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PIRO's Library (피로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4057178</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https://blog.naver.com/hellopiro</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ue, 30 Jun 2026 07:32:16 +0900</lastBuildDate><image><title>피로</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440571782428131.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44057178</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피로</description></image><item><author>피로</author><category>긴 서평</category><title>인문학책 추천: 나는 살아가는 사람인가 - [나는 살아가는 사람인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37476</link><pubDate>Tue, 16 Jun 2026 07: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3747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42139299&TPaperId=1733747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17/74/coveroff/k14213929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42139299&TPaperId=1733747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는 살아가는 사람인가</a><br/>박성욱 지음 / 파람북 / 2026년 05월<br/></td></tr></table><br/>바쁘게 돌아가는 거친 세상 속에서 우리는 늘 ‘어떻게 나를 지킬 것인가’를 고민한다. 파람북에서 출간된 박성욱 작가의 『나는 살아가는 사람인가』는 바로 그 고민의 출발점을 뒤흔드는 책이다. 저자는 동양고전의 지혜를 빌려,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고질적인 불안과 고립감의 원인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책은 우리가 세상의 기준에 맞춰 '살아지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단단한 자기다움을 회복하여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인지 묻는다. 소유와 경쟁 대신 공존과 상생을, 고립 대신 따뜻한 연결을 제안하는 이 책은, 쉼 없이 흔들리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가장 깊은 근원을 돌아보게 만드는 묵직한 이정표가 되어준다.<br><br>존재에 이름을 붙일 수 있지만, 그 이름은 한결같이 지속되는 이름은 아니다. 『도덕경』 1장<br>한결같이 지속되는 본질은, 바라는 바가 없으면 그 묘함을 볼 수 있지만, 바라는 바가 있으면 바라는대로 보이게 된다. 『도덕경』 1장<br>있음과 없음이라는 것은 생겨남을 기준으로 나눈 모습이고, 어려움과 쉬움은 이루어짐을 기준으로 나눈 모습이며, 긴 것과 짧은 것은 형태를 기준으로 나눈 모습이고, 높음과 낮음은 기울어짐을 기준으로 나눈 모습이며, 음악과 소리는 조화로움을 기준으로 나눈 모습이고, 앞과 뒤는 따라감을 기준으로 나눈 모습이다. 『도덕경』 2장<br>​<br>​<br>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은 이름을 짓고, 기준을 정하고, 무언가를 규정하고 분류하는 일에 언제나 진심이었다. 무언가를 명확히 규정해야만 사회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로 생활 규범이 되었고, 신분 체계나 사회적 지위가 되기도 했다. 형태가 무엇이든 이러한 ‘개념화’와 ‘분류’ 덕분에 인류는 혼란을 줄이고 사회 질서를 유지해 올 수 있었다.<br>​<br>확실히 대상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행동의 기준을 정하는 행위는 세상을 인식하는 가장 편리한 도구이며,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까지 주어진 이름과 기준에만 맞춰 살아가야 할까? 편리를 위해 만든 ‘이름’이라는 틀은, 역설적으로 대상의 본질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br>​<br>당장 나의 삶만 보아도 그렇다. 딸을 키우는 나는 사회로부터 ‘엄마’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엄마’라는 이름표가 나라는 존재의 전부를 규정할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나는 엄마이기 이전에 매일 아침 회사로 출근해 ‘ㅇㅇㅇ 매니저’라는 명함을 내미는 직장인이다. 그뿐인가. 친정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다시 내 어머니의 ‘딸’이라는 이름표로 갈아입는다. 