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는 남편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전혀 몰랐다. <스파이는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과 가장 소중한 사람까지도 속여야 한다.>고르디옙스키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하지만 엘레나는 이제 그에게 가까운 사람도, 소중한 사람도 아니었다. 사실 그는 충성스러운KGB 요원인 그녀가 진실을 알아차린다면 그를 밀고할 것이라고확신했다. - P117
이중생활의 압박과 그로 인한 위험 속에서도 고르디옙스키는 홀로 고독하게 소련의 억압에 맞서며 만족했다. 그러던 중 그에게 사랑이 찾아왔다. 레일라 알리예바는 코펜하겐의 세계 보건 기구에서 일하는 타이피스트였다. - P117
잔소리가 심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엘레나를 겪은 고르디옙스키에게 성격이 온화하고 소박하며 다정한 레일라는 기운을 북돋우는약과 같았다. 그는 대인 관계에서 자신과 상대방의 언행을 끊임없이 평가하며 계산하는 데 익숙했다. 반면 레일라는 자연스럽고 외향적이며 솔직했다. - P119
어느 겨울날 저녁 덴마크의 젊은 정보 요원이 발레룹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다가 외교관 번호판을 단 자동차가 외교가와는 거리가먼 골목에 주차된 것을 보았다. 그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정보 요원으로 훈련받았고 열정도 갖고 있던 그는 자동차를 자세히 살핀 끝에 그것이 소련 대사관 차량임을 알아차렸다. 소련 외교관이 주말저녁 7시에 이 근교에서 뭘 하는 거지? - P120
다음 날 아침 덴마크 방첩 담당자인 예른 브룬의 책상에 보고서한 장이 올라왔다. KGB 요원으로 의심되는 소련 외교관이 발레롭의 아파트에 들른 것이 확인되었으며, 그가 미지의 인물과 독일어로 짐작되는 미지의 언어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내용이었다. 그 보고서의 결론은 이러했다.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 P121
덴마크에서 활동하는 소련 간첩과 정보원 네트워크는 한심할정도로 작다는 것이 그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우선 술을 좋아하는정치인 게르트 페테르센과 덴마크 이민국에서 일하며 가끔 사소한 정보를 넘겨주는 뚱보 경찰관이 있고, 덴마크 전역에 자리를 잡고제3차 세계 대전을 기다리는 불법 스파이가 여러 명 있었다. - P122
군보르 갈퉁 호비크는 노르웨이 외무부의 평범한 직원이자 전직간호사로, 정년퇴직이 가까운 사무원 겸 통역이었다. 그녀는 몸집이 자그마하고, 성격이 다정했으며, 다소 수줍음을 타는 편이었다. 하지만 30년 경력의 스파이로 고액의 보수를 받는 베테랑이기도 했다. <국제적 이해를 강화>한 공로로 소련 우정 훈장을 비밀리에 받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녀가 국제적 이해를 강화한 방법은 바로기밀문서 수천 건을 KGB에 넘기는 것이었다. 호비크의 이야기는 KGB가 사람을 어떻게 조종하는지를 보여 주는 고전적 사례였다. - P122
노르웨이는 고르디옙스키의 활동 영역이 아니었지만, KGB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하나로 뭉뚱그려서 생각했으므로 각국의 지부들은 서로의 활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1974년 바딤 체르니라는 KGB 요원이 덴마크에 새로 파견되었다. - P124
이 노르웨이 사례는 고르디옙스키 같은 첩자를 관리할 때의 핵심적인 과제이자 일반적인 첩보 활동의 난제를 잘 보여 주었다. 정보원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고급 정보를 이용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말한다. 적진 깊숙한 곳에서 활동하는 간첩이 우리 진영의 간첩들 정체를 밝혀 줄 수는 있지만, 만약 우리가 그 간첩들을 모두 체포해서 무력화하면 적이 자기편에 간첩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 P125
