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청장의 귀촌 일기
조연환 지음 / 뜨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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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신준환 님의 '다시, 나무를 보다'를 보면서 느낀 게 있다.

문장이 아무리 화려하고 수려하고,

온 우주나 생명, 삶 자체를 담고 있다고 하여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이 못 미치면 버거울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그 때문인지, 이런 책을 만나면 좀 망설이게 된다.

 

신준환 님을 떠올린 이유는,

두 분 다 산림청장 출신이다.(지금은 국립수목원.)

조연환 님이 먼저 2004년 7월부터 2006년 1월까지 25대 산림청 청장을 한 것으로 되어 있고,

신준환님은 국립수목원 원장직에서 2014년 물러난 것으로 되어있다.

 

신준환 님의 그것이 좀 학술적인 것도 같고 철학적인 것도 같고 그랬다면,

조연환 님의 이 책은 제목처럼 '일기'에 가깝다.

그래서 가볍게 접근하고 다가갈 수 있겠다.

귀촌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유용할 여러가지 정보들도 제공하고,

저자 자신이 산촌에 살고 있으니 그 즐거움에 대해서 수더분하게 적어내려가고 있다.

4장의 '행복한 귀촌 설계'는 귀촌을 결심한 이들이라면 반드시 따지고 볼 것들을 모아두어 따로 읽어볼만하다.

 

이 책을 찬찬히 읽다가 이 분의 귀촌은 아내 분의 내조와 바람으로 성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귀촌까지는 아니고 전원생활을 꿈꾸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 지는 모르겠다.

 

시골 종갓집 장손인 남편이,

그래서 문중 땅을 다량 가지고 있는 남편이,

고향이 아닌 다른 곳으로 귀촌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실의 삶이 팍팍할때면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여러 개 나열해 놓고 혼자 저울질을 해볼 뿐이다.

 

이 책의 저자 조연환 님은,

산림청장 출신이 시골에 집을 짓고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으레 건축 디자인부터 정원 설계까지 치밀하게 계획하여 멋지고 화려하게 꾸며놓았을 거라고 상상하지만,

당신은 그때그때 주먹구구식으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아왔다. 사실 귀촌을 하는 데 거창한 계획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마음을 먹고, 용기를 내서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면 된다.(6쪽)

고 하신다.

그런데 현실이 되면 또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시인일기'를 쓰신 박용하 님의 경우 시골 텃세가 심해 이사까지 불사하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텃세라는건 시골에서뿐만이 아니라 똥개들의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것이니,

어느 정도 감수하고,

자신이 먼저 맞춰가도록 노력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구절이 좋았다.

  하지만 내가 참깨농사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참깨를 벨 때 아내는 참깨 대궁을 짧게 베라고 이른다. 나는 길게 벤다. 참깨는 아내 몫이지만 대궁은 내 차지이기 때문이다. 눈 오는 날 모닥불을 피워놓고 참깨대궁을 태워보라. "참깨 참깨'하며 타오르는 불꽃, 온 사방에 번지는 고소한 냄새, 화려하게 퍼지는 장관, 화끈하게 타는 그 정열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안다. 올해도 나는 참깨 대궁을 길게 자른다.(72쪽)

이런 소박하고 슴슴한 문장이 좋다.

 

이런 구절도 좋았다.

참나무는 쓸모가 없다면서 잡목으로 치부한다. 아까시나무는 일본 사람이 우리 땅을 망치려고 심은 건데, 그것도 모르고 아직까지 아까시나무가 온 산을 다 덮고 있는데도 뽑아버리지 않는다고 성화를 부린다. 낙엽송은 예전에 전봇대로 썼는데 요즘은 콘크리트 전봇대를 쓰니까 쓸모가 없다고도 한다. 틀린 말이다. 쓸모없는 나무는 없다. 나무마다 쓰임새가 다를 뿐이다.(109쪽)

 

조연환 님은 이쁜 꽃들도 좋아하시나 보다.

동백이나 노각나무도 그렇고, 작약이랑 목련도 자주 언급된다.

 

어쩌면 몸을 움직이기 위해 산촌에 사는 건지도 모른다. 특히 머리를 싸매가며 일하는 정신노동자들에게는 몸을 움직이는 노동 자체가 힐링이 될 수 있다.

