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니 이 책에 6.8혁명 이야기가 나온다.






11장

반체제운동

사회가 바뀔 때 희생양을 찾으려고 유난히 집착하는 것은 인간사에서 아주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사람들은 평소에는 일상생활에서 기존의 도덕적 의무를 내버리며 살다가도 사회가 바뀔 때면 늘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처럼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그런 행동은 결국 많은 사회운동을 수반하며, 그러다 법과 질서가 작동하지 않게 되면 더욱 광분한다.
-앤서니 F. C. 월리스 세인트클레어St. Car


저기 있는 남자는 여자들이 차를 탈 때 도와주고 웅덩이를 건너도록 손을 잡아 올려주고 어디서나 가장좋은자리를 앉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하죠. 그런데 내가 차를 타거나 진흙탕을 건널 때 도와주거나 좋은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난 자가 아닌가요? 나를 보세요! 내 팔을 보라고요! 나는 지금까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수확해서 헛간에 쌓았어요. 어떤 남자도 나를 막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여자가 아닌가요? 나는 남자들만큼 많은 일을 하고 많이 먹고(그만큼 먹을 것이 있다면 그리고 채색질도 견뎌낼 수 있었죠! 그래서 내가 여자가 아닌가요? 나는 아이를 열셋이나 낳았지만 대부분이노예로 팔리는 것을 보았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울부짖을 때 내 동곡에 귀 기울인 사람은 예수님 말고아무도 없었어요! 난 여자가 아닌가요?) 하느님이 만든 최초의 여자는 혼자서 세상을 뒤집어엎을 정도로 강했죠. 지금 우리 여성들이 힘을 합친다면 틀림없이 그것을 되돌려서 다시 똑바로 세워놓을 수 있울거예요.
-소저너 트루스(실버블랙 인용) 『미국의 여성들』 - P630

(전략). 그러나 노동조합과 파업, 민족해방, 시민권, 여권운동, 민병대, 환경운동, 근본주의 종교운동과 같은 종류의 저항운동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렇게 저항하는 다양한 인간집단들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그것을 하나로 개념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말하자면 이런 다양한 운동을 어떤 세계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까? - P631

이런 저항운동들이 자본주의 세계체계 팽창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학파는 인류학·사회학·역사학·지리학·정치학에 두루 있다. 그들은 이 같은 이유로 그런 저항운동을 반체제운동이라고 부른다(Amin, 1990). - P631

우리는 많은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이런 혁신들이 길게 보면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또한 일부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경기변동은 장기적으로 결국 균형이 잡힌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이 그리는 성장곡선의 기복은 일반인들에게는 번영이냐 위기냐 하는 구체적인 삶의 국면으로만 다가온다(Guttmann, 1994, 14쪽). - P632

반체제운동: 두 차례의 세계혁명

1848년 이매뉴얼 월러스틴(1990)은 첫 번째 세계혁명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 해 유럽의 11개 나라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이 되어 반란을 꾀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일련의 봉기들은 불과 몇 달 만에 진압되었지만 마침내 자신들이 주장하는 개혁의 대부분을 완수하게 한 항의내용을 세상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두 번째 세계혁명은 1968년에 일어났는데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일본, 멕시코의 노동자와 학생, 농민이 그 대중봉기에 참여했다. - P633

1848년 혁명

1848년 혁명은 2월 24일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보통선거권에 기반을 둔 새로운 공화정을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 (중략). 그 혁명은 심지어 브라질에서도 반란을 일으켰고 1년 후에는 콜롬비아에서 또 다른혁명을 일으켰다(Hobsbawm, 1975, 10쪽). 그러나 1년 반 만에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전 정권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 P633

 이 두 가지 유형의 운동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을 본떠서 ‘자유, 평등,
우애‘를 주창했다. 1848년은 물론 그런 운동의 시발점이 아니었다. - P633

노동운동

 1848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기반의 정치집단이 정치권력을얻기 위해 등장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월러스틴(1990)에 따르면 그들은 비록 실패했지만 그 혁명은 노동권을 옹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는 산업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개선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격론을 유발했다. - P634

(전략)

그 결과, 유럽과 미국에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이 서로 경쟁하며 부상했다. 하나는 투표를 통해 정치권력을 얻고자 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주도하는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을 지지하는 공산주의 조직들이 주도하는 전략이었다. - P635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미국과 서유럽의 빈민충 숫자는 크게 감소했다. 1949년 미국과 서유럽 노동자들 대다수는 1848년에는 꿈도 못 꿨던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동시에 러시아나 대다수 동유럽 국가들과 같은 혁명국가들의 노동자들은 공산정권 아래서 그들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들은 비록 서방의 노동자들만큼 풍요롭지는 못했지만 기본적인 생활(예컨대 일자리, 식량, 주택)을 영위하는 데서는 더 완벽한 보장을 받았다. 따라서 노동자들은1848년 혁명으로 쟁취한 혜택을 100년 동안 넉넉하게 누렸다. - P635

민족주의 반체제운동 유럽과 미국에서 노동계급의 운동이 민중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이었을 때, 주변부 국가에서는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중심부에서는 산업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사회민주주의운동과공산주의운동을 주도한 반면에 주변부의 민족해방운동은 중산층과 지식인 계층이 자국의 반자본주의 세력들과 손을 잡고 주도했다. - P635