이처럼 상황마다 나를 지칭하는 파편적인 이름표들만으로 나의 본질을 온전히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br>​<br>이름은 대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동시에 그 존재의 역할을 단편적으로 고정해 버린다. 그리고 이름이 정해지는 순간, 고정관념이라는 부정적인 반대급부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사회가 부여한 역할극에 갇히는 순간, 그 역할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려 할 때 우리는 이유 없는 불안감이나 죄책감마저 느끼게 된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한결같이 지속되는 이름은 없다"고 통찰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br>​<br>이처럼 한 사람은 여러 이름을 동시에 지니며 다양한 역할을 하지만, 특정 이름에 갇히는 순간 그 존재의 다채로움과 고유한 정체성이 사라진다. 사회가 부여한 ‘역할’이라는 이름표가 개인의 모든 면을 규정하고, 심지어 그 역할을 벗어날 때 불안감이나 죄책감마저 느끼게 하는 일도 벌어진다. 이름에 잡혀 대상에 대한 선입관이 생기거나, 의도나 욕망이 개입되면 이름과 대상을 동일시하는 잘못이 일어날 수 있다. 존재를 인식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인 이름 때문에, 오히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p 050<br>​<br>우리는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기 위해 개념을 정의하고 만들어낸다. 개념화는 복잡한 현실 세계를 단순화하고 구조화하는 인식의 도구인 것이다. ‘아름답다’, ‘선하다’, ‘크다’, ‘작다’와 같은 표현들 모두 존재를 이해하고 분류하기 위한 인식의 도구들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개념화가 오히려 존재의 본질을 흐리고 왜곡하는 결과를 자주 보게 된다. 단순화된 그 틀이 때로는 존재의 본래 모습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개념은 분류를 낳고, 분류는 차이를 만든다. 이렇게 생긴 차이를 불필요한 평가와 차별로 일어가는 일이 쉽게 일어난다. ‘도덕경’에서는 개념과 분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p 059<br>​<br>비단 이름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개념화’하는 일 역시 서늘한 부작용을 낳는다. 개념은 분류를 낳고, 분류는 차이를 만들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떠한 것을 보고 ‘아름답다’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 이면에는 ‘추함’이 동시에 생겨난다. 어떤 행동을 ‘선하다’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와 반대되는 행동은 고스란히 ‘악’이 된다.<br>​<br>일단 사회적으로 개념이 합의되고 규정되면, "과연 그것이 진짜 아름다운가? 착한 행동이 맞나?"라는 본질적인 질문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적이라 믿는 이런 규정들은 사실 그 당대의 관념과 욕망에 의해 결정된 것들이 대다수다. 노자의 말대로 '바라는 바(의도와 욕망)'가 개입되어 세상을 보기 때문에, 본질이 왜곡되는 것이다.<br>​<br>특히 이러한 개념과 규정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맥락이 완전히 달라지곤 한다. 멀게는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재판에 대한 당대의 찬사가 후대에 이르러 가장 잔혹한 악행으로 극명하게 엇갈린다. 가깝게는 과거의 기준에 묶여 현재 우리의 삶을 억죄고 있는 오래된 법 조항이나 규제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당대에는 질서를 위한 최선이었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저 낡은 틀이 되어 살아 숨 쉬는 존재들을 짓누를 뿐이다.<br>​<br>인문학책 『나는 살아가는 사람인가』는 바로 이 지점을 날카롭게 건드린다. 삶은 짓밟고 올라서는 경쟁이나 타인이 정해놓은 기준을 축적하는 소유가 아니라, 온몸으로 부딪히는 경험이라고 말이다.<br>​<br>수많은 이름표에 갇혀 세상이 나눈 이분법적 기준에 헐떡이며 '살아지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그 틀을 깨고 나와 단단해진 자기다움으로 세상과 따뜻하게 연결되어 '살아가는' 삶을 살 것인가. 