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와 천조의 중국사 - 하늘 아래 세상, 하늘이 내린 왕조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단죠 히로시 지음, 권용철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말 오랜만에 중국사책을 읽었다. 요즘 서양사 관련 세계사책만 읽어서 그런가? 중국사책을 읽으니 너무나 익숙한 기분과 함께 분노가 치솟는 건 내가 동양사람이어서 그런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옆나라 중국은 양가적 감정을 들게 하는 나라다(일본과 비슷하달까?). 심지어 우리나라 고대 역사부터 현재사까지 중국은 필수 등장인물이다. 매 역사적 시기마다 중국이 긍정적인 의미로 등장하면 참 좋겠지만, 위에서도 말했듯 중국은 ‘양가적’ 감정을 들게하는 나라다. 즉, 부정적인 의미로도 엄청 자주 등장했다는 이야기!



‘동북공정’, ‘문화전쟁’, ‘일대일로’ 등 당장 떠오른 키워드만해도 그렇다. 이 키워드들은 중국이 현재 진행하는, 지들만 좋은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이 키워드를 한데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바로 ‘중국몽’. 중국몽이란 중국이란 나라의 부강과 민족 진흥, 인민행복을 내세운 중국 공산당의 선전 문구다. 중국몽을 위시한 중국의 프로젝트는 시진핑 정권과 함께 시작되었다. 




-동북공정: 중국의 민족 진흥을 위한 중국사 연구▶ 대한민국의 고대역사(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는 중국에 속한 이민족들의 역사라고 하는 중


-문화전쟁: 중국의 우월한 문화를 뽐내기 위한 원조 경쟁▶ 김치도 지네꺼, 태권도도 지네꺼, 한복도 지네꺼라고 우기는 중(비슷한 상황으로 이탈리아의 피자도^^..)


-일대일로: 중국의 ‘새로운 실크로드 전략’▶ 현실은 대규모 자금을 동원하여, 세계 여러나라에 정치적 영향력을 넓혀서 중국의 꼭두각시 만들기






중국의 해양 진출이 이제 와서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고, 그 방향성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2005년 4월 ‘정화의 서양 진출’ 60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 정부는 7월 11일을 중국의 ‘항해일’로 결정했다. (…) 정화는 방문국에 도착하면 그 국가의 왕에게 많은 증여품을 하사하고, 이것과는 반대로 명으로의 입공을 요구했다. 이 요구를 받은 아시아, 아프리카의 30여 개 국가들이 사절단을 파견하여 명과의 사이에 조공관계가 성립되었다. (…) 무엇보다도 정화는 가는 곳마다 그 국가에 조공을 독촉하고 있었고, 결단코 대등한 국교를 맺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명과 해당 국가와의 사이에는 군신 관계를 설정했고, 이를 통해 안정된 국제 질서를 확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명의 요청을 거절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국가에게는 무력을 사용해서 국왕을 교체하는 것조차 서슴치 않았다. p 012~013



대체 중국은 왜이럴까? 



지금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과거의 중국을 알아야 한다. 예컨데 명나라 때 ‘정화의 원정(대항해)’를 기억하는가? 서양의 신항로 개척보다 70여년 빠른, ‘최초’의 대항해로 세계사 시간에 필히 배우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 정화의 원정으로 시작된 건 무엇인지는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정화는 영락제의 명을 받아 7차례 대항해를 하면서, 도착했던 모든 나라에(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대규모 선물을 주었다. 물론 공짜가 아니다. 선물을 준 댓가로 중국에 입공을 독촉했다. 입공을 하지 않으면, 무력을 사용해서 왕을 교체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지들보다 약한 나라에 강제로 선물을 안기고, ‘나를 형님으로 모셔라’ 시전했다는 이야기.



이거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현재 시진핑 정권에서 진행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로젝트. 동남 아시아 일대에 대규모 자금을 동원해서 막대한 건설공사를 하고, 그 댓가로 지들의 영향력을 챙겨먹고 있지 않은가! 아, 물론 요즘은 그로 인해 중국경제가 휘청해지는 엄청난 후폭풍을 맞는 것 같긴 하다만. 유럽권도 중국의 일대일로에 손절치는 분위기고.



뭐 여튼! 한마디로 지금 중국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21세기에 들어서 ‘유독’ 유별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와 과거, 중국에서 했던 모든 일들이 묘하게 겹쳐지는 이유! 그 이유를 바로 중국 역사 속에서 찾고자 하는게, 이 세계사책 「천하와 천조의 중국사」의 목적이다. 



현대 중국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전통적 중화 제국의 행동 원리를 추적하고 탐구하여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를 ‘천하’와 ‘천조’라고 하는 키워드를 통해 역사적으로 동해해보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p 014



천조라는 것은 글자에서 읽히는 것과 같이 ‘천자의 조정’을 가리킨다. 동아시아의 중심 국가였던 중국은 전통적으로 스스로를 높이는 의미를 집어넣어 자국을 그렇게 불렀다. 이 단어 자체는 역사 용어인데, 아마도 기원 전후의 한나라 때에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역대 왕조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최후의 왕조인 청나라 시대에 서구 열강의 침략이 활발해진 이후에도 청은 천조대국으로서의 긍지를 완강하게 계속 지켜나갔다. p 18



저자는 중국사를 연구하면서, 중국사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제시한다. 바로 ‘천자’, ‘천조’, ‘천하’다. 이 세 가지 키워드와 유교의 합치는, 역대 중국 황제들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주었다. 



천자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통치하는 자, 천조는 천자의 조정을 말한다. 천조가 통치하는 공간이 천하다. 여기에 유교를 지들의 입맛대로 변형해서 합쳤다. 그렇게 탄생한 명제가 있으니, “중화제국 영역 확장은 천자의 덕이 높다는 증거”. 이러한 논리는 중국 대륙의 주인이 바뀌든 말든 상관없이 지속되었으며, 덩달아 중국 황제의 부도덕한/억압적인/폭력적인 정치도 정당화했다.



<지금의 중국을 규정하는 키워드: 중화제국, 한족>



일반적으로 중국, 중화(중하), 화하, 제화(제하) 혹은 단순히 화(하) 등으로 칭해지는 이러한 용어들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하夏와 중국인데, 이들은 모두 서주 시대(기원전 11세기~기원전 8세기)부터 존재했다. 하라고 일컫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하왕조를 가리키는 것인데, 하의 다음 왕조인 은을 지나 주 시대가 되어서도 주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하라고 칭하기에 이르렀다. p 025



주는 동맹을 맺은 여러 국가와 동족의 여러 국가와의 사이에서 군사적 협력관계를 구축했는데, 이 여러 국가들 속에서 점차 강렬한 일체감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일체감은 자신들을 같은 부류로 보는 의식으로 승화되었고, 그것을 톡별한 용어로 표현했다. 이것이 제하, 제화, 화하 등의 용어였던 것이다. 이전에는 주의 직할지만을 하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춘추시대 이후가 되면 주와 동맹한 여러 국가들을 모두 하라고 부르게 되었다. (…) 하는 하 왕조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화는 ‘화려함’이라는 글자의 뜻이 바뀌어 문화가 우월하다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여러 국가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불렀음은 당연한 것이었고, 당시 주 및 주와 동맹한 여러 국가들은 중국의 중심부, 즉 문화적 선진 지역인 황화 중류와 상류유역에 위치했다. 이른바 중원 지역에 존재했던 것이다. p 026



본래 중원이라고 하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고, 마땅히 중국의 중심부=문화적 선진 지역=중원=화(하)라고 하는 관념이 춘추시대 즈음에 생겨났다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과 관련하여 그 땅의 주인만이 훗날에 ‘화하족’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중국 최초의 종족이 되었고, 그들은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민족과 접촉하고 융합하면서 훗날의 한족으로 성장하고 발전해나갔던 것이었다. p 028



중화라고 하는 용어는 중국과 제화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세계의 중심에 있으면서 문화가 가장 발전한 지역을 의미한다. 후한 말기, 삼국시대의 중국에는 이민족인 오호가 대두하고 있기도 했고, 중국의 주변에는 이적의 세계가 넓게 자리하고 있어서 화와 이의 구분이 강력하게 의식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아래에서 탄생한 것이 중화라고 하는 신조어로, 중국의 국토와 문화의 중심성이 그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p 033



<그리고 유교(유가사상)>



얼마 후 국내의 혼란도 수습하면서 왕조의 기반도 확립되었고 차차 유교는 정통 사상으로 인정되었다. 통설에서는 7대 황제인 (한)무제가 유학자 동중서의 의견을 채용하여 오경박사를 설치했던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른바 ‘유교의 국교화’이다. 다만 국교화의 시기에 대해서는 요즘에는 무제보다 약간 훗날의 일이라고 여겨지고 있고, 왕망의 시대라고 하거나 혹은 후한 시대가 되어서부터라는 등 여러 학설이 분분하고 확실히 정해진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한 왕조에서 유교에 의한 지배의 정당화를 시도했고, 최종적으로 유교가 체제 교학으로서 중국 사회를 규정했다는 점이다. p 052



유가 사상에서는 지상의 주재자는 천자이고, 천자란 천명을 받아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통치하는 덕을 갖춘 사람이었다. 천자는 어디까지나 하늘의 아들이고, 하늘 그 자체는 아니다. 즉 유일무이한 절대 권력자로서 지상의 하늘에 있는 황제와 유가 사상에서 말하는 하늘의 대리자는 본질적으로 입장이 다른 것이다. 황제와 천자를 어떻게 동일화, 일체화할 것인가? 유가가 황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p 054




대한민국은 많은 면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는다. 이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이 어퍼컷을 날리면 무방비하게 맞는다. 문제는 그게 매번 반복된다. 이쯤되면 무엇이 문제인지도 눈에 뻔히 보이는데, 그럼에도 예방을 못한다. 대체 왜그럴까?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게 아닌가 싶다. 뭐, 당장 국내 현실문제 이해도도 부족한 나라인지라, 옆나라에 대한 이해도를 말하는게 맞는건가? 싶기는 한데. 



