그 말에 두 사람은 놀란 눈으로 에르도사인을 쳐다보았다.
"그건 말이야, 지금은 마음을 다 정리했기 때문이야." - P83

갑자기 에르도사인은 주머니에서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 멀찌감치 집어 던졌다. 권총은 벽에 부딪히면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 같은 놈한테 권총이 무슨 소용이야!" - P84

순간 대위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 후......, 조금만 더 참아줘요, 대위, 그 후로 난 늘 ‘모자란 놈‘, ‘덜떨어진 녀석‘ 소리를 들었어요. 그럴 때면 얼마나창피한지 내 마음이 온통 몸속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내 존재가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보다 더 하찮게 여겨졌죠……………. 화가 치밀었지만 덤빌 용기는 나지 않았어요. (후략)." - P86

대위는 조용히 에르도사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그건 당신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 용기를 시험해 보기 위해섭니다. 그러면 내가 그토록바라던 일을 성취하는 셈이니까. 내겐 천지개벽과도 같은 일이지・・・・・・ 그럼, 그만 가봐요." - P87

그때 에르도사인은 엘사도 자신만큼이나 불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엄청난 충격이 밀려들면서 의자 끝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괴로움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래서 가겠다는 거야? 정말로 내 곁을 떠나겠다고?"
"그래. 이러면 우리 인생이 더 나아지는지 보고 싶어. 내 손을 봐." - P89

에르도사인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앞에 시멘트와 철근이 군림하고 있는 흉측한 도시의 모습이 나타났다. 뱀처럼 꿈틀대며 움직이는 군중 속으로 불쌍한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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