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학문에서 사기사건은 어떻게 일어나나?


‘학문에서 일어나는 사기‘라는 주제는 말할 것도 없이 매우 흥미로운 것이지만 그 내용이 쉽지 않고 그 층이 겹겹이 복잡하여 다른 이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드물게 다루어지고 있다. 언론인들의 대부분은 그 사기사건들 중에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건들에만 관심을 갖는데, 그런 사건들은 짧은 시간 동안 거세게 끓어오르고는 곧바로 다시 식어버리면서 아예 관심 밖으로 사라져버린다. - P5

. 한편으론 조심이 지나쳐 화를 부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를테면 1980년대 미국에서는 크게 문제가 된 과학 사건들이 생물의학 연구 분야에서 잇달아 일어나자 의회가 나서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사기행위를 철저히 가려내도록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사회의 관심과 열기가 치솟으면서 사기꾼과 위조자들을 색출하는 마녀사냥이 벌어지는 일까지 생기기도 하였다. - P6

과학자들이 과학 사기사건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대부분자신이 혐의의 대상이 되거나 해당 사건에 심사자로 연루되어 있을때뿐이다. 더구나 그 주제와 관련하여 스스로 발 벗고 나서서 자세하게 규명하려 한다면 ‘제 집안 헐뜯어 망신시킨다!‘는 의심과 손가락질을 받을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다. - P6

지금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학문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기현상을 맨 처음 체계적으로 다룬 사람은 바로 영국의 위대한 수학자 찰스 배비지 Charles Babbage, 1792~1871였다. 1830년 런던에서 발표된 『영국 학술의 몰락에 관한 고찰들』에서 배비지는 한 꼭지를 할애하여 학술사‘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 P7

‘위조‘ 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만연되었던 것은 배비지가 ‘요리하기 cooking‘ 라고 표현한 절차였다. 그 뜻을 풀자면, (가설에) 들어맞지 않는 값들을 아예 빼버려서 실험이나 계산의 결과들을 ‘맛있게꾸며‘ 조작한다는 말이다. - P8

이와 같은 데이터조작의 대가라면 의심의 여지없이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아이작 뉴턴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측정하여 얻은 값들을 자신의 이론에 맞게 미리 정해놓은 값에 가깝게 되도록 교정계수를 가지고 다듬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천재적인 능력 덕에 뉴턴은 그런 방법으로 여러 가지 자연법칙들을 찾아냈지만, 오늘날의 잣대로 보면 그 방법은 그다지 깨끗한 것은아니다. - P9

그렇지만 학문 연구분야에서 장난과 정말 마음먹고 하는 사기를 구분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수수께끼로 남은 것이 그 유명한 ‘필트다운 화석‘이다. 애초 장난으로생각했던 것이냐 아니면 정말 의도를 가진 사기였느냐를 두고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 P11

본서 『과학의 사기꾼』을 쓰면서 내가 마음먹은 목표는 도덕이라는 집게손가락으로 욕을 먹어 싼 사기 또는 위조사건의 주인공들을 손가락질하자는 것이 아니다. - P11

원고 정리를 해준 가브리엘레 자이델 여사에게 특별히 깊은 고마움을 표하며 그림과 사진 문제를 처리해준 베라 여사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고 빌라이-VCH 출판사에서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온갖 힘을 아끼지 않은 이 책의 프로젝트 책임자 구드룬 발터 박사께도 감사드린다.



하인리히 창클 - P13

짜맞춘 계산-뉴턴의 ‘조작인수


아이작 뉴턴이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또 더 자라 나중에 위대한 학자까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 P39

역사가인 리처드 웨스트폴Richard Westfall은 뉴턴이 자신의 측정값들을 다루면서 사용했던 수치들을 가리켜 ‘조작인수fudge factor‘ 라고 했다. 뉴턴은 이 ‘인수‘를간단하면서도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곤 했다. 이를테면 그가 이론으로 생각했던 값이 나올 때까지 계산에 넣어야 할 초기값들을 계속해서 바꾸는 식이다. - P40

그처럼 그리 성실하다고 할 수 없는 뉴턴의 계산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경우가 바로 소리의 빠르기 계산이었다. 그당시 이미알려져 있던 파동의 법칙을 바탕으로 뉴턴은 소리가 1초에 약 255미터 움직인다는 계산 결과를 내놓았다. 그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프랑스의 두 학자가 내놓은 값은 뉴턴의 값과 큰 차이를 보였는데,
그들의 값은 499%에서 182%였다.  - P40

(전략). 자기 명예를 살리기 위해 그는 자신이 계산을 할 때 공기밀도를 제대로 계산에 반영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공기밀도의 값을 자기 마음대로 1/850에서 1/870로 높였다. 그러나그렇게 했음에도 여전히 348%에 미치지 못하자 이번에는 습도의 힘을 빌렸다. - P41

한참 뒤에 프랑스의 물리학자 루이 라플라스Louis Laplace는 그리 과학적이지 못한 그런 조작이 꼭 필요했던 게 아니었으며, 이론을 통한 뉴턴의 처음 계산이 옳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 P41

오늘의 우리들은 해마다 태양이 50.4초씩 앞서간다는 사실을알고 있다. 그런데 이 값은 17세기에 이미 알려져 있었는데, 다만 그런 차이가 생기는 까닭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태양과 달의 끌림(인력) 때문이란 걸 처음으로 알아차린 사람이 바로 뉴턴이었다. 그는 그 차이 (세차운동)를 계산하기 위해 공식을 만들고,
그걸로 계산하여 얻어낸 값을 천문 관측의 자료와 비교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값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 P43

그의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증명할 때도 똑같은 식이었다.
계산을 시작하기 위해 그는 먼저 거의 자기 마음대로 지구와 달의 거리를 지구 반지름의 60배로 잡았던 것이다. - P43

뉴턴의 천재성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를 과학자의 모범이라고보기는 어렵다. 그런 점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미적분을 놓고독일의 수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폰 라이프니츠Gottfreid Wilhelmvon Leibnitz, 1646~1716와 벌인 다툼이었다. 뉴턴은 라이프니츠가 자신의 계산방법을 베꼈다고 비난했다. - P44

우리의 천재 뉴턴의 마음을 굳이 더이상 상하게 하지 않고 그저지금까지 살펴본 사건들만 보더라도 그의 성격 특성들이 그의 학문능력만큼 그렇게 바람직한 건 결코 아니었다라는 말은 얼마든지 할수 있을 것이다. - P45

타고난 음모꾼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


(전략). 인간의 심리와장애라는 새로운 분야에서 프로이트의 업적이 폭넓게 거론되고 있기 때문에 흔히 프로이트 혼자서 이 분야를 개척했다는 인상을 갖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인물들이 초기 정신분석 이론을 개발하는 데 가담했다. 오늘날 그들에 대해서 거의 거론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노련한 음모를 통해 막상막하의 라이벌을 모두 제거하는 프로이트의 천부적인 재능 때문이었다. - P298

그의 첫 희생자는 빌헬름 플리스Wilhelm Fließ라는 의사였다. 그는 이미 프로이트 이전에 성심리학을 연구했으며, 인간은 누구나 양성애적인 성향을 지닌다는 이론을 제기했다. 또한 성적으로 성숙하는 과정(사춘기)에서 한쪽의 성적 기질이 억제된다고 주장했다. - P299

플리스는 1905년 마침내 자신의 책을 출판했다. 그와 동시에 리하르트 페니히Richard Pfennig라는 사서는 플리스의 권유로 『빌헬름 플리스와 그의 표절자들: 바이닝거와 스보보다』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프로이트의 표절행위가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프로이트는 곧바로 자신과 친분이 있는 빈 출신의 기자 카를 크라우스Karl Kraus에게 연락을 취해 자신을 옹호해주는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 P300

몇 년 후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라는 사람이 프로이트의 눈에 들어왔다. 이 두 사람은 전에는 친분이 매우 두터웠으며, 공동연구를 추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들러는 점점 자신의 학설을 확고히 굳히면서 검증되지 않은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들러는 특히 아동기의 성적장애가 성인이 된 이후 정신질환의 근본적 원인을 제공한다는 이론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프로이트는 곧바로 아들러가 편집증에 시달린다는 소문을 퍼뜨리면서 그의 영향력을 박탈시켰다. - P301

프로이트는 아둘러를 상대로 투쟁을 벌이는 동안 취리히의 심리학자 융C. G. Jung과 집중적인 접촉을 시도했다. 프로이트는 명성이 높은 융을 설립 구상 중인 국제정신분석협회의 회장직으로 임명하여 그의 덕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융을 회장직에 임명하는과정에서 자신을 추종하던 지지자들의 강렬한 저항에 맞서야 했다.
프로이트는 배후에서 행동하면서 자신의 지지자 중 한 명인 산도르 페렌치Sandor Ferenczi를 내세워 그들의 저항을 막도록 했다. 프로이트와 읍과의 관계 역시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 P302

프로이트는 음모와 비방의 귀재였을 뿐만 아니라, 학술논문을저술할 때에도 사실에 전혀 입각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한 증거는 거의 모든 사례보고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눈에 띄는 한가지 예로 유명한 ‘쥐인간Rat Man‘ 에른스트 란처Ernst Lanzer를 들 수있다. - P302

그 외에도 프로이트는 자신의 저서 『꼬마 한스』의 주인공인 소년 한스를 실제로는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었다. 이 소년은 말 공포증에 시달렸는데, 마차사고를 직접 목격한 이후부터 말에 대한 공포증이 생겼다고 본인 스스로 매우 이성적으로 해명한 바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 소년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졌다는 결과에 도달했다. - P303

한편 프로이트는 자신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환자 다니엘 슈라이버 Daniel Schreiber에게 질식할 것 같은 느낌과 망상의 원인이 잠재적 동성애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또한 프로이트는 슈라이버가 자신의 분석을 통해 부분적으로 치유되었다고 주장했지만, 환자는 이 점에 대해 평생 동안 맹렬히 반박했다. - P303

프로이트가 몇 안 되는, 그것도 극히 일부분을 피상적으로 분석한 사례를 통해 다양한 이론을 구축한 사실은 매우 놀랄 만하다. 그가 1907년 자신의 모든 기록을 불태웠기 때문에 가설의 토대를 좀더 자세히 검토하기 위한 문서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그러나 프로이트가 일시적인 정신질환에 시달렸으며, 옛 친구들을 상대로 비방했던 편집증 증세로 자신 역시 고통받았다는 일부 증거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인간의 심리기제를 보다 잘 통찰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과 가설을 개발하는 데큰 공적을 세운 점은 무시하기 어렵다. - P304