여튼! 지금의 중국의 행태를 이해하기 위해선, 중국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아버지 최재형
최 올가 페트로브나.최 발렌틴 페트로비치 지음, 정헌 옮김 / 상상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3년 8월 15일. 광복절이 제78주년을 맞았다. 날이 날이니만큼, 오늘은 독립운동가 최재형에 관한 책을 리뷰하려 한다.



러시아 독립운동계의 대부, 러시아 한인들의 페치카, 안중근 의사의 후원자. 모두 독립운동가 최재형 이름 뒤로 붙어다니는 수식어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은 기억해도, 그 뒤에 있던 최재형은 잘 모른다. 이 책 「나의 아버지 최재형」은 사람들이 잘 모르던 최재형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최재형의 자녀들이 기록한 책이다. 



최올가: 독립운동가 최재형 딸

최발렌틴: 독립운동가 최재형 아들





이 책의 전반부는 최올가의 시선으로 본 최재형과 최올가 본인의 삶이 기록되어있고, 후반부는 최발렌틴의 시선으로 본 최재형과 본인의 삶이 기록되어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최올가는 본인 삶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였고, 최발렌틴은 아버지 최재형의 삶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따라서, 최재형의 삶을 조명함에 있어선, 최 발렌틴의 기록이 더욱 디테일하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 한인 1세 최재형

러시아 한인들의 페치카 최재형

러시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안중근 후원자 최재형

그는 대체 누구일까?



페치카 최재형


러시아 한인 1세 최재형은 가난한 노비 최홍백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가봐도 조선의 흙수저였던 그는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건너오고,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먹고 살기 바빴던 친부모와 달리, 러시아에서 만난 선장부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최재형의 삶은 달라졌다.



(최올가) 무역선의 선장과 그의 아내는 수습 선원인 소년 최재형을 무척 예뻐하였다. 그 선장 부부는 소년에게 세례를 주고 ‘표트르 세묘노비치’라는 러시아 이름도 지어주었다. 소년은 6년 동안 배에서 생활하였다. 선장이 더 이상 무역선을 무역선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선장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역업을 하는 사업가 친구에게 보냈다. 최재형은 러시아인들과 지내면서 러시아 말과 글을 익히게 되었다. 최재형은 단 하루도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다. 하지만 총명한 그는 책을 꾸준히 읽었고 점점 지식과 상식이 풍부해졌다. p 014



최재형의 대부, 대모가 되어준 러시아 선장 부부는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조선에만 갖혀있던 과거와는 달랐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은 당연했고, 다른 한인들과는 달리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사업수완까지 있었던 최재형은 어느새 자수성가한 거부가 되었다. 


당시 최재형이 소유했던 쿤스트 앤드 알베르스 백화점이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며, 최재형이 얼마나 거부였는지를 보여준다.



러시아는 최재형을 인정하고 존경했다. 1894년에는 10월에는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초청까지 받았다. 혼자 잘먹고 잘살아도 누가 뭐라하지 않았을 그 시기에, 최재형은 자신의 재산과 목숨을 독립운동과 한인들을 지키기 위해 바쳤다.



(최발렌틴) 고향 사람들의 권리가 이처럼 정당하게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 젊은 최재형은 공사장에서 일하는 한인 노동자들의 법적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노력했다. 공사장에서 일했던 농민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통역사 최재형은 착하고, 정당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 도로를 건설하던 시기에 한인들은 최재형을 최페치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원래 페치카는 난방을 위해 집 안에 철과 벽돌로 만든 땔감나무를 뜻하는 벽난로를 뜻한다. 대부분의 한인들에게는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라는 이름보다 최페치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p 165



(최올가) 도로 건설이 끝나고 통역사로서 일을 마친 후 최재형은 얀치헤의 읍장이 되었다. 읍장이 된 최재형 앞에는 해야할 일들이 많이 놓여 있었다. 새로운 마을이 생겼지만, 대부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최재형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공부도 시켜야했다. 그는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p 017



(최발렌틴) 최재형이 주도한 애국 계몽 운동에 이종호 등 많은 계몽 활동가들이 참여하였다. 최재형과 계몽 활동가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 청년협회를 조직하였고 한인 민족학교 건립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모은 자금으로 극동지역에 182개의 학교를 설립하여 260명의 교사들이 6,00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졸업시켰다. p 166



최재형은 계몽 활동과 사회 활동을 하면서 주민들의 문화 수준 향상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는 특히 학교와 교육에 큰 관심을 두었다. 마을마다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고, 노보키옙스크에서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는 6년제 상급 교육기관도 세웠다. 상급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들은 민족의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p 169



최재형이 죽은지 100여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러시아 한인들에게 최재형은 아직도 ‘페치카’라고 불린다. 그 증거가 바로 우수리스크에 남아있는 최재형 고택이다. (러시아 한인)고려인들이 최재형 고택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 정부와 끊임없이 협상을 하고, 우리나라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지켜낸 고택이다. 현재는 최재형 고택이며,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관으로 운영중이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1908년에 러시아에서 이위종의 주도로 항일 의병단체 ‘동의회’가 창설되었다. 동의회 창단 멤버는 최재형을 비롯하여 안중근, 이범윤, 엄인섭 등이다. 1910년에는 최재형 주도로 ‘권업회’가 창설되었다. 권업회는 대외적으로 러시아 정부의 공식승인을 받은 노동단체다. 실제로는 한인 무장 단체의 조직과 훈련을 비밀리에 진행하는 항일독립운동단체였다.


(최올가) 한국의 애국자로서, 최재형은 점령자들인 일본과 싸웠다. 독립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나의 아버지 최재형은 1906년, 항일 독립 운동 조직을 결성하고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다. p 028



(최 발렌틴)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 창립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정관이 승인되었고, 지도부가 선정되었다. 최재형, 유인석, 이범윤, 김학만, 홍범도, 이상설, 이종호, 이남기, 김치보, 고상준 등 권업회를 이끌었던 사람들은 모두 적극적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이었다. 항일운동의 지도자들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이 합법적인 단체를 방패막이로 사용하였다. p 167


안중근: 하얼빈 의거

이위종: 헤이그 특사

엄인섭: 훗날 친일파로 변절(영화 ‘밀정’ 모티브)

유인석: 을미의병

이범윤: 간도관리사

이상설: 헤이그 특사

홍범도: 봉오동 전투







총알을 피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붉은피로 독립기를 크게쓰고

동심동력하여 성명을 동맹하기로

청천백일에 증명하노니 슬프다

동지 제군이여

-동의회 총장 최재형-

( 러시아 해조신문 발췌 )



(최 발렌틴) 연해주에서 의병이라는 첫 유격대는 1906년에 조직되었다. 의병을 조직하고 무장시키는 일에는 최재형, 이범윤, 이상설이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무장한 유격대원들은 주로 연해주의 한인 마을에서 훈련하였고, 한반도 이북 지역에 침략해 있던 일본 군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하기도 하였다. (…) 1908년 6월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한 작전이 실시되었다. 최재형의 지휘 아래 있던 한인 의병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에 큰 타격을 주었고, 더 나아가 회령시 지역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 부대를 향해서도 기습공격을 감행한 후 연해주로 돌아왔다. p 171



1910년 7월 4일 러시아와 일본 간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에 따르면 일본에 의한 대한제국의 강제합병을 러시아는 인정하고, 러시아는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이익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러시아는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항일 운동을 사전에 방지하기로 한 것이다. (…) 이러한 상황 변화로 항일 의병 유격대의 일부는 해체되었고, 일부는 중국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p 172



그러나 일본은 이와 같은 결과에 여전히 만족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연해주에서의 항일 운동을 완전히 진압하려면 항일 운동의 지도자인 최재형부터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최재형이 대한제국의 일본 식민지화에 반대하여 항일 투쟁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연해주 지방 행정부는 그의 추방을 반대했다. 무엇보다 최재형을 보호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우수리스크 철도관리국의 경찰국장 쉐르바코프가 연해주가 군정 총독 스베친 앞으로 보낸 편치였다. p 173



이후 최재형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도 역임한다. 



