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하게 국권을 침탈당한 대한민국 심장부의 아픔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정동,

주선중화로 흩어진 선비들을 결집시키고 진경시대를 열어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한껕 드높인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서촌,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한 마을에서 사느니 차라리 등지고 살면서 힘든 시절을 견디어 낸 동촌,

한 많은 삶을 흥으로 이겨낸 자주적 개항장 목포,

피난민과 권주민이 윗동네와 아랫동네에 더불어 사는 개항장 부산,

사랑으로 용서팜으로써 동족상잔의 비극을 살림의 지혜로 이겨내개 한 증도,

이 땅에 서려 있는 우리 역사를 걸으며 나를 되찾는다.

증언에 따르면 고종은 공사관에서 가장 좋은 방에 기거하며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모처럼 안색이 편안하였다"고 한다. 개인은 평안했으되, 나라는 거널났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일본이 잠시 후퇴한 사이 황실 인사와 외교, 경제 이권은 러시아가 쓸어갔다. 비등한 여론에 밀려 만 1년 뒤 경복궁이 아닌 경운공, 즉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그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다. 그리고 10년 뒤 160미터 옆에 있는 중명전에서 나라를 빼앗기는 꼴을 봐야 했다.- P33

그때 조약에 찬성한 자들이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이렇게 5인이다. 이들을 똑똑하게 기억하자. 이들을 우리는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P31

경교장은 중화민국 대사관저로, 6.25 전쟁 때는 미군 특수부대 주둔지로 사용됐다. 전후월남대사관으로 쓰이던 경교장은 1963년 경교장 뒤편에 들어선 고려병원의 원무실로 사용됐다. 안타까운가? 누구 하나를 탓할 수 없는 일이다. 역사를 보존하기에는 아직 시대정신이 성숙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P25

평리원과 경성 재판소 시절,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 건물에서 재판을 받았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는 이 건물을 대법원 청사로 사용했다. 의미 깊은 판결들이 이곳에서 나왔다.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대법원은 "이 건물만은 꼭 보존해달라"고 서울시에 요청했다. 그런데 그 재판정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문화적인 무식함이었는지, 아니면 타협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되, 현재 남아있는 옛 건물은 건물 전면부 외벽과 현관밖에 없다.- P41

겸재의 그림 <수성동>에 나타난 수성동계곡을 보면 중간쯤에 다리가 하나 있다. 기린교다.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다가 이 다리를 발견했다고 한다. 아파트를 철거할 당시 생태공원을 조성하려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수성동계곡을 복원했다. 현재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위치에 보존된 다리라고 한다.- P57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포목시장이 형성되고,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채소시장이 형성되는 등 흥인지문과 동대문 시장은 우리 역사에 큰 변화가 있을 때마다 변해왔다. 동대문시장과 흥인지문에 또 한번 큰 변화가 찾아왔다. 일제강점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일본 왕자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15만 5,000원을 들여서 2만 5,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성운동장을 만든다. 경성운동장을 만들면서 허문 성곽 석재는 남촌 일본인 주거지역을 만드는데 사용한다. 1925년 10월 15일 경성운동장 개장식과 함께 조선신궁에 신상일 안치하는 ‘조선신궁 진좌제’도 거행한다.군사적 지배에 이어서 종교적 지배를 단행한 현장 역시 동대문이다.- P90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이라는 제 이름을 되찾는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그야말로 잠시였다. 서울운동장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차지하려고 하는 좌익과 우익의 각축장이었고 (중략) 1985년 잠실운동장은 올림픽주경기장이 되고,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이 된다.- P91

동대문운동장이 떠난 자리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돌아왔다. 포목시장이었던 역사성을 살리면서도 21세기를 선도할 수 있는 멋진 곳으로 거듭났다- P92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창달한 나라가 저급한 문화 수준을 가진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가 없기 때문에 조선은 꼭 독립한다. 일본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우리 문호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지금 간송이 해야 할 일은 문화보국이다."- P79

"천학매병 속의 69마리 학이 천상의 세계를 향해 날아올랐다. 불감 속에서 목탁소리가 흘러나왔다.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추사 김정희가 고맙다고 손을 잡았다. 백발의 스승 위창 오세창이 다가오더니 큰일 이루었다며 그를 안았다. 1962년 1월 26일 나이 57세 때다."- P82