내 가슴에 붙은 수많은 명함과 이름표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17/74/cover150/k14213929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177471</link></image></item><item><author>피로</author><category>긴 서평</category><title>청소년 과학도서 과학책 추천: 최소한의 과학공부 - [최소한의 과학 공부 - 볼 것 많은 요즘 어른을 위해 핵심 요약한 과학 이야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8208</link><pubDate>Thu, 11 Jun 2026 06: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820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937757&TPaperId=1732820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196/49/coveroff/k17293775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937757&TPaperId=1732820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최소한의 과학 공부 - 볼 것 많은 요즘 어른을 위해 핵심 요약한 과학 이야기</a><br/>배대웅 지음 / 웨일북 / 2024년 01월<br/></td></tr></table><br/>난 문과 출신이다. 문/이과를 가르기 전까지 공통과학도 좋아했고 수학도 좋아했지만, 그보다 더 역사를 좋아했고, 독서를 좋아했다. 문/이과 갈림길에서 더 좋아한 문과를 선택했다. 물리나 미적분 등 골머리 쓰는 이과 과목들을 배우고 싶지 않은 이유도 한 몫했다. 시간이 흘렀다. 최근 십 여년간 취업시장에서 문과생들이 빠르게 도태되기 시작했다. 문과생들은 닥남했다. 그들은 말했다.&nbsp;<br><br>“문송합니다.”<br><br>문과가 점점 위축되는 시대가 오다보니, 반발심일까? 과학을 더 멀리하고, 역사 및 문화, 철학 등 인문학을 더 가까이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용하는 모든 도구들이 과학 발전으로 생겨난 것들인데 과학을 멀리하는게 맞는가? 아프면 병원가서 진찰을 받고 약을 처방받는데, 이런 행위 자체가 과학의 발달로 가능한게 아닌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많은 질문들이 들고 일어섰다.&nbsp;<br><br>거기다 요즘은 과학적 사고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금이야 어려서 엄마, 아빠 말이 다 맞다고 하는 우리 상전이지만, 몇 년 뒤 커서 질문을 했을 때, 나는 과학적 사고에 입각하여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떠오른 순간 더 이상 안되겠다 싶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과학과 친해져야겠다고 말이다.&nbsp;<br><br>물론! 바로 물리, 화학, 지구과학 등 과학 학문을 공부한다는 말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건 현실적으로 어렵기도 하고. 그래서 나름대로 짱구를 굴려봤다. 다름아닌 내가 좋아하는 분야로 과학에 접근하는 법! 한마디로 ‘역사’를 중심으로, 과학에 접근하는거다! 따지고보면 이런식으로 과학서적(?)을 많이 읽긴 했다. 뭐 대게 의학, 약학 관련 책이긴 했지만. 이번엔 전반적인 분야에서(?) 과학에 접근해보자 싶어서, 책을 찾아봤다.<br><br>그렇게 내 눈에 띈 과학책 『최소한의 과학공부』. 내가 원하는 느낌의 과학도서다. 다 읽고보니, 과학에 입문하고자 하는 청소년 과학도서 추천용으로도 제격이다.<br>​<br>과학 발전은 정치, 사회, 경제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페니실린 개발(의학), 원자폭탄 개발(화학), 아폴로 계획(우주과학)이 대표적인 사례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사회적 배경과 정부의 막대한 지원으로 페니실린과 원자폭탄이 개발되었다. 소련과 미국 냉전체제라는 정치적 배경과 정부의 막대한 지원으로 지구 너머, 달에 사람이 발자국을 찍게 되었다.&nbsp;<br><br>과학사적으로 페니실린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페네실린으로 거대과학 연구가 본격화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페니실린 개발사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의 직업적 정체성은 다양하다. 예컨데 플레밍은 과학적 발견에 천착한 과학자였고, 히틀리는 경제 기술을 개발한 엔지니어였으며, 케인은 대량생산을 조직한 기업가였다. 이렇듯 페니실린은 정부, 기업, 재단, 대학 등을 망라하는 직단작업의 결과였다. 또한 페니실린을 계기로 과학 연구에서 국가 역할이 부각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페니실린 대량생산의 결정적 순간은 미국 정부가 화이자의 제조법을 (특허 따위는 무시하면서) 공유하고, 엄청난 자금과 자재를 지원한 데에 있었다. 이는 과학 발전이 국가 규모의 지원이 필요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함의한다. 이후 맨해튼 계획, 아폴로 계획 등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면서 과학과 국가는 불가분의 파트너십을 맺게 되었다. p 064<br><br>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이 모든 것을 정당화했다.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을 결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일단 만들기로 한 뒤에는 약간의 가능성만 보여도 인력과 물량을 쏟아부었다. 