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실살인게임 마니악스 밀실살인게임 3
우타노 쇼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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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최근에 귀공이 굉장히 많은 책을 읽었다네.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는 행위 자체가 너무나 좋았지. 그래서 낮 동안엔 얼른 집에 돌아가서 책 읽을 궁리만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네. 그런데 한동안 이렇게 많은 책을 읽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이토록 좋아하는 것을 단지 취미로 그칠 것이 아니라 귀공이 한번 직접 책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네. 소비자가 아니라 공급자가 되고 싶었던 게지. 직접 한번 해보면 어떨까… 책 읽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귀공과 같은 생각을 해봤을 거라고 보네.

 


    그런데 귀공은 소설 중에서도 특히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네. 복잡해 보이는 퍼즐과 불가능해 보이는 수수께끼가 명쾌하게 풀리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도 즐겁거든. 하지만 책을 덮는 순간, 그 모든 즐거움은 순간으로 끝이 난다네. 소설이 보인 것만큼의 대단한 수수께끼가 소설 밖의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게지. 슬픈 현실이야. 미스터리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너무나 빤한 것들뿐이라 솔직히 사는 게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해.

 

 

    추리소설이 그토록 좋다면 추리소설을 직접 써보면 되지 않은가… 아니라네. 조금 더 근원적인 욕구가 있다네. 조금 더 고차원적인 사고를 한번 해보게. 우리가 진정한 공급자가 될 순 없을까.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추리소설을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존하는 수수께끼를 만들어야 한다네. 진짜 사건을… 생생한 살인사건을… 제대로 된 문제 출제를 위하여 세심한 실험을 거쳐 완성된 밀실살인사건을…, 바로 나! 반도젠 교수처럼 말일세.

 

 

    반도젠 교수? 귀공의 이름을 듣고 귀공이 누군가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보네. 『밀실살인게임 왕수비차잡기』와 『밀실살인게임 2.0』을 읽었다면 금방 눈치 챘을 테지. 귀공은 밀실살인게임에 존재하는 한 명의 게이머라네. 갑자기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귀공의 존재가 의심스러울 테지. 그리고 귀공의 사고방식이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는 고안해낸 트릭을 직접 사용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는 게이머들이라네. 처음부터 상식 같은 걸 바라면 안 된다고! 아직도 모르겠는가!

 

 

    『밀실살인게임 왕수비차잡기』은 게임판을 만들었고, 『밀실살인게임 2.0』은 그 게임판을 뒤집어버렸지. 그러면 『밀실살인게임 마니악스』에선 무엇을 보여줘야 할까. 보여줄 게 아직 남아있긴 할까. 그래서 이번 밀실살인게임은 게임 같은 설정에 대한 소설의 자기합리화, 혹은 작가의 속마음을 풀어놓은 해설 정도로 보면 된다네. 외전 같은 형태지. 그동안 본격미스터리 문제 출제자로서 많은 추리소설 작품을 발표했던 우타노 쇼고, 작가 본인의 푸념을 포함해서 이 소설이 요즘 사회에 만연한 어떤 현상을 지적하려 하는가에 대해 약간의 풀이가 들어간 느낌이라네. 아니,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고, 분명한 밀실살인게임이 존재한다네.

 

 

    그런데 이토록 최첨단의 기술력을 가진 밀실살인게임이 세상에 과연 존재하긴 할까, 귀공도 사실 정말로 깜짝 놀랐다네. 나름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인다고 자부하는 귀공이네만, 인터넷 AV화상채팅, 스마트폰, 와이파이, 블루투스, 인터넷 공유 프로그램 등… 빠르게 발달하는 기술력을 쫓아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트릭을 사용한 살인게임이라니… 너무 비상식적이지 않은가. 사실 이런 식이라면 세상에 불가능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중요한 건 살인게임을 지켜보던 불특정 다수의 순진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네. 다운로드하고 싶고, 공유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덧글을 달고 싶고……. 그러다 스스로가 직접 게이머가 되어 어설픈 게임 흉내를 내며 능동적으로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바이러스처럼 스멀스멀 퍼진다는 점, 그점이 대단한 것이라네. 이 얼마나 놀라운 밀실살인게임인가. 반도젠 교수?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닐세. 두광인? 잔갸군? aXe? 044APD?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다네. 우리는 이미 가상의 공간에서 훌륭한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가. 모두를 위한 밀실살인게임은 이미 열려 있는 것이라네.