1897년 10월 1일 고종 황제는 목포를 개항한다. 부산, 원산, 인천, 경흥 등에 이은 다섯번째 개항이었지만, 외국과 별도로 조약을 체결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개항한 첫 번째 칙령개항장이다- P113

다순구미는 목포 원주민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곳이고, 우리네 삶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개항장거리의 휘황찬란한 불빛은 아닐지라도 따뜻한 백열등을 밝혔고, 보란 듯 한껏 뽐을 내는 고관대작의 집은 아니지만 고단한 하루를 마치면서 지친 몸 편안하게 누이던 보금자리다. 이곳이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되어서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이 없어지는 것 같고 목포의 뿌리가 뽑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이곳에까지 기어이 아파트를 지어야 하겠는가!- P121

그래도 재정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장기려 박사는 대안을 모색한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다. 대공황기 미국에서 시작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모델로 해서 1968년 5월 13일 723명의 조합원으로 첫 출범했다. 담뱃값이 100원이던 시절에 한 달 의료보험료 60원을 받고 조합원 진료비 40퍼센트 할인, 30퍼센트 보험료, 나머지 30퍼센트 본인 부담 방식으로 사실상의 무료진료를 이어갔다. 1975년 8월 4일에는 청십자의료협동조합 직영병원 청십자병원을 설립했고, 1976년 11월에는 사단법인 한국 청십자사회복지회로 개편했다. 전국민의료보험 실시 하루 전날인 1989년 6월 30일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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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불확실함과 두려움은 그날 아침 한국인의 얼굴에서 읽었던 그것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추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불에 타 검게 그을린 택시와 버스, 그리고 깨진 보도블록 등이 도로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도로 한쪽을 점령하고 있는 군인들이 나를 ‘동그란 눈’의 외국인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도록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중략)

"우리는 여기를 알릴 방법이 없어. 자네는 봤지? 자네가 본 것을 다른 나라 사람에게 꼭 알려주게"

이 회고록은 아마도 광주항쟁을 직접 목격한 외국인이 기록한 최초의 출판물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광주 시민이 아닌 외부인의 관점에서 기록했다는 점에서 광주항쟁의 성격과 의의를 객관적으로 조명하는 소중한 자료이며, 광주항쟁을 둘러싼 수많은 왜곡과 폄훼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짓인지를 반증하는 증언록의 가치를 갖는다.- P232

병원 가는 길에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데, 사람들이 환자들 대신에 차라리 외국인인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33

모두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우리는 뒤를 돌아봤다. 그 젊은이가 바닥에 쓰러졌고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에서는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는 군인들 표정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P56

문이 닫히고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올 때 까지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승객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가끔 흘낏 창밖을 쳐다볼 뿐이었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들이었다. 도대체 군인들이 국민을 왜 이렇게 대하는 것일까? 어제 이곳, 광주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P57

"어제는 정말 참혹했어. 전두환의 군인들이 데모하는 사람들만 보이면 달려들었어.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말이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몰라. 사람들 얘기로는 백 명은 넘을 거래."- P63

"지금 당신은 우리를 대변해주어야 해요."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내 가슴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지금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이 나라 군인들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요. 미국인인 당신이 증인이 되어 우리를 대신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알려주세요."- P70

나는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 사건들로부터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애썼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군인들이 자행한 학살의 공포와 군인들의 퇴각이 준 흥분이 뒤엉켜서 이 항쟁에 열광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만은 없는 처지이다. 한국에 계속 있으려면 냉정을 유지하고 객관적인 관찰자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P85

대형 시내버스 두대, 승합차 한 대, 그리고 승요차 한 대가 도로에 널브러져 있었다. 차량 여기저기에 총알구멍이 뚫어져 있었다. 모든 차에 성한 유리창은 하나도 없었고 내부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어제 환호하던 젊은이들이 타고 다니던 바로 그 버스였다.

길 한가운데 자전거를 팽개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한동안을 멍한 상태로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으나, 어제 아침 남평으로 들어오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성취감과 정열이 넘치던 바로 그 청년들. 그들이 한국의 미래였다.- P97

"사람들은 지금 친북 공산주의자들이 광주를 장악했다고 말하고 있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이제까지 내가 보고 겪은 사건은 이 나라의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광주의 실제 모습은 철저하게 은폐되고 있었다.- P105

"미국 정부가 광주사태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하지만 전두환이 미군과 모종의 협의가 없이 광주로 군대를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 네 생각이 맞을 것 같아. 젠장! 그렇다면 미국이 이 만행의 공모자가 된 거잖아! 미국 대사관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까?"

