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독서 편식은 꽤 알아주는 편이다. 그렇다고 아예 선호하는 장르만 읽는가? 그건 아니다. 넓은 사고와 문제의식 고취를 위해서, 선호하지 않는 분야의 책을 읽기도 한다. 선호하지 않는 분야로는 자기계발책이나 경제, 심리학책 등이 그렇다. 뭐랄까, 그냥 좀 거리를 두게 되는 책이다. 물론 읽지도 않고 이렇게 독서 편식을 하게 된 건 아니다.



대충 내가 사회 초년생일 때, 지금과는 달리 자기계발책을 꽤 읽었다. 뭉퉁그려서 자기계발책이라고는 하지만, 자기계발서도 세부적으로 ‘대화, 처세, 성공, 시간관리, 자기관리, 취업, 자기개발’ 등 여러 하위 카테고리가 있다. 사회에 발을 처음 내민 초년생인 나로써는, 학교와는 다른 사회생활에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자기계발책을 읽는게 필요했다. 헌데 뭐랄까? 책을 다 읽은 후 머리 속을 정리해보면 항상 같은 생각만 남았다. ‘전에 읽은 책이랑 비슷한 내용이네?’, ‘자전적인 내용이 너무 많은데?’ 뭐 이런 느낌이랄까. 결과적으로 머리속에 남는 알맹이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경험은 나를 자기계발책을 선호하지 않는, 독서편식가로 만들었다.



그럼 자기계발책은 나에게 도움이 전혀 되지 않았는가? 아니, 그건 또 아니다. 그저 내가 자기계발책을 처음 읽었을 때, 읽을 타이밍이 안맞았고, 책을 고르는 눈이 나빴을 뿐이었다. 외려 사회에 찌들대로 찌든 지금 나에게 자기계발책(재테크나 대화, 시관관리 등)은 꽤 도움이 된다. 아마 자기계발책을 고르는 안목(?)이 생긴 것도 있고, 어떤 타이밍에 읽으면 되는지 알게되서 그런게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내가 생각한, 자기계발책을 읽는 방법은 이렇다. 자기계발책도 하위 카테고리가 세분화되어있기에, 본인에게 정말 필요한 분야가 어떤건지 정확히 파악한다. 예컨데 자기관리(시간관리)가 안되는 사람이라면, 자기관리에 대한 자기계발서를 선택하면 된다. 이렇게까지 자기계발책에 대한 견해를 밝힌건, 오늘 리뷰하는 책이 자기계발서라서다.




책 제목은 『필연적 편협』. 


이 책을 읽어본 사람으로써, 이 책 하위 카테고리는 ‘자기관리 및 성공’ 에 속하지 않나 싶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이라는 개념은 ‘높은 소득’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성공’하려면 경제나 제테크에 관심이 필요하고, 나아가서 그에 대한 전반적인 개념과 지식이 필요한 상황이다. 아마도 저자는 이에 착안하여, 경제 및 제테크에 대한 내용을 주제로 이 책을 쓴게 아닐까 싶다. 다만 책 내용을 전반적으로 봤을 땐 재테크보다 자기관리 비중이 높아보였다.



책 속 자기관리 내용 중에는 이해를 뒷받침하기 위한 예시가 많았다. 역사 속 사건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문제 등 많은 예시가 있었는데, 이는 그만큼 저자가 많은 책을 읽었고, 사회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저자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이 책을 썼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다만, 단락과 단락 연결이 매끄럽지 않거나, 내용이 조금 늘어진다는 느낌도 다소 있었다. 



아래에 책 내용을 일부 발췌하였다. 다만 내가 읽기에는 문장 일부가 매끄럽지 않다고 느껴져서, 일부 생략하고 다듬었다.




인생은 우주에 비해 매우 짧으며, 짧은 인생 속에서 사람은 더 간사하게 행동하고 편리함에 빠르게 적응하는 경향이 있다. 즉 사람은 생각보다 열심히 살지 않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열심히 산다면 계급을 이동할 가능성이 약간 남아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다른나라보다 상대적으로 계급 이동이 용이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 아는 만큼 보이고 이러한 차이가 빈부격차를 만들어낸다. 이런 이유로 아직까지 우리나라만큼 살기 좋은 나라는 없다. 즉 무엇이든 하라. p 057 ~ 058



강렬한 뉴스와 진실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공포 본능에 따라 세계를 왜곡하여 바라보기도 하는데, 이 왜곡은 현실적이고 균형있는 인식 형성에 방해된다. 주요 뉴스 이면과 진실을 들여다보고, 공포 본능이 세계를 왜곡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기여하는지 인식하여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p 073



사회에서 왼손잡이 비율이 가장 높은 분야가 바로 스포츠계다. 실제로 야구판에서 “좌완 파이어볼러는 지옥에서라도 데리고 온다”라는 말이 이으며, 야구뿐만 아니라 펜싱, 탁구, 테니스처럼 대결적인 요소가 있는 모든 스포츠는 왼손잡이가 유리해 일상 영역과 달리 왼손잡이가 귀족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 경쟁 속에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언제나 다수보다는 소수에게 기회 확율이 많았다. 즉 우리는 소수가 되자. 소수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p 084



우리는 최고의 투자는 스스로의 성장이라는 워렌버핏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워렌버핏 말은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게 ‘경험’이다. 부모님이 주식이나 부동산을 사라고 조언하지 않고, 공부를 권유하는 이유는 지식과 학습을 통해 스스로 능력과 지혜를 키우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p 110


근로소득과 자본소득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장벽을 넘은 후에 ‘월급’을 정의해야한다. 월급은 근로소득의 연속이자, 지금까지 해온 공부에 대한 보상이다. 하지만 월급이라는 보상을 받게 되면 그 틀에 갇혀 월급이라는 덫에 빠지게 된다. 월급은 숫자로 나타나는데, 이 숫자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p 064



월급을 평가하지 말고, 더 큰 시야를 가져야 한다. 월급은 그저 근로소득 중 하나라는 시각이 필요하다. 300만 원을 받는 사람보다 500만 원을 받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풍족하며 삶의 질이 높을 수 있다지만, 이는 상대적인 차이이다. 중요한 건 어느 쪽이 더 빨리 깨달음을 얻어 근로소득에서 자본소득으로 나아가느냐는 점이다. p 065



투자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투자자본과 위험요소, 투자 회수자본을 오로지 돈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투자자본을 돈으로만 생각하면 안된다. 투자자본은 돈 뿐만 아니라 시간, 건강, 기회비용 등 다양한 자원이 포함된다.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하는 것도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투자의 한 형태이며, 이러한 투자는 미래에 더 큰 가치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다. 공부를 통해 발전된 능력과 지식은 투자회수 자본으로 이어지게 된다. p 111



재테크나 투자는 견고한 본질과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분야다. 성공적인 재테크는 상승장에 반짝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시기에도 노력하고 배우는 것이다. 실패를 극복하는 인내심과 노력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고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재료다. 따라서 실패를 극복하는데 필요한 자기 관리와 인내심을 기르는 것은 중요하다. p 116



투자는 불확실성이 동반된다. 따라서 기다림과 인내를 배우며 차분하고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저축, 연말정산을 별 것 아닌 걸로 생각하고, 주식투자를 우선하는 것은 잘못됐다. 재테크 기틀을 잡으려면 저축이나 연말정산이 1순위가 되어야 한다. (…) 저축은 습관과 소비패턴을 파악 및 기록이 중요하다. 자신의 재정 상태와 소비 습관을 파악하여, 어떤 지출이 불필요하고 절약이 가능한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p 117


 

 



『필연적 편협』은 전체적으로 ‘자기관리’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거나, ‘제테크’에 관심은 있으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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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닷 2024-01-01 0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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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시명의 세계 술 기행 - 양조장과 축제장, 명주의 고향을 찾아 떠나다
허시명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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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술을 못마신다. 술은 마시지 못하지만, 지역에서 유명한 술을 사오는 사람. 술은 마시지 못하지만 맥주박물관, 맥주축제, 전통주 양조장을 찾아다니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왜? 술은 마시지 못해도, 그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디를 가든 그 지역에 유명한 전통주가 있다면 양조장 또는 박물관(전시관)을 꼭 방문한다. 내가 여행하는 타이밍에 그 지역에 맥주(전통주)축제가 있으면 꼭 찾아간다. 나는 거기서 이야기를 즐기고, 동행자인 신랑은 술 자체를 즐기고(ㅋㅋㅋ). 그렇게 술을 못하지만, 난 술을 즐겼고 앞으로도 즐길 예정이다.