2차 세계대전 뒤에 이어진 세계 경제의 엄청난 성장은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서방 국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기침체와 실업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고, 자신들의 세계가 영원한 번영과 성장의 길로접어들었다고 생각했다. 전 세계에서 기아가 사라지고 전염병이 근절되고 계급투쟁이 과거의 일로 기억되리라고 믿었다. 반면에 공산주의 국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제를 나정시킬 수 있는 경제 공식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 P636

(전략). 또한 동유럽국가들도 명목상으로는 민족공산주의 정당들을 통해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았다. 그렇다면 첫 번째 세계혁명이 추구했던 많은 목표가 이미 실현되었는데도 왜 또 다른 세계혁명이 일어났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없다. - P634

1968년 혁명

1968년 혁명은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로 촉발되었다. 대학교 구내로 번진 시위들은결국 잭슨 주립대학과 켄트 주립대학 학생들에 대한 주 민병대의 공격으로 학생들이 사망하는 사건을 초래했다. 프랑스에서는 노동자와 학생들이 파리 중심가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일본과 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시위가 일어났다. - P637

미국에서는 베트남 민중의 민족적 열망을 잔인하게 억압하려는 정부의 시도에 맞서 저항했다. 러시아와 동유럽 사람들은 스탈린이 얼마나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깨달았고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운동이 탄압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주변부 국가에서는 경제발전의 꿈이가난과 정부의 억압, 부패라는 악몽으로 바뀌었다. 이런 상황 전개는 돌아갈 곳조차 없는 구제받지 못한 사람들을 남겨놓았다.  - P638

주변부 국가의 사회적·경제적 개혁들이 국민에게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하거나 새로운 특권층을 양산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권력자들이기존의 경제조건의 지속(대개는 악화)과 신식민주의적 종속, 새로운 엘리트층의 등장을 초래한 경제개혁과 관행을 장려하거나 적어도 채택하는것을 묵인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1848년에 탄생한 반체제운동은 1968년에 탄생한 새로운 반체제 운동을 만났다. - P638

반체제운동은 두 차례의 세계혁명에서 나왔다. 우리는 이 장에서 검토하는 반체제운동들이 자본주의 문화의 다양한 특징에 반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운동이 다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항의를 개념화한 것은 아니다. 대개는 아니었다.  - P639

노동자의 항의: 19세기 펜실베이니아의 광산노동자.

석탄산업과 노동자의 삶

1820년대와 1830년대 필라델피아와 뉴욕의 투자자들은 펜실베이니아의 탄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중략)
대부분의 산업과 마찬가지로 탄광의 작업조직은 계층구조를 이루고 지하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지상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있었다. 탄광에서 가장 낮은 단계의 노동자는 8~12세의 사내아이들로 광부와 노새, 장비들이 갱도를 들락날락할 때 공기를 유통시키는 환기장치를 조작하는 일을 했다. 그다음으로 높은 단계의 노동자는 10대소년들로 수레에 석탄을 가득 담은 노새를 모는 일을 했다. - P670

184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세인트클레어의 탄광산업은 비록 돈을번 사람은 별로 없고 오히려 많은 사람이 손해를 보았지만 그런대로 패성장했다. 석탄 1톤을 채굴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1달러 56센트에서 3달러 16센트까지 다양했다. 여기에는 주민세, 운하나 철도 운송비용, 중개상 수수료, 고정자산 상각비용, 대출이자 같은 비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철도 운송비용은 1톤에 평균 1달러 60센트를 중심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따라서 실제로 석탄 1톤을 채굴하는 데 드는 비용은 최소 3달러 16센트에서 4달러 16센트에 이르렀다. - P641

그러면 세인트클레어와 그 주변 지역의 탄광업은 왜 이익을 내지 못했을까? 거기에는 명백한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그 지역의 지리적조건이고, 다른 하나는 각종 사고로 채굴 작업이 자주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 P642

탄광 경영자들이 그 지역의 탄광이 수익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 지질학자들의 보고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그런 손해는 보지 않을 수도있었다. 그러나 땅 소유주와 탄광 경영자들은 보고서를 무시하고 오히려과학적 근거들을 공격하며 이미 이루어진 투자들이 바로 수익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었다. - P632

석탄 채굴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갱도붕괴와 지하수 범람, 컨베이어 벨트로 된 쇄탄기에서 이루어지는 위험한 작업 말고도 끊임없는 폭발의 위험이 상존했다. 또한 석탄은 메탄가스를 내뿜는다. 산소와 섞이는 메탄의 양이 5~12퍼센트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불꽃이 점화될 수 있다. 당시 광부들이 쓰는 헬멧에는 덮개가 없는 백열전구가 부착되어 있어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치명적인 메탄가스의 발생을 막을 한 가지 방법은 갱도를 통해 꾸준하게 공기가 흐를 수 있도록 환기시설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설비는 비용이 많이 들었다.  - P634

철강산업이 성장하지 못하면 탄광산업도 성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국산 철강은 미국산 철강보다 더 싸고 품질도좋았다. 영국산 철강이 높은 수입관세로 가격이 올라가면 미국의 철강산업과 석탄산업이 성장하면서 이익도 늘어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P643

