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여길 보면 지금 해외에서 발견되는 모스바나 야생형, 그러니까 와일드 타입 유전체와 어긋나는 부분들이 많이 보이지.
식물은 퍼져 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적인 변이가 일어나니까 사실 야생형들끼리도 어긋나는 부분이 있는 건 당연해. 그런데 이건 변이가 너무 많이 일어났고, 무엇보다 이 해월에 퍼진 모스바나들, 개체들 간의 유전자가 너무 비슷해. 보통 자연적인 군락지를 이루면 이 정도로 같게 나오지는 않거든." - P87

"하나의 가설이 될 수는 있겠지. 그런데 솔직히 잘 모르겠어.
테러를 하려면 모스바나 말고도 훨씬 좋은 선택지가 많지. 굳이이런 식물을 골라서, 굳이 유전자를 개조하는 어려운 수고까지해서, 고작해야 산림청 직원들이랑 근처 지역 주민들만 괴롭히는 소심한 테러를 한다고? 동기가 짐작이 안 돼. 어떤 미친 사람이・・・・・・ 그냥 장난을 치는 거라면 모를까." - P88

자꾸 생각이 여기저기로 튀고 있었다. 멍하게 서 있는 아영의앞에서 윤재가 손을 살짝 흔들었다.
"괜찮아? 너무 어렵나? 갑자기 멍해졌네."
"윤재 언니. 우리 이번에 에티오피아에 가면, 개인 일정은 당연히 없죠?" - P89

"그렇겠지. 학회가 열리는 호텔도 시내에 있고, 왜, 관심 있는곳이라도 있어? 그냥 팀 따라다니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사적인일로 움직였다가 감사라도 받으면 큰일나." - P89

아영은 스트레인저 테일즈에서 받은 그 제보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짧은 머뭇거림 끝에 말했다.
"사실 정말로 학술적인 목적인지 좀 애매해서요." - P90

아디스아바바는 더스트 시대가 끝난 이후 가장 먼저 재건된 도시였다.  - P90

옆에서 윤재가 알은척을 했다. 이전에 아디스아바바 학회에와본 윤재와 달리 아영은 이번이 첫 참가였다. 이국적인 음식과 화려한 색상의 공예품에 시선이 이끌리다가도, 아영은 또다시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여기서 정말로 ‘랑가의 마녀들‘을 만날 수 있을까? 거짓 제보에 속은 것이라면 어쩌지? 계속 머릿속에서 이어지던 잡생각은 시원한 커피를 박스에 담아 와 돌리는수빈 덕분에 잠시 흩어졌다가, 덜컹거리는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는 동안 다시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 P91

지난 에티오피아의 심포지엄 자료집에도 ‘종식 직후의 민간약초학자들‘ 같은 발표문이 실려 있었는데, 자료집을 받아 들춰보긴 했지만 그 주제는 평소 아영의 관심사가 아니어서 꼼꼼히 살펴보지 않았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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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치버리의 논문은 1997년에 마침내 출판되었다.²⁶ 이 논문은 소위 일부일처성이라 알려진 푸른박새와 청둥제비 암컷들이제 새끼를 부지런히 먹이는 사회적 배우자보다 더 섹시한 수새와의 불륜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닌다고 밝힌 다른 연구들에 합류했다. - P122

26 Diane L. Neudorf, Bridget J. M.
Stutchbury and Walter H. Piper, Co-vert Extraterritorial Behavior of FemaleHooded Warblers‘ in Behavioural Ecolo-gy, 8: 6 (1997), pp. 595-600 - P460

성적으로 거리낌 없는 명금류 암컷은 행동생태학계를 뒤흔든혁명의 ‘일처다부제 혁명‘²⁸의 불씨가 되었다.
동물의 왕국에서 암컷은 수컷에게 빼앗긴 성적 운명의 통제권과 알의 친자 결정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 P122

28 Zuk and Simmons, Sexual Selection, p.
32

음탕한 랑구르원숭이

암컷의 방탕함에 모두가 황당해하는 것은 아니다. - P123

허디는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성차별적 교리를 솎아내고 여성의 진정한 본성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새로운 이론의 씨를 뿌렸다. 허디는 ‘조신한 암컷 신화‘³²에 최초로도전한 인물이고 많은 이들에게 원조 페미니스트 다윈주의자로 알려졌다. - P123

