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 한국인이 즐겨먹는 거리음식의 역사 - 음식유래이야기
윤덕노 지음 / 청보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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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이 너무 특이했다. 그래서 그냥 구입했다ㅋㅋㅋㅋㅋ. 진짜 오로지 ‘왜 하필 붕어빵일까?’ 라는 이유 때문에. 




읽고나서야 납득했다. 우리 주변에서 보기 쉬운 먹거리, 쉽게 해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대표해서 ‘붕어빵’을 메인으로 가져다 놨다는 것을. 그러니까 이 책은 쉽게 접할 수 있는 먹거리에 대한 ‘쉬운’ 역사책이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이 먹거리들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 그 궁금증을 아주 쉽게 해결해주는 책이랄까?



‘찐빵, 붕어빵, 소보로빵, 건빵, 마시멜로, 순대, 떡볶이, 주먹밥, 오뎅, 닭발, 호떡, 참깨, 쫄면, 돼지족발, 땅콩버터, 볶음밥, 육회 …….’


지금 나열한 이 음식들 말고도 더 많은 길거리 음식들, 혹은 메인 음식들이 이 책에 전부 들어있다. 



조금은 가슴아픈 사실이 있다면, 생각보다 많은 음식이 일본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역사인 ‘일제강점기’ 35년 동안에 말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건너온 음식은 대체적으로 제과/제빵같은 간식거리 위주이다. 그 외 음식들로 넘어가면 마시멜로처럼 기원전 4천년된 이집트에서 서양을 건너 넘어온 음식도 있고, 순대나 닭발처럼 고대 중국에서 시작된 음식도 있고, 쫄면 처럼 우리나라(인천)에서 발명된 음식도 있다.



<일본에서 건너오다: 붕어빵, 단팥빵, 건빵, 고로케>

붕어빵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형제가 겪어야 했던 수난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가깝게는 60-70년대 산업개발 시대에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던 우리 부모형제들이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밥 대신 끼니를 때웠던 것이 붕어빵이다. 1950년대 한국전쟁을 겪었떤 세대에게는 구호물자로 나눠준 밀가루로 풀 반죽을 해서 풀빵 그러니까 붕어빵을 구어팔아 생계를 이어갔던 생존의 몸부림이 기억으로 담겨있다. 일제강점기 떄 모든 면에서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의 붕어빵은 동전 한닢으로 따듯하게 허기진 속을 달래며 굶주린 배를 달랠 수 있었던 구원의 먹거리였다. p 020



단팥빵의 겉모습만 봐서는 내용물에 통단팥이 들어갔는지 아니면 팥앙금이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다. 해서 통단팥을 넣은 단팥빵에는 겨자씨를 뿌려놓았고, 팥앙금을 넣은 단팥빵에는 참깨를 뿌려 놓았다. 먹는 사람들이 참꺠가 뿌려져 있는지 혹은 겨자씨가 뿌려져 있는지를 보고 입맛에 따라 골라 먹을 수 있도록 표시를 했던 것이다. p 034



지금 우리가 먹는 단팥빵을 보면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 있는데 소금에 절인 벚꽃 열매를 놓기 위한 흔적이라고 한다. 또한 일왕이 단팥빵을 처음 먹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일본에서는 4월 4일을 단팥빵의 날로 기념한다. p 036



일본에서 다양한 일본식 빵이 만들어진 것은 빵이라는 낯선 음식에 대한 호기심도 강했지만, 서양음식을 통해 왜소한 일본인의 체형을 서구인처럼 키우려는 노력도 있었다. 아시아를 벗어난 일본을 유럽화 하려는 탈아입구의 일환이다. p 041



건빵은 한국군에서만 보급할 것 같고 한국군이 만든 독창적인 전투식량 같지만 사실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이 만든 결과물이다. 군국주의 일본에서 건빵을 개발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빠르게 발전했으며, 태평양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 때 제국주의 일본군대에 전면적으로 보급되면서 전투용 비상식량으로 자리잡았다. p 053



크로켓은 고로케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졌는데, 일본에서는 1872년 포테이토 고로케 만드는 법이 기록으로 나오니까 상당히 빨리 전해진 셈이다. p 064



위에 언급한 먹거리는 전부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크림빵, 소보로빵 등 우리 제과점에서 흔히 만나는 기본적인 빵들, 그러니까 유럽 빵집에서는 만나기 힘든 그런 빵들은 대게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주로 채식을 위주로 식사를 해왔다. 그러다보니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일본인이 유독 왜소했다. 메이지 유신(근대화 정책) 이후, 정부에서는 육류 섭취를 적극 권장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일본인의 체형을 서구인처럼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찰나, 생각해된 방법이 바로 서양의 ‘빵’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서양식 빵은 딱딱하거나 혹은 달지 않다. 여기서 또다시 고안된 게, 서양식 빵을 일본인의 입맛에 맞출 수 있게끔 개발하는 거였다. 조금 더 부드럽게, 조금 더 달게. 그렇게 개발된 빵들이 위에 나온 빵들이다. 그렇게 개발된 일본식 빵들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반도로 들어왔다다. 일본인이 한반도에 제과점을 오픈하며, 그렇게 일본식 빵들이 한반도에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말하자면, 각 지역별로 유명한 빵집인 ‘**당’은 대게 해방이후 주인이 사라진 일본 제과점을 조선사람이 인수하며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일제강점기를 거쳐 넘어온 음식들이 있다면, 이미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음식들도 있다.