참인가 거짓인가?
-아인슈타인의 ‘위조‘에 대한 비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더없이 뛰어난 천재였지만 그 못지않게 전통의 틀을 벗어난 학자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름을 둘러싸고 그렇게 많은 일화들이며 소문들과 혐의들이 많았던 것도 아마도 바로그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 P59

이처럼 부정적인 견해들이 있게 된 핵심 원인은 아인슈타인의특수상대성이론에 있는, 분명히 모순으로 보이는 역설의 결과를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시계의 역설‘이다. - P60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추론들을 생각하면 처음 특수상대성이론이 일반 사람들의 심각한 의심을 사고 더 나아가 능력이 만만치않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마저 허튼소리로 취급받았던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평가는 세월이 흐르면서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오늘날 이 이론은 사람의 머리로 생각한 것 가운데 가장 천재적인 이론으로 인정받고 있다. - P60

그보다 더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부인이었던 밀레바Mileva를 둘러싼 사건이었다. 밀레바는 1983년 『엠마Emma』라는 잡지에 실린 특별 기사에서 ‘상대성이론의 어머니‘로소개되었다. 이 이상한 이야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출처를 확인한결과, 데상카 트르부호빅규리치Desanka Trbuhovic-Gjuric란 세르비아여자에게 나온 이야기란 사실이 밝혀졌다. - P62

그 책에는 조페란 물리학자가 아인슈타인의 논문들 가운데 아주 중요한 세 편의 논문 서명이 ‘아인슈타인 마리치‘로 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인용 자료로 제시된 조페의 책 『아인슈타인에 대한 기억들』에는 아인슈타인의 부인이 공동저자였다는 말은 커녕 그 비슷한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 P62

지금까지 살펴본 앞뒤 맞지 않는 이야기들이며 잘못된 이야기들에서 아인슈타인의 책임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유명한 과학자도 학문 연구의 규칙을 엄격히 지키지 않았던 일이 하나 있었다. - P63

 먼저 자신들만의 이론을 정립한 두 사람은 실험을 통해 구해질 수 있는 값이 1‘일 수밖에 없다고 단정하고 실험 단계로 넘어갔다. 하지만 직접 실험을 한다는 게 비용도 비용이지만 아주 까다로웠기 때문에, 두 사람은 두 차례만의 측정으로 실험을 끝냈다. 나중에 드하스는 그 실험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 P63

그러나 나중에 다른 물리학자들의 실험을 통해 1.45란 값이 실제의 값에 더 가까운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측정값이 2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나중에 드하스는 측정값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아인슈타인은 그 조작 사실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자기학 관련 연구를 다시 하지 않았다. - P64

 아인슈타인이 이 사건에 대해 그토록 끈질기게 입을 다물었다는 사실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경우들에는 늘 자기 잘못을 순순히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911년 『물리학 연보』에는 이미 6년이나 지난 자신의 박사논문에서 잘못된 점을 고쳐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 1916년 일반상대성이론을 설명하면서 잘못된 계산도 마찬가지로 그 스스로 밝히고 고쳤던 것이다. - P64

마약과도 같은 위험한 게임
허술한 신약 테스트


특정 질병 치료를 위한 신약은 허가를 받기 전에 여러 단계에 걸친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실험실 분석과 동물 임상실험을 거친 신약은 인간에게 어떤 육체적·정신적 효능을 발휘하는지를 규명하기위해 우선 건강한 지원자를 대상으로 테스트 과정을 거친다. - P260

신약 테스트를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많은 환자들이 필요하기때문에, 제약회사는 대규모의 제반 비용이 드는 이러한 실험을 가능한 신속히 마치기 위해 여러 병원과 손을 잡고 일한다. - P260

신약 테스트는 주로 지속적으로 비어 있는 의료보험조합에 자금을 가져다주고 직원을 추가로 고용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제약회사와 병원의 관계가 매우 유착되어 있는 미국에서는 수많은 의사들이 이러한 신약 테스트 분야를전공한다. - P261

오거스타Augusta의 조지아 의과대학의 리처드 보리슨은 이 분야에서 다년간 활동했다. 그는 보스턴 출신으로, 의대 졸업 후 정신과전문의 연수교육을 받았고, 독일의 ‘사사Privatdozent‘에 해당되는
‘박사학위Ph. D. (Doctor of Philosophy)‘를 취득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자격을 갖추었다. 1981년 그는 조지아 의과대학의 정신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 P261

 보리슨이 정신과 의사였기 때문에 특히정신분열증과 우울증, 알츠하이머 질환을 가진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향정신성 약품 테스트가 주로 위탁되었다.
몇 년 후 보리슨 · 다이아몬드 커플은 제약회사 사이에서 테스트를 신속하게 수행하고 정확하게 보고하는 것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 결과 제약회사의 테스트 위탁이 점점 쇄도했으며, 곧 미국의 권위 있는 대다수 제약회사들도 조지아 의과대학에 신약 테스트를 위탁했다. - P262

연구가 순조롭게 진행되던 어느 날 신약 테스트에 참여 중인우울증 환자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보리슨과 다이아몬드는 환자의 자살 사실을 은폐하려고 했다. 그들은 담당 여성 연구원을해고하고, 그녀에게 돈을 주고 대학 측에 이 사실을 알리지 못하도록 입막음했다. 그러나 뒤이어 두 번째 환자가 자살하자 한 여성 연구원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대학 측에 사건 전모를 알렸다. 곧 내부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가 시작되자마자 대부분의 연구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 P262

브루스 다이아몬드는 바이오테크에 자주 나왔지만 약물학자였기 때문에 의사업무를 수행할 자격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는 보리슨의 이름으로 서명한 다음 부분적으로 처방전과 증명서를 발급해주었다. 그에게 환자들의 건강은 안중에도 없었다. - P263

불미스러운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검찰이 개입되었다. 오랜수사 끝에 리처드 보리슨은 기소를 당했고,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그 중에는 절도 및 사기, 문서조작과 뇌물제공 등 다양한 혐의가 존재했다. 그는 1998년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 외에도 그는 400만 달러의 손해배상액을 지불해야 했으며, 의사면허를 영구히 박탈당했다. - P263

보리슨 역시 돈과 사치를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선고가 내려진 이후 오거스타에서는 그가 소유했던 수많은 골동품과 그림을 대상으로 거대한 경매가 벌어졌다. 경매에 부쳐진물품 중에는 그가 이미 수중에 확보한 돈과 향후 몇 년간 벌어들일 돈으로 오거스타 근방에 지으려고 했던 화려한 성의 설계도도 있었다. 결국 그는 오랜 기간 동안 화려한 성 대신 비좁은 감옥방에서 살아야 했다. - P264

 조지아 의과대학은 신약 테스트와 관련된 그러한 부정행위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엄격한 규율을 새로 제정했다. - P264

약품개발 분야에서 생겨난 막심한 손해는 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약품 임상실험과 관련하여 보리슨과 다이아몬드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상실된 의약품 업계 전체의 신뢰를 만회하려면 앞으로 수년이 더 지나야 할 것이다. - P265

짜맞춘 계산: 뉴턴의 ‘조작인수‘
Di Trocchio, F., "Newton und der Fälschungsfaktor", Der große Schwindel,
(Rowohlt Taschenbuch, 1999).
Westfall, R.S., "Newton and the Fudge Factor", Science 179, (1973).
Zankl, H., "Ein Apfel fällt", Die Launen des Zufalls, (Primus Darmstadt, 2002). - P435

참인가, 거짓인가?: 아인슈타인의 ‘위조‘에 대한 비난

Di Trocchio, F., "Die Relativität: Scherz oder Betrug?", Der große Schwindel,
(Rowohlt Taschenbuch, 1999).
Fölsing, A., "Die Illusion der ‘harten Tatsachen", Der Mogelfaktor, (Hamburg:Rasch und Röhring, 1984). - P436

마약과도 같은 위험한 게임: 허술한 신약 테스트
Corwin, T., "Insurance, claim, trial linked", Augusta Chronicle, (5. 9. 1998).
(http://www.augustachronicle.com).
Garber, P. & Partridge, W., "Investigators asking if medical researchesdiverted funds", The Augusta Chronicle (17. 8. 1996).
Grinfield, M.J., "Ex Profs charged in Psych Department Research Scan",
Psychiatric Times 14,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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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그들은 왜
멀어졌을까


세상에서 가장 짧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 이야기는 단 두 문장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 헤어져!"
"저 남자/여자가 누구더라?"

우리는 인간 심리의 본성에 워낙 익숙해져 있으므로 위의 문장만 가지고도 어려움 없이 나머지 이야기를 엮어낼 수 있다. 우리는 곧바로 이야기의 배경을 파악하며 두 주인공의 생각과 기분을 짐작한다. - P453

관계가 깨지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서서히 멀어지거나, 산사태처럼 와르르 무너지거나. 우리는 후자는 연애 관계에서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연애는 대부분 대놓고 악감정을 드러내며 끝나기 때문이다. 반면 우정은 일반적으로 친밀감이 연애보다 약하기 때문에 실패하더라도 타격이 작다. 그래서 우정은 조용히 식는경우가 많다. - P454

친구 관계와 혈연관계가 다르다는 점은 대학으로 떠난 청소년들에 관한 우리의 연구에서도 명백하게 밝혀졌다. 고등학교 시절의 옛우정은 금방 희미해졌다. 대학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 결과 옛 우정은 새로운 우정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는데 친밀감을 유지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 사람을 자주만나지 않는다면 우정은 시들해진다. 특히 둘 중 누구도 그런 상태를 타파하려는 의욕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정은 깨진다. - P454

친척들은 친구들보다 너그럽다. 오랫동안 연락을 못 해도 용서해주고, 불가피하게 신뢰를 깨는 사건이 생겨도 용서해준다. 우리는 친척들이 못마땅할 때도 있지만,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거의 항상 그들을 도와주려고 한다. 하지만 이처럼 가족과 친척에게 더 많이 참아줄때의 단점은, 우리가 선을 넘는 행동을 지나치게 자주 하면 관계에급격한 균열이 생겨서 회복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 P455

