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큰 격변이 일어났고 우리는 폐허 가운데 서 있다. - P7

그녀는 클리퍼드 채털리와 1917년에 결혼했는데, 그가 휴가를 받아 한 달간 집에 돌아와 있을 때였다. 그들은 한달 동안 신혼 생활을 했다. 그런 다음 클리퍼드는 플랜더스¹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여섯 달 뒤에 다시 영국으로 후송되어 왔는데, 부상으로 몸이 바스러지다시피 한 상태였다. 그때 아내 콘스턴스는 스물세 살, 그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1) 현재의 벨기에 서부, 네덜란드 남부, 프랑스 북부를 포함하며 북해에면하는 지방. 1차 세계대전 때 영국과 벨기에가 이곳을 지켰다. - P8

그는 정말로 절망에 빠지지는 않았다. 휠체어로 혼자 이동할 수 있었고, 소형 모터가 달린 환자용 바퀴 의자가 있어 그걸 몰고 정원을 천천히 돌아다닐 수도 있었으며 우울한 기분이 감도는 근사한 저택 영지의 임원(林苑)으로 갈수도 있었다. 그는 이 임원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겉으로는 별것 아닌 체했다.
너무나 심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그는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 어느 정도 없어졌다. - P9

그의 아내 콘스턴스는 혈색 좋고 시골 분위기가 나는 여자로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에 몸이 튼튼했으며, 동작이 느린 듯했지만 발산되지 못한 활력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커다랗고 파란 두 눈은 놀란 듯했고 목소리는 부드럽고상냥하여, 고향의 시골 마을에서 갓 올라온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 P10

힐더와 콘스턴스는 둘 다 열여덟 살이 되기 전에 이미시험 삼아 연애를 해본 경험이 있었다. 그들과 그토록 정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힘차게 노래를 부르거나나무 밑에서 정말 자유롭게 같이 야영하며 지냈던 청년들은 당연히 사랑의 결합을 원했다. 두 처녀는 망설였다. 하지만 당시 그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많았고 사람들은그런 결합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 P11

그리하여 두 자매는 각각 가장 민감한 문제까지 속 깊은토론을 나누었던 청년들에게 자신을 선물로 주었다. 토론이나 논쟁 등은 정말 신나고 근사한 것이었지만 성행위나육체의 결합은 그저 일종의 원시적 퇴행으로 김빠지는 짓에 불과했다. - P12

남자란 욕구로 가득찬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여자는 그가 원하는 것을 주지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아이처럼 심술 사나워져 골을 내고 날뛰면서 이제껏 아주 유쾌했던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기 십상이었다. - P13

두 자매 모두 연애 경험을 했을 무렵 전쟁이 났고, 그들은 서둘러 귀국했다. 두 사람 다 상대 남자와 먼저 말로써아주 가까워지지 않으면, 즉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깊은관심이 생겨나지 않으면 결코 사랑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 P13

(전략).
그리고 이처럼 생기 넘치고 영혼을 일깨우는 토론으로친밀감이 고양된 끝에 성관계가 어느 정도 불가피하게 되면, 그때는 하는 수 없었다. 그것은 한 단원의 마감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또한 나름의 짜릿한 쾌감도 있었는데,
몸 안에서 묘하게 떨리는 전율과 자기를 주장하는 마지막경련은 자극적이었고, 마지막 한마디 말과도 같았으며, 한문단의 끝과 주제 전개의 일단락을 나타내려고 집어넣은 별표의 행렬과도 같았다. - P14

사랑을 겪었다는 것, 즉 육체적 경험을 한 흔적은 남자들에게도 역시 분명하게 나타났다. 남자건 여자건 할 것 없이 육체적 경험을 하고 나면 아주 미묘하면서도 틀림없는 변화가 신체에 일어난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여자는좀 더 활짝 피어나면서 살짝 둥그스름해지고 팔팔하게 모났던 것이 부드러워지며 표정은 수심기를 띠거나 아니면의기양양해진다. 남자는 훨씬 차분해지고 보다 내성적으로 - P16

몸속의 실제 성적 쾌감에 있어서 두 자매는 남성의 이상한 힘에 거의 압도되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정신을 차렸고 그 성적 쾌감을 하나의 감각으로 여겼으며 자유를 잃지않았다. 반면 남자들은 성 경험에 대해 고마워하면서 자신들의 영혼을 여자에게 넘겨주었다. - P16

클리퍼드 채털리는 코니보다 상류 계급이었다. 코니는부유한 지식인 계급이었지만 그는 귀족이었다. 명문 대가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엿한 귀족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준남작이었으며 어머니는 자작의 딸이었다. - P18

그렇지만 클리퍼드 역시 반란자였다. 자기 계급조차도거역한 반란자였다. 반란자란 말은 너무 강한 표현일지도모른다. 아니, 너무 지나치게 강한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그저 인습이나 실재하는 모든 종류의 권위를혐오하며 이에 반발하는, 당시 유행하는 젊은이들의 일반적 행태에 휩쓸린 것뿐이었다. - P19

1916년에 허버트 채털리가 사망했다. 그래서 클리퍼드가집안의 상속자가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조차 그는 두려움을 느꼈다. 제프리 경의 아들로서 그리고 라그비의 자손으로서 자신이 지닌 중요성에 대한 의식은 워낙 타고날 때부터 박혀 있던 것이라 그것을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 P21

제프리 경은 그따위 웃기는 생각을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핼쑥하니 긴장된 얼굴로 자신의 생각에 깊이 사로잡힌 채 로이드 조지가 되었든 누가 되었든 어쨌거나나라와 자신의 지위를 구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완고히 다지고 있었다. - P21

그리고 그는 클리퍼드가 결혼해서 상속자를 낳기를 바랐다. 클리퍼드는 자기 아버지가 구제 불능의 시대 착오자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자신이 아버지보다 앞섰다고 할 구석이 어디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고특히 자신의 처지가 가장 우스꽝스러움을 움찔하며 느끼고있는 것 말고는? 싫든 좋든 그는 별 심각한 생각 없이 남작의 작위와 라그비 저택을 받아들였지 않은가. - P22

채털리 가의 자손들, 즉 두 형제와 그들의 누이는 모든친척들을 물리치고 이상하게도 라그비에 함께 틀어박혀 고립된 채 살았었다. 가족 간의 유대는 고립감으로 인해 강화되었는데, 귀족의 작위와 토지에도 불구하고, 혹은 오히려 그것들 때문에 자신들의 지위가 허약하고 무방비 상태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P22

