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천보산을 갔었다. 집에서 멀기도 멀거니와, 이름도 생소한 천보산을 갔던 이유는 단 하나다. 제일 험난했던 시기에 귀한 자리에 올랐으나, 비참한 일생을 지낸 한 여인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 여인의 이름은 이애숙. 생소하다면 생소한 그 이름. 하지만 그녀의 봉호를 들으면 ‘아!’ 하고 알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조선 왕 효종에게 받은 봉호는 바로 의순공주 이다.



의순공주에 대해서는 내 블로그에서 여러차례 포스팅을 했다. 아마 잊을만 하면 포스팅을 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의순공주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소설 서평을 시작으로, 오롯이 의순공주와 환향녀에 대한 포스팅, 족두리묘 답사 포스팅, 그리고 의순공주와 당대 상황이 쓰여진 역사책 서평이 있었다. 내가 이토록 의순공주에 대한 포스팅을 끊임없이 한 이유는 단 하나다. 기억하고 또 기억해서, 이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의순공주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의 흑역사다. 사람에 따라서는 알고 싶지 않은 역사이고, 왜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하냐며 마음에 안들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의순공주의 이야기는 못난 리더와 못난 남자들의 환장의 콜라보로 이뤄진 이야기기 때문이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하지만, 슬프게도 역사적 사실인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에도 떡하니 기록되어있는 이야기다.



의순공주의 이야기를 알기 위해서는, 그녀가 살았던 조선 중기 (인조 ~ 효종) 대의 상황을 알고 있어야 한다.


※빠르게 훑어보는 인조 ~ 효종까지.


콤플렉스로 중무장된 한 사람이 반정으로 왕이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선조이고, 아버지는 선조의 아들 정원군(조선왕실 최초의 싸이코패스)이다. 할아버지 선조와 아비인 정원군. 그 핏줄을 이어받아 왕이 된 그는 바로 능양군, 인조다.


삼촌 광해군을 몰아내고, 1623년에 왕위에 오른 인조는 즉위 직후 광해군의 정책을 전면 폐기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펼쳤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때가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전쟁이 막 끝난지 얼마 안된 시기라는 점이다. 당시 광해군은 그 유명한 중립외교로 명나라와 금나라(청나라) 사이에서 완벽한 줄타기를 하며, 전쟁으로 피폐해졌던 조선 땅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광해를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는 망해가는 명나라를 선택했다. 그렇게 조선의 안전이 다시 한번 송두리째 흔들린다.


1627년 금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왔다(정묘호란). 이후 인조는 금나라와 형제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겨우 마무리 하는 듯 싶었다. 하지만 인조는 다시 금나라의 뒷통수를 쳤다. 이에 빡친 금나라는 국호를 청으로 바꾼 뒤, 1636년 다시 조선으로 쳐들어온다(병자호란).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다(원래는 강화도로 가려하였으나, 강화도로 가기 전에 청군에 길막당했다).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하다 결국 삼전도(현재 잠실 부근)에서 청태종에게 항복을 하며, 삼배구고두례를 하며 굴욕을 맛 보았고, 조선의 왕세자를 비롯한 왕자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후 청나라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던 소현세자가 귀국했지만, 소현세자가 요절한다. 결국 동생인 봉림대군이 왕위에 등극하니 그가 바로 효종이다. 





북벌정책으로 유명한 효종이다. 하지만 실상은 북벌다운 북벌은 한 적이 없는 효종이다. 명분이 없는 왕위였기에, 아비를 위하는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북벌이었던 것이다. 뭐, 여기까진 그렇다치고. 다시 의순공주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청나라는 효종에게 조선 왕실의 딸을 공녀를 요청한다. 하지만 효종과 종친들은 자신의 딸들을 오랑캐에게 보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공녀를 안보낼 수도 없는 일, 결국 종친의 한 사람이었던 금림군 이개윤이 본인의 딸을 공녀로 보내겠다고 하였다. 금림군은 효종의 10촌으로, 종친이라고는 해도 거의 남이나 다를 바 없었던, 성씨만 조선 이씨였던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힘없는 종친이 자의반, 타의반 총대를 맨것이다.



(금림군의 딸)의순공주로 간택이 결정되고 사흘 뒤 효종이 관료들에게 이리 물었다. “근래에 사대부집에서 서로 다퉈 혼사를 치른다는데 사실인가?” 사정을 모르는 양반들이 간택을 면하려고 결혼행진곡을 벌인다는 소문이었다. 효종은 열 살 된 세자와 열한 살과 아홉 살 먹은 공주 혼인을 걱정하며 8~12세 사대부 자녀 혼인 금지령을 내렸다.(『효종실록』) ‘두 살배기 공주 하나뿐’이라는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가짜라는 자백이었다. - 역사책 「땅의 역사 5권」 中



자기 딸 대신 오랑캐 나라로 간다는 금림군의 딸 이애숙을, 효종은 자신의 양녀로 삼았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있는 의순공주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효종의 양녀로 청나라로 간 의순공주는, 다행이라면 다행이게도 당시 청나라 권력가였던 예친왕 도르곤의 부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부부사이도 좋았던 듯 보인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은 이를 못마땅해했다. 그 사실은 의정부 천보산에 위치한 족두리묘와 정주당놀이로 확인할 수 있다.


병자호란과 정축하성으로 인해 울분에 차 있는 뭇 백성들 사이에 '왕실에서 공주까지 오랑캐에게 바쳤다' 라는 원성이 들끓었지. 조정에서는 몇 달 동안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결국 임금께서 자신의 딸을 빼돌리고 종친의 자녀인 너를 대신 보낸 일 까지 소문이 나서 민심이 더욱 흉흉해질까 봐 전전긍긍하시는 형편이 됐단다. 그래서 궁리해낸 것이 바로 이 족두리 묘였어. 네가 연경에서 오라비들을 통해 돌려보낸 족두리를 갖고 이야기를 지어낸거야. 


의순공주는 끝내 국경을 넘지 않았다. 국경으로 가던 중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힐 수가 없었다면서 평안도 정주 강에 몸을 던졌고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족두리만 물에 떠 올랐다는 설화를 만들어 낸 것이지. - 역사소설 「애숙의 나라」 中


경기도 의정부 천보산 기슭에 금림군 가족묘역이 있다. 동쪽 끝 비석 없는 묘는 ‘족두리산소’라 불린다. 오랑캐 땅을 밟기 전 공주가 압록강에 투신해 족두리만 모셨다고 믿는다. - 역사책 「땅의 역사 5권」 中



조선은 멀쩡히 살아있는 의순공주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뭐, 의순공주가 청나라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겠지만 슬프게도, 이후 의순공주에게는 비극이 연달아 일어난다. 힘든 기간을 버티며, 우여곡절 끝에 겨우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그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를 공주로 봉했던 조선왕실조차도 말이다. 하기사, 조선에서는 이미 죽어서 무덤까지 만든 사람인데, 살아서 돌아왔으니 반가울리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의순공주는 조선의 무능을, 자신들의 무능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비단 의순공주 뿐만이 아니다. 조선에는 의순공주를 포함하여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수많은 조선의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그녀들은 조선과 조선의 왕, 조선의 위정자들의 무능으로 인한 피해자였다. 그렇기에 조선은 그녀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정축하성의 국치*로 전쟁이 끝난 뒤 청국으로 끌려간 포로들에 대한 석방 교섭이 있었던 기묘년 이후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돌아왔다. 그런데 여인들만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혀 실절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내쳐지고 시집에서 문전박대를 받았다. 어쩌다가 도성으로 들어간 여인들도 다른사람들 눈에 띄지 말라고 별당이나 뒷방에서 유폐되다시피 홀로 쓸쓸히 지내야 했다. 대들보에 명주실을 내려 목을 걸거나, 은장도로 손목을 긋고 가슴을 찌른 여인들이 부지기수 였다. 집 안에 있는 샘에 거꾸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은 이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예 집안에 들어갈 수 조차 없는 여인들은 깊은 강을 찾아 몸을 던졌다. 대게는 오랑캐에게 끌려갈 때 자결하지 못한 자신을 한탄했고, 조선의 남정네들을 원망하면서 눈을 뜬 채 이승을 떠났다. 속환한 며느리가 칠거지악을 저질렀으니, 이혼을 하도록 해달라는 상소가 쉬지 않고 올라왔다. 환향한 지 한 해 만에 그렇게 한이 맺힌 채 죽어간 여성이 대략 일만 명은 넘었을 것이라는 말도 나돈다고 했다. - 역사소설 「애숙의 나라」 中

*정축하성의 국치: 삼전도의 굴욕


숱한 여자들이 청으로 끌려갔다가 매우 적은 숫자로 돌아왔다. 환향녀라 부른다. 이들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 역사책 「땅의 역사 5권」 中



조선은 이들을 환향녀라 불렀다. 그리고 이들을 괄시했다. 그녀들을 괄시한 명분은 뚜렷했다. 조선의 여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오랑캐에게 복수는 하지 못할 망정, 끌려갔을 때 죽지도 않고 살아서 돌아왔으니 정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인가.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을 힘없는 여인들에게 쏟아낸 것이,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 조선의 남자들이었다. 자기들이 무능해서 일어난 일이었고, 그로 인한 피해를 조선의 여성들이 입었음에도 조선의 위정자들, 조선의 남자들은 그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았다. 



의순공주는 그저 비극적인 삶을 산 여인이 아니다. 그녀의 삶은 죽지 못해 살았던 수많은 환향녀들을 대변한다. 그녀의 삶은 무능하고 치졸했던 조선과 조선의 왕, 조선의 위정자, 조선의 남자들을 고발한다. 




과거에는 의순공주 비극적인 삶 같은 조선의 흑역사를 볼 때마다 ‘만약’ 이란 생각을 했었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럼에도 ‘만약에 이랬다면~’ 이라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이제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아니라, ‘앞으로’를 위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훗날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가, 라는 생각 말이다.



의순공주가 살았던 당시 조선을 보면, 임진/정유재란이 일어난지 오래 안지나서 정묘/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번 대규모의 외침이 있었으므로, 이후 방비 및 외교에 대해 ‘제대로’ 생각했더라면 의순공주와 같은 피해자들은 나오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 뿐인가? 약 이백여년 뒤 여러차례 외침이 있었고, 결국에는 일본의 식민지배까지 받았다. ‘앞으로’를 생각하지 않아서, 흑역사가 계속 반복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사는 21세기에 저런 외침에 있겠냐고 말하는 삶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끊이지 않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음. 확실한 건 ‘앞으로’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21세기에도 의순공주와 같은 피해자가 다시 생겨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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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의 신사를 찾아서 - 일본·류큐·제주도 제주학연구센터 제주학총서 27
오카야 고지 지음, 이예안.이윤주 옮김 / 제이앤씨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역사에 관심이 많은 만큼, 민속학에도 꽤나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외국 출신 신神을 추종하는, 그 중에서도 유독 개신교로 점철된 우리나라를 보고 있노라면 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은 이토록이나 처참하게 무너졌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어렸을 적에는 시골에 가면 당산나무가 있었고, 서낭당도 있었고, 가족과 마을을 지켜주던 가택신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제 한반도 내에서는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다. 하지만 나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지, 많은 사람들은 우리 고유의 신앙에 살아숨셨던 신들은 잊은채 외국 신에 열광한다. 외국 출신 신을 받드는 종교도 종교거니와, 그리스/로마/북유럽 등의 외국신화에도 열광한다. 그렇게 내가 발 딛고 사는 땅에 살았을, 우리를 지켜주었을, 우리만의 신들은 그렇게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직 제주도에는 신이 남아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래서 나는 제주도 신화와 관련된 책도 여러 권 읽어보았고, 제주 여행을 다닐 때는 제주의 신화와 관련된 곳을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했다. 본토에는 찾기 힘든 민속신앙을, 제주도에서는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제주도만큼은 아직 신화의 나라이며, 그네들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왠걸. 내가 본 제주도의 신들도, 이미 수 많은 신이 사라진 뒤였다. 그 사실을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사람들 눈에 띄지않게 꼭꼭 숨어있는, 본토처럼 난개발에 사라지고 있는 제주도의 ‘당’을 보고나서야 알았다. 뭐, 이 책의 주제는 사라지는 전통신앙에 대한 것은 아니니, 이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 멈추고.




