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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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H마트에서 울다

◎ 지은이 : 미셀 자우너

◎ 옮긴이 : 정혜윤

◎ 펴낸곳 : 문학동네

◎ 2022년 7월 13일, 1판 9쇄, 407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책 소개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문학동네에서 나왔으니까 (문학동네에서 소설만 펴낸 것도 아닌데 이건 무슨 일반화인가) 또, 저 표지가 김숨의 소설집<국수>를 떠올리게 만든 탓에 자연스레 소설로 착각했다. 그래서 작가 소개를 보고 뮤지션이 글도 잘 쓰니 부럽구나로만 생각했다가 에세이인 걸 알고는 초반에 얼마나 뜨악했던지.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는 56세라는 젊은 나이의 엄마를 암으로 잃는다. 그 상실감은 한국 식료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H마트에서 울음으로 터지고, 엄마의 죽음 직후 아버지와 여행하며 치유하려 하지만 엄마와의 유대감 같은 것이 아버지와의 사이에는 없다. 결국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고 엄마와의 추억을 노래로 만들고, 엄마와 먹던 한식을 유튜브의 도움을 받아 해보고, 엄마와 하려던 제주여행을 남편과 함께 하면서 나아진다.

-엄마는 내게 직접 요리하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한국인들은 똑 떨어지는 계량법 대신 "참기름은 엄마가 해주는 음식맛이 날 때까지 넣어라." 같은 아리송한 말로 설명하길 좋아한다) 내가 완벽한 한국인 식성을 갖도록 나를 키웠다. 말하자면 나도 훌륭한 음식 앞에서 경건해지고, 먹는 행위에서 정서적 의미를 찾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10쪽)

-나는 지난 5년 사이 이모와 엄마를 모두 암으로 잃었다. 내가 H마트에 가는 것은 갑오징어나 세 단에 1달러짜리 파를 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두 분에 대한 추억을 찾으려고 가는 것이기도 하다. 두 분이 돌아가셨어도, 내 정체성의 절반인 한국인이 죽어버린 건 아니라는 증거를 찾으려는 것이다. (22쪽)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말했다. 내게 너무도 익숙한 한국말. 내가 평생 들어온 그 다정한 속삭임. 어떤 아픔도 결국은 다 지나갈 거라고 내게 장담하는 말.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나를 위로했다. (203쪽)

-내가 된장찌개와 잣죽을 직접 만들었던 것은, 엄마를 돌보는 데 실패한 기분을 심리적으로 만회해보려는 노력이자 한때 내 안에 깊숙이 새겨져 있다고 느낀 문화가 이제 위협받는 기분이 들어 그것을 보존하려는 노력이었다는 것도.(341쪽)

-한 달에 한 번씩 김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새로운 치유법이었다. (360쪽)

-트라우마가 내 기억에 스며들어 그것을 망쳐버리고 쓸모없게 만들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 기억은 어떻게든 내가 잘 돌봐야 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공유한 문화는 내 심장 속에, 내 유전자 속에 펄떡펄떡 살아 숨쉬고 있었다. 나는 그걸 잘 붙들고 키워 내 안에서 죽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했다. 엄마가 가르쳐준 교훈을, 내 안에, 내 일거수일투족에 엄마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를 언젠가 후대에 잘 전할 수 있도록. 나는 엄마의 유산이었다. (373쪽)

이 책이 어떤 책이냐고 묻는 지인들에게 나는 한 마디로

영화<미나리>의 모녀 버전이라 답한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401쪽)

숨기는 것 없이 (이런 얘기까지 해도 되나 싶을 정도의 솔직함으로) 자신의 속을 다 뒤집어 보여준 것 같은 이 이야기는 그런 이유로 나를 많이도 울렸다. 엄마에게 해주고 싶었지만 끝내 해주지 못했던 잣죽을 끓이는 걸 보면서 내가 그녀가 된듯 죽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끓어올랐다. 잣은 없고 냉동실에 팥은 있으니 팥죽이라도. 엄마가 밥에 둬 먹으라고 삶아 보내준 팥이라 물만 조금 더 붓고 우르르 끓여 도깨비방망이로 갈고 쌀 대신 찹쌀가루를 넣었다.



