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다른 이름은 도자기 전쟁, 당시 일본 장수들은 수 많은 도공들을 사로 잡아갔다.

포로로 잡혀갔던 도공들은 임란이 끝난 직후 까지만해도 머나먼 타향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일본 정치도 안정화가 될 무렵, 포로로 잡혀간 도공들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많은 도공들이 터를 잡았던 사쓰마번에서는 도공들을 사무라이 계급과 동일 대우를 해주며 지원해주었다.

조선에서의 그들은 도자기를 구우면서도 온갖 부역을 했어야 하는 천대 받는 아무개였는데

일본에서는 그들을 장인으로써 대우를 해주기 시작한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 정부가 고향으로 돌아와라! 한들 누가 가겠는가 ?

돌아가는 그 순간 그들은 다시 모진 일을 감내해야하는 아무개가 되는 것인데..

그들은 일본에 남아서 도자기를 빚었고, 그 도자기는 서양에 곳곳에 널리 알려지며 명품으로 자리잡는다.

이미 일본 땅에 20년 가까이 정착한 상태에서 귀국한다는 것은 정부의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포로였다가 귀국한 다음 자신들이 받게될 처우에 대해서 확신이 없기도 했던 모양이다.

-1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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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대를 졸업한 나나미는 동기인 아키호, 타마키와 함께 뮤지컬 오케스트라에서 연주를 하고 있다. 이번에 들어가게된 작품은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햄릿> .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두근거림도 잠시, 어느날 담당 지휘자가 바뀐다.

지휘자로 온 사람은 음대 동기였던 유우키 였다. 유우키는 음대시절 학교의 지원을 받아 독일로 유학을 유수의 인재였기에 그런 그가 클래식이 아닌 뮤지컬 오케 지휘자로 왔다는 것 자체가 놀라움이었다. 나나미는 그저 옛 동기였던 유우키와의 재회가 반가웠지만 그것과 별개로 유우키와 아키호, 타마키 세 사람의 관계를 걱정한다. 음대시절 유우키와 아키호는 연인이었으나 어떠한 이유로 둘은 헤어지고 현재 아키호는 타마키와 연인이 되었고 곧 결혼을 앞둔 사이 였기에..



유우키가 지휘자로 오게되었던 그 날, 나나미가 사는 동네에선 목이 없는 백골이 된 변사체가 발견된다. 백골사체의 손에는 빛 바랜 사진이 한장 들려 있었다. 담당 형사인 이시쿠라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평소보다 더 광적으로 이 사건에 목을 멘다.



백골이 된 변사체의 발견. 때마침 이 시기 전후로 나나미는 매일 밤 악몽을 꾸고 있었다. 백골과 나나미의 악몽, 이 모든 것이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퍼즐이 하나둘씩 맞춰지기 시작하며, 나나미의 마음 속에서 꽁꽁 잠겨 있었던 한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현실은 악몽보다 잔혹했다. 그리고 그 끝은 파멸이었다.

われわれは何であるかを知るも

その先どうなるかを知ら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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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우리의 역사에서 유독 저평가를 받는 인물 궁예를 비호하기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비호하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궁예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타당한 근거를 제시한다. 그리고 근거를 기준으로 (작가의 말에 의하면) 소설과 역사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정사로 꼽히는 삼국사기는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된 왕건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 고려에서 제작한 기록이다. 즉 삼국사기에서는 왕건을 띄위기 위해 궁예를 죽여야 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조선에서 집필한 고려사 역시도 비슷하다. 궁예는 이렇게 역사 속의 패자가 되어 지금까지혹독한 평가를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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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권리가 없었던 백성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모른 체로 살아왔고

비합리적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국가에 위험이 있었을 때 마다 제일 먼저 희생을 당했다.

지금 껏 아는 것이 없었고 알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던

그저 하라는 대로만 해왔던 힘 없는 백성이었기에..



반면 지금은 클릭 한 번으로 수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물론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져서 진위여부 판단이 필요한 경우도 많지만..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안다는 것 자체가 힘이 된다는 건 지금도 유효한 전제이다.

우리의 힘 없는 조상들은 못했던 기득권 세력에 대한 감시가 지금은 가능하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이 책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서울 내의 풍부한 서적을 보유한 개인 소유의 도서관을 여럿 알고 있다.

그러나 한 번 보는 것만도 완전히 불가능하다.

그 주인은 책을 빌려주지도 않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손님에게 절대로 책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로서는 빌려주고 싶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왜 그 책을 그렇게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인지

그러한 조선인의 관습을 설명하기 힘들다.