이 책은 일본인 저자가 제주도, 한반도 서남해안, 오키나와, 일본 본토의 신사를 답사하며 연구한 결과물이다. 제목은 「원시의 신사를 찾아서」. 



한줄로 요약하자면 “일본 본토의 신사의 원형은 오키나와의 ‘우타키’로, 그럼 이 우타키는 어디서 온 것인고 하니, 제주도의 ‘당’”이다. 물론 이렇게 한줄로 요약하기엔 그 내용이 꽤나 방대하긴 하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한일고대사를 너무나 좋아할 뿐더러, 관련 역사책을 비롯하여 일본에 갔다 하면 도래인의 흔적을 찾으로 여기저기 다니던 나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그야말로 보물과도 같은 책이었다. 아니, 이 책을 왜 이제서야 읽었지? 산지는 꽤 되었는데. 육아하느라 시간이 없다고 미루고 미루고 계속 미루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는게 후회될 정도로 너무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을 좀 길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1. 일본의 신사의 원형을 오키나와의 우타키로 보고 있는데, 이 우타키의 원형은 제주도의 당으로 추정된다. 우타키나 당은 성스러운 숲, 여성사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2. 제주도의 당 문화는 바다건너 서, 남해안에도 퍼져있을 것으로 보이나, 제주도와는 달리 본토는 미신타파 등 토종신앙 박해등으로 당문화가 급속도로 쇠퇴하여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려운 곳이 많다.


3. 그렇다면 오키나와의 우타키 문화만 제주도의 당 문화가 비슷한 것인가? 아니다. 제주도와 바다를 사이에 둔 오키나와 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 규슈 해안가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적어도 고대에는 쿠루시오 해류가 흐르는 해안가를 주변으로 동일한 문화권으로 묶여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풍습 역시도 오키나와나 쿠루시오 해류가 흐르는 해안가 마을과 비슷하다. 즉 제주도인과 오키나와인, 그외 큐슈 해안가 사람들의 교류가 빈번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4. 고대의 일본 신사는 오키나와 우타키처럼 신사 건물이 없었다. 즉 성스러운 ‘숲’이나 나무, 바위 등을 모셨다. 신사에 대한 제일 오래된 기록은 한반도 도래인이, 자국의 신을 모시기 위해 세운 신사에서 시작된다. 


5. 일본 내에 있는 신사에서 출토된 제일 오래된 물품은 야요이 토기인데, 야요이 문화는 한반도 도래인의 선진문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과 그외 수많은 도래인이 세운 신사의 기록을 볼 때, 일본 내의 많은 신사의 성립 과정에서 한반도 도래인은 어떠한 경로로든 개입이 되어 있을 것이다.


6. 제주도의 당과 오키나와의 우타키는 기본적으로 ‘성스러운 숲’, 즉 신수신앙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는데, 신수신앙에 대한 시작은 아무래도 신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 근거로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성스러운 숲에 대한 기사가 많이 실려있다. 또한 당시 고대 일본의 권력은 신라계 도래인이 쥐고 있었다.


7. 제주도의 당(본토 성황당 등)과 오키나와의 우타키(본토 신사)는 그 시작은 비슷했으나, 결과는 너무나 달랐다. 일본의 신사와 오키나와의 우타키는 일본 관광책자에는 무조건 실려있는 관광 명소가 되었지만, 제주도의 당이나 본토의 성황당등은 많은 수가 사라졌거나, 있어도 유명무실하며, 실제로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자국의 문화를 중요시하였고, 타종교를 들여왔어도 박해를 하지 않았으나, 한반도는 달랐다. 고려 불교 오백년, 조선 유교 오백년, 현대의 새마을운동등을 거쳐 한반도 토종 민속문화는 거의 절멸하였다.


8. 한국의 토종신앙과 일본의 신사 사이에는 분명한 연결고리가 있으며, 일본에는 명확하게 검증된 고대 도래인이 세운 신사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이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은게 현실이다. 제일 큰 이유는 아무래도 한국의 토종신앙을 미신으로 치부하며 타파한 유교문화이지 않을까. 그러다보니 신사가 일본 고유의 문화인 것마냥 알려지게 되었지만, 실상 일본 신사의 시작은 한반도다.




정말 이 책을 읽은 나를 너무 칭찬한다. 특히 한일고대사에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나에게는 이만한 책이 또 어디있을까? 정말 이 책에 실려있는 모든 내용이 흠잡을 데가 없다. 정말 역사책은 ‘ㅇㅇ총서’ 정도는 되야 흠잡을 데 없고, 번역에 대한 가독성도 높아서 읽기도 좋다. 



나 역시도 일본의 신사의 시작은 고대 한반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한 근거를 들자면, 일본에 갈 때마다 한반도 도래인이 세운 신사와 사찰, 도래인들이 꾸려나간 지역들을 찾아다니면서 보고 들은것과, 한일고대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보이는 고대 일본의 권력 중심세력이 한반도 도래인들이었다는 점이랄까? 다만 이것만으로는 그저 나만의 ‘카더라’에 지나지 않기에, 그냥 입 밖으로는 내지않고 혼자만 생각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내 이런 생각들이 그저 헛된 생각이 아니었다니. 흑. 이런 연구를 하는 연구자가 있었을 줄이야, 그것도 바로 일본에! 요즘의 일본은 자국에 있는 신사와 사찰에서 도래인의 흔적을 지우고, 도래인의 흔적이 남은 지명조차도 바꾸었기에, 일본에서는 이런 연구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이런 연구를 한다면 극우파에 협박에 시달리지않을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뭐, 여기까지 각설하고!



한반도 도래인에 관해선 대충 규슈는 가야/신라, 관서는 백제/신라, 관동은 고구려 도래인 계열이 주를 이루었다고 알고는 있었다. 그 도래인들이 각 지방에 설립한 신사나 사찰에 대해서도 유래나 뭐 이런 건 대충은 알고 있었는데, 이 책 덕분에 대충 알고있던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된 부분이 꽤 많았다. 특히 이세신궁과 신라의 연관성은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던 터라, 와. 생각해보면 신라나 이세신궁에 대한 각각의 내용은 다 알고 있던건데, 왜 난 이걸 연관짓지 못했을까 싶기도 하고. 이래서 사람은 꾸준히 계속 배워야 하나보다.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이 총 10개의 챕터로 되어 있다.


-제주도 당과의 만남

-한국 다도해의 당

-제주도 당과 제

-오키나와의 우타키

-제주도와 류큐

-신사와 한반도

-신사를 둘러싼 몇 가지 문제1 (조몬, 야요이와 신사)

-신사를 둘러싼 몇 가지 문제2 (신사는 무덤인가)

-성스러운 숲의 계보

-신사, 우타키, 당



이 챕터중 일부를, 특히 내가 기억하고 공부하고자 하는 부분을 아래에 발췌했다.




▶ 제주도 당과의 만남


당은 결코 제주도만의 것이 아니다. 적어도 과거에는 신사나 우타키와 마찬가지로 한반도 어느 마을에나 있던 것 같다. 하지만 유교를 국료로 하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크게 변질되었고, 특히 최근에는 근대화(예를들어 새마을운동)나 기독교의 보급으로 한국 본토에서는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p 012



내가 본 최초의 당은 잊을 수 없다. 그곳은 서귀포시 북쪽 교외 호근동이라는 마을의 당으로 감귤밭 속 작은 숲이었다. 『제주도 고대문화의 수수께끼』에 실려있는 사진과 똑같은, 아니 우타키의 숲 그대로였다. (…) 『니혼쇼키』와 『고지키』에 나오는 스이닌텐노의 명을 받아, 다지마모리가 바다 저편 이상향인 도코요노쿠니에 구하러 갔다는 도키지쿠노가쿠노미는 제주도의 감귤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다. 다지마모리는 신라에서 건너간 아메노히보코의 후예로 알려진 인물이며, 게다가 감귤이 자라는 곳은 한반도 안에서 오직 제주도뿐이라고 하니 이설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p 018



당은 신사나 우타키와 비교해서 일반적으로 청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청결하지 않다. 처음에는 신앙의 쇠퇴가 그 이유로 보였지만 한마디로는 정리할 수 없는 것 같다. 제를 지낼 때 이외에는 함부로 출입해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금기가 있고, 또한 사람들은 일단 신에게 바친 제물은 쉽게 가져가거나 버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한 데에서 난잡함의 일부가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p 021



길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네, 다섯 명의 할머니들에게 물으니 이 마을의 당은 해안가에 있었는데 새마을운동으로 파괴되었다고 했다. 새마을이란 새로운 마을을 의미하며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지시에 의해 시작되었다. 농어촌 구습을 타파하고 시대에 걸맞은 마을 만들기를 목표로 하는 운동으로 당 신앙 등은 미신으로 규정하여 배제 대상이 되었다. p 026



 



▶ 한국 다도해의 당


한산도에 가는 페리안에서 일본어를 잘하는 제승당 이사장과 함께 있었기에 당의 주소를 물어보았는데 “없어요” 라고 단번에 부정을 하는 바람에 나는 섬을 돌 의욕을 잃어 제승당만 보고 다음 페리를 타게 되었다. 연화도에서도, 욕지도에서도 내 입에서 나오는 당이나 신당이라는 말에 주민들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단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 그리고 작은 마을에 개신교, 천주교를 포함해 네 개나 되는 교회가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최근 한국에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보급은 우리 일본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으며, 예를 들어 상점 하나 없는 작은 섬에도 지붕에 십자가가 반짝이는 교회만은 있다고 할 정도이다. p 039



나는 소매물도에서 처음으로 당, 정확히 말하면 당의 흔적을 보았다. (…) 그러자 주인은 나를 가게 밖으로 데려가더니 왼쪽 작은 산 정상 가까이의 산등성이에 우거져 있는 벌목된 것 같은 작은 숲을 가리키며 “옛날에 저곳에 당이 있어 제를 지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가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곳까지 올라가 보았따. 잡목이 우거진 숲 속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었고, 그 앞에는 희미하지만 제사를 지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사라진 당이었다. p 040



한려수도의 섬에서는 제주도와 비교해서 당 신앙의 자취가 매우 옅고, 당의 형태도, 그 제祭도, 제주도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p 044



(신안 지도) 당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 아직 초목의 마른 빛깔이 남아있는 밭 속에 있었는데 주위의 평범한 풍경 속에 있어 유달이 눈에 띄는 숲이었다. (…) 신목이라고 생각되는 숲 중심에 솟아있는 커다란 팽나무 밑가지에 금줄이 쳐져있을 뿐이었다. 당은 보편적으로 마을의 뒷산과 가까운 산, 작은 산이나 조금 높은 곳에 입지하는데, 내가 처음으로 본 당인 제주도 호근동의 당과 이곳처럼 밭 가운데 있는 경우는 비교적 적다. 이런 당을 들당이라고 한다. 당이 상당과 하당으로 나누어져 있는 경우 신사의 야마미야와 사토미야과 같이 상당은 산이다 다른 높은 곳에 있고 하당은 마을이나 그 주변에 있는데, 대천리에서는 이 들당이 상당이고 마을안에 하당이 있다. p 048