간혹 나한테 술에 무슨 이야기가 있냐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한다. 술은 역사라고! 

지금 사람들이 흔히 즐겨마시는 소주만 봐도 그렇다. 지금은 초록병에 담겨있는 그저 그런 증류식 소주지만, 그런 소주가 탄생한 이유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주세령, 즉 가양주 제조 금지법이 있었다. 

​​

본디 우리나라 전통주 특징은 ‘가양주’다. 한마디로 집에서 만드는 술이다. 예로부터 제사를 중시했기 때문에, 집에서 직접 술을 빚어서 제사상에 올렸다. 집집마다 술을 빚는 방식은 물론 술 빚는 비법도 달랐다.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가양주 문화가 꽃 피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사실상 가양주 제조를 금지하는 주세령이 공포됐다. 곡물로 만든 술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고, 희석식 소주는 아주 낮은 세금을 매겼다. 일본에서 만드는 희석식 소주를 한반도에서 팔기 위함이었다. 간혹 비밀리에 가양주를 지켜온 집안도 있었다. 하지만 해방이후에도 한국의 주세제도는 바뀌지 않았다. 가양주 문화는 그렇게 사라졌다.

물론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증류식 소주가 없었다는 건 아니다. 널리 알려져있는 원 간섭기 때 한반도에 소주가 유입되었다는 것도 소주의 또 다른 이야기다. 더 나아가면 원나라 이전에도 중국 대륙에서는 동한이나, 당나라, 북송 등 증류 소주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당대 중국과 교류했던 한반도에 있던 여러 국가에도 소주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데 당나라와 긴밀한 관계였던 신라에, 당나라 소주가 유입되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증류식 ‘소주’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줄줄이 사탕이다. 이게 바로 술을 못마시는 내가 술을 즐기는 방식이다! 

이 책 『허시명의 세계 술 기행』은 나 같처럼 술을 못마시는 사람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술을 500%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술에 대한 인문학 책이며, 술을 따라 여행을 한 여행에세이다. 술 마시는 사람들한테는 술자리에서 교양(?)을 뽐낼 수 있는 인문학책으로 추천! 술 못마시는 사람들한테는 나처럼 여행을 다니며 술을 인문학적으로 즐길 수 있는 여행에세이로 추천한다.

술을 가장 풍성하게 소개하고 있는 우리 문헌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다. 『임원경제지』에는 180여개의 술 이름이 등장하는데, 밎는 방법을 소개한 술이 109가지, 효능을 중심으로 소개한 술이 62가지, 그리고 술을 관리하는 요령이 10여 가지 소개되어 있다. 중국 문헌에서 인용한 술도 있지만, 왜례주, 왜미림주와 같은 일본 술 제조법도 소개하고 있다. p 019

한국 술의 전통을 살피려면 중국과 일본의 술 문화를 살피면서 한국적인 특징을 포착해 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쌀이라는 주식으로 술을 빚는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많다. 백제 때부터 조선 시대까지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술 문화가 건너갔다면, 개항이 이후에는 일본인이 한반도에 건너와 식민 수탈을 하면서 일본의 양조 문화가 한반도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 p 019

현재 주세법에서는 술을 탁주, 약주, 청주, 소주, 일반증류주, 과실주, 리큐르, 맥주, 위스키, 브랜디, 기타주류로 나누고 있다. 술의 특징을 구분하는 큰 이유는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기 위해서였다. 조선 시대에는 리큐르, 위슼, 브랜디가 존재하지 않았을 테고, 맥주는 보리술로서 존재했지만 지금 같은 맥주는 아니었고, 과실이 들어간 술도 있었지만 지금의 과실주와 달랐다. 현재 방식의 술 분류는 1909년 일본인 주도로 만들어진 대한제국 주세법에서 세 종류로 구분하면서 시작되었다. p 021

아! 나는 술에 대한 이야기만 즐기는게 아니다. 국/내외 여러 지역에서 술이 주인공인 축제나 맥주공장도 종종 즐기곤 했다. 물론 이 책 『허시명의 세계 술 기행』의 저자처럼 많이는 못가봤지만! 

개인적으로 2017년에 갔었던, 일본 요코하마 독일 맥주축제가 기억에 남는다. 아카렌카 창고를 보러 간거였는데, 운 좋게도 딱 그날 그 곳에서 독일 맥주축제가 개최되었더랬다. 타이밍도 이런 굿 타이밍이! 생애 첫 맥주축제였는데, 정말 술을 못마시는 나였음에도 분위기에 취했다. 안주들도 저렴해서 좋았고. 물론 동행자였던 신랑은 진짜 술을 마시며 즐겼고!

#칭다오맥주 비닐봉지에 맥주를 담아 마실지라도!

칭다오에서 해마다 8월 중순이면 맥주 축제가 열린다. 중국인들은 뜨거운 차를 즐기고, 튀기고 볶은 음식을 즐겨서인지 찬 맥주를 싫어한다. (…) 어쨌든 중국은 이제 세계 최대 맥주 생산국과 최대 소비국가가 되었다. p 130

칭다오 맥주 제조장은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생겨난 식민지 유산이다. 유산이 아니라 잔재인가? 유산이면 지킬 테고 잔재라면 지울텐데, 지키고 있으니 그냥 유산이라고 하자. 독일이 청나라로부터 칭다오를 강압적으로 조차한 것은 1897년 일이고, 독일과 영국이 합작하여 칭다오 맥주 제조장을 세운 것은 1903년 일이다. 양조 설비와 원재료를 독일에서 들여와서 가동했고, 1906년에는 독일 뮌헨 국제 박람회에 출품하여 금상을 받으며 주목받기도 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면서 1916년부터는 일본이 칭다오 맥주를 관리하였다. 1945년 이후에는 중국 정부가 관리하였고, 1993년에는 주식이 상장되어 자본 시장에 나와 국제 기업이 되었다. 1903년의 양조장 건물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곳을 활용하여 100년이 지난 2003년에 맥주 박물관을 만들었다. p 133

박물관을 나오자 온통 맥주거리가 펼쳐졌다. 이곳에서 꼭 맛봐야 할 맥주가 있었으니, 그게 원장 맥주다. 원장 맥주는 양조장에서 살균하지 않고 효모가 살아 있는 상태의 신선한 맥주를 말한다. 원장 맥주는 이곳, 칭다오 맥주 제조장 주변에서만 판다. 유리병이나 캔에 담긴 맥주보다 더 맛이 풍부하고 깊었다. 멀리서 칭다오 맥주 제조장 마을을 찾아오는 이유이자 마을에 맥주집들이 즐비한 이유이기도 했다. 원장 맥주를 포장해서 담아가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데 맥주를 병에 담지 않고, 비닐봉지에 담아 무게를 달아 팔았다. p 136

요즘 칭다오 맥주가 여러모로 부정적인 화제의 중심이다. 뭐, 중국에서 제조하는 음식 위생상태야 뭐 매년 이슈가 되서 새롭지도 않긴 하지만. 여튼! 난 칭다오 맥주가 온리 메이드 인 차이나 인줄 알았다. 뭐랄까, 칭다오 맥주 탄생은 시작부터 온리 중국이라고 생각했달까? 하지만 아니었다. 놀랍게도 칭다오 맥주는 유럽 제국주의 잔재였다. 우리나라를 점령한 희석식 소주가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였듯이.