"글쎄, 대사관에서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가만 있으면 안되지."- P113

"우리가 토론해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어. 미국 문화원 운영자가 전화를 했어.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들에게 광주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왔대."- P124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해요."

독일 기자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떨리고 있었다. 옳다.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동굴처럼 어두컴컴하고 침울한 이 방에 모두 있었다.- P134

도대체 어떤 정부가 이 할머니를 죽였을까? 얼마나 많은 이름 모를 할머니들이 죽었을까? 얼마나 많은 할머니들이 가족들을 기다리며 누워있고,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할머니 앞에서 통곡을 했을까? 로빈은 할머니 옆의 작은 관으로 갔다. 우리가 질문ㅇ르 하기도 전에 안내하던 의대생이 먼저 말했다.

"이 어린이도 같은 시각에 죽었습니다. 부모를 찾고 있는데, 죽은 할머니와 이 어린이가 친척사이인지는 모르겠어요."

시신은 얼굴만 남기고 천으로 둘러져 있었다. 충격을 받은 우리는 이 어린이의 관을 쳐다보며 아무말 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시신들이 그야말로 즐비했다.- P136

"저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어요. 그런데 사진을 해외로 가지고 나가려면 쉽지 않을 거에요."

내가 로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과연 로빈이 이 사진을 해외로 제대로 반출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군인들이 그의 카메라와 필름을 압수할 수도 있었다.- P146

우리는 대리대사의 사무실 밖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 자리를 일어나 나왔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대사관은 과주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나는 마침내 이 책을 통해서 도청 앞의 할머니가 들려주기를 원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P178

1980년의 미국은 한국과 한국인을 실망시켰다. 나는 이 책을 쓴 미국인으로서 미국인과 한국인이 우리 공동의 역사, 공동의 열망, 나아가 공동의 고통을 서로 더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서로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다.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다.-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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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대한민국 도슨트 6
이서후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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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보고, 남부지방을 간다면 꼭 가보리라 싶었던 지역 통영. 하지만 지금까지도 멀다는 이유로 못 가본 통영. 언제쯤 가보나 고민만 하고 있던 통영인데, 때마침 「대한민국 도슨트」 다음 시리즈로 통영 편이 나왔다. 








난 통영은 이순신 장군으로 시작해서, 이순신 장군으로 끝나는 도시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니 사실, 어느 도시는 그 도시를 대표하는 유명인물이 하나 둘쯤은 있지만, 통영은 참 여러사람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 처럼 관광을 위해 내세우는 인물들도 여럿이고,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통영을 만든 사람들도 있었다. 통영은 ‘사람들’이 만든 도시이자, 그 ‘사람들’ 덕분에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도시 통영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7년 후 당시 제6대 이경준 삼도수군통제사는 새로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할 장소를 찾고 있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해안을 다 뒤지던 그가 ‘여기다!’ 하고 찾은 곳이 두룡포였다. 선조 임금의 허락이 떨어진 게 1604년 9월 9일이다. 조선 최초 군사계획도시였던 통영 역사는 사실상 이때부터가 시작이다. p 023






이 때부터 300년 가까이 통영은 전함 500여 척, 수군만 3만여 명이 주둔하는 조선 최대 군사도시였다. p 069






통영하면 떠오르는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이 처음 통제영을 설치한 곳은 통영에 속한 섬인 한산도였다. 하지만 한산도 통제영은 짧은 순간에 사라졌다. 선조의 못난 질투심으로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할 때였다. 선조와 마찬가지로 이순신 장군에게 못난 시지, 질투를 갖던 원균. 그는 이순신 장군의 자리였던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고, 한산도 통제영을 지휘했다. 그리고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했다. 조선의 수군은 궤멸했다. 이순신 장군이 다시 돌아왔을 때, 통제영은 완도에 속한 섬인 고금도에 설치되었다.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이 통영에 있었던 때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리고 1603년. 제6대 통제사인 이경준이 바로 이곳, 통영에 다시 터를 잡았다. 그 때부터 ‘통제영=통영’이 성립되었고, 조선최대군사도시 통영이 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바로 이경준 장군에 의해 시작된거다. 