그렇지만 클리퍼드는 코니와 결혼했고 한 달간 그녀와신혼 생활을 했다. (중략). 그와 코니두 사람은 그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아주 사이가 좋았다. 코니는 성이나 남자의 ‘만족‘에 상관하지 않는 이러한 다정한 관계에 약간 흥분된 기쁨을 느꼈다. 어쨌든 클리퍼드는 다른 대다수의 남자들과는 달리 자기의 ‘만족‘을 채우려는 데만 열중하지 않았다. - P24

제2장


코니와 클리퍼드가 라그비에 돌아온 것은 1920년 가을이었다. 미스 채털리는 동생의 변절을 아직 혐오스럽게 여기고 있었던지라 그곳을 떠나 런던의 조그만 아파트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 P25

코니가 익숙하게 보아온 것은 켄싱턴 거리나 스코틀랜드의 구릉지대 또는 서식스 지방의 구릉 지대 등이었다. 그녀에겐 그것이 바로 영국의 모습이었다. 젊은이의 냉철한극기적 자세로 그녀는 석탄과 철의 고장인 중부 지방의,
영혼도 없고 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한눈에 파악하여 받아들였고 이후로는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 채 개의하지 않았다. - P26

클리퍼드는 런던보다 라그비가 더 마음에 드는 듯이 말했다. 이 지방에는 그 특유의 완고한 의지 같은 것이 있고사람들에겐 두둑한 배알이 있다는 것이었다. - P27

젊은 지주의 귀향을 맞는 환영회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잔치도 열리지 않았고 사람을 시켜 인사를 전한 경우도 없었으며 심지어 꽃 한 송이도 보내오지 않았다. 그저자동차로 어둡고 축축한 찻길을 따라 우중충한 나무들 사이를 뚫고 습기에 젖은 채 달려가다가, 축축한 잿빛 양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영지의 임원 비탈진 곳으로 빠져나온 뒤 마침내 저택의 암갈색 정면이 드러나 보이는 언덕위에 이르렀고, 가정부 내외만이 마치 대지의 표면 위를 불안스럽게 떠도는 소작인들 모양으로 그곳을 서성거리고있다가 뭐라 더듬거리며 인사를 올릴 뿐이었다. - P28

마을 교구의 목사는 예순 살가량의 사람 좋은 노인으로직분에 충실한 자였는데, 마을의 이 말없는 ‘넌 내 일에 상관 마!‘ 주의에 의해 하나의 개인으로서는 아무 실체도없는 존재로 전락해 있었다. 광부의 아내들은 거의 모두가 감리교파 신자였다.  - P29

코니가 접근하며 말을 걸었을 때 이를 대하는 광부 아낙네들의 그 이상하고 의심쩍어하는 겉치레 상냥함, 절반은 아첨기가 섞인 그들의 목소리 속에서 언제나 울려 나와코니의 귀에 들려오는 ‘어머나! 채털리 부인이 이렇게 나에게 이야기를 걸고 있으니 난 이제 대단한 사람인 셈이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내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라는 식의 묘하게 공격적인 투의 태도 등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 P30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상대해야 할 때면 클리퍼드는 약간 거만하고 경멸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젠 더 이상 그런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그는 자기와 같은 계급이 아닌 사람은 누구든지 대체로 좀 깔보고 경멸하는 태도로 대했다. - P30

그러나 클리퍼드는 다리 불구가 된 탓에 사실 극도로 소심하고 자의식이 강했다. 그는 자신의 시중을 드는 하인들이외에는 누구와도 만나기를 꺼려했다. 휠체어나 환자용바퀴 의자에 앉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 P31

그러나 그녀는 사실 클리퍼드에게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관계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광부들은 말하자면 그가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광부들을 사람이 아니라 사물로, 즉 생명체의일부가 아니라 탄광의 일부로, 자신과 더불어 사는 인간이아니라 거칠고 조야한 자연 현상으로 보았다. - P32

그렇지만 그에겐 야심이 있었다. 그는 단편 소설을 쓰는일에 열중했는데, 자기가 알았던 사람들에 대한 묘하고 아주 사적인 이야기들이었다. 날카로운 재치가 돋보이고 약간 짓궂기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관찰력은 특이하고 비범했다. 하지만 접촉하여 닿는 것이, 실제 와 닿는 접촉이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인공적으로 만든 세상 위에서 일어나는 것 같았다. - P33

육체적인 면에서 보면 그들은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코니는 물론 집안일을 감독해야 했다. 그러나 가정부는 제프리 경만도 여러 해 동안 섬겼던 사람이었고, 식사 시중을 드는 하녀는 쭈글쭈글하니 나이가 많고 더할 나위 없이정확하게 일을 수행하는-잔심부름꾼 하녀라고도 부를수 없고 심지어 여자라고도 부르기가 힘든-아낙네로 이집에서 일한 지가 사십 년이나 된 사람이었다. - P34

그냥 내버려 두는 것 말고 그녀가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 P35

비평가들이 칭찬했고 클리퍼드의 이름은 이제 거의 유명하다고 할 정도인 데다 돈까지 벌어들이고 있는데, 클리퍼드의 작품 속에는 아무것도 든게 없다니 아버지는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지? 그의 작품에 또 뭐가 더 있을 수 있단말인가?
이런 의문이 든 까닭은 코니가 젊은이의 기준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순간에 있는 것이 전부였다. - P36

그는 나중에 코니와 이 ‘반처녀‘ 라는 것-절반은 처녀인 여자라는 그녀의 처지에 대해 좀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래도 그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와 코니는 그러기엔 너무 가까운 사이면서도 또한 그럴만큼 충분히 가깝지도 않았다. 그와 코니는 정신적으로는정말 깊이 하나가 되어 있다. - P37

코니가 라그비에 온지 이제 거의 이 년, 그녀를 필요로하는 클리퍼드와 그의 작품에만 정신을 쏟을 뿐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생활이었다. 특히 그의 작품에 더 몰두하는 생활이었다. 두 사람의 관심은 항상 함께 그의 작품 위로 쏟아져 흘렀다. - P38