난다 긴다 하는 과학자들도 그렇게 조건 없는 대규모 지원을 받으며 연구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한 계획은 단 3년 만에 성과를 냈다. 1945년 7월 뉴멕시코 앨라모고도에서 테스트에 성공했고, 한 달 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방의 폭탄이 떨어졌다. 1억 총옥쇄를 외치며 결사항전을 준비 중이던 일본은 곧바로 항복했따. 3년간 총 13만명의 인력와 20억 달러의 예산이 투입된 결과였다. 2023년 기준 330억 달러, 원으로 환산하면 약 39조 9600억 원이다. 이러한 대규모 물량과 천재적 두뇌의 조합은 맨해튼 계획의 성공,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전 세계에서 오직 ‘천조국’ 미국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p 121<br><br>요컨데 아폴로 계획은 과학이 정치, 경제의 전폭적 지원으 받으면 어떤 위업을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준다. 순수하게 과학 연구만의 목적만 있었다면 아폴로 계획은 시작조차 못했거나, 금방 좌초되었을 것이다.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시대적 목표가 있었기에 반대 여론과 천문학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수 있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아폴로 11호로 목표의 상당부분을 이뤘기에 더 이상 계속되기 어려웠음을 함의하기도 한다. 원래 아폴로 계획은 20호까지 계획되었으나,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17호로 끝났다. 그리고 냉전질서가 완전히 해체된 이후, 더 이상 달에 가려고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을 이유도 없어져 버렸다. p 149<br><br>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많다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건 ‘돈’이다. 기본적으로 연구는 돈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백날 연구만 하는 과학자들이 연구할 돈은 어디서 구하는가? 돈 많은 사람들의 지원과 투자다. 투자자들은 아무 이유없이 지원을 하는가? 아니다. 그 기술이 돈을 벌어다준다는 확신이 있어야 투자를 한다. 특히나 페니실린/원자폭탄 개발, 달탐사 계획은 일반적인 투자가 아닌, 범국가적 투자가 필요한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간다. 실패했을 경우 n년치 국정 운영예산을 날리는 것과 같았다.&nbsp;<br><br>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막대한 비용을 지원했다. 물론 이 프로젝트들을 지원 결정을 하기까지 과정은 지난했다. 하지만 당시 정치,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미국 정부는 막대한 비용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냉전체제에서의 승리라는 목표를 위해서. 그렇게 일단 지원을 결정한 순간, 미국은 이 프로젝트에 경제적 지원, 세계 여러나라에 있는 인재 포섭, 각종 규제완화등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성공했다. ‘천조국’의 시작이다. 결과적으로 과학의 발달은 국가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br><br>과학도 입문은 보통 ‘이과’를 선택하며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이과생들이 과학도의 길로 들어서는가? 아니다. 공부머리가 있는 이과생 대다수는 ‘의사’를 목표로 이과를 택했다. 이는 최근 몇 년간 방영된 여러 대중매체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실제로 난다긴다하는 이과생들의 최종 목적지 역시 의과대학이다. 심지어는 공과대학에 갔던 학생들조차도 수능을 다시 보고 의대를 가거나, 졸업후 의전원을 선택한다.&nbsp;<br><br>물론 이과생 일부는 순수 과학 분야를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도 많겠으나, 의과대학을 노리는 학생들에 비하면 그 수는 턱없이 적다. 이러한 추세는 순수 과학분야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적고, 의사들에 비해 과학도의 수입이 적은 이유가 적지않은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단 한 명도 없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앞으로도 우리나라에서 노벨과학상 수상자 배출은 어렵지 않을까(일본 노벨과학상 수상자는 스무명이 넘었다).<br><br><br>뢴트겐은 강직한 지식인이었다. 누가 봐도 X선의 특허는 떼돈을 벌 기회였다. 독창적 아이디어를 특허로 독점해 돈을 버는 것이 나쁜 일도 아니었다. 