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만연한 불안은 실제로는 영구적인 재앙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구조적인 이유와 연관된, 그래서 구체적인 사건에서는 그 원인을 찾을 수없는 넓게 퍼진 불안에 괴로워한다. - P30

자유롭다는 것은 곧 어떠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반대로 자유가 강박을 일으킨다. - P31

자기 창조도, 창의적 자기실현도 마찬가지로 압박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최적화하고 실현한다는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죽도록 착취한다. - P33

희망은 우리를 고립시키지 않고 연결하며 공동체화한다는 점에서 불안의 반대 개념이자 ‘반대 기분Gegenstimmung‘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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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인간파괴
해부



아마 우리가 겪는 문제, 인간이 겪는 문제의 뿌리는 이것일 것이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인생의 모든아름다움을 희생하고 우리 자신을 토템, 십자가, 피의 제물, 첨단 모스크 종족, 군대, 깃발, 국가에 가톨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제임스 볼드윈. 《다음 번 화제》


공포 관리 이론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생물이 기본적으로 지나는 자기보호 성향과 정교한 인지 능력이 결합할 때 인간은 자기가 취약한 존재라는 것과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결과 무력감을 불러일으키는 공포가 발생한다. - P201

 그러나 우리와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마주치면 우리의 문화적 세계관과 자존감에 대한 신념이 흔들리고 필연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 P202

하마스 위성 방송국 알 아크사Al-Agsa는 이슬람교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유대인을 증오하도록 가르치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가자 지구를 비롯한 유럽 전체에 방송한다. 미키 마우스를 베껴 만든 캐릭터파르푸르가 등장하는 이 프로그램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 P204

인간이 증오와 폭력을 사용하는 이유는 집단생활하는 영장류의 습성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침팬지는 자기 영역을 지키고 확장할 때 공격성을 드러내며 가끔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은다른 침팬지를 죽이기도 한다. 3만 년 이상 이전에 살았던 초기 인류수렵채집인들은 음식이나 물, 짝 같은 자원을 얻는 데에 유용한 텃세를 유지하고 향상시킬 목적으로 싸움을 벌였다. - P205

죽음을 초월하려는 갈망은 서로를 향한 폭력을 부채질한다. 내가 속한 문화적 사물 체계를 통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공포를억누르지만, 전혀 다른 신념 체계로 이 공포에 대처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인 것이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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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3장

무의식 없는
초현실주의


(전략).
 자본주의와 근대는 성스러움과 ‘정신적인 것‘의 멸종과 더불어, 모든 사물의 깊은 배후에 존재하는 물질성materiality이 마침내 백주의 햇빛 속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땀 흘리며 발작하는 시대라할 만하다. 문화 역시 그러한 것 중에 하나로서, 그 근본적인 물질성이 명시적이고 회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  - P155

 즉 문화가 그 구조와 기능에 있어서 언제나 물질적이었거나 유물론적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면, 이는 문화가 물질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은 근대 이후의 인간은 그런 문화의 물질성을 발견하기 위한 어휘를 가지고있다. - P156

문화가 언제나 미디어의 문제였으며, 또한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형식이나 장르, 심지어는 영적 훈련과 명상, 생각과 표현까지도 사실은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미디어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된 이유는, 결국 오늘날의 문화가 미디어의 문제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기계의 발명과 문화의 기계화 그리고 의식산업ConsciousnessIndustry*에 의한 문화의 매개는 이제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 ‘의식산업‘은 독일의 이론가이자 시인인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Hans Magnus - P156

오늘날 미디어의 우선성이 부각되고 있는데, 이는 결코 새로운 현상이라 할 수 없다. 지난 70여 년 동안 고명한 현자들이 경고했던 것처럼, 20세기의 지배적인 예술 형식은 결코 문학이 아니었다(회화나 연극 혹은 교향악도 아니었다). - P157