그리고 이런 점에 있어서는, 공허 속에서일지언정 하나의 생활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나머지는 존재가 없는 삶이었다. 라그비가 있었고, 하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유령 같을 뿐, 정말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 P38

클리퍼드는 친구, 정확하게 말하면 아는 사람이 상당히많았으며 그들을 라그비로 초대하곤 했다. 그는 비평가나작가를 비롯하여 자기 책을 칭찬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라그비에 초청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찬사를 바쳤다. 코니는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 P39

시간은 흘러갔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정말 일어난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정말 훌륭할 정도로 아무런접촉 없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녀와 클리퍼드는 자신들의생각과 그의 작품 속에 묻혀 살아갔다. 그녀는 손님을 맞아 접대해야 할 때도 많았다 집에는 늘 사람들이 끊이지않았다. 시계가 7시 반에서 8시 반을 가리키듯이 그렇게시간은 흘러갔다. - P40

제3강


하지만 코니는 점점 마음이 초초해지는 것을 느꼈다. 접촉이 없는 것에서부터 일종의 초조감이 광기처럼 그녀를사로잡았다. - P41

그것은 진정 초조감이었다. 그녀는 영지의 임원을 가로지르며 달려나가, 클리퍼드의 일 따위는 모두 팽개쳐 버리고 고사리 덤불 사이에 쭉 뻗어 엎드려 있곤 했다. - P41

그러나 숲은 진정한 피난처나 성역이 되지 못했다. 그녀와 그곳은 아무런 연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그저그녀가 나머지 다른 것들로부터 도망쳐 있을 수 있는 장소에 불과했다. - P42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다시금 충고했다. 애인 하나두는 게 어떻겠니, 코니야? 세상의 여러 재미도 좀 맛보도록 하려무나! - P42

클리퍼드가 이 서른 살의 젊은이를 집에 초대하려던 때는 이 젊은이의 경력에 있어서 불운한 시점이었다. 하지만클리퍼드는 망설이지 않았다. 마이클리스에겐 아직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관심 있는 독자로 남아 있을지 몰랐다. 게다가 지금 가망 없는 왕따가 된 처지인지라, 상류 사회의다른 모두가 그를 외면하여 내쫓는 이 괴로운 시기에 라그비에 와달라고 초대해 준 것이 그로서는 틀림없이 고맙기만 한 일일 것이다. - P43

코니는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클리퍼드의 맹목적이고 강박적인 본능에 대해 약간 놀라워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고 불안해하며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그 형체 모를 넓은 세상에서 유명해지고자 했고 작가로서, 그것도 일급의 현대 작가로서 유명해지고자 했다. 나이 많고 원기 왕성하며 허세를 부리는 성공한 아버지 맬컴 경을 통해 코니는 예술가들도 자기선전을 해대며 자신의 상품을 잘 보이게 하려고 애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P44

런던 최일류 거리의 양복점, 모자점, 이발소, 구두점 등을 거쳐 단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이클리스는 분명 영국인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그는 절대 영국인이 아니었다. 납작하고 창백한 얼굴과 행동거지는 종류가 다른 것이었고,
불만스러워하는 표정도 종류가 달랐다. - P4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인을 데리고 그 멋들어진 차를 척 타고서 행차를 하였으니, 이 더블린의 잡종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코니의 마음에 드는 뭔가가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 대해아무런 환상도 품고 있지 않았다. - P46

"그렇지만 그 시작이란 것을 해야 하겠지요." 클리퍼드가 말했다.
"아, 그렇지요! 안으로 뛰어들어야 하지요. 밖에 있으면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요. 길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야합니다. 일단 그렇게만 하면, 아무리 해도 어긋날 수가 없게 되지요."
"그렇지만 당신은 희곡 말고 다른 수단으로 돈을 벌 수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클리퍼드가 물었다. - P47

"내 나이가 서른 살-그래요, 서른 살이지요!" 마이클리스는 날카롭고 돌연한 어조로 묘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공허한 듯하면서 의기양양하고, 또 씁쓸한 웃음이었다. - P48

"미국 여자하고는 어때요?" 클리퍼드가 말했다.
"아, 미국 여자요!" 그는 공허한 웃음을 웃었다. "안 돼요. 난 그래서 하인에게 터키 같은 나라의 여자든지, 뭐동양인 가까운 여자를 하나 찾아보라고 부탁해 두기도 했답니다."
코니는 엄청난 성공의 표본인 이 묘하고 우울한 사람에대해 정말 놀라움을 느꼈다. 그는 미국에서만도 5만 달러의 수입을 올린다고들 했다. - P49

마이클리스는 자기가 코니에게 뭔가 강한 인상을 주었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 P50

코니의 거실은 저택 중앙부의 맨 위층인 3층에 있었다.
클리퍼드가 사용하는 방들은 물론 1층에 있었다. 마이클래스는 채털리 부인의 거실로 올라오라고 초청받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그는 아무 다른 생각 없이 하인의 뒤를 따라갔다. - P51

(전략).
이제 그녀와 마이클리스는 불이 지펴진 벽난로 양편에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자신과 그의 부모와 형제 등에 대해서 물었다. 그녀에게 있어 다른 사람들은 항상 어딘가 놀라운 관심거리였으며, 동정심이 일깨워지는 순간 계급의식 따위는 깡그리 잊어버렸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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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고 믿는 게 당신의 전부가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나요?」
최면사 오팔이 공연의 클라이맥스가 될 마지막 쇼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 P13

그녀의 손끝이 한 사람에게서멈춘다.
「이분!」
젠장. 운도 없지.
「네, 거기, 남자분. 제 쪽으로 와주시겠어요?」 - P14

「성함과 나이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르네 톨레다노, 서른두 살입니다.」 그가 마지못해 부루퉁히 대답한다.
「무슨 일을 하시죠?」
「조니 알리데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어요.」 - P15

「한 가지 여쭤볼게요. <잊힌 기억들>이라면 뭐가 떠오르시죠?」
호기심을 느낀 르네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역사 교사인 제 눈에 지금 세계는 기억 상실을 앓고있어요. 과거의 실수들이 초래한 결과를 망각했기 때문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거죠」
곳곳에서 공감의 소리가 들리자 르네가 용기를 얻어말끝을 단다. - P16