 

 

    그래서 지금 참가한 게임이 조금 어설퍼 보였는가. 그래서 게임에 불만을 품고 있는가. 그러면 더 좋은 게임을 직접 만들면 될 것 아닌가. 귀공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보네. 만약 그런 게임이 있다면 얼마든지 귀공을 불러만 주게. 필히 참여할 테니… 어서 그 홈페이지 주소를……. 아, 오해는 마시게. 귀공은 단지 최종답안 제출 뒤 스피커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경쾌한 소리가 좋은 것뿐이라네. 정답! 바로 그 소리가 좋다네.

 

 

 

 


 

 

 

    다만 이 추리게임에는 세간의 일반적인 호사가들이 주고받는 추리 논의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다.

    여기서 추리 대상으로 삼는 살인 사건은 게임 참여자 각자가 직접 일으킨 것이다. 일단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인 뒤 채팅에 참여하여 수수께끼를 풀어보라고 문제를 내는 것이다. (9쪽)

 

 

    그 지경이니 서른일곱 살 먹은 미혼 프리라이터의 괴사는 공원에서 죽은 길고양이만큼이나 취재할 가치가 없었던 셈이야. 독이 든 먹이를 먹고 죽은 길고양이는 사회문제로 취급되는 만큼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군. 이 몸은 어렸을 때 사람의 생명은 지구보다 무겁다고 배웠네만, 이 나이를 먹고서야 그 말이 단지 문학적 표현에 지나지 않다는 걸 알았다네. 시정 잡것들의 생명은 정치가가 아침으로 먹다 남긴 빵쪼가리보다 가벼우이. (57쪽)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종종 나 같은 건 도저히 비교도 못할 만큼 지식과 지기와 행동력을 갖춘 사람을 만날 때가 있지. 그런 만남이 인터넷의 매력이기도 해.” (108쪽)

 

 

    우리가 왜 사람을 죽이냐? 빚을 떼어먹으려고? 회사에서 잘린 나머지 성질이 나서? 그런 흔해빠진 살인이 아니잖아. 수수께끼를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고. 죽였지만 수수께끼가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어. (147쪽)

 

 

    “첫 번째 문제는 누구나 쉽게 추리에 참가할 수 있게 만들었어. 그랬더니 너무 싱겁다고 야유를 퍼붓더군. 배려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한마디도 못 들었어. 두 번째 문제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기술을 의도적으로 사용해서 추리의 문턱을 극단적으로 높였지. 그러자 또 야유를 퍼붓네. 잘도 이런 트릭을 생각해냈다는 칭찬은 역시 못 들었어. 실은 이 반응을 보고 싶었거든. 이번에는 승패보다도 이게 테마였지. 인간이란 결국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것만 인정하려는 생물이야. 잘 알았어. 아쉽기는 하지만. 아, 아까 전에도 말했던가. 뭐, 이걸로 댁들 취향은 잘 알았으니까 다음에 출제할 때 참고할게. 다음번에는 너무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문제를 만들 거야.” (188쪽)

 

 

    게임 속의 진실은 현실이 아니야. 제작자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설정을 꿰뚫어보아야 게임을 공략할 수 있다고, 사가시마.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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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소설 전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0
이상 지음, 권영민 엮음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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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상. 그가 세상에 남겨놓은 소설이 몇 편 없기 때문에 그가 발표한 모든 소설을 읽는 것도 한 순간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문단에 대단히 큰 한 획을 그었던 작가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굵고 짧게……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획이라고 말하기 힘들지 모릅니다. 그래서 커다란 점이라고 해야겠습니다. 획을 긋기 위해 나아가려다 그대로 멈칫하고 정지해버린 느낌, 그래서 모양이 조금 이상하게 찍힌 하나의 커다란 점이라고…….

 

 

    이상의 소설 중 「날개」가 가장 유명한 이유는 단지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의 다른 소설들에 비해서 비교적 무슨 내용인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 이상의 소설 중에서 「날개」는 읽어봤어요, 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그의 다른 소설은 읽어도 읽었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의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해독이 필요한 글인지 아닌지, 해독여부를 해독해야하는 것 또한 이상하고 어렵습니다. 