문학은 종종 현명하면서도 기회주의적인 방식으로 영화의 기법을 흡수하여 자신의 내용물로 만들면서, 모더니즘 시기내내 이데올로기적으로 지배적인 미학 패러다임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또한 여전히 계속해서 풍부하고 다양한 혁신을 추구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놓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20세기의 현실과 깊이 공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 시대와 그저 단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만족했다. - P158

 즉 영화는 일단의 문화적 가치와 범주들 속에 갇혀 있는데, 이것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명백히 한물 간 것 혹은 ‘역사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영화가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적으로 변하고 있다거나, 최소한 몇몇 작품들은 이미 포스트모던적이라는 주장은 분명 맞는 말이다. - P159

 여기에서 여러 정황적 증거들을 일일이 다루지는 않겠지만, 영화나 문학은 내용, 형식, 기술에서 심지어 주제에 이르기까지 다른 예술 혹은 매체에 대한 의존도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데, 이 예술 혹은 매체가 바로내가 오늘날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리라고 여기는 최고의 후보자이다.
이 후보자의 정체는 비밀이라 할 것도 없다. 바로 비디오다. 이 비디오는 쌍생아와 같은 두 가지 형식을 통해 나타나는데, 상업적 텔레비전과 실험적 비디오 혹은 ‘비디오아트‘*가 그것이다.

* 이후 논의에서 제임슨은 비디오와 텔레비전을 똑같은 매체로 취급하고 있으며, 비디오아트나 상업적 텔레비전 쇼 등과 같은 하위 범주만을 구별하고 있다. 따라서 번역을 할 때에도 그 둘을 크게 구별하지 않았다. - P159

(전략). 오히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 내가 입증하고자 하는 명제라 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이러한 주장이 전제하는 흥미로운 점과 더불어, 특히 비디오에 새롭고 보다 중심적인 우선권을 부여함으로써 파생되는 다양한 새로운 결과들을 설명해보고자 한다. - P160

비디오 이론이 존재하느냐에 대한 의구심은 종종 제기되었다. 1980년 10월 ‘더 키친The Kitchen‘*이 주최한 이 주제에 관한 야심 찬 컨퍼런스는 이를 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초청된 여러 고위 인사들은 연이어 강단에 올라와 왜 자신이 초청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불평만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텔레비전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들 중 몇명은 텔레비전을 본다고 인정했지만 말이다).


* ‘더 키친‘은 뉴욕에 위치한 비영리 예술·공연 공간이다. - P161

 텔레비전은 영화의 위대한 순간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계속 떠오르거나 잔상을 남기지도 않는다(물론 ‘위대한‘ 영화라고 해서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진 않는다). 기억과 비판적 거리의 구조적 배제에 대해 설명하려는 시도는 어쩌면 우리를 불가능해 보였던 비디오 이론으로 이끌어 갈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왜이론화가 불가능한가에 대한 설명이 그 자체로 하나의 이론이 되는 것이다. - P162

하지만 내 경험상 그렇게 생각하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내면의 깊은 흐름은 종종 기만을 통해, 혹은 가끔은 배반과 책략을 통해 깜짝 놀라게 할 필요가 있다. - P162

그러나 만일 형식적 혁신과 확장된 가능성의 언어를 통해 우리가 새로운 형식과 시각 언어의 만개와 다양화를 기대할 수 있다면, 이렇게실험적 비디오를 통해 텔레비전에 접근하는 것을 멀리하고 다른 방법으로 대체해야 한다. 그러한 언어는 당연히 존재하며, 또한 그것들은 (때때로 백남준의 1963년 최초 실험에서 시작된다고 여겨지는) 비디오아트의 짧은 역사에 비하면 아주 놀라울 정도이기에, 어떤 설명이나 이론이 그 다양성을 모두 포괄할 수 있을지 궁금할 정도다. - P163