엔드게임

그렇다면 누가 누구와 사이가 나빠질까? 우리가 이 문제를 들여다봤더니 놀랍게도 관계의 단절에 관한 연구는 너무나 적었다. 관계가 깨지는 이유에 관한 연구들은 있었지만 그 연구들은 애인이나 절친한친구 같은 친밀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 P455

관계가 깨지는 사태의 절반은 관계를 맺은 지 3년 이내에 발생하며, 나머지 절반의 대부분은 당신이 거의 평생 알고 지냈던 사람들,
주로 가까운 가족과의 결별이다. 다시 말하면 결별은 관계의 아주 초창기에 발생하거나 관계를 맺은 지 한참 지나서 발생하며 그사이에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데이터에 따르면 친척이 아닌 사람과의결별이 친척과의 결별보다 먼저일 가능성이 높다. - P457

결별 중에 놀랄 만큼 비중이 컸던(4분의 1 정도) 것은 가까운 가족구성원과의 결별이었다. 하지만 가족은 150명 친구 중 거의 절반을차지하기 때문에, 가족과의 결별이 전체의 4분의 1이라는 것은 가족과 결별할 가능성이 친구들과 결별할 가능성의 절반밖에 안 된다는뜻이다. - P457

 애인과의 관계가 깨지는 것은 이해할수 있는 일이지만, 가까운 가족과의 관계가 자주 깨진다는 점은 약간거슬린다. 이러한 결과가 거슬리는 이유는 우리가 처참하게 실패했을 때 우리를 돕기 위해 백방으로 애쓸 사람들은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이다. - P458

우리의 조사에서는 사이가 나빠지는 대상도 성별에 따라 확연히갈렸다. 우리는 부모, 애인, 지인 등 응답자들이 각각 특정할 수 있는24가지 관계 유형을 제시했다. 그러자 여성은 24가지 관계가 모두깨진 적이 있다고 답했지만 남성은 24가지 중 14가지 관계만 깨진적이 있다고 답했다. 남성은 자녀, 의붓형제, 이모/삼촌, 사촌, 양부모, 먼 친척들과 사이가 나빠진 경험이 없었다. (중략).
남성들은 남성과 사이가 나빠질 확률과 여성과 사이가 나빠질 확률이 동일했지만 여성들은 남성보다 다른 여성과 사이가 나빠질 확률이 2배 가까이 높았다. 즉 여성과 여성의 관계는 특별히 취약하다. - P459

왜 우정에 금이 갈까

관계와 관계의 파괴에 관한 유명한 연구로는 영국의 전설적인 사회심리학자 마이클 아가일 Michael Argyle (나는 학생이던 1960년대에 그와함께 수업을 들었다)의 연구가 있다. 1980년대에 그는 동료인 모니카헨더슨Monika Henderson과 함께 우정의 토대가 되는 법칙들을 알아보기위해 여러 편의 광범위한 실험 연구를 했다. 그들은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6가지 핵심 법칙을 찾아냈다.

1)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도 그의 편을 들어준다
2) 그 사람과 중요한 소식을 공유한다
3) 감정적 지원이 필요할 때 지원을 해준다
4) 서로를 신뢰하고 비밀을 털어놓는다
5) 도움이 필요할 때 자발적으로 도와준다
6)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한다

마이클과 모니카는 이 6가지 규칙 중 하나라도 위반하면 관계는 약해지고, 여러 개의 규칙을 깨뜨리면 관계는 망가져버린다고 주장했다. - P460

우리는 관계 파괴 연구에서 대상자들에게 관계가 깨지는 11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선택하도록 했다. 대상자들이 가장 자주 생기는 일부터 가장 드문 일까지 순서대로 나열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관심부족, 소통 실패, 서서히 멀어짐, 질투, 알코올 또는 약물 문제, 관계에 대한 집착, 제삼자와의 경쟁, 다른 사람들의 ‘방해‘, 피로, 오해, 문화적 차이. 관계를 깨뜨리는 주요 원인 3가지 (그냥 멀어지는 것은 제외)는 관심 부족, 소통 실패, 질투였다. - P461

(전략). 이 점에 대한 훌륭한 설명은 뜻밖에도 네덜란드에 위치한 막스 플랑크 심리언어학 연구소의 언어학자 시메온 플로이드 Simcon Floyd와 닉 엔필드 NickEnfield 그리고 2명의 동료들이 제시했다. - P462

평균적으로 부탁을 했던 사람이 ‘감사합니다‘라고 답했거나 ‘감사합니다‘와 비슷한 의미의 말로 답한 경우는 약 5.5퍼센트에불과했다. 영국인이 가장 정중했고(부탁 건수의 14.5퍼센트), 에콰도르의 차팔라 인디언이 감사 인사를 가장 적게 했다(0퍼센트), 현대사회의 통념과 달리 사람들은 일상적인 호의에 대해서는 감사의 표현을 자주 하지 않았다. - P462

관계가 깨진 원인에 관한 응답에서는 남녀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남성들은 서서히 멀어짐, 알코올 또는 약물 문제, 제삼자와의경쟁, 다른 사람의 개입이라는 응답이 많았다. 여성들은 소통 실패,
질투, 피로감 때문에 상대를 덜 좋아하게 됐다는 응답이 많았다. 이런 결과를 보면 남성은 남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고 여성은 자신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같다. - P463

(전략). 제프리 홀은 그 항목을 ‘주체성 agency (신체 활동에 참여하고 지위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성향)‘이라고 명명했다. 특히 남성은 높은 지위를 가진 동성 친구들과의 우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두드러졌다. 연령과 혈통이라는 변수를 통제해도 이런 차이는 동일하게 나타났지만, 연령이 높을수록 차이가 커졌다. - P464

이혼 통계도 이런 결론을 뒷받침한다. 영국에서 2017년에 접수된 이혼 신청의 3분의 2가량은 여성이 접수한 것이었고, 동성 부부의 이혼 신청 중에서는 4분의 3이 여성 동성애자 부부(남성 동성애자 부부가 아니고)의 이혼신청이었다. 두 경우 모두 이혼 사유 중에 가장 많았던 것은 ‘비이성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여성이 비이성적인 행동을 이혼 사유로 꼽는 비율이 높았다(여성은 52퍼센트, 남성은 37퍼센트). 레즈비언 부부의 이혼 사유 중에도 비이성적인 행동이 가장 많았다(전체의 83퍼센트, 게이 동성애자 부부의 이혼 사유 중 비이성적인 행동은 73퍼센트였다). - P464

멕시코와 영국 학생들의 고독감에 관한 애나 히틀리의 연구는 왜이런 일이 벌어지는가에 관한 하나의 설명을 제시한다. 애나 히틀리는 여성이 남성보다 고독감을 많이 느낀다고 답변한 사실을 발견했다. 애착 안정성이 낮은 사람들, 평소에 자신이 감정적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여기고 자신의 인간관계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은 안정적 애착을 가진 사람보다 고독을 많이 느꼈다. - P465

부부간 결별에 관한 문헌에 등장하는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결별이나 이혼 후에 남성이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할 위험이 더 크다는것이다. 그것은 남성들의 우정이 더 가볍기 때문에 이혼과 같은 상황에서 남자들은 충분한 감정적 지원을 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 P466

거절당할 때의 고통

불행하게 끝난 관계는 큰 고통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고통스럽다.
우리 중 4분의 3 정도는 결별이든 죽음이든 간에 사랑하는 사람을잃은 것이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힘든 일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 P467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아마도 미국의 신경과학자인 나오미 아이젠버거일 것이다. 나오미는 사교적 거절을 당할 때 뇌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아보기 위해 인디애나주 퍼듀대학의 킵 윌리엄스Kip Williams가 개발한 ‘사이버볼cyberball‘이라는 단순한 스크린 게임을 활용했다. - P468

실험 결과 사이버볼 게임에서 사교적으로 배제된 사람의 뇌에서활동량이 증가한 영역들은 전측 대상회 피질ACC(뇌의 두 반구 사이의 틈 깊숙이 위치한다)과 전측섬상세포군AI(머리의 양쪽 측면의 피질 안쪽에 위치한다)이었다. 실험 대상자가 스스로 밝힌 불쾌함의 정도가 클수록 이 영역들이 활성화된 정도도 컸다. - P468

뇌에서 육체적 고통과 사교적 고통을 관장하는 영역이 같다는 증거는 다양한 문헌에서 발견된다. 한 연구는 사교적으로 따돌림을 당할 때와 육체적 통증이 수반되는 과제를 수행할 때의 뇌 활동을 조사했는데, ACC와 AI의 활동이 상당히 많이 겹쳤다. (중략).
OPRM1 유전자는 엔도르핀 수용체를 조절하는데, 실험 대상자 중1~2명은 이 유전자의 대립형질을 가지고 있어서 육체적 통증에 특별히 민감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사교적 거절에도 유난히민감했고, 사교적 배제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ACC와 AI의 활동량이다른 사람들보다 많았다. - P469

 제니퍼 스미스 Jennifer Smith (당시 우리의 학생이었다)가 사이버볼 게임을 이용해 설계한 실험에서는 대상자들이거절을 당한 후에 통증역치(엔도르핀 양을 판단하는 지표)가 증가했지만, 초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했다고(하지만 중학교 때는 당하지 않았다고) 답한 사람들의 경우 통증 역치가 훨씬 커졌다. 이런 결과로 보아사교 경험은 아주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며 어른이 되고 나서도 사교적 상황에 더 민감해지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 P470

울음과 우정의 연관성

우리가 슬플 때나 괴로울 때 하는 정말로 이상한 행동이 하나 있다. 내가 이상하다고 한 것은 다른 어떤 종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서 생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 P472

. 울음에 관해 생각할 때 더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인기를끌었던 영화의 다수는 우리를 웃게 만드는 영화가 아니라 울게 만든영화였다는 것이다. 코미디 영화는 보통 시시한 작품으로 간주되고비극은 진지한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이 이상한 행동에 대해 과학은 아직 만족스러운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하나의 가설은 울음이 다른 사람의 동정을 유발해서 그 사람이우리에게 뭔가를 해주거나 우리를 울게 만든 어떤 행동을 멈추도록 한다는 것이다. - P472

화해가 어려운 이유

가까운 가족 관계는 연애 관계와 마찬가지로 재앙으로 끝날 위험이 높은 것 같다. 가까운 가족과는 화해하기도 가장 어렵다. 왜냐하면 그 결별은 험악하게 끝나기 대문이다. 우리가 온라인으로 수집한 900회 정도의 결별 표본 중에서 45퍼센트 가까이는 조사가 실시된 시점에 화해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 P474