비금도에서는 섬 남서부에 있는 내촌리의 당을 보러갔다. 마을 뒷산 중턱에 제를 지낼 때 제물 등을 준비하는 낡은 오두막이 있고, 그곳에서 40~50m 정도 더 올라간 곳에 돌담으로 둘러싸인 한 구역이 있었다. 그 안에 높이 1m정도의 돌로 만들어진 신기한 신상이 평평한 자연석 위에 모셔지고 있었다. 이목구비와 가슴 앞에 모은 두 손만을 매우 단순한 저부조로 새긴 반신상으로 어딘가 오리엔트나 이집트의 신상을 떠올리게 했다. 『다도해의 당제』에 의하면 먼 옜날 한 학자가 딸인 소녀를 데리고 이 마을에 유배되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가서 익사하고 딸은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 채 산 정상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나날을 보내는 사이 죽게 된다. 머지않아 마을 사람의 꿈에 신이 나타나 딸의 영혼을 모시라고 고했기에 모시게 된 것이 이 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소녀상인 것이다. p 051



내가 이 섬을 방문하고자 한 이유는 외나로도의 신금리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 숲이 있어, 그 속에 마신馬神을 모시는 당이 있다는 것을 『남해안』이라는 한반도 남해안 가이드북을 보고 알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 최덕원씨의 「나로도의 당제」라는 글도 접하게 되었다. 최씨에 의하면 1986년 조사 시점에서 나로도 30개 마을 중 16개 마을에서 당제를 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재작년 내가 돌아본 몇 개의 당 중에 2곳은 폐당 혹은 제를 지내지 않아 현재 당으로써 남아있는 마을은 드물 것이다. p 055



남해와 서해 섬들의 당을 돌아보고 깊이 느낀 점은 제주도 당의 분포가 높다는 점, 대부분이 당사를 두지 않는 작은 숲으로 되어 있다는 점, 여성이 제사를 주관한다는 점으로 다른 섬들의 당과 비교해서 상당히 이색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질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제주도의 당과 남해, 서해 섬들의 당, 특히 신안지역 섬들의 당 사이에는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차이점도 두드러진다. 높은 분포를 보인다는 점에 대해 말한다면, 옛날에는 다른 섬들 즉 어느 섬의 어느 마을에서도 한 곳 이상의 당이 있었다고 생각되며 실제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왜 섬에서 당이 이정도로 소멸되었고, 제주도에만 아직도 많이 남아있으며 게다가 그 신앙이 계승되고 있는 것일까. p 059



 


▶ 제주도 당과 제


일본에서는 ‘민간신앙과 그들의 국가 종교가 대부분 직결’되어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민간신앙이라고 하면 바로 반사적으로 미신과 타파라는 말이 튀어나온다’며 장주근씨는 약간 노기 서린 어투로 말한다(『한국의 향토신앙』). 실제로 일본의 오랜 역사 속에서 신사가 국가로부터 박해를 받은 사례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우타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쓰마번의 류큐정벌 이후, 번의 직할령이 된 아마미의 섬에서 우타키와 같은 신산과 그 신앙이 탄압을 받아 관리의 손에 의해 산신의 나무가 베어지는 일도 있었고, 메이지정부가 한때 우타키를 신사화 하려고 도모한 적도 있었으나 모두 극히 일시적이고 한정된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에 불가하다. 이것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주도의 당 입지가 이러한 박해의 역사과 관계가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실제로 신사나 우타키와 같이 마을 안쪽 눈에 띄는 장소에 입지하는 경우는 드믈고 대부분은 외딴 곳에 숨어 있듯이 존재한다. p 066



제의 주체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제주도의 당과 오키나와 우타키는 비슷하지만, 우타키의 경우 사제자인 노로, 쓰카사도 여성에 한정되어 있다는 데 반해 제주도 당제의 사제자는 남녀 누구나 될 수 있다. 과거에는 오히려 박수 중심이었는지 17세기 초반에 병자호란 때 제주도에 오게 되었던 김상헌의 『남사록』이라는 저서에는 ‘이 지방 풍속에는 예로부터 여자 무당이 없고 귀신을 모시고 기도하는 일은 다 남자 무당이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p 072


▶ 오키나와의 우타키


여성 사제자는 오키나와, 아마미 외에 일본 곳곳 변두리에 아직 그 존재를 겨우 유지하고 있다. 이를테면 도카라열도의 네시, 쓰시마의 묘부, 이즈칠도의 하치조섬과 아오가섬의 미코, 무녀들이다. 모두 낙도 이야기이며 본토에서는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고 여겨진다. 다만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신사 제사에 여성의 영향이 커진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이세신궁의 제사에 미혼의 여성 황족을 사제로 봉사시키는 사이구제도, 가모신사의 같은 제도 사이인은 그러한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두가지 제도는 당시 다른 신사에서도 제사가 여성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추측하게 한다. p 103



이러한 우타키를 대표하는 게 세이화우타키이다. 이곳은 류큐왕조의 최고 신녀, 왕비, 왕의 자매, 왕녀 등이 임명된 기코에오키기의 즉위식과 오아라우리를 행했던 곳으로 이세신궁과 견줄만한 성지이다. 지금은 가이드북에도 실려있고 주차장도 있어 관광 명소의 하나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통제가 심했다. 특히 남자 엄금으로 남자가 어쩔수 없이 들어가게 되었을 때는 여장해서 들어갔을 정도의 장소이다. p 109



오키나와에서 현재까지 제사의 중심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류큐왕조가 있던 시기에 기코에오키미를 정점으로 하는 확고한 신녀 조직을 구축한 점이 그 커다란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영적 우위를 인정하고 자매를 형제의 수호신으로 하는, 이른바 오나리신 신앙이 아마미, 오키나와 지방에 넓게 나타나는 것은 야나기나 구니오가 「누이의 힘」에서 다룬 이후 잘 알려지게 되었다. ‘오나리’란 형제가 자매 즉 여자형제를 이르는 말로 자매가 남자형제를 이를 때는 ‘에케리’라고 한다. p 111



(…) 세 명의 신녀가 있어 류큐왕조의 판도를 세 개로 나누고 각각 구역을 관리, 통괄했다. 그들 하에 있는 것은 하나의 마을 혹은 몇 개의 마을마다 한 명씩 둔 ‘누루’(노로라고도 함)이다. 누루는 임명제이긴 했으나 왕부에서 파견되는 일은 거의 없고 지역 구가 여성이 선택되었다. 부계를 따르는 세습으로 백모, 숙모에서 조카딸에게 이어지는 계승이 전형적이다. 현재도 누루, 쓰카사 제도는 오키나와 전역에 남아있기는 하지만 소멸 직전에 놓여있다. 이제는 경제적으로 공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고 제사 수는 많아 여러가지 제약을 받는 누루, 쓰카사를 자진해서 떠맡으려는 여성은 극히 드물다. p 112



 

▶ 제주도와 류큐


제주도와 일본의 관계는 고대부터 서로 이주와 혼혈이 반복되어 왔다는 것은 틀림없다. 특히 거리적으로 가까운 고토열도, 쓰시마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상적이었다고 여겨지며, 한반도 남해와 서해의 섬들과 현해탄의 섬들은 한 때는 동일 문화권에 속해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제주도와 쓰시마에 대해 살펴보면 제주도에서 자리돔, 갈치 등 연안어업과 해조류 채취에 지금도 사용되는 떼배는 쓰시마에 현존하는 떼배와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그리고 작은 말은 일본에는 쓰시마, 도카라 열도, 요나구니 섬에 있는데 한국에는 제주도에만 있고, 쓰시마의 말은 제주도에서 건너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p 129



『제주도 무속연구』의 저자 현용준씨에 의하면 제주도에서는 제를 지낼 때 심방이 ‘대로 만든 채롱 위에 북을 세로로 세워 올려 고정시키고, 북채를 양 손에 들어 오른쪽 고면 만을 치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현씨가 쓰시마섬, 이키섬 조사 때 신사의 제의에어 신관이 이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북을 치는 것을 몇 군데 견학한 일이 있다고 한다. p 129



부언하자면 다니가와씨가 이 책에서 한반도에서는 정월 보름에 줄다리기를 하는데 제주도만은 구마모토, 가고시마에서 남도에 걸친 지역과 마찬가지로 음력 팔월 보름날 밤에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러한 사실은 제주도가 이 지역과 마찬가지로 쿠로시오 문화권에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 역사학자 김태능씨는 제주 여성아 한반도 본토보다 오히려 일본에 가까운 습속으로 ‘바느질 방법, 아이를 업는 방법, 물건을 등에 지고 머리 위에 올리지 않는다’는 점을 들며 예로부터 떠돌아다니는 성향이 강해 타지에 진출하는 규슈 시마바라반도와 아마쿠사섬의 여성들이 제주도에 건너간 것은 아닐까 추측한다. p 131



김철준 교수는 ‘제주의 삼성설화는 이 지석묘 영조자들의 설화였다고 생각된다’고 까지 말한다. 삼인의 일본 여성이 안에서 나타났던 나무상자의 표착지는 제주도 동남쪽 온평리로 알려져있다. 이곳은 규슈 서부지역에 가장 가까운 장소로 한때는 열운리라고 불렸다. ‘열운리의 여는 일본의 별칭인 이에 혹은 요와 비슷한 음이며, 이에인 즉 일본인들이 상고시대부터 이주해 온 장소라고 생각된다’고 김태능씨는 말한다. p 133



이러한 습속 외에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독립국이었는데 결국 본토에 귀속되어 지속적으로 차별을 받았다는 점, 최근에는 본토 사람들에 의해 제주도는 43사건, 오키나와는 오키나와 전투라는 비극에 휘말린 역사가 있다는 점에서도 제주도와 오키나와는 매우 닮아있다. p 140




▶ 신사와 한반도


제주도의 풍습도 포함해 당이 우타키와 관계가 있다면 우타키는 신사의 ‘원시형식’이기 때문에 당은 신사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니, 야요이 시대부터 고대까지 한반도 남부와 일본 본토, 특히 기타 큐슈와는 동일 문화권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당과 신사의 관계는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 우타키의 경우보다 훨씬 밀접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조차 든다. p 153



신사의 역사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신사의 신역에서 야요이 토기가 출토된 사례가 많다는 사실에서 야요이시대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렇다면 야요이 문화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전한 문화이기에 그늘이 신사의 성립에 관련이 없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벼와 철이라는 이른바 선진문명의 전수자이기도 했고, 신을 모시는 방법만 토착민들(조몬인)에게 배웠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p 154



『하리마국풍토기』 이보군이세노조에 ‘기누누히노이테, 아야히토노도라라의 조상’이라는 백제에서의 도래인이 ‘여기에 살려고 신사를 산기슭에 세워 신을 받들어 모셨다’라는 구절이 있으며, 또한 『고고슈이』에도 오진텐노 부분에 ‘진, 한, 백제에 종속하는 백성이 각각 많다. 감탄할 만 하다. 모두 그들의 신사가 있지만 아직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어, 도래인이 신사를 세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p 155