#뱀술 #미인술 멸망한 유구국의 슬픈 유산

오키나와 나하 공항에 내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서남쪽 해변에 있는 사사히로 주조 주식회사였다. 마사히로 주조는 1883년 처음 창업할 때는 유구왕국의 궁궐이 있던 수리성 부근에 있었다. 양조장을 창업한 이는 궁중 요리사였고, 중간에 전쟁을 치르면서 단절을 겪고 지금의 제조장은 1965년에 설립되었다. 마사히로는 3대 후손의 이름이고, 지금은 4대 후손이 주조소를 운영하고 있다. 아와모리 증류주와 식초를 만드는데 둘 다 시간이 흐를 수록, 숙성의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와 가격이 올라가는 발효 식품이다. p 191

전시장에 들어와 우리는 뱀술을 보고 놀랐다. 뱀이 술병 속에 똬리를 틀고 마치 살아 있는 듯이 담겨 있었다. 한국에서는 동물 술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음성적으로 거래되거나 호사가들이 사사로이 취하는 것이지, 공식 상품으로 유통할 수 없다. 그런데 오키나와에서는 뱀술, 하브주(뱀이 일본어로 ‘헤비)’가 특산주였다. 섬에 뱀이 많아서 그 뱀을 처치하다보니 뱀술을 상품화시켰다고는 하지만 보기에 섬뜩했다. p 193

뱀술을 마시는 법이 특별하다. 뱀술은 빨대로 마셔야 한다. 빨대를 목젖 가까이 대고 잇물에 술이 묻지 않게 마시는 거다. 독이 든 뱀술을 상처난 피부에 바르면 죽을 수도 있지만, 마시면 죽지 않는다고 한다. 어느 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진지하게 내게 해준 이도 있었다. (…) 이렇든 뱀술에는 믿기 어려운,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가 똬리를 틀고 있다. p 195

조선의 눈으로 유구를 추억할 수 있는 술들이 있다. 유구 사신들이 조선을 찾아왔을 때 가져왔던 술로 미인주와 천축주가 있었다.미인주는 세조 8년 유구 사신이 왔을 때 답한 이야기 속에 일일주(하루 만에 빚은 술)로 등장한다. 유구 사신에게 “주초, 염장의 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깨끗이 씻은 쌀로 밥을 지어 누룩에 섞어서 술을 빚으며, 다만 일일주는 15세 처녀가 입을 깨끗이 씻고 밥을 씹어서 술을 빚는데, 그 맛이 기막히게 달다. 초도 또한 쌀로 빚는다. 소금은 바닷물을 끓여서 만든다. 장은 밀을 써서 바로 만든다”라고 하였다. 젊은 여자들이 입으로 밥을 씹어서 빚어 미인주라고 물렸다. p 197

사람의 침 속에는 아밀라제라는 효소가 들어 있어서 곡물을 당화시킬 수 있다. 누룩이나 발효제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젊은 여자들이 항아리에 둘러앉아 곡물을 씹어 항아리에 뱉어 담아 두면 천연 효모가 안착하여 알코올 발효를 시킨다. 오래 두면 알코올 도수가 제법 나오겠지만, 술을 빚은 지 하루만에 마셔서 일일주라고 했으니 도수는 아주 낮았으리라. 술 빚어 하루를 두면 당화는 되지만 알코올 발효는 그다지 이뤄지지 않아 독하지 않고 달달한 맛만 띠게 된다. 오키나와에서 지금은 특별한 행사 때만 미인주를 시연하고 있다. p 197

일본에 강제로 흡수되기 전까지만해도 ‘류큐’라는 독립 국가였던 오키나와. 류큐시절 부터 오키나와인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술 중에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된 미인주 라는 전통주가 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보면 위생적으로 좀(...) 꺼려지는 생산방식이지만, 뭐.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니 몇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오는게 아닐까 싶다. 엄밀히 따지자면 현재의 미인주는 특별한 행사 때만 시연한다고 하니, 일본에서도 위생적으로 꺼려지긴 하는가보다.



#식초 술의 종착역

술의 종착역은 식초다. ‘초醋’의 한자어를 살펴보면 ‘술 주酒’를 뜻하는 변에 ‘저녁 석昔’이 붙어있다. 술의 저녁, 술이 저물면 식초가 된다. 초산균은 알코올을 영양분으로 삼아 초산을 만든다. 그래서 술이 많들어지는 곳에서 좋은 식초도 나온다. 일본 규슈 가고시마는 흑초와 고구마소주로 유명한 동네다. p 231

후쿠야마 마을이 흑초 고장으로 특화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이 고장의 곡물 식초를 흑초라고 부른 것은 1975년 사카모토 양조장에서 처음이라고 하니, 흑초 시대가 열린 건 40년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에도 시대 1800년경부터 이 마을에서 식초를 빚었다고 하니, 그 전통은 200년이 넘었다. 식초를 만들던 전통이 새롭게 해석되어 흑초를 탄생시켰다. p 234

가고시마현은 흑초 붐을 일으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국립대학이나 식품종합연구소와 연계하여 흑초에 관한 과학적 연구 분석 자료를 내놓았다. 홍보관에는 1983년부터 이뤄진 90편의 흑초 연구 논문 목록을 게시해놓고 있었다. 또한 흑초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휴대용에서부터 음료용까지 다양한 상품을 개발해 놓았다. (…) 가고시마 흑초가 유명해진 데는 활화산에서 분출되는 연기, 밭에 놓인 수만 개의 항아리, 3년 숙성된 깊은 맛, 마을의 전통적인 제조법, 흑초의 성분 분석 자료, 흑초 전문 매장과 레스토랑, 다양한 흑초 요리 세리피 개발, 용량이 다른 흑초 상품들, 음료용으로 개발된 과일 흑초 등 다양한 콘텐츠가 기여하고 있었다. 음식을 맛으로 파는 것이 아니라, 복합 문화로 판다는 것을 가고시마 흑초가 잘 보여주고 있었다. p 237

맛있는 술이 나오는 지역은 맛있는 식초를 만들 수 있다. 생각치도 못했다. 더 놀라운건 이를 지자체 관광 활성화로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오래전부터 식초를 빚었던 가고시마현 후쿠야마 마을. 지역인구가 줄고 경제도 현저히 안좋아지자, 그들이 생각해낸 방법이 바로 지역 특산품인 고구마 소주와, 흑초였다. 후쿠야마 마을 사람들과 지자체, 여러 연구기관이 합심한 결과, 흑초 고장이자 유명한 관광지로 이름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일본은 지자체 관광 활성화를 정말 잘하는 나라 중 하나다. 내가 다녀본 일부 일본 소도시를 보면 몸소 느낀다. 이런 점은 우리도 배워야하는데, 항상 나랏밥 먹는 사람들은 외국에서 나쁜 것만 배워오니 원.


다시금 말하지만 술은 마시지 못해도 즐길 수 있다. 왜? 술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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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을 읽다 보면 난세에 영웅난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시기가 있다. 일본은 전국시대(센고쿠시대)가 바로 그 때다. 전국시대는 무로마치 막부 권위가 땅에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시작된다. 막부 권위가 떨어지니, 기존 다이묘(슈고 다이묘)를 통제가 어려워졌다. 그러자 슈고 다이묘에 반하여 각 지역 세력자들이 들고 일어나니, 이른바 센고쿠 다이묘다.



센고쿠 다이묘들은 서로 세력다툼을 하며 영지를 넓혀가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몇몇 유명한 다이묘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전국시대 포문을 열었던, 중심에 있었던, 종지부를 찍었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른바 천하3인이 유명하다. 한국인들은 아무래도 정권 ‘통일’이라는 관점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런가 아닐까 싶다. 뭐, 조금 더 들어간다면 ‘임진왜란, 정유재란’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바라본 경향도 있을거고.