 

 

    「지도의 암실」,「휴업과 사정」,「지팡이 역사」와 같이 초기에 발표한 작품들은 말 그대로 굉장히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언어 파괴까진 아니지만, 뛰어 쓰기를 무시하고 단어의 순서와 문장의 구조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해체시켜 놓은 글. 그래서 어떤 암호와 같은 느낌입니다. 억압된 검열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랬던 것일까요. 그런데 이런 문장들이 묘한 느낌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쉽게 알아들을 순 없지만 어렴풋이 어떤 뜻인지 알 것 같다는 느낌… 정말로 이상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이럴 때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 젊은 문단에선 외국의 어떤 작가의 영향을 받고 이런 글을 즐겨 썼을지 모릅니다.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글로 가장 현대적이고 진보한 문학을 보였던 것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어떤 특권 의식을 갖고 있는 예술, 작품보다 더 장황한 해설서를 읽어야만 하는 예술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서 인지 소설을 공부하며 읽어야겠단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난해한 작품 속에 어떤 깊은 사연이 담겨 있는가, 해설서를 참고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상이기 때문에 더욱 이 같이 이상한 글을 쓴 이유가 궁금해서 이상하게 호기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사차원 대학생의 이상한 낙서를 보고 의미를 찾으려는 이상한 짓에 시간을 뺏겨선 안 된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의 작품마다 비슷한 이미지를 풍기며 작품 아래에 납작 엎드려 있는 화자의 모습이 만약 작가 자신의 모습이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소설 속의 어떤 상황들에 대해 머리로 이해는 한다만, 마음으로 공감할 순 없다는 느낌…… 어쩌면 그건 제 자신의 불안하고 혼란스런 내면이 들킬까봐 탐구하길 거부하는 심리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정말로 이상합니다.

 

 

 

 



 

 

    내객이 아내에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나 아내가 내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나 일종의 쾌감―그 외의 다른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을 나는 또 이불 속에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쾌감이라면 어떤 종류의 쾌감일까를 계속하여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불 속의 연구로는 알 길이 없었다. 쾌감, 쾌감 하고 나는 뜻밖에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 흥미를 느꼈다.

    아내는 물론 나를 늘 감금하여 두다시피 하여 왔다. 내게 불평이 있을 리 없다. 그런 중에도 나는 그 쾌감이라는 것의 유무를 체험하고 싶었다. (날개, 97쪽)

 

 

 

    우리 둘이 맛있게 먹었다. 시간은 분명히 밤이 쏟아져 들어온다. 손으로 손을 잡고,

    “밤이 오지 않고는 결혼할 수 없으니까.”

    이렇게 탄식한다. 기대하지 않은 간지러운 경험이다.

    낄낄낄낄 웃었으면 좋겠는데―아―결혼하면 무엇하나, 나 따위가 생각해서 알 일이 되나? 그러나 재미있는 일이로다.

    “밤이지요?”

    “아―냐.”

    “왜―밤인데―. 에―우습다―. 밤인데 그렇네.”

    “아―냐, 아―냐.”

    “그러지 마세요, 밤이에요.”

    “그럼 뭐, 결혼해야 허게.”

    “그럼요?”

    “히히히히?” (동해, 129쪽)

 

 

 

    물론 이것은 죄다 거짓부렁이다. 그러나 그 일촉즉발의 아슬아슬한 용심법이 특히 그중에도 결미의 비견할 데 없는 청초함이 장히 질풍신뢰를 품은 듯한 명문이다.

    나는 까무러칠 뻔하면서 혀를 내어둘렀다. 나는 깜빡 속기로 한다. 속고 만다.

    여기 이 이상 선생님이라는 허수아비 같은 나는 지난 밤 사이에 내 평생을 경력했다. 나는 드디어 쭈굴쭈굴하게 노쇠해 버렸던 차에 아임을 보고 이키! 남들이 보는 데서는 나는 가급적 어쭙지않게 자야하는 것이어늘, 하고 늘 이를 닦고 그러고는 도로 얼른 자 버릇하는 것이었다. 오늘도 또 그럴 세음이었다. (종생기, 168쪽)

 

 

 

    나는 지금 이런 불상한 생각도 한다. 그럼―.

    ―만 26세와 3개월을 맞이하는 이상 선생님이여! 허수아비여!

    자네는 노옹일세. 무릎이 귀를 넘는 해골일세. 아니, 아니.