PET 내에는 고르디옙스키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훨씬 더 적었다. 그가 제공하는 정보는 필요할 때만 간간이 동맹에 전달되었으며, 그나마도 원래 정보원을 가리기 위해 중간에 다른 사람을 내세웠다. 고르디옙스키는 비밀 정보를 한 움큼씩 대량으로 넘겼지만, MI6는 어디에도 그의 지문이 남지 않게 주의했다. - P126
CIA는 선빔과 관련된 정보를 받지 못했다. 영국과 미국의 이른바특별한 관계는 첩보 영역에서 특히 따스했으나, 양국 모두 <반드시필요한 정보만 전달한다>는 원칙을 적용했다. - P126
정보기관들은 직원이 한곳에 무한정 오래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칫 너무 편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보원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자주 교체된다. 그들이 객관성을 잃어버리거나, 어느 한 정보원과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것을 막기위해서다. - P126
고르디옙스키는 예전과 달리 외교적인 파티에 잘 나가지 않았고, 류비모프를 제외하면 KGB 요원들과 거의 어울리지 않았다. 반체제 문학에도 몰두했다. 그의 집에는 우리 나라에서 금지된 일부 작가들의 책이 있었다. 상급자로서 나는 그에게 그 책들을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치워 두라고 조언했다. 두 사람은 부부 동반으로 식사할 때가 많았는데, 그런 자리에서 고르디옙스키는 농담을 던지고, 다소 과하게 술을 마시면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척 과시하곤 했다. - P127
고르디옙스키와 거스콧은 보자마자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 거스콧은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두 사람은 처음부터 친한 사이처럼 서로를 대했다. 둘 다 장거리 달리기를 즐긴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호킨스와 달리 거스콧이 올레크를 정보원으로만 보지 않고 인간으로서 더 존중해 주는 듯하다는 점이었다. - P128
MI6는 소형 카메라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고르디옙스키가 그것으로 레지덴투라 내부에서 문서들을 찍어 현상하지 않은 필름을 넘겨주면 어떻겠느냐고, 고르디옙스키는 거절했다. 들킬 위험이 너무컸다. - P129
모스크바에서는 둘둘 말린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메시지와 지시를 보냈다. 소련 외교 행낭으로 이 마이크로필름이 도착하면, 레지덴트 또는 암호 담당 직원(이쪽이 더 자주 이 일을 맡았다)이 필름을 잘라 관련 부서들, 즉 여러 <라인>에 나눠 주었다. 불법 스파이 담당은 라인 N, 정치는 PR 라인, 방첩은 KR 라인, 기술은 라인 X 등이었다. - P129
거스콧은 MI6 기술부에 요청을 전달했다. 기술부가 위치한 버킹엄셔의 시골 저택 핸슬로프 파크는 나무가 무성한 정원과 철조망과경비초소에 에워싸여 있었다. 핸슬로프는 영국 정보기관의 출장소중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경비가 가장 삼엄한 곳 중 하나였다(지금도 그렇다). 전쟁 중에 핸슬로프의 연구원들은 보안 무전기, 보안 잉크, 마늘 맛 초콜릿 등 스파이들을 위한 기상천외의 기술 제품들을만들어 냈다. - P129
한번은 거스콧이 도시 북쪽의 기차역을 접선 장소로 정했다. 그는 역 안의 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고르디옙스키가 나타나 근처 공중전화 부스 안의 선반 아래에 마이크로필름을 두고가기를 기다렸다. 고르디옙스키는 예정대로 나타나 필름을 두고 사라졌다. 하지만 거스콧이 공중전화 부스에 다다르기 전에 어떤 남자가 그 안으로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긴 통화였다. - P132