하지만 천하 3인만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바라보기엔 아쉬운점이 너무 많다. 전국시대는 일본 영토 곳곳에서 전투 및 전쟁이 빈번히 발생했던 시기다. 수 많은 전투, 전쟁중에 유명한 일화를 만든 장수들이 한 둘 이 아니다. 심지어 그런 장수들 개개인 서사까지 들어가면 드라마 한, 두 편은 뚝딱일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 전국시대를 배경으로한 드라마가 많이 방영되기도 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전국시대를 풍미했던 인물과 굵직한 전쟁 및 전투 등 통사에 해당되지만.



통사를 벗어나서 전쟁사 관점으로 봤을 때도 일본 전국시대는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특히 전국시대 전쟁, 전투 방식 등은 중세 한반도에 있었던 전쟁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 많아서 알면 알수록 신기한 부분이 많다.




이 책 「센고쿠 전쟁이야기」는 전쟁사 관점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이야기한다. 이름을 날렸던 장수나 일본사 통사가 아닌, 오롯이 전국시대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전국시대에 운용되었던 전쟁 방식이나, 전법, 전쟁 도구에 대한 건 기본이다. 거기다 매 주제마다 일러스트 활용이 높은데, 이는 독자들의 이해를 높이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전법이나 전쟁 도구들은 일러스트가 없었으면 이해가 조금 어려웠지 않았을까 싶고. 예컨데 방어구, 특히 투구 및 마스크의 변천사랑 개인용 깃발이나 장수용 깃발 같은 전쟁도구 변천사는 정말 일러스트가 없었으면 큰일날 뻔했다.



그 뿐만인가?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야비한데?’ 라는 말이 나올만큼 독특한 전쟁 방식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조차 일본 전국시대에서는 전쟁 시 고려되는 수 많은 방식 중 하나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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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과는 별개로 조금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이런 일본의 전쟁 방식이나 당시 일본 정세를 조선의 위정자들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랜기간 평화에 찌들어 바다 건너 옆나라가 어떤 상황인지, 첩보가 올라와도 듣는둥 마는둥. 전국시대가 사실상 끝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직전까지도, 첩보 진위여부를 가릴 생각조차 안하던 조선 위정자들을 생각하면 열불이 터진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배경 중 실질적인 요인으로는 전국시대 온갖 전투로 인해 늘어났던, 전쟁 후에는 잉여가 되버린 남아도는 병력과, 승자 편에 붙어서 가신이 된 장수들에게 줘야할 봉토 문제가 컸으니까.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래에 이 역사책을 읽으면서 새삼 놀랐던(!) 몇몇 내용을 발췌하였다. 일본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역사책이 꽤나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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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군마는 모두 수말이었다는 점을 이용한 기발한 계책도 있다. 하시바 이데요시가 오고성을 공격했을 당시, 허를 찔린 성주 오고 사다노리는 영지 내에서 50마리가 넘는 암말을 모아서 적군을 향해 풀어놓았다. 그러자 하시바 군의 수말이 흥분해 날뛰기 시작했고, 병사들 사이에서는 혼란이 발생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오고의 군대가 돌격하자 하시바 군은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거세라는 관습이 없었기 때문에 성립될 수 있었던 기발한 계략이다. p 028



이가 닌자의 종가인 후지바야시 나가토노가미의 자손, 후지바야시 사무지야스타케가 저술한 『반센슈카이』 등의 인술서에는 닌구를 용도에 따라 ‘등기’, ‘수기’, ‘개기’, ‘괴기, ‘화기’로 분류하고 있다. (…) 저택이나 창고의 문을 열기 위한 도구가 바로 개기다. 가느다란 쇠붙이의 끝부분이 둘로 나뉘어 있는 자물쇠 따개나 빗장을 부수는 데 사용하는 강철제 하마가리 등이 있다. p 048


센고쿠 시대에 사용된 무기 중에서 적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것은 활, 그 다음은 철포였다고 한다. (…) 사실 칼은 다섯 번째다. 네 번째는 놀랍게도 돌이었다. 전장에서 입게 되는 상처 중에서 약 1할이 돌에 맞은 상처였다고 한다. (…) 단순히 손에 들고 던지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전용도구를 사용한다면 더욱 멀리, 더욱 강하게 공격할 수 있다. 줄팔매는 이를 위한 도구다. p 064



센고쿠 시대로 접어들면서 무장들은 도세이구소쿠에 맞게 거울이나 검, 부채, 동식물이나 새, 병풍, 못이나 톱, 악기 등 다양한 디자인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뽐냈다. 다테 마사무네의 트레이드 마크로 유명한 초승달을 본든 거대한 다테모노 역시 좋은 예이다. p 068



도세이쿠소쿠가 아무리 중무장이라해도 공격할 부분은 있다. 전투복인 이상 전투가 벌어졌을 때 착용자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된다. 따라서 백병전용의 도세이구소쿠는 움지이기 쉽게끔 필연적으로 가동부위가 많아질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상대방의 시점에서 본다면 공격하기 좋은 약점이었다. 센고쿠 시대에 탄생한 ‘가이샤 검법’은 이러한 약점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검술이지만 동시에 구소쿠를 착용한 적을 공략하기 위한 검술이기도 했다. p 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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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대장은 각 우마지루시의 위치로 번선 지휘관의 움직임과 전황의 변화를 확인한 뒤 후속지시를 내렸다. (…) 시대가 지남에 따라 멀리서도 한 눈에 알 수 있게끔 화려하게 디자인된 우마지루시가 많이 쓰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우마지루시는 거꾸로 뒤집힌 금 호리병이었는데, 이는 히데요시가 이나바야마성을 함락시켰을 당시에 창끝에 호리병박을 걸었던 사실에서 유래한다. p 088



대군이 전장에서 격돌하는 센고쿠 시대에는 난전 중에 적과 아군을 구별하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아군을 공격하고 만다. 이를 피하기 위해 각 병사들은 다양한 표식을 달아 적과 아군을 구별했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표식이 바로 ‘소데지루시’다. (…) 동시에 이는 적에게 소데지루시를 내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므로 난전 중에 찢겨져 나가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암호를 사용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암호를 잊어버린 탓에 아군에게 살해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p 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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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금표 - 우리는 무엇을 금지당했나?
김희태 지음 / 휴앤스토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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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이웃이신 희태님이 오랜기간 답사 및 연구에 매진하셨던 한국의 금표. 드디어 그 결실이 나왔다. 금표라는 것이 본디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로 인정은 커녕 전문가들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을 정도로 잊혀졌다. 자칭 역사더쿠라고 하는 나조차도 금표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을 뿐더러, 유적지 답사를 가다가 분명히 마주쳤을 금표였음에도 기억하지 못했다. 혹시나 해서 답사 당시 찍었던 사진을 찾아보았더니, 세상에나. 금표 사진이 있었다. 내 손으로 사진까지 찍었음에도 머리속에서 지워진 것 보면, 그만큼 금표에 대한 관심이 없었단 이야기겠지?



금표란 금할 금(禁), 표할 표(標)에서 보듯 행위의 금지를 표식한 것이다. 주로 표셕의 형태나 바위 등에 글자를 새겼는데, 출입과 이요의 제한을 두는 경우가 많기에 금표의 분류 기준은 어떤 행위의 금지냐에 따라 달라진다. 현재까지 확인된 금표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건 산림 관련 금표로, 이 중 나무와 관련된 금표의 비중이 다수를 차지한다. p 014



금표는 특성상 소재지가 산이나 비공개 지역, 험지 및 접근성이 좋지 않은 곳에 있다. 이런 지리적 위치로 인해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잊혀진 것 같고. 잊혀지지니 자연히 사람들도 문화재라 인식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느 순간 유실되어도 유실되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거고. 이래저래 참 아픈 문화재가 아닐 수 없다.