문화 수용이라는 좁은 범위에서 보더라도, 특수한 종류의 작품이나 문체 혹은 내용에 대한 지루함은 언제나 우리의 실존적 • 이데올로기적·문화적 한계에 대한 값진 징후로서 생산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즉 지루함은 타인들이 예술의 성격과 가치에 대한 우리 자신의 합리화에 대하여 행하는 문화적 실천 및 위협 들 중에서,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표로서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다. - P164

(전략). 특히 비디오아트를 보는 상황과 그와 유사한 실험영화를 경험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상기해본다면, 이런 특정한 형식의 미학적 지루함의 성격은 흥미로운 문제가 된다(사회적·제도적 의식을 거행하듯 공손하게 앉아 관람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라도 비디오를 꺼버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앞서 제안했듯이, 이 비디오테이프혹은 텍스트가 단순히 나쁜 것이라는 손쉬운 결론을 피해야 한다. - P165

그렇다면 두번째 가능성, 즉 설명을 위한 두번째 유혹이 있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와 연관된다. 비디오 제작자의 선택이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것이라면, 21분이라는 비디오 상연 시간은 하나의 도발로서, 관객에 대한 계산된 공격으로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노골적인 공격 행위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러한 경우 우리의 반응은 온당하다. - P165

 일례로 사진의 초창기 시절, 즉 은판사진법이 사용되던 시절에,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일정 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앉아있어야만 했다. (중략).
그래서 초창기 사진사들은 전기의자 비슷한 것을 고안하여, 가장 낮은 하층민부터 일반적인 장교들은 물론이거니와 링컨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사체를 이 의자에 앉혀놓고 죔쇠로 몸 뒤쪽을 고정시켜 5~10분의 노출 시간 동안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 P166

 실험적 비디오의 선조를 1960년대 초 백남준의 작품에서 찾건 아니면1970년대 중반에 시작된 새로운 예술의 홍수 속에서 찾건 관계없이, 비디오아트는 역사적 시기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시대에 나타난 것은 분명하다. - P166

기계에는 양면이 있다. 즉 주체로서의 기계가 있고, 객체로서의 기계가 있다. 그 둘은 닮았지만 서로 무관심하다. - P166

 상연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디오 관람자는 이제 움직이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통합되고 중화된다. (중략). 그러나 비디오텍스트의 총체적 흐름은 자발적 집중을 요구하기에 관람하는 동안 거의 쉬지 못한다. 따라서 브레히트 연극의 관람객처럼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심리적 거리는커녕, 영화관에서 편안하게 스크린을 대충 훑어보는 것과도 상당히 다르다. - P167

 최근 영화 이론에서 영화 장치에 의한 매개와 영화 관람객의 주체 구성사이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이 (대개는 라캉적 관점에서) 제공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관객은 탈인격화되지만 동시에 여전히 자아와 재현 사이에 허구적 동일성을 다시 정립할 수 있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받는다. - P167

어쨌든 이런 의미에서 실험적 비디오는 허구가 아니며, 허구적 시간을 투사하지도 않고, 허구나 허구들을 가지고 작업하지도 않는다는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비록 그것이 서사 구조를 가질 가능성은 있지만 말이다). 일단 이렇게 구별을 해놓으면, 다른 구별도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새 문제들에도 접근할 수 있게 된다. - P168

이 상업 텔레비전에 대한 우리의 개탄이나 찬양과는 무관하게. 이것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아마도 실험적 비디오를 설명함으로써가장 잘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텔레비전 시리즈와 드라마 등을 다른 예술과 미디어 (특히 영화적 내러티브)의 매개에 의한 모방이라는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한다면, 아마도 텔레비전 프로그램 생산 여건이 지닌 가장 흥미로운 특징을 놓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P169

사실 시간성에 대한 다양한 현상학적 설명이나 시간에 대한 철학과 이데올로기 들과 더불어, 우리는 시간의사회적 구성에 대한 광범위한 역사적 연구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들중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작업장에서의 정밀시계도입이 가져온 효과를 분석한 E. P. 톰슨Edward P. Thompson의 고전적 에세이²다. 그런 의미에서 진짜 시간이란 객관적objective 시간이다. - P170