<반전의 마시멜로, 순대, 닭발, 약과, 양갱>

(마시멜로는) 기원전 2,000년 이전부터 이집트 사람이 먹었다. 그러니까 4,000년이 넘는 유서깊은 과자다.고대 이집트에서는 신들에게 마시멜로를 제물로 바쳤고 파라오들도 먹었다. 그렇지만 과자라기보다는 의약품이라는 성격이 강했던 것 같다. p 070



동양에서 순대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사서삼경 중 하나인 『시경』에 보인다. 기원전 11세기에서 8세기까지 중국에서 불린 시와 노래를 기록한 책인 시경에, “훌륭한 요리를 곱창과 순대를 준비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p 078



한편 우리나라 문헌에서 순대라는 한글 이름이 처음 보이는 것은 19세기 말 요리책인 『시의전서』다. 한글 이름은 그렇지만 한자로 동물창자를 요리했다는 기록은 17세기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에 개 창자, 18세기 증보산림경제에 소 창자를 삶은 우장찜이라는 기록이 있다. p 078



우리나라의 실학자 이덕무도 닭발이 천하의 진미라는 사실에 동의를 했고, 서기 3세기 무렵의 문학가인 장협도 닭발을 산해진미라고 했지만, 역사서를 보면 춘추전국시대 때 제나라의 임금이 닭발을 무척 즐겨먹은 것으로 나온다. p 135



엉뚱한 소리 같지만 제사상이나 차례상에 반드시 약과를 놓는 것은 약과가 영혼을 부르는 음식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p 273



고려 의종 때 팔관회와 연등행사에서 약과가 빠진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 처럼 요란을 떠는 장면이 고려사에 보인다. (중략) 약과가 영혼을 부르는 음식이라는 것은 중국 전국시대 때의 노래를 엮은 『초사』에 근거를 누고 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부루는 초혼부라는 노래에 자신의 임금이었던 초나라 회왕을 그리워하며 ‘밀이’라는 음식을 차려놓았으니 돌아오라는 구절이 있다. p 275



양(羊)은 왠만한 사람들이 다 읽을 수 있는 한자로 네발 달린 가축인 양을 뜻하는 한자이지만, 갱(羹)은 왠만큼 한자 실력이 좋은 사람 아니면 읽기조차 힘든 글자로, 국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양갱은 양고기 국이라는 뜻이다. p 280



일본에서 양갱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인 에도시대다. (중략) 중국에 유학을 온 승려가 귀국하면서 이 떡을 일본에 전했는데, 불교에서는 육식을 금하기 때문에 양고기 대신 팥을 넣어서 발전시킨 것이 지금의 양갱이 됐다고 한다. p 280~281



지구 2바퀴를 뛰어도 빠지지 않는다는 마시멜로는 알고보면 4천년 전 이집트에서 약으로 쓰인, 메시멜로 나무뿌리로 만든 유서깊은 음식이었다. 약으로까지 쓰였던 음식이니, 몸에도 좋은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마시멜로는 중세/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마시멜로’라는 이름만 남은 채, 그 내용물은 완전 다른 불량식품이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명절만 되면 제사상 위에 있는 약과에 눈독들이는 아이들, 매운 음식의 대명사 닭발, 떡볶이 친구 순대. 지금은 언제 어디서든 쉽게 먹을 수 있는 이 음식들이, 알고 보니 고대 조상들이 신성시하며 극찬한 요리라고 하면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고대 중국에서부터 극찬하고, 심지어 조선 왕족 및 선비들의 교과서인 『사서삼경』에까지 그 기록이 있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어느날 TV속 사극에서 조선 왕들이 순대를 먹고, 닭발을 뜯고 있을 지도!



아, 위와는 별개로 양갱의 시작은 양고기 국이었다는 건, 또 다른 반전이랄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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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키는 매일 심리학 - 무자비한 세상에서 단단한 방패막이 되는 34가지 심리 법칙
오수향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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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인 문제는 언제나 마음의 문제는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하기에, 심리학책이나 자기계발서 같은 책은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종종 보던 TV 프로그램에서 인지심리학자인 김경일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조금 변했달까? 어쩌면 심리학이나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않았던 내 심리마저도, 무언가 이유가 있는 느낌도 들고. 한번쯤은 제대로된 심리학 강의를 듣고싶은 마음도 들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 그렇게 잊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어느정도 흘렀을까? 생각치도 못했던 그런 일이 나한테도 일어났다. ‘왜 하필 나에게?’라는 생각은 의미가 없었다.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니까. 나는 그 일에 감내를 해야만했다. 지금이야 툭툭 털어냈지만, 이 때 확실히 알았다. 나는 나를 위로하는 방법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처럼, 자신을 어떻게 위로해야하는지 그 방법을 잘 모른다. 그런 사람들에게 추천하고픈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상상출판에서 출간된 「나를 지키는 매일 심리학」.


