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에 대한 감식 결과가 나왔어. 네 종류가 유카씨의 머리카락이 아닌 걸로 나왔는데, 그중 하나는 청소를 담당하는 종업원의 것과 일치하니까 그것은 제외해도 될 거야. 나머지가 누구의 머리카락인지 확인 좀 해봐." - P244
"이걸 보면 전부 여자네요. 그럼 후지모리 요코, 가나에, 이치가하라 기요미, 고바야시 마호 중 누군가의 것이겠군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를 보더니 당황해하며 얼버무렸다. "아아, 혼마 씨가 여사가 아니라는 건………." "괜찮아요, 발견된 머리카락이 모두 검정색인가 보죠?" "죄송합니다. 실은 그렇습니다. ・・・・・・ 그럼, 저는 조사하러가보겠습니다." - P245
"나오유키 씨한테 들었습니다. 방금 전에 그런 얘기가 오갔다고 하더군요. 나오유키 씨 얘기로는 부인께서 왠지 유카씨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던데." 나오유키가 유카에 대해 털어놓은 걸까? 왜 그렇게 쉽게자백했을까? 아니, 그것보다 왜 그런 방향으로 얘기가 진행된 걸까? - P246
"바닥에 뭔가가 떨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였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만, 마침 그 시각에 깨어 있던 다케히코 씨는 그 소리가 마음에 걸렸답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는데 그 사정이라는 게 나오유키 씨에 관한 거였습니다." - P247
"다케히코 씨가 밤중에 일어난 시각은 몇 시쯤인가요?" "3시라고 하더군요." 이 말을 하는 경감의 눈이 예리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그는 목소리를 죽이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만약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상당히 유력한 정보라고 할수 있죠. 다케히코 씨가 들었다는 소리는 범인이 낸 게 아닐까 싶습니다." - P248
"아, 그 부분요? 그게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야자키 경감은 다시 환하게 웃었다. "자기 전에 나오유키 씨의 방문에 표시를 해두었다고 하더군요. 그 표시란 게 머리카락 한올을문틈에 침으로 붙여두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문을 열거나 닫으면 머리카락이 떨어질 테니 밤중에 방을 나왔는지 어떤지를 확인할 수 있는 거죠.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그 얘길 듣고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더군요. 좋아하는 여자가 아무리 걱정된다고 그렇게까지 하다니." - P249
유카를 죽인 것은 나오유키가 아니다. 어젯밤 그의 방문이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을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얘기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나오유키는 동반자살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셈이다. - P250
내가 복수해야 할 인간. 그 사람은 나오유키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유카가 유서를 훔친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유카가 감싸야 할 사람이 또 있는 걸까? - P251
"두 종류의 머리카락은 주인이 밝혀졌습니다. 후지모리 가나에 씨와 고바야시 마호 씨의 것 같습니다. 혈액형과 머리길이도 일치합니다. 만약을 위해 감식으로 확인하겠지만요." - P251
"성별은 여성, 혈액형은 AB형, 연령은 20대나 30대, 짧은머리로 최근에 자른 흔적이 있음. .………… 여기에 해당하는 여성...... 이 없습니다. 혹시 몰라서 다케히코 씨와 기요미 씨에게도 물어봤지만 두 사람 다 혈액형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 P252
"뭘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습니까?" 나오유키가 경감에게 말했다. "머리카락 주인이 없다는 건 외부인이 유카의 방에 침입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없다면 그렇겠죠." - P252
"여자가 강도짓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어. 왜 가끔 미녀 강도가 신문에 실리기도 하잖아. 남자를 유혹해서 수면제를 먹이고 돈을 훔치는" 소스케가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범인이 외부인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자 무거운분위기가 약간 누그러진 것 같았다. 단 한 사람, 야자키 경감만은 못마땅한 얼굴이다. - P253
"여자가 범인이라니……" 소스케가 요코와 똑같은 말을 했다. "이제야 유카한테 저항한 흔적이 없는 게 납득이 가는군. 범인은 돈을 노렸던 거야. 그건 그렇고 그런 사람이 있는 걸보면 여기도 좋은 환경이라고는 할 수 없겠군." - P254
"오빠, 무슨 소리를 들었으면 좀 더 빨리 나가보지 그랬어?" 그러곤 가나에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어제 새벽 3시쯤 유카 언니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다케히코 오빠가 창문으로 방안을 살펴봤대요. 지문은 그때 묻은 거래요." - P254
"목이 좀 마른데 커피라도 끓여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끓여올게요." 가나에가 일어서며 말했다. "지배인님은 아침부터 계속 일하셨잖아요. 좀 쉬세요." "아니에요. 그런 당치도 않은………. "괜찮아요." - P255
나오유키가 쓸데없는 말을 꺼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다도에 관한 얘기가 너무 길어지지 않기를 바랐는데, 요코가 우라센케(裏千家、일본 다도의 3대 유파인 우라센케, 오모테센케, 무샤노코지센케 중 하나 -옮긴이)냐고 물었다. 나는약간 주저했다. 어느 파라고 해야 하지? 아무도 모르는 거라면 적당히 둘러대도 될 것 같지만.………. - P256
"아니, 오모테센케야. 형님한테 들은 적이 있어. 부인께서오모테센케의 다도를 가르친 적이 있다고." 별걸 다 기억하는 남자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기를 잘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오유키 씨 말이 맞아요. 오모테센케예요." - P256