「역사 교사가 기억을 상실하면 큰일이잖아요. 안 그래요?」
르네가 즉시 대답하지 못하고 관객석의 동료를 힐끗쳐다본다.
엘로디도 나처럼 궁금해하고 있을 거야. 왜 쇼를 시작하지 않고 이렇게 사적인 질문들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지 말이야. - P17

「제가 이야기하려는 건 단기 기억도 장기 기억도 아닌・・・・・・ <심층> 기억이에요. 아주 깊은 심층의 기억 말이죠. 자, 지금부터 당신의 의식 아래 켜켜이 쌓여 있는 기억의 지층들을 함께 발견해 보기로 해요. 당신을 당신이게 만드는 바로 그것을 말이에요. 심층 기억을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셨어요?」 - P17

「이 체험을 수락하면 아시게 될 거예요. 먼저 한 가지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이 쇼를 무대에 올리는 건 오늘이처음이에요.」
뭐? 그럼 내가 최초의 피험자란 말이야? 최면 기술을 완벽히 터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고 있을 테니 빨리 뭐라고 대답을 하긴 해야 하는데,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아 보일까. 그래, 하는 수 없어. 어차피 되돌리기엔 늦었어.
그가 입을 비쭉하고 나서 고개를 끄덕인다. - P18

「르네, 제 말 듣고 있어요? 아직 우리랑 같이 있죠? 대답해요. 문이 보이죠?」
지금 눈을 뜨면 사람들이 다 날 쳐다보고 있겠지? 적극적으로 최면에 응하지 않으면 분명히 엘로디가 전통 마술만 좋아해쇼를 망쳤다고 날 원망할 거야. 에이, 까짓것, 노력을 좀 해보자. 방금 뭐라고 했지? 그래, 계단, 계단을 내려가면 뭐가 보인다고? 맞아, <무의식의 문>이라고 했어. - P19

「가장 가까이 보이는 숫자가 뭐예요?」
흐릿한데 초점을 모아 볼까.
「111.」
「그건 당신이 지금 나온게 112번 문이라는 뜻이에요.
당신은 112번째 생을 살고 있는 거죠! 이제 어떤 전생에가보고 싶은지 생각해 봐요. 가장 가보고 싶은 전생을 골라 봐요.」
「흠・・・・・・ 내가 가장⋯⋯⋯⋯ 영웅적인 삶을 살았던 때가 궁금하네요.」 - P20

「네, 109번에 불이 들어왔어요.」
(중략).
「어서 열어 봐요, 겁내지 말고, 제가 여기 있고, 우리모두 당신 곁에 있어요.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 P21

2
「......내 손인데......」
르네는 눈앞에 보이는 대로 관객들에게 묘사해 나가기 시작한다.
(중략).
그의 주변에 똑같은 청회색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여러 명 눈에 들어온다. 역사 전공자인 르네는 그 제복이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프랑스 군인들이 입었던 군복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 P22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군모를 쓰고 견장을 단 부사관 하나가 점호 시작을 알린다. 이름들과 성들이 낱알처럼 공중으로 흩어진다.
<상병 이폴리트 펠리시에>가 들리는 순간 르네는 흠칫하며 저도 모르게 대답한다.
「넷!」르네는 지금 와 있는 <지난 생>에서 자신의 <지난 이름>이 이폴리트 펠리시에라고 추론한다. - P23

「만나서 반갑다, 제군. 나는 니벨 장군이다.」
이 유명 지휘관의 명성을 익히 들어 온 병사들이 압도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오늘 1917년 4월 16일, 랑시(市) 인근 이곳에서 아군은 독일군의 저지선을 뚫기 위한 공격을 개시한다. 적은슈맹 데 담에 저지선을 구축하고 있다. 보병대가 선두에 나서 3분에 1백 미터씩 전진하며 공격을 이끌 것이다. 비슷한 여건의 베르됭 전투에서 두오몽 요새를 수복했을때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가 될 것이다. 그때 우리를 승리로 이끌었던 전술을 이번에도 똑같이 쓰려고 한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 전투에는 슈나이더 전차를투입해 배후의 적군을 포격함으로써 보병대의 공격 부담을 덜어 줄 거라는 점이다. 일몰 전에 랑 남쪽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다.」 - P25

중사가 악을 쓰듯 호령한다.
「공격 태세 돌입!」
병사들이 용기를 내기 위해 럼주를 채운 수통을 들고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한다. 이폴리트의 수통에는 시칠리아산 적포도주가 채워져 있다. - P27

사기충천한 아군 보병 부대가 다시 비탈을 오르기 시작한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독일군 기관총 진지에서 불이 뿜어져 나온다. 선두에 위치한 병사들이 우수수 쓰러진다. 이폴리트는 전우들과 함께 낮은 포복으로 땅을 기면서 독일군 사격호 너머 짙은 색깔의 철모들을 조준 사격하기 시작한다. - P28

청회색 군복들이 찰박찰박하며 진탕을 뛰어가기 시작한다.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고 아군이 짚단처럼 쓰러진다. 중사가 빽빽 소리를 지른다.
「전진! 빌어먹을! 전진하라니까!」그가 독기를 품고 악을 쓴다.
「되돌아오는 비겁한 놈은 비탈 아래 특별히 배치된 기록류관총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요행히 살아남아도, 이탈한높은 총살을 면치 못할 것이다!」 - P29

병사들이 상관의 명령대로 교전을 벌이는 사이 날이훤하게 밝아온다. 비탈 아래서 등장한 적들은 모두 소탕했지만 아군은 전력에 막대한 타격을 입고 사상자는 어마어마하다첫 번째 공세에서 부대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폴리트는 영웅은커녕 쫓기는 짐승의 다급한 처지가 된다.
신속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 P30

이폴리트는 굴 안으로 상체를 넣는다. 계단을 몇 개내려가자 천장을 가로대로 떠받쳐 놓은 지하 통로가 나온다. 프랑스군의 포격을 피하고 접전 시 필요에 따라 신규병력을 투입하기 위해 독일군이 오래전부터 이곳에 거미줄처럼 땅굴을 파놓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 P31

그들은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쉰다. 무기를 휘두르며거리를 지킨 채 공격 기회를 노린다. 체격과 힘에서는 유리하지만 민첩성이 부족한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이폴리트가 독일군에게 여러 번 창상을 입힌다. 하지만 두툼한지방이 방패 역할을 하는 그의 몸속 깊이 칼을 찔러 넣기는 역부족이다. - P32