최재형과 안중근 하얼빈 의거


(최 올가) 우리가 있던 노보키옙스크에 ‘안인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던 안응칠(안중근)이 살았다. 그는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창고 벽에 세 명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들을 향해 총을 쏘는 연습을 했다. 어느 날, 나와 소냐 언니는 마당에서 놀다가 그 광경을 보게 되었다. 결국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가서 일본군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 노보옙스크에는 안중근의 아내 두 명과 아이들이 남았다. 그들은 우리 식구들과 친했기 때문에 우리 집에 자주 왔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잘 대접하려고 애썼다. 어머니는 아이들 옷과 각종 물건들이 들어 있는 보자기를 가지고 와서는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골라 가져갈 수 있게 해주었다. p 028



(최 발렌틴) 나의 아버지 최재형이 이끄는 유격부대에는 안중근이라는 젊고 결단력 있는 소대장이 있었다. 1907년도에 블라디 보스토크에 도착한 안중근은 최재형과 이범윤 등 반일 유격부대 지도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p 175



최재형과 이범윤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한 작전을 수립하고 사격 훈련을 계획하였다. 훈련은 노보키옙스크에서 진행되었다. 1910년 3월 26일, 죽음도, 고문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영웅 안중근은 뤼순감옥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사형을 당하고 순국하였따. 한국에서 안중근의 미망인이 우리 집에 왔다. p 176



우리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그 뒤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최재형의 딸과 아들의 기록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는 최재형의 집에서 주기적으로 사격연습을 하였다. 안의사가 체포되었을 직후에는 최재형의 부인이 안의사의 가족들을 돌봐주었고, 국제변호사를 선임하여 안중근 의사를 변호한 사람도 최재형이었다.



추측이지만,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권총은 최재형이 구해주었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에서 총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며, 심지어 실명등록을 해야했다. 거기다 안의사가 사용한 권총은 당시 기준으로 최신식 총인 브라우닝 권총이었다. 최재형은 러시아에서도 인정한 사람이었기에, 그가 권총을 구해다주었을 것이라는 게 추측이지만, 이 추측 외에는 안의사가 권총을 구할 방법이 없으므로, 이 내용은 정설이 되었다. 



최재형의 마지막 모습


1920년 일본군은 간도일대에서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한다. 우리가 배운 ‘간도참변’이다. 간도 일대에 살던 수많은 한인들이 무차별적으로 도륙되었고, 최재형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은 일본군이 잡아갔다. 이후 이 지역에 살던 한인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설상가상으로 1937년 스탈린 강제이주 정책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한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졌다. 최재형 가족들도 그랬다. 그들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고려인’ 이다.



1920년 4월 4일 저녁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우리 모두를 불러 “내가 떠나고 없으면 곧 일본인들이 어머니와 너희들을 모두 체포헤 때리고 내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할 거다. 나는 이미 늙었고 충분히 오래 살았으니 죽어도 되지만 너희들은 살아남아야 한다. 나 혼자 죽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그 말에 우리 모두가 울었다. 그렇게 또 한 번 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일찍, 아직 해도 뜨지 않았을 무렵 아버지가 우리방 덧문을 열었다. 5분 정도 지났을 부렵 방문이 열리고 총을 든 일본군이 나타났다. 우리는 모두 무슨 일인지 깨닫고 벌떡 일어나 옷도 입지 못하고 현관 계단으로 내달렸다. 그리로 나가보니 팔이 뒤로 묶인 아버지의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1920년 4월 5일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p 046



늦은 밤, 불시에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나는 집을 떠날 수 없다. 내가 떠나서 집에 없으면 일본군들이 어머니와 너희들에게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라며 고문할 것이다. 나는 이제 나이 60이 되었다. 충분히 오래 살았고 죽어도 된다. 하지만 너희들은 살아남아야 한다. 나 혼자 죽는것이 낫다”라고 말했다. 밤새 내화가 이어지는 내내 어머니는 우셨고, 아이였던 우리들도 울었다. p 191



그날 200명이 넘는 한인이 체호되었다. 심문이 끝나고 저녁 무렵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 카피톤 니콜라예비치를 제외하고 나머지 한인들은 모두 풀려나왔다. 4월 참변, 그 비극의 시기에 당시 연해주에 있었던 러시아인들과 함께 일본 침략자들에 맞서 싸웠던 수많은 러시아 국적의 한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본군들이 당시 체포한 사람들을 잔혹하게 고문했다고 한다. 최재형과 그의 동료들이 일본군에게 지독한 고문과 학대를 당하고 나서, 체포된 다음 날, 총살되었다고 한다. p 193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일제가 총살 후 그를 언덕배기에 묻어버리고, 그 장소를 함구했기 때문이다. 최재형은 지금도 우수리스크 소베스트카야 언덕 어딘가에 묻혀있다. 하지만 시신을 찾지못했다 한들! 유교의 나라 대한민국에선 문제가 없다. 대한민국은 가묘라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최재형은 해방 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고, 국립현충원에는 최재형의 가묘가 조성되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사실이 들어났다. 당시 최재형의 보훈 혜택을 받았던, 최재형 후손이라고 했던 그들은 ‘가짜’였다. 더 웃긴건 지금부터다. 논란이 두려웠던 국립현충원은 최재형의 가묘를 없앴다. 무엇보다 이 모든 사실을 진짜 최재형의 후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최재형은 죽어서조차, 그 영혼마저 안식을 찾지 못했다. 아니, 못했었다.



2023년 8월 14일, 바로 어제 국립현충원에 최재형 묘가 다시 설치되었다. 최재형 부인 최 엘레나와의 합장 묘로. 많은 사람들의 노력 덕택에 법이 바뀌었고, 최재형은 부부 합장묘 방식으로 현충원에 다시 안장될 수 있었다. 여기서 조금 슬픈 사실 하나는, 최재형의 부인 최 엘레나의 유해가 어디에 있었는가다. 최 엘레나의 유해는 키르기스스탄의 한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었다. 관리의 흔적 하나 없이. 그녀는 최재형이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그의 뒤에서 내조를 했고, 최재형 사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된 후에도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했던 사람이다. 



(옮긴 이) 독립이 되고 난 후에,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에 남겨진 독립투사들의 자손들, 한반도에 남겨진 자손들이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았는가를 생각하면 깊은 한숨과 함께 가슴이 미어진다. 당시 조국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목숨을 건 투쟁과 끊임없는 헌신에 대하여, 정확한 사실에 입각하여 재조명함으로써 제대로 된 한민족의 역사관을 정립하여야 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처자식의 안위는 뒤로한 채, 이역만리에서 소리없이 스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을 우리는 국가적 차원에서 보살펴야할 의무가 있다. 조국을 위해서 싸우다 희생된 애국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을 존경하며 보살피지 않는 나라가 세계 역사를 주도한 예는 역사상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p 309




아직까지도 중앙아시아 곳곳에는 우리가 모르는 독립운동가 무덤이 버려져있다. 그나마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인물이면 다행이다.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씨들도 많다.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이제는 나라가 그들을(또는 그들의 후손을) 보호하고 지켜줄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그들은 아직까지도 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위에 짧게 언급했지만,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강제이주 된 한인들은 오로지 몸만 기차에 실렸다. 짐짝처럼 기차에 실린 고려인들. 기차에서 죽어나간 생명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고려인’들은 아무것도 없는 중앙아시아에 버려졌다. 그 어떤 물질적은 지원도 없었다. 그저 맨 몸으로 중앙아시아에 버려졌다. 여기서 중요한 건 대다수 ‘고려인’들이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라는 점이다. 국내에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그랬지만,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삶이 힘들었던 건 매한가지였다. 나라가 독립을 해도 그랬다. 



강제이주 1세대 고려인들에게 해방 후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의 후손들에게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일까?