월러스가 당시의 사고 보고서들을 살펴본결과에 따르면 사고의 원인은 거의 모두 광부들의 태만 때문이었다. 따라서 탄광 소유주는 경제적 손실에 대한 비난을 모면할 수 있었고, 탄광경영자는 사고에 대한 어떤 경제적 책임도 지지 않았다. - P643

1869년 광산안전법이 통과되기 전 상황에 대해 일관된 기록은 없지만『광부 저널』(광산업계의 주요 잡지)에 게재된 기사들을 검토한 결과, 윌러스는 지상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포함해 해마다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6퍼센트가 죽었고, 다른 6퍼센트는 평생 불구가 되었으며, 또 다른6퍼센트는 중상을 입었다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은 12년 동안 살아 있을 확률이 절반도 안 되었으며 6년 안에 죽거나 평생 불구가 될 가능성이 컸다(Wallace, 1987, 253쪽).  - P644

(전략). 그러나 계약직 광부들은 이들과 다른 대우를 받았다. 그들이 터널 뚫는 일을 하면 얼마나 많은 수레로 흙을 실어 날랐는지에 따라, 얼마나 깊이 터널을 뚫었는지 그 길이(야드)에 따라 대가를 받았다. 그러나 계약직 광부들은 여기서 일부를 조수들에게 급여로 지급하고 전구나 양초심지 비용도 내야 했다. - P645

한 사람이 1년에 버는 돈은 기껏해야 150~200달러에 불과했다. 그래서 어떤 집에서는 하숙을 치기도 하고 일부 여성은 침모나 식모 가정부로 일해야 했다. - P645

반면에 식비는 쌌다. 옥수수는 1부셸에 50센트, 달걀은 12개에 11센트, 밀가루 1배럴에 5달러, 버터 1파운드에 18센트, 베이컨 1파운드에 7센트, 소고기 1파운드에 8센트였다. 주거비도 쌌다. 따라서 아내와 자녀 둘을 둔 노동자는 한 달에 평균 20달러만 벌면 먹고살면서 약간의 저축까지 할 정도가 되었다. - P645

노동자 저항과 항의

노동자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이익을 지킬 수 있었을까? 그들이 탄광에서 직면하는 각종 위험과 저임금, 해고, 채굴 중단으로 야기된 경제적 불안에 대해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어떻게 항의할 수 있었을까?
광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임금과 위험한 노동조건에 대해 항의했다. 일시에 작업을 중단하기도 하고 광업소에 맞서 파괴행위도 하고 시위와 행진, 태업도 했다. 이런 저항행위들은 대개 경찰이나 주 민병대와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 P646

실질적인 최초의 파업은 1868년에 일어났다. 펜실베이니아 주의회가 법정 하루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정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삭감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광부들은 임금 삭감이 없는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했다.  - P646

또한 작업장 안팎에서 극심한 차별을 당하는 아일랜드계 광부들의 항의의 중심에는 몰리머과이어Molly Maguires라는 비밀조직이 있었다. 몰리머과이어라는 용어는 본디 아일랜드 남부 지역에서 생겨났는데 지주와 치안판사처럼 가난한 아일랜드 가정을 못살게 구는 사람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조직된 농민집단을 일컫는 말이었다.  - P647

아일랜드계 탄광노동자와 탄광 소유주 또는 경영자들 사이의 투쟁에서 탄광 소유주와 경영자들이 광부들의 조직을 파괴하고, 다른 노동자조직들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국제적 음모와 연결시키려는 시도의 초점이 몰리머과이어에 맞춰져 있었다는 것은 당시에 그 조직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P647

1875년 9월 살인과 살인미수 사건들이 여기저기서 발생했다. 희생자들은 대개가 과거에 아일랜드인을 공격했거나 아일랜드계 노동자들을 해고하거나 취업을 막은 사람들이었다. 월러스(1987, 374쪽)가 말한 것처럼몰리머과이어에 속한 사람들은 "정부 당국이 인종차별을 하는 분위기에서 보복을 통해서라도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요구와 자신들의 권리를 철저하게 거부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증오에 찬 분노"에 따라 행동했다. - P648

노동자 저항의 파괴

탄광 소유주와 경영자들은 탄광의 작업안전 기준을 높이거나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을 인정하는 어떤 법률 제정에도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작업안전 기준을 더 높이면 경제적으로 탄광 운영이 어려워지며, 단체교섭을 인정할 경우 탄광 경영에 대한 노동자들의 발언권이 지나치게커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펜실베이니아 주의회가 1869년 작업안전 기준을 높이는 법률을 통과시켰지만 겨우 다섯 달 만에 펜실베이니아 애본데일에 있는 한 탄광 폭발로 108명이 죽었다. - P649

고웬은 노동자공제협회와 고대아일랜드인회를 몰리머과이어의 일부조직이라고 몰아붙여 몰리머과이어가 저지른 실제 또는 꾸며진 범죄행위의 희생양으로 삼는 전략을 썼다.  - P650