매체로서 비디오가 더 큰 물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이 암시하는바는, 상업 텔레비전 혹은 극영화 내지는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명백한 상호 참조 지점보다는 다른 지점을 탐색해야만 비디오의 공통점을 더 쉽게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 P172

한편 총체적 흐름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이는 실험적 비디오를 분석하기 위한, 특히 그러한 매체가 제시하는 연구 대상이나 단위를 구성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론적 의의를 지닌다.  - P172

포스트모더니즘 이 만개한 오늘날의 상황에서 (예술 작품이나 걸작과 같은 말에서 사용되는) ‘작품 work‘이라는 고전적인 언어는 모든 곳에서 거의 대부분 ‘텍스트‘
혹은 텍스트들과 텍스트성이라는 상당히 다른 언어로 대체되었는데, 이는 유기적이고 기념비적인 형식의 성취라는 의미가 전략적으로 배제된 언어다. - P173

 사실 비디오를 본다는 것은 사물 자체의 총체적 흐름 속에 빠져있는 것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너 시간짜리 비디오테이프를 순서 없이 연속해서 보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고 공중파와 케이블 텔레비전의 상업화 덕분에) 비디오는 도시적인 현상이라 할수 있다. 즉 집 주변에 비디오 대여점이 있어야 하며, 예전에 우리가극장이나 오페라하우스(혹은 심지어 영화관)를 찾아가는 것과 같은 제도적 습관처럼 격식 없이 편안하게 그곳을 들락거릴 수 있어야 한다. - P174

이런 조건과 의구심 들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구체적인 텍스트를가지고 논하지 않고는 비디오의 가능성을 보다 심도 깊게 파고들기 힘들 것 같다. 여기에서 1979년 시카고 예술학교에서 에드워드 랭커스Edward Rankus, 존 매닝John Manning, 바버라 레이섬 Barbara Latham이 제작한 29분짜리 비디오 ‘작품‘ 「소외국 AlienNATION」을 살펴보자.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분명 상상의 텍스트로 남을 것이다. (후략). - P175

 즉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이야기로 바꾸려고 시도하지 않겠는가? (자크 레나트 Jacques Leenhardt와 피에르 조자Pierre Józsa가 쓴 상당히 흥미로운 책 『독서를 읽다 Lire la lecture』 [Paris: Le Sycamore, 1982]에 따르면, 심지어 "플롯이 없는 소설"을 읽을 때조차도 이런 과정이 작동한다. 독자의 기억은 재단되지 않은 천으로부터도 "주인공"을 창조해내며, 이를 인식 가능한 장면과 서사적 배열로 재조립하기 위해 그것을 읽었던 경험을 훼손한다.) - P176

 만약 비디오의 기억 구조와 할리우드 유형의 극영화의 기억 구조 사이의 대비가 극명하고 명백하다면, 우리는 비디오의 시간적 경험과 실험영화의 시간적 경험 사이의 간극이 그에 못지않게 크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이느낌을 기록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 P176

따라서 사람들은 이런 비디오를 관람한 후에는 비디오의 소재들 몇 가지를 나열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다. 이 소재라는 것은 일단 주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의사-광고의 창고에서 물질적으로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바쟁André Bazin스타일의 촘촘한 미장센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 P177

(전략). 이 비디오테이프에서 ‘자연적인 것은 인공적인 것에 비해 좋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질이 떨어진다. 이는 (큐비즘의 오브제들처럼) 인간에 의해새롭게 축조된 사회에서의 안정된 일상생활보다는, 새로운 미디어 사회에서의 소음과 뒤죽박죽된 신호들과 상상도 할 수 없는 정보의 쓰레기를 함의한다. - P178