무라야마 마사오씨의 「조선관계신사고」는 「신명장」에서 도래계라고 추정되는 신사를 표로 정리해 싣고 있고, 그 수는 14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게다가 히라노신사, 마쓰오타이샤 등 이미 도래계로 확실히 알려진 신사는 제외한 것이니 실제수는 「신명장」 2,861사의 10퍼센트 가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신사 명과 제신, 기록, 항간에 전하는 유래를 통해 사실로 판명된 것들이다. 하지만 중고시대 이후 신사 측에서 한반도와의 관계를 꺼리는 경향이 강해져 이들 중에도 신사 명의 표기나 발음을 바꾸고, 제신도 원래 제신을 폐하고 『니혼쇼기』와 『고지키』의 신으로 하는 사례가 눈에 띈다. 따라서 이들 이외에도 도래계였던 사실을 지금은 알 수 없는 신사도 많다고 할 수 있다. p 155



신사에 대해 말하자면, ‘교토에서 가장 도래된 절인데, 전부라고 하면 과장이 될지도 모르지만 많은 부분에서 한반도 도래인의 신앙이 밀착되어 있다’라고 어느 좌담회에서 우에다 마사아키씨는 말했다. 실제로 가모신사, 히라노신사, 마쓰오타이샤, 후시미이나리타이샤, 야사카신사 등 교토의 유명한 신사의 대부분의 창사에 도래계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연관되어 있다. p 161



…이나리라고 칭하게 된 유래는 하타노나카쓰헤노이미지키 등이 먼 조상의 하타씨족 이로구는 벼농사로 유명했다. 그런데 떡을 갖고 과녁으로 하여 활을 쏘았는데 떡이 백조로 변하여 날아가 이 산에 내려와 벼가 되었으므로 이를 신사 명으로 했다. 『야마시로국 풍토기』 中 인용


후시미이나리가 있는 주변은 하타우지 세력의 중심이었던 곳으로, 신사가 진좌한 이나리산과 그 주변에는 몇 개의 고분이 있다. 이 고분의 일부는 하타우지의 고분이고, 이나리 신사는 그 고분에 묻힌 하타우지의 선조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서 후에 농업신이 되어 널리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고 고증하고 있다. 하타우지의 창사에 관련이 있는 교토의 신사로는 이외에도 마쓰오타이샤와 하타노사케키미를 모시는 우즈마사의 시키나이샤 오사케신사가 있다. p 162



야사카 신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해지고 있는데, 여기서 하나하나 소개할 여유는 없기 때문에 신사에서 나오는 『야사카신사 유서 약기』의 한 구절만을 인용하기로 한다.


…야사카 신사의 창립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사이메텐도 2년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온 부사인 이리시오미가 신라국 우두산의 스사노오미코토를 야사카 지방에 모셔, 야사카즈쿠리 성을 받은 것에서 시작했다는 설은 니혼쇼키에 스사노오미코토가 아들 이소타케루노카미와 함께 신라에 내려가 소시모리에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신찬성씨록에 야사카즈쿠리는 고구려인 시루쓰마노오리사의 자손이라는 기록과 추정을 합하면 거의 이치에 맞는 창립이라고 볼 수 있다. p 164



이세신궁도 한반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동안 그런 사실은 사라지거나 감춰져 이젠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향후 연구를 통해 점차 밝혀질 것이다. 김달수 씨의 『일본 속의 조선문화』 4에는 신궁 근처 이세시 구스베의 가라카미산을 찾으러 가는 도중 신궁사청에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퇴직 후에 지방사 연구에 볼두하고 있는 사람의 집을 방문하니 그 사람이 “조사를 하면 할 수록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그대로였어요”라고 했다. “모조리 조선 분위기가 풍긴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면 신궁사청이 곤란해진다는 거죠”라고 대답하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덧붙여 이스즈강을 따라가는 가라카미산은 신궁의 네기(신관)의 묘지였던 곳으로 커다란 고분이 있었지만, 다이쇼 초기 이스즈강 개수 공사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산에는 가라신사의 작은 사당이, 그리고 가까운 숲에는 구니쓰미오야신사, 오쓰치미오야신사라는 두 개의 신사가 있다. 신궁 네기의 무덤이 있던 산이 왜 가라카미산으로 불리는지, 왜 근처에 선조를 의미하는 미오야라는 이름이 붙은 신사가 있는것인지 의문만 깊어간다. p 167



이세신궁의 신궁이라는 명칭 자체가 신라에서 먼저 쓰였다는 설이 몇몇 사람들에 의해 나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9년 봄 2월조에 ‘신궁을 나을에 설치하였다. 나을은 시조가 처음 태어난 곳이다’라고 되어있는데, 이를 신궁의 첫 기록이라 한다. 그 전까지 역대 왕은 제 2대 남해왕 때 창건한 시조묘에서 제사를 지냈지만, 이후 시조묘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왕이 제를 지내는 것은 신궁이 됨에 따라 시조묘를 신궁으로 개명했거나 개편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잡기 제1, 제사조에 남해왕이 시조 혁거세의 사당을 세웠다는 것을 기록한 후에 ‘사계절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는데 친 누이동생 아로로 하여금 제사를 맡게 하였다’라고 하니, 이세의 제궁제를 떠올리게 하여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p 167



마에카와 아키히사씨는 「이세신궁과 신라의 제사제」라는 논문에서 ‘이세신궁이 신사에서 신궁의 칭호가 붙게 된 전화의 계기는… 신라의 제사성의 영향에 의한것은 아닐까 생각된다’고 설명하며, 이세신궁은 제사제도까지도 신라에서 배웠다고 한다. (…) 덴무도 이후 거의 정기적으로 복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제도로서 확립된 것은 덴무텐노시기로 보인다. 덴무텐도는 그 출신이 신라의 왕족이라는 설이 나올 정도로 신라에 가까운 텐노였다. 진신의 난이 덴지텐노의 친동생과 제1황자의 황위계승을 둘러싼 난이라는 종래의 설을 부정하고, 신라의 세력을 배후에 둔 오아마황자와 백제의 세력을 등에 업은 오토모황자의 싸움이라는 오와 이와오씨의 설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이 설이 맞다면 진신의 난 이후 덴무조에서 신라의 문물이 많은 분야로 들어왔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고 이세신궁도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이세, 시마 지방에는 그 이전부터 많은 신라계 도래인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 같다. p 168



이런 신라의 신의 숲은 당의 숲으로, 그리고 진수의 숲, 그러고 나서 우타키의 숲으로 이어졌음에 틀림없다. 신사와 한반도의 관계를 구체적인 사례에 입각해 추적해왔지만 끝이 없기 때문에 이정도로 해 두겠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 교토의 신사가 특히 한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데 무라야마 마사오씨의 「조선관계신사고」에서 조선과 관련 있는 시키나이샤가 가장 많은 곳은 이즈모로 11곳, 다음은 오미 10곳, 야마토와 이세, 에치젠은 8곳으로 3위, 야마시로와 가와치, 무사시가 6곳으로 4위였다. 이주모는 지리적으로 한반도 특히 신라와 가까워 신라와의 관계에는 예사롭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 p 169



약간 농담濃淡의 차이는 있으나 일본 대부분 지역에서 고대 도래인의 흔적과 그들과 연관 있는 신사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신사의 성립을 고찰할 때 한반도를 무시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p 171



신라의 신수신앙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했지만, 좀 더 보충해보자.


신라의 시조 혁거세는 숲 속 우물 옆에 놓인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고, 제13대 미추왕이 속한 김씨의 시조 알지는 계림에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 속에서 나왔으며, 또한 수도 경주는 원래 계림이라고 불렸으니 이 나라는 수림樹林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실성왕 시대에 경주 부근 낭산에 구름이 일어났는데, 향기가 가득 퍼져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으니 왕은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믿어 낭산을 성지로 하여 나무를 베는 일을 금했다고 한다. p 180



당과 신사 사이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둘이 거쳐 온 역사이다. 신사 신앙도 우타키 신앙도 모두 시종일관 국가의 신앙으로 국가의 두터운 비호를 받으며 박해를 받은 사례는 없었다. 그에 반에 당은 유교를 국교로 하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음사로 배제되고, 때로는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제주도 당의 박해 사례는 제1장에서 언급했지만, 그것은 제주도만의 일이 아닌 한반도 전체의 일이었다. p 181



일본에서 나오는 한국 가이드북에서 당을 접할 수 있는 책은 눈에 띄지 않는 것에 반해, 일본의 이세신궁이나 이즈모타이샤, 이쓰쿠시마신사 등에 대한 기술이 없는 한국 가이드북은 적다. 당의 자취는 희미하고, 그 존재는 없는 것과 같아보인다. 그렇기에 신사는 일본 고유의 것이라는 의식이 나타나게 된다. 한국인 스스로 손수 다룬 당과 당제에 대한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마침내 본격화되고 있고, 향후 연구가 진행되면 당과 신사가 숨겨진 형제 혹은 자매라는 점이 서서히 밝혀지게 될 것이다. p 183



 

그리고.....책 내용과는 조금, 아니 매우 관계없는 TMI



그러고보니, 이 책의 저자는 김달수 씨의 저서를 많이 인용하였는데, 그 김달수 씨의 저서가 우리집에도 있다. 그 책들은 여차저차해서 겨우 구하긴 했는데, 아직 읽지는 않았던 터라, 이 정도의 책을 쓴 저자가 인용할 정도면 그 내용도 정말 깊이가 있겠구나 싶다. 늦장 그만부리고 김달수 씨 책도 얼른 읽어봐야지(김달수 씨는 한일고대사에서 ‘도래인’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한 재일동포).



그러고보니22


이 책의 출판사가 제이앤씨다. 문득 내 책장에 일본사, 한일고대사에 관한 역사책들이 꽂혀있는 책장을 봤는데 놀랍게도 제이앤씨에서 출판된 책들이 여러권 있었다. 뭐지 이 출판사..? 눈여겨 봐야겠어!



그러고보니333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책은 번역이 꽤나 잘 되어 있다. TMI이긴 한데, 내가 읽어본 일본인이 쓴 책의 번역본 중 반 이상은 정말 가독성이 매우 떨어진다. 물론 나 역시도 제약논문 번역을 하면서, 번역이 어렵다는 것은 몸소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뭐랄까. 책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돈받고 하는 일일텐데, 그정도로밖에 못하나? 싶은 마음이 아주 수백번 드는건 어쩔 수 없달까. 헌데 이 책은 그저 그런 교양서도 아니고 학술총서인데, 이 정도의 매끄러운 번역이라니! 이런 번역본들만 있었으면, 내가 굳이 원서를 읽을 일들이 없었을 건데^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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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귀족 문화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무라카미 리코 지음, 문성호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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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영국 귀족문화에 대한 세계사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번에 같은 출판사에서 또 다른 영국에 대한 책을 출판했는데, 이번에는 무려 영국 여왕이다. 정확히는 대영제국의 최전성기 여왕, 그녀 재위했던 시기를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유명한 여왕, 바로 빅토리아 여왕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 어떤 유럽의 여왕 중에서도 유명세로 탑 파이브에 들지 않을까? 여튼 그정도로 빅토리아 여왕은 유명하다. 그녀가 유명한 이유는 대충 네가지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1. 빅토리아 시대, 해가지지않는나라, 대영제국의 최전성기: 대영제국, 아일랜드 연합왕국과 인도의 여왕


2. 그녀의 자손들이 유럽 왕실 곳곳으로 퍼져있어서, 일명 ‘유럽의 할머니’.


3. 영국 왕실의 전통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를 만든 여왕.


4. 유럽 왕실에 혈우병을 퍼트린 사람.