원래는 100여개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던 통제영 관아는, 현재 세병관(객사) 한 동만 남았다. 일제강점기 때 죄다 허물었기 때문이다. 세병관이 살아 남은 이유는? 학교건물로 사용하기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 이쯤에서 눈치채겠지만, 일제강점기 통영도 많은 수난을 겪은 도시이기도 하다. 이렇든 저렇든 통영은 일본을 대파한 이순신 장군이 머물렀던 곳이기에, 일본입장에서는 통영은 짓밟아야 할 도시였던 것이다.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에 나있는 좁은 물길, 통영운하. 이 운하를 만든 시기는 일제강점기다. 그러니까 일본인의 의지로 파낸 운하다. 물론 기존에도 물길이 있었긴 하지만, 일본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운하를 만들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책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이유는 뻔하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 것이다. 그래서 통영8경에도 뽑히는 이렇게 멋진 통영운하가, 한없이 멋지게만은 보이지 않는 이유다. 






통영운하 아래에는 해저터널도 있다. 그 해저터널 역시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무려 ‘동양최초’ 해저터널이다. 이 해저터널이 지어졌을 당시, 일본인들이 붙였던 이름을 보면 더 씁쓸하다. 그 이름은 바로 ‘태합굴’.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태합’자리에 있었다. 그러니까 이 해저터널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임진왜란 당시, 통영 한산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 이후 약 300여년이 흐른 뒤, 일본은 본인들이 대패했던 그 통영바다에 보란듯이 해저터널을 만든것이다. 과거에는 일본이 졌지만, 지금은 일본이 이겼다는 사실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그런 가슴아픈 곳이 바로 통영해저터널이다.






이순신 장군도, 박경리 소설가도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사람이다. 그분들의 자취가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그분들을 기리는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통영 음악가 ‘윤이상’. 이 음악가는 오래도록 수면아래에 있었다.






“그러게 왜 간첩질을 해! 간첩질을 안 했으면 영웅이 됐을건데!” p. 120







아직까지도 일부 사람들은 윤이상 음악가를 저렇게 바라본다. 간첩, 빨갱이, 배신자…. 그에게 따라붙던 꼬리표다. 대체 왜일까?






1967년, 박정희 정권. 중앙정보부에서 간첩단을 대거 잡아들인다. 일명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이다. 독일에 체류중이던 수 많은 한국인들이 다짜고짜 납치되어, 한국으로 끌려와 간첩이라며 고문을 당했다. 윤이상도 그 중 하나였다. 세계적인 음악무대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리고, 기립박수를 받았던 음악가였던 윤이상이 말이다(윤이상 외에도 서독에 있던 수 많은 교민들이 간첩이라는 죄명하게 죄다 납치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외국에 머물던 이들에게 북한에 대한 반감은 있었으나 ‘분단’이라는 인식은 강하지 않던 시기였다. 실제 북한과 은밀하게 정보를 주고받은 이도 있었겠지만, 정치적인 일이라 생각치 못하고 동베를린으로 넘어가 북한 사람을 만난 이들도 많았따. 잡혀 온 이들이 받은 고문은 혹독했다. 윤이상도 결국 그를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간 물고문 끝에 ‘북한에 봉사하는 공산주의자’ 라는 자백을 하고 말았다. 그해 12월에 열린 1심 재판에서 무기 징역, 2심에서 징역 15년, 3심 최종에서는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동베를린 사건은 이미 수사 과정에서부터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독일 정부는 윤이상이 무리하게 끌려가 수사를 받았다며 특별사면을 요구했다. 세계적인 음악가인 스트라빈스키, 카라얀 등을 포함한 음악인 200여 명도 한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보내 항의했다. 결국 1969년 2월 25일 윤이상은 대통령 특사로 풀려나 독일로 추방됐다. p 126







동백림 사건으로 간첩으로 지목된 194명. 과연 이들 중, 저들이 말하던 진짜 간첩이 얼마나 있었을까? 분명 그들이 동독 북한대사관을 자주 찾기는 했다. 다만 당시는 남한보다 북한의 국력이 조금 더 나은 편이었기에, 북한대사관에서는 남한 유학생들에게 밥한끼 먹여주는게 흔한 일이었다. 그 결과 윤이상은 빨갱이가 되었고, 모국에서 추방당했고 죽을 때 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죽은 지 23년이 흘러, 정권이 바뀐 뒤에 그의 유해가 비로소 통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통영은 윤이상의 도시가 되었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빨갱이가 되었었고, 나라의 위상을 빛낸 사람이 되기도 한 윤이상. 그의 기구한 일생이 바로 이곳 통영에 있었다.