새알심도 없으니 보는 것도 심심하고 쌀을 넣었을 때처럼 살짝 묵직한 듯 혀를 감싸는 그 진중함이 없다. 김치도 안 꺼내놓고 먹다가 나중에야 김치 몇 조각을 얹어 먹었다. 그래, 심심한 팥죽에 김치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헌데, 이 나이 되도록 엄마한테 김치를 얻어먹고 있는 나는 언제쯤 김치를 직접 담글 것인지. (너도 상실을 겪은 뒤에야 할 거니?)

그녀에게는 물론 남편과 남편의 가족들이 있지만 아직 한국에 이모와 이모부, 이종사촌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 서로 말은 잘 통하지 않아도 엄마가 생각나면 한국으로 훌쩍 날아와 이모가 선사해주는 따뜻함을 다시 맛볼 수 있을 테고,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함을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보통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에야 고마움과 그리움을 뼈저리게 느낀다. 주위 친구 부모님이 한두 분 돌아가시면 모인 자리에서 늘 다짐들을 했다. 계실 때 잘 하자. 그런데 그게 딱 그때뿐이다. 사는 게 바쁜 탓도 있지만 극도로 이기적인 때문이다. 제발,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다.'는 말로 정당화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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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 바빌론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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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 지은이 : 허수경

◎ 펴낸곳 : 난다

◎ 2018년 11월 20일 초판1쇄, 251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열린 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시인 허수경을 알고 있던 나는 그녀가 발굴지로 여행을 다녀왔구나, 싶었다. 산문을 별로 즐기지 않지만 시인의 시선이니 뭔가 다르려니 호기심이 일었고 그렇게 가을에 내게 온 책인데 여태 읽기를 망설인 건 마치 '이 안에 들어오기만 해봐. 흙으로 덮어줄 테니' 하며 노리고 있는 것만 같은 저 표지 때문이었다. 햇볕때문이다. 부족하면 사람이 우울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고고학을 모른다. 관심도 별로 없다. 박물관에 가서 구경하는 건 즐기지만 그 물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를 통해 거기 그렇게 우아한 모습으로 놓여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므로 '발굴지에 있었다'는 그녀의 고백은 (진짜 고백같지 않은가. 서슬 퍼런 경찰 앞에서 자신의 알리바이를 필사적으로 입증하려는 용의자처럼 그녀는 '그때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고 쓰고 있으니) 내가 모르는 그 경로들을 밝혀줄 것이라는 희망이 우울을 이겨냈다. (그래서 희망은 빛으로 표현하는 모양이다.)

그녀의 고백은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이라크를 침공한 그 시점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삶의 터전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시작한 이야기는 그녀가 직접 발굴에 참여하고 연구했던 발굴지의 역사와 자신의 역사와 현재가 버무려져 둥글게 둥글게 굴러간다. 찰칵하고 슬라이드 한 장이 돌아가는 동안 그 슬라이드를 돌리는 내가 보이고, 또 그 안에 내 과거가 둥실 떠오르는 그림을 생각하면 비슷할 것이다.

먼 옛날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구나, 그들의 역사와 신화가 그렇구나 방심하며 읽다가 코가 맵고 눈물이 삐죽거렸다. 낯선 곳에서 서로 엇갈려 지나기도 좁은 골목길을 가다가 생판 모르는 사람이 (그것도 인상마저 험상궂다든가 혹은 껄렁껄렁한 얼굴로 비릿한 웃음이라도 흘리는 사람일 경우는 더더욱) 저편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댔다. 독일 유학시절 마른 빵을 삼키며 따뜻한 음식을 그리워했던 그녀가 전혜린을 떠올리게 했으므로 더욱.

-독일에서 살고 공부를 하게 되면서 모어로 통신을 하지 않았던 셀 수 없는 나날들을 나는 이미 살아온 뒤였다. 그러나 이 발굴 숙소에서 아팠던 나날들이 아마도 나를 얼마간 약하게 만들었는지 문득, 내 앞에서 응응거리는 모어가 아닌 말들 속에서 나는 기력을 잃고 있었다. (152쪽)

-ㅎ은 그리고 언젠가 ㅎ이 시인이었던 적이 있다는 것을 10년 동안 무슨 두부를 베 보자기에 가두어 놓고 물기를 짤 때처럼 끙끙거리며 손에 쥐고 있었다. (186쪽)

작가는 자신을 'ㅎ'이라든가 '시간이 있는 사람'이라고 제3자를 바라보듯 지칭한다. 그래서 더 슬프다. 정신만 둥둥 떠서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 갖게 하니 말이다. 어쩌면 이런 느낌은 작가 소개를 먼저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에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기적을 바랐던 그녀가 10월에 독일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걸 알고 시작한 글이라서.