1970년대 초반 하버드대학교 소속 대학원생으로서 허디는 사회생물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의 진원지에서 그 분야의 귀재인 로버트 트리버스의 궤도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³³ - P124

33 Sarah Blaffer Hrdy, ‘Myths, Monkeysand Motherhood‘ in Leaders in AnimalBehaviour, ed, by Lee Drickamer and Donald Dewsbu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 P461

"당시 하버드에서 훈련받은 저한테는 저렇게 이해할 수 없는행동을 해석할 배경지식이 없었어요. 시간이 지나서야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헤퍼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이 랑구르원숭이 암컷의일상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지요."³⁷ - P125

/heby25 Susan M. Smith, ‘Extra-pair Copula-tions in Blackcapped Chickadees: TheRole of the Female‘ in Behaviour, 107:1/2 (1988), pp.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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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의사소통의 이해

학습목표 및 성과
1 대인 의사소통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
2 의사소통 과정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
3 의료상황에서 의사소통 방해요인을 설명할 수 있다. - P103

1) 의사소통의 정의

의사소통(communication)은 라틴어의 communis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communis는 공유 또는 공통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의사소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 동물, 기계의 의사소통을 모두 포함하여 의사소통이란 상징을 통하여 의미를 전달하는 현상, 즉 정보 전달의 현상이다"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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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맞은편에는 사진 속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가 친근하게말을 걸어주는 것만으로 나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이따금 입을 다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P294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 순간 나는 흠칫 놀라 눈을 떴다. 어둑어둑한 찻집의 웅성거림도, 커피 향도, 창문으로 비치는 희끄무레한 빛도 전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 P294

그때 갑자기 관측소 밖에서 야수의 포효가 들려왔다.
일어나 블라인드 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더 있어야 하는지 온통 어두웠다. 한 번 더 포효가 들려왔다. 섬에서 생활하게 된 뒤로 포효는 종종 내 잠을 깨웠다.  - P295

계단을 내려가자 사야마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사야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화장실이나 샤워실을 쓰는것 같지도 않았다. - P295

왕 같은 관록을 떨치며 그림자는 천천히 초지를 걸어왔다. 달빛을 받은 몸뚱이는 파르스름하게 인광을 발하는 듯 보였다.
커다란 호랑이였다.
(중략)
호랑이는 유리 너머에 눕더니 조각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뭔가를 호소하듯 나를 쳐다봤다. 몹시 쓸쓸해 보이는 눈이었다.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호랑이는 사야마 쇼이치였다. - P296

이튿날 아침, 나는 전망실의 간이침대에서 잠이 깼다.
(중략)
계단을 내려가자 사야마 쇼이치는 자기 방 구석에 있는 부엌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 P296

"어제 한밤중에 호랑이를 봤지?" 베이컨에그를 먹으며 사야마쇼이치가 불쑥 말했다. "그건 나야."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사야마를 쳐다봤다.
혹시 꿈이었던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랐군?"
"그야 놀라죠." - P294

"장난치는 건 아니겠죠?"
"믿지 않아도 돼."
"......선천적으로 그런 겁니까?"
"이거 봐, 선천적으로 호랑이로 변신하는 인간이 어디 있어?
이건 아마 이 섬에서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일 거야. 가끔씩 기억이 없을 때가 생기면서 점점 상황을 알게 됐지. 호랑이인 동안의 기억도 단편적으로는 나." - P297

"네모 군, 지난 2주 동안 자네는 훌륭하게 내 조수로 일해 줬어. 신뢰할 만한 인물이라는 걸 스스로 입증한 거지. 그래서 이제 자네에게 이 관측소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 주고 싶군. 이제부터 우리는 새로운 모험에 나설 건데, 그 모험의 의의를 자네가 꼭 이해해줬으면 하거든."
진지한 말투에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알겠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 P298

"난 ‘학파‘에서 파견됐어."
‘학파‘라고요?" - P298

사야마 쇼이치는 해도를 탁 치며 말했다.
"얼마 전에 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군도 이야기를 했지. 요새는 그걸 선원의 환각이거나 황당무계한 뜬소문으로만 보고 무시하거든.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노력을 거듭하는 건 오로지 학파뿐이야. 내가 이 관측소에서 지내온 건 그 때문이지."
이 사람은 지금 나를 데리고 장난치는 건가? - P299