 


이 책속에는 통영의 어느 한 시간대에 있던 사람들은 분명 여럿 있었다. 이순신 장군을 필두로, 이경준 장군, 백석 시인, 박경리 소설가, 윤이상 작곡가, 김성수 장인, 김용우 동장 등. 그 중에서도 나는 이상하리만치 빛나는 인물들 보다는, 그늘에 가려진 인물들에게 한없이 마음이 갔다. 비슷한 의미로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지형, 지물에도 마음이 간다. 




지금의 통영은 한려수도 해상국립공원이 떠오를 만큼 푸르른 해양도시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아픈 역사가 있고, 이렇게 푸르른 해양도시를 만들기 위해 뒤에서 애를 쓴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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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대한 여섯 개의 시선은 ‘오타쿠’, ‘혐한’, ‘뉴미디어’, ‘센고쿠시대’, ‘평화헌법’, ‘일본미’를 향한다. 하나같이 현재의 일본을 읽어 미래의 일본을 전망하는 데 필수적인 주제어다. 이는 각각 대중문화룬, 사상사, 미디어론, 역사, 정치, 문학이라는 렌즈로 조준되어 있다. 각각의 꼭지는 그 단면에서 일본을 잇는 그대로 드러내되, 책의 구성은 그 단면을 하나로 엮어 육면체로 입체회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오타쿠를 보면 현대 일본이 보인다.

우선 1960년대생이 중심인 오타쿠 1세대는 일반적으로 에스에프테 관심이 많고 당시 성장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본격적으로 향유한 세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우주전함 야마토》와 《마징가Z》등을 들 수 있다. 1970년대생이 주축인 오타쿠 2세대는 1980년대 거품경제의 수혜를 받은 출판업계와 관련 연상업계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상황에 등장한 사람들이다.《기동전사 건담》등 일본 애니메이션의 고전뿐 아니라 이 당시 발전한 게임기와 게임산업을 향유했고,《주간 소년 점프》등 일본만화의 전성기를 겪은 세대이기도 하다. 1980년대생이 주류인 오타쿠 3세대는 거품경제의 붕괴를 청소년기에 직접 겪은 세대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체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상징하는 암울한 미래와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상실한 오타쿠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고 사회, 문화 비평의 대상이 되는 등, 주류사회에서 오타쿠 문화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P36

일본정부는 기존의 전통문화 중심의 이미지 전략을 대폭 수정하고 세계의 젊은 세대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오타쿠 콘텐츠 및 캐릭터 산업을 일본의 대외전략 및 산업정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런 흐름의 결과, 일본을 대표하는 오래된 만화 캐릭터인 도라에몽이 명예 외교대사로 임명되는 등, 현재까지 쿨재팬 정책은 지속되고 있다.- P44

-난감한 이웃 일본, 증오의 감정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순

반일과 혐한은 서로를 ‘상식과 도덕’이 결여한 집단, 소통이 불가능한 무뢰한으로 취급하지만, 서로를 미워하는 에너지는 같은 주파수에서 나온다. 그들 모두가 정보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기보다는, 국가/국민/민족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자신들의 이기심과 편파적인 의견을 숭고한 애국심으로 포장한다.- P96

역사인식 부재,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 보수정치인들에 대한 암묵적인 인정, 넷우익이나 재특회 등 우리가 ‘일본시민사회’라고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대개 우경화하는 일본정치를 직접 투영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언론 탓만도 아니다 .이러한 정치영역과 온라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우경화 경향에 비판적으로 움직이는 시민사회의 대응은 일본 주류 미디어에서도 잘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P107