 국장, 차장, 청장 재직 시절에 때때로 숨쉬기조차 힘들고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업무 때문에 지쳐 있다가 금산에 오면 우선 가슴이 확 트였다. 공기 맛이 그리 달콤할 수 없다. 보이는 게 모두 아름답다. 삽과 괭이를 들고 밭으로 간다. 굳은 땅을 삽으로 파고 괭이로 고르고 유기질 비료를 주고 비닐을 씌우면 한나절이 쉬이 지나간다. 온몸에 땀이 흐른다. 정신은 맑고 상쾌해진다. 몸안에 쌓인 스트레스가 땀으로 다 배출되는 것만 같다.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밭에 나가 괭이질을 할 일이다. 몸을 움직여야 머리가 맑아진다. 몸을 움직이기 싫다면 산촌에 내려올 필요가 없다.(158쪽)

나는 하는 일이 몸을 좀 움직여야 해서 내가 정신노동자인지 육체노동자인지를 놓고 고민할때가 있다.

몸을 움직이니 육체노동자이지만,

환자를 상대해야 되니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내가 육체와 정신, 어느 쪽을 쉬면서 힐링을 하는지를 생각해 보니,

몸을 움직여도 머리를 쉴때이다.

그렇다고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하지도 않는다.

좀 게으른 편이다.

책을 읽을때 가장 편안하고 치유되는 느낌이다.

그러고보면 읽는다는 행위는 육체와 정신, 양쪽을 아우르는 만병 통치약인가 보다.

 

산에 나무를 심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애기하고 있다.

산에 나무를 심으면 심은 사람에게는 돈이 되지 않지만 그 나무가 자라면서 국민 모두에게 엄청난 혜택을 베풀어준다, 그러기에 산에 나무를 심는 사람이야말로 애국자라 할 수 있는데, 정부도 국민들도 나무 심는 이들의 공덕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가슴 아팠다.(195쪽)

 

옛날에, 나 어릴적 학교에선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이라고 배웠는데, 이 책에선 64퍼센트(228쪽)라고 한다.

산을 논이나 밭으로 개간해서 그런 것일까?

 

산에 나무를 심고 키우는 것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과 닮았다.

하루 아침에 성과를 볼 수 있는게 아니라, 꾸준히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금 당장 귀촌하여 나무를 심을 순 없겠지만,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책으로 만들어지기 위해 베어넘겨지는 나무에게 경의를 표할 수는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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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7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27 1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27 1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27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06-27 19:34   좋아요 1 | URL
저도 산이 전 국토의 70%라고 배웠습니다. ㅎㅎ
매일매일 자연이 그리워지니 이런 책 읽고 싶어집니다.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

양철나무꾼 2018-06-28 10:00   좋아요 0 | URL
산이 개간되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바다가 간척사업으로 땅에 편이뵈어 그런건지, 궁금하긴 합니다.ㅎ

매일 아파트에 갇혀 지내나 보니 자연이 그리워지긴 합니다.
근데 자연으로 가게 된다고 해도,
벌레도 무섭고(벌레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전 광적으로 벌레를 싫어합니다~--;),
해결해야할 과제들이 좀 있습니다.

가끔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 보면서 감정이입을 해보곤 합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1
백세희 지음 / 흔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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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에 혹해서 사게 되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제목을 내 식대로 해석했다고나 할까.

책의 띠지를 보면,

'자기가 지금 힘든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아요. 이유 없는 허전함에 시달리면서.'

라고 되어 있는데, 그 마음도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책의 제목을 내 식대로 해석했다는건 뭘 얘기하냐면,

나 또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떡볶이'였으나,

먹고나면 쓰린 속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려야 하는고로,

이젠 먹고 싶으나 두려움으로 잘 못먹는 음식이 되겠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울때는 다시는 먹지 말아야지 하지만,

날이 밝으면 언제 그랬느냐 잊어버리고,

또 다시 떡볶이를 먹기 위하여 바람을 잡는다.

 

이 책은 내겐 좀 가벼웠다.

내용이 별로라거나 가벼웠다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내 나이 또래에서 이 책의 지은이 같은 고민을 한다는게 좀 배부른 고민처럼 여겨진다는 거다.