 



빅토리아 시대는 제국주의가 최고조를 달렸던 시기이다보니, 세계 곳곳에 대영제국 식민지가 있었다. 영국의 반대편에도 있었다. 그렇기에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따라서 이 시기가 영국에게는 제일 리즈시절이라 할 수 있지만, 그만큼 그림자도 많던 시기였다. 식민지가 많았다는 이야기에서도 충분히 추정할 수 있지 않은가. 간혹 tvN 프로그램인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영국아저씨가 출현하면, 그렇게 입이 마르도록 사과하는 이유가 바로 대영제국 시절의 영국의 그림자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의 할머니’와 ‘유럽 왕실에 혈우병을 퍼트린 사람’은 그 궤가 같다. 빅토리아 여왕의 자녀는 9명이었는데, 그 중 딸들이 여러 유럽 왕가와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42명의 손자녀를 두었다. 이 42명의 손자녀 중 손녀들도 역시 또 여러 유럽왕실로 시집을 갔다. 문제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혈우병 인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혈우병은 여성을 통해서만 유전이 되고, 남자만 발병한다고 한다. 즉, 빅토리아 여왕에게서 시작한 혈우병은 그녀의 딸, 손녀들을 통해 유럽 왕실 곳곳으로 퍼저나갔다. 빅토리아의 아들부터 시작해서, 손자, 증손자 등등. 혈우병은 계속해서 그녀의 피를 이은 유럽 왕실 남자들을 덮쳤다. 무엇보다 빅토리아에게 시작된 혈우병으로 인해 러시아 왕가가 몰락했다고 하니, 여러모로 그녀의 존재감은 대를 끊이지 않고 유럽왕실에 드리워졌다고나 할까?



‘군립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를 영국 왕실의 전통으로 만든 빅토리아. 그 덕분에 군주제가 몰락하는 시점에서도 영국 왕실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제 2장 정치편에서 이 부분에 대해, 빅토리아의 일기와 그녀의 정치력을 보여주며 설명한다. 말 나온 김에 이 책의 목차를 보면, 빅토리아의 유년시절을 시작으로, 여왕으로 즉위하고, 그녀의 사랑인 알버트와의 결혼, 그녀의 사생활과 정치, 최전성기였던 대영제국의 영광, 그녀의 사망까지를 이야기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일기와, 당대의 신문기사,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자서전등을 전부 망라해서 말이다. 소설이 아닌, 오롯이 사료에 의거한 영국사, 세계사책이다. 영국사, 특히 대영제국 시기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제 1장 즉위준비 1819-1837


제 2장 대관식과 정치 1837-1839


제 3장 빅토리아의 왕궁 1837-1880


제 4장 결혼으로 가는 길 1828-1840


제 5장 여왕의 주거와 가정생활 1837-1860


제 6장 만국박람회와 전쟁 1851-1858


제 7장 상복을 입은 여왕과 남자들 1861-1883


제 8장 제국의 영광 1868-1899


제 9장 끝날 때 1900-1901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빅토리아 여왕과 관련된 각종 삽화가 정말 많이, 아주 많이 실려있다는 점이다. 올컬러로! 물론 처음부터 흑백인 삽화는 어쩔수 없지만, 그를 제외하면 올컬러다. 만약 글만 있었다면 다소 지루했을지도 모르는 이 세계사책은, 올컬러 그림자료를 넣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읽는 즐거움 뿐만 아니라 보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아래에 이 책의 일부를 발췌하였다.


▶ 제 1장 즉위준비 1819-1837

6시에 어머니가 깨워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하울리와 커닝엄 경이 와서 내게 면회를 요청했다고 했다. 커닝엄 경은 유감스럽게도 나의 할아버지, 국왕께서 이미 세상에 없다는 것, 오늘 새벽 2시 12분에 숨을 거두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내가 여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했다. p 012, 빅토리아의 일기 中



(빅토리아가)탄생한 시점에 아버지 켄트 공에게는 세 사람의 형이 건재했으나, 모두가 정식 결혼에 의한 자식이 없었다. 만약 이 백부들 중 누군가가 적자를 얻었거나, 아니면 선왕이 살아 있는 동안 빅토리아에게 동생이 생겼다면 남자 우선인 계승 순위 때문에 왕위가 돌아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빅토리아가 겨우 8개월이 됐을 때 아버지 켄트 공이 세상을 떠나 동생이 태어날 가능성은 사라졌으며, 백부의 자식들도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빅토리아는 겨우 18세의 나이로 영국의 군주가 된다. p 012



모친인 켄트 공 부인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시종무관이었다가 자신의 회계관으로 등용된 존 콘로이와 함께 딸이 세간의 눈을 최대한 피하게 하고, 동시에 모랄면에서의 의심스러운 왕궁 사람들과도 심리적으로 깊게 엮이지 않도록 켄싱턴 궁전에 격리하듯이 키웠다. (…) 켄트 공 부인의 동생 레오폴드는 빅토리아에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는 사모의 대상이었으며, 동시에 지적인 인도자이기도 했다. 그는 세계 각지에서 현지의 정세를 적어 보내주었고, 편지를 통해 지리와 정치, 국제 정세의 지식을 전수했다. 자신이 여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아직 모르던 시절부터 빅토리아는 어머니와 콘로이, 레오폴드의 유도로 ‘그날’을 위한 준비를 착착 쌓아가고 있었다. p 019



1832년 7월, 13세일 때 어머니가 일기장을 준 일을 계기로 빅토리아는 더욱 구체적으로 하루하루의 기록을 일기로 남기기 시작했다. 이 일기는 가족의 죽음 등 도저히 말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중대한 일이 일어났을 때 중단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반드시 제개되었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 기록되었다. 또 언니, 숙부, 아이들, 가족과 친척에게는 대량의 편지를 썼다. p 021



빅토리아가 어른이 되어 남편과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보낸 건실하고 도덕적인 삶은 19세기 중류 계급 사람들에게 가정적 도덕의 모범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 원점에는 가족이 없던 왕녀가 도덕 교본과 인형놀이로 생각해낸 공상의 가정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면, 참으로 얄궂은 상황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적은 것들은 모친이 매일 체크했고, 당연하지만 왕녀가 읽는 것들도 엄하게 제한되었다. 켄트 공 부인은 침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딸이 하인이나 여관과 필요 이상으로 잡담을 해 영향을 받지 않도록 가정교사에게 트리머 부인의 도덕 교본을 낭독해 들려주도록 명령했다. 당사자의 시점으로 생각한다면 모든 면에서 모친의 간섭과 제한이 많았던 소녀 시대였음을 엿볼 수 있다. p 023



켄트 공 부인은 빅토리아가 즉위할 때까지 같이 침실에서 자고, 가능한 딸을 자기의 컨트롤 아래에서 키우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사교 행사로서의 정찬에는 적극적으로 출석시키지 않았다. 이때의 의도는 어른으로 취급하지 않고, 아이인 채로 머물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인 켄트공 부인과 측근이자 브레인인 존 콘로이에 대해서는, 빅토리아를 세간과 격리해 아이 취급을 했다는 점에서 역사가나 전기 작가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아가서는 콘로이는 사설 비서, 모친은 섭정으로 지명되어, 즉위 후에도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다. 장사자의 생각은 당연히 별개였다. p 031



빅토리아가 자신이 여왕이 될 것임을 안 것은 1830년 3월 11일, 10세 때였다고 한다. 위의 인용은 즉위 50주년과 60주년 시기에 대량으로 제작된 저렴한 기념 책자 중 하나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좋은 사람이 되겠다’라는 대사는, 그녀의 성격의 핵심을 나타내는 일화로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말했는지 디테일은 달라지지만, 다양한 종류의 여왕 전기, 회상록, 기사 등의 초반 하이라이트에 대부분 등장한다. p 038



신의 뜻에 따라 이 지위에 오른 이상, 나는 전력을 다해 나라를 위한 의무를 다할 것이다. 나는 너무나 어리고, 전부라고까진 하지 않더라도 많은 부분에서 경험이 부족할 테지만, 지금의 나만큼 올바른 일을 하겠다는 진정한 선의와 열의를 품은 사람은 없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p 040, 빅토리아의 일기 中




▶ 제 2장 대관식과 정치 1837-1839

그것은 빅토리아의 어머니 켄트 공 부인의 여관인 레이디 플로라 헤이스팅스에 관련된 사건이었다. 당시 빅토리아와 켄트 공 부인의 모녀 관계는 더욱 험악해져갔으며, 이렇게 사이가 나빠진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너무나도 싫어하는 콘로이와도 친하게 지냈던 여관 플로라는 그들의 스파이처럼 느껴졌다. 빅토리아는 그녀를 ‘엄마의 느낌 좋은 레이디’라고 일기에 적었지만, 당연히 비꼬는 것이었다. p 056



여관과 총리를 둘러싼 문제는 같은 시기에 하나 더 더해졌다. 1839년 5월, 휘그파의 멜번 총리가 식민지 자메이카를 둘러싼 법안에서 패배하고, 반대파인 토리파로 정권이 교체되게 된다. 이 시기까지 빅토리아는 정치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멜번총리에게 의지하고 있었으며, 그와 빅토리아는 아버지와 딸 같은 관계를 쌓고 있었다. 대관식 날의 일기에는 자신을 지켜보는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던’ 것을 네 번이나 되풀이해서 적었을 정도로. 여왕은 마지못해 토리파의 원로 정치가 웰링턴 공작을 불러 총리가 되기를 요청했으나, …. 필은 빅토리아의 침실 여관 중 ‘몇 명인가를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 이 여관은 전원 휘그파 정치가의 아내들 중에서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 빅토리아는 ‘전원을 바꾸라고 강요당했다’고 해석해 강하게 반발했으며, 일체의 변경을 거절한다. 결과적으로 필은 내각을 조직하는 것을 단념하고 멜번이 돌아오게 되었으며, 여왕은 만족했다. 하지만 정치에서 구심력을 잃었던 멜번 총리의 명운은 금방 다했고, 2년 후에는 사임하는 사태로까지 몰리게 된다. p 058 ~ 061



빅토리아의 치세는 길었다. 경험을 쌓은 그녀의 의견은 존중되었고, 발군의 기억력을 기초로 제시되는 과거의 지식은 대신들에게도 나름대로 존중받았다. 하지만 편지나 총리와의 회견을 통해 매일 영향력을 발휘한다 해도, 최종적인 결정에는 의회의 의향이 우선시되었으며, 정치나 외교, 군사에 관한 커다란 문제에 여왕 개인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한 입장으로 서서히 물러났기때문에, 수많은 나라에서 군주제 그 자체가 폐지되던 역사적 흐름 속에서도 21세기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국 왕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p 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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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근대인물 기행 - 한일 근대사 속살 이야기
박경민 지음 / 밥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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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내 주 관심사인 한일관계사 역사책을 들고 왔다. 물론 서평은 오랜만이고, 근래까지도 한일고대사책은 종종 읽었다. 서평만 안했을 뿐!




이 책은 한일관계사 중에서도 근대사를 다룬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암흑기이자 떠올리고 싶지 않은 역사인 근대사를 말이다. 단, 일제강점기까지는 가지 않는다. 일제강점기까지 가는 과정을 그릴 뿐이다. 그 과정을 그리는데 있어서 중심은 인물이다. 한일 근대사에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흐름을 만든 조선인과 일본인을. 그 인물들 중에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을 법한 인물도 있다. 반면에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인물들도 있다. 한, 일 양 국가간의 인물 모두 말이다.



