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연주를 듣다
- 이 승 주 -
여태 나는 억새가 흔들리는 까닭을
제 몸에 실리는 바람의 무게를 덜어내려는 몸짓으로 알았다.
비워내지 않고 바람의 무게를 감당하다가는
흔들리지 않고 무모하게 맞서 견디다가는
허리가 꺾이고 뿌리가 뽑힐지도 모른다는 걸
생리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인 줄 알았다.
억새의 흔들림을 비겁하다고 하는 말 속에는
처세와 연관된 인간들의 가치관이 내포되지만
바람이 몰아칠 때면 허리를 휘어야 하는 줄
결코 바람을 탓하는 법 없이
기다리면 바람이 지나갈 줄 아는
이것이 억새의 지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억새의 흔들림은
살아 있음의 증거라 믿었다.
어느 날 억새가 흔들리는 것을 보다가 문득
바람이 억새를 연주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억새는 바람의 현신顯身이고 바람의 악기인 줄
가늘고 길수록 떨림은 깊고 섬세하므로
억새의 목이 긴 까닭을.
이런 생각으로
억새의 목의 코드를 집는 바람의 손가락과
긴 목에 떠오르는 떨림의 에코를 똑똑히 보며
종일토록 바람의 연주를 들었다.
-<내가 세우는 나라>중에서 -
아들은 방학을 하기가 무섭게 미국의 삼촌네로 가버렸다.
할일이 없는 남편과 난,
아들이 보내온 문자를 곱씹고 분석하느라 있지도 않은 감과 대추를 가지고 다툰다.
이번 직장에 4년 정도 있었다.
하지만,난 오너와 마인드가 많이 틀려,
몇번이고 그만 둘 고비를 겪고 넘겨왔다.
고객을 돈으로 보는 오너와 달리,난 고객은 고객일 뿐이다.
엊그제 빨리빨리 대충해서 치워내라는 말에 울컥하였다.
나의 더러운 성질을 참아내느라 나름 오너도 힘들었을 테지만,
마인드가 전혀 다른 오너와 일을 하느라,
양심에 털도 났고 안면에 철판도 깔았고,
짐승이나 로봇이 되기 싫어...양철나무꾼을 택한 나도 힘들대로 힘들었다.
직장을 하루 아침에 그만 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고작,
오너와 얼굴 마주치지 않기,절대 밥 같이 먹지 않기 정도로 다소 소극적이다.
어젠 같이 있다 퇴사한 직원이 점심시간에 맞춰 놀러 왔다.
어쩔 수 없이 질긴 탕수육과 기름진 자장면을 오너의 독설에 비벼 먹었다.
먹을 때부터 고생을 하겠구나 싶었지만,
독설을 걸러내느라 무방비 상태였나 보다.
오후엔 옛 사람의 다소 기운없고 쓸쓸한 목소리를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먹은 걸 다 올려내는데,
남편이 뒤 늦게,
"중이 제머리는 못 깎지."하며 뒷짐지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체한 건 굶어야 낫는다며 남동생네 가서 저녁을 해결하고 오겠단다.
남편은 이제는 내가 둥글어 질 때도 됐다고 한다.
여전히 까탈스럽고 뾰족하게 군다며
너무 팽팽하게 굴다 끊어져 버리면 주체할 수 없다는 말도 한다.
만 하루를 굶고 버티니 목이랑 가슴 경계 어딘가에서 신물이 넘어온다.
남편은 지역선거 유세 현장을 가보자며,옷을 주워 입는다.
옛사람은
"이럴때,미국놈들은 치킨수프를 먹는다더라~"하며,
따뜻한 말 한마디로 닭죽을 끓였었는데 말이다.
더도 말고 말한마디면...
나도 둥글고 말랑말랑해 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