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자 1 - 드라마 대본집
박경수 지음 / 북폴리오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씬 1. 크롱의 집, 책상 앞

 

 

크롱과 에디는 책상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보다 말고 대화를 나눈다.

 

 

크롱    (검은 뿔테 안경을 쓸어 올리며) 에헴, 그러니까 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에디    또 무슨? 똥 폼을 잡아가며 책 이야기를 하려 그러시나? (비아냥거리는 표정)

크롱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겸연쩍은 듯) 나는 그저 책 이야기를 하려던 것뿐 이라고!

에디    (크롱 앞에 놓인 책을 집어 들며) 대본집?

크롱    응. 지난번에 블로그 이웃이 꼭 보라며 추천했던 드라마야. 추적자라고. 여름 즈음인가? TV에서 방영했던 거야.

에디    그런데 한번 봤던 드라마를 책으로 왜 또 보는 건데?

크롱    사실 드라마를 못 봤거든. 요즘 책을 많이 읽다보니 상대적으로 TV볼 시간이 줄어서 말이야. 이건 어쩌면 키스를 글로 배웠다는 O양의 경우와 같다 할 수 있어. 드라마를 눈으로 본 게 아니라 글로 읽는 경우니까.

에디    (한심하다는 듯) 그래서 자랑이다.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크롱과 에디는 대화를 끊고 요란하게 흔들리는 대문을 바라본다. 문 밖에선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포비    (다급한) 빨리 문 열라고.

크롱    뭐가 그렇게 급해. 릴렉스. 릴렉스. 워. 워. 제발 진정하라고.

 

 

크롱은 문을 열어주고, 포비는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실망한 듯 크게 숨을 내쉰다.

 

 

포비    (한숨쉬며) 아직이야? 아직 도착 안했어?

크롱    (포비를 바라보며) 응, 아직이야. 조그만 기다리면 돼.

에디    (포비가 온 것에 신경 쓰지 않으며) 마저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시지?

크롱    (방으로 들어가며) 응, 그래서 이 대본집은 박경수 작가가 제대로 된 극 하나를 만들어 보고자 한 큰 뜻을 품고서 세상에 내 놓은 건데, 기승전결이 맞아 떨어지고, 개연성도 충분하면서, 인물들 간의 관계도 복잡간단하고, 또 대단한 흡인력을 보인 극이라 할 수 있지. 그리고 박경수 작가는 그런 일생일대의 극을 만들어보자 다짐하고 미친 듯이 썼다고 하더라고. 촬영 일정에 쫓겨서 쪽 대본도 만들어가며 말이지.

에디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친 듯이….

포비    (일그러진 얼굴, 계속해서 안절부절 못해 하며 두리번거린다)

크롱    아무래도 드라마는 각 회마다 시청자들을 계속해서 붙잡아 둬야 할 거 아냐. 그래서 추적자에서도 꽤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사람을 잡아 놓는 맛이 느껴져. 시답잖은 멜로나 극중 인물의 일상의 모습을 보이기보단 몰아치는 느낌으로 16부작을 완성했다고나 할까.

에디    그런 느낌은 소설도 충분히 보일 수 있는 거잖아.

크롱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 (에디가 들고 있던 대본집을 뺏어 들며) 그런데 대본집으로 드라마를 읽으면 드라마의 기본을 볼 수 있어. 극이 보인 배경을 조금 더 확장해서 촬영 중인 세트장의 전반적인 풍경까지 볼 수 있거든. 그리고 연기자들이 내뱉는 숨결로 느껴져. 추운 겨울날 야외 촬영장에서 몰아쉰 하얀 입김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킥킥 웃는다) 그런데 그게 조금은 거친 느낌이기도 하고, 생소하기도 해. 그래도 꽤 재미있단 말이지. 드라마 시나리오 작업, 그리고 연기를 준비하기 위한 대본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 지는구나, 하는 것도 대충 알 수 있고 말이야.

에디    (곰곰히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 으음…. 그렇단 말이지. (다시 크롱이 들고 있던 대본집을 뺏어 들며) 그런데 안에 대본 용어라고 해야 하나, (책을 펴며) 아무튼 조금 독특한 구조의 글이 보이는데?