    자네는 자네의 먼 조상일세. 이상(以上). (종생기, 190쪽)

 

 

 

    “나는 죽지 못하는 실망과 살지 못하는 복수, 이 속에서 호흡을 계속할 것이다. 나는 지금 희망한다. 그것은 살겠다는 희망도 죽겠다는 희망도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이 무서운 기록을 다 써서 마치기 전에는 나의 그 최후에 내가 차지할 행운은 찾아와 주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무서운 기록이다.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 (십이월 십이 일,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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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33
이노우에 다케히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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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의 이야기를 다룬 시바 료타로의 소설 『패왕의 가문』을 읽고, 혹시 이 시대가 그 시대인가 궁금해서 찾아보려고 『배가본드』를 꺼냈다가 결국 또다시 처음부터 다 읽어버리고야 말았습니다. 소설과 완전히 같은 시절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겹치는 부분이 있고, 유명한 검객들 이름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가기도 해서 오호라 그놈이 그놈이구나 하며 재미있게 봤습니다. 다시 꺼내든 만화책을 통해 이전에 읽었던 소설의 내용이 내 안에서 더욱 단단해지는 느낌… 이야기가 보인 세상이 명확해지는 느낌… 어떤 경지에 이르는… 오호라! 이런 세상도 있구나! 라며.

 

 

 

    『배가본드』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코지로, 일본에 실존했던 두 검객의 이야기를 다룬 만화입니다. 15년 전에 단행본 1권이 나온 듯한데, 현재 33권까지 나온 상태니 일 년에 두 번의 단행본이 나왔던 것이군요. 아무튼 굉장히 느릿느릿하게 나오고 있고 이야기 진행 자체도 굉장히 느릿느릿해서 다음 단행본이 나오길 가슴 졸이며 기다리다 재빨리 찾아보기 보단 느긋하게 잊고 지내다가 생각나면 한 번씩 들춰보는 재미로 찾아보기 좋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느리게 나오다가 갑자기, 예선전에서 하얗게 불태우다 보니 본선에 오르자마자 지쳐서 이렇게 갑작스레 완결하기로 하였습니다, 스미마셍, 하며 끝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타고난 천재와 만들어진 천재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슬램덩크』가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그의 그림은 엄청나게 형편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 그가 보인 그림은 만화라고만 여기기엔 아까울 정도로 어떤 경지에 이른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작품 활동에만 전념할 여건을 갖춘 작가가 된다는 것. 그래서 비로소 만들어진 천재가 된다는 것. 세상에는 여유가 없어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천재적인 붓과 펜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붓과 펜 모두가 빛을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가던 길을 계속 갈 기회를 얻는 천재는 많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결국 우리는 결과를 두고 이야기할 뿐이지만, 역시 힘들고 대단한 것은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그 길을 가다가 지치고 말라서 죽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이름없는 천재들을 생각하니 괜히 온몸이 떨려옵니다.

 

 


    물론 누구나 여건이 된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기본적인 자질과 충분한 소양을 갖추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기회가 왔을 때 낚아 챌 수 있는 능력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미야모토 무사시처럼 천천히 성장하며 다듬어지고, 세상과 뜻이 만나 태어진 천재 검객이라 할지라도 기본적인 체격 조건이나 완력, 타고난 고집, 행운 등 세상이 허락한 외적인 조건들이 잘 들어맞아야 할 테니까요.

 

 

 

    『배가본드』 역시 1권에서 보인 그림과 33권에서 보인 그림의 수준 차이가 느껴집니다. 계속해서 발전하는 그림, 진화하는 모습, 더 대단한 작품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 그건 『배가본드』에서 미야모토 무사시가 천하제일의 검이 누구인지, 과연 스스로를 천하제일이라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신의 거친 방식대로 검을 휘두르며 세상에 소리쳐 묻는 모습과 닮았습니다. 천하제일이라는 집착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성찰을 통해 해소하고, 그러한 과정을 반복하며 얻은 자기 안에 지혜가 차근차근 쌓이다가 결국엔 하나의 뜻, 진리의 경지에 이른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배가본드』는 사람을 베고 자르는 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 세상 사는 일이 손에 쥐고 있는 도구만 다를 뿐 비슷한 모양새라 할 수 있으니, 결국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뜻으로 통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검이 아니라 붓으로 천하제일이 되겠다는 뜻을 품었을지 모릅니다. 고집과 근성, 체력을 내세운 강백호나 미야모토 무사시 같은 캐릭터가 작가 자신의 모습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천하제일을 꿈꾸던 패기 넘치는 소년이 진정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달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 누가 되었든 천하제일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합니다.

