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전에 없이 과대하고 관대한 건물이다. 매년약 450만 명의 사람이 대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 행렬에 합류하고, 여기에 그저 바깥에서 건물을 바라만 보고자 오는 방문객2천만 명이 더해진다. 대중적인 문화 오락인 것이다. - P32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와 까사밀라가 독창적이고 유일하다면, 이 구역은 2천 년에 걸쳐 지어진 수백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이곳의 건물 역시 대중적인 문화 오락 역할을 하며 수백만 명의 사람을 끌어들인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인간적인 장소다.

왜일까? - P33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면 건물을 보라는 말이 있다. 고딕 지구에서는 여러 세대에 걸친 카탈루냐인의 정체성이 수천 개의 표면에서 자신 있게 목소리를낸다. - P35

고딕 지구의 거리도 가우디의 건물도 내게는 모두 평범한 사람을위해 지어진 궁전이다. 둘 모두 인간성에 대한, 그러니까 인간의 이에 대한 진리처럼 끼친다. 돈 한 푼 내지않고 누구라도 향유할 수 있다. 친근하게 보는 이의 기분을 고양하고 언제나 최소한의 것 이상을 제공한다. - P36

고딕 지구와 가우디의 건물처럼, 이 지하철역들도 인간의 필요. 욕구·행위를 염두에 두고 지어졌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면서 제작자의 생애를 훌쩍 뛰어넘어 존속할 수 있으리라는 염원과 함께 만들어진 것이다. - P37

바르셀로나 고딕 지구에서 서쪽으로 10킬로미터 거리에 평범한 사람을 위한 궁전이 또 하나 자리하고 있다. 1975년 건축가 리카르도 보필 Ricardo Bofill의 설계로 지어진 월든 7 Walden 7은 까사 밀라같은 고급 아파트 건물이 아니라 국가 주도 하에 당시 통상보다 적은 비용으로 지어진 국가 보조 공동주택 단지다. - P38

보통의 저예산‘ 주거프로젝트는 으레 작고 옹색한 출입구를 가지기 마련이지만, 월든7은 그렇지 않다. 외려 장중하고 장대하게, 복수의 그림자와 반짝이는 푸른색 타일로 극적인 분위기를 담아낸다. - P40

이렇게 생긴 건물은 나에게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는데, 왜 이런 건물이 더 많지 않은 걸까? - P40

.. 2주 후, 나는 캐나다 밴쿠버로 여행을 떠나 해안가 호텔에 자리를잡는다. 길 건너편 넓은 광장은 밴쿠버항의 가장자리까지 펼쳐져있는데, 대체로 평평하고 사실상 아무도 없다. 반복은 종종 눈에 띄는 반면 복잡성은 찾아볼 수 없다. 공간의 가장자리를 따라 기울어진 가로등 몇 개와 캑터스 클럽 카페 Cactus Club Cafe의 노란 차양이 있다. - P41

얼굴 없는 고층 건물 사이에서 흥미로운 지붕 하나를 발견한다. 지붕이 덮고 있는 건물은 갈색 벽돌과 회색 석재로 지어졌다.  - P42

어느새 흥미로운 지붕들이 한데 모인 그 건물의 건너편에 와 있다. 건물의 이름은 마린 빌딩 Marine Building 이다. 자연스레 건물의1층을 흘깃 살피고는 뒤로 기대어 건물을 올려본다. 높이를 빠르게 타고 올라 꼭대기에 다다른 시선이 또 한 번 멈춰 지붕의 디테일을 음미한다. - P43

마린 빌딩의 출입구도 월든 7처럼 거주자와 방문객에게 특별한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한 쌍의 넓은 회전문은 금으로장식되어 있고, 떠오르는 태양이 돛을 활짝 편 목선 위로 찬란한 광선을 뿜어낸다. 그 중심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으며, 태양의 꼭대기에는 여섯 마리의 거대한 캐나다기러기가 날고 있다.  - P44

마린 빌딩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사치스러운 손길의 실제적기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건축가 존 Y. 맥카터 John Y. McCarter는 ‘무언가 매력적인 것‘을 만들고 싶었다고 변호한다. - P46

마린 빌딩은 점진적인 감정의 고조를 촉발한다. 즐거움을 준다. 관대한 마음을 가졌다. 모험과 발견과 바다의 경이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 주변 세계가 사실은 흥미롭고 생생하게살아 있음을 상기시킨다. - P47

내 오른편에 피너클 호텔 하버프런트Pinnacle Hotel Harbourfront가 있다. 호텔은 장대할지언정 다양한 층위로 이루어진 마린 빌딩 같지 않고, 바르셀로나 고딕 지구의 높고 좁은 구조물과도 다르다. 마치 가로로 눕혀진 마천루처럼 여봐란 듯이 수평적인 느낌을 준다. - P48

 피너클 호텔 하버프런트 앞을 지나칠때면 대개 대형 유리판이나 플라스틱 간판이 보인다. 건물의 거대한 창문은 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진다. - P48

표면을 가득 메운 흥미로운 요철들이 특별한 방식으로 세월의 흔적과 때를 숨길 수 있게 하는 바르셀로나의 건물들과 달리, 아무런 장식도 없는 호텔의 표면은 빈 캔버스가 되어 수십 년간 쏟아지며 얼룩을 남긴 빗물을 강조한다. - P50

한때 존 Y. 맥카터가 얘기했던 ‘분위기‘는 어디에 있는거지? 즐거움은 어디에 있으며? 이야기는 어디에 있고? 찬미는 어디에 있을까? 관대함은? 배려라는 감각은 어디에 있지? 인간적인 손길은어디에 있는 걸까? - P51

매일 수천 명의 사람이 지나다니는 세계적인 도시의 중심가라는 사실은 아무래도 좋은 것 같다. 바르셀로나와 밴쿠버 다른 지역에서는 관대함을 경험했고, 여기서는 이기주의를 맞닥뜨린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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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ken windows
인식의 힘이 비즈니스를 어떻게 움직일까?