1)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기 힘들 때

2) 꿈 대신 안정을 쫓는 내 자신이 속물이라 느껴질 때

3) 실패를 극복하고 싶을 때

4) 다른 사람들과 빠르게 친해지고 싶을 때

……등등등……



학생부터 직장인까지, 현대인이라면 한번 쯤은 고민해보았을 문제라 생각한다. 나 역시도 한번쯤은 생각해봤던 문제들이었고, 오랜시간을 지나 어떻게든 해답을 내린 문제이기도 하다. 다만, 이 해답을 내리기 위해 너무 오랜 시간을 낭비했다는게 참 안타까울 따름이랄까. 이런 책을 진작에 읽어봤다면, 난 지금처럼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조금은 더 빠르게 해답을 찾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많은 사람이 착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착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절대 나쁜 게 아니다. 문제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타인을 배려하고,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를 쓴다는 것이다. 남에게 ‘착한 아이’가 되지 못한다고 우울해하거나 불행해 빠질 필요는 없는데도 말이다. (중략) “착한척을 그만둔다는 것이 상대를 배려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자신의 의사를 확실하게 표현하되,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으로 상대를 대하는 게 착한 것 입니다.” 단단한 자아를 세우고, 남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전달하려면 내면의 ‘착한 아이’를 미련 없이 버려야 한다. 오로지 남을 위해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이제 굳이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자. 남으로부터 얼마든지 미움받아도 된다. p 023~024



누군가에게 진작에 들었으면 좋았을 이야기.



한 회사를 벌써 10년째 다니고 있다. 집에서 장녀로 컸던 나에게는 ‘착한아이 콤플렉스’가 분명히 있었다. 당연히 회사에서도 ‘네,네’. ‘내가 왜 이런 부탁을 들어줘야하지? 내가 왜 이런소리를 들어야지?’ 이런 생각을 매번 했지만, 어쩔수 없었다. 그렇게 몇년 흐르니, 내 자신이 썩어 문드러가는 느낌? 이러다간 내가 더 힘들어질것 같고, 내 자신이 없어질것 같고.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흘러 회사 연차도 어느정도 쌓이고 나서야, 이제는 거절해도 되겠지 싶었다. 물론 그동안 상처란 상처는 다 받은 뒤였지만. 만약 상처를 받기전의 나에게, 누군가 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면? 나는 그 긴시간동안 상처를 받지않고, 오히려 나를 위해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하하.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이미 지나간 시간,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요즘학생들을 지배하는 가장 큰 욕구는 당장 돈을 버는 것이다. 명예로운 직업이나 정말 관심 있는 분야보다는 수입이 안정적으로 보장되는 직장을 선호하고 있다. (중략) 또한 직장은 자아실현 뿐 아니라 의식주 문제와도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따라서 대다수 사람은 꿈을 이루는 것보다 안정적인 직장을 최우선으로 하게 된다. 먹고 사는 것과 관련된 욕구는 본능적이기 때문에, 이 욕구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학자의 꿈, 변호사의 꿈, 사회활동가의 꿈도 이뤄지지 않는다. 이들은 결코 나약하게 꿈을 호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욕구에 누구보다 진실됐다고 할 수 있다. p 062



가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집을 팔고, 자기 꿈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그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 누구라도 지금 당장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고, 국내일주든 세계여행이든 글을 쓰든 뭐든 원하던 꿈을 따라갈 수도 있다. 정말 누구든 할 수 있는 일다. 다만 그러지 못하는 것은, 그저 단 하나. 내가 먹고 사는 일을 걱정해야하니까, 그래서 쉽게 꿈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속물’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내가 먹고사는게 중요한데, 꿈이 무슨 의미인가? 물론 꿈이 내 삶을 책임져준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솔직히 드물지 않나. 내 꿈이 먹고사는 일을 해결해준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런 행운이 누구에게나 오는 일은 아니니까.



그렇기에 난 꿈을 포기한 이들을 속물이라 할 수 없다. 그들이 나약하다고도 할 수 없다. 나역시도 먹고 사느라 내 꿈이 뭐였는지조차 잊고산지 오래니까.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 꿈을 포기하는건 어쩔수 없는,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인것이다.




‘코로나 블루’, ‘코로나 레드’라는 신조어까지 생긴 요즘이다. 그 어떤 때보다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지금, 이 한 권의 책으로 조금이나마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위로를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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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일관계와 『일본서기』 - 『일본서기』의 허상과 실상 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15
이재석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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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60년부터 시작한다고 설정하여 697년까지 약 1350년간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하여 이를 720년에 완성했는데 그 과정을 상식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아마도 7세기, 즉 600년대의 역사는 『일본서기』에서도 가장 ‘현대사’에 해당하며, 당시 편찬자 입장에서 보아도 자신의 당대 또는 부친이나 조부 세대의 역사이므로, 비교적 기억도 선명하고, 역사 기술에 참고할 자료도 잘 남아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시대의 역사는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50

물론 그렇다고 하여 6~7세기의 서술이 모두 사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등장하는 인물이 실존 인물이라고 해도 특수 목적에 따라 왜곡, 윤색해 기술되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실적’의 의미는 이전 시기의 전승적 차원의 기술 부분에 비해 그나마 6세기 이후는 전승 속의 인물이 아닌 실존했던 인물이나 사건이 기사에 반영되어 있을 확율이 높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P52

『일본서기』 속 일본 역사의 전개과정은 신화의 세계와 인간 지상의 세계로 구분되어 있다. 신화의 세계에서 일본의 국토와 여러 신이 탄생하였으며 그 뒤에 비로소 지상(일본열도)에서 천황이 일본을 건국해 지배하기 시작한 인간의 역사가 이어져 갔다는 것이다. (…중략…) 그럼 왜 일본의 역사가 신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고 설정된 것일까? 그것은 일본을 건국하고 천황으로서 통치하기 시작하는 천황가가 바로 하늘의 천상계에서 내려온 천손의 후손이라고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P42