나보다는 아랫세대에게 잘 맞겠다.

 

선생님 

영화를 보면 꼭 의미를 찾아내야 할까요? 내가 좋아썬 부분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고, 나는 재미 없었는데 타인은 좋았을 수도 있잖아요. 모든 것을 너무 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감정에 중점을 두는 거죠. '아무렴 뭐 어때'라는 생각이 중요해요.(45쪽)

 

선생님

부러움은 누구나 느낄 수 있겠죠? 이상향을 가지고 있는 거니까요. 하지만 부러워하는 것과 자신을 계속 비교하고 비하하는 건 다른 거죠. 지금은 동경하는 정도로 느껴지고, 심해보이지는 않아요.(55쪽)

 

선생님

ㆍㆍㆍㆍㆍㆍ그런데 그렇게 해서 '행복했다'라는 기억이 남았다면, 그 부분이 편한 거죠. 나를 편하게 하는 나만의 방법을 계속 찾는 건 중요해요.(74쪽)

 

선생님

너무 강박적으로 이상화된 잣대를 계속 가져와서, 그 기준에 맞추려고 하는 거죠. 자신을 벌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82쪽)

 

이 책의 앞부분에는 '기분부전장애(심한 우울 증상을 보이는 주요우울장애와는 달리, 가벼운 우울 증상이 지속되는 상태)'를 앓는 지은이의 상담내용이 녹취록의 형태로, 뒤에는 문창과 출신이라는 저력을 살려 가벼운 단상들이 실려있다.

 

떡볶이를 먹는 그 순간에는 나중에 속이 쓰려서 배를 부여잡고 뒹굴게 될 줄은 까맣게 잊게 된다.

그렇듯 상처 받는 것이 두려워서 다가가지 않는다면 젊음이 아니다.

상처는 옹이를 남기고 단단해지지만 우리는 그걸 흉터라는 이름 대신 훈장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니까 말이다.

 

남우세스러워서 안아주지는 못할 것 같고,

어깨를 아무렇지않게 툭 치며 술 한잔을 권할 수는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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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6-22 18:19   좋아요 1 | URL
이 책 제목을 보고 저는, 매워서 나중에는 괴로워도 일단 떡볶이를 먹겠다,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페이퍼를 읽으니 그런 내용이 아닌 것 같아요.
아마도 제가 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어서 그렇게 보였나봐요.
맛있긴 하지만 너무 매워서 요즘 못 먹거든요.;;

양철나무꾼님, 기분좋은 금요일 저녁시간 보내세요.
떡볶이 보다 더 맛있는 저녁도 드시고요.^^

양철나무꾼 2018-06-23 09:34   좋아요 2 | URL
그러고보면 주변에 매운걸 좋아하고 매운걸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도 많지만,
의외로 매운걸 잘 못먹는 사람도 많더라구요.
대체음식으로 간장 떡볶이 어때요?
아님 감자를 크게 썰어넣은 짜장 떡볶이요.

저는오늘 날이 더울걸 대비해서 오이랑 토마토 적당하게 썰어 고명으로 얹은 콩국수요~^^

단발머리 2018-06-23 09:59   좋아요 2 | URL
일단 떡볶이라면~~~ 저희 집 아이들이 워낙 좋아해서 자주 먹고 있어요.
국민 간식 아니고 우리집 간식으로요..... 사 먹기도 하고 만들어먹기도 합니다.
사실, 어제 저녁에도 먹었어요^^

양철나무꾼님의 ‘내겐 좀 가벼웠다˝ 이런 게 전 좋아요.
뭐랄까요. 책을 읽고 나서 그런 솔직함이 필요한데 전 아직도 별로인 책에 대해 별로라고 잘 말하지 못한다고 할까요.

그리고 마지막 문단도 좋아요.

남우세스러워서 안아주지는 못할 것 같고,

어깨를 아무렇지않게 툭 치며 술 한잔을 권할 수는 있겠다.


키햐~~~~~~~~~~~~!!!