실제로 일본의 사회운동단체와 지식인은 정치인의 망언이나 보수정권의 미디어 장악 시도, 극우단체의 혐오발언과 혐오범죄를 규탄하고 시정을 욕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왔다. 공중파 방송에서 이들의 요구나 활동을 심도 있게 다루는 경우는 드물다. 방송은 사회적 파급력이 크고 즉각적이라는 이유로 정부가 여타 매체에 비해 훨씬 더 엄격하게 규제하기 때문이다.- P120

-이토록 낯선 일본의 역사

대게 하나의 왕조는 200년에서 300년에 한 번씩 바뀐다든가, 사서오경을 열심히 공부한 지식인들이 권력을 쥐고 통치하는 등, 우리 역사에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들이 일본역사에서는 당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천년동안 한 번도 바뀌지 않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다스린다든가, 지식인이 아닌 칼을 찬 무사가 다스리는 시대를 상상하기 쉽지 않고, 그러한 존재들로 이루어진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당연히 더더욱 쉽지 않다.- P146

센고쿠시대란 종래의 중앙권력이 약화되어 붕괴해가자, 전국각지에 통치를 위임받고 있던 지방 영주들이 각자 세력을 키워가며 서로 충돌했던,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말에 이르는 약 150년 동안의 시기다.- P148

막부로서는 250여 개의 번 사이에 평화를 위한 세력균형이 꺠지는 일이 없도록, 혹은 막부의 권위에 대응하지 못하도록 평소에 적절히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고안된 법이 바로 무가제법도, 즉 다이묘를 포함한 무사들이 지켜야 할 내용을 규정한 법이었다.- P165

근대 이래 끊임없이 서양과 비교하고 서양을 따라잡으려 했던 열등감과 욕망, 모든 어려움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며 이웃침략으로 해결하려던 이기적인 선택등이 이어져, 근대 일본은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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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여행 가이드북 - 아이가 좋아하는 사계절 여행지, 2020-2021 최신판
권다현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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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아이여행 가이드북」 개정판이 나왔다. 불과 작년에 초판을 봤었는데 말이다. 겉으로 보았을 땐 눈에 확 띄는 건 표지 색깔. 기존에는 파스텔톤의 초록색이었는데, 이번엔 하늘색이다. 그냥 뭐랄까, 조금 더 아이들의 눈 높이를 맞춘 색깔 같다고나 할까(그냥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 ㅋㅋ)?




코로나19 때문에 집콕하느라, 스트레스가 쌓이는 하루하루가 벌써 반년째다. 아직 신혼인 우리 부부도 이렇게 힘든데, 아이가 있는 가정은 얼마나 힘들지, 아니 뭐. 당장 애기 엄마아빠인 회사동료들만 봐도 매일 주말마다 아이 달래느라 진이 빠진다고 한다. 그런 애기 엄마빠들이 조금이나마, 아이들과 슬기로운 집콕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울 만한게 뭐가 있을까 싶었는데, 바로 이 책 「아이여행 가이드북」이 아닐까?



아이와 함께 이 책을 보면서 코로나19가 종식되면 바로 뛰어 나갈 수 있도록 여행계획을 세우는 거다. 




“봄에는 여기를 가서 우리 ○○이 같은 이쁜 꽃을 볼꺼야, 


여름에는 시원한 바다로 나가서 수영을 해야지!


가을에는 알록달록한 나무 숲길을 걸어볼꺼야, 


겨울에는 ○○가 좋아하는 눈의 나라로 가보자!”



이렇게 말이다.




  

계절별 아이와 함께 여행하기 좋은 여행지



이 여행가이드북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아이가 좋아하는 ‘사계절’ 여행지다. 그렇다보니 목차도 계절별로 구분되어있다. 대부분의 여행가이드북은 여행지에 대해 알려줄 때 지역별로 묶어서 하다보니, 어쩌면 이 책은 여행지를 계획할 때 조금은 보기 어려울수도 있겠다. 그래서! 이 책은 계절별 목차 뒤에 지역별로도 한 눈에 찾아볼 수 있도록 두번째 목차를 만들어놓았다.



 

혹시 모르니 지역별로 다시 한번!



바로 이렇게! 



그러니까, 계절별 목차에서 여행을 가고 싶은 여행지를 미리 결정한 뒤에, 바로 뒤에 있는 지역별 목차에서 근교 지역에 있는 여행지를 추가로 선택하여 여행코스를 계획하면 된다는 것!