일본은 석기시대에서 곧장 청동기+철기의 혼용 시대로 이행하였으므로 매우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이러한 특이성은 일본 열도 내부의 내재적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이식 문화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즉 농경과 철기 문화 단계의 금속에 익숙한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함으로써 그러한 문화가 전수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주역은 한반도 사람들이었다.- P64

농경과 금속문화로 상징되는 야요이 문화는 당시 일본열도 최고의 선진 문화였으며 이것이 사회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야요이 문화를 주도한다는 것은 곧 일본열도의 패권을 장악할 가능성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서일본 지역이 이러한 우위성을 갖게 된 것은 한반도와 중국 대륙으로부터 문물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P68

『일본서기』의 신공황후와 응신청황기의 한일관계 기사의 연대는 대게 2주갑(120년)을 더해보면 『삼국사기』의 연대와 정확하게 일치하므로….- P86

무령왕 시기를 포함해 6세기의 왜국 관계는 주로 『일본서기』의 기사를 통해 엿볼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현존하는 한국의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내용이 『일본서기』에 집중적으로 수록되어있기 때문이다. 무령왕과 성왕의 치세기간에 해당하는 왜국의 계체천황~흠명천황 기간의 『일본서기』 기술내용은 그 상당수가 백제를 위시한 한반도 관계기사로 채워져 있어 『일본서기』 안에서도 특히 계체/흠명천황기는 백제의 역사서를 보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P148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차치하고라도 그럼 무령왕의 아버지는 누구였을까? 사실 이 부분도 난해하다. 위의 사료에 따르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하지만 어떤 사료에는 곤지의 아들, 또 어떤 사료에는 동성왕의 아들이라고 되어있다. 『삼국사기』는 동성왕의 둘째아들설을 취하고 있다. 동성왕이 곤지의 아들인 점은 분명하고, 연령에서 볼 때 무령이 동성보다 연장자였음 또한 분명한데 그런 무령이 동성왕의 아들일 리는 만무하다. 무언가 전승의 과정에서 상당한 착오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P120

그런데 이 기사를 자세히 검토해보면 주어(행위의 주체)가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바로 여기에 기사의 비밀을 푸는 담서가 감추어져있다고 생각한다.(…중략…) 따라서 목라근자 등을 파견한 주체도 응당 신공황후가 되어야한다. 흥미로운 점은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라고 특별히 주기가 붙어있다. 즉 목라근자를 파견한 사람은 신공황후가 아니라 백제 근초고왕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구저는 백제의 사신으로 이미 <사료11>에서도 나온 인물이며 사백/개로도 전형적인 백제인의 인명이지 왜인은 아니다. 또한 목라근자의 군대는 나중에 백제왕 부자가 이끄는 부대와 합류해 4읍의 항복을 받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렇게 보면 상기 군사 행동은 백제군이 주체가 되어 움직인 작전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P91

그렇다면 『일본서기』에서 기술된 임나일본부라는 용어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런 실체도 없는데 『일본서기』 편자가 무리하게 만든 가공의 존재일까? 아니면 어떠한 실체가 있었는데 그것을 『일본서기』가 임나지배의 기구인 양 임나일본부라고 명명하며 기술한것에 불과한것일까?-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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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일관계와 『일본서기』 - 『일본서기』의 허상과 실상 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15
이재석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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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고대사, 내 독서 취향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분야이다. 한일고대사에 빠져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우리나라 고대사는 중/근대사에 비해 사료가 현저하게 적어서, 많은 부분이 비어있기 때문이다. 사료가 적어서 그런지, 이 분야 서적자체도 정말 흔치 않다. 더군다나 일반인을 상대로하는 한일고대사 교양서적은 뭐랄까, 대부분이 겉만 핥은 답사기에 그친다(실제로 관련 교양서는 거의 다 읽음). 나는 정말 깊이 있는 내용을 읽고 싶은데, 내 욕구를 채울만한 책은 손에 꼽을 정도 밖에 없다는게 슬플 뿐이다. 그나마 손에 꼽을 만한 책들이라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오늘 리뷰를 쓸 「고대 한일관계와 『일본서기』 : 『일본서기』의 허상과 실상」 이 책은 내 욕구를 채워준 정말 손에 꼽을만한 책 중 하나이다.



우리에게 고대사를 보여주는 (정사)역사서라곤 『삼국사기』에 그친다. 그마저도 당대에 쓰여진 역사서가 아닌, 고려시대 즉 중세에 편찬된 역사서다. 그러다보니 『삼국사기』는 중세인들의 관점에서 고대사를 정리한 내용이기에, 실제 고대인들의 어떤 생각을 바탕으로 삶을 살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고려시대에 편찬된 야사인 『삼국유사』도 동일하다). 『삼국사기』처럼 중세인이 쓴 고대사는 오롯이 중세인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작성되었기에, 중세인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면 삭제되거나 혹은 중세인의 언어로 다시 쓰여진다. 