5년간 매일 들른 단골 커피전문점에서 당신은 어느 날 문득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을 보고 왜 음식의 위생 상태를 의심하게 되는 것일까? 마사 스튜어트는 부당 내부거래 혐의 때문이 아니라 그 논란을 무마시키는 과정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녀는 왜 위법 행위까지 하며 논란을 무마시키려 했을까? 정치인들은 그들의 불법적이고 비양심적인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런 혐의를 무마하려다 지지자들을 잃고 만다. - P26

01

깨진 유리창의
숨겨진 힘을 찾아서

빨간불에 길 건너는 사람을 막을 수 없다면 강도도 막을 수 없다. 1982년 출판 당시, 깨진 유리창 이론은 기존의 형사행정학이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혁명적이고 독창적인 개념으로평가되었다 - P27

‘법‘과 ‘질서‘는 다르다. 법을 수호하려면 각자 법을 어기지 않고 살아가면 된다. 매우 간단하다. 그러나 도시와 국가와 기업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 이 같은규칙을 따라야 하며, 각각의 규칙이 똑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 P28

 줄리아니시장과 브래턴 경찰국장은 마음대로 차 유리를 닦고, 낙서를 하고, 무임승차를 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용납할 수 있는 것들과 용납하지 못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지하철에 낙서를 하거나 무임승차를 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뉴욕 시민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 P30

페인트칠이 벗겨진 식당은 음식도 맛이 없다

그렇다면 깨진 유리창 이론을 비즈니스 세계에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까?
비즈니스에서는 고객의 인식이야말로 기업의 성패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한 번의 실수, 한 명의 불친절한직원, 한 번의 불쾌한 경험 때문에 고객은 당신의 회사에 등을 돌린다. - P31

고객을 유인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긍정적 인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부정적 인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일 역시 중요하다. 깨진 유리창은 갈아 끼우는 것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 - P33

정치인은 왜 이미지 관리에 신경 쓰는가


 (전략).
비즈니스를 운영하면서 작은 부분까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힘들여 얻은 고객의 충성심을 놓치게 된다. - P34

‘살림의 여왕‘ 마사 스튜어트 Martha Stewart 의 경우를 보자.
그녀는 부당 내부거래, 사기, 공공신탁 조작 혐의를 받았지만 유죄 판결을 받지는 않았다. 정작 유죄 판결을 받은 부분은 혐의에 대한 논란을 무마시키려 했던 불법 행위였다. 왜 그녀는 혐의에 대한 논란을 무마시키려 했을까?  - P35

비즈니스에서 과연 깨진 유리창이란 무엇인가? 빛바랜 페인트처럼 물리적인 것들은 비교적 찾아내기 쉽다. 그러나 기업의 정책에 따르지 않거나 고객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현장 직원들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 P36

05

크리스피 크림보다 던킨도너츠에
열광하는 이유 혹은 그 반대


똑같은 제품에 다른 고객이 몰리는 이유


크리스피 크림 Krispy Kreme 도넛과 던킨도너츠Dunkin Donuts도넛의 맛을 구분할 수 있는가? 나는 그럴 수 없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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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누나 유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을 때 구사나기는 커피숍에서 『주간 트라이』 최신호를 읽고 있었다. ‘구아이회‘에 관한기사 제2탄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 P53

‘구아이회‘라고, 너, 들어봤어?"
구사나기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주간지를 내려다보았다.
"응, 알아. 요즘 여러 가지로 화제에 오르는 것 같던데."
자신이 그와 관련된 사건을 담당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누나 시어머니가 그 종교에 빠졌단 말이야?" - P54

"누나, 둘째를 원해?"
"아니야, 이제 와서 둘째는 무슨. 그런데 있잖아, 너 알아?
‘구아이회‘ 입회금이 자그마치 백만 엔이야. 할머니가 돈을어떻게 쓰건, 그거야 당신 자유지만, 속임수일 게 뻔하잖아."
흠, 하고 구사나기는 한숨을 쉬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설마 할머니를 설득하라는 말은 아니겠지?" - P53

구사나기는 유리에게 부탁받은 얘기를 늘어놓았다. 웃어넘길 줄 알았는데 유가와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실은 지난번에 자네한테 얘기를 들은 후로 내내 마음이찜찜했어. 우리 연구실에서도 ‘아이회‘가 화제에 오르더니학생들끼리도 갑론을박을 벌였거든. 그들을 지도하는 입장에서 무시할 수가 없더군. 그래서 지난주와 이번 주 『주간트라이』를 열심히 읽고 있던 참이야."
"뭐 좀 알아냈어?" - P56

(전략).
명함을 건네는 유가와에게 사토야마 나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다행이군요. 누추하지만 일단 앉으시죠. 커피라도 가져오겠습니다."
"아니에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어서 얘기를 듣고싶어요."
사토야마 나미가 필기도구와 녹음기를 꺼냈다. 유가와는난처한 표정으로 구사나기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 P57

"기사는 읽었습니다. 하지만 비유적인 표현이 많아서 참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더군요. 조금 더 객관적인 사실을 알고 싶습니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사토야마 나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 P58

