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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나를 들어올린다

-손택수

 

구두 뒤축이 들렸다 닳을 대로 닳아서

뒤축과 땅 사이에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공간이 생겼다

깨어질 대로 깨어진 구두코를 닦으며

걸어오는 동안, 길이

이 지긋지긋한 길이

나를 들어 올리고 있었나 보다

닳는 만큼, 발등이 부어오르는 만큼 뒤꿈치를 뿔끈

들어 올려주고 있었나 보다

가끔씩 한쪽으로 기우뚱 몸이 기운다는 건

내 뒤축이 허공을 딛고 있다는 얘기

허공을 디디며 걷고 있다는 얘기

이제 내가 딛는 것이 반은 땅이고

반은 허공이다 그 사이에

내 낡은 구두가 있다.

 

 

****

여름내내 너무 더워서 걷는 일을 게을리했더니 몸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다.

내 앞에 천적이 나타나 위협을 하는 상황이라도 되는 건지 허리둘레며, 팔 둘레가 모두 잔뜩 부푼 상태가 되어버렸다.

몸도 거북하고 마음도 거북하다.

이제 슬슬 찬 바람이 불어 걷기도 맞춤한 상태가 되었으니 어디 좀 걸어볼까?
샌들을 벗어버리고 발목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었다.

걷는 거 하나는 자신있었는데 왠지 몸이 한 쪽으로 기우는 느낌이 들었다.

가만 보니 내 왼 발이 자꾸만 오른쪽으로 다가서는게 아닌가!

 

먹다 지쳐 내려놓은 내 나이가

왼발과 오른발 사이에서 멈춘다.

버리지 못하고 잡아두었던 시간은 내가 먹은 나이만큼 닳았다.

 

닳아버린 부분을 자르고 다시 튼튼한 밑창을 덧대어주면 구두야 멀쩡해지겠지만

보낸 시간을 내게 덧붙여주면 나는 행복할까?

잠을 제대로 못 자 얼굴이 엉망인 날 화장한 것처럼 여기저기 얼룩덜룩한 상태가 될 게 틀림없다.

왼쪽 한 번, 오른쪽 한 번 발을 차례로 털어 미련으로 남겨두었던 내 시간도 보내버려야겠다.

 

여섯 사람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이라는데 손택수 시인도 그렇다.

많이 갈 것도 없이 두 칸만 건너면 아는 사람이 되는데(물론 내 쪽에서만)

'아는' 그에게서 나와 같음을 읽어내니 훨씬 더 친근한 느낌이 든다.

올 가을 정말 어울리는 시집 한 권을 만나서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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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에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헤죽, 헤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

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
시월이다.


10월이라고 숫자로 썼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시월’이다.

뭔가 좀 더 아릿하고 쓸쓸한 느낌이 배인, 제대로 된 감각의 ‘시월’이라 마음에 든다.


어제는 상동에서 중동을 향해 걷고 있었는데 작은 공원에 다다를 때쯤

지독한 매연과 어수선한 공기를 과감하게 뚫는 향기가 흘러 다녔다.

짧게 이발하고 바람이 흔드는 대로 사사사삭 낮은 포복을 하는 잔디들은

깔끔하긴 하였으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제 멋대로 잘라버린 사람들에게

싱싱한 풀냄새로 항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베인 아픔을 향기로 뿜어내는 저 풀들의 항의가 내게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베인 마음을 치유해주는 소중한 약이 되었다.

 

허전하고 빈 집 같은 시월이지만 이런 마음들이 있어

나는 오늘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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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墨정원 7

-우리는 늙으면

 

                                     장석남

 

우리는 늙으면

저녁별을 주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문턱에 앉아서 부는

바람도 느껴볼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매일

저녁별 보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날도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늙음 끝까지 신작로를

바라보고 창문 아래에

앉아서

저녁별을 볼 것이다

그리고 먼지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

그런 날을 기다리면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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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식

- 임영조

나리들은 술집에 가시면 주로

폭탄주를 드신다고 들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다

곁에는 육방 찰방에 목탁 서넛에

춘향 모녀까지 증인삼아 앉히고

폭탄주를 돌린다고 들었다

충분히 이해하고 남을 말이다

하시는 일 마음대로 안 되고

속이 오죽 폭폭하시면

자폭을 기도할까 경배하고 싶다

그리고 기다린다 부디 한 소식

슬프건 기쁘건 또는 우습건.

 

****

대통령의 탁자 위에도 폭탄주가 그득하다고 했다.

누군가는 '형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지.

폭탄주를 마시는 것도 취향이니 그럴 수 있다 치자,

형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받아들이는 쪽이 있으니 그럴 수 있다 치자,

시인의 말처럼 부디 한 소식,

우리가 기다리는 건 슬프고 우스운 소식이 아니라 기쁜 소식, 반가운 소식이니

한 잔 쭈욱 드신 다음엔 꼭 들려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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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을 떠도는 벌 한 마리

- 이윤학

 

 가을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고 있는데

벌 한 마리

좁아터진 방,

유리창을 떠돌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날갯소리

그 터는 소리, 유리창을 잔뜩 물들인 햇볕,

보다 넓은 감옥을 보기 위해, 가끔

열곤 하는 저 유리 창문

열어주고 싶지 않다

 

저러다, 언젠가, 창틀에서

우연히 발견되겟지 하면서,

날갯소리 나는 곳을 바라본다

 

벌은 악착같다,

유리창에 바짝 붙어 있다

항문을, 침을, 안으로 오므리고

무수한 날개로 유리창을 치고 있다

 

**

어제 다시 꺼내 읽은 아지즈 네신의 <당나귀는 당나귀답게>라는 책 속에는

'위대한 똥파리'가 나온다.

집안에 갇힌 젊은 파리 한 마리가 아직은 훤한 밖으로 나가기 위해 유리창으로 열심히 돌진하자

다른 파리들은 어리석은 행위라고 끝까지 말리지만 젊은 파리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앉아있는다고

뭔가가 바뀌지 않는다면서 끝까지 유리창에 부딪히기를 되풀이한다.

그러다가 글도 읽을 줄 아는 우리의 젊은 파리는 그집 아들 녀석이 펼쳐 놓은 책속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유리창을 뚫고 지나가기 위해선 광속과 같은 속도가 필요하단 걸 읽고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유리창으로 돌진하다 결국은 납작하게 짜부러지고

다른 파리들은 그런 젊은 파리를 자유를 위해 싸운 위대한 파리로 부르자고 한다.

아지즈 네신은 사회풍자로 유명한 사람이니까 깊이 보면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그런 건 제쳐두고,

벌 한 마리를 못 나가게 잡아두는 이윤학의 손짓에서 젊은 파리가 연상되었다는 말이다.

자유를 찾아 투쟁한다기보다는 그냥 본능적인 거겠지만

두 녀석이 어쩌면 그렇게 악착같이 나가려고 기를 쓰는 건지.

누군가가 가두어둘수록 발버둥치는 건 동물들의 공통된 습성인가보다.

아이들도 그렇고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자유를 갖기란 젊은 파리의 경우처럼 참 어려운 것일뿐더러

자유를 찾는다해도 그걸 지켜나가기가 어렵다.

사는 건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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