아픈손가락에 더 관심을 갖고 챙겨준다는 말이 있다. 금표가 딱 아픈손가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아픈손가락에 관심을 갖고 보듬은 이가 이 책 「한국의 금표」 저자인 희태님이 될거고. 추측이긴 한데 희태님 전작인 태실 연구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은?



희태님은 이 책을 쓰면서 금표에 대한 역사성을 살리고자 남아있는 사료들 교차 검증 및 금표가 세워진 배경이나 사건도 같이 조명했다. 역사책이다보니 왜곡, 축소 및 과장을 주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행히도 희태님은 ‘아는건 아는대로 쓰고 모르는건 모르는대로 남겨둔다’는 모토 아래 책을 집필하는 분이라,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무엇보다 이 책에 제일 큰 장점은 사진자료라는 것! 모든 금표 사진 자료는 물론 역사적 배경 및 사건 설명에 대한 사진자료까지 전부 실려있다. 접근하기 쉬운 장소부터 시작해서, 접근하기 어려운 험지까지 모든 사진자료가 다 있다. 이를 보다보면 현장을 답사한 희태님이 금표 연구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오죽하면 역사더쿠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 이도학 교수가 추천사에 이런 말을 썼을까?


한국인 가운데 ‘금표’를 들어 보기라도 한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김희태가 고산준령을 넘고 들판을 누비고, 관련 문헌을 뒤적일 때

문화재 전문가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한국의 금표」 이도학 교수 추천사



책 말머리에 따르면 현재까지 전국의 금표를 조사, 연구를 진행한 이는 단 한명도 없다고 한다. 물론 개별 금표에 대한 논문등이 나온 적은 있으나, 이는 연산군 시절 금표라던가 산림청에서 발표한 산림금표 같은 특정한 금표에 한해서다. 한마디로 이 역사책 「한국의 금표」는 전문가들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아니 어쩌면 방대한 양에 눌려 하지못했던 일에 대한 결실이다. 이 역사책 「한국의 금표」는 한국 금표 연구에 대한 기초자료로써도 손색이 없다.




왕실금표: 왕릉 금표, 태실 금표 및 화소, 왕실 관련 장소 금표


왕실금표는 말 그대로 왕실과 관련된 능원이나 태실, 왕의 거주지 등 왕실과 관련된 장소에 세워진 금표다. 다만 지금까지 확인된 유일한 왕릉 금표는 이 책의 저자인 김희태님이 발견한 화성 외금양계비가 유일하다. 태실 금표도 많이 유실되긴 했지만 보은 순조 태실, 영월 철종 원자 용준 태실, 홍성 순종 태실 등에서 일부가 확인되었다.


현 융릉과 건릉의 규모는 과거와 비교해 많은 차이가 있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소(火巢)’와 ‘외금양(外禁養)’에 대해 알아야 한다. 화소란 능이나 태실로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경계 지점에 불에 타기 쉬운 나무와 잡풀 등의 발화요인을 제거한 일종의 완충지대다. 『정조실록』과 『일성록』을 보면 현륭원 바깥으로 외금양을 두었는데, 금양 지역으로 설정되면 나무의 벌채와 농지의 개간, 무덤 조성 등이 금지되었다. p 064




단종의 복권은 유배지였던 영월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흔적이 청령포에 세워진 금표비다. (…) 청령포에 금표비가 세워진 이유는 단종이 왕으로 추복되면서, 청령포는 더 이상 유배지가 아닌 왕이 거처했던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p 107



전주성의 남문 이름이 풍남문이며, 객사의 명칭은 풍패지관이다. 풍남문의 풍(豊)과 풍패지관의 풍패(豊沛)는 한 고조 유방의 패현 풍읍 출신인 것과 관련있다. 즉 제왕의 출신지에 붙여진 요엉로, 이는 전주가 조선왕실의 발상지인 것과 관련이 있다. 전주 자만동 금표가 세워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만동 금표는 자만동 벽화마을 내 골목길에 있는데 (…) 이목대가 있는 자만동 일대를 보호하기 위해 금표를 세운 것으로, 언제 세운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조경단이 정비되던 고종 때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p 121




왕의 거주지 금표로는 단종이 노산군 시절 거주했던 영월 청령포에 세워진 금표와, 조선 왕실의 시조인 전주 이씨 조상 묘역을 보호하기 위한 전주 자만동 금표가 있다.



이 두 금표는 여러 의미로 많은 역사적 이야기를 포함한다. 단종은 모두가 알듯, 삼촌인 세조에게 쫓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당해 죽은 비운의 왕이다. 즉 죽었을 당시만해도 왕이 아닌 ‘노산군’이었다. 따라서 단종이 죽기전까지 살던 영월 청령포도 그저 죄인이 살던 곳이었다. 하지만 숙종 때 그 지위가 복권되면서, 청령포도 덩달아 왕이 살던 곳으로 지위가 급상승했다.


전주 자만동 금표는 또 어떠한가. 조선 후기 족보찾기 열풍이 나라를 휩쓸고 있었다. 인조 때 부터 찾기 시작한 전주 이씨 시조묘 찾기 열풍은 후대 왕들을 거쳐 고종 때 까지 간다. 하지만 당연히 시조묘는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자 고종은 시조묘(가묘)를 조성하고, 시조를 위한 제단을 만들었으니 그게 바로 전주에 있는 조경단이다. 뿐만 아니다. 전주 이목대는 고종이 이성계의 5대조 이안사의 출생지라고 명한 곳이다. 저자의 말처럼 자만동 금표는 정확하게 언제 조성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이 일대가 고종 때 정비되었다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금표 역시 고종 때 세워진 것이 아닐까.


조선 왕실의 권위를 위해 어떻게든 시조묘를 찾고자 혈안이 되었던 고종이니 만큼, 조선 왕실을 이끄는 전주 이씨의 탄생지와 조선 건국자 이성계의 흔적이 있는 일대를 보호하기 위해 금표를 세우지 않았을까.



산림금표: 황장금표, 향탄금표, 삼산봉표, 기타


산림금표는 크게 구분할 때 금강송(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한 황장금표, 향/참나무(향탄목)을 보호하기 위한 향탄금표, 밤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율목봉산, 산삼을 보호하기 위한 산삼봉표 등이 있다. 나무를 보호하는 금표라고 하면, 지금 기준에서는 ‘자연보호’는 당연한 일이라지만 금표까지는 너무했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조선 소나무들의 잔혹사를 모른다면 말이다.


‘금산’은 조선 초기 산림의 보호와 이용을 위해 특별히 사인의 출입과 이용을 제한하기 위해 지정된 산을 뜻한다. 금산의 목적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송금(松禁) 정책인데, 송금은 나라에서 정한 삼금 중 첫번째였다. 그랬기에 소나무를 보호하고, 무단으로 벌채하는 행위를 엄금했으며 이러한 조치들은 금산의 증가로 이어졌다. p 036



산림의 사적 소유가 늘어나면서 그나마 남은 공유지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때문에 공유 자원이 고갈되고 황폐해지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산림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정책적으로 산림에 대한 보호가 필요했다. 그 결과 송금정책을 시작으로 금산, 봉산 등의 제도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또한 산림의 훼손과 황폐화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기에 국가차원에서 나무를 심고 무단으로 베어낼 경우 처벌을 강화하는 등의 대첵을 세웠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산림은 백성들에게 생존수단이었기 때문이다. p 046


조선 백성들에게 소나무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집을 지을 재료가 되고, 난방을 위한 뗄깜이 되며, 어부들이 타는 어선을 만드는 재료였다. 흉작일 때는 껍질을 달여먹기도 했고, 송화가루는 약재로 사용되었다. 백성 뿐만인가? 조선 정부에서도 소나무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궁 및 사찰 건설 재료였고, 해군이 타는 병선 재료였으며, 제사에서 쓰는 향과 숯의 재료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조선의 소나무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에게도 필요하고 중요한 생활자산이었다. 더군다나 나무가 있는 조선의 산은 공유지였으니, 너도나도 들어가서 벌목을 하기 바빴다. 조선 산림 황폐화는 예견된 수순이었다. 오죽하면 조선 문인들 기록속에서도 ‘민둥산’이라는 표현이 확인될까.