 

 

 

 


 

 

 

    내 안에는 온갖 소리가 있다. 뼈가 부딪히며 삐걱이는 소리. 숨을 들이쉬는 소리. 내쉬는 소리. 검의… 무게로 ‘지걱’하고 울리는 소리. 무게를 없애자. 

    됐다. 마른 잎의 무게뿐. 

    지쳐 쓰러질 때가지 계속해야지. 아니, 좀 더 잘하려고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백 번이든… 천 번이든… 처음 휘두르는 것처럼. (배가본드 3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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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즈가 보낸 편지 - 제6회 대한민국 디지털작가상 수상작
윤해환 지음 / 노블마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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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가 왔습니다. 그래서 읽었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팬이 된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요. 모든 팬들이 저처럼 이런 감정에 사로잡히나요. 기기묘묘한 분위기에 둘러싸여 그 자리에 앉아 홀딱 밤을 새며 읽었습니다. 홈즈의 편지가 제게 온 날은 그랬습니다. 홈즈가 보낸 편지와 대화를 나누었던 어느 겨울 날. 이제는 정말로 그날이 17년 전의 일이 된 것처럼 너무나 까마득한 느낌이라 사실 어떤 대화가 오고갔나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다만 아련한 느낌의 훈훈한 온기가 전해졌다는 것밖에…….

 

 

    이상적인 탐정은 세 가지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고 합니다. 관찰력, 추리력, 지식. 그렇다면 이상적인 탐정소설이 갖추어야할 세 가지 자질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 최초의 추리소설 작가 김내성이라면 이상적인 탐정소설은 무엇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김내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은 그러한 것들에 대해 무엇이라고 할까요. 그런 궁금증을 갖고 윤해환 작가의 소설 『홈즈가 보낸 편지』를 읽었습니다.

 

 

    이와 같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작가를 직접 만나 질문하고 작가의 말을 들어 보는 일, 그건 상상만으로도 굉장히 설레는 일입니다. 아마 소설 속 아이들이 셜록 홈즈의 친필 편지를 받아 함께 수수께끼를 푸는 기분과 같을 것입니다.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지만, 어떤 형태로든 곧 만나게 될 거라고 기대하는 것.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긴 할지 바로 앞날의 일도 예측할 수 없지만, 막연하게 그렇게 되리라는 믿음을 갖고 소망하는 것. 그런 느낌들이 모여서 괜한 흥분을 만들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내성, 카트라이트, 쥬니치로, 산온...! 사냥이 시작되었네!

 

 

    한 데 섞일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 함께 미스터리한 사건을 풀이한다는 이야기. 이것은 일종의 게임과 같은 느낌입니다. 커다란 하나의 주 임무를 완료하기 위해 바로 앞에 놓인 하위 임무를 완료하고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는 재미난 모험. 강 약 약, 중간 약 약… 리듬을 타며 전개되는 이야기 속 임무들에서 경쾌한 박자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런 박자들 중에서 조금 다른 느낌의 박자 즉, 변주의 형태로서 소설의 마지막엔 방대한 분량의 주석이 자리 합니다. 김내성과 코난 도일, 에도가와 란포, 모리스 르블랑 등 유명한 작가들에 얽힌 세부적인 사실을 모아둔 이 주석은,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고 느끼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또 숨겨져 있는 소설의 다른 재미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주석에서 보인 인문학적 소양이 소설의 중심을 다잡고 있어 소설의 무게감을 실어주기도 합니다.

 

 