양철나무꾼 2018-06-23 10:20   좋아요 1 | URL
아침부터 단발머리 님께 칭찬받고 완전 기분이 업되어 트렘폴린 위를 날아다니는 기분입니다.
사실 저도 ‘별로‘여도 ‘별로‘라고 잘 못하는 편이어서,
별 셋 미만은 페이퍼로 돌려버리기도 하고 그래요~^^

이 책은 내용이나 기획의도 이딴 게 별로였던게 아니라,
이 처자가 힘들어하는 그 부분이,
제 나이에 이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부질없는 것이 되더라 하는 그런 소심한(?) 제 의사표현이었습니다.

저희집은 남편도, 아들도 별로라 하고 저 혼자만 좋아해서 만들어 먹지는 잘 않습니다.
(제가 은근 손이 커서 1인분을 해도 하다보면 한솥이 되는지라~--;)
저희 동네엔 수요미식회에 나왔던 소문난 떡볶이집이 있어서 거길 애용한답니다.(속닥~^^)

AgalmA 2018-06-24 13:58   좋아요 1 | URL
죽고 싶지만 울고 싶지만... 대신 다른 걸 하는 게 많죠.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그럴 때 많고요. 맛있는 걸 먹는 것도 그런 대용일텐데 굳이 떡볶이인 게 더 짠함.

양철나무꾼 2018-06-25 09:14   좋아요 0 | URL
저는 오히려 떡볶이라서 이 책을 사 읽었어요~^^

이 친구 홈페이지를 가봤는데 얼굴도 완전 예쁘고, 분위기 있는 맛집도 찾아다니고,
떡볶이만 먹고 살지는 않더라구요, 적어도.
암튼 마음 속의 우울한 기조를 이렇게 책이란 예술로 승화시키는게 멋져보였어요~^^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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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책의 역자가 정영목 님이라고 하면 무조건 사들이고 봤으니 제법 읽었을 줄로 알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꽤 돼도,

읽은 것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그건 취향에 문제인 것도 같다.

내가 정영목 님을 번역가로 알고 있으니 책에 관한 걸로만 생각했었고,

정작 정영목 님은 음악으로, 영화로, 분야를 확장시켜 나가시니,

님이 번역하신 책 몇 권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안다고. 그를 좋아한다고 설레발 칠 일도 아니지 싶다. 

거기다가 이 책에선 님이 번역하신 책 뿐만 아니라 읽으신 책들에 대해서도 소신을 엿볼 수 있었고,

그러고 나서 바라보니 이 분을 '번역가 정영목' 님이라는 테두리에 가두기에는 좀 큰 분이란 생각이 든다.

 

보통 번역을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당신 나름대로, 외적으로 드러나는 어떤 양의 균형이 아니라. 나 지신의 어떤 균형, 을 염두에 두고 소설만이 아니라 인문학 등 소설 외의 책들도 번역해 왔다(6쪽)고 하신다.

 

한군데 모아놓고 보니,

필립로스는 이제 시작이고 주제 사라마구는 좀 읽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정영목 님이 번역하셨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고,

존 업다이크는 읽어보지도 못했고 가지고 있는 책도 없다.

이창래 같은 경우는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왠지 정이 가지 않았는데,

정영목 님도 그 부분을 언급하신다.

'소설의 서사적 완성도뿐만 아니라 개성적이고 우아하며 유려한 문체로 높은 문학적 평가를 받고 있는데다가,

설익은 희망적 메시지 대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나오는 극복의 에너지에 집중해 왔다'고 하니 한번 시도해 봐야 겠다.

 

알랭드 보통은 젊은 시절의 치기가 좀 맘에 안들었는데,

정영목 님의 말씀으로는 나이가 들면서 보통다움을 회복하고 일상의 철학자로 거듭났다고 하니,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그 외에도 오스카 외일드, 존 밴빌. 코맥 매카시, 윌리엄 트레버, 커트 보니것,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등이 있는데,

윌리엄 트레버는 요즘 내가 흥미를 갖게된 작가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필립 로스라고 하면 유대인과 미국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가 번역한 책 속에서는, 역자후기를 통하여서도 언급하지 않았었는데,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벌어지던 일을 배경으로 하였음을,

사람이 삶을 견뎌내는 방식을 중요시 하였음을, 명확히 집어내고 있다.

 

존 업다이크와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것도 흥미로웠다.