크롱    응. 맞아! (조금 큰 소리로) 바로 그거야!

포비    (깜짝 놀라며) 드디어 왔나? 온 거야?

크롱    (포비를 진정시키며) 아니, 조금만 더 기다리래두.

포비    (울먹이는) 아……. 죽겠단 말이야. (털썩 주저 앉는다)

에디    (한숨)

크롱    (에디를 바라보며) 그래서 이런 대본집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가 쉽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몰라. 일단 인물들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이미지화해서 대화가 오고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지. 그런 것이 대본 용어와 섞여서 꽤 혼란스러운 느낌이거든. 그런 방해를 받지 않으며 극에 몰입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는 것이 중요해. 그리고 꽤 힘들어. (검지 손가락을 펴며) 또한 인물들이 보인 행동을 짧게 요약된 어떤 지시어로 읽어야 하는데, 그런 서술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게 조금 건조한 느낌일 수도 있고 말이야. (에디가 들고 있던 대본집을 다시 뺏어서) 하지만 추적자의 극은 TV드라마로 이미 한차례 인정받았으니 재미는 충분히 보장한단 말이지. (책을 요리저리 흔들며) 어때, 빌려 줄까?

에디    (크게 숨을 내쉬는) 아직 읽을 책이 많이 있는데….

 

 

갑자기 울린 초인종 소리에 대화가 끊긴다. 잠깐의 정적. 방 안에 있던 셋은 묘한 미소를 보이며 두 눈을 반짝인다. 포비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용수철 튀어 올라 쿵쿵 소리를 내며 다가간다. 그리고 대문을 연다.

 

 

알바    (들고온 비닐을 내밀며) 치킨이요.

포비    (크게 웃는) 아싸리비아. 콜롬비아. 호이호이. 왔구나. 왔어. (큰 엉덩이를 조금 씰룩거린다)

에디    (한숨, 어깨를 조금 들썩거린다)

크롱    (장난스런 표정으로 웃으며) 일단 치킨이 왔으니 먹고 나서 책 이야기를 마저 해볼까?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알바는 치킨을 바닥에 내려놓고 카드리더기를 꺼낸 다음 크롱이 건넨 카드를 받고 결제를 한다. 그리고 카드와 영수증을 크롱에게 건네고 천천히 문 밖으로 나간다. 그때 포비는 치킨을 순식간에 방안 가득 펼쳐놓는다. 곧바로 셋은 말없이 치킨을 뜯는다. 포비는 양손에 치킨 다리를 들고서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수정    아빠… 고마워. 정말… 고마워.

홍석    (눈물이 그렁해진다. 손을 뻗어서 만지려 하지만, 손이 닿지 않는 거리다)

수정    …아빠는… 무죄야. (2권, 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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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기억 속으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어두운 기억 속으로 매드 픽션 클럽
엘리자베스 헤인스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애인한테 맞아서…….” 혹은, “남편에게 맞으며.”

 


    엘리자베스 헤인스의 소설 『어두운 기억 속으로』는 악마적인 매력을 지닌 남자친구를 둔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굉장히 치명적인 매력을 지녔습니다. 너무나 치명적이라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남자친구의 본성을 알아챘을 땐 이미 많이 늦었습니다.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가 정말로 늦었을 때라고. 여인은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랑인지 불안인지 공포인지 모를 끔찍한 경험을 합니다.

 