토머스의 고소와 핑커턴에서 침투시킨 첩자가 제시한 증거를 근거로 범인 체포에 들어갔다.
고웬은 고대아일랜드인회와 노동자공제협회를 재판에 붙였다. 따라서 그조직들의 회원이라는 것 자체가 오명이라는 식으로 음모를 꾸몄다. 이어지는 재판으로 20명이 살해를 공모한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결국 그 재판은 탄전의 경제적 실패를 광부들과 그들의 조직탓으로 돌리며 광부들을 희생먕으로 만드는 데 결정젇 역할을 했다. - P650

실제로 월러스(1987)에 따르면 아일랜드 가톨릭이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세계에 대해 보복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도구로서 몰리머과이어가 일정부분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노동자공제협회와 고대아일랜드인회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고웬의 대응이 마우마우단에 대한 영국인들의 대응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 P651

고웬은 마침내 사람들이 이미 붕괴된 노동조합을 더는 신뢰하지 않도록 만들었으며 석탄업계 자체의 문제들에 대한 비난을업계 바깥의 영향력들, 즉 영국 철강에 대한 수입관세의 부재와 노동자들 탓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월러스가 기록한 세인트클레어의 이야기는 오늘날 전 세계 산업 현장에서도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는 노동분쟁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 P651

국제자유노조연맹ICFTU은 2006년에 펴낸 연차보고서(International Confederation of Free Trade Unions, 2003)에서 2005년 전 세계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살해된 노동자가 115명이나 되고 급습을 당한 노동자는 1,600명이 넘으며 경찰에 체포된 노동자는 9,000명에이른다고 전했다. 또한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노동자가 1만 명 가까이 되며 감금된 노동자도 1,700명에 이른다. - P652

전 세계 여성해방운동

1995년 9월, 중국 베이징에 전 세계 비정부기구의 대표들이 모였다. 그들은 4차 세계여성대회에서 대회 참가자들이 ‘전략적 자매관계‘라고 부른, 주변부 국가의 여성운동과 중심부 국가의 여성운동을 통합하는 국제단체를 만들기로 했다. 오늘날 여권운동의 모델은 1848년 세계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P652

오늘날 여성운동은 적어도 서양에서는 여성의 신분 상승에 도움을 주었지만 나머지 세계의 여성들은 여전히 경제적·정치적·사회적으로 주변부에 머물고 있다. 마사 워드가 『여자로 가득한 세계』A World Full ofWomen (1996, 221쪽)에서 특별히 언급한 것처럼 전 세계 여성들은 주로
"가판, 공장 조립라인, 삯일, 환금작물 재배와 상업농사, 매춘, 가사노동,
호텔의 침대시트를 갈아주는 청소부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여성들은 전 세계 농작물의 75~90퍼센트까지 생산하는 동시에 가사를 책임지고 있다. 유엔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어느 나라도 남성이 가사에 소비하는 시간이 여성의 가사활동 시간과 비슷한 나라는 없다. - P653

. 여성을 위한 10년(1975년 12월 유엔총회에서 전 세계 여성의 사회참여, 남녀평등 촉진, 권익 향상을 위해 1976~1985년을 여성을 위한 10년으로 지정하고 각종 지원과 회의를 개최했다-옮긴이)의 비공식 표어는 "여성은 전 세계 노동의 3분의 2를 감당하지만 소득은 전체의 10퍼센트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생산수단 소유는1퍼센트에 불과하다"(Ward, 1996, 224쪽 인용)였다. - P653

(전략)

그러나 오늘날 지구촌 여성의 경제적 지위는 어느 정도 향상되었음에도 전체적으로 볼 때 여전히 남성들의 주변에 머물러 있다. 예컨대 하루수입이 1달러 이하인 10억 명 정도의 극빈층 가운데 60퍼센트가 여성이다. 그렇다면 전 세계 여성들의 지위를 열악하게 만든 요인들은 무엇일까? 그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 P654

자본주의 문롸에서의 성의 관계

 리콕은 자본주의가 여성들을 가사에 얽매이게 만들어 결국 여성이억압당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매우 가부장적인 생산양식이라고 주장한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논리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여성의 주변화와 그것이 유발하는, 특히 주변부 국가에서의 저항이 자본주의 문화의 팽창에 따른 결과라는 증거가 있는가? - P655

18세기와 19세기 자본주의의 팽창은 그것이 확산된 사회들의 두 가지 사회관계를 바꾸었다. 첫째, 자본주의는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에게서 생산수단을 빼앗아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에 의지해 살 수밖에없게 되었다. 둘째, 자본주의는 대가족집단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개인이나 핵가족 단위로 분리했다. 그렇게 분리된 각 경제 단위는 남성 가장의 지배를 받았다. 리콕 (1983. 268쪽)은 이런 상황 전개가 결국 오늘날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억압받게 된 배경이라고 주장한다.  - P655

리콕, 보스럽, 색스 같은 학자들의 연구는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Silverblatt, 1988). 근대화가 가져다준 이익과 그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근대화론자들은 대개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대가족이 쇠퇴하고 핵가족이 부상한 것을 사회진보의 중요한 예로 든다. 하지만 여성운동가 대다수는 여성의 지위가 낮아지게 된 것이 어느 정도 핵가족제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런 변화가 ‘근대화‘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히려 자본주의 문화의 등장 그리고 팽창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대가족은 왜 자본주의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들과 양립할 수없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 P657