    무게가 느껴지는 진중한 이야기. 그건 아마도 소설이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은 역사 그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경쾌한 느낌이기도 합니다. 일본에서 유학한 조선인, 영국인 아버지와 조선인 어머니를 둔 양인, 군인을 아버지로 둔 일본인 등, 직위나 출신뿐만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달라도 너무 다른 각 계층의 사람들이 하나의 사건이라는 공통된 관심사를 갖고 모입니다. 거대하게 휘몰아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나약한 개인은, 어느 편에 서야 안전한 장소를 찾고 전쟁의 시련을 피하며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격동의 시대는 개인에게 정체성의 혼란을 강요합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개인, 그런 개인은 소설 속 인물 근섭을 말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소설은 결국 개인과 개인이 만나 서로의 손을 잡고, 훈훈한 게임이자 17년간 미스터리로 묶여있던 한 살인사건을 추적하고 해결하기에 이릅니다. 역사가 가해자이고 개개인은 피해자일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홈즈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 혹시라도 홈즈가 추신을 남겼다면 그것은 아마도 화해의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 메시지는 어떠한 형태로든 소설 속에 존재합니다. 안개가 자욱하게 껴 한치 앞의 미래의 날도 볼 수 없는 대동강 너머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 그리고 이어 조금 더 가까운 뱃머리에서 들려오는 뿔피리 소리, 다시 그 소리에 화답하는 호루라기 소리가 만들어낸 하모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개인을 하나의 만인이라 일컬을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피-에수-아이’가 아닐까 합니다. 함께 웃으며 서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이름. 그래서 이상적인 탐정소설이 가져야할 세 가지 자질은 ‘P, S, I’라고…….

 

 

 

 

 

 


 

 

 

 

    “기기묘묘한 것을 찾으려면 삶 그 자체로 들어가야 한다. 인생은 그 어떤 상상보다 더한 것을 보여주기에.” (122쪽)

 

 

    “왜냐하면 나는 자네의 첫 번째 팬이니까. 이 쥬니치로가 팬이라 자청하는 소설가는 이 세상에 유불란 한 명밖에 없다고!”

    “어처구니가 없다니까.” (153쪽) 

 

 

    소설이라면 트릭이 실패해도 괜찮다. 책이 안 팔리면 그만이다. 현실은 다르다. 치졸하다 비웃은 저들보다 못한 처지에 떨어지리라. 카트라이트가 이야기한 토막민처럼 몰락하리라.

    도망쳐.

    내성의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꿈틀거렸다. (228쪽)

 

 

    “어떻게든 데뷔는 해냈어. 자네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 별생각 없이 정탐소설을 탐독하다 보니 이곳까지 왔지. 데뷔할 때엔 그저 신이 나서 비로소 조선 최초의 정탐소설가가 탄생하였다! 소리를 질러댔지. 그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겁 없이 덤벼서 이뤄냈는데…… 막상 되고 나니 뭘 써야할지 모르겠네. 작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긴 하였으나 이후의 일은 생각지 않았거든. (…)” (264쪽)

 

 

    “어떻게든 흐르겠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 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밖에 없으이.” (271쪽)

 

 

    “자네는 글을 쓸 때에 진정으로 행복하니까!”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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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의 가문
시바 료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도쿠가와 이에야스. 100년 넘게 지속된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인물. 250년 에도 막부의 시대를 연 초대 쇼군. 통일 일본시대를 열어 체제의 안정을 바탕으로 일본의 사회, 경제, 문화 발달의 초석이 되었던 인물. 한마디로 말해 세상을 품었던 시대의 영웅. 그런 그가 유훈으로 이런 말을 남깁니다. ‘자기 분수를 알아라.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패왕의 가문』은 일본을 제패한 패왕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가 거느렸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현대적으로 해석한 소설, 결국엔 소설입니다. 그런데 어떤 가식적인 영웅담을 통해 인물을 화려하게 치장하려는 모습의 글은 아닙니다. 한 역사의 이야기에서 한 인물의 이야기로, 그리고 다시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로 확장하는 글. 그리고 화자는 소설 밖에 서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며 해설에 주력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물의 장점과 함께 단점도 많이 지적해 보이고, 역사적 갈림길에서 저지른 중대한 실수 때문에 이후 어떤 상황이 만들어 졌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합니다. 또한 가문의 부끄러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쑤시기도 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듣는 입장에선 꽤 흥미진진한 글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하는 이야기. 그렇다 할지라도 『패왕의 가문』은 재미있습니다. 그것은, 같은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전하는 이야기꾼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재미의 정도가 다른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한다면 그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역사소설을 전문적으로 썼다던 작가 시바 료타로의 내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많은 인물들이 이야기 속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많은 사건들이 발생합니다. 또 배경이 되었던 지역에 대한 수많은 일화들이 함께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야기들이 굽이쳐 흐르는 모습이 마치 세차게 흐르는 강물과 같아 보입니다. 땅을 판 자리에서 품어져 나와 졸졸 흐르기 시작한 샘터의 작은 물줄기처럼, 갑작스레 튀어나온 이야기들이 결국엔 하나의 큰 강을 이뤄 하나의 주요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나중엔 이에야스 가문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전체의 이야기라는 큰 대해를 이루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런 이야기들의 흐름이 장관입니다. 난세를 평정한 영웅의 이야기는 뭐가 되었든 기본적인 재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린 시절에 얻은 트라우마와 그가 다스렸던 지역적 특성 때문에 비교적 영웅적이지 않은 성품을 보였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의 일본은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이 드물었고, 그래서 오히려 시대가 요구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조심성 많고, 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의 의견을 잘 따르는 인물. 영웅이 만들어지기 위한 환경이 좋았던 경우, 즉 시대를 잘 만난 경우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에야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람을 잘 만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란의 시대였음에도 이에야스의 곁에는 한결같은 모습의 우직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인간이란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항상 관계를 중요시하며 원칙과 신념을 지켜서 얻은 당연한 결과라고 봅니다. 그것이 순간엔 어떤 교묘한 속셈으로 인해 조작된 인간관계와 외교관계였을 수 있지만, 결과론적으로 역사를 다시 되짚어보면 결국에 그 모든 것을 끝까지 유지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반대로 도쿠가와 가문의 아랫사람들 또한 윗사람을 잘 만난 경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혼란의 세상을 평정해줄 영웅의 등장이 필요한 요즘의 시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 사람들의 이야기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사람들에게 기본과 원칙을 강조하며 진정한 믿음을 주었던 평범한 군주 도쿠가와 이에야스. 독창적이고 천재적 자질이 없던 이에야스에게는 어쩌면 그가 갖고 있던 수많은 단점들이 오히려 그의 독특하고 창의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위엄과 배려.