사야마 쇼이치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학파는 이 해역의 수수께끼를 풀려 하고 있어. 하지만 진짜 목적은 그 다음에 있지. 이 해역의 불가해한 현상을 성립시키는 기술, 즉 ‘창조의 마술‘을 손에 넣는 게 우리 목적이야."
사야마 쇼이치는 옆에 쌓여 있는 책 더미에 손을 뻗어 맨 위에 놓여 있던 종이 서류철을 집었다. 속에는 클립으로 묶은 서류가 들어 있었다. 그는 사진 한 장을 빼서 내게 보여주었다.
"이 인물을 본 적 없어?" - P300

"마왕이야."
잔교에서 만났을 때 사야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마왕의 자객은 아니겠지?" - P301

"여기 놓여 있는 걸 잘 봐둬."
나는 사진에 얼굴을 가져갔다. 사야마가 가리킨 것은 테이블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였다. 마왕은 왼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손을 상자에 대고 있었다. - P301

"이게 마왕의 카드 상자야. 이 작은 나무 상자가 바로 마왕이 부리는 ‘창조의 마술의 원천이거든. 말하자면 ‘마법의 지팡이‘
라고 할까. 그 비밀을 밝히려고 학파는 지금까지 여러 밀정을마왕에게 보냈어. 그런데 모두 소식이 끊겼어. 내 전임자도 이 사진을 찍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군도에 발을 들여놨다가 그 뒤로 소식이 없어."
"・・・・・・ 두렵지 않습니까?" - P301

"관측소가 있는 이 섬은 세계가 끝나는 곳이야. 이 바다는 우리 세계와는 다른 원리를 따르고 있어. 무에서의 창조가 가능한 세계, 말하자면 ‘천지창조의 원점‘이지. 마왕만이 창조의 마술의 비밀을 알고 있어. 그 답을 얻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 가치가 있잖아?" - P302

그 젊은 여자 사진이었다.
"이 사람은 마왕의 딸이야." - P302

"그날 밤 이 작업실에서 미쳐 날뛰는 폭풍 소리를 듣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어. 세계의 종말은 곧 세계의 시초이기도 하다.
이 폭풍이 지나가면 새로운 전개가 섬에 찾아들 게 틀림없다고말이야. 그랬더니 예상이 적중해서 날이 밝은 다음 앞바다에이상한 섬이 출현했지 뭐야. 나는 당장 보트를 타고 상륙해 봤어. 역시 그건 ‘창조‘된 섬이었어. 대체 이건 무슨 징조인 걸까 생각하는데………….."
"제가 표류해 왔군요."
"여기서부터 모든 게 시작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 P303

어두운 밀림을 지나온 눈에는 모든 게 별천지처럼 보였다.
왼편에 솟은 시커먼 바위땅과 오른편의 나무들에 파묻힌 곳 사이에 안긴 작은 후미는 신비적인 고요함을 지니고 있었다. 잔교를 걸어가니 발밑에서 파도가 찰싹거렸다. - P304

"걱정할 거 없어, 어차피 상식이 안 통하는 바다니까."
"제발 호랑이로 변신하지는 말아주세요."
"내가 변신하면 사양 말고 바다로 뛰어들라고."
다행히 사야마가 호랑이로 변신하지도, 보트가 파도에 뒤집혀 침몰하지도 않고 앞바다의 작은 섬에 상륙할 수 있었다. 보트를 모래사장으로 끌어올린 뒤 나는 섬을 한 바퀴 둘러봤다.
섬이라기보다 여울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 P305

"저는 정말 인간일까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네모 군."
"사야마 씨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불안해져서 말이죠. 저는제가 누군지 기억을 못 합니다. 난파돼서 기억을 잊은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닐지도 모르죠. 기억을 못 하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과거가 없다면?" - P306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해." 사야마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직 존재하지 않으니까."
"존재하지 않으면 상륙할 방법이 없잖습니까."
"마왕은 마술로 그 섬들을 만들어 냈어. 우리는 마술의 구조를 몰라. 전임자가 여러 명 상륙했는데 내가 조사한 바로는 정해진 방법은 없더군." - P307