우리는 조선이 어째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지를 알고 있다. 다만 ‘제대로’ 알고 있는게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국사, 근현대사를 배웠을 당시에는 그 유명한 순/헌/철 시대의 세도정치와 나쁜 일본인들에 의해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정도만 배웠다. 약간 ‘남탓’ 위주였다고 해야할까? 여튼 그렇게 배웠다. 반대로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역사인 독립운동사는 아주 세세하게 배웠다. 이름이 비슷비슷한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을 하나하나 외우면서. 이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국사,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오로지 수능 때문이었으니까. 그냥 가르쳐주는 대로 배웠고, 수능을 봤으며, 한 문제 틀린걸로 분노했었더랬다. 뭐 여튼, 그랬다.



그리고 꽤 오랜시간이 흘렀다. 언제부턴가 역사책을 읽는데, 특히 한일관계사 관련 역사책을 읽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임진왜란이 오롯이 왜놈들 탓인가? 2백년간의 평화에 도취되어, 국방력을 조금씩 조금씩 줄여나간 조선의 위정자들은 문제가 없었나?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의 리더십은 문제가 없었나? 일제강점기가 온게 오롯이 나쁜 왜놈들 탓인가? 당시 조선의 왕과 조선을 주름잡던 노론세력들은 정말 문제가 1도 없었나?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어두운 역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엄연한 우리의 역사를 말이다.



우리 조상들의 어두운 역사를 이야기하면, 식민사관이다 뭐다해서 마녀사냥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내 블로그에도 그런 덧글들 꽤 있었음^^). 그나마 다행인 건 요즘은 시대가 변해서, (학교교육은 몰라도) 예전처럼 빛나는 역사만 이야기 하지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다행인지. 몇 백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류성룡의 『징비록』이 빛을 발하는건가 싶기도 하다. 확실한 건 요즘은 서점에서도 ‘징비’를 하는 역사책들이 왕왕 보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시리즈 같은?



‘징비’란 지난 일의 잘못을 후회하여, 후에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한다는 뜻이다. 즉, 나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대비한다는 뜻이다. 고로 징비를 하기 위해서는, 지난 잘못에 대해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알아야 하는게 우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한일 근대인물 기행」도 ‘징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저자는 조선후기부터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까지, 조선과 일본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미화도 생략도 없이 사실에 기반하여 책을 썼다. 특히나 동시간대의 일본과 조선의 위정자들이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 그 행보의 결과가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말이다. 그러다보니, 한일근대사를 학교에서만 배우고 끝난 사람들에게 이 책은 배신감을 주는 책일 지도 모른다. 왜? 학교에서는 남탓(일본) 위주로 가르쳤으니까.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내가 배웠던 교육과정에 한해서지만. 거기다 일본이 조선을 야금야금 집어삼킬 수 있었던 이유조차도 대게 가르쳐주지 않기도 했고. 그렇기에 난 한일근대사 역사책으로 이 역사책을 추천한다. 정확한 내용을 알아야,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고, 그래야만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류성룡이 『징비록』을 썼으나, 조선의 위정자들은 이를 무시했고 결국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일이 또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장담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알아야만 한다. 임진왜란 이후 왜 같은 일이 반복되었는지를 말이다. 그게 바로 이 역사책을 추천하는 이유다.




조선과 일본, 

근대화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은 그 기회를 잡았고

조선은 그 기회를 철저히 무시했다.




조선과 일본, 일본과 조선. 근대화의 시작.


조선과 일본. 서구열강의 눈에는 두 나라 모두 먹기 좋은 살구였다. 어떻게든 개항을 하게 하면 되는 거였다. 다만 서구열강에 비해 조선과 일본은 힘이 없었으니, 당연히 불평등한 시작이었을테지만 말이다. 확실한 건 불평등이라 할지라도, 개항을 해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하느냐 마느냐이다. 



미국은 함대를 이끌고 일본의 해역으로 들어갔다. 조금의 시차는 있으나, 미국의 배는 조선의 해역으로도 들어왔다. 하지만 조선과 일본의 반응은 달랐다. 일본은 미국을 받아들였고, 조선은 거부했다. 그것도 아주 극렬하게 거부했다. 여기서부터 조선과 일본, 일본과 조선의 평행선은 끊어졌다. 일본은 빠르게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룩한다. 반면에 조선은 강력한 쇄국을 단행한다.



조선과 일본의 서로 다른 선택의 배경은 어디서 나온 걸까?


시마바라의 난을 계기로 천주교가 가공할 단결력을 가졌음을 절실히 깨달은 막부는 천주교에 대한 단속과 탄압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쇄국정책을 ‘조법’이라며 막부 말기까지 약 250년간 엄격하게 유지했다. 이와 같이 에도막부는 엄격한 쇄국정책을 오랫동안 흔들림 없이 시행했지만, 조선의 쇄국과는 개념상 많이 달랐다. 즉 서구문물과 기술에 호의적인 반면 천주교에는 폐쇄적이었고, 무역의 효용성은 잘 알지만 막부 외의 다이묘와 상인들이 활용하는 것을 엄금했다. 정리하면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은 막부가 허용한 다음과 같은 4개의 제한된 문을 통해서만 바깥세상과 교류할 수 있었다.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통한 네덜란드 상인과의 독점무역


쓰시마번을 통한 조선 왜관에서의 독점무역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의 류쿠왕국에 대한 편취무역


마쓰마에번(현 마쓰마에군)의 에조치현(현 훗카이도)에 대한 독점무역 . p 029



일본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을 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서구문물(네덜란드)이 들어오는 창구 하나는 계속해서 유지했다. 즉, 본인들의 사상에 걸림돌이 되는 종교는 반대하지만, 본인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기술이나 문물은 끊임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조선은 서구의 문물도, 서구의 종교도 전부 반대했다.



개별적인 수탈 외에 탐학한 관리들은 교묘한 수법으로 삼정의 제도를 이용한 시스템적인 수탈을 가장 많이 활용했다. 전정은 경작하는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이다.농민들은 원래 수확량의 1/10 정도를 내면 되었으나, 지방 수령들이 여러 가지 명목의 부과금을 붙이며 점점 늘어나기 시작해 심한 경우 수확량의 1/2까지 수탈당했다. 군정은 16~60세의 남자가 군역 대신 군포 또는 쌀로 내는 세금이다. 18세기 중반 균역법의 시행으로 부담이 절반으로 줄었으나 군포를 면제받는 양반 수가 늘어나자 그 부족분이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지방관들은 죽은 사람에게도 부과하거나(백골징포), 어린이에게도 부과하고(황구첨정), 친척들에게까지 세금을 내게 했다(족징). p 065



정조는 죽기 직전 세자와 김조순을 불러 세자에게 옆에 있는 김조순을 가리키며 그의 보필을 받으면 절대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라는 유훈을 남겼다. (…) 딸이 순조의 왕비(순원왕후)로 책봉되자 그는 영안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804년 정순왕후가 수렴첨정을 거두자 어린 순조를 대신해 섭정했다. 김조순은 정순왕후가 승하한 1805년 막후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p 071



김조순의 막내아들 김좌근은 초고속 승진을 통해 명실상무하게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핵심이 되었다. (…) 1862년 삼정의 문란 등으로 발생한 각지 농민봉기의 대책으로 설치된 삼정이정청의 총재관을 겸했다. 농민봉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삼정이정청에 농민봉기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세도정치의 원흉을 앉혔으니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 수 있을까? 조선 말기의 정치가 늘 이런식이었다. p 074



조선은 세도정치로 망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세도정치를 하던 당시 집권여당(안동 김씨 등)을 탓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세도정치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 사람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고 일컫는 정조다. 정조는 안동 김씨의 좌장 김조순을 직접 국구로 만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조는 외척의 위험성을 잘 아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조순에 힘을 실어주었다. 김조순은 내 사람이니 안그러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 문제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일 큰 문제는 정조의 조선은, 오로지 정조 한 사람 덕분에 굴러갔던 것이다. 시스템에 의해 잘 굴러가는 조선을 만들었어야 했으나, 정조의 조선은 시스템이 아닌 사람, 즉 정조 한 사람이 움직이는 나라였다. 그렇기에 정조가 죽자마자, 정조라는 한 사람 때문에 숨죽이던 간신들이 여기저기 몰려나와, 조선을 갉아먹기 시작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 열강이 앞다투어 조선으로, 일본으로 밀고 들어왔다.


(일본) 2개월이 넘는 협상 끝에 1854년 3월 31일 역사적인 미일화친조약을 맺었다. 막부는 일단 개항해 전쟁을 피하되, 시간을 벌어 서양을 이길 국방력을 키우자는 심산이었다. 역사적인 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개국으로 나아가는 첫발을 내디뎠다. 통상조약은 아니지만 일본이 서양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이 조약을 모델로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조약을 체결했는데, 최혜국조항 등 일본에 불리한 조항을 뒤늦게 깨닫고 나서 후일 메이지 신정부가 오랫동안 불평등조약 개정이라는 숙제를 떠안게 된다. p 034




(조선) 프랑스군과의 병인양요에 이어 신미양요에서 미군이 물러나자 대원군은 더욱 확고한 쇄국으로 치닫게 된다. 일본이 이미 개항했다는 것과 개항 이후 벌어지는 일본 사회의 격렬한 변화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국제정세 파악에 소홀하고 시대적 소명을 통찰하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 조선호는 시대의 조류와는 역방향으로 더욱 강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p 133



일본은 미국에 개항했다. 당연히 불평등한 관계였으나, 일본은 개항했다. 당시 청나라 이홍장과 주중 일본공사 모리 아리노리의 대화에서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홍장이 물었다. “왜 귀국은 서양옷을 입는가.”


모리가 대답했다. “옛날 옷은 놀기에 좋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데는 절대 맞지 않는다. 우리는 가난하고 싶지 않다. 부자기 되기 위해 옛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했다.”


이홍장이 반격했다. “의복 제도는 조상에 대한 존중 표시다. 만세 후대에 이어야 한다.”


모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조상이 살아 있어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천 년 전 조상들은 중국 옷이 당시 일본 옷보다 우월해서 중국 옷을 택했다. 남의 나라 장점이 보이면 일본은 어떻게든 배워서 따라한다. 그게 일본의 미풍양속이다.” _P 287 (「대한민국 징비록」 中 모리 아리노리 전집 일부, 박종인 」




조선은 미국이 이 땅에 들어오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렇기에 조선의 백성들을 사지로 밀어넣었다. 무기에서부터 이미 엄청난 차이를 보인 미군과 조선군이었음에도 말이다. 결국 조선 군은 미군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딱 48시간만에 종료된 이 날, 미국 전사자는 단 3명인 반면, 미군측에서 작성한 기록이긴 하지만 조선군은 최소 300명 이상이 죽었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날의 전투는 조선의 ‘승리’로 둔갑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미국이 조선의 해역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그저 미국이 조선의 개항을 ‘포기’하고 돌아선 것인데도,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조선이 승리했다고 자축했다. 조선군은 전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조선은 완벽한 쇄국을 선언하며, 조선 땅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신미양요 4년 뒤, 일본 운요호가 미국이 했던 것 처럼 강화도로 쳐들어왔다. ‘개항’을 빌미로 말이다. 과거 미국이 일본에 그러하였듯이. 이 때의 일본은 이미 근대국가로 돌아선 뒤 였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에 문호를 개방하고, 먹는 것 부터 입는 것 까지 모든 것을 서구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본은 근대국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1863년 봄 5명의 조슈번 청년들이 밀항해 영국 유학을 가기 위해 영국 범선의 석탄 창고에 숨어 요코하마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서구의 해군과 국방기술을 배우고 온 후 제대로 된 양이를 하겠다’고 번주를 설득했고, 당시 번의 실세 다카스키 신사쿠의 지원으로 유학이 결정되었다. 유학이 불법이었기에 번주는 모르는 체 하되 사적으로 경비 지원을 해주었다. p090 (유학생 중 한명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



메이지 신정부는 선진국의 근대문물을 직접 시찰하고 이를 개혁에 반영하고자 용단을 내렸다. 오늘날 장차관과 국장 등에 해당하는 상당수의 핵심 인력이 무려 2년 가까운 기간에 걸쳐 구미 12개국을 순방했다. 이들의 또 하나의 숨겨진 임무는 서구와 맺은 기존 불평등 조약의 재협상이었다. (…) 당시 신정부의 실세 및 정부 각 부처의 중견 관리 41명, 수행원 18명, 유학생 43명 등 100명이 넘는 대규모였다. 이들의 장기 공백으로 정무에 큰 차질이 빚어졌으니 메이지 신정부의 서구 따라잡기를 통한 근대화의 의지와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p 112



이렇게 말이다. 이 때 서구에 유학을 갔던 유학생들이 훗날 메이지유신을 주도하고, 근대 일본의 권력층에 선 사람들이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일조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원수’라는 말로도 부족하나, 일본에서는 나라를 발전시킨 애국자였다.