    보통의 남녀 관계 문제에 있어서 극단적인 상황에 까지 이를 수밖에 없었다면, 그 문제의 원인 대부분은 양쪽 모두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게 양쪽이 똑같은 양의 잘못을 저지른 경우, 혹은 오로지 한쪽만 전적으로 잘못했을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라고 봅니다. 극단의 상황에 이를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었다는 것도 일종의 잘못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신의 인생을 두고 그런 식의 무책임한 행동을 보인 것은 문제가 크다고 봅니다. 상대방의 죄가 더 크다고 해서 자신의 죄가 상쇄되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은 달콤한 연애소설처럼 시작합니다. 시작은 평범한 느낌입니다. 일반적인 초콜릿. 하지만 한번 맛을 보니 그 맛에서 헤어나질 못합니다. 악마의 달콤함을 지닌 초콜릿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맛봄과 동시에 약간의 불안을 느낍니다. 맛있고 멋있긴 한데 무언가 굉장히 섬뜩한 느낌의 잔인한 공포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허용될 수 있는 어떤 경계선 위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흐릅니다. 그러다 조금씩 밀어붙이고 취향을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자신의 영역으로 조금씩 들어오는 느낌.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순간 자신의 공간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알아챕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고, 세상의 모든 것이 인위적인 시험 무대라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한 여인은 결국 미치고 맙니다.

 


    설마 이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으로 이야기가 흘러갈까 싶지만, 소설은 묘하게 그런 극단적인 방향으로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막다른 공포를 느끼게 합니다. 아무에게도 도움 요청을 할 수 없어서 끊임없이 내달리다 어쩔 수 없이 어두운 골목의 끝에 이른 느낌. 아무도 믿을 수 없어서 결국 자기 안에 갇혀버린 한 여성의 모습. 연애소설, 혹은 치유소설이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스릴러로 변모하고, 소설이 흘러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간 거의 숨이 막혀버릴 정도가 됩니다. 어떻게 그 상황이 되도록 그러고 있었나, 혹은 그러고도 지금은 괜찮은가, 등등 묻고 싶은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기준의 차이, 정도의 차이일 수 있겠지만, 소설이 보인 모습만 보자면 이런 관계는 정말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섬뜩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 같은 스릴러 소설보다 오히려 더 극단적이고 작위적일지 모른단 생각이 듭니다. 뉴스만 봐도 판타지 무협 소설 같은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니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소설이 또 다른 공포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도 어떤 악마의 초콜릿이 새어나오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더 두려움에 몸을 떱니다. 

 






    “당신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그건 당신이 좋은 여자인지 나쁜 여자인지에 달렸지.” (69쪽)

 


    이 모든 이야기의 이면에는 그가 나와 함께 있고 싶고 나와 함께 있는 걸 즐기는 이유가 오로지 우리 둘 다 연애 관계를 원치 않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 뛰어들 염려 없이 안전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내가 그에게 병신처럼 뛰어들기 직전에 그가 한 말이었다. (162쪽)

 


    “넌 이제 한 사람을 사귀는 거야. 이건 전혀 다른 종류의 게임이라고.” (220쪽)

 


    나는 회복 과정을 밟아나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하지 않았을까 하고 수차례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사를 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내 인생을 통제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 자신이어야만 한다고. 다른 답은 없다고. 그래서 나는 주도권을 쥐고 매 순간을 통제했다. 일정을 초 단위까지 맞추고, 발걸음 수를 세고, 티타임을 정했다. 그것은 나에게 목적의식을 주었고, 아무리 지랄 같고 우울하고 외로워도 하루하루 한 걸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를 제공했다. (264쪽)

 


    나는 맞고 사는 관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여자들을 멍청하다고 항상 생각했다. 어쨌든 간에 상황이 뭔가 잘못 흘러가버렸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갑자기 자신의 애인이나 남편이 두렵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 테니까. 그때가 바로 떠나야 하는 순간이다. 돌아보지 말고 떠나야 하는 거다.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왜 남아 있는데? TV나 잡지에서 이런 여자들이 인터뷰한 것을 보면 항상 이렇게들 말한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279쪽)

 


    “망할 정신과 의사처럼 말하지 좀 마요.” (4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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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세상은 우리에게 이토록 부끄럽고 잔인한 질문을 합니다. 이런 질문은, 그런데 너는 왜 아직도 그 모양인가, 라고 지적을 하기 위한 다분히 공격적인 의도를 가진 질문입니다. 모범 답안에 가장 가까운 대답을 한다 할지라도 되돌아올 것은 분명 정신이 바짝 들게 할 따끔한 따귀뿐이란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이길 수도 없는 어떤 힘에 대한 저항, 불만과 분노, 반항, 일탈을 품습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형태로 표출될 것입니다. 하지만 청소년기라면 누구나 짊어야 할 짐이고, 건너야할 강이기도 합니다. 강 저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강물에 몸을 담그지 않을 수 없으니.