지금의 나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많은 생각이 드는 하루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란공 2023-08-18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분을 <범도>를 읽다가 처음 알게된 분입니다. 일본군에 끌려가는 이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던 기족의 기억이 먹먹하게 하네요. 많은 독자기 만났으면 하는 책입니다.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방랑하는 철학자
헤르만 폰 카이저링 지음, 홍문우 옮김 / 파람북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일 출신 철학자가 쓴 여행에세이 「방랑하는 철학자」. 이 책을 받는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게.....벼..벽돌책이잖아? 철학자가 세계여행을 하며 쓴 책이라고 하길래, 당연히 여행에세이라고 생각했는데. 으하하하하. 정말 반전도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이야. 내가 살면서 읽은 벽돌책이라고는 「코스모스」나 「사피엔스」 정도인데, 이 책은 앞 두 책보다 페이지가 더 많다. 무려 800페이지!! 


‘철학자의 세계여행 기록’이라고 하길래 당연히 뒤에 있는 단어 ‘세계여행’이 메인이라 생각했는데ㅋㅋㅋㅋ으하하하. 앞 단어 ‘철학자’가 메인이었다. 정말 진짜 와. 철학책은 읽어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보니, 와. 순간 당황했지만, 읽었다. 다 읽고야 말았다. 벽돌책에다가 철학책이라서 솔직히 조금 겁났다. 어려울까봐. 웬걸? 의외로 술술 읽혔다. 뭐, 간혹 흐름이 끊겨서 위험한 순간도 있긴 했지만, 완독 성공!  이렇게 내 책장엔 벽돌책이 또 하나가 늘어난건가. 하하하.

나는 오래전부터 혼자 지질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만난 사람들의 개성을 파고들면서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긴 책을 읽어도 보았다. 그러나 흥미진진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지금이야말로 세계를 한 바퀴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더욱 안달이 났다. 분명 호기심 때문은 아니다. 나는 ‘볼 만한 재미’가 있다는 곳은 싫다. 절실히 원하는 곳이 아니니까 별로 내키지 않는다. 내 기질에 맞거나 근본적으로 진지하게 접근할 만한 특별한 문제도 없다.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수도원에 들어가는 많은 사람이 그랬겠지만 나 자신부터 알고 싶다. p 017

저자는 지금의 에스토니아 땅인 러시아 제국령 리보니아에서 태어난 독일의 철학자 헤르판 폰 카이저링. 무려 금수저출신이다. 원래 전공은 지질학. 지질학 박사학위를 딴 사람인데, 갑자기 철학자가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 저자가 왜(!) 바로 철학을 공부안하고, 지질학을 먼저 공부했는지 이해가 안될정도로, 정말 철학계에 딱 맞는 인간상이랄까. 아 물론 내가 철학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달까? 


저자의 세계여행 시작은 ‘실론’이다. 실론이 대체 어디지? 내가 아는 실론은 ‘실론티’ 밖에 없는데… 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실론티의 그 실론이었다. 실론의 현재 이름은 ‘스리랑카’. 

저자가 세계여행을 시작한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던 시기였다. 당시 실론은 영국 자치령이었고, 저자는 유럽권에 위치한 독일의 철학자였다. 저자 입장에서 동쪽으로 떠나는 첫 세계여행이니, 아예 모르는 나라보다는 유럽 국가 식민지를 가는 것이 쉬웠을테다.


욕망과 성취! 이 둘이 제대로 어울린다고 모든 문제가 풀릴까? 어째서 위인들은 기후가 혹독하지 않은 지역에서 등장했을까? 모든 것이 나타난 곳에서는 더 찾을 것이 없다. 탐구자가 아닌 한 누구도 궁극의 진실을 찾지 않는다. 의지는 모든 것을 갖춰 아쉬울 것 없는 곳에서 솟구치지 않는다. 영웅적 행위는 한가한 데에서 나오지 않는다. 모든 가능성이 실현되는 곳에서 어떤 이상적 관념도 살아남지 않는다. p 052

열대의 독특함은 너무 낯설다. 열대에서는 상상력도 다른 것들처럼 식물처럼 움직인다. 사실, 열대에서 경이로운 꽃이 핀다. 마치 신들과 얽힌 민중 신화처럼, 시인의 가슴에서 무르익은 서정처럼, 야성의 환상을 보여주며 향기롭게 타오른다. 그러나 제아무리 아름다워도 ‘자연계’ 속에서만 벌어지는 창조다. 영적 ‘깊이’라는 독특한 원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정신으로 재창조되지 않는다. 제아무리 화려해도 저절로 높아지는 영성 같은 것은 없다. 주어진 틀을 과감하게 뛰어넘는 인간만 거기에 이른다. 하지만 열대 사람은 이렇게 노력할 기회가 없다. 모든 것이 자연발생적이라 그렇다. 불가능한 것을 탐내는 동기와 추진력이 부족하다. 그 의식은 무척 빈곤할 수밖에 없다. 의식이란 자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모든 것이 자연스레 저절로 벌어지는 곳에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 열대사람들이 과연 사랑을 알기나 할까? 이들은 서양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상상에만 기댄다. 욕망이 쾌락보다 우선이고 관념이 현실을 앞지른다. 이런 곳이라 경이로운 생장은 욕망과 성취의 거리도 없어질 만큼 풍성하고 따뜻하며 아름답다. p 052

당시 세계는 서구 우월주의로 만연했다. 그들에게 아시아는 미개한 지역이었다. 이 책의 저자 헤르만 폰 카이저링도 그랬다. 그는 철학자이기 전에 유럽사람이었다. 

스리랑카는 유럽과는 달리 뜨거운 열대 지역이다. 저자는 이런 열대기후와 날씨 등을 토대로 서구와 비교하면서, 열대지역의 문명 발달이나 그들의 가치관을 분석했다. 어찌보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이 책의 저자는 유발 하라리와는 달랐다. 헤르만 폰 카이저링은 세계여행 기록 곳곳에서 서구 우월주의를 내비쳤다. 어쩔수 없는 시대적 한계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땐 이런 한계를 잠시 내려놔야 한다. 그러면 보인다. 

이 책이 서구인의 눈으로 본 동양의 이색적인 풍경이 아니라, 철학자의 눈으로 본 동양의 정신세계를 고찰한 책이란 것을.

붓다의 현상학은 분명한 진리다. 붓다의 연상학은 그 어느 시대의 식물론보다 정확하다. 식물의 삶이 모든 삶을 대표하는 만큼 붓다는 인간에 대해서도 진리를 말했다. 내용도 풍부하다. 모든 기본 문제가 인간의 가장 고상한 문제와 마찬가지로 식물 속에서 완벽하게 벌어지고 풀이된다. 아무튼 식물을 통해 인간을 정의하니 조금 거북하다. 그렇게 하면 인간을 왜곡하지는 않지만 고유의 안간성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원칙적으로 식물과 비슷함을 보여주면서도 어떻게 다른지 따지지 않는다. 붓다의 이론을 들여다보면 그가 인간을 종종 식물로 바꾸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다. 정말 그는 그렇게 했다. 붓다의 이론은 모든 생명체의 공통점을 속속들이 모방했다. 그 추종자들은 이런 생명 공동체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불교의 수동성은 식물과 비슷하다. p 055

불교 승려들의 수준은 매우 높다. 지성의 수준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수준이 높다. 인품도 기독교도보다 낫다. 인자하며 지식에 관련된 것에 호방하다. 사람들을 반긴다. 기독교 사제도 그만하다고 주장하기 어려울 만큼 초연하다. 이는 불교가 신도들에게 완전히 무사무욕을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보다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이 이론적으로야 훌륭하다. 하지만 실제로 적극적 이웃 사랑은 수준 높은 정신에 이르지는 못했다. 되레 야박해지기나 했다. 타인에게 닦달이나 했지 지배욕을 버린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람들을 향상시키고 싶다는 사람들이 막상 얼마나 요령부득이던가! 선교사들은 얼마나 가리는 것이 많고! 선교사들의 심리는 단순하다. ‘자기 관점을 타인에게 씌운다.’ 사실상 제한된 행동을 한다. 이렇게 계속 직무에 따라 움직이다 보면 어느덧 편협해 진다. p 061

이곳 사찰의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든다. 이렇듯 편한 곳을 어디에서 다시 찾을까. 그런데 지금 어느 때보다도 불교는 유럽 사람들에게 쉽게 통할 종교가 아니다. 실론 사람들 틈에서 그들만큼 적극 실천하려면 유럽 사람과 완전히 다른 정신이 필요하다. 유럽 사람들은 ‘현상’을 절대시하면서 개인의 구원만 바라는 생활에만 투자하다 보니 금세 비루한 이기주의에 빠졌다. 온정은 야생동물 보호 조치 비슷하게 싱거워졌다. 유럽 사람들은 열반을 동경하면서 각성은 고사하고 쓸데없이 부실해지기나 했다. p 063

기독교는 원래 빈민의 종교였다. 기본 원리부터 특권층과 대립했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 편에 선 입장에서 행복한 사람들에게 원한이 많은 사람들 편에 섰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쪽을 지향하든 불화의 씨를 품고 있었다. 평화에 가장 탁월한 종교가 가장 불화를 키웠다는 사실이야말로 매우 의미심장하다. 예수의 정신이 아무리 뛰어났떠라도 그것으로 세속의 문제를 지배하지 못했다. p 066

저자는 동양 불교를 마주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서구 문명의 가치관인 기독교를 떠올린다. 분명 두 종교의 커다란 지향점은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기독교가 그렇게 타락했는지를 분석한다. 이게 이 책의 묘미다. 분명 이 책을 읽다보면 서구 우월주의가 자주 나타나는데, 진짜 딱 그만큼 서구문명도 비판한다. 