여행을 어떻게 계획해야할 지 고민이 끊이지 않는 부모님들을 위해서, 계절별 1박 2일 추천여행코스도 있다.



 

계절별 1박2일 추천코스!



이 추천코스에는 대체적으로 아이들이 체험을 할 수 있는 여행지와, 그 지역 맛집까지 함께 있기 때문에 힘들게 여행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다. 1박 2일이 버겁다면 당일로 나들이를 떠나도 좋다.




베스트 여행지로 선택된 이런 장소들은 당일로 나들이를 떠나도 정말 좋은 장소들이니까!



이 책에는 그저 아이와 함께 여행하면 좋을 여행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10년간 아이와 함께 여행을 했던 경험을 살려서, 아이와 여행을 하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하는지, 아이를 어떻게 케어해야하는지도 알려준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아이를 위해 필요한 짐을 전부 챙겼는지, 혹은 너무 과하게 챙긴건 아닌지 다시 한번 체크해본다.



※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 QnA 



1)  아이와 나들이, 키즈카페가 답일까요?


- 키즈카페에 가면 부모들도 여유가 생기는 건 맞지만, 때로는 아이와 즐거운 나들이를 떠나요! 몸은 힘들어도 눈과 마음은 즐겁고, 아이들의 창의력에도 도움이 될꺼에요.



2) 카시트에 앉기 싫어하는 아이 때문에 장거리 여행은 엄두도 못내요.


- 카시트는 아이의 생명을 지켜주는 장치이니 절대 예외가 있을 수 없어요. 신생아 때부터 카시트에 앉는 습과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지만, 아이가 불편해한다면 다른 보상을 제시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어요.



3) 아이가 걷는 걸 싫어해요.


- 걷는 걸 싫어한다고 여행을 포기할 게 아니라, 아이가 걸을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지속적으로 시도해보길 추천해요. 아이가 스스로 걸어냈을 때는 폭풍칭찬도 해줘요.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아이도 자연스레 성취감을 느낀답니다.



4) 남매(혹은 형제자매)가 성향이 너무 달라서 여행지를 고를 때마다 고민이에요.


- 수목원이나 공원처럼 무난한 여행지를 고르거나, 하루에 하나씩 각자의 성향에 맞는 여행지를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이 과정을 통해 아이들에게 양보를 가르치는 것이 좋아요.



5) 아이가 어려서 ‘이 여행을 기억이나 할까?’ 생각하면 회의적인 기분이 들어요.


-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언어를 통해 기억하는게 아니라, 저마다의 이미지와 감각들로 여행을 기억한다고 해요. 아이의 여행 경험을 더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려면 함께 여행을 기록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좋아요.



6) ‘노키즈존’ 때문에 여행 가서 밥 한기 먹는 것도 눈치 보여요.


- 상대방을 원망하기 전에 일단 우리부터 아이들이 공공의 질서를 잘 따르도록 조금은 엄격한 부모가 되어야 해요. 그리고 식당을 선택할 때 아기의자가 있는지 미리 확인해요. 아기의지가 비치되어 있는 곳은 그만큼 가족손님을 배려한다는 의미니까요.



p.24~26, 요약



이렇게 아이 엄마에게 피가되고 살이되는 여행꿀팁이 끝나면, 이제부터는 아이여행 가이드북의 메인인 본문이 나온다.





본문의 구성은 이렇다. 



1) 추천 연령과, 추천 시기: 예를 들자면, 이제 유모차 타는 아이에게 직업체험 테마파크 이런 곳은 조금 시기상조니까.


2) 여행 지역: 우리 집에서 해당 지역까지 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은 이동시간 체크가 필수!


3) 해시 태그: 해당 여행지의 특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4) 여행지 기본 정보: 입장료가 있는지, 있다면 얼마인지, 몇 시까지 운영하는지 등 기본적인 정보는 필수!


5) 주변 정보: 해당 여행지 주변에 있는, 같이 돌아보면 좋을 여행지나 ‘키즈 프렌들리’ 맛집을 소개한다.





본문은 여행지별로 1페이지씩 있지만, 간혹 위 안면도 쥬라기 박물관 처럼 2페이지인 경우도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지금, 코로나19가 종식되는 그 때를 위해 아이와 함께 이 책을 보며 여행계획을 세워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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