구사나기가 말했다.
"염을 한 번만 받은 게 아닙니까?"
그러자 그녀가 구사나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보란 듯이턱을 쳐들었다.
"교단을 세상에 정확히 알린 데 대한 사례라면서 대사가저를 특별 회원으로 인정해 줬습니다. 그래서 입회금을 면제받고 신자가 되었죠." - P59

"기사에 따르면 무언가 따스한 것에 감싸인 듯한 느낌이었다고 했던데요."
유가와가 말했다.
"맞아요. 아주 잠깐이었지만, 체온이 확 올라가는 느낌을받았어요." - P60

구사나기가 유가와를 바라보았다.
"기공으로 그런 일이 가능해?"
"숙련된 기공사는 손을 향하기만 해도 그 부분이 따뜻해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일설에 따르면 손바닥에서 원적외선이 방출된다고도 하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대사는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도달했을 거라고 봐요."
"원적외선이라....
유가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사람을 창문 밖으로 떨어뜨릴 수 없어." - P61

유가와는 "불이라…………." 하고 중얼거리며 팔짱을 끼고는생각에 잠긴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저, 하고 사토야마 나미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유가와가갑자기 팔짱을 풀더니 구사나기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취조실에서 렌자키 씨에게 염을 받았을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고 했지?" - P61

"대사에게 그 일에 관해 들었어요. 염을 보내는 시늉만 했을 뿐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런 신성한 행위를 취조실 같은 곳에서 할 수는 없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그 의식은 이 방에서가 아니면 하지 않는다는말이군요."
유가와가 칠판에 그린 평면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정화의 방‘에서만 하는 거죠." - P62

"과학적으로 조사하는 것 말이에요. 우리 편집부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와서 교단에 부탁한 적이 있는데, 곤란하다고 했어요."
"왜죠?"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대사의 염은 상담자의 마음에 작용하는 거라서, 사람의 마음을 과학으로 읽을 수 없는 것처럼 그 힘 역시 측정할 수 있는 것이아니므로 측정하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대요. 게다가 외부인들이 들락거리면 제대로 송념이 되지 않는다고 했어요. 아까 제가 과학적으로 설명해 줄 사람을 찾는다고 말한 이유도직접적인 조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 P63

8

(전략).
그녀는 ‘구아이회‘ 본부에 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 옆에 유가와가 있다.
"소문은 들었지만, 위세가 대단한 것 같군요. 가구도 장식품도 죄다 최고급품이에요."
유가와가 실내를 둘러보며 태평스럽게 말했다. - P64

유가와가 "요코다입니다." 하며 명함을 건넸다. 실제로 편집장에게 받아 온 명함이긴 하지만 그 사용처를 편집장에게는 정확히 알려 주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들으면 노발대발할지도 모른다.
"저희 사토야마 씨가 신세를 많이 졌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이번 호도 매진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유가와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대단한 연기다. - P65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유가와가 나섰다.
"실은 요즘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아서 고민이에요. 몸이 무겁고, 머리도 하고요. 게다가 식욕 부진에 불면증까지 있지뭡니까. 그런데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 봤더니 딱히 나쁜 곳이없다는 거예요. 사토야마 씨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대사를 한번 만나보라고 권하더군요."
아하, 하고 마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의 염을 받고 싶다는 말씀이로군요?"
"안 되겠습니까?" - P66

과학적인 조사를 교단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유가와는 자신이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피험자가 되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설사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해도 물리학자가 체험하겠다고 나서면교단 측에서 달가워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러자 유가와는 놀랍게도 자신이 『주간 트라이』 편집장 행세를 하겠다고 했다. - P67

마지마가 미닫이문을 열고 그렇게 말하더니 유가와의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짐은 저희가 맡아 드리겠습니다."
나미가 움찔 놀라며 유가와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들고 있겠습니다."
유가와의 말에 마지마는 고개를 저었다. 미소를 띠고 있지만 눈빛이 날카로웠다.
"‘정화의 방‘에는 불필요한 물건을 들이지 않습니다. 그게규칙이니 모쪼록 양해해 주세요." - P68

가방을 맡긴 후 두 사람은 실내로 들어섰다. 한가운데에 방석이 놓여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간소한 방이었다.
창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저게 ‘구아이의 별‘인가요?"
유가와가 상좌 뒤 벽에 걸려 있는 마크를 보면서 물었다.
맞아요, 하고 나미가 대답했다.
"디자인이 깔끔하군요. 조그맣게 글자가 쓰여 있는데, 뭐라고 쓰여 있는지 좀 봐주겠어요?" - P69

앞쪽 문이 열리고 승복 차림의 렌자키가 들어왔다. 그는 나미에게 묵례한 후 유가와를 바라보며 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평소처럼 ‘구아이의 별‘에 예를 갖춘 뒤 단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때 나미는 단 앞쪽에 대학노트가 세워져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렌자키가 앉아 있는 자리 바로 밑이었다. 당연히 렌자키에게는 보이지 않을 터였다. - P70

유가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마음의 더러움을없애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군요. 오랜 세월에 걸쳐 더러움이 쌓인 터라서요. 저, 입회하겠다는 뜻은 확고합니까?"
"그건 아직요. 일단 체험하고 나서 결정할 생각입니다."
"그래요?"
렌자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의심하고 계시는군요." - P71

(전략).
"그래요? 그럼 다시 한번 해 보죠."
렌자키가 똑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그러자 유가와의 몸이 뒤로 밀려나는 것처럼 움직였다.
"어떠세요?"
이번에는 틀림없이 느꼈겠지, 라고 하듯이 렌자키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유가와는 이번에도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어요. 제가 원래 암시에 쉽게 걸려들지 않습니다." - P72