심지어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조선의 산지는 완전 초토화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눈앞에 보이는 푸릇푸릇한 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다름아닌 박정희 정부 때 산림법이 제정 및 산림청이 신설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 때 우리나라 환경에 맞는 개량 소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그린벨트가 지정했다. 우리가 아는 식목일 지정 및 식목일에 나무심기 행사가 시작된 것도 이 즈음이다.



조선도 정부에서 금표를 지정하고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했지만, 결국엔 실패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산림살리기는 성공했다. 이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름아닌 생활 자원의 변화였다. 석탄 대중화로 나무 뗄감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시멘트 대중화로 주택 건설 재료가 변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울창한 산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함정이라면 내 눈 앞에 있는 산은 울창하지만, 내 눈에서 벗어난 산들은 지금도 훼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에서 불을 사용하는 무개념들로 인해 산불이 나거나, 도시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산이 깎여나가는 형태로.



양양문화원에 따르면 사진으로 남은 장리 금표의 명문은 ‘연자산 북계칠십리’로 확인된다. 하지만 지난 2002년 태풍 루사의 내습 당시 유실되었다. 원일전리 금표 역시 2008~2009년 사이 새 농촌건설 하천 정비사업 당시 훼손되었다. 마찬가지로 탁본으로 남은 어성전리 금표의 명문은 ‘금표십리’로, 해당 금표도 1984년 군도 확장공사 과정에서 매몰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 또한 사진으로 남은 법수치리 금표의 명문은 ‘금표’로 학인되고 있으며, 지난 1997~1998년 사이 법수치리 용화사 입구 다리 공사과정에서 파괴되었다고 한다. p 132



원주 비로봉 황장금표는 지난 2016년에 발견되었는데, 바위에 ‘황장금표’가 새겨져 있다. 한 장소에서 3곳의 금표가 발견된 사례는 치악산이 유일하며, 과거 치악산 일대가 황장봉산으로 지정되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p 136



그렇게 현대에 들어 야금야금 산림이 훼손되면서, 덩달아 남아있던 산림금표들도 유실되었다. 아주 간혹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산림 금표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사찰금표: 장묘 금지 금표, 왕실 관련 사찰, 사찰 내 행위 금지


유교의 나라 조선, 억불숭유가 기본이었던 조선에서 어떻게 사찰을 보호하는 금표를 세웠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조선 왕실 사람들은 사찰을 좋아했다. 왕 또는 왕비에 따라 불교를 진흥한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 왕릉 및 태실을 만들 때, 왕릉을 수호하는 원당사찰이나 태실을 수호하는 태실수호사찰을 꼭 지정했다. 사찰금표는 그러한 왕실 관련 사찰이나, 해당 사찰 내에서 행위를 금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



안동 봉정사 금혈비는 일주문의 좌측 숲속에 있는데, 기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과 『디지털안동문화대전』 등에 봉정사 금혈비의 존재와 위치를 정확히 언급하고 있다. 지난 2019년에 금혈비로 추정되는 현장을 찾았을 때 비신이 뒤집힌 채 방치되고 있었다. (…) 이번에 금표 고나련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연구소 회원들과 함께 현장을 찾았는데, 3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 과정에서 비석의 명문을 확인하기 위해 뒤집혀 있는 비석을 들자 전면에 새겨진 명문이 눈에 들어왔다. 비석의 명문을 한자씩 확인하다 ‘금혈’ 부분에서 시선이 멈췄다. 봉정사 금혈비인 것이 명확해진 순간이었다. p 201



보은 법주사 일주문을 지나 걷다 보면 속리산사실기비 옆에 두 기의 비석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벽암대사비’와 ‘봉교비’다. 이 중 봉교비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조선시대 법주사 지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 ‘봉교’란 임금이 내린 명령을 받는다는 의미로, ‘금유객제잡역’은 법주사 일대에서 노는 행위를 금지하고 잡역을 면제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p 210



왕이 거주했던 곳도 금표를 세우는 나라였으니, 왕실사찰 역시 금표를 세울 수 있다. 그런데 사찰 내 행위를 제한하는 금표는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역시나 억불숭유가 기본이었던 조선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조선 선비들은(그러니까 유학자들^^) 유람을 자주 떠났다. 가끔 명승지에서 조선 문신들이 글을 세긴 바위를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놀러온 김에 왔다간 흔적을 남긴 경우다. 뭐 여튼, 이렇게 유람하는 선비들은 근처에 사찰이 있으면 찾아가서 행패를 부르는 경우가 잦았다. 오죽하면 사찰을 부시고 그 자리에 서원을 만들 정도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백운동 서원이다. 최초의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 된 그 서원이다. 원래는 ‘숙수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이러한 사례가 많다보니 왕실 사찰의 안전도 보장하기가 힘들어졌을테고, 사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금표를 세운 것이 아닐까.




종교/신앙금표


종교/신앙금표는 사찰금표를 제외한 종교나 민간신앙관련 지역에 세워진 금표다. 단군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참성단이라던가, 무속에서 제일로 취는 최영장군 사당이라던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서 수입된 관왕묘(관우사당)에 세워졌다.



제주 추자도 신묘금지비는 최영 장군 사당에서 봉골레산으로 이어진 제주 올레 18-1코스 구간에 있다. 이곳에 최영장군 사당이 있는 이유는 1323년(공민왕 23년) 제주에서 원 목호인 석질리 등이 난을 일으킨 것과 무관하지 않다. p 247



최영이 반란으로 토벌하러 가는 길에 풍우를 만나 잠시 추자도에 정박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최영은 이곳 주민들에게 어망편법과 고기잡는 방법등을 가르쳤다고 하며, 이에 주민들은 최영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당의 동쪽에는 신묘금지비가 있는데, 이 비석은 최영 장군의 사당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금표의 일종이다. p 248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최영장군이 제주도로 내려간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이야. 제주도로 내려가서 목호들을 토벌하기 전 과정에 이런 일화가 있을 줄은 몰랐다. 개인적으로는 아래 관왕묘를 보호하는 금표보다는, 이렇게 최영사당을 보호하는 금표가 훨씬 가치가 있다고 본다.



숙종시기부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숙종은 관왕묘로 친히 시를 지어 보내고, 심지어 직접 찾아 친제를 행했다. 또한 지방에 있는 안동 관왕묘 정계를 넓히고, 성주 관왕묘를 이건했다. 이후 영조와 정조, 순조, 철종 등을 거치는 동안 관왕묘는 왕이 친제를 행했던 중요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관왕묘 위상이 변화했던 건 당대 명분인 대명의리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인식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 관왕묘에도 금표가 확인되고 있어 주목되는데, 바로 금잡인 표석이다. “잡인의 출입을 금지한다.” 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p 258



현재까지 확인된 금잡인 표석은 ▶서울 공관왕묘 ▶강화 동관제묘 ▶강화 남관제묘 총 3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p 260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관왕묘는 서울, 강화도, 안동, 남원, 완도에 있다. 우리 역사를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관우를 신격시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헌데 왜 관왕묘가 이 땅 곳곳에 있을까? 그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선조가 명나라에 구원요청을 하고, 명나라는 원군을 보냈다. 조선에 도착한 원군들은 자신들이 믿는 관우사당을 한반도 곳곳에 만들었다. 심지어 명나라 군은 선조에게 관왕묘 참배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조금 놀라운건 임진왜란의 승리가 명나라 덕분이라고 명을 떠받치던 선조조차도 관왕묘 참배 만큼은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선조도 하지 않은 걸 숙종이 했다. 심지어 관왕묘 지위를 한껏 높여주었다. 이 배경에는 중원의 패자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고, 청나라가 조선을 공격한 병자호란이 있었다. 이때부터 조선은 망해버린 명나라를 드높이는 이상한 생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야기하면 길어질 뿐더러 분노가 치솟을 것 같으니 각설!!