기원전 660년부터 시작한다고 설정하여 697년까지 약 1350년간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하여 이를 720년에 완성했는데 그 과정을 상식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아마도 7세기, 즉 600년대의 역사는 『일본서기』에서도 가장 ‘현대사’에 해당하며, 당시 편찬자 입장에서 보아도 자신의 당대 또는 부친이나 조부 세대의 역사이므로, 비교적 기억도 선명하고, 역사 기술에 참고할 자료도 잘 남아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시대의 역사는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물론 그렇다고 하여 6~7세기의 서술이 모두 사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등장하는 인물이 실존 인물이라고 해도 특수 목적에 따라 왜곡, 윤색해 기술되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실적’의 의미는 이전 시기의 전승적 차원의 기술 부분에 비해 그나마 6세기 이후는 전승 속의 인물이 아닌 실존했던 인물이나 사건이 기사에 반영되어 있을 확율이 높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p 050 ~ 052



하지만 일본에는 고대에 쓰여진 역사서가 있다. 바로  『일본서기』다. 그러니까, 고대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당대에 기록으로 남겼다는 이야기다(720년 편찬). 그 내용의 사실유무를 차치하고서라도, 『일본서기』는 고대인들이 당대에, 고대인의 가치관으로 쓴 역사서이기에, 고대인들이 어떤 삶을 영위했는지, 왜곡되지 않는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대인 스스로가 왜곡을 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고대인 스스로가 왜곡을 한 부분은, 그 왜곡에서 왜 해야만 했는지 사회상을 찾아 볼 수 있는 또다른 사료가 된다.



이렇든 저렇든 『일본서기』 는 분명 당대에 집필된 역사서지만, 집필 목적이 그저 역사를 후대에 알려주기 위함은 아니다. 오로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기 위해서,천황가가 일본을 통치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장황하게 서술한 역사서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집필은 천황가 주도하였다.



『일본서기』 속 일본 역사의 전개과정은 신화의 세계와 인간 지상의 세계로 구분되어 있다. 신화의 세계에서 일본의 국토와 여러 신이 탄생하였으며 그 뒤에 비로소 지상(일본열도)에서 천황이 일본을 건국해 지배하기 시작한 인간의 역사가 이어져 갔다는 것이다. (…중략…) 그럼 왜 일본의 역사가 신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고 설정된 것일까? 그것은 일본을 건국하고 천황으로서 통치하기 시작하는 천황가가 바로 하늘의 천상계에서 내려온 천손의 후손이라고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p 042



『일본서기』 는 오로지 천황제 이데올로기 성립을 목적으로 하기에, 지금 천황가는 신의 자식이라는 ‘천손강림’ 사상을 주입했다. 지금 관점으로 보면 누가봐도 허구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많다. 근데 이걸 또 마냥 허구라고 손가락질 하기에는 우리나라 역사에도 환웅의 자손 단군이나, 해모수의 자손 고주몽 등 ‘천손강림’ 사상이 꽤 많다. 다만 우리 역사의 경우에는 이런 천손강림 사상을 ‘전설’이나 ‘신화’의 형태로 고착화시켰다면, 일본은 말그대로 ‘역사’화 시켰다는 점이 문제랄까(그래서 일본은 아직도 자국내 일왕을 신의 자손이라고 하지않나).



여기서 문제는 『일본서기』 는 시작부터 신이 나오다보니, 일본의 건국을 기원전으로 설정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나온 건국연대가 기원전 660년. 왜 기원전 660년인지는 당대 중국의 참위사상등이 반영되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책에 있으니 각설. 여튼 기원전 660년부터 일본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써야하다보니, 자연스레 초대천황(기원전 660년) ~ 9대 천황(기원전 98년) 까지는 시간상 끼워맞춘 허구의 인물이며,  『일본서기』에도 주요한 내용은 없다. 



시간상의 이유만으로 초대 천황~9대 천황을 허구라고 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 ‘천황’이라는 명칭은 7세기 후반에 사용되기 시작했으니, 7세기 이전, 그것도 기원전에 사용했을리가 만무하다. 거기다 초대~9대는 거의 부자계승으로 이루어져있는데, 고대는 형제계승이 기본이었다. 부자계승이 고착화 된건 7세기 후반이 지나서다. 뿐만아니라 이들 천황의 명칭도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속속들이 나온다.



일본은 석기시대에서 곧장 청동기+철기의 혼용 시대로 이행하였으므로 매우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이러한 특이성은 일본 열도 내부의 내재적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이식 문화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즉 농경과 철기 문화 단계의 금속에 익숙한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함으로써 그러한 문화가 전수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주역은 한반도 사람들이었다. p 064



농경과 금속문화로 상징되는 야요이 문화는 당시 일본열도 최고의 선진 문화였으며 이것이 사회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야요이 문화를 주도한다는 것은 곧 일본열도의 패권을 장악할 가능성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서일본 지역이 이러한 우위성을 갖게 된 것은 한반도와 중국 대륙으로부터 문물을 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p 068



대부분의 문명은 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를 거쳐 철기시대를 맞이한다. 우리나라도 그러하였다. 하지만 예외인 나라가 있으니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세계 여러 나라들이 청동기에 도입했을때도, 석기시대를 유지했다. 4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외래 문화가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환경적 문제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고대 한반도인이 청동기+철기문화를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일본은 세계사적으로는 유래없는, 신석기에서 바로 철기시대로 건너뛰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으니, 바로 한반도 도래인의 이동경로다. 왜 중요하냐하면, 한반도 도래인의 이동경로에 따라 일본열도의 발달(정치/경제부흥?)이 진행됬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뱃길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가는 제일 빠른 길은 규슈를 향하는 길이다. 도래인들은 그 길을 따라 도래하여 규슈를 향하였다. 그리고 그 시기와 맞물려 규슈에서 야마타이국(소국 또는 연합국)이 성립되었다. 야마타이국의 히미코 여왕이 가야의 왕족이라고 말하는 연구자들도 있고, 가야와 관련된 지명이나, ‘캇파(=가랏파)’같은 단어들이 남아있는 만큼, 규슈 일대는 한반도 가야계 도래인과 관련이 크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할 만하다(사족이지만 천황가의 시조가 야마타이국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여튼, 야마타이국이  점차 세력을 키워 기나이(現 칸사이)로 넘어갔든, 혹은 다른 세력에 흡수되어 기나이로 넘어갔든, 확실한건 대체적으로 한반도 도래인은 규슈를 시작으로 점차 기나이 지역로 넘어갔다고 보는 사실이다.