"마왕의 마술로 만들어졌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저는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죠."
"뭐,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겠어. 하지만 인간일 가능성도 마찬가지로 있어. 적어도 같이 생활해 온 내가 보기엔 네모 군은충분히 인간으로 보이는데."
"고맙습니다." - P306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해." 사야마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직 존재하지 않으니까."
"존재하지 않으면 상륙할 방법이 없잖습니까."
"마왕은 마술로 그 섬들을 만들어 냈어. 우리는 마술의 구조를 몰라. 전임자가 여러 명 상륙했는데 내가 조사한 바로는 정해진 방법은 없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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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 - P957

2.
우린 공원에서 소련 백과사전을 읽고 있었어. 스탈린이 살아 있던 시절에 나온 사전이었지. 너희 어머니가 가지고 계시던 책 말이야. ‘만국의 아버지‘는 다양한 재능을 갖고있었지만, 심지어 위대한 과학자이기도 했던 모양이야. - P358

좋아, 그 일에 관해선 내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거든. 유대인 여자애 두 명이 1960년대에 나온 두꺼운 철학 사전 한 권을 가지고 공원으로 산책을 갔어. 그 사전에는 우스꽝스러운 내용이 많아서, 걔들은 나무 그늘에서그걸 보고 웃으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지. - P359

3.
가끔은, 학교가 끝나면 우린 그냥 작별 인사를 할 수가없었어. 그래서 노예들이나 입을 것 같던 그 멍청한 교복을 입고 체르니셰우스카야 거리에 있는 나무 아래서있었지. 교복 동복의 갈색은 마치 [빈 칸을 채우시오]. 마치진흙 속 깊숙한 곳에서 초콜릿 스펀지케이크를 파먹고 있는 지렁이들 같았지. - P362

4.
네 열여섯 번째 생일. 내가 준 꽃들, 네 키만 했던가, 어쩌면 더 컸던 것 같네. 끌어안고 깔깔 웃었지. 우리 그때이런 말을 했잖아, 그 꽃들이 "술 취한 올림픽 수영 선수들" 같아 보인다고. 잔인한 낙천주의 - 이런 표현 들어본 적 있니? - P363

6.
가끔은, 학교가 끝나면 우린 그냥 작별 인사를 할 수가 없었어. 아니면 얼른 작별 인사를 하고 잽싸게 집으로 가서 곧바로 서로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지. 너도 계단 한 층을오르고, 나도 계단 한 층을 오르고, ‘제압‘해야 하는 언니는 너한테도 한 명, 나한테도 한 명. - P366

네가 인터넷 여기저기를 뒤져 가며 나를 찾아보고 나서 나한테 전화했던 게 몇 년도였더라? 2003년? 2005년이었나?  - P367

 그 연구자는 내 "감정적 강렬함"의 예를 여러 가지 들면서 그것들이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시공간을 드러내 준다고 쓰고 있었어. 내 세번째 책에서 몇 단락을 인용했더라고. 맥 빠지게 주절거린 끔찍한 부분들이었는데, 지금 내가 잘난 척하는걸까? 그런 것 같네. 문득 궁금해진 게 있어. 화가가 자신이 옛날에 그림을 그려 놓은 캔버스를 무심코 보게될 때도 이런 식으로 두 눈이 화끈거릴까. - P370

8.
지금 훑어보고 있는데, 네가 처음 몇 년 동안쓴 편지들은 다 있네. 1990년, 1991년, 1992년 그때 말이야. 그 뒤로는 한 통도 없어. 네가 나한테 편지 쓰는 걸 그만뒀었나 봐? 모든 걸 그만뒀었나? 네가 모든 게 끝났다는결론을 내렸던 때가 그때였니? 난 기억해. 그말. 우리가 가진 거라곤 과거뿐이고 그걸로는충분하지 않아라는 말. - P370

10.
CNN 라이브, 스튜어트 루니가 래리 킹에게

(후략) - P374

11.
우리 4학년 때 담임이었던 라리사 페트로우나 선생님은 나무 뒤에서 담배를 피우곤 했어. 혼자 살았고, 선생님이 숨는 것과 담배를 피우는 것, 숨어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내가 그분에게서 유일하게 흥미롭다고 느낀 점이었어. - P376