이런 종류의 비디오텍스트에 의해 제기되는 가장 흥미로운 질문은 가치와 해석의 문제로 남아 있다. 만일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그런 문제들에 대한 어떤 대답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말이다(그리고 그 비디오 텍스트의 가치와 의미가 무엇이건, 나는 분명 그텍스트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리라 생각한다. 즉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정보의 과잉으로 인하여 그 내용을 결코 완전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시청자는 그것을 반복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 P181

 음과 악보의 수학적 차원이 뭔가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공해주는 듯 보이지만, 오늘날 우연성 음악과 포스트 12음 음악에서 나타나는 문제도 이와 유사하다. 어쨌든 내가 의미하는 바는 이 비디오에서 우리가 추출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형식적 표식들, 예컨대 호숫가와 완구용 블록과 ‘끝이라는 느낌‘ 같은 것은 모두 기만적이라는 것이다. - P182

앞 문단에서 도입하기 시작한 함의 connotation라는 말은 이 개념의 핵심적인 정교한 의미를 재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이 개념에 대해서 우리는 롤랑 바르트에게 빚지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신화론』에서 옐름슬레우 Louis Hjelmslev*의 이론에 따라 함의의 개념을 만들어냈지만, 그의 후기 ‘텍스트적인 저작에서는 1차언어와 2차언어 (지시적 의미와함축적 의미)의 차이를 부정한다.


* ‘루이 옐름슬레우‘(1899~1965)는 덴마크 출신의 언어학자로 소쉬르의 기호학 이론을 계승하여 구조주의 언어학 이론을 발전시켰다. - P183

 이 논쟁의 중요성이나 내포된 의미가 무엇이건, 합의의 작동에 대한 바르트의 초기 고전적 개념은 (아마도 누군가의 승인 여부를 떠나서) 적당히 복잡하기만 하다면우리에게 상당히 시사적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상황은 광고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광고에서는 ‘보다 순수‘하면서도 좀더 물질적인 기호가 광범위한 이데올로기적 신호를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도록 전유되고 전용된다. 반면 실험적 비디오에서는 이데올로기적 신호가 이미 1차 텍스트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데다가, 1차 텍스트 자체가 이미 철저하게 문화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이다. - P184

그런데 여기에서 배제되어야 할 것은 이 특정 비디오텍스트에서 작동한다고 생각되는 탈신비화 과정 같은 것이다. - P185

 어쨌든 내 생각에 비디오에 인용된 다양한 요소와 부분(즉 현대 문화의 영역에 존재하는 광범위한 1차 텍스트의 부서진 파편들)을 수없이 많은 로고logo 라고 생각할 수 있는지, 다시 말해서 바르트의 초기 이론들이 다루어야만 했던 그 어떤 광고 이미지보다 구조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훨씬 더 발전하고 복잡해진 광고 언어의 새로운 형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는 따져볼 문제다. 로고는 광고 이미지와 브랜드 이름의 통합체 같은 것이다.  - P186

그런데 이런 요소나 새로운 문화적 기호나 로고 들이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해진다. 비디오텍스트 자체의 거의 모든 순간이 이런 요소들 간의 끊임없고 명백히 무작위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 P187

(전략).
그런데 2항 모델의 경우 의미 있는 이론적 모델이 그리 많지 않다. 가장 오래된 것은 당연히 주어와 술어로 구성된 논리적 모델인데, 이 모델은 진술 문장이나 진리 주장을 담고 있는 명제로서의 논리를 박탈당하고 최근에는 주제 topic와 논평comment의 관계로 재편되었다. 문학이론은 대개 메타포 분석에 한해서 어쩔 수 없이 이 구조를 사용했으며, I. A. 리처즈Ivor A. Richards의 주지tenor와 매체vehicle의 구별이 이를 잘 보여준다. - P188

(전략). 마지막으로 최근의 내러티브 이론은 (일화나 기본적인 이야기의 원재료인) 우화fable와 미장센을 기능적으로 구별하는데, 여기에서 미장센이란 원재료를 이야기하거나 무대화하는 방식으로서, 다시 말해서 초점 맞추기 focalization라 할 수 있다. - P189