반면 정치세력이 밀집했던 규슈나 기나이와 멀리 떨어져있던 관동쪽은 발달의 속도가 더뎠다. 실제로 관동은 고대국가가 해체되고나서도, 중세를 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장악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現 도쿄)를 건설하면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메이지유신을 지나 교토에 있던 천황가도 도쿄로 넘어오면서, 일본의 수도로 유래없는 경제발달을 맞이했다.



『일본서기』의 신공황후와 응신청황기의 한일관계 기사의 연대는 대게 2주갑(120년)을 더해보면 『삼국사기』의 연대와 정확하게 일치하므로…. p 086



무령왕 시기를 포함해 6세기의 왜국 관계는 주로 『일본서기』의 기사를 통해 엿볼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현존하는 한국의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내용이 『일본서기』에 집중적으로 수록되어있기 때문이다. 무령왕과 성왕의 치세기간에 해당하는 왜국의 계체천황~흠명천황 기간의 『일본서기』 기술내용은 그 상당수가 백제를 위시한 한반도 관계기사로 채워져 있어 『일본서기』 안에서도 특히 계체/흠명천황기는 백제의 역사서를 보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p 148



하지만 굳이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고작 일본역사를 알고자 『일본서기』를 연구하는 것일까? 그건 전혀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힘든 한국 고대사가 『일본서기』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백제사! 특히 계체천황(게이타이)~흠명천황(긴메이)의 기사내용은 내가 백제사를 읽는건지 일본사를 읽는건지 헷갈릴 정도로, 백제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만큼 『일본서기』에는 우리가 모르던 한국 고대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예컨데 국사시간에 배웠던, 일본에 각종 문물을 전해준 “왕인박사, 오경박사, 노리사차계 등”은 우리나라 역사서가 아니라, 『일본서기』에 나타난 인물들이다. 즉, 우리 역사서에서 찾아볼 수 없던 인물을 일본 역사서에서 찾아서,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백제 왕릉 중 유일하게 누구의 무덤인지 비정된 왕릉, “무령왕릉”도 그렇다.



※사료14 『일본서기』 웅략천황 5년(461) 4월조


백제의 가수리군<개로왕> 은 지진원<적계여랑>을 태워 죽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협의하여 “옛적에 여인을 바쳐 채녀로 하였다. 그런데 무래하여 우리나라의 이름을 떨어뜨렸다. 지금부터 여인을 바치지말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우 군군<곤지>에게 고하여 “너는 일본으로 가서 천황을 섬겨라”라고 말하였다. 곤곤이 대답하여 “상군의 명을 어길 수 없습니다. 원컨대 君의 부인을 주시고 그런 후에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주며 “내 부인은 이미 산달이 되었다. 만일 도중에 출산하면 부디 한 배에 태워서 어디에 있든지 속히 우리나라로 돌려보내라”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헤어져 (일본)조정에 보냈다. 6월 병술삭 임신한 부인은 과연 가수리군의 말대로 쓰쿠시의 가카라시마에서 출산하였다. 이에 그 아이의 이름을 도군(島君)이라 하였다.



위는 이 책에 삽입되어 있는 『일본서기』 웅략천황(유랴쿠)의 기사다. 요약하면 개로왕이 만삭인 자기 부인을 아우인 곤지와 함께 배를 태워 일본으로 보냈는데, 만삭인 부인이 가카라시마에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의 이름이 도군(島君)이라는 점이다. 뒷 이야기는 생략했지만, 이 아이는 다시 배를 태워 백제로 보내지고, 백제의 왕이 되는데 그가 바로 무령왕이다.



이번에는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묘지석을 보자. 그 묘지석에는 “묘지의 주인은 백제 사마왕(斯麻王)”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백제 사마왕. 이는 무령왕의 이름이다. 



고대에 ‘사마(斯麻)’ 의 ‘사(斯)’는 ‘시’라고 읽혔다. 즉 ‘사마’를 ‘시마’로 읽었다는 이야기인데, 때마침 일본어에서 섬을 뜻하는 ‘시마’라는 말과 같다. 더 놀라운 사실은 위 웅략천황 기사에 나오는 ‘도’군의 한자가 섬을 뜻하는 도(섬 도; 島)이다. 일본어에서는 ‘섬 도; 島’를 ‘시마’로 읽는다. 즉 당시 백제에서는 섬을 두 음절 단어인 ‘시마’로 발음했고, 오늘날 일본어 섬을 뜻하는 시마와 그 어원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실제로 사가현에 속한 섬인 ‘가카라시마’에서는 옛부터 “먼 옛날 한 여인이 이곳에 와 샘물을 마시고 아기를 낳았다. 훗날 그 아기가 아주 귀한 사람이 되었다.” 라는 전설이 전승되고 있었다. 이후 한국 공주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되어 표지석이 나왔다(무령왕릉 발굴 당시 우리만큼 일본도 열렬한 관심을 보냈고, 취재열기도 대단했다). 무령왕릉 표지석과 『일본서기』 웅략천황 기사로 인해서, ‘가카라시마’에서 무령왕이 태어났다는게 명확하게 밝혀졌다. 현재 가카라시마에는 ‘무령왕 탄생 전승지’라는 비석도 세워져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차치하고라도 그럼 무령왕의 아버지는 누구였을까? 사실 이 부분도 난해하다. 위의 사료에 따르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하지만 어떤 사료에는 곤지의 아들, 또 어떤 사료에는 동성왕의 아들이라고 되어있다. 『삼국사기』는 동성왕의 둘째아들설을 취하고 있다. 동성왕이 곤지의 아들인 점은 분명하고, 연령에서 볼 때 무령이 동성보다 연장자였음 또한 분명한데 그런 무령이 동성왕의 아들일 리는 만무하다. 무언가 전승의 과정에서 상당한 착오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p 120