자본주의 관점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정서적 유대를 축소하고 노동력이 필요할때 어디든 쉽게 재배치할 수 있다면 여러모로 편하다. 자본주의 문화가 더 선호하는 가족 단위가 핵가족이라고 한다면 핵가족은 어떻게 해서 여성의 지위를 열등항 수준으러 떨어뜨릴까? - P657

첫째, 핵가족의 등장으로 남성들은 대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 좀더 자율적인 존재가 되었고 각종 자원과 자기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지배력이 높아졌다. - P658

산업 생산이 중심부 국가에서 주변부 국가로 확대되면서 여성들이 생산수단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차단되고 남성 중심의 핵가족이 사회를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되었으며 여성들은 결국 경제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 P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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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종이 중에 일종의 비밀 글자가 적혀 있는 종이가많다는 사실을 혹시 알고 있나요? 이런 종이를 투과광으로 비추면 보이지 않던 투명한 글자나 문양이 드러납니다.
이를 워터마크라고 하는데, 보존가는 워터마크를 조사해 그종이가 언제, 어느 지역에서 제작된 것인지, 그리고 종이를 만든 공장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낼 수 있습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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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숨겨진 가보를 찾아라!

집가家 


가보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집안의 보물.
가장 한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
가족 한집에 모여 같이 사는 부모와 그 자식들 비 식구가훈 한집안의 조상이나 어른이 자손들에게 일러 주는 가르침.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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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올레크가 밝힌 회상에 따르면, 그들은 〈둘 다 깊은 생각이나 자기 성찰 없이> 약혼한 뒤, 몇 달 만에 화려하지 않은 결혼식을올렸다. 결혼을 빨리 한 이유는 로맨스와는 별로 상관없었다. 엘레나는 결혼으로 그의 승진 가능성을 높여 주고, 그는 그녀에게 모스크바를 빠져나가는 수단이 되어 줄 터였다. 비록 두 사람 모두 상대에게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KGB식의 정략결혼이었다. - P47

덴마크에서 비밀 간첩들의 네트워크를 관리하는 이 자리에 가겠느냐는 제안이 오자 올레크는 주저 없이 기쁘게 받아들였다. 킴 필비가 1933년 KGB에 포섭된 뒤에 밝힌 심정과 비슷했다. - P47

2
고름손 삼촌

나중에 한 MI6 요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련의 공산주의제보다 서구 민주주의가 우월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도시 하나를 고른다면, 코펜하겐보다 더 나은 곳은 별로 없을 것이다.> - P49

소련 대사관은 코펜하겐 북쪽 크리스티아니아 거리에 있는 치장벽토 주택 세 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깨끗한 정원이 넓게 뻗어 있고 스포츠 센터와 사교 클럽이 갖춰져 있어서 소련 대사관이라기보다는 웅장한 정문이 있는 호텔처럼 보였다.
(중략)
완전히 세뇌된 KGB요원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이런 자유를 맛보고 나서 여기에 남고싶다는 충동에 저항할 수 있겠는가? - P50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스무 명의 관리 중 진짜 외교관은 고작 여섯 명이고, 나머지는 KGB나 소련군 첩보 기관인 GRU 소속이었다. 이곳의 레지덴트인 레오니드 자이체프는 매력적이고 양심적인 요원이었으며, 자기 부하들이 대부분 무능하거나 게으르거나 부정직하다는 사실, 아니 대개 이 세 가지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 P50

 요원 대부분은 덴마크인과 만난 이야기를 거짓으로 만들어냈다. 가짜 영수증을 만들고 거짓 보고서를 쓰는 방법으로 자신에게 지급된 돈을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중앙은 코펜하겐에 파견된 직원 중 덴마크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심지어 덴마크어를 아예 한 마디도 못 하는 사람도 몇 명이나 되는 이 비정상적인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 P51

어느 날 올레크는 신호 장소인 공중화장실 창턱에 구부러진 옷을 놓아두었다.
어떤 불법 스파이에게 미리 지정된 버려진 편지함에서 현금을 가져가라고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 불법 스파이가 이 메시지를 잘 받았다고 답하려면, 같은 장소에 맥주병 뚜껑을 놓아두어야 했다. - P51

스파이들 사이의 신호 체계에서 진저비어도 평범한 맥주와 같은가? 아니면 여기에 또 다른 의미가 있는건가? 레지멘투라로 돌아와 동료들과 밤새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그는 문제의 그 스파이가 두 종류의 병뚜껑을 똑같은 것으로 보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 P52

올레크는 어머니의 결혼 전 성(姓)인 <고르노프>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며 몇 달 동안 덴마크인들과 친분을 다진 끝에, 어느 교사 부부를 설득해 <살아 있는 편지함> 역할을맡기는 데 성공했다. 불법 스파이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올레크는 덴마크 경찰관 한 명과도 친구가 되었으나 몇 번 그를 만나고 난 뒤 자신이 그를 포섭하는 건지 아니면 그반대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 P52

1957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 청년 축전에서 KGB의 지시로 어떤 미국 여성을 유혹했다. 4년 뒤 소련 대사관의 공보 담당관으로 영국에 배치된 그는 노조 학생 단체, 여러 주류 단체에서 정보원을 포섭했다. 그는 낭랑한 상류층 말씨의 영어를 구사했으며, 여기에 영국식 옛 표현들을 곁들였다. - P53