우선 앞서 언급했던 두 기호의 상호작용 과정의 성격에 대해 좀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주장했던 항구적인 자리바꿈 속에서 하나의 요소(혹은 기호나 로고)는 다른 요소에 대해 어떤 식으로건 ‘논평‘을 하거나 그것의 ‘해석‘로서 기능하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의 내용은 이미 로고에 대한 설명 속에 암시되어 있다. - P190

사실 이 상호 교차 방식의 목록을 표로 만드는 작업은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상당히 지루한 작업일 것이다(다른 어떤 이는 앞서 언급한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대립을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이며, 어떤 이는 보잘 것 없지만 ‘자연스러운‘ 거리 풍경을 직접 찍은 것과 전형적인 미디어 자료의 흐름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통시적인 교차를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 P191

별개의 감각기관과 별개의 미디어로부터 전송되는 기호의 상대적영향력이라는 가장 단순한 경우 말고도, 우리 문화에 있는 다양한 장르적/종적 체계들의 상대적 중요성이라는 보다 일반적인 문제가 항존한다. 우리가 광고라고 부르는 장르보다, (생존경쟁, 사무실, 틀에 박힌 일상 같은) 관료 사회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담론보다, 혹은 옵아트효과(이것은 새로운 그래픽 기술보다 훨씬 더 많은 무언가를 함의할 수도 있다)와 같이 이름이 없는 시각 ‘장르‘보다, SF가 선험적으로 더 영향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 P192

‘이 텍스트나 작품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라는 해석 문제는 일반적으로 주제에 관한 답변을 촉구하는데, 우리가 다루고 있는 「소외국AlienNATION」이라는 비디오테이프의 친절한 제목 역시도 그러하다. - P193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대립, 실험실의 생쥐처럼 우리 모두가 프로그램화 되어버린 현대 사회, 자연과 문화의 대립 등과 같은 메시지 말이다. 시쳇말로 이런 ‘주제들‘은 진부하며, 또 소외라는 말만큼 진부하다(그렇다고 해서 캠프 미학만큼 구식은아니다). 어쨌든 이런 흥미로운 사태를 단순화하고 본성과 질의 문제, 지적 내용의 문제, 혹은 주제 자체의 문제로 축소하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 P194

(전략). 그러한 지점들에서 (하나의 기호나 로고가 다른 것에 대하여 잠정적 지배권을 행사하여, 그것을 자신만의 내러티브 논리에 따라 해석하거나 다시 쓰게 되는)잠정적 서사화‘가 필름 위에 떨어진 불똥처럼 시퀀스 전체로 급속하게 퍼져나간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잠정적 서사화는 충분한 시간 동안 ‘지속되기 때문에, 비디오 자체의 텍스트 논리와 상당히 모순되는 주제적 메시지를 생성하고 전달할 수도 있다. 그러한 순간은 사물화 reification의 특이한 형식과 연관되는데, 동시에 우리는 이를 주제화thematization라는 말로 특징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후략). - P195

우리는 이제 이 분석을 통해 예상치 못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결과란 다름 아닌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해석이라는 난처한 문제뿐만 아니라 또 다른 문제인 미학적 가치와도 관련된 것으로, 이는 우리 논의의 출발점에서부터 잠정적으로 논의 대상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 P196

지시성 reference의 문제는 특이하게도 최근 유행하고 있는 다양한 포스트구조주의 담론의 헤게모니 속에서 추방당하거나 부정적인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지시성과 더불어, ‘리얼리티 reality‘ ‘재현representation‘ ‘리얼리즘realism‘ 등과 같이 비슷한 낌새가 보이는 말들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심지어 역사history라는 단어도 알파벳 ‘r‘이 들어 있어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 오로지 라캉만이 부끄러움을 모른 채 ‘실재the Real‘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실정이다(그런데 실재 역시 부재하는 것으로서 정의된다). - P200