렌자키가 심각한 표정으로 양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은 채 유가와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유가와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는 그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뭔가 느낀 모양이군요."
렌자키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유가와는 두세 번 고개를 끄덕였다.
"느꼈습니다. 확실히요." - P73

"그러십시오. 자, 그럼."
렌자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괜찮으세요?"
나미가 유가와에게 물었다.
유가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단상으로 다가가 세워 놓았던 노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걸 펼쳐 보며 만족스럽게미소지었다. - P74

9


구사나기를 비롯한 경시청 수사관들이 후지오카와 함께
‘아이회‘ 본부를 압수수색한 것은 오전 9시경이었다. 도량예는 일반 신자도 있었는데 그들은 당혹스러워할 뿐 저항하지 않았다.
강력하게 반발한 쪽은 간부들로, 그들은 수사관이 위층으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엘리베이터를 정지시켰다. - P74

옆방에는 렌자키 시코, 본명 이시모토 가즈오와 아내인 사요코가 함께 있었다. 그들을 방에서 내보낸 후 벽에 붙어 있는 책장을 조사하던 구사나기 일행은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곳에서 금속 장식을 발견했고, 그걸 조작하자 책장이 옆으로 미끄러져 움직였다.
그 안쪽에 숨겨져 있던 것은 서랍장 정도 크기의 장치였다. - P75

10

실험이 있고 일주일 후, 구사나기가 유가와의 연구실을 찾았다. 재차 감사 인사를 하려는 것이었다.
"자네 덕분에 윗사람들이 싱글벙글이야. 고맙네." - P80

구사나기가콧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대로야. 아쉽지만, 나카가미 건으로는 상해치사가고작일 거야. 하지만 놈들의 죄는 그뿐이 아니라네. 명백히 사기죄에 해당하거든. 그래서 수사 2과 녀석들이 아주 신났어. 우리 1과 덕분에 말이야." - P81

"그럼 그자들은 무죄일 수도 있겠군. 주모자는 누구야, 역시 교조인가?"
구사나기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수족일 뿐이야. 이용당했다고 할까. 주모자는교조의 아내 사요코였어. 애초에 그 여자가 원흉이야." - P82

사요코는 전에 다른 남자와 결혼한 적이 있었다. (중략).
그러나 사요코는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재산을 노리고결혼했을 뿐이다. 실제로 결혼 당시에는 공장의 경영 상태가좋았다.
그런데 장기화한 불황의 여파로 상황이 서서히 나빠졌고가사에 시달리며 돈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생활에 염증을느낀 사요코는 마침내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 P83

(전략).
하지만 사요코의 남편이 남긴 취급 설명서를 읽어 본 마지마는 "이건 팔릴 만한 물건이 아니야."라며 고개를 저었다.
왜냐고 묻자 산업 기기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작용 기계도 아니고 계측 기기도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건강기구랄까." - P84

그래서 새로 끌어들인 사람이 역시 도박 멤버로 알게 된 모리야였다. 모리야는 신비주의를 내세워 돈을 번 경험이 있었다. 종교 법인을 설립하는 루트도 훤히 꿰고 있었다. 셋은 사요코를 중심으로 면밀히 계획을 세웠고 마침내 종교 단체를 세웠다. (중략).
그때 알게 된 사람이 이시모토 가즈오다. 그는 기공사 간판을 내걸고 병을 치료하고 있었다. 효험이 좋다는 평판이 있는 반면 치료 효과가 전혀 없다는 소문도 많았다.
바로 이 남자야, 처음 이시모토를 봤을 때 사요코는 그렇게생각했다. 생김새도 나쁘지 않은 데다 지성미마저 살짝 풍겼다. 퍼포먼스가 뛰어나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도취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 P85

이렇게 해서 신흥 교단 ‘구아이회‘를 발족했다. 구아이라는 이름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괴로울 고(苦)와 사랑 애자를 붙여 소리 나는 대로 쓴 것에 불과했다. 교조는 이시모토였지만 교단을 조직하는 일은 사요코가 도맡았다 - P86

그런데 순조롭게 신자를 늘려 가던 교단이 최근 들어 정체기를 맞았다. 입소문만으로 사람을 모으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러던 차에 신자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몇몇 간부가 교단의 자산을 횡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몇몇 간부란 마지마와 모리야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다. - P87

그러나 나카가미를 죽일 작정은 아니었다. 그가 뛰어내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 사요코와 마지마 등의 주장이었다.

"그들의 주장이 부자연스럽기는 하지만, 그 주장을 뒤집기도어려워."
구사나기가 말했다. - P88

"흐음, 지금까지 들은 바로는 단순한 배후 인물로 만족할만한 여자가 아닌 것 같은데."
"본인은 스스로를 배후 인물이라고 여기지 않았어. 프로듀서라고 여겼지."
그 말을 하면서 구사나기는 새삼 사요코의 얼굴을 머릿속에떠올렸다.
재미있었어요, 희대의 악녀는 얄미울 정도로 태연스럽게말했다. - P89

"그자는 믿고 있었어. 자신의 힘으로 신자들을 구원해 왔다고 말이야. 그래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자수할 의사를 밝혔던 모양이야. 자신이 죽였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사요코 일당은 그의 그런 믿음을 이용하기로 했지. 교조가 자수하면 선전 효과가 한층 높아질 거라고 생각한 거야. 어차피 유죄 판결이 내려지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했으니까. 간수 말로는 이시모토가 구치소에 있는 내내 명상을 하더래. 그 모습이 연기로 보이지는 않았다는군."
구사나기의 얘기를 듣고 난 유가와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 올렸다. - P91