1965년에 그가 영국의 암호 담당자를 포섭하려다 실패하자, 영국 보안국은 즉시 그를 포섭하려고 시도했다. 영국의 첩자가 되라는 제의를 거절한 뒤 그는 외교상 기피 인물로 판정되어 모스크바로 송환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을 겪고도 그의 열렬한 영국 사랑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 P53

 어느 날 올레크는 코펜하겐 홍등가를 찾았다가 포르노 잡지와 성적인 장난감 등을 파는 상점에 순간적인 충동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거기서 동성애 포르노 잡지 세 권을사서 집에 가져와 옐레나에게 보여 주었다. <난 그저 흥미를 느꼈을뿐이다. 동성애자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전혀 몰랐다. 그는 이잡지들을 벽난로 위에 두었다. 소련에서는 누릴 수 없는 자유가 거기 드러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인간으로서 꽃을 피웠다. 아름다움, 무척 활기찬 음악, 훌륭한 학교,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 주는 개방적인태도와 유쾌함에 비하면, 소련이라는 광대하고 황량한 강제 수용소는 일종의 지옥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 P54

감시당한다는 느낌이 사라진 것은 평생 처음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감시당하고 있었다.
덴마크 안보 정보국Politiets Efterretningstjeneste (PET)은 아주 작지만 대단히 유능한 기관이었다. 이 기관의 임무는 <덴마크를 자유롭고 민주적이고 안전한 나라로 유지하는 데 위협이 되는 작전과 활동의예방, 조사, 격퇴>로 명시되어 있었다. PET는 올레크 고르디옙스키가 바로 그런 위협 중 하나라고 강력히 의심했으므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이 소련의 젊은 외교관이 코펜하겐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 P55

덴마크 정보국은 (고르노프, 구아르디예체프, 고름손 삼촌 등의 이름을 지닌) 고르디옙스키가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한 KGB 스파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어느 날 올레크와 옐레나는 경찰관 친구 부부의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두 사람이 집을 비운 동안, PET 직원들이 그들의 아파트에 들어와 도청 장치를 심었다. - P56

. 유부남인 소련의 정보관계자가 동성애 포르노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을 약점으로 협박하는 것이 가능했다. 덴마크 정보국은 이 사실을 꼼꼼히 기록해서 일부 동맹국에게 전달했다. 서구 정보 파일에 포함된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의 옆에 처음으로 물음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 P56

그의 결혼 생활에 이처럼 금이 가고 있을 때, 소련 블록 내에서는땅이 뒤흔들리는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1968년 1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제1서기이자 개혁주의자인 알렉산드르 둡체크가 소련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화를 지향하기 위해 여행과 언론에 대한 제한과 검열을 완화했다. 둡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내세워, 비밀경찰의 권한을 제한하고서구와의 관계를 개선하며 궁극적으로는 자유선거를 실시하겠다고약속했다. - P58

모스크바의 KGB 본부는 체코의 개혁 실험을 공산주의 자체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보았다. 냉전에서 소련에 불리한 쪽으로 저울을 기울일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본 것이다. - P59

1968년 초, 서른 명이 넘는 KGB 불법 스파이들이 체코슬로바키아로 침투했다. KGB 국장 유리 안드로포프는 그들에게 체코의 개혁 운동을 방해하고, <반동적인> 지식인 서클에 침투해 프라하의 봄을 지지하는 저명인사들을 납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KGB의 공작원들은 대부분 서방 관광객으로 위장하고 체코슬로바키아로 갔다. - P59

(전략). 그러나 1968년에 중앙은 파우스트라는 암호명을 쓰는 이스파이가 피해망상에 걸렸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빼내기로 했다.
1968년 4월, 바실리 고르디옙스키는 우샤코프를 약물로 잠재운 뒤핀란드를 거쳐 모스크바로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KGB는 우샤코프를 정신 병원에 넣었다가 풀어 준 뒤 해고했다. 바실리는 <흠잡을데 없이 임무를 수행한> 공로로 KGB 메달을 수상했다. - P60

바실리는 프라하의 봄을 깎아내리고 파괴하려는 KGB 작전의 선봉에서 활약했다. 아버지처럼 그도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 것인지 의문을 품지 않았다.
올레크는 형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형이 벌이고 있는 비열한 짓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두 형제는 그때도 그 뒤에도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 P61

1968년 8월 20일 밤, 2천 대의 탱크와 20만 명이 넘는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넘었다. 소련군이 주력이었지만, 다른 바르샤바 조약국들의 파견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략).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는 경악과 혐오를 느꼈다. 성난 덴마크인들이 코펜하겐의 소련 대사관 앞에 모여 침공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을 보며 그는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는 모습을 지켜볼 때도 큰 충격을 받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침공은 그가 봉직하는 정권의 진정한 본질을 훨씬 더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였다. - P62

덴마크 정보부는 그가 아내와 나눈 이 위험한 대화를 틀림없이 포착해서, <고름손 삼촌>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KGB라는 기계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톱니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터였다. 그렇다고 그가 딱히 서방에 접근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덴마크를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정보국에 그의 감정을 알리려는 시도, 감정적 측면의 <스치는 접선>같은 것이었다. - P63