-인간에게 삶의 터전은 무엇인가.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방이다. 방과 방을 연결하는 마루와 마당과 그 마당에 조금씩 피어있는 빛 좋은 작은 꽃이며 그 모든 것을 어루안고 있는 담이다. 그리고 그 담을 잇대고 있는 이웃의 담이며 이웃의 꽃이며 마루며 이웃의 방이다. 담과 담 사이에 갓 지은 밥냄새가 삶의 터전, 그것이다. (16쪽)

-폐허 도시의 죽음의 시간은 지금과 가장 가까운 시간이다. 그러나 놀라워라, 인간의 시간과는 달리 폐허 도시의 시간은 죽음의 시간인 지층을 파내면 순간순간마다 유년과 청년과 장년과 노년이 한 지층 안에 어우러져 숨쉬고 있다. 각각의 지층이 머금고 있는 시간의 스펙트럼. 발굴은 도시의 죽음을 파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21쪽)

-기록자가 절대 화자인 고대인들의 글쓰기는 강력한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한 기록자가 사실 전부를 지배하고 있는 이 태도에는 글쓰기, 라는 것이 주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고대적인 인식에서 비롯되며 그 주술의 힘을 타인하고 나누지 않으려는 '혼자서 말하는 자'를 수없이 태어나게 했다. (33쪽)

-사물에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을 반복해 외우는 길을 통하여 아마도 그들은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를 문자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고정되지 않은 사물의 세계가 문자로 고정되면서 나, 라는 존재 역시 문자 안으로 들어오는 그런 경험을 그들은 했는지도. (39쪽)

-아무리 찬란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발견되지 않은 과거는 고고학적인 사실로 들어오지 않는다. 고고학적인 조사를 통하여 얻어지는 과거는 그러므로 언제나 잠정적인 결론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고고학적인 결론이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혹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이라는 단서가 붙여진 결론이다. (65쪽)

-컴퓨터 앞에 앉아 고향을 생각한다. 고향이 겪어내는 당대성을 같이 경험하지 못하는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이주자 가운데 하나인 이 '시간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구체적인 당대성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 꽃빛일까, 그 꽃빛 아래 어찔해서 말을 잊고 한 생애의 오후를 정지시키는 그 마음일까. 그 마음의 주인은 누구일까, 어떤 대륙도 주인을 가지지 않았는데, 누구도 어떤 한 뼘 땅의 주인이 될 수 없는데…… 오,오, 이동의 역사여,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하라. (83쪽)

마지막으로 그녀는 신도 인간도 다 떠나버린 폐허를 이야기하며 무엇을 위해 우리가 전쟁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한다. '타인을 찾아가는 마지막 여정은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 있는지. 내 속에는, 많은 이가 그렇게 적은 것처럼, 많은 타인이 들어 있다. 그 타인들이 나의 얼굴을 만들고 있다. 나의 얼굴은 타인의 얼굴이다. 그 얼굴이 끔찍하지 않기를 바란다.' (108쪽) 내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나의 얼굴도 그렇기를 바란다. 너의 얼굴도 그렇기를 바라는가.

마지막 장을 덮고 허전해서 표지를 보며 멍하니 앉았다가 홀린듯 일어나 허수경의 시집을 찾아왔다. 쉽게 동화되지 않는 시들이었던 기억을 젖혀두고 다시 넘겨보다가 똑같은 곳에서 멈추었다. 그녀의 역사를 조금 알게 된 뒤에 읽어 더 와닿는 시다. 부디, 그곳에서 평안하시길.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나는 내 섬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의 섬으로 들어간다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

고독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지만

기필코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 섬으로 들어갈 때 그대들이 챙긴 물건은

그 섬으로 들어갈 때 내가 챙긴 물건과 비슷하겠지만

단 하나 다른 것쯤은 있을 것이다

내가 챙긴 사랑의 편지지가

그대들이 챙긴 사랑의 편지지와 빛이 다른 것

그 차이가 누구는 빛의 차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세기의 차이다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다