구사나기가 물었다. 유가와는 티켓 앞면을 구사나기 쪽으로 돌렸다.
"전국 점 페스티벌이래."
"점?"
(중략).
"어유, 답답하긴・・・・・・ 미안해. 그냥 버리게."
"버리긴 왜 버려? 잘 맞힌다잖아. 이거 흥미진진한걸. 고맙다고 전해 줘."
유가와는 티켓을 흰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P92

4장

휘다


1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10월 들어서는 날씨가 영 신통치 않다. 이게 가을장마라는 건가, 하고 남자가 중얼거렸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휴대 전화가 울렸다. 남자는쭛, 혀를 차고서 손으로 더듬거려 전화기를 찾아 쥐었다. - P265

"언제까지 있을 건데?"
아내는 음, 하며 잠시 생각하다가 "내일 돌아올 예정이긴 하지만 어쩌면 하루 더 묵을지도 몰라. 장례식 뒷정리도 거들어야 하니까."라고 대답했다.
"그걸 꼭 당신이 해야 해?"
지하주차장 입구가 보였다. 몇 번 온 적이 있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 - P266

통화를 마친 남자는 휴대 전화기를 조수석으로 휙 던졌다. 여자는 참 태평해서 좋겠어, 하고 생각했다. 남자는 머릿속에 어떻게 하면 한 푼이라도 더 벌까 하는 생각뿐인데. 오늘만 해도 원래는 쉬는 날이었는데 동료가 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자신이 불려 나왔다. 물론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특별수당을 외면할 만큼 형편이 넉넉지 않다. - P267

2

이 정도 크기라면 기계식 주차장에 들어가기 어렵겠는걸.
구사나기가 은색 차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유럽산 세단이다. 전체 길이가 5미터도 넘는 데다 차폭도 1미터 80센티미터 이상이다. 그렇다면 평면 주차 공간에 세울 수밖에 없는데, 안타깝게도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특권층의 권력을 이용했다. 이건가." - P268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그게......"
구사나기는 눈꼬리 옆을 긁적거렸다.
"아직은 뭐라고 말하기 힘듭니다. 단, 피해자가 이 장소에차를 세운 게 우연은 아닌 것 같아요. 다시 말해서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의 계획적인 범행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 좋아.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자네들은서로 돌아와 피해자의 남편이 곧 도착한다니까." - P269

"그야 그렇겠지. 다만 야나기사와 선수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아마 뛰지도 못했을걸."
"그래요?"
(중략).
"그럴 때 부인이 이런 일을 당했으니..... 타이밍이 너무나쁘네요" - P270

스포츠 센터 주차장에 여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는신고가 들어온 것은 오늘 오후 5시 30분경 신고한 사람은 주차장 경비원이다.
119에도 신고가 들어가 구급대원이 달려왔다. 여자는 운전석 문 옆에 쓰러져 있었다. 원피스 위에 얇은 코트를 걸쳤는데, 그 코트의 등쪽이 절반 가까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구급대원이 여자의 사망을 확인했을 무렵 관할 서 경찰관이 도착했다. - P271

이름은 야나기사와다에코 이 스포츠 센터의 VIP 회원이었다. 이날 방문한 목적은 피부 관리를 받는 것으로, 사전에 예약되어 있었다. 그럴 경우 지하 주차장 특별 구역에 주차하게 한다는 것이 피부 관리실 담당자의 설명이다.
스포츠 센터 데이터베이스에 야나기사와 다에코의 개인정보가 일부 들어 있었다. 그녀는 가족 회원이고, 남편이 프로 야구팀 도쿄 엔젤스의 야나기사와 다다마사 선수라는 사실도 그 정보에 의해 밝혀졌다. - P272

"그 피부관리실 말인데요, 부인이 그곳에 다닌다는 사실을 아는사람이 많습니까?"
글쎄요, 하면서 야나기사와가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무한테도 말한 기억이 없지만그 사람은 적어도 친구들한테는 말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 P273

"자동차 조수석에 있던 물건입니다. 백화점 쇼핑백에 담겨있었어요."
야나기사와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처음 봅니다."
"누군가에게 선물하려고 한 게 아닐까 싶은데, 그런 얘기를 부인께 들은 적은요?"
"없습니다." - P274

차가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야나기사와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었다. ‘빈소‘라든가 ‘장례식‘ 등등의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통화 도중 야나기사와가 저, 하고 말을 건넸다.
"시신을 언제쯤 돌려보내 주실 거죠?"
구사나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일러야 내일 저녁 무렵일 겁니다. 부검을 해야 하니까요."라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 P275

3

범인은 사건 발생 닷새 만에 체포되었다. 27세 남자로, 다니던 회사에서 며칠 전 해고당했다고 한다. 회사 비품을 멋대로 가져다가 인터넷에서 판매한 사실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어떻게 하면 돈을 마련할 수 있을까 궁리한 끝에 주차 중인 차량을 털기로 한 그는 전에 경비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 고급 스포츠 센터 주차장을 떠올렸다. - P276

남자는 옆에 있던 차 뒤에 몸을 숨기고 외제 차가 후진해서주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차에 탄 사람은 여자 혼자였다.
차림새가 고급스럽다는건 밖에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유리창을 깰 필요가없지 않은가. 차에서 내리는 여자를 덮쳐서 기절시키면 그만이다. 지갑을 지녔을 테니 전당포에 갈 필요도 없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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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음모주의를 약화하는 것으로 보이며,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사람의 42퍼센트는 음모론적 성향을 가지는 반면 대학원 학위를 가진 사람은 22퍼센트에 머문다.²⁹ 그럼에도 석사나 박사학위를 가진 미국인 5명 중 1명 이상은 음모를 믿는다는 것은 여기서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 P68