지금 우리와 관련된 직접적인 사례에서, 나는 명확한 지시대상체로 여길 수 있는 것의 현존과 실존을 주장했다. 예컨대 죽음과 역사적사실 같은 것은 궁극적으로 텍스트화될 수 없으며, 또한 텍스트적 가공의 그리고 기표의] 조합과 자유 유희의 얇은 막을 뚫고 나오게 된다(라캉이 말하듯 "실재"는 "절대적으로 상징화에 저항하는 것이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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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란 무엇인가


물론 정신 감응이다.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일이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그런 것이 정말 존재하느냐는 문제를 놓고논쟁을 거듭했고, J. B. 라인 [Joseph Banks Rhine: 1895~1980, 미국 초심리학자-옮긴이] 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정확하게 검증하는 방법을 고안하느라고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 P125

예정에 의하면 이 책은 2000년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출판하기로 되어 있다. 일이 예정대로 진행되더라도 여러분은 나보다 상당히 뒤늦게 이 글을 읽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마 저마다 멀리볼 수 있는 곳, 즉 정신 감응으로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장소에 있을 것이다. 물론 ‘몸소‘ 그런 곳에 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책이란 어디든지 갖고 다닐 수 있는 마술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 P126

나는 이렇게 기회만 있으면 책을 읽는다. 그러나 나에게도 특별히 좋아하는 장소가 따로 있는 것처럼, 아마 여러분도 그럴 것이다. 조명이 밝고 분위기도 아늑한 장소 말이다. 내 경우에는 내 서재에 있는 파란 의자가 그런 곳이다. - P127

지금 우리는 모두 똑같은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 각자가 본 것을 비교해봐야 되겠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약간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P128

마찬가지로 토끼장도 개개인에 따라 해석을 달리할 여지가 많다. 이 토끼장은 ‘간단한 비유‘로 설명되어 있는데, 이런 비유는 여러분과 내가 세상과 그 속의 사물들을 비슷한 눈으로 바라봐야만 쓸모가 있다. 간단한 비유를 사용할 때는 세부적인 내용을 소홀히 하기쉽다. - P128

지금 우리는 정신의 만남을 갖는 중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붉은 천이 덮인 테이블 하나와 토끼장 하나와토끼 한 마리와 파란 잉크로 찍힌 8이라는 숫자를 전송했다. 여러분은 그 모든 것, 특히 그 파란 8자를 무사히 수신했다. 우리는 정신감응을 경험한 것이다. 무슨 전설 속의 산 따위가 아니라 진짜 정신감응이다. 여기서 내 말의 요지를 장황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 P129

‘경박한 마음으로 백지를 대해서는 안 된다.‘ - P130

그렇다고 경외감을 가지라는 뜻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만 쓰라는 것도 아니고 유머 감각을 버리라는 것도 아니다(유머감각은 꼭 필요하다). 글쓰기는 인기 투표도 아니고 도덕의 올림픽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다. - P130

머리말 둘


글쓰기에 대한 책에는 대개 헛소리가 가득하다. 그래서 이 책은 오히려 짧다. 나를 포함하여 소설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그리 잘 알지 못한다. 소설이 훌륭하거나 형편없다면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책이 짧을수록 헛소리도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3

머리말 셋

이 책의 다른 곳에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알아둬야 할 규칙이 하나 있다. 편집자는 언제나 옳다. 그러나 편집자의 충고를 모두 받아들이는 작가는 아무도 없다 - P14

. 즉 주지주의가 지금까지 미처 건드리지못한 유일한 것이었던 바로 저 비합리적인 것의 영역이 이제는의식으로까지 끌어올려서 자세하게 관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합리적인 것의 현대적인 주지주의적 낭만주의 (diemoderne intellektualistische Romantik des Irrationalen)가 실제로 도달하는 곳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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