 기억나는지 모르겠는데 학교에 찾아와서 내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 주고 ‘오토‘ 카탈로그 한권을 선물로 줬어 (그때 독일의 패션 브랜드 카탈로그들은 정말 멋졌는데). 난 우리 언니의 웨딩드레스로 만든 치마에 수수한 흰색재킷, 검은색 상의를 입고 있었어. 너희 언니가 걸어 준 진주 목걸이도 하고. - P377

13.
디나 루비나⁶⁹는 이민을 떠난 지 수년 뒤에 모스크바의어느 서점에 잠깐 들렀다. "끔찍한 충격이었어요. 모든책이 이미 쓰인 뒤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전부 출간돼있었어요. 이미 책들이 너무 많아서 뭔가 더 쓸 필요가전혀 없었죠. 무언가를 쓰기로 마음먹으려면 독자를 위해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어요. 물러서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죠." 우리는 같은 날 루비나의 인터뷰를 지켜봤지. 나는 여기 (거기)서, 너는 거기(여기)서.


69Dina Rubina(1953~). 타슈켄트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던 그는 소련에서 작가로 활동하다 1990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 P379

14.
(전략)
그 부츠를 신은건내 평생을 통틀어 서너 번 정도일 거고 그이상은 절대 아니야! 부츠는 조심스럽게 묶어 놓은 실에 매달린 채로 아직도 창고에 걸려 있어 (그래야 손으로 만든 장식이 들어간몸통에 주름이 생기지 않는다나, 맙소사). - P381

- P382

그다음 날 밤에는 잠이 안 와서 남의 집 부엌에서 (내가 어디서 누구랑 사는지는 기억하지?) 거의 담배 한 갑을 다 피워 없앴지 뭐니(1주일치 일용할 양식이었는데! 젠장!). - P383

15.
난 새로운 삶을 살면서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테고 그들은 (질문을 한다거나 해서) 너에 대해 알게 될 거야. 그때마다 난 깜짝 놀라며 당혹스러워하겠지. ‘도대체 어떻게......?‘ - P384

16.
2008년에 찍은 그 사진들은 내가 지웠어. 네 사진은 기꺼이 잘라 내서 보관하려고 했지만 그건 불길한 행동이잖아. 내가 도저히 못 보겠는 건 내 얼굴이야. 그 무렵의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는 내 얼굴. - P385

18.
(전략)
그 애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난 정말로그런 생각을 해. 5년 동안 금요일마다 그랬지. 나는 술도 마셔 보고, 잠도 자 보고, 일도해 보고, 걷기도 해 봤어. - P388

최악의 요일은 토요일이야. 온갖 두려움과 걱정이 머리 위에서 눈덩이처럼 떨어져 내리거든.  - P389

머릿속에 벽돌처럼 박혀 있는 말이잖아. "고양이는 자기가 먹은 게 누구 고기인지 안다"⁷⁰라는 말이랑 같이. 그리고 어떤 사람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을 "높은 산 속으로" 데려가라는 (V.S. 비소츠키⁷¹의) 말도 있지. - P392

70
러시아 속담. ‘죄를 지은 사람은 다른사람이 고발하지 않아도 양심의 가책때문에 말이나 행동을 통해 스스로의 죄를 드러내게 된다‘는 뜻이다.

71
Vladimir SemyonovichVysotsky (1938~1980). 음악가이자작가, 배우. 체제 친화적이지 않은 작품 활동을 하면서 동료 예술가 및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 P392

소금의 중량에 대한 얘길 다시 이어가 볼게. 내게 필요한 소금은 딱 한알이야. 그거면 돼 (확실히 몇몇 사람들은 남들보다 빨리, 금방 파악할 수 있거든). 그런데 만약 B가 집에 와서 "나 방금 어떤 상점 점원하고 친해졌어"라고 행복하게 선언한다면(그 애들은 서로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텐데 말이야), 그럴 때 나는 그 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을까?  - P394

21.
 PP우크라이나에 대한 SMM⁷⁴은 다음과같은 사항들에 관한 최신 정보를 매일 제공한다. 정전 위반 행위/포격 상황 및 민간인사상자/병기 철수 상황 / 안전지대에 배치된 무장 전투 차량과 대공 병기/물 공급 중단 상황 / 지뢰 및 지뢰 위험 신호, 부비트랩과 UXO⁷⁵에 관한 정보.
인터넷에서 무료로 읽어볼 수 있다.
아무런 승인 절차도 필요 없다.