장소/행위 금지 금표: 사산금표, 사패지금표, 행위금지 금표, 기타


장소 관련 금표는 특정한 장소에 대한 보호를 위해 세운 경우로, 대표적으로 한양도성을 둘러싼 4개의 산(백악산, 목멱산, 낙산, 인왕산)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사산금표’가 있다. 행위 금지 금표로는 연산군 시대 사냥터를 만들기 위해 세운 금표가 대표적이다.



은언군의 묘는 철종의 즉위와 함께 그 위상이 달라졌다. 이유는 은언군의 가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사도세자-은언군-전계대원군-철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철종이 즉위한 뒤 은언군과 전계대원군 추숭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은언군 묘에 제각이 만들어지고 석물이 세워졌으며, 철종이 직접 은언군 묘소를 전배했다. p 273



조금 놀랐던 점은 은언군 묘역 사패 금표다. 은언군은 모반죄로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천주교 박해당시 사사된 정조의 이복형제다. 죄인으로 죽었던 은언군 묘를 지키는 금표. 이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죽었다가 복권된 것과 비슷한 케이스다.



은언군의 손자는 강화도령 이원범. 안동 김씨에 의해 왕이 된 자, 철종이다. 왕이 된 손자는 아비와 조부를 추숭했고, 그 과정에서 은원군 묘에 금표가 세워진 것이다.



기타 금표: 한글 금표, 목적을 알 수 없는 금표



지금까지 금표는 금표라는 문구가 한자로 세겨진 금표였다. 보통 조선시대 세워진 비석은 한자를 세기니 당연한 일이다. 헌데! 한글로 세겨진 금표도 남아있다.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 위치는 이윤탁과 고령 신씨의 묘 옆 비각 안에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한글이 새겨진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기에 한글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다. 해당 비석에서 중요한 부분은 옆면으로, 영비 아래 한글로 30자가 새겨져 있는데, 안내문에 기록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신령한 비다. 쓰러트리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이를 한문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p 303



포천 인흥군 묘계비는 인흥군 묘로 들어가는 길에 있었다. 인흥군은 선조와 정빈 민씨의 소생으로 이름은 영(瑛)이다. 인흥군 묘계비에서 주목해볼 점은 앞선 이윤탁 한글 영비의 사례처럼 한글로 새겨진 경고문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비기 극히 영험하니 생심도 사람이 건드리지 말라.” p 304



영남 남송리 금표는 인곡마을에서 쌍계사지로 가는 길에 있는 감나무밭에 세워져 있다. 길쭉한 형태의 자연석 전면에 ‘금표’ 두 글자만 새겨져 있다. 추가 명문이나 기록들이 확인되지 않기에 해당 금표가 어떤 목적으로 세운 것인지는 알수가 없다. 다만 위치상 국사봉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쌍계사지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p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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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 서가명강 시리즈 14
박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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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를 읽다보면 개인적으로 읽을 때마다 상대적인 분노(?)를 느끼는 구간이 있다. 그게 바로 일본에 흑선(쿠로부네, 서양 증기선)이 상륙했던 시점부터 메이지유신 직후까지다. 분명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해서, 조선의 문물을 배워간 일본이었다. 하지만 저 시기를 기점으로 일본은 급격하게 근대화 노선을 타기 시작했고, 성공적으로 근대화에 이르렀다. 반면 조선은 발전의 시계가 더 뒤로 갔다. 주 권력층이었던 민생을 생각하기는 커녕 노론들은 권력 싸움하느라 바빴다. 그 과정에서 가렴주구한 행태가 빈번히 나타났다. 조선 후기 잦은 민란이 발생한 이유다.



당시 일본 지배층은 도쿠가와 막부 및 사무라이였다. 쉽게 보면 조선의 왕과 신하(양반)들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의 양반네들처럼 도쿠가와 막부 하 사무라이들도 백성들을 부려먹으로 가렴주구 했을 것 같지만, 놀랍게도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도쿠가와 막부 하에서 피지배층인 농민들이, 지배층인 사무라이보다 경제적으로 풍족했다.

지속적인 경제 발전으로 인해 상인들이 부를 축적했다. 농민들도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부를 축적했다. 농민들이 부를 쌓으니, 막부에서 세금을 조금이라도 더 걷을라 치면 바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당시 일본의 농민들은 그정도로 단합이 잘 되어 있었다. 반면에 신분상으로는 지배계층인 사무라이들은 피지배층인 농민, 상인보다 실질적인 생활수준은 매우 낮았다.

당시 일본은 계층에 따라 거주지가 제한되어 있었고, 병농이 분리되어 있었다. 농민들은 농지(대충 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상인은 시장에서 가업을 이어가며 살았으며, 사무라이들은 번주가 부르면 즉각 행동할 수 있도록 도시에서 살았다. 농민들은 농사만 지을 수 있었고, 상인들은 상업만 할 수 있었으며, 사무라이들은 오로지 번주를 지키는 무업이 숙명이었다.

농업 및 상업 활동을 하며 실질적인 부를 챙긴 농민, 상인들과는 달리 사무라이는 주군에게 받는 봉급 외에는 소득이 없었다. 심지어 도시에 거주하다보니, 경제발전으로 오르는 물가상승에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이되,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임노동자들도 경제적 상황이 안좋은 건 매한가지였다.

여기까지가 도쿠가와 막부 당시 일본 상황이다.


보통 사회적인 불만을 가진 계층이 늘어나면, 그 계층에서 개혁이 시작되기 마련이다. 다만 피지배층에서 시작된 개혁은 보통 실패하거나 성공해도 오랜 기간 진통을 앓는다. 하지만 일본 근대화 개혁인 메이지 유신은 달랐다. 안정적으로 시행되었고, 짧은 시간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개혁을 주도한 계층이, 다름아닌 지배계층 사무라이라는 것!

칼 차고 싸움질만 하던 사무라이들이 어떻게, 그 어려운 근대화 개혁을 성공했을까? 그 이유는 다름아닌 거주지 제한에 있었다. 그들은 거주지 제한으로 인해 돈이 없어도 어쩔 수 없이 도시에 살아야만했다. 도시에 살다보니 자연스레 교육을 받을 기회가 늘어났다. 실제로 19세기에 이르면, 이미 많은 사무라이들이 유학(주자학)을 배우거나, 이미 배워서 그 수준이 꽤 높았음을 여러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한마디로 19세기 당시 사무라이는 허리에는 칼을 차고, 책을 읽는 ‘독서하는 사무라이’ 였다.

이뿐만 아니다. 도시에 살다보니, 격변하는 정세를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세계 정보가 도시로 몰려들었다. 제일 큰 변화는 함선과 대포로 무장한 서구열강 증기선이 일본 항구에 나타난 사실이다. 무인이였던 사무라이들은 느꼈을 것이다. 서구와 싸웠을 때, 자신들에겐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심지어 일본에는 해군도 없었다. 이는 개인의 생명 문제가 아니었다. 서구열강이 쳐들어보면, 지금으 일본이라는 나라는 지도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근본적인 위기였다.

서구열강을 향한 위기감을 느낀 ‘독서하는 사무라이’들. 그들은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본을 근대화 시키는데 앞장섰고, 성공시켰다. 그게 바로 메이지 유신이다. 메이지 유신까지 이르게 한 ‘왕정복고(대정봉환)’ 도 역시 ‘독서하는 사무라이’들이 주도했다.

중세를 살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근대를 살아야 하는건 엄청난 변화다. 하지만 일본은 이토록 거대한 변화를 충격없이 받아들였다. 이유는 단 하나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혁을 주도한 ‘사무라이’가 지배계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혁으로 인해 사회질서가 무너질 일이 없고, 처음부터 지배계층이서 시작된 개혁이니 피지배계층은 기존 처럼 수긍하며 따랐던 것이다.