"물론이지." 요코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우라센케에서는 거품이 잘 나도록 하지만, 오모테센케에서는 거의 거품을 내지 않아. 제 말이 맞죠?" 갑자기 피가 머리로 몰렸다. 모르는 내용이었다. 나는 점심때 야자키 경감과 나누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거품을 잘 내는게 어렵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 P257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방금 주고받은 얘기를 들었을까? 순간 경감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지금까지와는 확실히 다른, 날카로운 빛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 P257
자신들은 일단 수사본부로 돌아가지만 수사관들이 주변을지키고 있으니 안심하며 쉬라고 경감이 말했다. 하지만 속뜻은, 그러니까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방에서 얌전히 있으라는 말일 것이다. - P258
"그랬군요. 역시 여성의 눈썰미는 못 당하겠네요. 하지만알아차린 사람이 기쿠요 부인이라 다행입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골치 아팠을 겁니다." "다른사람한테는 아무 말 안 할 테니 걱정 마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 P259
"그런 감정은 일시적인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식을 거라고말했는데 유카는 이해하지 못하더군요. 결혼은 안 해도 좋다고 고집을 피우면서………겉으로는 얌전해 보여도 유카에게 그런 면이 있었는지 모른다. 대담해 보이는 가나에가 오히려 보수적일 수도 있다. - P260
"어제 여기에 도착해서 주더군요. 자기도 같은 진주를 사용한 반지를 낄 테니까 저도 넥타이핀을 하라면서요. 받고 싶지 않았지만 옥신각신하다가 괜히 다른 사람들 눈에 펼까 싶어서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유품을 받은 셈이네요."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죠. 아이러니한 얘기지만." - P261
"부인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유카가 저를 동반자살 사건의 범인이라고 생각한게 아닐까 하고요." "나오유키 씨도.………" 깜짝 놀랐다. 그러나 나오유키의 뛰어난 통찰력을 생각하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 P262
"저는 정말 동반자살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신에게 맹세할 수 있습니다. 유카가 살해당한 건에 대해서도 전혀 모릅니다." "알고 있답니다." 나는 가슴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어젯밤 나오유키 씨가 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다케히코 씨가 증명해 주셨잖아요." - P263
"사건 직후, 유카가 딱 한 번 묘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화재가 나기 전에 어디 갔었어요?‘라고 분명히 그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아무 데도 안 가고 그냥 잤다고 했더니 그럼 기분 탓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더군요." - P263
"나오유키 씨는 유카 양을 죽인 범인이 외부인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유카의 행동에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집안사람 중에는 범인이 없다고・・・・・・ 그럴 거라고 믿습니다." - P264
긴 복도를 둘이서 나란히 걸었다. ‘D‘동을 지날 때 나오유키가 말했다. "생각보다 정정하시네요." - P264
"나이 드신 분들한테 이 복도가 너무 길어서 힘들다는 불평을 많이 들었는데, 부인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요. 게다가 본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방에 묵으시고." - P265
"죄송합니다. 하지만 내일은 분명히 해결될 겁니다. 제 생각에 범인은 아직 주변에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 경찰•은 우수하니까 분명히 찾아낼 겁니다. 내일은 꼭." - P265
유카는 왜 나오유키가 동반자살 사건의 범인이라고 생각했을까? 결과적으로는 오해였지만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을까? 나오유키의 말 중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유카가 그에게물었다고 했다. 화재가 나기 전에 어디 갔었어요..…………. - P267
순간 아, 하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나왔다. 가나에와 유카의 사소한 말다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화재가 나기 전에 무슨 소리를 들었다는 증언은 없었느냐고 유카와 가나에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대답한 것은 다케히코였다. 그는 ‘A-1‘ 방에서 소리가 났다 해도 그걸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요코뿐일 거라고 했다. - P268
동반자살 사건이 일어난 날 밤, 유카는 나오유키의 방에서무슨 소리가 나는 걸 들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가나에가이런 말도 했다. 자고 있던 것에 비하면 방에서 굉장히 빨리나온 거네. 내가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언니는 이미 본관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거든. - P268
시간이 흘렀지만 유카는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어젯밤 동반자살 사건이 위장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얘기가나왔을 때 맨 먼저 나오유키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떠올랐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정도의 확신은 없었을지도모른다. 다만 만일을 생각해서 자기 손으로 유서를 훔쳐내 그내용을 확인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 P269