이것이 고독이다

섬에서 그대들은 나에게 아무 기별도 넣지 않을 것이며

섬에서 나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속에는 눈물이 없다

다만 짤막한 안부 인사만, 이렇게

잘 지내시길,

이 세계의 모든 섬에서

고독에게 악수를 청한 잊혀갈 손이여

별의 창백한 빛이여


-허수경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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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날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4
카롤린 라마르슈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림원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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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개의 날

◎ 지은이 : 카롤린 라마르슈

◎ 옮긴이 : 용경식

◎ 펴낸곳 : 열림원

◎ 2022년 7월 8일, 개정판 1쇄, 162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바게트는 별 맛이 없는 빵이다. 소를 넣지 않은 담백한 빵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건 갓 만든 빵의 경우고, 만든 지 하루가 지나 수분이 점점 말라가는 빵에게 애정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단지 먹을 게 전혀 없을 때 굶주림을 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말라버린 빵을 질겅질겅 오래도록 씹고 있으면 예상치 못한 것이 찾아온다. 바로 희미한 단맛.

이 책이 그랬다. 162쪽이니 한 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양이건만 중간에 집어던지지 않으려고 허벅지를 꼬집은 다음에야 끝을 보았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꾸역꾸역 다 읽으니 찾아왔다. 아주 큰 그림 앞에 바짝 다가섰다가 점점 뒤로 물러나며 전체적인 윤곽을 마주한 경우라고 해야 할까? 너무 가까이 서면 무슨 그림인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줄거리를 한 줄로 쓰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개 한 마리가 고속도로 중앙 분리지대를 달리는 걸 본 여섯 명의 이야기.' 각각 여섯은 자신의 시선으로 본 개와 그 개를 본 순간 떠오른 생각들을 두서없이 늘어놓고 있다. 그러니 산만할 수밖에. 화자가 여럿인 장편도 꽤 많이 보아온 터이니 화자가 많다고 투덜댄다는 건 어불성설이나 그들의 생각 속을 함께 휘젓고 다니는 것은 쉽지 않았다.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던 트럭운전사는 자신을 인터뷰하러 오는 신문기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 개를 본다. 고속도로를 혼자 달려야 하는 그는 외롭다. 그래서 무언가를 자꾸 지어낸다. 그는 개 이야기를 써서 잡지에 기고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자에게 보내 그녀가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신에게서 정력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늙은 사제는 수도원에서 만났던 소피( 단지 문학적으로만 통했던, 어딘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를 찾아 도시의 도서관을 헤맨다. 그러다가 소피가 돌아올 것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과 지상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기도했고 그 개를 봄으로써 대답을 얻었다.

-지난 월요일 고속도로에서 그 개가 내 시야에 불쑥 나타남으로써 드러난 부활은 어쩌면 그에 앞서 나타났던 부활들처럼 내 몫의 고통과 경이인지도 모른다. 나도 그 개처럼 죽음에 맞서서 혼자 가리라. 죽음을 침착하게 수용하는 이미지보다 훨씬 더 잘 늙음을 정의해준 미친 질주, 그것이 내포한 눈먼 폭력과 더불어 죽음이 언젠가 내게 다가오리라. (68쪽)

빨간색 레인코트를 입은 여자는 애인과 결별식을 하려던 날 개를 본다. 유모가 자신의 오빠를 간호하기 위해 떠난 것을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여자. 그리하여 사랑을 믿지 못하는 여자는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버린다.

-사랑. 사랑은 항상 당신들을 버린다. 아무리 짧은 순간의 사랑이라 하더라도. 아니다, 사랑은 처음부터, 환희의 순간에도 당신들을 버린다. 그때 이미, 태양은 우물 속에 가라앉고, 검은 물 아래 버려진 개가 있는 것이다. (87쪽)

가게 주인에게 폭언을 퍼부은 뒤 실직자가 된 동성애자 필.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려 자전거를 타다가 개를 본다. 친구들에게서 떠나왔지만 다시 그곳(제멋대로의 열렬한 사회)으로 돌아오라는 초대를 받는다.