    이승우 작가의 소설 『생의 이면』은 박부길이라는 한 작가의 생을 정리하는 글입니다. 특히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을 추적하는데 힘을 쏟습니다. 한 인생을 정리하기 위해 꽤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박부길이 작업한 소설에 스며든 그의 인생 조각을 하나하나 짜 맞춰 갑니다. 그리고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만듭니다. 아니, 어쩌면 미완의 그림일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것이 미완의 그림일 수 있고, 부분의 그림일 수 있어도 우리는 일단 보여준 그림의 전체를 보고 나서야 그가 어떠한 모습의 인간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거의 작가의 독백, 혹은 박부길의 독백 형태로 이루어져 있지만, 가끔 따옴표로 묶인 대화가 등장하곤 합니다. 이 대화는 아마도 말수가 거의 없는 그가 실제로 가끔씩 내뱉었던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 그가 뱉어낸 얼마 되지 않는 말만 봐선 그의 인성과 성격, 사상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없어서 오해하는 일이 종종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가 했던 말의 의미, 그리고 그가 보인 행동의 의도에 대하여 따로 정리해 보인 그의 독백을 듣지 않았으면 도저히 그의 행동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 정도 입니다. 그만큼 원채 말이 없고 무뚝뚝한 행동을 보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를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지는데, 어쩌면 이것은 젊은 시절 우리를 쉽게 판단하려한, 자신 이외의 세상 모든 것들이 저지른 성급한 일반화, 혹은 규격화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젊은 시절의 이유 없는 반항에 대한 이유에 대해 그럴싸한 의미를 담아 말한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 못한 것 같은 답답한 기분이 사라지진 않을 것입니다. 어떤 행동이 나오기까지 내면을 장악했던 나름의 사고, 자신이 처한 환경 등등의 여러 요인을 들어가며 어쩔 수 없었다는 독백이 오히려 너저분하게 보일 것입니다. 소설의 느낌이 그랬단 것이 아니라, 소설 안에서 보인 인물이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인생을 정리하는 행위는 현재의 자신을 감싸기 위한 변명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소설은 그런 행위가 부끄럽단 것을 알고 있긴 한지, 누군가의 생을 누군가가 대신 정리한다는 형태를 취합니다. 타인의 생에 대한 이면을 들여다본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곧 자신을 들여다보는 행위일 것입니다. 무언가 대단히 부끄러워 말하지 못할 젊은 날의 기억들에 대해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 무심하게 내뱉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 작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작가가 쓴 여러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형태의 글로써 말입니다. 당연히 소설의 내용이 소설가 본인의 이야기일리 없습니다만, 어쩌면 이건 작가 스스로의 생을 이야기한 것일지 모릅니다. 누군가의 생에 대한 이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에 대한 내면. 그리고 어쩌면 그건 우리 모두의 생에 대한 고백일 수 있습니다. 부끄럽고 나약하고 떠올리기 싫은, 방황하던 젊은 시절에 대한 기억을 자서전적 풀어쓴 변명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은 마지막에 이르러 작가 박부길의 연보를 정리하다 말고 미완의 느낌으로 끝납니다. 아직 그의 생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노출 본능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은 거짓이다. 더 정확하게는 위장이다.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에 행복해 죽겠다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때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불행한 현실에 마취제를 주사한다. 독자들 또한 그 마취제를 억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뿐이다. (23쪽)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에게 나는 가장 서툴다. 서툰 것을 사람들은 용납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빈번하게 상처를 입는다. 궁색한 선택이지만, 그래서 유일한 나의 대안은 사람 곁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참혹하고 질긴 생래적인 외로움은 어쩔 것인가. 하여 나는 나의 물색없는 외로움을 가장 위험한 것으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107쪽)

 