 

번역이야 물론 훌륭하니 말할 것도 없고 이분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주제 사라마구'에 대한 이런 코멘트를 보고나서 였다.

 

헤밍웨이 편에서 이런 구절을 보고는 헤밍웨이 단편집을 당장 사들이기로 마음 먹었다.

마치 묵언 수행 과정을 묘사한 듯한 이 단편에서 걷기와 낚시는 남성성의 과시가 아니라 치유의 과정이 되며, 자연은 대상의 수준에서 벗어나 인물과 일체를 이룬다. 아마도 헤밍웨이는 늘 이런 상태가 그리웠을 것이다. 다만 거기에 이르는 것이 지난했을 뿐(61쪽)

완전 멋진 문체다.

그동안 번역한 저자를 앞에 드러내느라고,

역자의 문체는 묻혀있어서 몰랐었다.

 

존 밴빌의 '바다'같은 경우는 언젠가 책을 읽고 리뷰(==>링크)를 쓸때도 밝혔지만,

정영목 님의 번역이 아니라면 끝까지 읽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좋다고 상찬하는데(역자 정영목 님까지도),

실상 나는 공감하기 좀 힘든 상황이었고,

그건 역자의 해석을 보고난 지금도 그렇다.

 

그동안 번역가 정영목으로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었다면,

'번역가인' 정영목이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소신을 가지고, 이런 취미생활을 하면서...자신을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번역가란 다른 작가의 삶을 번역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괜히 숙연해지고 경건해지는 것이 저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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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8-06-21 16:29   좋아요 1 | URL
이 책 빨리 사서 봐야할텐데 읽고 있는 책들이 많아 자꾸만 밀리네요^^

양철나무꾼 2018-06-21 16:52   좋아요 2 | URL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읽고싶은 책 목록이 볼록해졌어요.
읽으시는 책 마저 읽으시고 차차 읽으셔도 마찬가지의 감동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저도 안 읽은 정영목 님의 역서들을 읽은 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땐 또 다른 새로움으로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요?^^

CREBBP 2018-07-13 21:13   좋아요 1 | URL
아 정말 존 밴빌의 바다는 말씀하신 것 강하게 동의해요. 그 책에서 특히 번역은 예술임을 실감하게 되죠. 꼽아주신 책 작가를 보니 제가 좋아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도 번역이 좋아서라는 이유도 큰 몫을 했던 것 같아요. 특히 필립 로스는 제가 세계문학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만일 형편없는 번역서를 읽었다면 세계문학에 흥미 자체를 안가지게 되옸을 것 같아요. 특히 문학성 뛰어난 작가와 작품들은 장르 소설에 비해 번역의 비중이 크잖아요. 김화영님도 그렇고 절절하게 번역하시는 분들 많이 계신 것 같아요

2018-07-14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8-07-14 09:20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가만 생각해보니 <김화영님의 번역수첩>을 읽고 좋은 인상을 받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 경우는 패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을 김화영님 덕분에좋아하게 되었거든요. 물론 원작이 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무런 출판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 그러니까 노벨상 수상 전 다른 수상작도 없던 시절부터 김화영님이 그 분을 발굴 소개하시는 안목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번역 관련 책 관심 많으시다면 그 책도 미리보기 한 번 해보세요. 전 반쯤만 읽어서 리뷰도 못썼어요 ㅋ

양철나무꾼 2018-07-14 09:26   좋아요 0 | URL
앗, 그렇군요.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북극곰 2018-07-18 14:54   좋아요 1 | URL
저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읽고 있는데 의외로? 너무 와닿는 말들이 많아서....
나무꾼님이 예전에 그 책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 부러 찾아와 봤어요.
요 책도 완전 읽어보고 싶어지는 리뷰네요. 저도 읽고 싶은 책 목록을 볼록하게 만들고 싶어서~~~라나 뭐라나. ^^

근데 어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해 보이는 책을 두 권이나 내셨을까요?
<완전..>은 좀 더 번역에 관한 일반적인 접근이고, <소설이..>는 본인이 번역한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좀 더 많은가봐요??