관계 단절에 관한 우리의 연구에서는 대상자들에게 화해가 이뤄진 과정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가장 보편적인 행동은 단순한 사과였다(성공한 화해의 절반 정도). 두 번째로 많았던 응답에는 사과도 화해를 위한 노력도 포함되지 않았다. - P474

일반적으로 사교적 유대를 강화하는 어떤 신체 활동 내지 사교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화해했다는 응답은 15퍼센트 미만이었다. - P475

대체로 여성들은 과계가 깨질 경우 화해하지 못하는 기간이 남성들보다 길었다. 여성이 다른 여성과 결별한 사례의 47퍼센트가 화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 P475

여성은 남성에 비해 용서를 쉽게 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시인들과 극작가들이 항상 다루는 주제기도 하다. - P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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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른 문명권과 차이를 보이는 아메리카의 경우를 논외로 했으므로 그 나머지에 대해서 본다면, 1500년에 문명이 발달한 곳은 1400년에도 이미 문명이 발달해 있었고, 1800년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역시 문명이발달해 있는 곳이다. 그러한 곳이 어디인지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 P74

이런 곳을 총괄해서 보면, 약 1,000만 제곱킬로미터로서 오늘날 프랑스영토의 약 20배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공간에 불과하지만 대신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다. 이 지역은 뚜렷이 분간되는 띠 모양을 이루는데, 이것은 약간의 차이점만 빼면 오늘날의 세계지도에서도 그대로 찾을 수 있다(다시 반복하지만 1,100만 제곱킬로미터의 넓이를 가진 이곳에 인류의 70퍼센트가 살고있다). - P74

이런 수준은 우리에게는 매우 낮아 보일지 몰라도, 당시로서는 이미 확실한 인구과잉이었다. 1제곱킬로미터당 44명으로서 독일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뷔르템베르크는 16세기 초에 특히 랑스크네병을 모집하는 징병지역이었다.⁸⁵ 스페인의 인구밀도가 17명이었던 데 비해 프랑스의 인구밀도가 34명이었으므로 이곳은 이민을 떠나보내는 원천지역이었다. - P75

85. H. Bechtel, o, pp. 25-26. - P762

 앙시앵 레짐 시기의 프랑스에 대한 장 푸라스티에의 계산에 따르면, 윤작까지 고려하여 한 사람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1.5헥타르의 경작지가 필요하다.⁸⁶ 이것은 1709년 대니얼 디포가 단언한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디포의 계산에 의하면 한 사람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땅 3에이커나 중간 정도의 땅 4에이커(즉 1.2-1.6헥타르)가 필요하다는것이다.⁸⁷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이 인구 압력이 있을 때에는 음식생활을바꾸거나(특히 육류와 빵 사이의 변화를 초래한다), 농업의 변화를 가져오거나, 아니면 이민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 - P76

86. Jean Fourastié, Machinisme et bien-être, 1962, pp. 40-41.

87. Daniel Defoe, A Review of the State of the British Nation, 1709, p. 142, 다음에서 인용.
Sydney Pollard et David W. Crossley, The Wealth of Britain 1085-1966, 1968, p. 160. - P762

이상에서 고찰한 것은 인구역사의 핵심적인 문제들의 시작점에 불과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도시 인구와 시골 인구 사이의 비율이 비율은 이전에 유행했던 경제성장의 역사에 핵심적인 지표였다—이며 또 인문지리학의 규준에 따른 시골 인구집단의 형태이다. - P76

고든 휴즈의 지도가 보여주는 다른 사실들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들 수 있다.
첫째, "문화"(인류의 첫 번째 성공)와 "문명"(인류의 두 번째 성공)이 자리 잡은 위치가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략).
둘째, 이 지도를 보면 유럽인이 승리를 거두기 벌써 수 세기 혹은 수천 년전부터 전 세계가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77

마지막으로 셋째, 인구가 조밀한 이 좁은 지역들이 늘 동질적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탄탄하게 자리 잡은 지역들(서유럽, 일본, 한국, 중국 등)이 있는가 하면, 말레이 제도나 인도네시아 등 거주지역이 몇몇 곳에 분산된 지역도있다. 인도는 복잡하게 섞인 여러 문명들이 지역 전체를 완전히 장악한 것이 아니다. - P80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무리 거대한 대양이라고 하더라도 일찍부터인간의 모험이 펼쳐지지 않아서 그 비밀이 드러나지 않은 바다는 없었고(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인은 인도양의 몬순을 알고 있었다), 접근하고 통과하는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산맥이 없었으며, 인간이 이리저리 뚫고 들어가보지않은 숲이나 인간이 통과해보지 못한 사막이 없었다. 이 세계가 "거주 가능하고 항해 가능한"⁹⁰ 공간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500년 이전,
아니 1400년이나 심지어 1300년 이전에도 아무리 작은 조각의 공간이라고해도 주인과 용익권자가 없는 곳이 없었다. - P77

90. Denis Diderot, Supplémentau voyage de Bougainville, 1958, p. 322. - P762

정글북 : 인간과 야생동물

오직 문명권만을 보고자 하는 욕구가 늘 크기 마련이며, 사실 문명권이 핵심적인 것도 분명하다. 게다가 이 문명들은 그들의 오랜 모습, 도구, 의복,
주택, 관습, 심지어 전통적인 노래 등을 되찾기 위해서 모든 재능을 다 사용했다. 그리하여 그 결과물들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각각의 문명에는 또한 나름의 색깔이 있다. 여기에는 독창적인 요소들이 많다. - P80

야만인들의 모습을 가장 많이 보여주는 곳은 말레이 제도, 중국의 고산지대, 홋카이도 북부, 타이완, 또는 두드러지게 대조적인 면모를 가진 인도의 심장부 등 아시아 지방일 것이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유럽에는 숲속의 빈 공간의 마른 땅에서 벼를 재배하기 위해서 고지의 숲을불태우는 ("숲을 먹어치우는") 화전민 같은 정주 상태의 "야만인이 없다.⁹⁴ 유럽은 아주 일찍 산지 사람들을 순화시키고 길들였으며, 그들을 파리아(paria: 천민계급)로 취급하지 않았다. 반대로 아시아에서는 이와 같은 일종의 "합작" 관계가 없었다. - P81

94. Georges Condominas, Nous avons mangé la forêt de la Pierre-Génie Goo......, 1957. - P762

그러나 이상에서 말한 야만족은 사실 이들을 업신여기는 문명권에 포로처럼 갇혀 있는 상태였다. 진짜 야만족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들은 사람들이 조밀하게 모여 사는 지역의 경계 밖에서, 가혹한 환경이기는 하지만 완전한자유를 누리고 살았다. 프리드리히 라첼은 이들을 란트뵐커(Randvölker), 즉
"주변 종족"이라고 불렀으며, 독일의 지리학자와 역사학자들은 게시히틀로스(geschichtlos), 즉 역사를 가지지 않은 종족이라고 불렀다(그러나 과연 역사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일까?). - P82

땅의 지력이 낮고 이용가치가 없어 보여서 사람이 희귀해지면, 야생 짐승들이 증가한다. 인간으로부터 멀어지면 곧 짐승들과 만나게 된다. 여행기들을 보라. 땅 위의 모든 짐승들이 당신을 향해서 온다. 17세기의 한 여행자의말에 의하면, 아시아의 호랑이들은 마을과 도시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갠지스 강 삼각주에서 낚시를 하다가 배에서 잠이 든 낚시꾼에게 헤엄쳐 다가와서 공격한다. - P82

오늘날에도 동아시아에서는 가공할 만한 식인 호랑이를 피하기 위해서 산간마을 주변을 개간해버린다.⁹⁸ - P83

늑대는 우랄 산맥에서부터 지브롤터 해협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체를 무대로 삼아왔고 곰은 이곳의 산악지대에 살고 있었다. 도처에 늑대가 있었고늘 늑대를 조심해야 했기 때문에 늑대 사냥은 시골이든 도시이든 그 지역이얼마나 건강한지에 대한, 그리고 그해가 얼마나 살기 좋은 해인지에 대한 지표가 될 정도였다. 잠시라도 주의를 늦추거나, 경제가 후퇴하거나 또는 겨울 사정이 나빠지면 늑대 수가 증가했다. - P84

당연히 빈 터가 클수록 동물이 번성했다. 만주지역에서 중국 황제의 웅장한 행차(10만 필의 말이 동원되었다)를 수행했던 페르비스트 신부*는 피로가 누적되어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환상적인 사냥에 동행했다. 이때 하루 만에 잡은 포획물이 1,000마리의 사슴과 60마리의 호랑이였다.¹¹⁷ 1639년 당시 아직 사람이 살지 않던 모리셔스 섬에는 멧비둘기와 토끼가 어찌나 많았는지, 그리고 어찌나 겁이 없었는지 사람들이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¹¹⁸


* Ferdinand Verbiest(1623-1688) : 네덜란드의 예수회 선교사, 천문학자. 중국 청나라 왕조에서관직을 역임했으며 중국 이름은 남회인(南仁)이다. 그는 천문학 지식을 이용해서 흠천감(天 - P85

117. H. Josson et L. Willaert, Correspondance de Ferdinand Verbiest, de la Compagnie deJésus (1623-1688), 1938, pp. 390-391.
118, J. A. Mandelslo, 앞의 책, II, p. 523. - P763

사실 18세기 이전에는 어느 곳이나 「정글북」의 세계였다. 그곳에서 길을잃기 전에 이 책을 덮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세계를 얼마나 미약하게 장악하고 있었는지를 증언한다. - P89

18세기에 마무리된 생물학적 앙시앵 레짐

중국에서든 유럽에서든 18세기에 생물학적 앙시앵 레짐이 무너졌다. 생물학적 앙시앵 레짐은 이때까지의 규준이었던 속박, 장애물, 구조, 비율, 수치의관계 등의 총체를 가리킨다. - P89

균형

출생과 사망, 두 움직임 사이의 균형 잡기라는 게임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대개 앙시앵 레짐하에서는 모든 것이 균형 상태에 이르렀다. 출생률과 사망률의 두 계수는 약 40퍼밀로서 서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출생이 가져온 것을 죽음이 가져갔다. 오늘날 렌 지역의 교외에 속하는 라샤펠 푸주레라는작은 코뮌의 교구 기록¹²⁷을 보면 1609년에 50건의 세례식이 있었다. 인구1,000명당 40명 정도가 출생한다고 가정하면 세례식의 수에 25를 곱한 것이 인구가 되므로 이 마을의 인구는 약 1,250명 정도로 추산된다 - P90