    그러나 그런 유의 지리멸렬한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놓는 것은 온당하지 않음을 나는 안다. 옛날에 나는…… 어쩌고 하는 투의 자기과시를 곁들인 감상적인 회상이, 회상하는 개인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에게 무슨 의미를 주겠는가. 모든 과거는 기억된 과거일 분이며, 모든 기억은 검열된, 또는 취사선택된 기억일 뿐이다. (113쪽)

 


    나는 그때 너무 커버렸던가. 적어도 생각은 그렇게 했었다. 어쩌면 생각뿐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생각이 많은 편이었고, 그래서 늘 행복하지 못했다. 생각이 많은 것은 무언가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려는 욕망이 많은 생각을 만든다. 하지만 생각은 생산 능력이 없다. 그래서 결핍의 정도는 더욱 심해지고, 세상의 불화감은 더욱 증폭된다. 그 증폭된 불화감은 또 더 복잡한 생각의 밑천이 된다. 끝도 없는 악순환. 생각이 많은 사람은 세상을 쉽게 믿지 않고, 세상은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따돌림의 대상이 된, 생각이 많은 사람은, 복수하듯 세상을 따돌릴 채비를 한다. 거기서 다른 사람에 비해 자기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돌출한다. (116쪽)

 


    “왜요? 그러면 안 됩니까?” (191쪽)

 


    그는 오히려 더 깊이 동굴을 판다. 그리고 그 동굴에 오만가지 책들을 숨겨 놓고 탐욕스럽게 읽어 댄다. (236족)

 


    그리고 또 중얼거렸다. 그녀는 어디 있는가. 왜 여기 없는가.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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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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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차이는 무엇일까. 물론 많은 차이점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두 문학의 차이점을 나열해 보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에 나온 수많은 소설들 중에서 두 문학의 테두리에 동시에 포함되어 교집합의 위치에 있을 소설도 분명 존재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순문학을 지향한 장르문학, 장르문학을 지향한 순문학. 어느 것이 되어도 좋습니다. 그저 그런 소설이 있다면 과연 어떤 느낌의 소설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일본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것도 1950년대의 일본 사람. 묘하게 그 시대 일본의 분위기, 시대가 갖는 습관, 사람들의 사고방식 등이 제 안으로 스며듭니다. 아직 가본 적 없는 곳이라 일본을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세이초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그 당시의 일본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듭니다. 당시 일본 길거리의 불빛을 알고, 술집을 드나들며 술을 마셔봤고, 사람들을 만나며, 전화를 걸고, 전보를 치고, 약속 장소를 확인하며 기차 시간표를 들추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제가 전혀 겪어보지 않았던 착각의 기억입니다. 그런데 이 점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점과 선』도 그런 착각을 만들어내는 추리소설입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어떤 한 지점에 가만히 서서 현재까지 소설이 인도한 지점들을 연결해보곤 합니다. 그리고 점과 점을 연결하여 하나의 선으로 만들면서 마치 자신이 어떤 사건을 쫓는 형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듭니다. 왜 이것은 아닐까? 이 알리바이에는 어떤 트릭이 감춰져 있을까? 왜 그들은 그래야만 했을까?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소설을 통해 확인하며 직접 선을 그어 보게 합니다. 소설 밖에 있지만, 소설 안에 있는 듯한 착각.

 


    그런 착각은 세이초 소설이 보인 친절함 때문에 생겨납니다. 독자 스스로가 사건의 중심에서 능동적으로 사건에 임하도록 친절한 유도를 보입니다. 간간히 등장인물에게 일어났던 일, 조사를 통해 밝혀진 내용, 등장인물들의 알리바이 등을 정리해줍니다. 그리고 사건을 추적하는 인물이 이 같은 정보를 마음속으로 정리하는 목소리를 독자에게 들려주며 독자도 함께 고민해보길 권합니다. 독자와 비슷한 높이에서 독자와 함께 풀어보길 원하는 미스터리. 세이초의 인간미가 돋보인 서술 형태란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작위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닙니다. 시종일관 담백한 어조로 차분히 사건을 말합니다. 조금 건조한 느낌의 해설과 인물들 간의 대화로 소설은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내려는 듯하는데, 저는 이런 느낌이 좋았습니다. 소설이 보인 사건 자체는 정말로 단순한 것이고, 어떻게 보면 단서를 쫓는 과정도 약간 낡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진행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잠깐씩 숨을 돌리게 한 정적인 순간들이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또 그런 장면이, 듬성듬성 들어간 삽화와 잘 어우러져 더욱 분위기 있는 추리소설을 만든듯 합니다.