74
특별 감시 임무Special MonitoringMission의 약자. 유럽 안보 협력기구는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분쟁이 본격화한 2014년에 이 특별 감시단을파견했다. 감시단은 러시아의 침공이 본격화한 2022년 3월에 철수했으며,
업데이트 역시 중단되었다.

75
Unexploded ordnance의 약자.
불발탄을 뜻한다. - P398

어젯밤에는 친구네 집에서 잤어. 친구가 멀리갈 일이 있었는데 아들들을 봐 줄 사람이없었거든. 밤중에 끔찍한 폭풍이 시작됐어.
천둥도 쳤고 번개가 수직으로 내리꽂히더라.  - P399

22.

10세 이하 어린이 축구팀들의 축구 경기가 로드 보호지역⁷⁶에서 열렸어. "난 인간 방패다!" - 이건 센터백을 맡고 있던 내 아들이 특정인을 염두에 두지는 않고 한말이야.

76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보호지역 Reserve은 공원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로드 보호 지역 역시지역민들을 위한 공원에 해당하는 장소다. 이 표현은 앞선 21번 챕터가 선보이는 안전 구역 개념과 기묘한 방식으로 공명한다. - P400

23.
(전략). 우리가 만나기 전에 네가 문자를 보냈어.
"생일 축하해. 다시는 만나지 말자." 생일에 관해서라면 우린 전에도 그랬던 적이 있잖아, 아닌가? - P402

2005년 이전의 네 편지랑 사진들 전부를 잃어버렸어. 이사를 하다가 사진 앨범들이 든 가방 하나가 없어져 버렸거든. - P403

24.
자말라의 <1944>, 534점.⁷⁷ 혹시 너도 보고 있니?


77

2016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우크라이나 대표 자말라가 우승한 일을 가리킨다. <1944>의 가사는1940년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크림 타타르족을 강제 이주시킨 일을배경으로 하고 있다. - P404

26.
75년 전부터 -75년은 우리 어머니의 나이,
우리 어머니의 평생과 같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지, 얼마나 많은 포위 공격이 더 발생했는지 너한테 말할 필요는 없을 거야. 그런데 그 일들은 아직도 그자리에 머무르고 있어.  - P408

유튜브에 있는 관련 영상은 다 봤어. 거기에사로잡혀 버렸어. 정신적으로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말이야. 그 여러 영상 중 하나에서는 사람들이 땅에 떨어져 얼어붙은 참새를 두고 싸우고 있었어.  - P409

27.
(전략)
네가 떠나던 날...... 내 열여섯 번째 생일…네가 내게 준 노란 장미 꽃다발………… 우린 그장미 가운데 한 송이를 가르시나에 있던 아파트의 네가 살던 동 입구 옆 눈밭에 기념으로 꽂아 놓았지. - P412

(전략)
 그러다 어떤 사람이 날 플랫폼으로 다시데려갔고, 우리 셋은 결국 너희 집에 가서 네가 날 위해 남기고 간 그레벤스치코프⁷⁸의 음반들과 ‘꼬마 과학자의 화학 실험실‘ 세트를 챙겼지.

78
Boris Grebenshchikov(1953~).
1972년에 결성한 록/포크 밴드아쿠아리움Aquarium을 통해 소련시절부터 활동해 온 러시아 음악가.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음악 활동을해온 그는 현대 러시아 밴드 음악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 P413

28.
그날 다른 사람들은 전혀 기억이 안 나. 그냥 너랑 나 둘만 있었을 수는 없다는 거 아는데.
"이민이란 내장이 튀어나와 길 위에 펼쳐지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할복자살 같은 거죠." 우리는 같은 날디나 루비나의 인터뷰를 본다. 너는/나는 거기 (여기)서. - P418

29.
우리는 절친한 친구였다. 나는 우리 얘기를 썼다. 이렇게. "죽지 않아 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건 개인적인 편지속에서 오직 너에게만 하는 말이야." - P419

32.
우리가 만나기 전에 너는 말했지. "우리 다시는 서로 만나지 말자. 그럴 필요 없잖아. 의미도 없고." 난 말했어.
"나한테 한 시간만 내줘." 그건 한 시간이라는 뜻이 아니었어. 네 삶의 남은 시간 전부라는 뜻이었지. - P422