-나는 나약함으로 인해 자살을 하지 않기 위해서 달리기 시작했고, 따라서 이 모험의 목적은 아주 오랫동안 참을성 있게 달려서 자살의 개념 자체가 사라져버리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즉 내 목숨을 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그 개가 마치 내 눈 앞에서 자발적인 죽음으로의 질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나타났던 것이다. (114쪽)

암으로 남편을 잃은 나는 버림을 받았다고 느낀다. 과부협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딸인 안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다가 개를 발견한다. 아빠만을 사랑했던 딸은 그녀와 어떤 교류도 원하지 않았고 그녀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른다.

-내가 본 적이 없는 어떤 개 한 마리가 내 앞을 가로질러 갔고, 이후 나는 마침내 어머니가 되었다. 나는 그 길을 피해서 갔음에도 불구하고 안을 낳았다. 나는 개에게 시선을 주기를 피함으로써, 안이 힘을 되찾게 해주었다. (137쪽)

아빠를 잃은 안은 힘들다. 너무 잘 지내는 것 같은 엄마에겐 슬픈 내색도 할 수 없다. 누군가 자신에게 어떻게 행동하라고 알려주었으면 좋겠고 너무 많이 먹는 자신을 일깨우고 가르쳐주기를 바란다. 안은 고속도로에서 개를 본 순간 그 개가 마치 자신 같다.

-불안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거나 구조를 모색하는 척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나만, 오직 나만은 안을 내 가슴에 간직한다. 이제 나는 그 개가 무사히 살아날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울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약하지도 않고 벙어리도 아니다. 나는 강철 같은 근육을 가지고 있으며, 아무리 달려도 숨이 차지 않는 폐활량을 가지고 있고, 나를 지옥으로부터 구해낼 의지를 가지고 있다. (158쪽)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 없는 고통스러운 고독과

엄청난 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출구는

죽음인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 중 누구도

그것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49쪽

버림을 받거나 누구를 잃은 경험이 있는 여섯 명은 개에게 자신을 투사한다. 개가 곧 자신 같고 자신의 인생 같은 것이다. 개가 아슬아슬하게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을 보며 그 개가 고속도로를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개는 사람들 쪽으로도 들판 쪽으로도 달아나지 않고 지평선을 향해 질주를 계속할 뿐이다. 그저 달리는 것 말고는 무엇을 하겠는가. 과거로 도망칠 수도, 현재에 안주할 수도 없는 게 인생이다.

다른 이의 죽음을 바라보거나, 죽음 자체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잘 살아왔나? 내 인생은 여태 뭐였지?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그러면서 어쨌거나 살아있음에 감사하기도 하고 다시 살아갈 희망을 얻기도 한다. 이 여섯 명은 그렇게 얻은 에너지로 또 다른 죽음을 보기 전까지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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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저쪽
정찬 지음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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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길, 저쪽

◎ 지은이 : 정찬

◎ 펴낸곳 : 창비

◎ 2015년 5월 26일, 초판 1쇄, 267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표지가 왠지 낯익다. 이 기시감이 뭘까 생각해봤더니 『고통의 해석』 안에서 본 프란츠 카프카의 <법 앞에서>의 상황이 떠올라서 그런 모양이다. 문지기가 들여보내 주지 않았던 그 문이다. 길, 저쪽이라 하니 지겹게 인용되어 온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도 떠오르고 난리다. 길은 늘 인생과 동급으로 취급되어 왔다. '인생=길'이라는 공식을 따르자니 한숨이 나오지만 근사한 어떤 비유도 떠오르지 않으니 어쩔 것인가.

중년 사진작가 윤성민이 이십 년이 넘은 필름을 인화하며 그곳을 함께 갔던 김준일을 생각하는 동안 희우의 편지가 도착한다. 오랜 세월 연락이 끊긴 그녀에게 온 편지로 인해 성민은 아픈 과거를 떠올린다. 변혁운동가였던 김준일과 그의 영향을 받았던 자신의 옥살이와 고문. 그들이 지나온 6월 항쟁, 6.29민주화선언, 대통령 선거의 절망적 패배.

-우리는 역사의 발전을 믿었다. 비록 지금은 '길, 이쪽'에 있지만 언젠가는 '길, 저쪽'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희생의 대열 속에서 그토록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194쪽)

-고백하자면, 저에게 사회주의는 언제나 현실 너머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가 아닌 저쪽에서 꿈의 형태로 존재한 것입니다. (221쪽)

감옥에 있을 때 이별을 통보하는 편지만을 보내고 파리로 떠나버린 희우. 그녀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가 그립다며 편지를 보내왔고 만나기를 원한다. 이야기는 희우의 편지를 매개로 과거의 일들이 중첩되는 구조다.