 




 

    그들에게 마지막 기쁨의 시간조차 충분히 갖지 못할 만큼 절박한 사정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42쪽)

 


    찻집 안에는 단골손님의 얼굴이 두셋 보였다. 종업원이나 손님 모두 평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 창문 너머 보이는 긴자는 여전히 그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미라하만 며칠간 그곳에서 일탈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미하라의 그 뻥 뚫린 시간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 그가 어떤 이상한 것을 보고 왔든 전혀 관심 없다는 얼굴들이다. 당연한 일이건만, 그는 일종의 고독을 느꼈다. (89쪽)

 


    4분간의 공백은 정말 기막힌 착상이야. (126쪽)

 


    내가 이렇게 병상에 낮아 나의 여윈 손가락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순간에도, 전국의 여러 지방에는 일제히 기차가 정차해 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인생에 따라 기차에 타거나 혹은 내린다. 나는 눈을 감고 그런 정경을 상상한다. 그러다 보면, 그 시간에 각 선의 어느 역에서 기차들이 교차하는지까지도 발견한다. 무척 즐겁다. 기차가 교차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필연이지만, 타고 있는 사람들이 공간적으로 교차하는 것은 우연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여러 고장에서 펼쳐지는 스쳐 지나가는 인생을 한없이 공상할 수 있다. 타인의 상상력이 만든 소설보다도 자신의 공상이 훨씬 흥미롭다. 꿈이 떠다니는, 고독한 즐거움이다. (137쪽)

 


    말할 것도 없지만, 수사관에게 중요한 것은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노력입니다. (190쪽)

 


    누구나 모르는 사이에 선입관이 작용해서, 당연하다고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섭습니다. 이 만성이 된 상식이 간혹 맹점을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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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굉장히 유명한 작가라고 하는데, 사실 이승우 작가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건 불과 얼마 전의 일입니다. 뒤늦게 알았다는 것에 대한 어떤 죄의식 때문일까, 아무튼 몇 권의 소설을 짧은 기간 동안 급하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소설마다 비슷한 무언가가 계속해서 언뜻언뜻 스쳐지나가는 듯해 참으로 묘합니다. 소설쓰기는 작가의 인생을 그대로 드러내놓는 행위이구나, 혹은 아무리 숨기려 한다 해도 저절로 작가의 인생이 새어나올 수밖에 없구나, 등등의 생각을 해봅니다.



    『지상의 노래』는 죄인들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노래에 대하여 정확히 무엇이라 단정하듯 말할 수 없습니다.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혹은 실제로 존재하긴 하는지 증명할 길이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첩첩 산중 꼭대기에 위치한 한 수도원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수도원 벽에 가득 적힌 성경 구절의 벽서는 누가, 어떤 연유로 쓴 것인가, 하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런 핵심을 쫒다보니 등장하는 모든 죄인들의 노래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적인 성향의 소설에서 죄인들이 어떤 식으로든 결국 구원받는다는 결말로 이어진다면, 사실 그들이 속죄하기 위해 스스로를 얼마나 가두었는지 여부를 떠나 구원받아 안식을 얻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배신감을 느낍니다. 죄는 사라지지 않는데, 소설의 초점은 죄에 있지 않고 죄를 씻어내는 과정에 있습니다. 또 그런 과정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경건하게 치장하려는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아무리 걷고 또 걸어서 성지에 다다른다 하더라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고, 길바닥에 자기 머리를 수십 번 내리 찍는다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 죄의 경중을 떠나서 이런 점은 참으로 어려운 부분이라, 사실 뭐가 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소설의 이야기 자체는 쉬워 보이지만, 묘사하는 행위의 의미는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종교적 사건에 대한 비유, 인물의 내면에 대한 묘사, 사유의 흐름과 결정, 어떤 갈등과 죄의식, 수치심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소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받아들인 내용이 사실 그다지 중요한 내용이 아닐지 몰라서 계속해서 소설 속에 숨어 있는 어떠한 뜻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소설은 희미해지고 처음 안다고 여긴 어떤 것까지 사라집니다. 무언가 아득해지는 느낌으로.