이폴리트가 상대의 목을 움켜잡은 손에 다시 필사적으로 힘을 준다. 하지만 이내 힘이 풀리고, 칼끝은 그의 오른쪽 눈에 와 박힌다. 빠삭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이순식간에 두개골을 통과해 지나간다. - P33

3

르네 톨레다노는 소스라치며 눈을 번쩍 뜬다. 한쪽 눈이 실쭉실쭉한다. 최면사가 다급히 소리친다.
「안 돼요! 아직 눈을 뜨면 안 돼요! 최면에서 깨어날때는 잠수에서처럼 단계를 밟아야 해요. 다시 눈을 감아요.」르네는 들은 체 만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 P34

애초에 내가 최면에 응한 게 잘못이었어. 그녀가 한 일이라곤 악몽을 꾸는 내 모습을 관음증에 걸린 관객들에게 보여 준 것뿐이야 사람들 눈에 내가 얼마나 불쌍하게 비쳤을까. - P35

스킨헤드가 칼을 훅 내찌른다. 르네가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는 중에 칼끝이 손등을 스친다.  - P36

르네가 바닥에 떨어진 칼을 힘껏 차서 강물로 날려 버린다. 스킨헤드가 씩씩거리면서 독일어로 욕을 내뱉더니성난 황소처럼 몸을 구부려 달려들 태세를 갖춘다. 그가장딴지에 붙은 칼집에서 이번에는 칼날이 더 넓고 긴 칼을 하나 꺼내 든다. 인간 수컷들의 싸움이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된다는 듯 강둑을 돌아다니던 쥐들이 모여들기시작한다. - P37

온다. 르네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의 손목을 꺾고 칼끝이 반대로 향하게 돌려놓는다. 서슬에 놀란 그가 바닥에넘어지는 순간 칼이 가슴에 박힌다.
(중략).
르네는 상대가 죽은 척하는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조심스럽게 다가가 몸을 뒤집어 본다. 스킨헤드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 P38

그가 스킨헤드의 시체를 멀뚱히 내려다보며 서 있다.
아냐, 경찰에서 내 말을 믿어 줄 리 없어. 내가 노숙자를 찔러죽였다고 할 거야. 정당방위를 입증할 증거도 없어.
손에 입은 상처를 보여 줘도 코웃음을 치면서 단순한 찰과상이라고 우길 거야.
아무리 샅샅이 둘러봐도 목격했을 만한 사람은 주위에 보이지 않는다.  - P39

4


르네는 적에게 쫓기듯이 집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쾅닫는다. 그는 자물쇠를 모두 잠그고 문에 기대서서 가쁜호흡을 가다듬는다. 파리 15구 샤를미셸역 근처 작은 건물 8층에 있는 자기 아파트의 낯익은 풍경 속으로 들어오고 나니 안도감이 든다. - P41

「나는 누구지?」 그는 마치 거울 속의 사람과 대화하듯묻는다.
내가 아닌 것 같아. 거울 속에 보이는 이 사람은 누굴까? 이게나란 말이야? 내가 어떻게 이 몸과 이 얼굴을 갖게 됐을까? 과연 이 외피가 내가 진정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을까? 스스로 영웅이라고 자부하지만 괴물에 불과한 이자는 누굴까? 다 그놈의심층 기억 때문이야. 그 비밀의 동굴에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구역질이 인다.
「나는 누구였을까?」 그는 소리 내어 묻는다. - P42

「(전략). 이 사건은 우리에게 한 가지 시사점을 준단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역사가들이 무엇을 기술했는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지.」
「그럼 역사가들이 제일 힘이 세요? 그래서 아빠도 역사를 전공했어요?」 - P45

「쥘 미슐레도 마찬가지란다. 너도 알다시피 그가1840년에 집대성한 프랑스 역사는 우리한테 절대적 권위를 가진 교과서로 인식돼 있지. 하지만 그가 제멋대로역사를 해석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전투가 중요한지, 어떤 왕은 위대하고 어떤 왕은 별 볼 일 없는지,
그가 선택하고 자의적으로 판단해 썼다는 뜻이야. 자신의 정치적 비전에 부합하게 왜곡했다는 거야. 하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단다.」 - P46

하루는 어린 르네가 에밀에게 물었다.
「아빠, 이 얘기들을 왜 수업에서는 해주지 않아요?」에밀이 아들을 진지하게 쳐다보면서 입을 뗐다.
「아빠 말을 잘 기억해 두렴. 진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얘기해 줄 수는 없단다. 거짓에익숙해진 사람들의 눈에는 진실이 의심스럽게 보이기 마련이거든.」 - P47

(전략).
오늘 초저녁까지만 해도 그는 난파자처럼 기억의 옛목을 붙잡고 조용히 살고 있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않은 착실한 공무원, 엘로디의 친구, 상사들의 인정을 받는 열정 넘치는 역사 교사, 알츠하이머라는 다모클레스의 검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미래의 퇴직자.
그런데 바로 한 시간 전에 그 빌어먹을 <심층 기억>이예기치 않게 등장하는 바람에 자신의 숨겨진 단면을 발견하게 됐다. - P49

르네는 인터넷을 뒤져 제1차 세계 대전 공식 사망자명단을 찾아낸다. 거기에서 슈맹 데 담 전투에 참전해23세의 나이로 전사한 이폴리트 펠리시에 상병의 이름을 발견한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진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클릭하는 순간, 퇴행 최면의 거울 속 얼굴과 똑같은 얼굴이모니터에 나타난다. 똑같은 회색 눈, 콧수염, 얇은 입술,
턱 보조개까지. 르네는 이폴리트 펠리시에 상병의 복무기록을 읽어 내려간다. - P51

5

므네모스: 망각의 여신 레테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밤의 여신 닉스에게는 쌍둥이 아들인 잠의 신 히프노스(최면이라는 단어의 어원이됨)와 죽음의 신 타나토스(<타나토노트> 같은 단어의 유래가 됨)가 있다. 잠에서 깰 수 있고 없음이 이 두 형제사이의 미묘한 차이점이다.
(후략). - P54

6

(전략).
어제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으니 경찰이 집으로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야. 아니, 일부러 직장에서 날 체포할지도 몰라. 학생들이 다 지켜보는 앞에서 선생인 사람이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고 충동에 휩쓸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으니,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지.
자신을 드러내는 걸 싫어하는 그는 신문 머리기사의주인공이 된 상상을 하며 몸서리친다. - P56