고르디옙스키가 협조 조건으로 내걸었던 사항들은 점차 희석되다가 아예 증발해 버렸다. 그는 자신의 말이 녹음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KGB 요원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던 원칙도 버리고, 모든 요원, 모든 불법 스파이, 모든 정보원의 신원을 알려 주었다. 나중에는 돈도 받기로 했다. 거스콧은 영국이 감사의 뜻으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런던의 은행에 <때때로 돈을 예치할 것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 P133
MI6의 설립자인 맨스필드 커밍이 해군의 습관을 가져와서 처음 채택한 서명 방식이었다. 해군의 선장들은 초록색 잉크로 글을 쓴다. MI6의 역대 최고 책임자들은 모두 이 전통을 따랐다. 거스콧은 올드필드가 고르디옙스키에게 보내는 감사와 축하의 영어 편지를 두꺼운 크림색 종이에 타자로 쳤다. 그리고 올드필드가 거기에 초록색 잉크로 화려하게 서명을 남겼다. - P134
군보르 호비크는 KGB 담당관인 알렉산드르 프린치팔로프와1977년 1월 27일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녀가 약속 장소인 오슬로 근교의 어두운 골목에 도착하자 프린치팔로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노르웨이 방첩부 요원 세 명 또한 기다리고 있다가 두 사람을 덮쳤다. 프린치팔로프는 <격렬한 몸싸움> 끝에 결국제압되었고, 그의 주머니에서 약 2천 크로네가 발견되었다. 그레타에게 줄 돈이었다. 호비크는 저항하지 않았다. - P135
이 사건의 외교적 여파로 KGB 레지덴트인 겐나디 티토프가 오슬로에서 추방되었다. 그리고 노르웨이에서 중요한 간첩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덴마크의 KGB 지부에도 신속히 전달되어, 요원들은 이런저런 추측을 분분히 내놓았다. - P135
옐레나 고르디옙스키도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이 뭔가를꾸미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하룻밤 외박을 하거나 주말을 아예 다른 곳에서 보내고 오는 일이 늘어났지만, 그는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설명만 내놓을 뿐이었다. 엘레나는 남편이 틀림없이 바람을 피운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화를 내며 비난하자 그는 그런 것이아니라고 말했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둘 사이에 <불쾌하고 소란스러운 일>이 연달아 벌어졌다 - P136
만약 두 사람이 헤어진다면 둘 다 곧바로 다음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올라야 할 터였다. 두 사람은 KGB의 규칙에 순응하기 위해 결혼했으니, 역시 KGB 규칙에 따라 하다못해 명목상의 결혼 생활만이라도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이미 캄캄했다. - P136
결국 그는 세계 보건 기구에서 일하는 젊은 사무원과 사귀고 있으며,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미하일 류비모프에게 털어놓았다. 그의 친구이자 상사인 류비모프는 그에게 공감하면서도 현실적이었다. 직접적인 경험으로 류비모프는 KGB의 청교도들에게 이사실이 알려진다면 고르디옙스키의 장래가 불투명해질 것을 알았다. 류비모프 본인이 결혼 생활에 실패한 뒤 강등되어 여러 해 동안 무시당하지 않았던가. - P138
참조
호비크와 트레홀트의 사례는 『미트로킨 아카이브』에 묘사되어 있다. 코펜하겐 레지덴투라의 활동에 대해서는 류비모프의 『불한당 레지덴트의 기록』과 『내가 사랑하고 싫어한 스파이들』을 참고하라. - P140
5
비닐봉지와 마스 초코바
(전략). 그러나 이 호기심 많은 관찰자가 이런 사실들을모두 알아차릴 만큼 한참 동안 그 건물 근처에 어른거렸다가는 체포되었을 것이다. 센추리 하우스는 MI6의 본부이며, 런던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건물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건물. - P141
일부러 한없이 평범하게 만든 건물이라, 처음 오는 사람들은 누가 주소를 잘못 가르쳐 준 게 아닌가 하고 헷갈리기 일쑤였다. <우리 국에 스카우트돼서 1~2주쯤 이곳에서 일한 뒤에야 비로소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도 있었다.>¹ 한 전직 요원은 이렇게 썼다.