 


    아마도 그런 느낌은 소설이 보인 서술 형태 때문일 것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이야기, 소설의 느낌이 딱 그러합니다. 정확한 내막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이가 한 명 있는데, 그는 바로 작가 자신일 것입니다. 작가는 곧 소설 안에서 신과 다름없으니, 이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 그 말씀에 따르면 소설 안에서 작가는 신과 다르지 않음을 말하니,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는 소설을 부정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으나, 그런 부정 자체가 작가의 존재를 일부 시인한 것이라 볼 수 있고, 그것은 소설을 부정하지 않기를 부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소설을 부정하지 않기를 부정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또는 소설과 작가의 관계를 부정하지 못한 부정일 수 있기 때문에 소설 안에서 작가의 목소리가 신의 목소리처럼 들린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당연하지 않다고 말하는 당연함은 오히려 당연한 부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너무나도 당연한 어떠한 것을 규정하기 위해 한참 동안 돌고 도는 서술을 보이는데, 이 과정이 마치 아래로 내려오는 말씀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한동안 제 귓가에서 떠나지 않은 채 왕왕 울리고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아득한 느낌만 남았습니다. 반박할 수 없어서 그저 믿을 수밖에 없는 그런 느낌입니다.

 


    성경과 마찬가지, 소설도 독자의 경험, 현재의 상황,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어떤 생각들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감동과 깨달음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갑자기 책의 글자들이 그대로 튀어 올라와 가슴에 새겨지는 느낌으로. 『지상의 노래』도 저에게 어떤 것을 새기려 합니다. 그것은 난해하진 않았지만 무척 낯선 느낌입니다. 각자가 저지른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방식에서 소설이 표면적으로 보인 것 외에 어떤 다른 의미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어서 갑갑하기도 하고 계속해서 겉도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너무나 낯섭니다. 그래서 그저 이해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어서 어떤 모호한 느낌의 신비롭다는 감상만으로 경건한 마음을 표현할 뿐입니다.

 





    몇 명의 호사가들이 자신의 블로그에 이 책의 리뷰를 포스팅했지만 …. (20쪽)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고 묻는다면 왜 그럴 수 없지?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사랑의 열병에 사로잡힌 이 젊은 남자는 자기 자신에게 쉼 없이 그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 여자에 대해 네가 아는 게 뭐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그래?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수없이 질문을 되풀이한 끝에 그는 반문의 형식으로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왜 그럴 수 없지? 왜 그러면 안 되는데? (50쪽)

 


    절대 권력에 대한 종교적 헌신의 상징성을 감안하면 그것은 일종의 개종이라고 할 수 있다. 상징으로서의 선글라스를 벗어 던지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그는 선글라스를 쓰고 해 온 일들을 그만두겠다고 공언한 셈인데, 그 일은 그가 10년 넘게 꾸준히 해 왔고, 그의 존재를 구성했으며, 그 결과 그 일과 그의 존재가 잘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친밀했으므로, 존재의 위협을 무릅쓰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 (166쪽)

 


    그녀는 이 세상을 초월한 것처럼 보였다. 이 세상의 법칙은 그녀를 지배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숭고하고 위대해 보였지만 동시에 무모하고 두렵기도 했다. 아주 가까이에 있었지만 누구보다 멀리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래 함께 살아왔지만 처음 만난 것처럼 낯설고 거북했다. 문제는 그녀의 말들에 공감할 수 없었지만 무시해 버릴 수도 없다는 데 있었다. (183쪽)

 


    도움이 될지 모르겠는데, 길 위에 몸을 올려놔 봐요. 나는 도움이 됐어요. (303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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