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을 떠도는 벌 한 마리
- 이윤학
가을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고 있는데
벌 한 마리
좁아터진 방,
유리창을 떠돌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날갯소리
그 터는 소리, 유리창을 잔뜩 물들인 햇볕,
보다 넓은 감옥을 보기 위해, 가끔
열곤 하는 저 유리 창문
열어주고 싶지 않다
저러다, 언젠가, 창틀에서
우연히 발견되겟지 하면서,
날갯소리 나는 곳을 바라본다
벌은 악착같다,
유리창에 바짝 붙어 있다
항문을, 침을, 안으로 오므리고
무수한 날개로 유리창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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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다시 꺼내 읽은 아지즈 네신의 <당나귀는 당나귀답게>라는 책 속에는
'위대한 똥파리'가 나온다.
집안에 갇힌 젊은 파리 한 마리가 아직은 훤한 밖으로 나가기 위해 유리창으로 열심히 돌진하자
다른 파리들은 어리석은 행위라고 끝까지 말리지만 젊은 파리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앉아있는다고
뭔가가 바뀌지 않는다면서 끝까지 유리창에 부딪히기를 되풀이한다.
그러다가 글도 읽을 줄 아는 우리의 젊은 파리는 그집 아들 녀석이 펼쳐 놓은 책속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유리창을 뚫고 지나가기 위해선 광속과 같은 속도가 필요하단 걸 읽고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유리창으로 돌진하다 결국은 납작하게 짜부러지고
다른 파리들은 그런 젊은 파리를 자유를 위해 싸운 위대한 파리로 부르자고 한다.
아지즈 네신은 사회풍자로 유명한 사람이니까 깊이 보면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그런 건 제쳐두고,
벌 한 마리를 못 나가게 잡아두는 이윤학의 손짓에서 젊은 파리가 연상되었다는 말이다.
자유를 찾아 투쟁한다기보다는 그냥 본능적인 거겠지만
두 녀석이 어쩌면 그렇게 악착같이 나가려고 기를 쓰는 건지.
누군가가 가두어둘수록 발버둥치는 건 동물들의 공통된 습성인가보다.
아이들도 그렇고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자유를 갖기란 젊은 파리의 경우처럼 참 어려운 것일뿐더러
자유를 찾는다해도 그걸 지켜나가기가 어렵다.
사는 건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