예컨데 영국은 1623년 일찌감치 확립한 특허법 덕분에 산업혁명에서 다른 나라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뢴트겐은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X선의 특허 제안을 끝까지 거절했다. 그 이유는 이랬다. “X선은 내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 있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자산이어야 한다.” 카피레프트라는 용어도 없던 시절에 그 철학을 앞장서 실천한 것이다. 만약 X선의 사용권이 독점화되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거대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기업들만 주로 썼을 것이다. p 050&nbsp;​<br>여담이지만, 뢴트겐의 이러한 행보는 과학도를 넘어 모든 이가 본받아야할 자세가 아닌가 싶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196/49/cover150/k17293775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1964913</link></image></item><item><author>피로</author><category>긴 서평</category><title>인문학책 글쓰기 책추천: AI시대, 스토리텔링의 재탄생 - [AI시대, 스토리텔링의 재탄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6866</link><pubDate>Wed, 10 Jun 2026 12: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686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52137140&TPaperId=1732686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36/94/coveroff/k35213714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52137140&TPaperId=1732686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AI시대, 스토리텔링의 재탄생</a><br/>김태원 지음 / 파람북 / 2026년 04월<br/></td></tr></table><br/>​지금껏 스토리 창작은 작가가 자신의 영혼을 깎아내어 한 세계를 구축하는 고독하고도 숭고한 작업이었다.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들이 텅 빈 백지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인간 창의성의 상징과도 같았다.<br>​과거 바둑계를 뒤흔들었던 ‘알파고’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우리는 AI가 그저 계산과 수치, 법률처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영역에만 머물 것이라 믿었다. 기계가 인간 특유의 미묘한 감수성을 건드리는 이야기를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의 AI에게 창작을 맡기면 돌아오는 것은 조악하고 파편화된 문장들뿐이었기에, 우리는 ‘창작은 인간 고유의 성역’이라며 안심하곤 했다.​<br>하지만 찰나와 같은 시간이 흐른 지금, 풍경은 완전히 바뀌었다. 생성형 AI는 이제 인간의 영감과 상상력을 모방하는 수준을 넘어, 독자의 감정을 파고드는 정교한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심지어 AI가 쓴 소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시대가 도래했다.<br>​이 책의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감행한다. 동일한 주제로 AI에게 스토리 창작을 제안하고, 1년이라는 시간차를 두어 그 진화의 과정을 추적한 것이다. 저자의 치밀한 비교 끝에 현재 스토리텔링의 승기는 '클로드(Claude)'에게 돌아갔지만, 구글의 '제미나이(Gemini)' 역시 매서운 추격세를 보여주었다. 이 두 모델을 제외한 다른 AI들이 아직은 창작의 보조 도구로서 한계를 보이는 상황에서, 저자의 기록은 AI 시대 스토리텔링의 현주소를 날카롭게 관통한다.<br>​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사용자가 올곧게 집중해야 할 것은 ‘후크’일 뿐이다. 스토리의 아이디어와 콘셉트를 다듬고 내가 이 스토리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생각(주제)과 카타르시스는 무엇인지 고민하고 놓치지 않도록 집중하라는 뜻이다. ‘플롯’에 대해서는? AI에게 시키면 된다. 시키는 것으로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AI가 내놓은 답(결과물)을 판단하고 수정의 지침을 주고 최종 결정을 하는 일은 오직 사용자의 몫이다. (…) AI가 해주는 일이란게, 사용자가 때로는 불필요하게 소모적으로 쏟아부어야 할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시켜 주는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플롯’에 관한 한 사용자가 직접 하는 작업보다 생성형 AI가 조금 더 정확한 결과물을 만들어 줄 것이다. p 029<br>​‘프롬포트’ 사용자가 AI에게 원하는 작업이나 응답을 요청하기 위해 입력하는주문(질문)이다. 