어젯밤 나는 나오유키의 방문이 열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케히코의 방문에서 난 소리였다. 그래서 동반자살 사건이 일어난 날 밤 유카도 나와 똑같은 착각을 한 게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 그 방에 묵은 사람은 없었다. - P270
N, S, VI. 그 어느 것도 딱 와 닿지 않았다. 그 순간, 어쩌면완성된 글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글자를 쓰는 도중에 유카의 숨이 멎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w‘라든가 또 다른 글자는・・・・・・. 몸을 뒤척이다 살해된 유카처럼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글자를 쓰려고 했다. - P271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설마 그 사람이 ・・・・・・ 아냐. 그런 생각을 못 할 것도 없다. 만약 그 사람이 범인이라면 어떨까? 몇 가지 의문이 풀릴까? 예를 들면 범행 후에 ‘C-2‘ 방으로 도망간 이유를 설명할수도 있을까? - P271
손가락이 멎은 것은 연못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깜짝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래, 그렇게 된 거였어.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더니 선명한 광경이 떠올랐다. - P272
12시가 되기 전에 전화를 걸었다.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새벽 2시에 여자 욕탕에서 만나자고 엄청난 모험이었다. 만약상대가 범인이 아니라면 내 행동을 수상하게 여기고 경감에게 말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혹은 경찰이 모든 전화를 도청할 위험성도 있다. 어느 경우든지 야자키 경감은 부하들을 이곳으로 보내 나를 체포한 뒤 심문하려고 할 것이다. 그 순간 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 P273
나는 반드시 올 거라고 믿는다. 범인이라면 분명히 올 것이다. 다시 한번 시계를 보았다. 새벽 2시 1분...…그때 문에서 달칵, 하는 소리가 났다. 내눈앞에서 손잡이가 돌아갔다. 그리고 문이 밖으로 천천히 열렸다. "기쿠요 부인?" - P274
"범인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나는 말을 계속 이었다. "그사람도 당신의 설득이라면 듣지 않을까 ・・・・・・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부탁을 하는 겁니다." ".………… 도대체 누구라고 생각하시는데요?" "그 사람은..….…." 나는 주저하는 척하고 다시 상대의 눈을보며 말했다. "후지모리 요코 씨입니다. 틀림없습니다." - P275
"저녁때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보세요, 욕조 안에 뭔가 떨어져 있죠?" 나는 욕조 옆에 서서 식은 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상대도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어디요?" - P275
욕조에서 기어오르려고 하는 상대를 위에서 내리눌렀다. 노답지 않은 기민한 동작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아이스피크로 두 번째 공격을 했다. 이번에는 가슴을 찔렀다. 상대가 소리를 질렀지만 밖에서 들릴 만큼 크지는 않았다. 상처부위에서 흐른 피가 욕조에 퍼져나갔다. "왜......" 피로 물든 욕조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고바야시 마호가 나에게 물었다. - P276
이치하라 집안사람들은 전부 각자의 방에 있었을 것이다. 남는 사람은 고바야시 마호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마호는 ‘C-2‘ 방에 들어갔을까? 그건 도주 경로를 단축하기 위해서다. - P276
마호가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면 ‘D‘과 본관을 지나야만한다. 마호는 그 방법이 위험할 뿐만 아니라 시간도 너무 많이 걸린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정원을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 P277
이런 추리를 이끌어 낸 동기는 유카의 다잉 메시지였다. ‘I‘ 은 무슨 글자였을까? 죽은 유카와 같은 자세를 하고 있다가 그걸 깨달았다. 엎드려서 왼손으로 글자를 쓰게 되면 보통과는 반대로 손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이는 게 편하다. 유카가 죽기 직전 쓰고 싶었던 것은 W도 아니고 N도 아니다. ‘M‘이라는 글자였다. MAHO의 M. 범인은 마호였다. - P277
"왜 나한테 죽어야 하는지 짐작이 안 가겠지? 하지만 내가누구인지 알면 바로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말하고 마호 쪽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모, "모르・・・・・・겠어요. 누구・・・・・・죠?" 숨을 헐떡이면서 마호가 물었다. - P278
"설・・・・・・마, 죽은 .....… 줄......." "하지만 이렇게 살아 있어. 그리고 당신 덕분에 이렇게 상처도 남아 있지." 마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 P278
자백하면 살려줄 거라고 생각했는지 마호는 열심히 입을움직였다. 덕분에 상황을 알게 되었다. 유카는 자기 방에 들어가자마자 마호에게 기습을 당한 것이다. 마호는 유카를 이불에 눕혀 자고 있다가 당한 것처럼 꾸몄을 것이다. 그러나유카는 바로 죽지 않았다. 마호가 나가고 나서 마지막 힘을다해 다잉 메시지를 남겼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잘 알았어." - P279
"이제 편하게 해줄게." 나는 욕조 안으로 손을 넣어 마호의 가슴에 꽂혀 있는 아이스피크를 빼냈다. 뭔가가 새어나오는 듯한 소리가 났고 마호는 눈을 크게 떴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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