-선교사 호머 B 헐버트

만일 만 권의 책을 저쟁해놓고도 빌려주지도 않고 읽지도 않고 햇볕을 쏘이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면

빌려주지 않는 것은 인(仁)하지 못함이요, 읽지 않는 것은 지혜롭지 못함이요,

햇빛을 쏘이지 않는 것은 부지런하지 못함이다.

사군자가 글을 읽자면 남에게 책을 빌려서도 읽는 법인데

책을 꽁꽁 묶어놓기만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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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이야기는 정말 읽을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잘 안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하 ㅠㅠㅠ..

당시의 제일 나쁜 놈은 일본이 맞다. 이건 정말 반박불가한 것.

특히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사과를 받고 싶은게 내 심정..



하지만 그 전에 일본에 이렇게까지 짓밟히게 만든

나라 꼴을 이 지경으로 만든 그들은 대체 어딜 가서 뭘 하나..

조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수 차례의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을 전부 뻥뻥 차버리고, 결국 힘 없는 백성들만 죽어나가게 만든 그들은..

일본인의 만행으로 인해 그들도 민비처럼 면죄부를 받은것인가.

이때까지 군사들에게 월급을 지급하지 않은 것이 벌써 반년이나 지났다. 때 마침 호남 세선이 수척이 경창에 짐을 풀었는데 그것으로 먼저 밀린 월급을 지급하라 명했다. 혜청 당상 민겸호 집안의 하인이 혜청 창고지기가 되어 지출을 담당했다. 그는 겨를 섞어서 미곡을 지급하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이익을 남겼는데 이것을 눈치 챈 사람들이 크게 노하여 그를 구타했다. 그러자 민겸호는 주동자를 잡아서 포도청에 가두고는 죽이겠다고 하자 여러 사람들은 원통하고 분함을 참지 못해 칼을 뺴어서 땅을 치며 분노했다.

"굶어죽는 것이나 법에 따라 처형당하는 것이나 죽는 것은 똑같다. 마땅히 죽일 놈은 죽여서 우리의 억울함을 풀겠다"

관군과 일본장수 영복창 등이 동학군을 쫓아 공중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두황은 내포로 들어가 신창과 해미지역을 다니며 승리를 거두었다. (중략) 일본군은 동학군보다 먼저 공격을 하는데 군기가 엄하고 무기가 정교하며 명령을 내리면 잽싸게 전진하고 또 탄약 또한 풍부해 동학군들이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두황 등은 연이어 승리를 했는데 남하한 관군과 일본군은 모두 합쳐 2천명이었다.

이때 민비는 벽에 걸린 옷 속에 피신했지만 일본인들이 끌어냈으며 소촌실이 살펴보자 민비는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민비를 칼로 내리치고 시신을 검은색 긴치마에 싸서 녹산 밑 숲 속에서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으며, 타다가 남은 몇 조각의 뼈는 바로 불을 지른 그 곳에 묻었다.

일본인이 은행권을 만들었다. (중략) 일본인은 또 지폐를 만들어 제일은행권이라 불렀으며, 청국상인으로 동순태라는 상호를 가진 자는 동순태상표를 발행하여 매양 한 조각의 지표로 앉아서 백화를 벌어들였다. (중략)

일본인들이 숭례문에서부터 한강까지 스스로 구역을 점령한 후 군용지라 하면서 푯말을 세워서 경계를 정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이 후부터 무엇을 하고자 할 땐 무조건 군용지라며 빼앗아 갔다.

21일 경신 밤에 일본인이 대궐을 침입하여 강제로 신조약을 성립시키고 참정해신 한규설을 면칙시켜 보냈다. 이등박문이 도착하자 서울 장안이 흉흉하여 변고가 있을 것을 의심하고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백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항부대신 이완용, 농부대신 권중현 등은 암암리에 관망하며 막으라 하였고 옥은 몰래 서로 주무하였다. (중략) 고종은 끝내 날인하지 않았으며 한규설 또한 날인하지 않았다. 날인한 자는 오직 외부대신 이하 각구 대신들 뿐이었으며 (중략)

이완용의 아들 이명구의 처 임씨는 임선준의 형인 대준의 딸이다. 이명구가 일본에 들어가 수년 간 유학하는 사이에 시아버지 이완용과 간통했다. 이명구가 돌아온 어느 날 내실에 들어갔다가 이완용이 며느리를 포옹하고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기를 "집과 나라가 모두 망했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라며 자살했다. 그 후 이완용은 며느리를 독차지하고 부끄러움 없이 첩 같이 여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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