서방은 이 신호를 놓쳤다. 올레크가 손을 뻗었으나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덴마크 안보 당국이 중간에 가로채서 처리하는 정보가 워낙 많기 때문에, 작지만 의미심장한 올레크의 신호는 눈 에띄지 않고 지나가 버렸다. - P63

올레크의 덴마크 근무가 끝나갈 무렵, 모스크바에서 연락이 왔다. <작전 활동 중단. 그곳에 남아 분석하되 작전은 이제 없다.> 모스크바 중앙은 덴마크인들이 올레크 동무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인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가 KGB 요원임을 그들이 알아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중간에 가로챈 무선 통신 내용을 보면, 올레크가덴마크에 도착했을 때부터 평균 이틀에 한 번씩 그에게 미행이 붙었음을 알 수 있었다. 소련 대사관 직원 누구보다도 높은 빈도수였다.  - P64

어느 서독 외교관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그는 젊은 덴마크 남성과 대화를하게 되었다. 그 청년은 유난히 친절했으며, 상당히 취한 상태였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함께 술을 마시러 가자고 청했지만, 올레크는 집에 가야 한다면서 정중히 거절했다.
그 청년은 덴마크 정보국의 공작원이었고, 그날의 대화는 올레크를 동성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 P64

PET는 이 계책이 왜 실패했는지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그가 고도의 훈련을 받은 KGB 요원이라서 그 유혹 시도를 알아차린 걸까? 아니면 그들이 내세운 <미인>이 그의 취향이 아니었나? 진실은 단순했다. 올레크가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것. 그는 상대가 수작을 걸고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 P65

소설과 달리 첩보 작전이 정확히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프라하의 봄이 끝난 뒤 올레크는 서방 정보국에 은근한 신호를 보냈지만 상대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P65

그는 다시 S부에 배치되었고, 옐레나는 외국 외교관에 대한 도청을 맡은 KGB 제12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녀가 배치된 곳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대사관과 외교관을 도청하는 팀이었는데, 그녀의 계급도 중위로 높아졌다. 결혼 생활은 이제 기껏해야 <일을 위한 관계> 정도였지만, 두 사람이 실제로 자기 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없었다. 아니, 함께 살고 있는 모스크바 동쪽의 우울한 아파트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가 아예 별로 없었다. - P66

1970년 봄, 영국의 젊은 정보 요원 제프리 거스콧은 얼마 전 캐나다에서 온 <인물 파일>을 뒤적이고 있었다. (중략). 하지만 겉과 속이그만큼 다른 사람도 없었다. 한 동료는 거스콧이 <소련 첩보계에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많은 피해를 입힌 인물일 것>이라고 말했다. - P67

1965년 거스콧은 막 개혁의 물결이 시작되던 체코슬로바키아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3년 동안 그는 프리드라는 암호명을 가진 스파이를 관리했는데, 프리드의 정체는 바로 체코 정보국 직원이었다. - P67

거스콧의 책상에 다니첵이라는 암호명으로 놓여 있는 파일은 스타니슬라프 카플란이라는 체코 정보국 하급 관리가 최근에 망명한일에 관한 것이었다.
카플란은 프라하의 봄 직후 불가리아로 휴가를 떠났다가 자취를감췄다. 그러고는 얼마 뒤 프랑스에 나타나 프랑스 정보국에 정식으로 망명 신청을 했다.  - P68

카플란의 파일에는그가 꼽은 사람 100여 명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체코슬로바키아인이었고 소련인은 다섯 명이었다. 그중 한 명이 유독눈에 띄었다.
카플란은 자신처럼 장거리 달리기를 즐기고 KGB에 들어가기로예정되어 있던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와의 우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올레크가 <분명한 정치적 환멸의 징후>를 나타냈다고 말했다. - P68

거스콧은 추적을 잘 피하고 유능하며 어쩌면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있고 한때 자유로운 사상을 품었던 이 KGB 요원이 서방에 다시나타난다면 접근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고 고르디옙스키 파일에적어 두었다. 이렇게 <흥미로운 인물>로 <점> 찍힌 올레크에게는 선빔이라는 암호명이 부여되었다. - P69

1971년 9월 24일, 영국 정부는 소련 정보 요원 105명을 추방했다.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스파이 추방이었다. 풋Foot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이 대규모 추방의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이미 얼마 전부터였다.  - P69

KGB의 첩보 활동이 점점 뻔뻔스러워졌기 때문에 영국 보안국, 즉 MI5는 그들을 치고 싶어 안달하고 있었다. 방아쇠가 된 것은 소련 편물업계 대표로 행세하던 KGB 요원 올레크 리알린의 망명이었다. - P70

소련은 풋 작전으로 완전히 기습을 당한 꼴이었다. 제1주요부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 P70

어느 날 밤 올레크는 「BBC 월드 서비스」 방송을 몰래 듣다가, 풋작전의 여파로 덴마크가 그의 옛 동료 세 명, 즉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한 KGB 요원들을 추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 오전 그는 덴마크과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이 소식을 언급했다. 5분 뒤 그의 전화기가 울리더니, 수화기 속에서 귀가 멀 것 같은 호통이 쏟아져 나왔다. 「고르디옙스키 동무, 덴마크에서 추방이 있었다는 헛소문을 계속 KGB 내부에 퍼뜨리며 돌아다닌다면 처벌이 있을 것이오!」 야쿠신의 목소리였다. - P71