1 Anthony Cavendish, Inside Intelligence (London: Bloomsbury Publishing, 1987). - P142
몇 주 전 고르디옙스키는 피곤한 모습으로 안가에 도착했다. 뭔가 다른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닉, 내 안전에 대해 생각해 봐야겠어요. 처음 3년 동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곧 모스크바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혹시 내가 의심받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소련 탈출 계획을 짜줄 수 있습니까?」 내가 돌아갔다가 다시 나올 방법이 있을까요?」불안한 소문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KGB 내부에 첩자가 있다고모스크바 중앙이 의심한다는 소문. - P143
거스콧은 정신이 번쩍 드는 대답을 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어요. 당신이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100퍼센트 보장할 수 없습니다.」 고르디옙스키도 성공 가능성이 아주 낮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렇겠죠. 그건 분명합니다. 그냥 확률만 말해 주세요 만약의 경우를 위해서.」 소련은 사실상 거대한 교도소였다. - P144
바에만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의완고한 공산주의 통치하에서 정권의 의심증이 거의 스탈린 시대 수준으로 높아져, 모두를 모두와 싸우게 하는 스파이 국가가 만들어졌다. 전화는 도청되고, 편지도 당국이 미리 열어 보고, 국민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다른 사람을 고자질하는 일이 장려되었다. - P144
소련에 침투해서 첩자를 포섭하고 계속 연락을 유지하는 것은 극도로 힘든 일이었다. 철의 장막 뒤에서 포섭하거나 이쪽에서 침투시킨 소수의 공작원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 P145
가능한 탈출로 중 하나는 바다였다. 프라이스는 도망자가 위조신분증을 이용해 소련 항구를 떠나는 여객선이나 상선에 탑승할 수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러나 부두와 항구의 경비가 국경과 공항 못지않았고, 위조 신분증을 만드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 P145
민감한 물건을 국경 너머로 운반하는 데에는 외교 행낭을 이용할 수 있었다. 주로 서류가 운반되었지만, 약품과 무기 운반도 가능했고 어쩌면 사람을 옮기는 것도 가능할 수 있었다. 외교 행낭이라고 표시된 짐을 여는 것은 엄밀히 말해 빈 협약 위반이었다. 그래서 리비아의 테러리스트들이 이 방법으로 영국에 총을 밀반입했다. - P146
하지만 국제 외교의 전통 중에 어쩌면 고르디옙스키에게 유리하게 이용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오랜 관습에 따르면, 대사관 직원이 모는 외교관 번호판 차량은 국경을 넘을 때 일반적으로 수색받지 않는다. 외교적 면책 특권의 연장선인 셈인데, 그 덕분에 외교관들은 주재국의 법률에 따른 박해로부터 보호받으며 안정한 통행을 보장받는다. - P146
하지만 도망자를 자동차에 태우는 일 또한 어려운 문제였다. 영국대사관 영사관, 외교관 관저에는 경찰 제복을 입은 KGB 요원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소련인이 들어오려고 하면 이 경비원들이 그들을 불러 세워 수색하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 P147
MI6의 모스크바 지부장은 핀란드 국경 근처에서 도망자를 만나 차에 태우기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 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쇼핑하러 가는 것처럼 레닌그라드에서 차를 몰고 핀란드로 향했다. - P148
(전략), 널찍하게 D 자를 그리며 오른쪽으로 휘어진 도로가 고속 도로에 합류하기 전에 잠시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런던의 연립 주택한 채 크기만 한 커다란 바위가 이 차량 대피소의 입구를 표시했다. MI6 지부장은 자동차 창문을 통해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남쪽의모스크바로 계속 차를 몰았다. 만약 KGB가 그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면, 영국 외교관이 이런 외진 곳에서 왜 커다란 바위 사진을 찍었는지 틀림없이 궁금해했을 것이다. - P148
탈출 계획을 발동시키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고르디옙스키가 7시 30분에 세이프웨이 슈퍼마켓의 비닐봉지를 들고 빵집 앞에 서있는 것. 세이프웨이 비닐봉지에는 빨간색으로 S자가 크게 찍혀 있으므로, 모스크바의 칙칙한 풍경 속에서 금방 눈에 띌 수 있었다. - P149
이 탈출 계획에는 핌리코라는 암호명이 부여되었다. 정보기관 대부분이 그렇듯이 MI6에서도 암호명은 공식적으로 승인된 목록 중 아무 이름이나 임의로 선택해서 붙이는 것이 원칙이었다. 암호명 대부분은 실제로 존재하는 단어들이었는데, 그 암호명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것들로 신중히 선택되었다. 그러나 스파이들은 현실과 공명하거나 아주 미묘한, 또는 그리 미묘하지 않은 단서를 품은 단어를 선택하고 싶다는 유혹에 질 때가 많았다. - P151
<아주 흥미롭고 상상력이 풍부한 탈출 계획이었지만 너무 복잡했다. 신호 장소의 조건도 너무 상세하고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그 계획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이 계획을 일단 암기한뒤, 앞으로 이 기억을 떠올릴 일이 없기를 속으로 기원했다. 센추리하우스에도 핌리코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회의주의자들이 있었다. - P152