329 Uscinski and Parent, American Conspiracy Theories, 83.

통제력 상실과 환상 패턴 감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심리학자 제니퍼 휘트슨Jennifer Whitson과 애덤 갤린스키 Adam Galinsky는 사람들이 어떻게 무작위성을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지, 그대신에 어떻게 자신이 지각하는 패턴에 행위자를 귀속하는지 탐구했다.³² - P69

32 Jennifer A. Whitson and Adam D. Galinsky, "Lacking Control Increases Illusory PatternPerception," Science 322, no. 5898 (October 1, 2008), 115-117. - P367

두 번째 실험에서 휘트슨과 갤린스키는 피험자에게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었거나 통제할 수 없었던 경험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했다. 그런 다음 피험자는 등장인물이 자신의 아이디어가 통과될지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리기 전에 발을 동동 구르는 것 같은, 연관성 없고 미신적인 행동으로 성공 또는 실패가 결정되는 시나리오를 읽었다. - P70

‘환상 패턴 지각(내가 패턴이라고 부르는 것)‘을 ‘일련의 무작위또는 무관한 자극들 사이에서 일관되고 의미 있는 상호 관계를 식별하는 것(거짓 상관관계를 인식하고, 상상의 인물을 보고, 미신적 의식을형성하고, 음모 믿음을 받아들이는 경향)‘으로 정의할 경우, 휘트슨과갤린스키의 다음과 같은 논제는 입증된다. "개인이 객관적으로 통제감을 얻을 수 없을 때는 지각적으로 통제감을 얻으려고 노력한다."³⁵ - P71

35 Whitson and Galinsky, "Lacking Control." - P367

환상의 상관관계와 환상 패턴 감지라는 더 넓은 문제에 관해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마지막 실험에서 휘트슨과 갤린스키는 한 그룹의 피험자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숙고하고 긍정하도록 요청하여 통제감을 부여했는데 이는 학습된 무력감, 부조화, 기타 혐오스러운 심리 상태를 줄인다고 입증된 기법이다(다른 그룹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가치에 대해 숙고하게 했고 통제 그룹은 아무것도 긍정하지 않게 했다). - P72

휘트슨과 갤린스키의 논문이 발표된 이후 불안과 통제력 상실이 음모론적 인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많은 논쟁이 이어졌다. 2020년 아나 스토야노프Ana Stojanov와 자민 할버슈타트Jamin Halberstadt의 통제력 상실과 음모 믿음에 대한 메타 분석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작은 효과는 있었지만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 P72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불안, 소외감, 거부감, 통제력 상실감이 음모주의의 요인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프린스턴대학교의 한 연구에 참여한 피험자들은 자신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쓴 다음, 다른 두 사람이 그 설명을 판단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 후 같은 소그룹에 속한 두 사람에게 글을 공유했다. 자신이 쓴 글이 거부당했다는 말을 들은 피험자는 음모와 관련된 시나리오를 더 믿는 경향이 있었다.⁴⁰ - P73

40 Daniel Sullivan, Mark J. Landau, and Zachary K. Rothschild, "An Existential Functionof Enemyship: Evidence That People Attribute Influence to Personal and PoliticalEnemies to Compensate for Threats to Control,"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Psychology 98, no. 3 (2010), 434-449. - P367

문화적 불안감이 음모론적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2018년미국인 3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가치가 약화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많은 주요 사건의 배후에는 소수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행동이 있다"와 같은 음모론적 진술에 동의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⁴² - P74

42 Jan-Willem van Prooijen, The Psychology of Conspiracy Theories (London: Routledge, 2018), - P367

2015년 네덜란드에서 수행된 한 연구에서 연구자는 피험자를 (1) 무력하고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는 그룹, (2)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는 그룹, (3)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대조군의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그런 다음 피험자에게 프로젝트 예산에서 돈을 훔치려는 시의회의 음모에 관한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무력하고 통제 불능하다고 느끼는 피험자는 음모론을 믿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⁴³ - P74

43 vanProoijen, Psychology of Conspiracy Theories, 54-55. - P367

음모론이 지닌 매력의 마지막 요소는 엔터테인먼트 가치에 있다. - P74

"무서운 영화나 추리 소설과 마찬가지로음모론은 일반적으로 미스터리, 의심되는 위험, 완전히 이해하지못하는 미지의 힘을 포함하는 극적인 서사를 포함한다"라고 얀-빌렘 반 프로이옌과 그의 동료들은 썼다.⁴⁵ "아울러 이러한 특징은 음모론에 대한 학습을 매혹적이고 감정적인 경험으로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음모론에는 잠재적인 오락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며 우리는 오락적 가치를 사람들이 특정 서사를 재미있고 흥분되며 눈을 사로잡는 것으로 평가하는 정도에 따라 정의한다." - P75

45 Jan-Willem van Prooijen, Joline Ligthart, Sabine Rosema, and Yang Xu, "TheEntertainment Value of Conspiracy Theories," British Journal of Psychology, July 14, 2021.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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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알을 섬긴 죄

Transgression


(전략). 문서를 스캔해 보관하듯 복사본을 만들어 머릿속에 넣었고, 스무 해 전의 모습과 비교했다. 여전히 돌처럼 견고한 인상이었다. 바위라기엔 이목구비가 갸름하고 조약돌이라기에는 날카로운 느낌이 강했다. 특유의 아우라 덕분인지 특색 없는 검은색 티셔츠와 면 반바지마저도 이채롭게 느껴졌다. - P57