127. P. Goubert, 출판하지 않는 저작, École des Hautes Études, 제6부. - P763

유럽 인구가 정체 또는 감소 상태에 있던 시절인 1648년 직후, 독일을 방문한 한 이탈리아인이 "무기를 지닐 정도의 나이인 사람은 거의 없는 반면 아이들이비정상적으로 많다"고 말했다.¹³²
만일 균형 상태에 빨리 도달하지 못하면 당국이 개입한다. 대단히 폐쇄적이었던 베네치아에서도 가공할 만한 흑사병이 지나간 직후인 1348년 10월30일 자의 관대한 칙령을 통해서 앞으로 1년 이내에 가족과 재산을 가지고이곳에 정착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완전한(de intus et de extra)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 P92

132. G. Franz, 앞의 책, pp. 52-53. - P763

기근

수 세기 내내 기근이 끈질기게 반복되어서 그 자체가 인간의 생물학적 체제에 편입되었고 일상생활의 구조가 되었다. 그나마 우월한 위치에 있던 유럽에서도 곡가 상승과 곡물 부족은 계속 일어났고 심지어 친숙했다. 일부 부유한 사람들이 지나치게 잘 먹는다고 해도 그것이 일반 법칙을 바꾸지는 않는다. 사실 어떻게 상황이 다르게 진행되겠는가? - P93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살펴본 결과는 극도로 심각하다. 다른 곳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던 프랑스라고 해도 전국의 일반적인 기근이 10세기에 10회, 11세기에 26회, 12세기에 2회, 14세기에 4회, 15세기에 7회, 16세기에 13회, 17세기에 11회, 18세기에 16회가 있었다.¹³⁵ 18세기에 작성된 이 계산은 물론 매우 조심스럽게, 많은 유보조건하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수백 건에이르렀을 지방적인 기근은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낙관적으로 보일위험이 있다. - P94

135. Moheau, Recherches et considérations sur la population de la France, 1778, p. 264. - P763

유럽의 어느 국가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도시와 인근 지역들에 기근이 악착같이 따라다녔다. 18세기와 19세기에 약간 나아졌다고는 해도 재난이 그치지 않았다. 1730년 슐레지엔, 1771-1772년 작센과 남부 독일에 곡물 부족 사태가 벌어졌고,¹³⁸ 1816-1817년 바이에른에서 시작된 기근은 이 지역의 경계를 넘어 널리 확산했다. - P94

138, Fritz Blaich, "Die Wirtschaftspolitische Tätigkeit der Kornmission zur Bekämpfung derHungersnot in Böhmen und Mähren (1771-1772)", in: Vierteljahrschrift für Sozial- undWirtschaftsgeschichte, 56, 3, 1969년 10월. pp. 299-331. - P763

그러나 한편 도시들만 이러한 운명의 타격에 노출되었다고 속단하지는말자. 도시는 탄원하는 데 익숙했다. 도시에는 창고와 저장 곡물과 "밀 보급창"과 외국에서의 구매 등 여러 수단이 있었는데, 이것은 조금씩 여러 방면에서 준비하는 개미 같은 정책이었다. 역설적으로 보이는 것은 흔히 도시보다도 주변 농촌지역이 더 큰 고통을 겪었다는 점이다. 상인, 도시, 영주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농민은 거의 비축물이 없었다. - P95

부르주아들의 잔혹함은 16세기 말, 그리고 17세기에 더욱 심해졌다. 이들이 가진 문제의식은 빈민들이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뿐이다. 파리에서는 병자와 불구자는 언제나 그렇듯이 병원*으로 보냈고 성한 사람은 두 사람씩 사슬에 묶어 하수도를 청소하게 하는 등 힘들고 한없이 지루한 일을 시켰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치세 말기에 빈민법(Poor Laws)이 나왔는데, 사실 이 법은 차라리 빈민을 억압하는 법(lawsagainst the poor)이었다.

* höpital, hospital: 이 단어는 오늘날과 같이 ‘병원‘의 뜻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이 시대에는 그의미보다는 빈민, 광인, 불구자, 병자 등을 수용하여 격리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더욱 강했다. - P96

1630-1631년에 거의 인도 전체를 짓누른 가공할 만한 식량 부족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한 네덜란드 상인이 끔찍한 기록을 남겼다.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나 농촌을 떠나 의지할 곳 없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닌다. 그들의 상태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눈이 푹 꺼지고, 입술은 창백하고 거품으로 덮여 있으며, 마른 피부에 뼈들이 불거져나와 있다. 배는 빈 자루처럼 매달려 있다. 몇몇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울고 소리지른다. 다른 사람들은 땅 위에 누워 죽어간다." - P97

우월한 위치에 있는 유럽으로 되돌아오면 사람들은 마치 밤새 여행을 한끝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굳어져 있거나 아니면 안심이 되어, 또는 체념하는 마음이 되어 도착하게 될 것이다. 서유럽에서 이와 비슷한 공포스러운 사태는 중세 초기에나 있었으며, 아니면 아주 큰 시차로 뒤쳐져 있던 동쪽의변경지역에서나 남아 있었다. 한 역사가에 따르면, 만일 "역사상의 재앙을그에 따른 희생자의 비율에 따라 평가한다면 핀란드에서 1696년에서 1697년까지 일어난 기근이 유럽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재앙으로 꼽힐 것이다."
이때 전 인구의 4분의 1에서 3분의 1이 사라져갔다.¹⁴⁷ - P98

147. Eino Jutikkala, 앞의 논문, p. 48. - P764

 1662년 블레주아에서는 한 증인에 의하면 "500년 이래 이러한 곤궁은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양배추의 심과 밀기울을 대구 씻은 물에 담가 먹었다."¹⁴⁸ 같은 해에 부르고뉴의 징세담당관들은 국왕에게 올린 상소에서 "올해의 기근은 전하의 국토에서 1만가구 이상을 죽어가게 했으며, 심지어 훌륭한 도시 주민의 3분의 1이 풀을먹고 살도록 만들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¹⁴⁹ 한 연대기는 "일부 사람들이 인육을 먹었다"고 덧붙인다.¹⁵⁰ - P98

148, Pierre Clément, Histoire de la vie et de l‘administration de Colbert, 1846, p. 118.
149. G. Roupnel, 앞의 책, p. 35, 주 104.
150. Journal de Gaudelet, Ms, 748, Bibl. Dijon, p. 94, 다음에서 인용, G. Roupnel, 앞의 책 p.35. 주 105. - P764

질병

한 번의 흉작은 그런 대로 넘어간다. 두 번 계속되면 가격이 미친 듯이 오르고 굶주림이 시작되는데, 그것은 결코 그 자체만으로 끝나는 재난이 아니다. 그것보다 약간 이르게, 어쩌면 약간 늦게, 기근이 질병에게 문을 열어준다.¹⁵⁴ - P99

154. 이것은 흔해빠진 언급이지만 다음에서 증명되었다. Enrique Florescano, Precios delmaizy crisis agricolas en Mexico, 1708-1810, 1969. 이 책에서 그는 18세기 멕시코에서기근이 발생한 날짜와 여러 질병이 일어난 날짜를 비교했다(같은 책, 161쪽의 표 참고). - P764

그러나 현대의 의사들은 얼핏 보아서는 이 질병들이 어떠한 것인지 거의모른다. 이것들은 옛날의 병명 뒤에 숨어 있고, 증상의 묘사가 때로 이상하기 때문이다. 우선 그 병들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병과 같은 것인지를보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질병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세균과 바이러스도 진화하고 그것들이 살아가는 터전인 인간 역시 진화함에 따라 질병은 각각 독자적인 역사를 가진다.¹⁵⁶ - P100

156, Mirko D. Grmek, "Préliminaires d‘une étude historique des maladies", in: Annales,
E.S.C., 1969, n° 6, pp. 1473-1483. - P764

이런 대규모 공격 앞에서 잘 먹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저항도 못했다. 내가 자주 인용하는, "말라리아에 대한 최선의 치료는가득 찬 솥이다"라는 토스카나의 속담은 아주 잘 맞는 이야기이다. 1921-1923년 러시아에 기근이 심했을 때,¹⁶⁵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증거에 의하면 러시아 전역에 말라리아가 퍼졌는데, 북극권 가까운 곳에서조차 마치 열대지방에서와 거의 같은 증상을 띠고 나타났다. 영양 부족은 확실히 질병의 "확산요소"였다. - P102

165. Société des Nations, Rapport épidémiologique de la section d‘hygiène, n° 48, Genève,
1923년 4월 24일, p. 3. - P764

 현대 의학자들이 이것에 대해서 개진한 4-5가지의 가설 중 가장 가능성이 커 보이는 것은 매독이 두 종족 간의성관계에 의해서 창조되거나 재창조된 질병이라는 주장이다(트레포네마 팔리듬 균[treponema pallidum]에 대해서 트레포네마 페르테누에 균 [treponemapertenue]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¹⁶⁷ 이 병은 바르셀로나에서 콜럼버스의 귀환을 축하하는 축제가 열린 때(1493)부터 끔찍한 증상을 드러냈으며,
그후 급속히 퍼져갔다. 이 병은 전염성이 강하고 치명적이었다. - P103

167. A. G. Price, 앞의 책, p. 162. - P764

페스트

페스트에 대해서는 엄청난 양의 문서들이 꾸준히 늘어가고 있으며 많은 설명이 제시되고 있다. 우선 이 병은 적어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폐(肺)페스트는 1348년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면서 역사에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질병이며, 이에 비해 선(線)페스트는 더 오래된 것으로서 종기가 가랑이에 생기고 또 썩어들어가는 질병이다. - P105

지금까지 말한 것이 쥐나 벼룩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며, 오히려 니더작센의 윌첸에 페스트가 퍼져가는(1560-1610) 데 대한 치밀한 연구를 볼 때 (이것에 대해서 3만여 건에 달하는 문서가 있다) 그 반대임을 확인하게 된다.¹⁷³ - P105

173. Erich Woehlkens, Pest und Ruhr im 16. und 17. Jahr., 1954. - P764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서유럽에서 이 질병의 강도는 18세기부터 약화되었다. 이 병이 엄청난 규모로 퍼진 마지막 사례는 유명한 1720년 마르세유의 페스트이다. 그렇지만 이 병은 동유럽에서는 여전히 두려운 질병으로남아 있었다. 1770년 모스크바에 살인적인 페스트가 창궐한 것이 그 예이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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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우리 뇌 사용설명서