-고통은 소멸되겠지만 고통의 기억은 소멸되지 않아요. 몸 어디엔가 숨어 있어요. 고통에 대한 원한 역시 숨어 있어요. 의식이 닿지 않는 어떤 곳에 말이에요. 그 원한이 어떤 계기로 분출될 때 폭력이 발생하는 거예요. 폭력적 인간이란 고통에 대한 원한이 쉽게 노출되는 인간이에요. 야만적 사회는 우리의 몸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고통의 기억을 자극해요. 폭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나치스가 그랬고, 스딸린 체제가 그랬어요. 우리의 청춘이 통과했던 70년대와 80년대 한국 사회도 그랬어요. 수많은 청춘들이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어요.(260쪽)

-폭력에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폭력을 인정하는 행위예요. 분노를 껴안으면서, 분노를 넘어서는 감정이 슬픔이에요. 슬픔은 분노가 또다른 폭력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고귀한 감정이지요.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슬픔에 감싸여 있기 때문이에요. (261쪽)

희우가 성민 때문에 사복경찰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아비를 모르는 아이를 낳게 되었다는 사실은 성민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주역의 효사에 나오는 말이다. 나뭇가지에 마지막 남은 씨과실이 석과다. 석과는 먹어서는 안되는 과실이다. 마지막 씨앗을 먹어버리면 나무를 다시 심을 수 없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11쪽)

-사람의 마음에는 마지막 피안지대가 있어. 어떤 고통도 닿지 않는 본질적이며 절대적인 공간이라고 할까. 생명의 원천 혹은 씨앗 같은 거지. 사람의 마음에도 석과가 있는 거야.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마음의 석과를 잃었기 때문이야. 어떤 아귀가 그들의 석과를 먹었을까. (13쪽)

마음의 석과. 그것을 잃지 않았기에 희우는 젊은 시절의 자신을 과거에 남겨둔 채 딸 영서를 낳고, 돌아와 다시 한 번 성민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성민을 사랑했던 또 한 명의 여자 윤하는 석과를 잃은 쪽인데, 어릴 때 엄마 잃은 상실감을 성민을 사랑하는 것으로 채우려 했지만 성민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희우를 발견한 뒤 자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주문 너머 부처의 세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절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거의 완벽한 폐허였다. 그 허허로운 벌판을 거닐면서 부처의 세계란 어쩌면 이런 폐허가 품고 있는 아름다움 속에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239쪽)

폐사지만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던 성민은 어쩌면 자신, 그리고 혹독하게 인생을 갈취당했던 그 시절 청춘들의 마음을 보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상처받은 마음들 안에서 새롭게 살아갈 희망을 발견하고 싶었던 건지도.

이 책은 70년대와 80년대 사회를 아주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찌 보면 너무 많이 들어서 고리타분할 수도 있는 이야기, 이제는 지겹다며 손사래치고 싶은 그 시절 이야기지만 분명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다. 숨쉴 공기가 있다는 걸 자주 까먹는 것처럼 우리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어디로부터 왔는가도 가끔씩 일깨워야 한다. 소중한 걸 또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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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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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원청 文城

◎ 지은이 : 위화

◎ 옮긴이 : 문현선

◎ 펴낸곳 : 푸른숲

◎ 2022년 12월 2일, 첫판 1쇄, 587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우리나라 독자들이 '베르나르 베르베르'만큼 좋아하는 외국 작가 중 한 명이 바로 '위화'가 아닐까 싶다. 그를 그렇게 유명하게 만든 건 누가 뭐래도 『허삼관 매혈기』일 것이다. 이미 영화까지 만들어졌으니 책을 안 본 이라도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래도 원작은 한 번 읽어보는 걸 권하지만.)