이런 이유일 것이다. 헤르만 폰 카이저링이 자신이 속한 유럽권에서도 비판받은 이유가.


이렇게 볼 때 낙원에 대한 관념은 진실하다. 만약 우리가 나쁜 의도로 행동하지만 않는다면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유럽 사람은 어떤 낙원도 만들 수 없다. 우리는 사랑의 미덕을 확신하면서도 동물적 본능이 너무 강하다. 그러나 불교와 힌두교의 세계에는 여러 면에서 낙원의 분위기가 살아 있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동물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금하니까 동물도 사람에게 적개심을 보이지 않는다. 동물은 인간을 존중한다.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을 존중하듯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p 102

안내자는 타밀족 출신이라 내가 입장하는 사원마다 들어가지 못했다. 입장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기독교도인 데다가 최하층민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첫눈에 그의 신분을 알아본다. 힌두교도는 누구든 얼마나 능란한 거짓말을 하든 위장하든 아니든 사람의 계급을 즉시 알아내는 특이한 능력이 있다. (…) 서로 다른 계층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누구와 왕래하고 누구와 함께 식사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나쁜 사람과 사귀는 것은 세균만큼 감염의 위험이 크다. 정신도 감염된다. 심리는 놀랄 만큼 쉽게 오염된다. p 138

난처한 일이다. 우선 끝없이 자기자신을 타인과 차별화하면서 가벼운 병에도 죽어버린다. 인도에서 차별화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계급 제도는 극히 복잡해졌다. 인도 주민들은 늘 걱정하며 살아간다. 매번 편견이 길을 가로막는다.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끝없는 걱정도 낳았다. 유럽에서는 페스트가 만연하던 시대에서나 볼 법한 엄격한 처방과 규제를 항상 염려해야 한다. 

편견을 뿌리 뽑기란 어렵지 않다. 겪어보거나 조금 더 이해하면 금세 사라진다. 유럽에선 천 년 이상 일상에 자리 잡았던 대부분의 편견도 단 한 세기 만에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영혼이 우세한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모든 현실이 상상력에 좌우된다. 인도에서 일상화한 완고한 계급 제도도 편견만 사라진다면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너무 해묵은 편견이라 온실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최근까지 인도를 떠난 모든 브라만 계급은 해외에서 자기 계급을 잃었다. p139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눈으로 본 불교와 힌두교의 모습은 어떻게 그려졌을까. 그저 유토피아로만 봤을까? 그 안에 있는 계급 불평등은 큰 문제는 아니었을까? 아니면 저자 스스로 언급한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모든 현실이 상상력에 좌우’되기 때문에, 그 ‘상상력’으로 인해 생겨난 계급 불평등이니, 이는 그저 서구보다 못한 아시아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을까?

생애 첫 철학책(?)이라 그런가, 지금까지 읽어본 최고의 벽돌책(?)이라 그런가 읽는 내내 온갖 생각들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책 자체가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라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내가 읽고 있는 이 책이 여행에세이인가 철학책인가, 아니면 두 종류를 짬뽕한 책인가! 이 책의 정체성에 대한 고찰은 덤이다. 뭐, 이 책의 저자는 세계여행을 하기 전부터 에세이스트로도 조금 유명했다고 하니, 여행에세이가 맞...맞겠지? 확실한 건 이 책은 지금까지 읽었던 여행에세이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철학자가 세계여행을 하며 쓴 책이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읽으면 알게 될 것이다. 여행을 함에 있어서, 장소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이토록 다양할 수도 있구나! 라는 사실을. 플러스로 서구우월주의가 만연한 그 때, 동양과 동양 종교를 이토록 폭넓게 이해한 유럽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자의 글쓰기 - 모든 장르에 통하는 강력한 글쓰기 전략
박종인 지음 / 와이즈맵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종인 기자님 새 책이 나왔다. 음... 새 책인가? 제대로 말하자면 과거에 출판됐던 「기자의 글쓰기」 개정판이다. 이미 구판을 가지고 있는 나지만, 개정판은 또 못참지!!!

 


 

「기자의 글쓰기」 초판을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 개정판도 어김없이 배울점이 많다. 그리고 반성할 점도 많다T_T. 분명 초판을 읽었을 때도 반성을 했는데?? 이제 고쳐야지, 했는데??? 이게 참. 반성만 하고 개선을 못했다. 사람은 학습하는 동물이라고 대체 누가그런거여. 왜 난 학습이 안되건데?! 그래서 난 여전히 글쓰기 반성중 ^_T (심지어 초판을 읽고, 잊지 않기위해 블로그에 리뷰까지 썼는데, 개선을 못했음.하ㅏㅎ..핳하ㅏㅎ.ㅎ)

 

 

과거 포스팅을 곱씹어보자. 생각해보면 한동안은 「기자의 글쓰기」 에서 박종인기자님이 강조했던 ‘쉽고, 구체적이고, 짧게’를 상기시키며 포스팅을 했었다. 분명 그랬다. 벗뜨... 임신과 함께 나에게 온 그 이름 ‘매너리즘’. 그렇게 나는 매너리즘이라는 친구와 함께(^^) 오랜 기간 함께했다. 최근 몇 년간 도서 리뷰의 70%는 매너리즘과 함께한 포스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랄까. 문장도 길고, 쓰잘데기 없는 수식어도 많고. 그 옛날 대학 레포트를 길게 늘려쓰기 위해 아무말을 늘어놓던, 그 때의 내 모습이랄까? 하하하. 다시금 반성...!

 

 

근데 이 매너리즘이 블로그 포스팅에만 온 게 함정. 회사에서는 매너리즘이고 나발이고 ‘쉽고, 구체적이고, 짧게’를 오백프로 지키는중;;

 

 

이 책은 진실한 글에 대한 책도 아니고 도덕적인 글에 대한 책도 아니다. 그렇다고 부도덕한 글은 절대 아니다. 글을 잘 쓰는 방법에 관한 책이다. 진실한 글도 잘 쓰자는 말이고 도덕적인 글도 기왕이면 재미있게 잘 쓰자는 이야기다. 악마를 소환하는 글도 악마를 감동시킬 만큼 재미가 있어야 악마를 부를 수 있다. 악마도 맛있게 읽고 천사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글에 관한 요리책이다. p 011

 

 

복잡한 원칙은 원칙이 아니다. 원칙은 간단해야 한다. 몇 가지 원칙만 익히면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다. 사람들이 글쓰기 자체를 두려워하기에 원칙을 적용하지 못할 뿐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원칙을 깨닫게 해주는 목적으로 썼다. 글쓰기는 어렵지 않다. 몰라서 못쓰지, 원칙을 알면 누구나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p 013

 

 

박종인 기자님이 말하는 글쓰기 원칙은 한결같다. 글쓰기는 ‘상품’과 같기 때문에, 소비자(독자)가 선택할 수 있는 좋은 상품(좋은 글)이어야 한다. 모름지기 좋은 상품이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다. 좋은 글도 똑같다. 독자에게 쉬운 글이어야 한다. 쉬운 글은 내용이 구체적이고(이해하기 쉽고), 문장에 리듬이 있어서 읽는 데 끊김이 없다.

 

 

한마디로 좋은 글이란 ‘쉽고, 구체적이고, 짧아야’ 한다. 여기서 조금 더 디테일을 더하면 ‘팩트를 기반으로, 수식어 및 진부한 비유는 빼고,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

 

1. 좋은 글은 쉽다.

2. 쉬운 글은 전문 용어나 현학적인 단어가 아니라 평상시 우리가 쓰는 입말을 사용해 짧은 문장으로 리듬감 있게 쓴 글이다.

3. 독자는 글을 읽으면서 감동받기를 원한다.

4. 감동은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서 나온다.

5. ‘매우’ ‘아주’ ‘너무’ 같은 수식어는 그 감동을 떨어뜨린다.

6. 독자들은 ‘너무 예쁘다’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쁜 이유, 즉 구체적인 팩트를 원한다.

7. 불명확한 글, 결론이 없는 글은 독자를 짜증나게 만든다. 명확한 팩트로 구성된 명쾌한 글은 독자에게 여운을 준다.