10

트라우마가 생각에 저지르는 행각

나는 30대 중반에 이미 두 개국, 네 개 기관에서 5년간의 대학 과정을 마쳤고, 의학 대학원까지 졸업한 후 병원에서 정신과 신경과수련을 끝마쳤다. 이 모든 과정과 경험을 끝마친 후에야 나는 비로소 그동안 배운 교훈은 고작 중학교 때 다 배웠어야 할 내용임을 깨달았다. - P219

논리, 정서 그리고 기억

스스로를 대체로 논리적 동물이라 생각하고 싶겠지만, 사실 우리뇌는 논리와 정서를 각각 사용하는 것에 있어 복잡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 두 시스템에 입력된 정보는 우리가 결정을 내리도록 뇌에서 통합되어야 하는데, 만약 두 시스템이 같은 명령을 내린다면 결정하기가 상당히 쉽다. - P220

궁극적으로 정서는 논리보다 뇌의 더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정서적인 측면이 진화적 측면에서 더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중요한 문제에서 우리 뇌가 두 장의 표를 집계할 경우(한 표는 논리가 한 표는 감성이 행사), 우리 뇌는 기본적으로 정서에 투표하는 쪽으로 기운다는 뜻이다.
(중략).
물론 뇌는 단순히 모 아니면 도라는 의사 결정 방식보다 좀 더 미묘하고 복잡하게 움직인다. 가능하다면 논리와 정서를 모두 통합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한다. - P221

트라우마는 우리의 정서를 바꾸고, 바뀐 정서는 우리의 결정을 지배한다. - P222

 정서는 이런 식으로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데, 우리는 종종 정서가 하는 말이 얼마나 그럴싸한지, 또 그 힘을어떻게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행사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수치심과 트라우마의 다른 공범들도 바로 이런 식으로 우리가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목적을 달성하는데, 이들이 성공하는 이유는 우리의 정서와 의사 결정 과정에서의 정서적인 측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논리에 기반을 두고 결정을 내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트라우마에 물든 정서가 우리의결정을 통제한다. - P223

우리는 ‘사는 게 다 그래.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죽을 운명을 타고난 거야‘라는 몰인정한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 P225

인지 가림막: 트라우마가 세워놓은 거대한 벽

트라우마로 생기는 가장 끔찍한 여파 중 ‘가림막‘이라는 것이 있다. 이 가림막은 트라우마가 도둑질을 하려고 우리 뇌 속에 은밀히설치하는 것이다. - P226

트라우마를 끊임없이 겪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형태이든 인지 가림막이 자리하고 있다. - P227

세상을 항해할 때는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물론 주변 세상에 대한 명확하고 폭넓은 시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트라우마가 우리에게서 훔쳐 간 보물처럼 보이도록 감쪽같이 채색한 벽에서 빠져나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 보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트라우마가 스스로 세운 장벽 뒤에서 휘두르는 위협,
예컨대 너는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이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 너는 당해도 싸다. 그거 기를 쓰고 해도 안 된다, 라고 속삭이는 위협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 - P228

"누가 나를 선로 위에 눕혀놓았나요?"

하루는 누가 자기를 선로 위에 눕혀놓았는지 아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뭐라고 답할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긴급 상황이긴 했다.
무슨 영문인지 알아보려고 서둘러 몇 가지를 질문했다. 전화를건 사람은 내가 담당하는 환자였고, 기차선로 사이에 누워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중략).
"누가 나를 선로 위에 눕혀놓았나요?"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뭐라고 할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내가 그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녀 역시 답을 알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범인은 그녀 자신이었다. 바로 그녀 스스로 선로 위에 몸을 눕힌것이다. - P229

 ‘숨기‘는 태어난 후 쭉, 필수적인 대처 전략으로 할머니에게 각인되었다. 할머니는 스스로를 위해 평화로운 존재로 살아왔지만, 그 평화로운 삶은 공포와 도피 반응으로 인해, 때로는 아무런 경고 없이, 가끔은 대단히 위험하게 종지부를 찍었다. 기차선로 위에서 무의식 상태로 발견된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였다. - P230

할머니에게는 여러 명으로 보이는 자아가 있었고, 이 모두는 할머니 자아를 일부분씩 나누어 가졌다. 자아 중 하나는 심한 두려움에 떨며 옷장 속 침대 아래에 숨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집을 떠나지 않는다. 또 다른 자이는 집 안에 있는 모든 음식을 먹어치운다.
할머니는 이 두 자아에 대해서는 별다르게 걱정하지 않았지만, 다른 나머지 자아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같이 합칠 수 없었다. - P231

우리 모두에게는 다양한 측면이 있다. 이런 다양한 측면이 각기 다른 자아로 발현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종종 해결하기 어려운 상충되는 문제를 두고 대립을 벌일 때도 있다. 여러분의 다양한 측면은 무엇인가? 자기 자신속에서 만나는 성격이나 목소리 중 때때로 어떤 것들 때문에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기가 힘들어지는가? 트라우마는 자아의 여러 다양한 측면이 여러분에게 속삭이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 P233

12

트라우마가 가하는 신체적·정신적 파괴

우리 뇌는 몸이 없이는 작동하지 못하고, 우리 몸은 뇌가 없이는 움직이지 못한다. 이 둘 사이가 연결된다는 것은 목으로 서로가 붙어 있다는 것만은 아니다. - P263

그런데 우리 몸 안의 소통을 관장하는 규칙이 바뀌어 고통과고뇌의 신호가 전반적으로 노골적인 우선권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되면 고통과 고뇌 신호는 더 빨리 움직이고, 고속도로에서 다른 신호들을 제치고 앞서갈 수 있으며, 뇌나 몸속의)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좀 더 확실하게 자기들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도로망의 기본 규칙이 이런 식으로 바뀌면 우리 내부의 전체 환경도 바뀐다. - P264

현저성 Salience 은 신경생물학과 정신의학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이는 특정 생각, 감정 또는 인식이 다른 것보다 두드러지는 정도를나타낸다. - P264

트라우마는 통증을 키우고 통증은 고통을 늘린다

염증은 부상에서 회복하고 감염과 싸우려고 우리 몸에서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이지만 트라우마가 원인이 되어 일어나기도 한다. 트라우마를 어린 나이에 겪거나 그 정도가 심각할수록 염증의 영향은 더욱 강력해진다. 이런 염증이 발생하는 이유는 트라우마와 그 공범들이 스트레스를 촉발하고, 우리 몸은 스트레스를 염증을 일으키는 실마리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 P265

섬유근육통은 만성 통증, 피로, 기억력 상실을 동반하는 질환으로, 트라우마와 관련성이 입증된 사례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섬유근육통을 비롯한 많은 만성 통증 질환은 종종 트라우마 또는 뇌와 몸의 연결 관계를 그다지 고려하지 않은채 치료되고 있는 실정이다. - P266

염증은 수많은 기능 장애를 초래한다.

트라우마는 통증을 키우고, 통증은 고통을 늘리며, 고통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통증을 잠재우기 위한 방안을 필사적으로 찾게 된다. 사회적 측면에서 보면, 안타깝게도 이런 끔찍한 사이클이 마약의 유행으로 반복된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모르는 정신적 육체적 통증을 겪는데,
이는 외적인 통증 완화 수단이 유혹적이기도 하지만 그것에 저항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P266

√ 해법

긴장 줄이기


불안은 우리 뇌에 신호를 보내 몸 안에 근육 긴장을 더 유발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등, 여러 방면으로 불쾌한 경험인데, 이는 다시 말해 뇌에게 걱정거리가 있다고 알려주는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개입할 방안을 찾지 못한다면, 이 불쾌한 사이클은 그 자체로 우리 삶을 앗아갈 수 있다. - P267

이때 점진적인 근육 긴장 완화 요법을 통해 뇌 속 불안및 몸속 긴장의 일부인 근육 긴장을 인식하고 완화할 수있다. 3장에서 제시한 해법을 확장해보면, 내가 추천하는한 가지 흔한 방법은 잠자리 전략이다. 잠이 들기 전 누워서 발가락부터 머리까지 올라가면서 서서히 근육을 조인다음 풀어주는 방법이다. - P268

트라우마로 인한 자가면역 질환

염증이 늘어나면 박테리아 및 바이러스, 돌연변이된 암세포 등의 외부 및 내부 침입자에 맞서 싸우는 우리 면역계가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면역계가 잘 작동하지 않으면 평상시라면 별 걱정할 필요 없는 온갖 위협에 상당히 취약한 상태가 된다. - P269

 염증은 면역계를 뒤흔드는 여러기능 이상을 초래하고, 면역계에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며, 면역계가 도리어 자기 자신에게 무기를 겨누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렇게 면역계가 원래 보호하기로 되어 있는 자신의 몸과 뇌에서등을 돌리면 피로, 구역질, 통증 증가, 발진, 탈모 같은 저강도 중상이 나타나거나, 좀 더 파급력이 크고 피해 범위가 큰 류마티스성관절염, 루푸스, 다발성 경화증, 건선, 크론병 같은 자가 면역 질환이 생기기도 한다. - P270

후생유전학과 아동기 스트레스

후생유전학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의해 유전자가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되는 양상을 연구하는 학문이자 과학이다. 우리는조상의 DNA를 수동적으로 전달하는 배달부 역할만을 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경험은 어떤 특성이 활성화되고 어떤 특성이 잠들지를 결정한다. 트라우마에 의한 후생유전학적 변화는 일부 자가 면역 질환과 관계가 있으며, 이 밖에 아동기 트라우마에 의한 스트레스는 자가 면역 질환의 가능성뿐 아니라 성인기 염증 질환도 늘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 P271

트라우마가 들어오도록 무임승차권을 줄 필요가 없다.