르네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다행히 아직 센강에 시신이 떠올랐다는 뉴스는 들리지 않는다.
영영 발견되지 않을지도 몰라. 혹시 발견돼도 기삿거리가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술에 취한 노숙자가 강에 빠지는 일이야 종종 일어나니까. 그 일은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야. 내가 잊어버리기만 하면 돼. 그럼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게 될 거야.
심사가 복잡한 상태에서 운전을 하던 그는 오른쪽에서 나타나는 차를 미처 보지 못해 추돌 사고를 일으킬 뻔한다. 운전자가 차 창문을 내리고 그에게 욕을 해댄다. - P59

7

르네 톨레다노가 조니 알리데 고등학교의 주차장에차를 세우고 건물을 향해 걸어간다. 건물 입구에는2017년에 사망한 청소년들의 우상이었던 인물의 동상이 서 있다. - P61

그는 교실로 들어가 교단 위로 올라간다. 첫 수업을 듣는 학생 서른한 명이 벌써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학생들이 그를 쳐다본다. 그를 이전에 본 적이 없더라도분명히 정상이 아니라고 느낄 것이다. 앞에 서 있는 선생이 창백한 얼굴에 퀭한 눈을 실쭉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눈치챘을 테니까. - P63

「여러분과 6월까지 함께 공부하게 됐습니다. 별 탈 없이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랍니다. 학년 말에 바칼로레아가있으니까 말이에요. 준비 없인 당연히 합격이 불가능하다는 걸 명심하길.」 - P63

「교과서에 실린 공식 역사조차 자의적인 재단(裁斷)의 결과물인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글자를 가졌던 문명들이 남긴 흔적이죠. 그중에서도 또 역사가들이 존재했던 문명들이 전하는 과거가 전부예요. 게다가 모두 승자들의 버전이고」
「그 이유가 뭐죠, 선생님?」 맨 앞줄에 앉은 여드름 빼곡한 열성적인 남학생이 묻는다.
「전쟁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죽은 사람이 들려주는 경우는 극히 드무니까」 - P67

도수 높은 두꺼운 안경 속에서 눈이 뱅글뱅글 돌고 있는 앞줄의 또 다른 남학생 하나가 손을 든다.
「지금 말씀하신 건 다 너무 원론적인 내용이에요.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 주실 수 있나요?」 - P69

르네가 학생들을 쳐다보며 알 듯 말 듯한 소리를 한다.
「실제 벌어진 역사와 기술된 역사, 피지배자의 역사와지배자의 역사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치에서 기억은 사활이 걸린 문제예요. 그래서 수많은 정치인이 기억을 거머쥐고, 자신들한테 유리하게 주물러 빚으려고 하는 거죠」
「그런데, 선생님.」 한 학생이 말꼬리를 문다. 「선생님얘기를 듣고 교과서에 없는 엉뚱한 얘기를 적으면 바칼로레아에서 떨어질 텐데요.」 - P71

「진실을 아는 것보다 바칼로레아에 합격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니?」 - P72

8


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린다. 점심시간.
(중략).
르네는 식당 오른쪽 구석, 늘 가는 제일 조용한 자리에앉아 있는 엘로디 테스케를 발견한다.
「안색이 창백한데, 잠을 못 잤어? 」그녀가 다가오는 르네를 보면서 묻는다. - P74

「있잖아, 내가...………」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우물쭈물한다.
・・・・・・사람을 죽였어.
「......어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괴물이 되고 말았어. 다들 얼마나 한심하게 여겼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해.」 - P75

「있잖아, 우리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전생들이 현재의 삶을 <오염시킬 수 있어서 그런 거야. 내 경우에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병사로 살았던 삶이 다시 떠오르고 나서, 내가・・・・・・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잖아.」
「그건 나도 봤지.」
「그것 때문에 어젯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어.」
엘로디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입을 삐죽 내민다. - P76

「어제 한 퇴행 최면 실험으로 나는 금지된 경계선을넘었어. 그래서・・・*****괴물이 튀어나왔고, 나는 그 통제 불가능한 괴물의 포로가 됐어.」
생물과 지구과학을 가르치는 엘로디가 그를 향해 <농담이지?>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녀가 할 말이 있는 듯 잠깐 입술을 들먹이더니 의자를 뒤로 밀면서 일어난다. - P77

「뭐, 좋은 학생이긴 하겠지만 좋은 인간인지는, 글쎄,
두고 봐야지. 어쨌든 애들이 자율적 사고의 중요성을 몰라! 시험에 붙기 위해 그저 수업에서 들은 얘기를 외워서말할 뿐이야. 애들 머릿속에는 바칼로레아 생각밖에 없어. 자기 조상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안중에도없다고. 내가 가르치는 게 그 조상들의 얘기라는 것조차모를걸.」 - P78

「이폴리트의 삶을 다시 살고 보니 조금이라도 독일을연상시키는 건 왠지 기분 나쁘게 느껴지네.」
그녀는 맥주를, 그는 적포도주를 한 잔씩 집어 든다. 르네가 말끝을 잇는다.
「마치 테스토스테론이 과잉 생성되고 있는 것처럼 전에 없던 공격성을 느껴. 전투 중인 군인들이 그렇다잖아.
내가 정말로 참전이라도 한 것처럼 그 호르몬이 내 몸에남아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잠을 못 잤나 싶기도 해.」 - P79

9

어린 시절의 엘로디 테스케는 반에서 제일 예쁜 아이가 되고 싶었다. 부모님을 졸라 인형처럼 옷을 입어도 성에 차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사는 아름답고 완벽한 몸을 가지고 싶었다. 늘씬하고 긴 다리에 호리호리한 몸으로 포즈를 취하는 잡지 표지 모델의 몸을 꿈꾸며소녀는 먹은 음식을 게워 내고 수시로 완하제를 복용했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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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수학이 예측하는
우리 사회의 미래



이번에는 지난 강의에서 배운 편미분 방정식을 계산하기 위해 필요한 수치 기법들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이어서 이러한 계산으로 자연 현상을 모사하는 방법을 말씀드릴 텐데, 보다 구체적으로는 기상, 자연 재해, 자동차 충돌, 비행기와 요트 디자인에 현대 수학이 적용되는 과정을 살펴보죠. - P63