이 책은 메이지 유신을 이야기 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4명에 대해 설명한다. 그들의 이름은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일본사 또는 일본 드라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1~2명 정도는 들어봤을 그들의 이름이다.

요시다 쇼인

‘병학사범’ 쇼인은 이제 검술로는 서양을 상대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해군 육성을 재촉한 것이다. 뒤에 나오겠지만 사카모토 료마도 이 무렵 고향의 난학자에게서 해군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고, 이어 일본 해군 탄생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가쓰 가이슈의 제자가 된다. 사무라이는 원래 해군과는 무관한 존재들이다. 창검술, 기마에 대한 이들의 집착은 거의 중교적인 것이었다. 그만큼 해군 육성이라는 발상의 전환은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쇼인도, 료마도 이런 오랜 전통과 관례를 끊어버리고 해군 양성의 절박성을 바로 간파했다. p 063

요시다 쇼인은 어려서부터 신동이었다. 10대 때 아편전쟁에 대륙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인지하는 것은 물론 서양관련 서적을 탐독하였다. 그가 19세 나이에 번에 올린 「수륙전략」은, 그가 얼마나 서양에 대해 공부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는, 본인조차 땅에 발을 디디고 검을 사용하는 사무라이였음에도 그는 ‘해군’ 양성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이는 전국시대 당시 총검술을 버리고 조총을 선택했던 오다 노부나가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엄청난 발상의 전환이었다.

동시간대 조선은 어땠을까. 강화도령 철종이 즉위하던 무렵이었으며, 세도정치가 한창인 시기이자,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한 행태로 농민들은 죽거나, 도망가거나, 죽지못해 살거나 였다.

그는 옥중에서 죄수들을 상대로 『맹자』를 강의했다. 이 강의는 1855년 12월 보석으로 풀려난 후에도 친족과 찾아오는 청년들을 상대로 자택에서 1857년 6월까지 계속되었고, 그 내용은 저 유명한 『강맹차기』로 정리되었다. (…) 숙부 중 한 명인 다마키 문노신이 이전부터 송하촌숙이라는 사숙을 열고 있었는데, 쇼인의 학생이 날로 늘어나자 그가 이것을 인계했다. 쇼인 송하촌숙의 탄생이다. p 068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근대 일본의 정계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쌍벽을 이루던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송하손축에서 같이 공부하던 사이인데 훗날 정적이 되었다. 이토가 온건파라면 야마가타는 강경파다. (…) 늘 대외강경 노선을 걷던 야마가타는 한국병합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토 한국통감이 보호국하에서 병합으로 나아가는 걸 주저하고 있을 때 그와 가쓰라 내각은 한국병합을 향한 움직임을 강화해나갔다. 이토도 결국 거기에 동의했다. p 099

요시다 쇼인의 일생은 여행 및 감옥으로 갈린다. 당시 막부 하에서는 자신이 속한 번을 떠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나라를 떠나는 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쇼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서 여행을 다녔다. 여행을 다니며 더 넓은 세상을 배우고, 해외 정보를 수집했다. 여행이 끝나면 여행을 떠났다는 이유로 또는 너무 급진개혁파인 이유로 감옥에 들어갔다. 다만 감옥이라고는 해도 사무라이다보니, 옥중에서도 어느정도 생활을 보장받았다. 심지어 쇼인은 옥중에서 죄수들을 상대로 강의를 했고, 출옥한 이후에는 정식으로 사숙을 열었다. 우리말로 바꾸면 대충 서당 또는 서원 느낌인 교육기관이라고 보면 된다.

요시다 쇼인의 강의를 듣기위해 많은 사무라이들이 각지에서 몰려왔다. 그렇게 요시다 쇼인의 제자가 된 사람들 중 일부를 보자. ‘구사카 겐즈이’, ‘다카스기 신사쿠’, ‘시나가와 야지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노무라 야스시’, ‘이리에 구이치’. 흡사 훗날 메이지 정부의 내각 진용을 그대로 복사-붙여넣기 한 느낌이다. 특히 이들 이름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름도 있으니 바로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모두 메이지 정부 내각총리 출신이며, 이토 히로부미는 경술국치 이후 초대 조선통감이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선통감부 부의장이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던, 메이지 정부 요인들은 과거 쇼인이 구상했던 해외팽창을 착수해나갔다.

쇼인의 해외팽창 구상을 들어보자. 북으로는 만주, 훗카이도, 더 나아가 캄차카반도와 오호츠크해, 서로는 조선, 남으로는 류큐, 대만, 필리핀까지 일본의 수중에 넣자는 것이다. “조선을 옛날과 마찬가지로 공납하도록 촉구”하자는 말은 고대에 진구황후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일본서기』의 전설 같은 얘기에 기초한 것인데 당시에 크게 유행했었다. 여기까지도 황당무계하고 무모한 발상인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류큐, 필리핀을 넘어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머릿속에 들어와 있다. 그 장대한 구상에 한편으로는 놀라게 되기도 하지만, 무모하다고밖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생각이다. p 077

▶대동아 공영권

일본·중국·만주를 중축(中軸)으로 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타이·말레이시아·보르네오·네덜란드령 동인도·미얀마·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인도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의 정치적·경제적인 공존·공영을 도모하는 블록화하는 정책.

이는 요시다 쇼인이 생전에 구상하던 해외팽창 계획이자, 요시다 쇼인 사후 메이지 유신을 성공한 쇼인의 제자들이 진행한 프로젝트다. 실제로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정책하에 조선을 비롯한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를 식민지배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물론 미국 건드리는 바람에 대차게 패배했지만.

​​

이 책의 저자 박훈 교수는 프롤로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세계에서 일본을 무시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뿐이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서양인들은 일본 사회를 조금 이상하게 보기는 해도 무시하지는 않으며, 중국인들은 꽤 미워하지만 그렇다고 깔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무시하고 본다. 꼭 알아야 할 지점에서 눈을 감아버린다. 그래서는 안된다. 혹여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일본을 무시한다 해도 우리만큼은 일본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일본을 존경한다 해도 우리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다. - 들어가는 글 中

한일관계는 가위바위보도 지면안된다. 이 말 하나로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일본을 무시하고 미워한다는 사실을. 문제는 ‘알려하지 않고’ 무작정 미워한다는 것이다. 반일이건, 극일이건 일본을 알아야만 가능한 것인데, 일단 우리 기본 전제는 ‘무시’다. 일본 따위를 왜 알아야 하느냐는 전제가 깔린 것이다. 근데.. 과연 그럴까? 정말 일본을 모른채 무작정 미워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더군다나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지금에 말이다.

역대 정권들을 보면 정당에 따라 한 쪽은 무작정 반일, 또 한 쪽은 무작정 친일이었다. 한창 반일이 치솟을 땐 일본의 매우 몰염치한 행위가 있었다. 물론 그에 동조하는 국내 친일세력도 있었다. 심지어 일본의 몰염치는, 정확히 일본 정부의 몰염치는 지금도 진행중이라는게 함정이다. 예컨데 과거사 문제라던가,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에게 왜곡된 역사관을 심어주는 것도 그렇고. 이런 일본의 몰염치한 행위 때문에, 일본을 알아야된다는 생각이 더욱 사라지는 것 같기는 하다만. 근데 또 우리나라 현재 정권은 역대급 친일이라 당황스럽다. 이건뭐 냉탕, 온탕도 아니고 정권마다 이렇게 차이가 있어서야 원.

뭐 여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알아야한다. 빡치면 빡칠수록, 저놈들이 대체 왜그러는지 알아야만 그에 맞는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정답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조금더 바라는게 있다면, 정권 따라 대일관계 기조가 극심하게 바뀌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고. 다른나라는 그렇다치더라도 대일관계에 있어서는 좀 체계적인 방식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적어도 지금처럼 정당따라 난 친일! 난 반일! 이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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