어떤 특정인에 대해 시간 손실과 삶의 질을 예측하여 계산할수는 없지만, 삶의 경험과 정신 건강 변수를 근거로 예상치를 낼수 있다. 예를 들어 살면서 경험하는 심각한 트라우마처럼, 아동기트라우마 역시 상당한 피해를 준다. 노화의 경우 우울증이 유발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 우울증은 종종 트라우마와 연관이 있다. - P272

트라우마가 가져온 부정적 그림자

트라우마는 전에는 없었던 고뇌와 불리한 처지에 있다는 피해 의식 등 우리 뇌와 몸에 뉴노멀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뉴노멀은 통증 증가와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거나, 기회 상실과 우울증을 비롯해 건강하게 오래 살았다면 누렸을 놓친 세월에 대한 상실감 등의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 P273

(인지적 또는 실제) 장애물에 부딪쳤거나 위협을 느꼈을 때 나타난 여러분의 회복력에 대해 생각해보자. 여러분 안의 어떠한 힘이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는가? 좌절 이후 다시 정신을 차리거나 회복하도록 도와준 요소는 무엇이었는가? 어떤 자질을 통해 고난을 이겨냈는가? - P276

추천 서문

나는 어떻게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나

레이디 가가(스테파니 제르마노타stefani Germanotta)

월드 투어 중 나는 뉴욕의 개인 병원 응급실에 조용히 내던져졌다.
내 기억 속에는 의사와 간호사의 모습이 남아 있다. 내가 계속 소리를 지르자 이들은 차분하게 100부터 거꾸로 세어보라고 했다.
"왜 아무도 당황하지 않는 거죠?"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 P9

"안녕하세요, 저는 폴 콘티라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소개했다. "정신과 의사예요."
나는 같이 있던 의사가 좀 전에 방을 나간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옆에 있던 간호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진짜 의사를 불러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폴은 내 말에 "저는 뉴저지 출신이고 이탈리아 사람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말 한마디에 나는 폴에게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 P10

그동안 우리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여기서 일일이 다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이 점만은 밝혀두린다. 폴은 필요할 때만 흰색가운을 입었다. 자신이 의사임을 내게 상기시킬 필요가 있을 때만.
대부분은 상호 동의하에 폴은 같은 인간이자 안전한 남자로 내게 공감해주었다. - P11

 우리는 우리를 믿어주는 남자(그리고 또 남자가 아닌 사람들)가 필요하고 그래야 트라우마가 치유된다.
폴 콘티는 바로 그런 남자다. 그는 여성의 이야기를 믿고 여성이 지니고 있는 트라우마를 믿는다. - P11

폴은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고, 누구라도 그런 고운 마음씨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서 이런 덕목을본 순간 나는 치유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치유를 위한 여행 중이다. 여러분 역시 그렇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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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인구

19세기의 시작과 함께 우리가 믿을 수 있는 통계를 가지게 된 때부터(최초의진정한 인구조사는 1801년 영국에서 있었다) 중국과 유럽이 각각 인류 전체의약 4분의 1을 점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그러한 비율을 과거에 유추하여 적용할 때 그 유효성이 사전에 보장되지는 않는다. - P44

이렇게 계산한 인구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단기적으로는 급격한 감소를겪기도 하지만, 이것을 무시하면 1300년부터 1800년까지 대체로 장기적인 증가세를 보인다. 출발점인 1300-1350년의 추정치로 가장 낮은 값(2억5,000만 명)을 잡고 도착점으로 가장 높은 값(1780년의 13억8,000만 명)을 잡는다면 증가율은 400퍼센트 이상이 된다. 물론 이것을 믿을 필요는 없다. - P45

서구의 역사가들 중에 이 점에 대해서 놀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제시한 수치들을 확인해주는 많은 간접적 표시들을 알고 있다(새로운 토지의 개척, 이주, 황무지 개간, 토지 개선, 도시화………). 그렇지만그들이 이것들로부터 끌어낸 결론이나 설명은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현상을 오직 유럽에 한정된 것으로 보는 반면, 많은 장애물을 극복하고 인구가 늘어난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P46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 수치들

우리는 가장 잘 알려진 유럽과 중국에 관한 수치를 이용하여 세계 인구를추산하는 방법을 통계학자들로부터 빌려왔다. 그들은 이 방식에 대해서 반대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정작 통계학자들 자신은 다른 방법을 취했다. 그들은 연산과정을 잘게 나누고 세계의 다섯 "부분" 각각의 인구를 차례로 계산했다. - P46

17세기 중반 아프리카에는 확실히 활력 넘치는 사람들이 살았다. 이 대륙은 16세기 중반 이후 아메리카 대륙을 향한 흑인 노예무역이 늘었으나 그에따른 인구 유출을 감당해냈으며, 여기에 더해 이미 오래 전부터 있던 그리고 20세기까지 계속될 이슬람 국가로의 유출도 감당했다. - P48

그렇지만 유럽인이 블랙 아프리카 지방의 점령을 계속 고집하지 않은 것은 해안지역에서부터 "악성 질병 때문에 막혔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속적인또는 계속적인 고열, "이질, 결핵, 수종", 게다가 수많은 기생충들 때문에 유럽인들은 커다란 희생을 치렀다.²³ - P48

23. Père Jean-Baptiste Labat, Nouvelle Relation de l‘Afrique occidentale, 1728, V, pp. 331이하. - P760

 흑인 노예무역에 대해서 말하자면, 사람들이 흔히 믿는 정도로 대규모는 아니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노예무역에는 수송능력의 문제 때문에도 이미 한계가 있었다. 비교를 위해서 본다면 1769-1774년 사이 아일랜드의 이민은 모두 4만4,000명, 그러므로 1년에 8,000명 이하에 불과했다.²⁴ - P49

24. 이 시기에는 이민이 대단히 많이 이루어졌다. 다음을 참조하라. Michel Devèze, L‘Europeet le monde à la fin du XVIIIe siècle, 1970, p. 331, 주 586. - P760

아시아에 대해서 제시한 수치들 역시 과도하지만, 여기에서의 문제는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은 편이다. 카 손더스²⁷는 만주족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6년이 지난 1650년경의 중국 인구를 7,000만 명으로 잡은 윌콕스의 견해가틀렸다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그 두배(1억5,000만 명)로 올려잡았다. 중국사에서 전환기인 이때는 모든 것이 논쟁과 재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예컨대 인정은 혹시 유럽의 일반적인 징세단위인 가구, feux]와 같은것이 아닐까?). - P50

27. World Population, Past Growth and Present Trends, 1937, pp. 38-41.

큰 해일과도 같은 중국의 놀라운 인구 증가는 1680년 이전, 또는 타이완을 재정복한 1683년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은 시베리아, 몽골, 투르키스탄, 티베트 등 넓은 내륙지역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와 같이 자체의경계 속에 갇혀 있던 중국은 극도로 집약적인 (내부) 식민화의 포로였다. - P50

아시아의 인구로 되돌아가보자. 일반적으로 아시아의 인구는 중국 인구의 2-3배로 추정된다. 3배보다는 2배에 가까울 것이다. 인도의 인구가 중국인구와 같다고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판의 여지가 있는 자료들로부터1522년 데칸 지방의 인구에 대해서 추산한 결과(3,000만 명)를 따르자면 인도 전체의 인구는 1억 명에 달할지도 모른다.³² 그렇다면 당시 중국의 "공식적인" 인구 수치보다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 말인데 이것을 믿을 필요는 없다. - P52

32. W. H, Moreland, India at the Death of Akbar, 1920, pp. 16-22. - P720

그렇다고 하더라도 1797년에 처음 이루어진 프랑스인에 의한 인구 추산³⁵은 인도의 인구를 1억 5,500만 명으로 추정한 반면, 1780년부터 중국이 공식적으로 공표한 인구는 2억7,500만 명이었다. 킹즐리 데이비스의 통계연구 역시 인도 인구가 낮은 수준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지만,³⁶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의견이 옳다고 보증해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는 없다. - P52

35. A.E., Indes Or., 18, f° 257.
36. The Population of India and Pakistan, 1951, pp. 24-26. - P52

여하튼 중국의 2-3배로 가정한 아시아의 인구는 1680년에 2억4,000만 명또는 3억6,000만 명, 1790년에 6억 명 또는 9억 명이 될 것이다. 특히 17세기중반경에 대해서는 가장 낮은 수치를 선호한다는 점을 다시 밝혀두자. - P52

세기별 인구 변화

각각의 대륙별로 나누어서 수행한 공간상의 확인 작업과는 별도로, 이번에는 세기별로 시간의 경사를 좇는 더 어려운 확인 작업을 해야 한다. 파울 몸베르트가 이에 대해서 최초의 모형을 제시했다.³⁷ 1650-1850년의 유럽에관한 모형이었다. 그가 삼은 지침은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이다. 첫째, 가장 최후의 수치가 가장 덜 의심스럽다. 둘째, 가장 최근 시기로부터 가장 오랜시기로 거슬러올라갈 때에는 이들 사이에 대개 그러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인구 증가의 경사도, 즉 증가율을 가정한다. - P53

37. The Population of India and Pakistan, 1951, pp, pp. 533-545. - P760

이전의 불충분한 설명들

가장 처음에 제시했던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세계 인구의 전반적 상승이 그것이다. 유럽만이 아니라 중국의 인구 역시 논의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현저하게 증가했다면 이전의 설명들을 수정해야만 한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서유럽의 인구 증가의 원인에 대해서 고집스럽게도 도시의 사망률 감소(실제로는 여전히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³⁹ 위생과 의학의 발달, 천연두의 후퇴, 상수도 시설의 확대, 유아 사망률의 결정적인 하락, 여기에 첨가해서 사망률의 전반적인 하락, 그리고 결혼연령의 하락 등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이런 요소가 매우 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 P55

39. 「가제트 드 프랑스」에는 대단히 풍부한 정보가 들어 있다. 예를 들면 1762년에는 런던,
파리, 바르샤바, 코펜하겐 등지에서 출생보다 사망이 더 많았다. 코펜하겐의 경우를 보면, 출생이 2,289명인 데 비해 사망이 4,512명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 전체로 보면 출생과사망 사이에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 P370

그리고 유럽 외부에 대해서 보자면, 역시 의사도 없었고 위생수준도 특출할 것이 없었던 18세기 아메리카 대륙에서 앵글로색슨 계이든 스페인-포르투갈 게이든 인구가 증가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예를 들면, 1763년 이후 브라질의 수도가 된 리우 데 자네이루에는 황열병이 정기적으로 찾아오고 또다른 모든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러했듯이 매독이 일종의 풍토병처럼 창궐하여 환지를 "뱃속까지" 썩게 하지 않았던가?⁴² - P56