방정식의 해는 근사하다


파동방정식,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 맥스웰 방정식 등이 대표적인 방정식이에요. 이 방정식들은 모델링에서 도출되었으며, 수학 이론이 그해의 존재성, 유일성을 증명합니다. - P64

편미분 방정식의 수학적 해석도 중요하지만 이것을 실제로 구현하고 응용하기 위해서는 해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계산을 해서 보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정확한 해를 구하기는 불가능합니다. - P65

다른 형태의 미분도 유한 차분식으로 바꿔 보죠. 이제 우리가 풀려는 영역을 오른쪽 그림과 같이 가로 세로로 촘촘하게 잘라서 격자점들로 표현해요. 그 후에 미분 방정식에서 이 격자점들의 미분을 유한 차분식으로 변환하면, 미분 방정식이 격자점에서의 함숫값들의 관계식으로 바뀝니다. 미분 방정식은 무한히 많은 점 위에서의 연속 함수인데 이렇게 해서 유한한 개수의 격자점상에 있는 함숫값들의 문제가 됩니다. - P66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좀 더 수학적인 방식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한 요소법입니다. - P67

우리가 원하는 해 u는 연속함수로서 무한 차원인데, 조각 1차 함수들이 격자점에서 갖는 값만 알면이 함수들의 형태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삼각형들의 마디 위에서 갖는 함숫값만 찾으면 해결되는 거죠. - P68

비행기를 만드는 방정식

(전략).
유한차분법이든 유한 요소법이든 도출되는 행렬 방정식의 미지수는각 격자점에서의 함숫값들입니다. 고등학교에서는 보통 2행 2열 3행 3열정도의 행렬을 배웁니다만 이 방식은 100만 행 100만 열과 같은 굉장히큰 행렬을 금방 만듭니다. 보통 고등학교에서 2행 2열의 행렬 방정식을 풀때, 역행렬을 찾아서 곱하죠. 하지만 100만 행 100만 열쯤 되면 역행렬을찾기는 매우 힘듭니다. - P69

(전략). 병렬화가 쉽고, 복잡한영역의 문제를 단순 영역으로 바꿀 수 있죠. 또한 사각형 영역, 원형 영역처럼 영역별로 분할해 서로 다른 수치 방법으로 푸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렇게 비행기를 디자인할 때 위치에 따라 지배하는 방정식이 다른 경우를, 요즘은 다중 물리 문제(multiphysics problem)라고 부릅니다. - P70

폭발 모의실험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수학적 모델에서는 모델에 포함된 계수들을 변화시키면서 실제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실험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에도 컴퓨터로 모의실험을 시행해 결과를 예측 분석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해저나 우주에서 벌어지는현상은 직접 실험할 수가 없습니다 - P72

날씨를 계산하는 방법


지금부터는 우리가 어떻게 계산 수학으로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활용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기상 예측입니다. 기상 예측에서는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 열 방정식, 부시네스크 방정식(Boussinesq equation) 등을 사용합니다. - P73

그런데 요즘에는 이런 방식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지구 온난화처럼 과거에는 없었던 현상들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상학에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학습 이론, 소위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입니다. - P74

구름 위의 컴퓨터


구름의 광학적 두께를 측정하는 데도 계산 과학(computational science)은 중요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본래 구름은 두께를 측정하기 어려운 대상입니다. 구름은 멀리서 보기에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 같지만, 막상 그 속에 들어가면 매우 뿌옇고 흩어져서 두께를 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구름의 광학적 두께를 측정할 때 빛의 투과율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 P75

구름의 두께를 알게 되면 특정한 지역의 강우 여부, 강우량, 일조량 등을 종합적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상 예측인데 미국의 에너지 과학 계산 연구소(NERSC)에서는 더욱 심층적인 연구를 했습니다. - P76

 분할 단위를 줄여서 실험 모형이 세밀해질수록 정확도도 높아져서, 실제 관측 결과와 유사해져 가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계산 수학과 컴퓨터 공학이 발달해 나간다면, 머지않은 미래에는 우리가 원하는 지역의 일일 강수량을 정확히 예측해 낼수 있을 것입니다. - P77

아시겠지만 지금까지 보신 것은 전부 미국 자료에요. 한국에서 제작한 자료는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계산 수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 P78

자연 재해를 대비하는 수학


다음으로 말씀드릴 주제는 요즘 문제가 되는 자연 재해입니다. 그중에서도 피해가 컸던 재해가 아직 여러분들께서도 기억하시는 쓰나미일 것입니다. (중략).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재난 앞에서 수학은 어떤 도움이 될까요? - P78

파도 속의 방정식

실제로 존재하는 건물을 놓고서 쓰나미로 침수되면 어떻게 손상되는지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해 볼 수도 있습니다. 수시로 바뀌는 파도의 비선형적 형태뿐만 아니라 파도의 진행 방향 뒤로 퍼지는 분산 효과, 밀려오는 동선에 있는 지형지물들의 복잡한 형태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계산입니다. - P80

또한 파도에는 주기(frequency)가 있습니다. 파도는 여러 주기가 결합해서 형성되는데 각 주기별로 전파 속도가 다릅니다. 그래서 파도 하나가밀려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러 개가 함께 오는 것이고 이것들끼리 서로 속도의 차이도 있기 때문에 여러 개로 나눠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요소를 정확히 고려해서 쓰나미를 모의실험해야합니다. - P81

옆의 자료는 2011년 동일본 지진의 쓰나미로 일본 미야기 현 오나가와정에서 피해가 발생한 영역을 분석한 것입니다. 이 지역을 대상으로 시뮬레이션한 결과를 보면, 피해 양상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관측된 피해 영역과 높은 비율로 일치합니다. - P82

자연을 모사해 재해를 대비한다

다시 쓰나미를 계산하는 이야기로 돌아와 보죠. 문제는 이런 쓰나미 계산이 굉장히 힘들다는 것입니다. 바닷물이 지면을 따라오다가 건물들을 만나겠죠. 그러면 건물의 모양이나 위치에 따라서 접촉한 물의 모양이 달라질 것 아니에요?  - P84

한국에서는 쓰나미가 일어나지 않아서, 여름철에 자주 일어나는 산사태를 대상으로 재해 모의실험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 P84

