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평점 :
아마도 소설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가 그렇겠지만, 굉장한 소설을 만나면 흥분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선 나도 이 소설의 소설가처럼 글 한번 써봐야겠다며 흉내 낸 글을 짧게 구상해 보곤 하는 일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몇 줄을 써보다가 곧 좌절하고 말죠. 아니, 어쩌면 단 한 줄도 쓰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일지 모릅니다. 머릿속에서 소설의 구성에 대한 번쩍이는 아이디어, 플롯과 인물, 배경 등이 떠올랐다 하더라도 그 번쩍임의 순간은 굉장히 짧은 순간의 기억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후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무언가가 퇴색되는 느낌, 희미하게 사라지는 느낌, 붙잡고 싶지만 떠나는 느낌이 들어 금세 좌절하고 맙니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저 또한 처음 이 책에 대한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던 어떤 기억과 내용이 조금씩 사라져 흐릿해짐을 느낍니다.
『소설과 소설가』는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찰스 엘리엇 노턴’ 강의 내용을 묶은 강연록입니다. 책은 그가 소설에 대해 아는 것과 소설을 쓰며 배운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 여긴 몇 가지를 말합니다. 소설가들이 글을 쓰는 방법, 소설의 작용과 쓰임새, 소설을 통한 독자의 경험, 그런 독자를 마주한 경험이 있는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책은 소설에 대해서 분석적으로 접근하지만, 책에서 말한 분석은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 그리고 그 자신만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독자 입장에서 지나치게 멀고 어려운 문학론 아니라 꽤나 친숙하고 가까운 느낌의 강연록이 될 것입니다. 아마도 독자라면 소설가가 소설을 만드는 과정을 궁금해 하며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그 과정을 엿보길 바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런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서 친근한 느낌으로 이 책에 다가갔습니다. 그래서 소설과 소설가에 대한 약간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고, 묘한 공감대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오르한 파묵은 독자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희열을 느끼고 공감하는 과정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첫 문장의 시작부터 이미 많은 독자들이 전적으로 공감할만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소설과 관련된 사람들, 소설가와 독자의 상호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보인 글이라, 놀랍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해 소설가들이 소속되어 있는 어떤 우주를 관찰하고 탐험한 기분입니다. 그래서 경외심이랄까, 덜컥 두려운 마음도 생겨납니다.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것은 소설이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앞으로도 제대로 된 소설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울 것이며, 그런 소설을 찾았다 하더라도 제대로 읽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굉장히 암담합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세상에서 혼자 허우적거리고 있는 느낌입니다. 도저히 높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위대한 소설과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로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대단한 지성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독일의 작가 프리드리히 실러는, 어떤 글을 쓸 때 사상적, 도덕적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레 쓸 수 있는 작가를 ‘소박한’ 작가라고 합니다. 자신의 글을 고심하며 계산하고 운율을 맞춰가며 자신을 끝없이 통제하고 비판하려 들지 않고 어떤 힘에 이끌려 글을 쓴다는, 일종의 천재적인 작법을 추구하는 작가를 말합니다. 반면 글을 쓸 때 단어들의 규명, 문체와 구조의 형태, 스타일과 기법에 대해 고민하는 작가를 ‘성찰적인’ 작가라고 합니다. 자신의 글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지, 어떤 인위적인 모습을 갖추고 실재에 도달할지에 대한 문제로 항상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작가를 말합니다.
그런데 ‘소박’하고 ‘성찰적’이라고 구분한 이 두 특징은 독자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소설가가 미리 독자의 머릿속에서 소설을 읽을 때 일어날 일을 예상하여 유도한다는 점에서 두 가지 특징이 독자에서도 비슷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용어가 조금 어렵지만, 그냥 독자도 소설가와 마찬가지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어느 쪽의 독자에 속하나요? 저는 성찰적인 독자에 속합니다. 단, 많이 모자란 느낌의 성찰하는 독자입니다. 그래서 비교적 쉽게 소설의 이야기에 속아서 빠져드는 편입니다. 모자란 정보를 갖고서 소설을 이리저리 재어보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전적으로 소설을 믿고 따르는 부류, 즉 소설의 이야기가 곧 자연이라 여기는 소박한 독자가 되기도 합니다.
비록 이 강연록이 오르한 파묵의 소설은 아니지만, 제 개인적으론 도저히 성찰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글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뜬금없이 이런 글도 소박한 느낌으로 자연스레 소화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소설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을 떨쳐내어 쉽게 소설과 하나가 되고 소박하게 있는 그대로를 즐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성찰이 뒷받침되어야 하겠죠. 역시 뭔가를 깊게 파려 했다면 어설프게 팠다간 쉽게 한계에 다다르는 것 같습니다.
소설은 두 번째 삶입니다. (11쪽)
소설은 삼차원적 허구이기에 우리 현대인에게, 다시 말해, 모든 인류에게 강력하게 호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설은 삶의 가장 표면에 있는 모습, 그러니까 우리 감각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사적인 경험과 지식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때로는 가장 깊숙이 숨어 있는, 그러니까 중심부에, 삶의 본질에, 톨스토이가 ‘삶의 의미’라고 했던 것에, 다다르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그 존재를 낙관하는 그곳에 대한 지식, 직관, 실마리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본질과 관련된 가장 심오하고 가장 귀중한 지식에, 철학의 난해함이나 종교의 사회적 압력에 시달리지 않고도, 우리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우리 자신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평등하며 가장 민주적인 희망입니다. (33쪽)
이 무렵 나는 일곱 살부터 꿈꿔 왔던 화가의 꿈을 접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에게 이 결정은 행복해지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어릴 때 그림을 그리면서 지극히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 이 즐거움이 갑자기 그리고 한 번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로 사라졌습니다. 그 후 35년 동안 소설을 쓰면서도 사실 내가 그림에 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이제는 단어들로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113쪽)
소설 읽기와 상상하기에 투자되는 노력의 이면에는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되고 특별해지고 싶은 바람이 숨어 있습니다. 이 감정은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사는 소설 주인공들과 동일화되고자 하는 바람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주 ‘어려운’ 책을 읽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겁니다. 머릿속 한구석에서 우리가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조이스 같은 어려운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 우리 두뇌 한구석에서는 조이스 같은 작가를 읽고 있는 우리 자신을 축하하느라 분주합니다. (134쪽)
내 생각에 한 소설가가 창작자이자 예술가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은 소설 형식을 수수께끼로 구성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해답이 바로 그 소설의 중심부인 수수께끼! 가장 소박한 독자라도 이러한 소설을 읽을 때는 소설의 의미, 즉 중심부를 찾으려면 이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챌 것입니다. 순문학 소설에서 수수께끼는 살인자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진정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164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