양철나무꾼 2018-07-18 18:21   좋아요 0 | URL
북극곰 님, 연일 열대야예요.
더운데 어떻게 지내세요?^^

‘완전한 번역...‘은 당신의 번역에 관한 노력과 소신을 밝혀놓으신 책이라면,
이 책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법‘은 당신이 번역하신 책의 번역 후기랄까, 당신 만의 독후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는 두 책 다 나름 괜찮았는데,
님의 말씀처럼 비슷한 책 두 권을 내처 읽으니,
그리고 내용들이 역자 후기에서 봤던 것들이 많다보니,
좀 많이 지루했습니다.
요 책은 한 템포 쉬셨다가 좀 천천히 읽으셔도 괜찮을 듯 해요~^^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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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장래희망이 번역가였다.

장래희망이라고 말을 하기엔 내 직업을 갖고 어느 정도 나이가 먹은 이후이고,

감히 번역가라고 갖추어 직업의 형태로 말하기 민망한 건,

나의 그것이 좀 치기어린 이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소설을 읽다가 보면,

(난 책을 좀 꼼꼼이 공부하듯 읽는 경향이 있는데,)

내용이 이어지지도 않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렇게 툴툴거릴 바에야 '내가 직접 번역을 해봐?'하고 기웃거렸지만,

번역을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님을 깨닫고,

일찌감치 그 꿈을 접었다.

(나이가 '일찌감치'가 아니라, 그런 마음을 먹고 얼마 안있어 꿈을 접었다는 얘기다, ㅋ~.)

 

암튼 번역가가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실력이나 능력과는 별개로 번역가는 구도자와는 맞먹는 수련과 정신세계가 필요한게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정영목 님의 올곧은 성실성에 대한 얘기는 여기저기서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성실성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구도자의 경지를 느끼게 되었다.

 

정영목 님의 작품을 처음접한건 (내가 인식하기론) 주제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가 처음이었다.

그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띄어쓰기도 문장부호도 없는 글들의 나열에 완전 당황하게 된다.

나는 우리말로 쓰여진 글을 읽는 것을 가지고도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호흡을 조절하기 버거워했던걸 보면,

역자 정영목 님도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원래 포루투갈어였으니, 영어로 번역된걸 다시 번역햇을테니 말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끼는 작품은 '책도둑'이다.

 

이제 정영목 님이 번역한 작품은 망설이지 않고 그냥 읽게 된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동안 번역가나 번역 참고서에 나왔던 얘기랑 겹쳐지는 부분도 있지만 전혀 다른 얘기도 있다.

조근조근 그의 말들을 따라가다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앞부분의 김혜리 기자와의 이런 인터뷰가 실렸는데, 그의 번역세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저는 기본적으로 번역가란 이방의 언어와 문화에 반한 사람들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요.

상상하셨던 번역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다면 제 아랫세대를 만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나 제 윗세대가 외국문화에 대한 매혹을 번역가가 된 동기로 꼽는다면 전 거짓말이라고 의심할 것 같아요. 저희 세대는 영문학을 전공하는 게 과연 정당하냐고 의문을 제기한 세대거든요. 영문과더러 제국주의학과라는 농담도 오가는 상황에서는 서구문화에 대한 매혹이 있다 해도 뒤틀려서 표현됐겠죠.(18쪽)

 

번역을 논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외국어도 잘 알아야 하지만 모국어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던데요.

소설은 번역의 결과 자체가 소설로서 읽혀야 하죠. 그런 의미에서 모국어 실력이 중요하다는 것이 맞는 말인데, 문제는 그 능력이 어디서 오냐는 거죠. 예를 들어 글솜씨가 있으면 되느냐, 문장 구조가 정확하고 비문만 없으면 되느냐. 저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우리말을 구사하는 법은 국어 실력뿐 아니라 번역하는 방식과도 관련이 있거든요. 번역은 저자의 스타일을 향해 가려고 애쓰는 것이기에 문제는 내가 우리말을 잘 쓰느냐보다 저자의 문체를 우리말로 잘 옮겼냐입니다.(23쪽)

 

여러가지 내용들이 다 좋아서 일일이 옮겨 적기는 힘들고 일독을 권한다.