슈퍼컴퓨터와 자동차


다음으로는 자연 재해가 아닌 우리의 일상생활과 직접 관련된 계산 수학 모의실험을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우리가 늘 이용하는 자동차의 충돌사고를 가정한 모의실험입니다. 현대 자동차 같은 경우에 신차 모델을 하나 개발하면 보통 3000억 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 비용중 상당 부분은 자동차의 안전도 테스트를 위해서 자동차를 제작해 실제로 부숴 보는 데 쓰입니다. - P85

미래 항공기의 조건

(전략).
미래의 항공기는 끊임없이 발전할 것입니다. 그 필수 요건은 바로 연료절감이에요. 그 밖에도 소음과 유해 물질 배기량 감축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래서 미국 정부가 2010년에 내놓은 10년 장기 계획(2010 NationalAeronautics Research and Development Plan)에 따르면 연료 소모는 보잉737의 30퍼센트, 제트기 소음은 현재 기준보다 62 데시벨, 질소산화물배출량은 현재 국제 기준의 20퍼센트 이하로 감축해야 합니다. 이 기준에 미달하면 비행기를 완성해도 취항할 수 없다는 규정까지 이 장기 계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 P87

날리지 않고도 제작되는 비행기


유체 역학이 공기를 대상으로 계산한 것은 대략 1960년대부터입니다. 처음에는 공기에 점성과 회전이 없는 선형 모델만을 가정하고 계산했었습니다. 좀 더 쉽게 계산할 수 있었지만 그 대신 현실성은 다소 줄어들었죠. 선형 모델에서 비선형 모델로 진전되며 회전, 점성, 소용돌이까지 하나하나 가정에 추가해 계산하는 식으로 모델이 정교해졌습니다. - P88

비행기의 소음을 감소시키는 기술을 개발할 때도 직접 엔진을 제작해서 작동시켜 발생하는 소음을 측정하며 개량할 필요가 없습니다. 컴퓨터시뮬레이션으로 가상의 엔진을 제작해 작동시키고, 음파 방정식으로 그 소리의 크기와 확산 범위까지 계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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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곤경에 처한 이 사내가 자신의 발걸음에만 쫓기며길을 떠났을 때, 이 비참한 사내, 이 형제 살해자에게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많은 원칙이 있었다. 그가 가족 채소밭의 질퍽한 땅에 앉아 새로 심은 작은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서 자라기만 기다리던 모습을 종종 발견하던 그의 어머니에게 물어보라. 그는 네댓 살이었는데 나무들이 - P44

(전략). 그날 밤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하와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 이야기를 해주자 아담은 대답했다. 그 아이는 멀리 갈 거야.* 여호와가 방해만 하지 않았다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인은 이미 아주 멀리 갔다.



* 크게 된다는 뜻도 있다. - P45

어쩌면 비가 피를 씻어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으나, 다시 생각해 본 다음 흙으로 더러운 곳을 가리려 했다. - P46

(전략), 여호와는 모든 것을 알고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 턱뼈를 미리치울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아벨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지금 함께 우리 집 문간에 서서 이비를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고, 아벨도 내가 희생으로 드릴수밖에 없었던 것, 나의 힘든 노동과 내 이마의 땀에서 태어난 씨앗과 밀 이삭을 여호와가 받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라고 동의했을 것이고, (후략). - P46

이제 카인은 느긋하게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자신의 생각의 경로를 마음대로 좇아 그 생각이 자신을 어디로 이끄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인도 우리도 그 결과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 P47

카인은 서 있기도 힘들었는데, 걸어온 거리도 거리지만 이제 굶주림이 뱃속을 물어뜯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고, 이제 곧밤이 될 터였다. 나는 여기 그대로 있을 거야, 카인이 큰 소리로 말했는데, 이제 그는 자신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을 때마다 습관처럼 그렇게 하곤 했다. 물론 그는 지금 이 순간은 누구의 위협도 받지 않았다. - P48

사실 태어난 그날처럼 벌거벗고 거기 앉아 있는 것이 아주 옳은 일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는 혼자였고, 목격자는 없었기에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몸이 또 떨렸다. 아까와 같은 원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젖은 튜닉과 접촉하고 있어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생식기 부근에 일종의 전율을 느낀것이다. - P48

그러나 잠에서 깼을때 나온 첫마디는, 내가 아우를 죽였다, 였다. - P49

카인은 오두막을 나와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해는 아직 뜨지 않았지만 하늘이 은근한 빛깔들로 밝아오자, 그의 앞에 펼쳐진 불모의 단조로운 풍경이 그 이른 아침의 빛 속에서 변신을 하여, 아무런 금지가 없는 에덴동산처럼 보였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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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이 비극을 좌절시키기보다는 촉진할 수 있는 다른 이유들이 있다. 우리는 이성의 한계, 한때는 자주적이었던 인간 주체의 연약함과 자기 불투명성, 통제 불가능한 수수께끼 같은 힘들에 노출된 상황, 힘과 자율성에 가해지는 제약, 인간의 행복에 완전히 무관심해 보이는 익명의 ‘타자‘ 안에서 찾아야 하는 기원, 다원적 문화 안에서 선들의 불가피한 갈등, 인간이 주는 피해가 장티푸스처럼 퍼질 수 있는 사회질서의 복잡한 밀도를 새삼 인식하고있다. - P44

자크 라캉이나 슬라보이 지제크slavoj Zizek 같은 사람들에게는 굴라크Gulag나 홀로코스트가 비극적이라고 묘사될 수 없다. 그것이 드러내는 공포가 너무 깊은 곳에 이르러 비극적 존엄으로 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⁵⁵ - P46

55. Slavoj Žižek, The Fragile Absolute(London, 2008), p. 40 - P252

벨젠이나 부헨발트의 수감자들이 자신의 고난을 통해 성화된 상태로, 또는 운명에 용감하게 체념한 채로, 또는 자신이 세계사적 인물이라고 의식하면서, 또는 비록 자신은 죽을지라도 인간 정신 자체는 불굴이라는 생각에의기양양한 채로 죽어야만 비극적이라는 명칭을 얻을 수 있었던것은 아니다. 그냥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 P48

비극은 극한 상태에 처한 인간을 제시하며, 물론 이것이 인간정신의 101호실 * 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에 깊이 몰두하는 모더니즘이 이 형식을 그렇게 환대하는 하나의 이유다.


*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고문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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