"오랜만이다."
"으응."
반사적으로 대답한 우혁은 변성기가 지나도 한참이나 지난 목소리에 새삼스럽게 놀랐고, 자신이 더 이상 열다섯 살이 아니라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꼈다. 서른네 살짜리 보조강사의 존재가 이 극적인 재회를 누추한 것으로 전락시키고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 P58

오늘 낮에도 소년을 떠올리며 자위했다.
우혁은 그간의 방종을 고백해야 할지 고민했다. 긁어 부스럼일 가능성과 용서받을 가능성을 계량할 방법이 없었다. 감동적인 재회는 원래부터 글러먹었으니 이젠 자위가 아니라 실전을 시도해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 P59

"너, 똑바로 살지 않았어. 그렇지?"
뒤에 질문을 붙이고는 있지만 퍽 단정적인 말투였다. 경멸에 가까운 체념도 섞인 듯했다. (중략).
"미안해."
"기대하지도 않아. 뭘 기대하고 살린 게 아니야. 죽으나 사나 죄다 마찬가지야." - P59

"그러니까 넌・・・・・・ 재림 예수가 맞는 거지? 방송에서 나온것처럼?"
그때까지도 컴퓨터 화면은 <교주를 죽여라>를 재생하고 있었다. (중략). 소년은 화면을 힐끔 보더니 마뜩잖다는 표정으로 창을 닫아버렸다.
"방송은 엉터리니 잊어라. 내가 일전에 예수 역할을 뒤집어썼다는 거. 덕분에 날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까지만 사실이야. 나는 그저…………… 산에서 지내. 벌써 오래됐어." - P60

"북한을 통과해서 중국으로 간다는 거지."
"거기까지 따라오라고 하진 않으니 염려 말아. 너는 빌딩숲벗어날 때까지만 날 태워주고, 그다음부터는 내가 걸어서 가는 거야. 나는 한국 땅에는 더 못 있겠어. 성가신 인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들어서는 지리산이든 태백산이든 천지사방이 등산객으로 한가득이야"
이런 대사를 영화관 스피커가 아니라 소년의 입으로 직접듣고 있다는 사실이 짜릿한 경악으로 다가왔다. 그것도 한밤중의 직장에서 우혁은 한숨짓던 김 형의 얼굴을 떠올리면서상식적으로 처신하려 노력했지만, 이 상황에서 상식을 고수하는 인간은 일상을 종교처럼 떠받드는 유형일 거라고도 생각했다. - P61

소년이 대뜸 채무상환을 요구하더라도 거절할 명분이 없다는 사실, 거절하고 싶지조차 않다는 사실, 다만 지금의 선택에 여전히 공장제 낫 이상의 가치가 없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이 우혁을 괴롭혔다. 서른네 살은 현실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나이였다. 그에게는 특히 전력투구가 필요했다. - P63

우혁은 김형이 안겨준 기회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도박을가르친 입장에서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그건 엄연한 자선이자 후원이었다. 그 너그러움이 광신도들에게 습격당할 위험까지 아우를 리가 없었다. - P63

현실이라는 개념에는 정말로 다양한 층위가 겹쳐 있다.
10년 전이라면, 내가 스물네 살이면 좋았을 텐데......
혹은 어엿한 직장인이라도 되었더라면..
이 일의 여파로 인해 학원에서 쫓겨날 가능성이 두려워지는 한편, 자신이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었더라면 결심이 훨씬 쉬웠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P64

"뭐든 해줄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만, 원하는 게 있으면말해봐라. 함부로 떠들어대지만 않는다면 나는 상관없어."
"이를테면 어떤......?"
"소원은 네가 생각해내야지. 가족 건강이라도 살펴줄까?
혹은 돈 나올 구석을 봐줄 수도 있고."
우혁의 가족이라면 부모님뿐이었다. 두 분 다 정정한 편이었지만 연세가 있는 만큼 어디든 삐걱거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 P65

"여기로 온 건 절반만 우연이라고 하자. 나는 세상 돌아가는 꼴을 알아. 복권 번호를 알아맞힐 수준은 아니래도,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믿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대강 보이는 거다. 내일도 마찬가지야. 이 건물로 들어가야 해서 여기로 도망친 거고, 3층으로 빠져나와야 해서 3층으로 온 거다."
"또?"
"이대로면 넌 지옥에 가게 돼." - P66

첫째로는 이 구도가 리바이어던이 신을 집어삼키는 아이러니를 기묘한 방식으로 재현한다고 느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자신의 불균등한 지적 역량 때문이었다.
어째서 나는 정치철학과 신학을 아는데 정신 차리고 사는법은 모르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 정신의 유구한 신비였다.
하여간 결심이 섰다. - P67

"그때 목숨값으로 낫 하나 가져오라고 했잖아. 어디에 쓴거야?"
"잡풀과 덩굴 베는 용도로 썼지."
"그리고?"
"잘 쓰다가 녹슬어서 버렸다."
소년은 간이침대에 눕자마자 곧장 잠들었고, 우혁은 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묵상에 잠겼다. - P67

그런데 예수가 잠을 자던가? 예수는 사람의 몸을 지녔으므로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도깨비라면 어떤가?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은? 한편 내가 떨어질 지옥은 게헨나인가 한랭지옥인가 타르타로스인가?
그런 것들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지옥을 택함으로써 생명의 빚을 청산하게 되었다는 사실, 소년이 자신 앞에 있다는 사실이 빛나는 해방감을 안겨다 줄 뿐이었다. - P68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김 형에게서 통화가 가능하냐며 답신이 왔다. 예상한 반응이었고 욕먹을 각오까지 미리 해두었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쳐오니 숨이 턱 막혔다. - P68