조선은 세도정치 후에 또 다른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그저 성씨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거기다 왕실은 황제국을 자칭했다. 물론 일본도 만세일계라는 허황된 말로 (천황)제국주의로 나아갔지만, 적어도 일본은 근대국가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오로지 황제를 위한 헌법을 만든 대한제국과는 달리, 일본은 천황제를 명시하긴 했으나 적어도 서구열강의 헌법을 조사하여, 외적으로나마 입헌군주제의 면모를 갖춘 근대헌법을 만들었다.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탕평책을 추진해 그간 소외되어 있던 남인과 북인등을 골고루 발탁했다. 아울러 역량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탈세와 당쟁의 온상이자 유림의 사권력으로 뿌리내린 서원을 정리했다. (…) 백성들에게 피해가 컸던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를 시행했고, 지방특산물의 진상제도를 폐지하는 등 백성들의 잡세를 없앴다. 양반과 토호의 세금 등을 철저히 조사해 양반에게도 세금을 부과했다. 호포제를 시행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했고, 양전을 통해 토호와 양반의 누락 토지를 발굴해 전정을 개선했다. 또한 은광 개발을 허용하는 등 나라의 재정확충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p 127



1865년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확실히 세우기 위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의 중건 공사를 시작했다. (…) 양반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원성이 높아져 대원군 몰락의 한 원인이 된다. p 128



물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개혁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희망은 있었다. 하지만 그 개혁의 중심이 왕권강화였기에, 결국 그 개혁도 경복궁 중건이 시작되며 빛을 바랬다. 거기다 천주교 박해는 계속 되었고, 쇄국 역시도 계속되었다. 심지어 아들인 고종은 아비를 못마땅해하면서, 부자간의 권력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그 사이에는 고종의 부인인 민비가 있었다. 고종이 권력을 잡았을 때, 민비도 권력을 잡았다. 그렇게 조선에는 또 다른 세도정치가 시작 된 것이다. 여흥 민씨라는 성씨만 바뀐 세도정치가.



근대화의 기회를 무시하고

철저하게 ‘황제국’을 선언한 조선은

망국행 급행 열차에 탑승했다.



물론 조선에도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했던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그들은 실패했다. 



아시아에서는 제일 빠른 근대국가가 된 일본은 아래와 같이 차근차근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준비 과정에서 보다 원활하게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기 위해,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황실을 위한 당근도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다는건 안비밀.



ㆍ1904년 한일 의정서 및 제 1차 한일협약 - 조선을 일본 군사기지로 사용, 고문 정치, 그리고 대한제국 황실 보전 및 보증


ㆍ1905년 제 2차 한일협약 (을사늑약) - 외교권 박탈, 그리고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 유지 보증


ㆍ1907년 한일신협약 (정미7조약; 정미늑약) - 차관정치, 고종 강제퇴위 및 조선 행정권 등 박탈


ㆍ1909년 기유각서 - 사법권 박탈


ㆍ1910년 6월 - 경찰권 박탈


ㆍ1910년 한일병탄 - 국권피탈, 그리고 한국 황제 및 그 일가의 존엄과 명예 향유 보존 및 충분한 세비 지원




또 다시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과연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 해군이 욱일기를 단 일본 전함에 경례를 한게 불과 최근이다. 욱일기를 단 일본 해군이 독도 인근에 들어온 게 얼마 안된 일이다. 



류성룡이 말한 ‘징비’를 우리는 얼마나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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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한번씩 블로그에 서평을 올렸던 역사책 중 일제강점기 관련 역사책 몇 권을 다시 꺼내어 읽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암흑기와도 같은 바로 그 시대이다. 암흑기인 일제강점기를 그린 책은 크게 독립운동과 일제의 만행으로 나뉠 수 있는데, 이번에는 내가 소개하려는 책은 일제의 만행과 관련된 책이다. 이 역사책은 그 내용도 탄탄하거니와, 우리가 절데 잊어서는 안될 역사이기에 과거에도 여러차례 블로그에 소개했던 책이기도 하다.



물론 이 역사책들은 일제의 만행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보니, 가벼운 맘으로 읽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무겁다.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토록 모르고 살면 안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가해자인 일본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역사이다보니, 당시 피해자였던 우리마저 이 역사를 잊는다면, 지난날 일제의 만행은 없던일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나해서 덧붙이지만, 난 반일을 하자는 이야기도 일본을 가지말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나만해도 시간만 되면 일본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고, NHK채널을 자주 보고, 일본원서를 자주 읽는 사람이니까. 그저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매번 무슨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갑자기 ‘반일’, ‘불매’를 들고 일어나서 씩씩거리다가, 어느 순간에 슉 가라앉아서 ‘반일이 무엇? 불매가 무엇?’ 하며 모르쇠하는 그런 상황도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 어떠한 이슈로 인해 반일, 불매를 외치면서 누군가를 ‘매국노’라고 마녀사냥하는 행위는 정말-.. 일제와 다를바가 하나도 없다. 그렇게 누군가를 매국노라고 칭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애국자이고 깨끗한지 본인을 돌아봤으면 좋겠다. 과연 본인들은 일제의 잔재가 남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일본음식을 먹지 않고, 일본제품을 하나도 쓰지않는지, 경술국치일이 언제인지, 아니 경술국치가 어떤 의미인지는 아는지, 수백명의 독립운동가들 중 이름과 그의 행적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지, 매 국경일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는지,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보고 싶다.



이렇게 쓸데없기 길게 말한 이유는 단 하나다. 저렇게 누군가를 탓할 시간에, 혹은 어떠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냄비처럼 들끓었다가 가라앉을 시간에, 차라리 한일근대사에 대해 정확히 알고 기억하기를 바란다. 눈앞에 있는 일본인들이 똥베짱 부리면서 자기네 조상들은 잘못없다고 말할 때, 왜곡으로 점칠된 역사를 배우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 그들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요목조목 냉정하게 지적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현대에도 곳곳에 남아있는 친일파들이 백년전 그 때처럼 기승할 생각을 못하도록 매섭고 날카로운 눈으로 감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1) 일본이 찾아낸 침략과 식민지배의 기록: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지은이: 아카하타신문편집국 기자들

출판사: 정한책방



이 책은 일본 기자들이 기록한 책이다. 제국주의 시절 자기의 조상들이 어떠한 만행을 벌였는지 직접 보고, 듣고, 두 발로 뛰어가며 목숨 걸고 취재하여 남긴 기록물이다. 이 책 안에는 일본이 제국주의시절 자행한 모든 불법행위에 대한 증거와 증언(녹취록)이 그대로 담겨있다. 이 책의 서문은 이렇게 쓰여 있다.


​이 책은 침략 전쟁의 역사와 상황을 규명하고, 기자들이 한국, 중국 등에서 피해를 입은 현지 주민들로부터 직접 들은 증언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1부 '청일/러일전쟁에서 패배 전까지의 51년'과 '한국병탄과 식민지 지배'에서 다룹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한 것은 청일/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주된 목적이 한반도의 국민과 자원에 대한 '강탈적 지배'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일본군의 개입/군사지배에 저항하며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항일의병운동 등과 같은 한국의 민중 운동, 특히 3.1 독립운동이었습니다. 



한일 관계의 초점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위안부 피해자를 직접 취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의 통제 아래 벌어진 수 많은 여성 인권 유린 행위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중략)


실제로 천황 절대의 암흑 정치 세력에 의해 불법화된 당 기관지 <세스키>는 '조선 독립운동 3.1기념일 만세!', '일본, 조선, 대만, 중국 노동자/농민의 단결!', '조선의 토지를 조선의 농민에게!' 등의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우리의 선배들이 탄압받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투쟁은 미래를 향한 한일 두 나라와 두 나라 국민들의 우호에 있어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확신합니다.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서. 부디 이 책을 읽어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국 독자에게 전하는 글 - 아카하타 신문 편집국장>



이 책을 쓴 일본 기자들은 자기 조상들의 신념을 따랐다. 식민지배를 하던 민족이었음에도, 당시 식민지 노동자들의 편에 섰던 그 조상들의 신념을 말이다. 그래서 과거의 그 조상들처럼, 이들도 일제의 만행을 취재하는 내내 수많은 반대와 살해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자 이 책을 썼다.



당시 식민지배를 당했던 조선과 우리 조상들. 백여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그 땅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식민지배 당시 일제의 만행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조상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있나? 이 책을 읽다보면 머릿속에 이런 질문들이 떠다니기 시작한다. 가해국가의 기자들은 자국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책까지 내었는데, 당시 피해국가의 후손들인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 14살 때 강제 동원된 한국의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초등학교 일본인 교장과 헌병은 "정신대로 일본에서 일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여학교도 갈 수 있다." 라며 학생들을 속여 양씨 등 10명을 지명했습니다. 나중에 부모들이 반대한다고 하자, 교장은 "네가 안 가면 경찰이 너희 부친을 잡아갈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렇게 끌려가게 된 곳은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의 도우도쿠 공장이었습니다. 삼엄한 감시하에서 거대한 비행기 부품에 도장작업을 했습니다. 당시 페인트가 자주 눈에 들어갔던 탓에 지금도 눈이 아프다고 합니다. (중략) 양 씨는 일본이 패전을 맞은 뒤인 1945년 10월에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급료는 받지 못한 상태였고,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받았습니다. 정신대였던 것을 숨긴 채 결혼했는데, 남편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되자 "더러운 여자"라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 P 100



-위안소를 전전하며, 김복동


김 씨가 14살이던 당시 마을의 구역장과 반장이 일본인과 함께 찾아와 "딸을 군복 만드는 공장에 보내라. 거부하면 반역자다" 라며 가족들을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끌려간 곳은 중국 광둥성에 있던 위안소였습니다. 일본군의 성 노예가 되어 하루 15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주말에는 50명이 넘었습니다. 5년간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등을 전전했습니다. 외국에 가면 일본 정부가 이 문제를 이미 해결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보니 이야기를 하면 다들 놀라면서 이대로는 안된다고 많이 공감해주십니다. 