- 「기자의 글쓰기」 ‘좋은 글이 가지는 일곱 가지 특징 中’

 

 

 

 

글을 쓰려면 재료가 필요하다. 재료는 상상에서 나오지 않는다. 일상생활 경험과 남이 던진 이야기, 읽은 책, 검색한 자료에서 나온다. 그렇게 얻은 재료를 물 흘리듯 보내버리면 글을 쓸 재간이 없다. 반드시 기록해 둔다. 그게 글 보따리다. p 045

 

 

축적해 놓은 글 재료들을 되도록 엑셀 파일로 정리해 둔다. 방대한 재료들이 분류와 검색이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로 진화한다. 키워드를 만들어서 한 칼럼은 그 키워드를, 자료는 파일 이름과 컴퓨터 폴더명, 인터넷 URL을 분류해서 엑셀에 정리해 놓으면 기가 막힌 글보따리가 된다. 글을 쓰기로 작심했다면 꼭 이를 실천해보시라. 한번 쓰고 글짓기 그칠 사람은 이럴 필요 없다. p 047

 

 

2018년 12월, 박종인 기자님 북토크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 때 기자님이 했던 말이 있었다. 바로 기자님 본인이 모아온 ‘데이터’에 관한 것.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잘 안나지만, 본인이 취재하며 찍었던 사진들을 찾기 쉽게 정리하고, 갑자기 떠오르는 내용들도 까먹지 않도록 메모해둔다고 하셨던 것 같다. 이른바 ‘데이터 베이스’. 

 

 

박종인 기자님은 이 책에서도 ‘데이터 베이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본인이 관리하는 데이터 요약 화면까지 보여주면서.

 

 

위에서도 언급했듯 좋은 글은 좋은 상품이다.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선 생산계획을 수립하고, 재료를 수급하여 생산계획에 따라 제조한다. 좋은 글쓰기도 똑같다.

 

이제부터 발상을 전환한다. 글은 글이 아니라 ‘상품’이다. 독자에게 팔아먹기 위해 필자가 만드는 상품이다. 제조업이 됐든 금융업이 됐든 한 업종 한 업체가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 거쳐야 할 단계가 있다. 첫 번째가 생산 계획이다. (…) 왜 글쓰기가 아니고 글 생산이어야 할까. 일기장을 쓴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글은 대게 남에게 읽히기 위해 쓴다. (…) 팔리지 않는 상품은 무가치하다. 읽히지 않는 글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업체들은 저마다 계획을 세우고 상품을 만든다. 글에서는 이 계획을 ‘디자인’이라고 부른다. 글을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디자인해야 한다. p 072

 

 

 

 

 

 

 

이렇게 좋은 글 쓰는 과정을 배웠다면, 바로 써봐야 하는 법! ....라고 하기엔 나같은 글쓰기 풋내기들에겐 너무 이르니, 책에 실려있는 예문을 보자. 기자님이 쓴 (땅의 역사)원고 뿐만 아니라, 글쓰기 수강생(?)들의 글과 수강생들의 글을 고친 글 등이 실려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 

 

 

에세이와 평론은 ‘사실’에 대한 근거 제시 정도에서 차이가 난다. 에세이가 상황 묘사와 주관적 느낌에 중점을 둔다면 평론은 사실 자체에 더 비중을 둔다. 따라서 평론적인 글쓰기를 위해서는 글에 등장하는 여러 에피소드가 창작이 아니라 사실임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이게 학계에서 논문에 첨부하는 각종 인용 출처, 주석이다. 출처가 없는 사실은 독자에게는 사실이 아니라 주장밖에 되지 않는다. ‘소설’을 쓰겠다면 출처가 굳이 필요 없겠지만 사실을 담은 글, 논픽션을 쓰려면 출처 게시는 필수다. p 074

 

 

사건, 사고를 보도하는 신문기사는 철저하게 두괄식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뒤 육하원칙에 따라 그 상세한 상황을 끌까지 서술한다. 이유는 명쾌하다. ‘침략했다’라는 사실이 독자가 읽고 싶고 듣고 싶은 첫 번째 사실이니까. 에세이와 평론은 어떻게 시작해야할까. p 075

 

 

뿐만 아니다. 기자님은 여행 에세이, 역사평론, 인물에세이 쓰는 방법도 알려준다. 기자님이 이 정도로 떠먹여줬으니, 이제 배부르게 소화만 잘 시키면 되는데!! 내가 그게 가능할지는 미지수라는게 함정. 하^_T. 일해라 머리야!!!!! 

 

 

글은 문장으로 주장 또는 팩트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좋은 글은 리듬 있는 문장으로 팩트를 전달한다.

리듬 있는 문장은 입말로 쓴다.

- 기자의 글쓰기 p 111

 

1. 한국말의 외형적인 특성을 100퍼센트 활용한다:

문장 속 단어를 이리저리 순서를 바꾸거나 단어 자체를 바꿔보면 어느 순간 ‘이게 더 읽기 쉽네’하는 구성이 나온다.

 

2. 수식어를 절제한다:

수식은 ‘꾸민다’는 말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불필요하다는 뜻이다. ‘의’자와 ‘것’자를 절제한다: 의와 것을 남발하면 리듬이 끊어진다. 쓸 때는 모르지만 두 글자를 안 쓴 문장과 쓴 문장을 비교하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3. 입말과 리듬:

글은 무조건 입말이다. 왜? 말을 문자로 옮기면 글이 되니까. 글이란 문자로 기록한 말이니까.

 

4. 단문과 리듬:

리듬 있는 문장을 쓰려면 단문이 좋다. 리듬이 있다면 문장이 길어도 상관이 없다. 비결은 리듬에 있다.

 

5. 상투적인 표현-사비유 금지:

사비유는 죽은 비유를 뜻한다. 처음에 그 표현을 만들었던 사람은 주변 사람들한테 칭찬을 받았겠지만 이제는 개나 소나 다 알고 있는 표현을 혼자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네 라는 반응이 나올듯한 표현들을 총괄해서 하는 말이다.

- 「기자의 글쓰기」 ‘한국말의 특성: 외형률과 리듬  中’

 

 

우리들이 글에 담아야 할 것은 주장이 아니라 팩트다. 거짓말 가운데 제일 좋은 거짓말은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그럴듯한 거짓말은 왜 그럴듯할까? 구체적일수록 그럴듯하다.

‘옛날옛날’이 아니라 ‘서기 1821년 6월 7일에’라고 쓴다.

‘두 시쯤’이 아니라 ‘2시 11분’이라고 쓴다.

‘강원도 두메산골’이라고 쓰지 말고 ‘1993년에 전기가 들어온 강원도 화천군 파로호변 비수구미마을’이라고 쓴다.

‘20대 청년’이 아니라 ‘스물다섯 살 먹은 키 큰 대학 졸업생 김수미’라고 쓴다. p 130

 

원래 주장을 하기 위해 사람들은 글을 쓴다. 당연하다. 아무리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 글을 쓰더라도 필자가 가지는 주관적인 관점을 벗어날 수 없다. 소설가도 자기 원하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소설을 쓴다. 수필가가 수필을 쓰는 이유도 똑같다. 기업 직원이 쓰는 보고서에도 목적이 있다. 모든 글, 아니 모든 창작물은 그런 법이다. 자기가 갖고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러이러한 팩트, 이러이러한 재료를 버무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영화를 찍는다. 이 팩트가 제대로 수집되지 않는 상태에서 글을 쓰게 되면 오로지 주장밖에 보이지 않는다. p 131

 

 

잊지말자. 좋은 글은 짧고 쉽고, 팩트를 기반으로 한다. 회사 업무 메일이나 기안문만 이렇게 쓸 게 아니라, 내 공간인 블로그에서도(!!!) 제발 좀 이 원칙들을 잊지말자. 

 

 

 

 

 

 

기자님이 말하길, 이 책은 딱 두 번 읽고 버리라는데, 음. 나...나에겐 어려운 일일지도^_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파랑길 인문 기행 - 동해 바닷가 길에서 만난 우리 역사 이야기
신정일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은 육아때문에 여행을 못하고 있지만, 난 본투비 여행러다.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국내일주다보니, 남들보다 더 많이 더 자주 돌아다닌 면도 있다. 지금까지 돌아다닌 지역을 지도에 체크하면 우리나라(정확히는 남한)의 약 80%정도는 다 찍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이런 성향이 어디서 왔는고 하면,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나를 차에 타우고 전 지역을 쏘다닌 부친의 영향이 오백프로라고 할 수 있다.



평생을 운전을 하신 내 아버지는 휴가철이 되면 우리가족을 태우고 여행을 다녔다. 정확히는 업무로 인해 지방을 내려갈때, 우리 가족 모두 같이 가는 거라고 해야하나? 아버지 일이 끝나면 그때부터 여행 시작이었다. 이렇게 여행을 떠나게되면, 도착지는 대부분 동해였다. 아버지 차로 동해 해안길을 달리며 차에서 먹고자고 하면서 말이다. 지금 기준으로 따지자면 일종의 캠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튼, 그렇게 해안길 여행을 자주 하면서, 동해안을 제집 드나들듯이 다녔다.