남편이 오래전부터 어떤 사무원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모두 알게 된 옐레나는 모스크바로 돌아간 뒤 이혼하는 데 동의했다. 레일라의 세계 보건 기구 근무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으므로, 그녀 역시 몇 달 뒤 소련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고르디옙스키는 최대한 빨리 재혼하고 싶었지만, 이혼이 자신의 경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 P153
「모스크바에서 지내는 동안 무엇을 할 생각입니까?」 거스콧이 그에게 물었다. 「소련 지도자들에 관해 가장 비밀스러운 정보, 가장 중요한 정보, 가장 본질적인 요소를 알아내고 싶습니다.」 고르디옙스키는 이렇게대답했다. 「체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고 싶고요. 중앙 위원회가 KGB에도 비밀을 알려 주지 않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알아낼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최대한 알아낼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고르디옙스키가 시도한 반란의 핵심이었다. 자신이 증오하는 체제를더 손쉽게 무너뜨리기 위해 그 체제에 대해 최대한 많은 사실을 알아내는 것. - P154
KGB 내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첩자는 서방의 모든 정보기관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였다. 그러나 CIA의 리처드 헬름스 국장은 KGB에 첩자를 침투시키는 것이 <화성에 상주 스파이를 침투시키는 것만큼이나 가망 없는 일>⁵이라고 보았다. <소련 내부에 첩자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소련인은 거의 없었다.>⁶
5 Richard Helms, William Hood, A Look Over My Shoulder (London: RandomHouse, 2003); David E. Hoffman, The Billion Dollar Spy (New York: Doubleday, 2015)에서 재인용.
6 Robert M. Gates, From the Shadows (New York: Simon & Shuster, 1996); David E. Hoffman, The Billion Dollar Spyo - P155
하지만 MI6는 정반대의 결정을 내렸다. 고르디옙스키를 첩자로 관리하던 사람들은 첩보 활동의 역사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절제와 자기 부정을 보여 주며, 그에게 모스크바에서도 계속 연락하라든가 기밀을 계속 보내라고 부추기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고르디옙스키에게 일을 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가 모스크바로 돌아간 뒤 그에게 전혀 간섭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 P155
거스콧은 고르디옙스키에게 MI6가 모스크바에서 그와 연락하려하지 않을 것임을 알렸다. 은밀한 만남을 꾀하거나 정보를 가져가려는 시도는 전혀 없을 테지만, 고르디옙스키 쪽에서 연락할 필요가 생긴다면 연락할 수 있었다. MI6는 매달 셋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모스크바 중앙 시장 시계탑 아래로 요원을 한 명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 P156
이 스치는 접선은 그가 영국의 안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보 예를 들면 영국 정부 내에 소련 첩자가 있다는 정보 같은 것을찾아냈을 때에만 발동시킬 수 있었다. MI6는 이런 메시지에 답장을보낼 방법이 없었다. 탈출이 필요해지면, 고르디옙스키가 화요일 저녁 7시 30분에 세이프웨이 봉지를 들고 쿠투스키 대로의 그 빵집 앞에 서 있는 것으로 탈출 계획을 발동시킬 수 있었다. MI6는 매주 그 장소를 확인할 예정이었다. - P157
고르디옙스키와 거스콧은 악수를 했다. 그들은 20개월 동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수백 건의 비밀문서를 주고받았다. <그것은 진짜 우정, 진짜 호감이었다.> 거스콧은세월이 흐른 뒤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엄격하게 정해진 한계 안에서 성장한 이상한 우호 관계이기도 했다. 고르디옙스키는 닉 베너블스의 본명을 끝까지 몰랐다. - P159
이혼은 감정을 배제한 소련식 조치로 신속히 처리되었다. 판사는옐레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남편이 이혼을 원하는 건 남편은아이를 원하는데 당신은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맞습니까?」 옐레나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천만에요! 남편은 예쁜 여자랑 사랑에 빠졌을 뿐이에요.」 - P160
옐레나는 대위로 승진해, 외국 대사관들을 도청하는 과거의 일을다시 하고 있었다. 이혼 소송에서 그녀는 피해를 당한 쪽이었으므로, 그녀의 KGB 경력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영원히 고르디옙스키를 용서하지 않았고, 재혼도 하지 않았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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