"넌 강의도 뛰는 놈이 설명하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냐?"
"형, 내일 얼굴 보고 설명할게요. 통화로 하기엔 진짜 애매한 사안이라서 소란 피울 친구 아니에요. 그냥 자리만 차지하다가 갈 거예요. 그것만 해결되면 다음 달, 다다음 달 월급안 받아도 돼요. 1년은 보너스 생각도 안 하고 최저 시급으로 일할 수 있어." - P69

"그걸 지금 믿으라는 거냐"
"그래서 설명 못 했어요."
"난 너한테 도박 가르친 걸 맨날 후회해."
"예."
"학원에 너 데려온 건 후회하지 않게 해라."
"죄송합니다." - P70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더 하겠냐."
스피커가 긴긴 한숨을 토해냈다.
"늦었다. 오늘은 일단 자고, 내일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자."
김형은 정말이지 상식적이고 선량한 사람이다이에서는세상 사람 모두가 상식적이고 선량한데 자신만 이 꼴이라서 우혁은 조금 울었다.
울면 문제가 해결되나? - P71

"인쇄소는 서울에도 있는데 왜 하필 파주에 맡겼대냐?"
"인터넷 최저가 업체로 골라서 그렇죠, 뭐. 원래 파주에 인쇄소가 많기도 하고요."
"그 원장이라는 인간은 자기 차가 없어?"
"원장님은 강의하시고 파주는 잡일하는 머슴이 다녀와야죠. 대뜸 자기 차 맡기기도 애매하고요. 저야 일 시작한 지겨우 한 달 차인데"
"인쇄소에서 퀵으로 바로 쏘면 될 것을." - P72

"길게 말할 것 없고, 휴대폰에 은행 앱 깔아놨지. 열어봐라. 이체 내역을 보자."
그제야 우혁은 아버지가 떨떠름한 반응을 보인 이유를 깨달았다. 당신께서 걱정하는 것은 주먹구구식 학원 운영이나 아들의 운전 실력이 아니었다. 도박중독에 시달리는 아들놈이 월급을 허랑방탕하게 날린 다음 급전을 위해 차를 끌고나갈 가능성이었다. 비록 제도권 금융은 타인 명의 자동차로 담보대출을 잡아줄 만큼 허술하지 않았지만, 제도 바깥에서는 모든 게 가능했다. - P73

"내일 파주 가는 거 말이다. 내가 운전해도 되냐?"
"아버지 연세도 있으신데 아들놈 일로 고생시켜야 되겠습
"니까."
"우혁아, 아버지로서 진솔하게 이야기하마."
"예."
"나는 널 안 믿는다."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죄송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도 무슨 일인지 솔직히 털어놓아봐라." - P74

신갈IC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갔다가 내일 일정을 떠올리며방향을 틀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4시가 넘어 있었다. (중략). 그 기원이 무색하게도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학원의 일상이 우혁을 덮쳤다.
"최 선생, 일찍 나왔네요?"
"아, 예. 좋은 아침입니다박 선생은 고개를 까닥이더니 곧장 본론을 꺼냈다.
"어제 애들 답안 첨삭해놓고 간 거 2차로 한번 봤어요. 잘하셨던데,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너무 원론적, 형식적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강의에서 강조했던 풀이 전략 위주로 꼼꼼히 살펴봐주시면 좋지 않을까, 저는 그런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강의는 제가 하다 보니." - P76

"그나저나 어제 원장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최 선생 오면 바로 2번 강의실로 보내라던데, 분위기가 심상찮아 보여서."
"상의할 부분이 있어서요. 그럼 잠깐 가보겠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잘해요."
이건 분명 격려라기보다는 엄포였다. 원장 끈으로 들어왔다는 걸 피차 아는데, 그 끈마저 헐거워지면 당신 입지가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 P77

"최우혁 이 새끼야, 왜 이렇게 늦었어!"
"아직 9시도 안 됐는데요. 오전 타임 강의하는 것도 아니고10시까지만 오면......."
"너 설마 새벽에 그래놓고 정시 출근할 생각이었냐?"
"죄송합니다."
김형은 강의실 중간의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았고, 소년은 바로 뒷자리에 멀뚱히 자리 잡고 있었다. - P78

"나는 믿기로 했다. 이유는 일단 두 가지야."
"예."
"첫째, 난 네 돌발 행동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를 내봤자 너는 계속 죄송하다고만 할 테고, 그러면 나는 더 화가 날 거야. 나도 이제 슬슬 혈압 관리를 해야 할 나이인데. 그래서 민사소송을 걸 일만 아니면 바람이 부는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은 바람이 갑자기 지랄맞게 불고 번개도 치는구나…………"
"예....."
"둘째, 나는 어젯밤에 네 연락을 받고 이 자식이 드디어 미쳤나 싶었다. 혹은 텔레그램에서 불법 알바 받아서 하느라 거짓말을 늘어놓는 거거나 아침 되자마자 학원으로 달려왔더니 진짜로 남자애가 앉아 있더라. 도깨비인지 고등학생인지보자 싶어서 임진왜란도 직접 구경하셨냐 물어봤더니 자기는 그런 건 잘 모른다. 그러면 뭘 아느냐. 나는 예전에 중국을거쳐 한국으로 왔다. 그 전에는 유럽과 중동을 돌아다녔는데그때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보았으며 피오레의 요아킴과도 알고 지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이게 역사책을읽고 소설을 쓰는 건지, 실화인지 분간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인터넷에서 아무 라틴어 문구나 찾아서 읽어보라고 시켰지. 읽더라. 그냥 다 읽어."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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