다만 언어를 잘 한다는 것은 일정한 선을 넘으면 인간의 문제라고 하는 부분,

그리고 자동 번역기가 나왔지만 번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고 하는 부분은, 같이 새겨둘만 하다.

 

선생님은 유학도 간 적이 없고 해외여행도 자주 다니시지도 않는데요. 영어를 잘하기 위해 온갖 투자와 노력을 하는 젊은이들이 보면 비결을 궁금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언어에는 끈적한 속성이 있고 해당 사회에서 살아보지 않으면 터득하지 못하는 요소가 있어요. 그러나 영어든 한국어든 어떤 언어를 잘한다는 것은 일정한 선을 넘으면 모두 사고의 문제,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말귀를 잘 알아듣는게 핵심이라고 본다면 영어를 잘하는 것과 한국어를 잘하는 것이 같은 의미일 수있죠.ㆍㆍㆍㆍㆍㆍ

 

자동번역기계가 등장했을 때는 감회가 어떠셨나요?

서류 양식의 번역이라면 모르지만 소설의 번역은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배우처럼 불가분의 육체성이 번역에 붙어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를 교환하고 이해하는 영역에서는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 개입하거든요. 아닌 척하고 싶지만, 투명한 체하고 싶지만, 번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 번역가의 무엇인가가 책 속에 남을 겁니다.(35~36쪽)

 

이 인터뷰 부분 이후 딱딱하고 지루한 부분들을 꾸역꾸역 일독하였다.

뒷부분을 꾸역꾸역 읽을수록 그의 무미건조한 일상이 엿보이는듯 했고,

끝내 알수없는 감동으로 마음이 먹먹해져 왔다.

좀 딱딱하고 지루했지만,

나도 모르게 정영목 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차올랐고 그런 의미에서 별 다섯을 꽉꽉 채워도 부족함이 없겠다.

배우고 닮고싶다는 마음은 언감생심, 우러를 수는 있겠다.

 

이 책을 읽다보면 나이와 함께 체력이 쇠하고 집중의 지속이 짧아졌다는 정영목 님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저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한 책이 점점 더 필요해진다'고 한다.

천하의 정영목 님도 그러한데,

나의 게으름은 어쩜 당연한 것인가 싶어 위로가 된다.

앞으로 얼마나 책을 더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기꺼이 읽는 나날이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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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9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8-06-20 09:45   좋아요 3 | URL
저는 글은 무조건 알아먹기 쉽게 써야한다는 주의였는데,
번역가 입장에서는 그렇지도 않다네요.
작가가 의도적으로 어렵게 썼거나 작가의 문체가 그러할때는 작가를 그대로 번역해주는게 맞다는게 정영목 님 입장이셨습니다.
번역가라는게 엉덩이가 무겁고 꾸준해야 하는 직업이더라구요.
전 엉덩이 무겁고 꾸준한 걸로는 자신 있는데,
기본적인 실력이 많이 못 미치더라구요~--;

번역청까지는 아니더라도,
번역가들이 꾸준히만 하면 먹고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그런 거 말고, 처우개선이 시급하지 싶습니다~^^
 
동심언어사전
이정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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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을 하자면 이 책을 받아보고 놀랐다.

이게 사철 방식의 편집이라는데 난 파본인줄 알았다.

뭐, 여기 저기 물어 이게 요즘 유행하는 편집 방식이라는 건 알았는데,

그걸 알고 난 이후에도 나처럼 책에 물성을 부여하고 책신을 모시는 사람의 입장에선 대략난감이다.

실은 언제부턴가 문학동네 시집을 살때 표지는 파스텥 색상인 것이 예쁜데 몇 장 펼쳐서 넘기다보면 낱낱이 뜯어져서 힘들었었는데,

이 책도 그럴까봐 불안한 거라.

이런 방식의 편집이 책을 활짝 펼쳐놓고 필기를 하거나 무언가를 적어넣을때는 좋은 방식이라는데,

참고서도 수험서도 아닌,

(사전이란 이름을 달긴 했지만) 시집 한구퉁이에 뭘 적어넣는단 말인가~--;

 

제목은 '동심언어사전'이지만 이 책은 언어가 가진, 언어가 내포한 의미에 집중하기보다는,

언어를 사용하는 마음을 노래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짧아서 여운을 주는 것들이 더 좋았다.