그의 신간이 나왔다. ≪원청≫. 文城의 중국식 발음인가 보다. 중국 역사를 잘 모르니 당연한 일이지만 중국 청나라 말기에서 중화민국 초기까지가 배경이라는데 이야기만 읽어서는 가늠이 되질 않는다. 그저 작가가 그리 밝혀놓았으니 그렇게 알고 있는 것뿐이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이리저리 시달리는 백성들이 등장하니 힘든 시기려니 생각할밖에. 여기서 중국식 복색과 풍습을 빼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집어 넣어도 크게 이질감을 느끼지 않으니, 작가가 그런 난세 속 대한제국에도 ≪원청≫ 같은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하다고 한 말에 분명 있을 거라고 대답하고 싶어진다.

시진에 사는 린샹푸. 대부호인 그를 모르는 이는 없지만 강한 북쪽 억양을 쓰는 그의 내력을 아는 이는 없다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다. 그저 17년 전 나타나 지독한 눈보라를 뚫고 돌도 안 된 딸에게 젖동냥을 하러 다녔던 '온몸에 눈을 뒤집어쓴 머리카락과 수염이 잔뜩 자란 남자, 수양버들 같은 겸손함과 들판 같은 과묵함을 가진 남자'(13쪽)로 기억되는 그 사람.

그는 황허 북쪽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성실하고 부지런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도 어머니를 모시고 열심히 살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도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아청과 샤오메이라는 남매가 나타났고 말이 빠른 그들은 멀리 원청에서 왔다고 했다. 열이 난다는 동생을 남겨두고 아청이 떠났고 샤오메이는 자연스레 린샹푸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하지만 샤오메이는 어느날 린샹푸가 모아둔 금을 훔쳐 달아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배부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린샹푸는 그녀를 다시 받아들이고 예쁜 딸을 낳았지만 샤오메이는 또 다시 사라지고 만다. 린샹푸는 딸을 들쳐업고 그녀를 찾아 나섰다. 원청으로.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원청은 없다. 그는 시진 사람들 말투가 샤오메이와 닮은 것을 알아채고 결국 그곳에 자리를 잡는다.

이야기의 한 축은 이렇게 린샹푸가 샤오메이를 찾으면서 딸을 키우는 것이고 또 다른 축은 당시 ( '청나라가 무너진 뒤 전란이 그치지 않고 토비土匪가 곳곳에서 기승을 부렸다. 완무당을 노리는 토비도 예전보다 늘어났는데 주로 납치를 일삼았다. 부유한 집안의 아가씨를 잡아다 고액의 몸값을 요구하는 거였다.'(149쪽)) 이들을 괴롭혔던 토비와 마을 사람들 간의 참혹한 투쟁사다.

린샹푸가 샤오메이를 끝내 찾지 못한 것으로 끝이 났지만 뒷 이야기에서 샤오메이와 아창이 부부였으며, 이들이 살던 곳이 다름 아닌 시진이었고, 린샹푸가 그곳에 딸을 데리고 나타났을 때 그녀도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아이를 위해 지어놓은 옷과 모자를 계집종에게 들려 그에게 전했다는 것, 눈이 엄청 쏟아져 마을 사람들이 같이 천제를 올리던 그때 공터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얼어죽었다는 것을 전한다. 죽을 때까지 아이와 린샹푸를 그리워했다는 것도.

이것이 바로 ≪원청≫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 미소 짓는지 알고 싶고 누가 눈물 흘렸는지 궁금하지만

우리는 알 수 없고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알고 싶어도 알 수 없고,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지요.

그럴 때 우리는 상상 속에서 찾고 추측하고 조각을 맞춥니다.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6쪽

린샹푸가 샤오메이를 찾아 헤맸던 원창은 결국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샤오메이를 찾아 딸을 함께 키울 수 있었다면 거기가 바로 이상향이었으리라. 아창이 아무렇게나 지어낸 이름 원창. 그곳은 결국 난세에서 지친 그들이 농사짓고 편안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은 고장이었을 것이다. 나라와 나라끼리 싸움박질도 없고, 토비 따위는 얼씬도 하지 않아 아이들이 마음껏 웃고 떠들 수 있는 그런 곳.

아직 아비의 죽음을 모르는 린샹푸의 딸 린바이자와 그녀 대신 토비에게 잡혀가 한쪽 귀까지 잃은,그녀를 좋아한 천야오우라면 원창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정혼한 난봉꾼 구퉁녠이 영어를 모르는 죄로 호주에 일꾼으로 팔려간 건 안 됐지만 그의 행실로 봐서는 린바이자와 엮이지 못하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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