그래서 그런가? 다 커서는 신랑과 둘이서 소소한 짐만 꾸려서 해안 여행을 자주 했다. 둘다 직장인이라 장거리 여행은 불가능하기에, 해안길 여행을 할 때는 지역 몇 개씩을 묶어서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여행은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이런식으로 여행을 다녔다. 예컨데 동해로 치면 이번 여행 때는 부산부터 경주까지, 다음 여행은 (강원)고성에서 속초까지 뭐 이런 식으로! 그렇게 해안길 여행을 하다보니 어느새 서해안, 동해안 길은 완전히 섭렵했다. 아, 물론 트레킹이 아니라 자동차 여행이었지만.



요즘은 서해안은 서파랑길, 동해안은 동파랑길이라고 해안 트레킹 코스가 개발되었는데, 내가 여행을 한창 다닐때만해도 이런 제대로 된 트레킹 코스가 없었다. 그저 ‘무슨무슨 해안산책로’ 이런 형식이었을뿐. 그래서 조금 아쉬운면도 있다. 왜 해파랑길 트레킹코스는 내가 한창 여행다닐 때는 없었나!!!! 근데 이게 또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해파랑길(동파랑길, 서파랑길) 트레킹코스가 생겨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책의 저자 덕분이었다는 것. 허허허허. 내가 여행을 조금 더 늦게다녔어야 했나 싶기도 하고...하하...ㅋㅋ






이렇게 TMI가 길었던 이유는 『해파랑길 인문기행』 이라는 여행에세이를 리뷰하기 위함이다. 여름휴가책으로도 손색이 없는 이 책은 말그대로 파란바다가 넘실대는 동해안! 해파랑길 트레킹코스를 완주하는 여행에세이다. 거기다가! 그냥 여행에세이도 아니고 무려 ‘인문기행’ 여행책이다. 동해안 해파랑길을 그냥 무작정 걷는게 아니라, 발길이 닿는 그 곳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어우러져있는 것이다. 완전 내 여행취향이랑 딱 맞는 여행에세이가 아닌가!



난 동해안 지역은 단 한 군데도 빼먹지 않고 다 섭렵을 하고 왔던 경험이 있고, 지금은 해파랑길로 명명된, 당시에는 그저 해안산책로였던 트레킹코스를 꽤 여러구간 걷고 오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기대되었으며, 실제로 이 책은 내 기대에 오백프로 부응했다. 분명 내가 다녀왔던 지역이고, 내가 두 발로 걸었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모르는 역사적 지식들이 저렇게나 많다니! 역사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나도 꽤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물론 일반인에 비해서만), 역시나 나는 풋내기였다. 이 책을 들고 다시 동해안 여행을 다녀야 할 판. 하하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동해안은 정말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강원)고성이나 삼척, 영덕, 부산 앞 바다는 똑같이 ‘동해’라 불리우는 같은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른 맛과 멋을 가지고 있기에 어디를 가든 특색있는 동해여행을 할 수가 있다. 이번 여름휴가 여행지로 동해안에 인접한 그 어떤 지역을 가든지간에,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을 들고가야 그 재미가 보장된다!




 




이 여행에세이 속 저자의 동해안 해파랑길 트레킹은 부산에서 시작해서, 휴전선이 있는 강원도 고성에서 끝난다. 물론 어떠한 한 시점에 이 기나긴 해안길을 정복한 건 아니다. 내 여행방식이 그랬던 것 처럼, 저자 역시도 일정기간동안 일정구간을 걸었다. 그렇게 동해안 해파랑길 트레킹을 완주한 것이다.



아래는 저자의 첫번째 트레킹 부산에서 시작해서 울진에서 끝나는 9일간의 첫번째 여정 중 일부다.



부산부터 울진까지



 


이곳 연화리 일대에서 나는 미역이 명물이다. 기장 미역은 다른 어느 바다에서 채취한 것에 비해 잎이 두텁고 넓으며 파릇한 빛깔과 윤기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이 지역 돌미역이 『동국여지승람』의 「동래현」과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임금의 밥상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이곳에 곽전이라고 불리던 유명한 미역밭을 두어 직접 관리했다. (…) 당나라 사람인 서견은 자신의 저서 『초학기』에 “고구려인들은 고래가 몸을 풀고 미역을 뜯어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따라 미역국을 해산 식품으로 먹는다”라고 고구려 사람들의 독특한 해산 풍습을 기록했다. p 025~026



죽성리에는 죽성리 왜성이 있다. 마을 이름을 따서 ‘두모포 왜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서울에서 후퇴한 왜군이 장기전 태세를 갖추기 위해 쌓은 성 중 하나다. 당시 동원된 인부 수만 해도 약 3만 3천명 정도이다. 이 왜성에 올라서면 두모포만 전체를 아우르는 해안 절경을 조망할 수 있다. 이 성에 머물렀던 왜군들은 임진왜란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특히 기장과 경남 일대 도공들이 이 왜성으로 꿀려와 결국 왜군들과 함께 일본까지 가게 되었다고 한다. p 027



기장미역이 부산에 특산품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나, 기장미역이 무려 고구려 때 부터(!!!) 유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이정도면 지자체의 특산품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특산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건 뭐. 천 년을 훌쩍 넘는 미역 사랑이 아닌가?!




 


 


동방섬, 새뜸섬, 고래 아구리섬, 질무섬 등 크고 작은 섬들에 시선을 두고 걷다 보니 울산시 구류동이다.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떤 하곡 사람 박윤웅에 얽힌 일화가 많은 지역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박윤웅은 신라 54대 경명왕의 후손으로, 신라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왕건의 고려 창건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한 공을 높이 평가한 왕건은 박윤웅의 고향을 부로 승격시키고, 구류동 앞바다의 소출이 좋은 몇 개의 바위에서 채취하는 미역 일부를 박윤웅에게 세금처럼 바치도록 했다. 지금도 그곳 바위에는 ‘윤웅’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p 047



우리의 발길은 울산광역시의 마지막 마을인 북구 신명동에 이른다. 이 지역에는 신라시대 박제상에 관한 전설이 남아있다. (…) 그의 아내와 딸들은율포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산마루 치술령에 올라 하염없이 그를 기다렸으나, 박제상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높은 바위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렇게 뛰어내린 그들은 전설의 새가 되었다고 하는데, 아내는 치조라는 새가 되도 딸은 술조라는 새가 되어 날아갔다고 한다. 그들이 매일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박제상을 기다렸다는 산마루가 경북 경주시 외동읍 내동면과 경상남도의 경계지점에 있는 치술령이다. 그리고 모녀가 서서 기다렸다고 알려져 있는 망부석이 있다. 뒷날 사람들은 박제상의 아내를 치술신모라고 부르며 치술령 기슭에 신모사라는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냈는데…. p 049



부산에서 시작한 미역이야기는 울산에서도 ing!!



신라시대 박제상 이야기는 워낙에 유명한지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 여신 중 하나인 치술신모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개를 엮어볼 생각은 해 본적이 없었지? 물론 현재는 신모사도 사라지고, 제사도 사라졌다지만. 박제상에 대한 이야기와 치술신모에 대한 이야기의 비중을 두고 보았을때, 대체로 박제상만 알고 그의 부인인 치술신모에 대한 내용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게 조금은 씁쓸하다.






 


읍천리에서 세상을 놀라게 할 천연기념물이자 명승이 발견된 것은 2011년이었다. 내가 2007년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19일 동안 걸을 때는 근처 군부대에서 ‘민간인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표지판을 세워놓아 들어가지 못하고, 7번 국도로 돌아갔다. 그 뒤 『동해 바닷가 길을 걷다』라는 책을 펴낸 후에 문화체육관광부에 나라 안에서 제일 긴 도보 답사길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 길이 이후에 ‘해파랑길’로 명명되면서 나라 안에 아름다운 길로 자리잡았다. 그 길을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에서 다시 걷게 된 2011년 봄, 경주시 양남면 읍천항을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초소에 군인들이 없어서 들어갔는데, 유레카!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p 054



그 뒤 읍천리의 주상절리는 국가 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12년에 문화재청에서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지정했다. 전국의 수많은 사진작가의 사진 속에 담겼으며, 지금은 그 일대가 대처가 되어서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다. 중국 귀주성의 만봉림이나 장가계가 뒤늦게야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과 같이 해파랑길을 제안한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때문에 알려진 명승이다. p 055



봉길리 하봉 부근 소나무 우거진 숲길로 들어서 한참을 걸으니 수제마을이다. 봉길리 북쪽 수제마을은 예부터 가뭄이 들면 경주부윤이 마을 북쪽 해변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마을 동쪽으로 약 100m거리 바다에 대왕암이라고 부르는 문무왕 수증릉이 있다. 신라 제30대 문무왕릉은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p 057



경주시 감포읍 이견대 아래 위치한 대본리, 그 남쪽으로 큰 나루가 있었고, 동북쪽 독촌산에는 봉우재가 있는데 그 재 밑에 ‘용의 돌’이라는 바위가 있다. 옛날에 신문왕이 이견대에서 동해를 바라보다가 그 바위에서 용이 오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누정 조’에 이견대에 관한 내용이 실려있다. p 061



읍천리 주상절리!!! 진짜 저 주상절리는 너무나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꽤 오랫동안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었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얼마나 많은 천연기념물이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라는 제한으로 인해 숨겨져있을까? 정부 차원에서도 몰랐고, 이 책의 저자가 발견하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서 천연기념물로 지정까지 할 정도이니.