내용이 길어지고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서술하려는 것들은 좀 지루했다.

보통 시집의 두께였고 그 정도 분량이었다면 황홀하다며 설레발 쳤을 시들이 수두룩한데,

사전 형태로 묶어 양이 방대해지다보니 지루해 하품이 난다.

 

그렇다고 시집이 별로였다는 애기는 아니다.

여러번의 퇴고를 거쳐 시들을 응축시키고 추려냈다면 더 좋았을텐데 싶다는 얘기다.

시인의 저력을 알고 충분히 더 좋은 시들이 나와줄 수 있음을 아는데,

좀 널브러진 느낌이라서 아쉽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시 몇 편을 옮겨본다.

 

굴뚝연기

 

굴뚝연기가

아름다운 이유는

 

누군가의

차가운 등짝을

덥히고 왔기 때문이지

 

돌부리

 

땅속에 박혀 사는 새가 있지.

부리만 조금 내밀어

빗물과 눈송이를 받아먹지.

구둣발에 차일 때 많지.

괭이나 쟁기에 으깨지기도 하지.

울대가 없어서 삽날이 대신 울어주지.

발로 찬 사람이 울어주지.

눈을 감고 돌부리를 쓰다듬으면

내 어깨의 새부리뼈가 활개를 치지.

어깻죽지가 나른하지.

 

되새김질

 

내 것을 토해내야만

되새김질 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일단 가득 채워야 한다.

먼저 저 바깥을 들여앉히고

속앓이부터 해야 한다.

지는 해가 긴 혀로 솔숲을 곱씹듯.

밤바다가 끝없이 트림을 하며

물방울별 하나하나를 새김질하듯.

너만을 생각할 때처럼.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혀의 춤사위만 미끄러질 때까지.

 

백합조개

 

깜짝이야.

개펄에서 아침 먹더가 혀를 깨물었어.

바삐 놀러 나가다가

문틈에 옷자락이나 손가락이 끼듯.

 

서두르지 마.

바다가 몽땅 밥그릇이듯

세상이 모두 놀이터니까.

모래 한 알도 친구니까.

바다놀이 나갈까.

 

붕어빵

 

붕어를 살려보려고

호호, 인공호흡을 했다.

끝내 살아나지 않아서

눈 딱 감고 해부를 했다.

김이 모락모락 났다.

죽은 이유가 밝혀졌다.

달콤한 팥만 편식한데다

과식했기 때문이었다.

호호, 내가 대신

소화시켜줬다.

 

산더미

 

맑은 날도 있고

궂은 날도 있어야

 

하늘을 우러르고

바람을 만져보지.

 

밤과 낮이 있고

새싹과 낙엽 태우는 향이 있지.

 

사노라면, 일거리가

밤바다 눈보라처럼 몰려올 거야.

 

일머리를 깨치면

꽝꽝나무 이파리처럼 작고 눈부신 축복이지.

 

내 일이 산더미라야

내일이 반갑지.

 

손잡이

 

풀과

모든 열매는

자신이 손잡이가 되는 게 싫다.

 

내 귀를 비틀어

내 꿈을 내동대기친다면

그 누가 좋아할까.

 

그런데, 누가 나를 열고

깊은 방으로 들어간다면

드넓은 세상으로 나아간다면

그 누가 마다할까.

 

이 외에도 아침뜸, 앉은뱅이저울, 앞길,오색딱따구리,잔가시, 징소리, 짝사랑, 칠성무당벌레 등 좋은 시가 여럿이다.

 

여러 편의 시를 옮겨적으려니 좀 힘들지만,

되내며 옮겨 적는 한 호흡 한 호흡 행복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시인의 시가 좋은 것은,

알아먹고 공감할 수 있는 언어들로 쓰여졌고,

그리하여 읽고 있노라면 어딘가 모를 곳이 따뜻해지는 것이, 적당한 온기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내 안에 온기를 품고 바라보는 세상은 시리거나 눈물 겨워도 견딜만하니까 말이다.

 

동시라고 하긴 힘들겠고,

맑고 순한 마음으로 살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폭폭할때,

그래서 적당히 따뜻한 온기가 필요한 시린 날에 한번쯤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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