    이 두 가지는 옛날부터 일본에서 지도자가 꼭 갖추어야 할 요소였다. 뛰어난 지혜나 용맹한 자질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긴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지도자의 절대조건은 아니었다. 지혜나 용기 같은 건 수하들이 잘 갖추고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20쪽)

 

 

    젊은이는 흉내를 내야 한다는 말이다.

    독창과 창의, 기지 등을 세상 사람들은 지혜라고 일컫지만, 그런 것은 칼날처럼 위험하여 마침내 오만을 불러일으키고 몸을 망가뜨린다. 자기 나름의 지혜란 알고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만인지도 모른다. 특히 전략의 경우는 고금을 통해 아무리 뛰어난 싸움꾼이라도 그 방식이래야 고작 두세 가지여서 어느 하나에 버릇이 들면 어떤 전장에서도 같은 방식을 쓰게 되어 결국 적의 시야에 노출되고 만다. 같은 방식으로 세 번을 이겼더라도 마지막 한 번을 크게 져버리면 그대로 망한다. (24쪽)

 

 

    그렇다고 해서 이에야스는 ‘도대체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라고 자신에게 묻지 않는다. 이 사내는 회의주의자가 아니었다. 섬세한 감수성으로 조그만 일에도 전율을 일으키는 문학청년도 아니었다. 그는 어려운 조건 아래서 살아간다는 데 대해 어떤 열정을 품은 존재였던 것 같다. 그는 선천적으로 집요한 성격을 타고난 생명체로 꼬리가 잘리건 다리가 잘리건 혀로 상처를 핥고 침을 질질 흘리며 다시 일어서고야 마는 열정, 아니 생물적인 본능 같은 것을 풍성하게 지닌 사람이었다. 이것이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 사내가 가진 비상한 생리적 특성이 아니었을까. 그 복잡하고 살벌한 전국의 세상에서 이에야스나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결코 뛰어난 재능이라는 지엽적이고 사소한 품성 때문이 아니었다. 존재의 깊은 곳에 끈적끈적한 점막으로 감싸인 선천적인 열정과 생명력이 그로 하여금 생존에 적합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123쪽)

 

 

    그가 어떤 깨달음을 얻어서라기보다는 원래가 그런 사내였다. 그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젊은 시절부터 추상화하여 자연인이 아닌 일종의 법인처럼 규정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떠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움직였다.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도 마치 객관적인 사물을 보는 듯이 관리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관찰하고 필요한 것을 처방했다. 그의 내면에 감추어진 비밀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일생은 그것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좋다. 어디를 보나 영웅의 풍모란 찾아볼 수 없고, 외모도 일상도 그 재능도 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었던 인물에게 다른 사람에게 찾아보기 힘든 어떤 신비가 있다면 바로 이 하나였다. (5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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