42. N. Sànchez-Albornoz, 앞의 책, p. 188. - P760

 폴 발레리는 수학자들에게서 빌려온 표현으로 이 세계는 "유한하다"고 했고, 또 어떤 합리적인 경제학자는 "인류에게는 이제 더 이상 제2의 미시시피 유역도,
제2의 아르헨티나 같은 땅도 없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⁴⁵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빈 공간이 부족하지는 않다. 아직도 열대 밀림, 스텝 지역, 심지어 극지방이나 진짜 사막 같은 곳이 남아 있어서, 이곳에서 현대 과학이 놀라운 일들을 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⁴⁶ - P57

45, W. Röpke, Explication économique du monde moderne, 1940, p. 102.
46. Pierre Gourou, Terre de Bonne Espérance, 1982,
17 allÓ ELD - P761

기후의 리듬

(전략)
15-18세기의 세계는 80-90 퍼센트의 사람들이 땅으로부터 얻어내는 것만으로 살아가는 거대한 농업세계였다. 수확의 리듬, 품질, 그 부족 등은 모든 물질생활을 좌우했다. 그 결과는 나이테에든 인간의 육신에든 깊은 상처처럼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그런데 이 변화들 중에 일부가 도처에서 일시에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단지 가설적인 설명밖에 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나마 그 가설들은 차례로 부정되었다. - P58

마찬가지로 루이 14세의 시대는, 데릭 쇼브의 표현을 빌리자면,⁴⁸ "소(小)빙하기(petit age glaciaire, little ice age)"였다. 이것은 태양왕(루이 14세)보다도훨씬 더 절대적인 지휘자로서, 유럽의 곡물 재배 지역에서나 아시아의 벼 재배 지역, 스텝 지역, 프로방스의 올리브 재배지, 그리고 눈과 얼음이 아주 늦게야 없어지고 가을이 너무 빨리 찾아와서 밀이 익을 시간이 거의 없어진 스칸디나비아 지역 모두에서 이 절대자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7세기 만에 가장 추운 시기였던 끔찍한 1690년대 또한 그러했다.⁴⁹ - P59

48, "Discussion post-glacial climatic Change", in: The Quaterly Journal of the RoyalMeteorological Society, 1949 4, p. 175.
49. Eino Jutikkala, "The Great Finnish Famine in 1696-1697", in: The ScandinavianEconomic History Review, III, 1955, I, pp. 51-52. - P761

이런 기후론적 설명이 일부분의 진리를 포함한다고 해도, 과도하게 단순화시키지는 말자. 기후는 대단히 복잡한 체계이며 그것이 식물, 동물, 사람에 미치는 영향은 장소에 따라, 문화에 따라, 계절에 따라 굴곡이 심하고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온대 유럽 지역에서는 "6월 10일부터 7월 20일 사이의 강우량과 밀의 낟알 수는 음의 상관관계가 있고, 3월20일부터 5월 10일 사이의 맑은 날의 비율과 밀의 낟알 수는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⁵⁰ - P59

50. B. H. Slicher van Bath, "Le climat et les récoltes au haut Moyen Age", in: Settimana..
de Spoleto, XIII, 1965, p. 402. - P761

 오늘날에도 몬순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려져 있다. 이 바람이 조금만 늦게 불어와도 인도는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는다. 또 이 현상이 2-3년 연속되면 곧 기근이 닥쳐온다. 인간은 이가공할 만한 제약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만이 아니라1976년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이 겪은 가뭄의 재해라든가, 1964-1965년에 미국에서 풍향체계가 비정상적으로 바뀐 결과 로키 산맥 동부에서 겪게된 파국적인 가뭄의 재해를 생각해보라.⁵² - P60

52. Rhys Carpenter, Discontinuity in Greek Civilization, 1966, pp. 67-68. - P761

참조를 위한 척도

1979년 현재 지구상의 인구는 약 40억 명이다(이 중에 조사가 가능하여 잘 알려진 것은 약 10퍼센트 정도이다). - P60

도시, 군대, 함대

역사가들이 19세기 이전 시대로 거슬러올라가는 여행을 할 때 만나는 도시와 군대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그야말로 한줌에 잡히는 소도시이고 작은 군대이다.
15세기에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⁵⁵ 상류와 하류로 가는 수상 운송업의 교차로이고 또 육상의 대로들의 교차점이었던 쾰른도 인구가 고작 2만명에 불과했다. 이때 독일의 농촌 인구와 도시 인구의 비율이 이미 10 대 1에이르렀고, 비록 도시 인구가 우리 눈에는 아주 적어 보여도 이미 인구과밀로 인한 도시의 긴장이 뚜렷하게 고조되어 있던 시기인데도 말이다. - P61

55. Heinrich Bechtel, Wirtschaftsgeschichte Deutschlands vom 16. bis 18. Jahrhundert,
II, 1952, pp. 25-26; Hermann Kellenbenz, "Der Aufstieg Kölns zur mittelalterlichenHandelsmetropole", in: Jahrbuch des kölnichen Geschichtsvereins, 1967, pp. 1-30. - P761

16세기 초에 이탈리아를 놓고 싸우던 용병대들 역시 매우 작은 규모로서 대개 1만 명이나 2만 명 정도에 10-20문의 대포를 가진 정도였다. - P62

또한 영국 내전의 드라마에서 왕군이 처음으로 패배한 롱 마스턴 무어에서의 끔찍스럽고도 결정적인 전투(1644년 7월 2일)* 역시 사실은 소규모군사력 간의 충돌이어서 왕당파가 1만5,000명, 의회파가 2만7,000명에 불과했다

* 롱 마스턴 무어(Long Marston Moor) 전투, 즉 영국 내란(해석에 따라 영국 청교도 혁명)의와중에 국왕군이 최초로 패배한 전투를 가리킨다. 크롬웰, 페어팩스 등이 이끄는 의회군과레슬리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이 루퍼트 지휘하의 국왕군을 무찔렸다. 국왕군은 전사자3,000-4,000명의 손실을 입은 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혔고 대포 등의 무기를 빼앗겼다. 이후에 크롬웰이 의회파의 지휘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 P64

이렇게 보면 어떤 역사적 업적들은 비록 그 수치가 오늘날의 기준으로는별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된다. 스페인의 지사들이 세비야, 카디스(훗날에는 리스본), 말라가, 바르셀로나 같은주요 "통제소"로부터 유럽의 바다와 육지를 가로질러 갤리선, 함대, 테르시오 군대**를 이동시킬 수 있었던 것이 그러하다.

** Tercio: 16세기 말에 만들어진 스페인의 보병 엘리트 부대. - P64

일찍이 인구과잉이 된 프랑스

이상과 같은 비교작업을 계속해보면, 다른 중요한 설명들을 더 찾아볼 수있다. 1600년경의 세계 인구가 오늘날 인구의 8분의 1이라고 하고 오늘날의국경선을 기준으로 본) 프랑스의 인구가 2,000만 명이라고 가정해보자. 이 두번째 가정은 완전히 확실하지는 않더라도 가능성이 있다. 이때 영국 인구는많아야 500만 명을 넘지 못했다.⁶⁹ - P66

69. Karl Julius Beloch, 앞의 논문, p. 786. - P761

 16-17세기에 상당한 정도의 스페인 이민이 수행되었고, 더 이후의 시기에는 아메리카의 "섬들로 갔다. 또 우연한 기회에 종교적 이유로 망명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1540년에(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가 처음 시작되어 1752-1753년에 랑그도크 지방에서 피비린내 나는 탄압 끝에 최후의 대규모 이주가 일어나기 전까지 망명이 계속된 결과, 프랑스는 심각한 인구 출혈을 겪어야 했다.⁷¹ - P67

71. H. Luthy, H, I, p. 26. - P761

역사 연구의 결과로 얼마 전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프랑스인의 이베리아국가로의 이민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알게 되었다.⁷² 그것은 통계적 계산과 여행자들이 끊임없이 제공하는 기록에 의해서 입증되었다.⁷³ - P68

72. G. Nadal et E. Giralt, La Population catalane de 1553 à 1717, 1960.
73. Barthélémy Joly, Voyage en Espagne, 1603-1604, p.p. L. Barreau-Dihigo, 1909, p. 13.
카탈루냐의 피게라스의 장인들은 모두 "오트 오베르뉴 출신의 프랑스인들이다." - P761

18세기에 출산을 고의로 통제(피임)하기 시작하는 것-어쩌면 이미 이전부터 그래왔으나 이 시기에 확실하게 퍼졌는지도 모른다-은 따라서 이미수 세기 전부터 인구과잉에 시달려온 나라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P68

인구밀도와 문명의 발달수준

지구의 육지 표면적이 1억5,000만 제곱킬로미터이고 인구가 40억 명이므로현재 지구상의 평균 인구밀도는 1제곱킬로미터당 26.7명이 된다. 같은 계산을 1300-1800년의 시기에 대해서 해보면 1제곱킬로미터당 최저 2.3명, 최고6.6명이 된다. 다음으로 1979년 현재 가장 인구가 밀집된 지역들(1제곱킬로미터당 200명 이상인 곳)만을 계산하면 이곳은 오늘날 조밀한 문명(civilisationdense)의 핵심 지역이 되는데, 누차에 걸친 계산 결과를 보면 이런 곳은 모두1,10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바로 이 좁은 띠 속에 거의 30억 명의 사람,
전체 인구의 70퍼센트가 모여 있다. - P69

사람들이 거주하는 세계, 즉 외쿠메네가 사람들이 살지 않는곳보다 부조리할 정도로 작아서 비대칭을 이룬다는 이 이미지는 다시금 강조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어쩔 수 없어서, 때로는 소홀함으로 인하여, 또는 끊임없는 역사의 힘의 연쇄가 이미 그런 방향으로 결정해버려서 인간은 지구의 10분의 9를 비워두고 있다. - P69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몇몇 지점에 연속적으로 몰려드는 방식으로"⁸⁰ 인구가 누적되었다. 얼핏 보면 과거에는 인구밀도가 낮았으므로 1400-1800년 사이에 문명을 이룰 정도로 진짜 조밀한 인구집단은 어디에도 없었을 것으로 결론을 내리기 쉽다. - P70

80. P. Vidal de la Blache, 앞의 책, pp. 10-11. - P762

우리는 유럽인의 정복이 아메리카 대륙에 충격을 가하기 전인 1500년경전 세계의 문명, 발달한 문화, 그리고 원시문화의 위치를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 당시의 문서, 이후 시기의 기록, 과거와 현재의 민속학자들의 연구 등을 통해서 우리는 정확한 지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문화의 경계가 수 세기가 지나도록 거의 변하지않기 때문이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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