-중국 후난성, 창지아오 학살사건


쟝야오메이 증언) 일본군이 창지아오에 왔을 때 쟝씨는 생후 1개월이 된 작은 딸과 집에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일본군은 쟝 씨를 발가벗겨 이웃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부엌에 이불을 깔더니 당시 15살 정도이던 그 집 소년에게 쟝씨를 강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호통을 들은 소년은 얼떨결에 쟝 씨를 덮쳤지만 공포로 떨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화가 난 일본군은 나무 막대기를 쟝 씨의 하반신에 쑤셔 넣고 30분 이상 고통을 주었습니다.


런더바오 증언) 일본군이 집에 들어와서 총검으로 런 씨의 머리를 가격하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다음 날 출산 예정이던 모친은 거동조차 힘든 몸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일본군이 총검에 2번이나 배를 찔려 태아와 함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군은 이에 멈추지 않고 모친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낸 뒤 총검으로 찔러 높이 내걸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동료 일본군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습니다. 



-정의감 강하던 아버지도 결국 가해자


고바야시의 차녀 노자키 요시코가 <아카하타신문>에 아버지, 고바야시 다로 당시 상등병의 일지를 제공했습니다. "가족으로서는 가해 사실을 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요. 그러나 침묵하고만 있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잖아요. 괴롭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난징점령 (1937년 12월) 까지의 행군과 일본 육군 최대 규모 작전인 '쉬저우 작전'의 경로를 기록한 일지입니다. "병사는 칼로 머리를 벤다. 토민(민간인)은 총살"등의 기술이 남아있습니다. 일지의 기술만 봐도 살해당한 민간인이 15명 입니다. (중략)


포로 살해 관련 일지에는 제16사단의 나카지마 게사고 사단장이 "돼지 같은 놈들은 주저 없이 죽여도 된다"고 명령한 내용도 적혀있습니다. (중략)


고바야시의 차녀 노자키는 고등학생 시절에 처음 일지를 읽었을 때, 기록되어있는 가해의 참상을 접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족의 입장에서 볼 때는 늘 성실하고 정의감이 강했던 아버지였기에 더욱 무서웠고, 전쟁의 끔찍함 또한 통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베 총리는 중일전쟁이 침략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아버지의 일지를 보면 애초부터 침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희생자 유족에게 사과한다고 바뀔 것은 없겠지만, 스스로 가해를 저질렀다는 진실과 마주할 수는 있겠지요. 이 일지가 평화를 위해 작게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2)분노하기 전에 알아야 할 쟁점 한일사


지은이: 이경훈

출판사: 북멘토



이 책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만행과 그 만행들을 왜 지금까지 풀지 못하고 있는지를 요목조목 밝히고 있다. 총 아홉가지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으며, 그 아홉가지가 바로 “일본군 성 노예, 강제동원, 사할린 한인, B·C급 전범, 야스쿠니 신사, 재일 한국인, 독도, 문화재 환수, 역사교과서” 문제이다.



이 아홉가지 문제를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하는 제일 큰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한일기본조약’이다. 1965년 박정희 정권 당시 한일국교가 정상화 되었는데, 이 때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이 바로 일제의 만행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는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체결된 조약·협정은 ‘이미 무효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은 일본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강요된 한일병합 이전의 모든 조약이 무효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체결은 합법이었으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무효가 되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 중략 … 청구권협정으로 일본이 한국에 제공한 무상 3억달러, 유상차관 2억달러의 성격에 대해서도 한국은 배상금이라고 주장하지만 일본은 ‘독립축하금’이라고 하여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한일 간의 재산·권리 등에 대한 청구권에 대해서도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한다’라고 하여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에 따른 한국국민들의 개인청구권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나마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한인, 원폭피해자 문제 등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B·C급 전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한국인들에 대한 피해보상에 관해서도 일본 측은 한일청구권협정을 내세우며 한국 측에 보상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졸속으로 체결된 재일한국인협정은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와 민족차별 문제를 매듭짓지 못하였습니다. 어업협정에서는 독도문제를 협정문에 명기하지도 않았고, 문화재 협정에서는 협정 이후 새롭게 드러나는 일본인 개인이 소장한 한국 문화재의 환수에 대해서 한국정부에 '기증되도록 권장'한다고 하여 이후 약탈당한 문화재 환수에 적극적으로 나서가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_ P 016



심지어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던 그의 딸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과 밀실협약을 맺기도 했다. 거기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은 사법농단과 재판거래등으로 무기한 연기되기도 했다. 이후 정권이 두 차례나 바뀌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변한 것은 없다. 아, 생각해보니 변한 것이 하나 있긴 있다. 당시 생존해계셨던 피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돌아가셨다는 것. 이제 정말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야 할 당사자인 피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몇 안계신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정부나 일본 정부는 변한 것이 없다.




3)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지은이: 강덕상

출판사: 역사비평사


이 책을 쓴 사람은 얼핏 보면 한국인이지만, 사실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태어난 황국신민이었다. 당시 지도상에 ‘조선’은 없었으므로, 그는 일본어를 쓰고 일본문화를 향유하던 일본인이었던 샘이다. 심지어 일본에서 살았으니, 조선에 대한 기억이나 향수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하지만 그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조선이었다. 그런 그가 역사를 전공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한반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렇게 관동대지진에 대해 알게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있었던, 조선인을 상대로한 관동대학살을 마주한다.



저자는 책에서 이리 말했다. ‘왜, 어째서, 무엇때문에, 관동대학살의 피해국인 한국정부는 이 일에 대해 언급이 없고 무관심한건가?’. 



그래서 관동대지진과 관동대학살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기록물을 찾아다니고, 증거, 증언 등 수 많은 자료를 모았다. 그리고 이 책에 실었다. 그 수많은 사진과 기록, 자료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심지어는 눈 뜨고 보기 힘든 일본인이, 조선인을 학살하는 사진들도 게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렇게 관동대학살을 샅샅히 밝힌 책이 발매되었어도, 슬프게도 한국 정부는 여전히 무관심하다. 심지어 관동대학살이 있었던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은, 그 의미가 바뀌었다. 2011년 3월 11일 원전사고를 일으킨 동일본 대지진으로 말이다.



내지인과 조선인을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말씨가 분명치 않은 자를 조선인이라 하고, 무리를 이룬 피난민을 보고서는 ‘불령선인’ 단체라고 속단했으며, 조선인 노동자가 고용주의 인솔하에 작업장으로 가는 것을 ‘조선인 무리의 습격’ 이라고 잘못 믿어리는 등의 사례가 많았다. 9월 2일 오후 3시경 자경단원이 고마고메 경찰서로 끌고가 폭탄과 독약을 소지한 조선인을 조사해본 겨로가, 폭탄이라고 한 것은 파인애플 깡통이었고 독약이라고 한 것은 사탕이었다. P 108



이처럼 불안에 떠는 일반 시민을 동원한 권력은 어떤 행동요령을 내렸을까? 앞서 살핀 것처럼 경시총감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요시찰인, 사회주의자, 조선인의 책동에 특히 주의하시오, 방화에 주의하시오” 등의 말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 일반 심니이 점점 더 암시에 사로 잡혀갈 때, 이런 종류의 예단이 실제로 원인 불명의 화재와 겹쳐 민중을 더욱 흥분시키면서 “방화다!”, “불 지르는 것을 보았다!”, “조선인이다!”라고 외치게 만들었다. P 113



지침으로 “일부 조선인과 사회주의자 가운데 불온을 꾀하는 자 있으니 저들에게 빈틈을 엿볼 기회를 주지 않도록 시민 여러분은 군대·경찰과 협력하여 충분히 경계토록 할 것이며, 우물에 독을 투입하는 부녀자도 있으니 우물물에 주의할 것” 등의 지령이 있었던 것은 뒤에서 살필 사이타마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당시 ‘조선이니 습격해온다’라는 전단지를 신문사 이름으로 게시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P 126



일본 국회의원 인 육군소장 쓰노다 고레시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집 부근에서도 매우 소란스러워 문밖으로 나가보았더니 무장한 군대가 있었다. 그리고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적은 지금 하타가야 방면에 나타났다”라고 호령하고 있어 그 장교를 붙들고 “적이란 누구인가”라고 질문했더니 “조선인이다”라고 답했다. 내가 다시 “조선인이 어째서 적인가” 라고 묻자 “상관의 명령일 뿐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했다. P 181



지바가도로 나오자 1,000명 가까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조선인이 4열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가메이도 경찰서에 일시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헌병과 군대가 얼마간 붙어 나라시노 방향으로 호송하는 중이었습니다. 물론 걸어서였지만요. 행렬에서 벗어나면 구타하는 등 포로처럼 다루었으며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헌병은 2명, 병사와 순사가 4,5명이 동행했습니다. 그 뒤를 사람들이 우르르 뒤쫓아가면서 ‘우리 원수를 내놔라’ 하며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헌병은) 군중들을 쫓아내고 조선인들을 목욕탕에 넣었지요. …(중략)… 군대와 수사는 뒷일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자, 이제 그 다음에는 베고, 찌르고, 때리고, 차고 … 총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P 278



4) 흔들림없는 역사인식


지은이: 다카자네 야스노리

출판사: 삶창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인이다. 맨 위에 소개한 일본 기자들처럼, 이 책의 저자도 일제의 만행을 파헤치기 위해 당시 식민지배의 피해자들의 곁에 서서 목소리를 냈던 사람이다. 뿐만아니라,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올바른 역사 인식을 지니기 위한 역사윤리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역사왜곡이 만연한 일본에서, 일본인이 이런 책을 출간했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하지만, 어느 한 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과거에는 남의 일이라 생각된 역사왜곡이, 실은 우리나라 안에서도 자행되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노라면, 대체 일제와 우리가 다를게 뭐가있나 싶기도 하니 말이다.


일본의 근대사를 둘러싼 역사 인식이 문제가 된 지 오래다. 최대 논점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의 대립으로 볼 수 있는데, 사실의 검증과 교육을 중시하는 사고방식 대 사실 검증에는 관심이 희박한 채 근대를 미화, 정당화하는 데 중점을 둔 입장이다. 전자는 후자를 역사 왜곡이라 비판하고, 후자는 전자를 자학사관이라 비판한다. 이러한 대립은 역사교육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전자는 점차 축소되고 후자 쪽이 증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따라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교육함으로써 현대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역사교육이 약화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흐름은 제2차 아베정권에 의해 한층 강화되고 있다. p 035



역사윤리란 ‘역사에 책임을 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역사 용어로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개념으로서는 전혀 드물지 않다. 역사상 자주 볼 수 있고 국제 관계에서 많은 국가가 역사윤리의 과업을 다해왔다. (……)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인간의 길’에 어긋나는 행위가 없었는지를 따져보고, 만일 있다면 반성하고 사죄와 배상, 처벌 등의 과정을 통해 청산할 의무가 발생한다. 또 항상 이 ‘역사윤리’를 의식하며 정치와 사법에 임해야 한다는 뜻도 포함한다. p 036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책임을 묻는 이른바 전후 보상문제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국가 간의 ‘해결’이 끝났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완전히 무시했다. 하지만 ‘해결이 끝난 문제’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은 핑계에 불과하다.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고, 국가 간에도 배상을 한 것이 아니라 한일 경제협력협정을 맺고 청구권을 방기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피해자의 배상 청구를 모조리 거부했다. 그런 까닭에 배상 청구는 사법의 장에서 다툴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사법 역시 하급심에서 드물게 원고가 승소하는 일은 있어도 최고재판소에서는 전부 패소 확정을 강요받았다. 사법이 정치권력을 추종하는 소위 어용 기관이 된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p 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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