물론 명확한 부분만 있는 건 아니다. 위 내용처럼 무령왕이 정확하게 누구의 아들인지,  왜 연장자인 무령보다 연하의 동성왕이 왜 먼저 즉위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전부 명확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고대사의 묘미는 빈 공간을 상상으로 채워넣는거라 생각하니까.




자 지금까지는 우리에게 있어서  『일본서기』의 긍정적인 측면을 보았다. 뭐든지 비꼬아서 읽는 현재 일본의 입장에서, 우리에게는 탐탁치 않는 문제가 있으니 바로 <임나일본부>설이다. 이 이야기의 출처도 역시  『일본서기』다.



※ 『일본서기』 신공황후 섭정49년(249) 3월조


아리타와케와 가가와케를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 개로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주도록 요청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곧 목라근자와 사사노괘에게<이 두사람은 그 성(性)을 모르는데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장군이다.> 정병을 이끌고 사백, 개로와 함꼐 가도록 명하였다. 함꼐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래서 백제왕 부자와 아라타와케/목라근자 등이 의류촌에서 함께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오직 치쿠마나가히코와 백제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고사산에 올라가 함께 반석 위에 앉아서 백제왕이 “만약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천년만년 영원토록 늘 서쪽 변국이라 칭하며 봄가을로 조공하겠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치쿠마나가히코를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구저 등을 딸려서 보냈다. p 089~090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출발이 되는 사료다. 대충 요약하면 신공황후 군대가 가라 7국(가야 7국)을 평정했다는 이야기다. 현대 일본은 이 기사를 토대로 주구장창 임나일본부설을 말하며, 고대 한반도 도래인 덕택에 문명국이 되었다는 피해의식을 뒤집으려고 아주 노력을 노력을,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가 독도 문제에서도 잘 알듯, 일본이라는 나라는 글의 문맥과 당시의 상황을 확인하는게 아니라, 그저 글에 쓰여있는 글자 중 잘못쓰여진 한, 두글자를 잡아내어 꼬투리를 잡는데 아주 선수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지배하려했던 그들에게, 신공황후 섭정기사는 ‘한반도 지배’에 대해 정당성을 확보하였고, 한반도를 상대로 우월감을 갖게하는 강력한 힘을 주었다.



그런데 이 기사를 자세히 검토해보면 주어(행위의 주체)가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바로 여기에 기사의 비밀을 푸는 담서가 감추어져있다고 생각한다.(…중략…) 따라서 목라근자 등을 파견한 주체도 응당 신공황후가 되어야한다. 흥미로운 점은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라고 특별히 주기가 붙어있다. 즉 목라근자를 파견한 사람은 신공황후가 아니라 백제 근초고왕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구저는 백제의 사신으로 이미 <사료11>에서도 나온 인물이며 사백/개로도 전형적인 백제인의 인명이지 왜인은 아니다. 또한 목라근자의 군대는 나중에 백제왕 부자가 이끄는 부대와 합류해 4읍의 항복을 받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렇게 보면 상기 군사 행동은 백제군이 주체가 되어 움직인 작전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p 091



하지만 우리나라 연구자들도 바보가 아니다. 일본이 저렇게 나오면, 당연히 방어를 해야하는 것. 덕분에 우리나라 연구자들도  『일본서기』를 연구하고 또 연구하였다. 그러자 눈에 보이는 기사의 모순들! 예를 들어 백제식 이적 표현인 ‘남만 침미다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그렇다. 결국 위 신공황후 섭정기사를 작성할 당시, 출처로 한 사료는 백제의 사료가 된다는 이야기다(한성백제 당시 신라를 남만;남쪽 오랑캐 으로 인식). 



결국 백제의 사료를 토대로 후대에 『일본서기』를 편찬 과정에서 신공황후 이야기가 뒤섞이며 저렇게 모순이 얽히고 얽혀버린 기사가 된 것이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백제군의 활동이라는 전제하에 위 기사가 전부 사실인가에 대해서는, 이 역시도 의아한 점이 있다. 주어를 백제로 바꾸면 백제가 신라와 가라 7국을 평정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정말 백제가 신라와 가야를 평정했다면, 아무리 후대에 작성된 『삼국사기』라 한들 그 중요한 내용이 빠졌을리가 없을테니 말이다.