(전략).
이렇게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올레크를 KGB로 이끈 형 바실리 고르디옙스키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올레크의 승진이 빨라졌다.
바실리는 오래전부터 술을 심하게 마시는 편이었다. 동남아시아에 갔을 때 간염에 걸려 의사에게서 두 번 다시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나, 그는 계속 술을 마셨고 서른아홉이라는나이로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KGB는 그에게 완전한 군인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 P72

 소련은 덴마크에 비자를 신청하면서, 고르디옙스키가 소련 대사관 2등 서기관으로 코펜하겐에 다시 갈 것이라고 알렸다. 하지만 그의 실제 직책은 과거 미하일 류비모프가 맡고 있던자리, 즉 KGB 제1주요부의 정치 정보 담당관이었다.
올레크가 KGB 요원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으므로, 덴마크가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올레크의 귀환을 허락한 뒤 면밀히 지켜봐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런던에도 이사실을 알렸다. - P73

참조

미하일 류비모프의 회고록은 『불한당 레지덴트의 기록Notes of a Ne‘er-Do-WellRezident (1995)과 『내가 사랑하고 싫어한 스파이들Spies I love and Hate」(1997)에 수록되어 있다. 바실리 고르디옙스키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한 활동에 대해서는크리스토퍼 M. 앤드루와 바실리 미트로킨이 쓴 『미트로킨 아카이브 The MitrokhinArchive (1999)를 참고하라. - P73

3
선빔


덴마크 코펜하겐의 MI6 지부장인 리처드 브롬헤드는 자신의 정체가 알려지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 P75

키가 크고, 미남이고, 옷차림 또한 흠잡을 데가 없고, 언제나 농담을 던지며 술 한 잔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 브롬헤드는 코펜하겐 외교관들의 파티에서 금방 친숙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은밀한 임무를 <해찰>이라고 표현했다.
리처드 브롬헤드는 실제보다 훨씬 더 멍청하게 보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영국인 중 하나였다. 사실 그는 대단한 첩보원이었다. - P76

브롬헤드가 <골리기 작전>이라고 명명한 이 일에 브룬은 휘하의 가장 유능한 부하 직원인 옌스 에릭센과 빈터 클라우센을 배치했다. <옌스는 키가 작지만 콧수염을 길게 길렀고, 빈터는 덩치가 대략 커다란 문과 맞먹을 만큼 거대했다. 나는 그 둘을아스테릭스와 오벨릭스³라고 불렀다. 우리는 무서울 정도로 죽이잘 맞았다.> - P77

그들이 고른 사냥감 중에 KGB 요원이라는 사실이 이미 알려진브라초프가 있었다. 클라우센은 그를 미행하다가 그가 코펜하겐의특정한 백화점에 들어가기만 하면 장내 방송 시스템을 이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KGB사의 브라초프 씨는 지금 안내 데스크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된 뒤, KGB는 브라초프를 모스크바로 돌려보냈다. - P77

올레크의 비자가 발급되었다. MI6는 브롬헤드에게 새로 발령받은 이 사람에게 접근해 가까이 지내다가 적절한 때가 오면 의사를타진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PET는 상황을 계속 알려 달라면서도, 덴마크에서 MI6가 이 일을 맡아야 한다는 데에 동의했다. - P78

정치 정보 담당관은 불법 스파이와는 상관이 없고, 적극적인 비밀정보 수집과 서방 사회를 뒤엎으려는 시도가 주요 임무였다. 이말은 현실적으로 첩자, 접촉자, 정보원을 물색하고 포섭해서 관리하는 일을 뜻했다. - P78

 다른 서방 국가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덴마크 국민 중에도 소련의 지시를 기꺼이 따를 만큼 헌신적인 공산주의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그 외에는 돈을 받고기꺼이 정보를 넘기는 사람(돈은 첩보 세계의 윤활유다), 또는 돈이 아닌 다른 방식의 설득이나 강압이나 유도에 취약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 P78

올레크는 덴마크 생활과 문화에 쉽사리 다시 섞여 들어갔다. 미하일 류비모프는 모스크바로 돌아가 영국-스칸디나비아과의 고위직을 맡았고, 올레크는 그의 후임이었다. 그가 새로이 맡게 된 이 첩보 활동에는 짜릿한 재미가 있었지만 좌절도 있었다 - P79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인 게르트 페테르센은 덴마크사회주의 인민당의 지도자였으며, 나중에는 유럽 의회 의원이 되었다. KGB가 제우스라는 암호명을 부여하고 <비밀 접촉자>로 분류한페테르센은 덴마크 외교 정책 위원회에서 뽑아 온 군사 기밀을 소련에 넘겼다. 그는 아는 것이 많고 주량도 아주 셌다.  - P79

직업적인 면에서 올레크는 KGB의 사다리를 타고 매끈하게 위로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말이 아니었다. 모스크바에서 2년을 보내면서 공산정권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이 더욱 심해졌고, 덴마크로 돌아온 뒤에는 소련의 속물근성, 부패, 위선에 대한 절망이 깊어졌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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