경주 문무왕릉과 이견대, 감은사지는 더 이상 모르는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왠걸. 그럼에도 모르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 진짜 경주 역사 이야기는 정말 까도 까도 끝이 없구나!




 


뇌성산 뒤쪽에 있는 성동리 하성마을은 영천 황보씨 마을이다. 1454년 단종 2년에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당시 영의정이던 황보인의 삼대, 곧 그 자신과 그의 후손 다섯 명이 수양대군의 칼날에 희생된다. 그때 황보인 집안의 늙은 여종이 황보인의 젖먹이 손자를 물동이 안에 감춰서 도망친 뒤 이 땅 동쪽 끝, 구룡포에 들어와 살며 황보 씨의 맥을 잇고 마을도 일군 것이다. 마을 남쪽으로 광남서원은 황보인과 그의 아들 석, 흠 형제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순조 31년에 사액을 받았고, 광무 4년인 1900년에 복원한 뒤 1941년에 복설했다. p 073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상해에서 자객 홍종우에게 피살된 그의 시신은 청나라 정부를 통해 국내로 이송되어 양화진에서 육시처참형을 당한다. 그의 왼쪽 팔이 장기곶(호미곶) 앞바다에 내던져졌는데, 그때가 동학농민혁명이 한창이었던 1894년 갑오년 5월이었다. 이곳을 투기 장소로 정한 이유는 동해로 돌출되어 있는 이곳 지형에 역모의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p 083



포항의 향토연구가 박일천 씨는 연오랑과 세오녀로 상징되는 이 집단을 신라 초기 ‘근기국’으로 불리던 부족국가라고 설명했다. 진나라 멸망 뒤에 동쪽으로 이주해 온 세력 중의 하나로, 이들 부족에서 베 짜는 기술을 신라에 전해주었으나 신라가 강성해지자 무리를 지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지금도 영일 지방에는 줄줄이 이어 수평선 위를 지나가는 행렬을 지칭해서 “왜배 가는 것 같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아득한 옛날 이 부족들이 가축과 가재도구를 싣고 수평선 저쪽으로 왜 나라를 향해 줄줄이 사라져 가던 모습에서 유래된 표현이라고 한다. p 088



현재 포스코가 자리 잡은 곳에 대송정으로 유명한 조선시대의 역, 대송역이 있었다. 대송정은 동쪽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소나무를 많이 심어 울창한 숲을 이루었고, 그 숲 앞에 흰 모래밭이 있으니 경관 좋은 해수욕장을 이루었으리라. 하지만 공업단지 조성으로 그 풍광은 사라졌고, 동촌 남쪽으로 부련사 라는 절집도 사라진 지 오래다. 포스코가 들어서 있는 포항시 남구 송내동 주진리에 조선시대 행인들의 편의를 제공하던 주진원이 있었으나, 그 역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p 091



난 분명 포항 호미곶에 가서 상생의 손 동상을 보고 왔다. 그때는 약간 흉물(?)이라는 느낌 말고는 딱히 별 생각이 없었더랬다. 그런데.. 포항 호미곶에 김옥균의 왼쪽 팔이 버려졌다니? 이 사실을 알고 나니, 호미곶 상생의 손 동상이 좀 다르게 보이는 건 나만 그런가. 왜.....왜 하필 호미곶에 버려진게 김옥균의 팔인가;;;;; 다리도 아니고 목도 아니고, 이거 참 묘한 우연이네?




 


영덕 지방에서 가장 큰 항구인 강구항은 경치가 매우 아름답기도 하지만, 영덕 대게로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매년 11월부터 이듬해 4-5월까지 이어지는 대게 철에는 수많은 대게잡이 배들이 항구로 집결하고 위판장이 운영되며, 일명 ‘대게 거리’로도 불리는 식당가도 3km나 이어져 있다. p 112



동해 바닷가 어촌인 영덕읍 노물리에서는 지금 미역, 조개, 새우 등이 주로 잡히지만, 조선시대에는 물개를 잡아 나라에 진상했다고 한다. 방어가 많이 잡혔다는 방아짬, 돌매라는 사람이 미역을 따던 돌매방우, 상어 비슷한 물고기인 지투가 많이 잡히던 지투짬 등 노물리의 아름다운 옛 지명을 통해 이 지역에 해산물 종류가 다양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풍무한 어종 때문이었는지, 궁벽진 이곳까지 광대들이 자주 찾아들어서 광대에 얽힌 지명도 많이 남아있다. 광대가 줄을 타고 재주를 부렸다는 강대 줄탄모기 고개, 광대들이 가무를 즐기며 놀았다는 깨뭇개도 있다. p 115



지명의 유래로 그 지역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걸 좋아라하는 편인데, 이야. 영덕 노물리의 지명은 정말 놀랍다. 바닷가니까 해산물 종류가 다양하고, 그에 따른 지명이 생성된건 이해가 되는데.......광대라니! 전혀 생각치 못한 지명 유래라서 그런가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 광대로 인한 지명 유래가 생길정도면, 영덕 해안가 지역이 꽤나 상업적으로(?) 발달했고, 시장도 발달했었다라는 사실도 유추할 수 있고. 



이래서 사람은 어딜 가서 뭘 보든, 조금이라도 더 알고 봐야해!





 


대진항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대진 해수욕장이다. 이곳은 해안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 가운데 특히 관어대 일출이 빼어나다. 관어대는 영해면 괴시리에 위치한 조망대다. 그려 말 문신 목은 이색이 외가인 호지마을에 왔다가 바닷가 상대산에 올랐는데 넓은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바닷물이 아주 맑아서 물고기가 뛰노는 모습까지 보일 정도였다고한다. 그 모습에 이색은 이 산을 관어대라 이름 붙이고 글을 남겼다. (…) 이색이 살았던 괴시리는 원래 호지마 또는 호지촌이라고 부르던 곳이었으나,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온 이색이 이곳 지형이 중국 괴시와 흡사하다며 붙인 지명이라 한다. p 127



대진항에서 덕천, 고래불로 이어지는 해수욕장. 바다에서 바다로 이어진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어보자. (…) 한국의 포경지, 고래불 해수욕장. 고래불은 병곡면 병곡리에서 휘리리까지 동해 바다를 따라 약 4km에 이르는 긴 모래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 예전에 고래를 잡았다고 한다. p 128



금곡 북쪽으로 서낭당이 있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칠보산 토지지신 골매기님’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데, 소원 성취에 매우 영검하다고 한다. 유금남서쪽으로 선덕여왕 시절 창건된 유금사라는 사찰이 있고, 유금 남쪽 도리봉 위로 마고할미 집터도 있다. 경상북도와 강원도 사이에 도계를 이루는 지경 마을을 지나 울진군 후포면에 이른다. 드디어 첫 번째 일정긴 1구간 여정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온 몸이 아프다. p 130



목은 이색의 흔적을 울진에서 찾게 될 줄은 또 몰랐다. 대체 난 울진에서 뭘 보고 온건지..ㅋㅋㅋ 울진 대게만 먹고 왔나. 허허 이거 참. 나도 나름 울진에서 여러곳 답사도 하고 그랬는데^_T. 더군다나 다른 지역이긴하지만 목은 이색의 흔적이 있는 곳도 찾아 다니긴 했었는데. 정작 울진은 생각도 못했다. 심지어 목은 이색이 지명까지 바꾼 곳인데..허허허..



내가 가봤던 부산에서 울진까지, 저자가 걸었던 부산에서 울진까지의 갭이..너..너무 크니까 ㅋㅋㅋ 이거 뭐 정말 내가 가봤던 곳이라고는 생각치 못하겠는데? 어휴, 안되겠다. 이번 여름은 글렀지만, 내년 여름휴가는 뿡뿡이와 함께 이 책을 들고 동해 여행을 떠나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