역사는 반복된다 - P145

오늘 아침, 이라기보다는 얼마 전의 어느 날 아침, 나와 같은 열차 칸에 탄 두 명의 남자가 고개를 든다. 50대 남자 두 명인데 실크로 된 것 같은 수수한 스타일의 넥타이를 맸다. 교통 단속 카메라가 터질 때처럼 황급한 깨달음이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고, 곧 그들은 다음 역이름이 방송으로 나오기도 전에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웃고 있다. 이게 얼마 만이야?  - P146

쉿.
내 앞에 놓여 있는 건 시간이다. 시간은 강물이아니다. 시간은 기차에서 만난, 몸에 와 닿는 서류 가방을 느끼며 서로를 끌어안는 두 명의 낯선 사람이다. - P147

나는 그 아이들이 교외에서 일어난 불가사의한 범죄의 목격자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냥 법학을 공부하는, 현장 학습을 나와 지루해하는 학생들일 뿐이었다. - P147

오전 내내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별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음주 운전 재범 판결을 받은 남자 다음으로는 의류 브랜드 ‘엘우드‘의 매장 관리자가 나오는데, 시험관 아기 시술이 잘되지 않아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여자다. 이어서 옷을 잘 차려입은 소말리족 남자가 역시 옷을 잘 차려입은 소말리어 통역사와 같이 나온다. 남자는 안전벨트 미착용으로 기소되었다. - P149

"내가 저지를수 없겠다고 생각되는 범죄 같은 건 없다." 괴테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내 관심사다Homo sum: humani nil a me alienumputo." 이것은 고대 로마의 극작가 테렌티우스가 한 말이다. "동화 같은 결말은 없어요." - P149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이니까요." - P150

1주일 전, 나는 그 카페에서 부치안 판사 옐레나 포포비치를 만났다. 그때 그는 치안판사가 된 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이해하게 된게 있다고 말했다. 바로 자기 앞에 출두하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니라 그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처한 ‘위기‘ 속에는 희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 P150

집에 오는 길, 반쯤 빈 오후 열차 칸에는 웃음을 쏟아 내는 사람도, 옛 친구의 무릎 위로 쓰러지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혼자였다. 가방을 들고, 재킷을 입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가지고, 이리저리 헤매는 눈빛으로, 울리지 않는 커다란 휴대 전화를 두 손으로 꾹꾹 누르면서. - P151

걱정이라고는 없던 순수한 아이가 빛나는 두 눈을 지닌 청년이 되고, 그러고는 곧바로 누군가의 부모가 되고, 그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두 눈도 마찬가지로 금세 빛나게 된다. 그다음 장면에 등장하는 그들은 앞서 나온 인물과 같은 사람이지만, 그 두 눈은 흐려져 있고, 머리칼은 희끗희끗해졌고, 몸은 뚱뚱해지거나 말라 있다. - P151

아무리 허술한 감독이 만들었다 해도,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허구라 해도, 삶에서 죽음까지를 3분 안에 보여 주는 이런 영상을 보는 일, 그러니까 에어 매트리스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듯 인간의 삶으로부터 빨려 나가는 시간을 쳐다보는 일에는 어딘가 참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 P151

오랫동안 나는 그런 경험이 왜 고통스러운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이해하게 되었다. 그건 시간 때문이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괜찮게 만들어 준다. - P152

반복되는 상황 속에는 감지할수 없을 만큼 미세한 차이가 존재하며, 그 차이들은 똑같이 반복되는 일들을 때로는 빌어먹을 것들로 느껴지게 만들고, 또 때로는 고마운 것들로 느껴지게 만든다. - P152

일어나기, 머리빗기, 빵 굽기, 태양이 하늘로 솟아오르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기. 수없이 흘러가는 계절들. 온화하게 반복되는 매일의 활동 속에는 보이지 않는 그물이던져져 있고, 그 그물은 사람들을 떠받치고 보호한다.
왜냐하면 반복되는 것들―들뢰즈가 말한 바에 따르면
"바꿀 수도 대체할 수도 없는 특이성들"은 결코 똑같을 때가 없기 때문이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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