결국 이 기사는 목라근자를 비롯한 백제군이 신라와 가야7국 방면으로 진출했다는 정도로 보아야 하고, 요점은 왜의 활동이 아니라 백제의 활동이라는게 이 기사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서 기술된 임나일본부라는 용어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런 실체도 없는데 『일본서기』 편자가 무리하게 만든 가공의 존재일까? 아니면 어떠한 실체가 있었는데 그것을 『일본서기』가 임나지배의 기구인 양 임나일본부라고 명명하며 기술한것에 불과한것일까? p 169



현재는 『일본서기』를 비롯하여 여러 사료를 검토한 결과, (일본 빼고)임나일본부를 대부분 외교 사신으로 보는 추세라고 한다. 



애초에 고대 사료가 많이 남아있었다면 일본이 저렇게까지 역사왜곡에 힘을 쓰지도 못할텐데, 이럴 땐 또 사료가 부족한 게 참으로 한스럽다. 한국 고대사는 우리의 역사임에도, 우리는 일본과 중국에 남은 사료를 토대로 연구를 해야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분명 우리의 역사임에도 말이다. 하다못해 건물터든, 제사터든 무언가의 흔적이라도 발견하여 연구를 하면 좋은데, 우리나라는 발견하는 족족 문화재보다는 아파트 단지를 짓고, 도로를 건설하는게 우선이라는게 현실이랄까? 실제 지금도 가야고분군이 있는 지역에서는, 태양광사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가야 고분군이 말살될 위기에 처해있으니 말 다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사에 관심을 두는 거에 반에 반만이라도 고대사에 관심을 기울이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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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세계사 1 - 고대편
이세환 지음, 정기문 감수 / 일라시온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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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살라미스 해전만큼 정신의 힘이 물질의 양보다 우월하다는 사시을 명백하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 그 불굴의 정신을 가질 수 있게끔 한 원동력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을 냉정히 판단하고 미래에 대한 건전한 혜안을 가진 리더의 존재와 판단이다. 만약 테미스토클레스의 함대 건설론이 먹히지 않았다면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는 한낱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위기의 순간에 냉철한 판단을 할 줄 아는 리더의 존재는 모든 시대에 요구되지만, 항상 그런 리더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걸출한 리더는 항상 역사에서 귀하고 찬양받는 법이다. p 057- P57

"아테네가 세지면 스파르타를 지원하고, 스파르타가 세지면 아테네를 지원해서 서로 지치게 만들어라. 그래야 페르시아에 이득이 된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는 바로 이오니아 도시국가들을 다시 아테네 쪽으로 돌려세우는 데 성공한다. 단 한명의 사나이가 에개해 모든 국가들의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순간이다. p 075- P75

전권을 잡은 옥타비아누스는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먼저 군제개편이 있었다. 카이사르나 안토니우스 몰락의 공통점은 사병제도에 있었다. (중략) 필연적으로 암살이나 배반 등의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폐지하고 국가상비군제도를 도입한다. 시민들에게 세금을 거둬서 군인들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상속세를 신설해 부자들이 낸 세금으로 군인에게 월급을 줌과 동시에, 군 전역 시 특별 보너스와 약간의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를 확립했다. p 232- P232

어찌되었든 위대한 정복왕은 요절했고, 이후 마케도니아는 심한 분열끝에 별 볼 일 없는 나라로 전락한다. 정복왕이었으나 성군은 되지 못했던 알렉산드로스는 전사였지만 제국을 경영하는 경영자는 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원정하는 곳마다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했고, 군사적 측면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전술은 모든 현대 전술의 교본이 될 정도로 시대를 앞서나간 혁신적인 것이었다. p 107- P107

사실 카르타고의 문명은 찬란한 것이었다. 세계 최초의 아파트도 카르타고에서 나왔고, 진흙과 조개껍질을 섞어 방수하는 방법도 카르타고가 원조였다. 이렇게 찬란했던 카르타고가 왜 정치나 외교, 그리고 전투에서는 로마에게 궁극적으로 패배했을까? 카르타고는 상업에 치중한 나머지 그 외의 성장은 지지부진했다. 특히 군사력을 지속해서 용병에 의존하는 매우 좋지 않는 정책을 고수했다. 뭐든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p 184- P184

소설은 소설일 뿐, 위촉오의 진짜 역사는 위나라 다름 왕조인 사마씨의 진나라 시절, 역사가 진수가 쓴 <삼국지>에서 봐야한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는 엄청난 각색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 <삼국지>내용은 정사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p 238- P238

또한 <삼국지연의>에서 묘사한 유비, 조조, 손권의 모습은 정사와는 많이 다르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소설 <삼국지>는 셋을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묘사하는데 (중략). 예를들어 유비를 이야기해보자. 유비하면 덕으로 상징되기 때문에 소싯적부터 공부를 열심히 한 착한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정사에서 유비는 옷과 음악, 그리고 여자를 꽤나 좋아했던 사람이다. 또한 소설에서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돗자리 짜는 청년으로 나오는데, 실상 유비네 집안은 지방 토호 수준은 되는 나름 중산층 집안이었다. p 244- P244

소설에서 이들의 무기는 전문 무기 제작자의 손을 거친 무기가 아닌 동네 대장간에서 만든 것으로 묘사되는데, <삼국지연의>의 원작자 나관중은 진수의 <삼국지>에 주로 유랑극단의 연극 등에서 수집한 자료를 집대성해 소설을 완성한다. 다시 말해 중국인 특유의 과도한 각색과 창작이 오히려 역사적 사실을 압도하며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각인된 것이다. p 249-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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