프롬프트의 품질이 결과물의 품질을 크게 좌우한다. 어떤 이는 프롬프트가 구체적일수록 좋은 결과(답변)을 얻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처음부터 구체적인 프롬프트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첫 질문과 결과에 발목이 잡혀, 스토리가 뻗어나갈 수 있는 다양한 경로를 차단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한 번의 질문으로 완벽한 결과를 얻으려고 하지 않는 게 좋다. 처음에는 다소 커다란 덩어리를 주고받은 후에, 한 걸음 더 깊고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하나하나 완성해나가는 방식이 바람직한 결과물에 이르도록 할 것이다. p 081<br><br>​"스토리 창작의 주도권은 반드시 사용자에게 있어야 한다."&nbsp;<br>​책을 읽으며 가장 깊게 새긴 문장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가벼운 호기심으로 AI를 마주한다. '기계가 인간의 영혼을 태우는 창작을 얼마나 흉내 내겠어?'라는 의구심으로 시작하지만, 막상 AI가 쏟아내는 정교한 문장들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희망과 위기를 동시에 느낀다. 창작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달콤한 희망,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창작자로서의 위기감이다. 저자는 이 혼란스러운 지점에서 창작자가 지켜야 할 명확한 경계선을 그어준다.<br>​창작자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핵심은 스토리의 아이디어, 즉 '후크'다. 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지, 독자에게 어떤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반면, 구조를 짜고 살을 붙이는 '플롯'의 영역은 과감하게 AI에게 맡겨도 좋다. AI는 사용자가 소모적으로 낭비해야 했던 시간과 에너지를 획기적으로 줄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AI가 내놓은 결과물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다. AI가 제안한 길 중 어느 곳으로 갈지 판단하고, 수정 지침을 내리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디렉터'의 역할은 여전히 창작자의 몫이다.<br>​<br>흔히 프롬프트가 구체적일수록 좋다고 말하지만, 저자는 의외의 조언을 건넨다. 처음부터 너무 완벽하고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오히려 스토리의 확장성을 가로막는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은 정답을 맞히는 수식 계산이 아니다. 처음에는 큰 덩어리의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가능성을 탐색하고, 점진적으로 깊게 파고드는 '빌드업' 과정이 필요하다. 한 번의 질문으로 완벽한 답을 얻으려는 욕심을 버릴 때, 비로소 AI와 진정한 협업이 시작된다.<br>​창작자가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다. 창작자의 스토리가 서 있어야 할 출발선은, 세상이 앓고 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인간과 시대의 결핍에 대한 관심과 걱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핍을 위로하고 더 나은 삶과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건강한 욕망을 응원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런 위로와 응원이 스토리의 출발점이고, 기획의도와 주체를 구축한다. 사실 이 도전과제는 한순간에 뚝딱 하고 나오는 게 아니다. 창작자는 언제나 시대를, 세상을 여행하고 탐험하는 사람이다. 그 여행/탐험의 과정에서 다양한 영혼과 표정을 가진 사람들을 지켜보고 탐구하며, 우리 인간에게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모자란 것, 비뚤어진 것, 잘못된 것에 대해 생각하고 성찰한다. p 094<br>​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창작자의 출발선'이다. AI는 수많은 데이터를 학습할 수 있지만, 시대의 결핍을 아파하거나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려는 '선의'를 가질 수는 없다. 진정한 창작물은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곳, 잘못된 것들을 성찰하는 창작자의 건강한 욕망에서 시작된다. 세상을 여행하고 탐험하며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하는 창작자의 시선이 없다면, AI가 만든 스토리는 껍데기에 불과하다.<br>​뚜렷한 주관 없이 AI에게 끌려다니며 만든 결과물은 결코 자신의 작품이라 할 수 없다. 비록 제작 과정을 숨길 수는 있겠지만, 진정성을 고민하는 창작자라면 그 공허함에 끊임없이 후회하게 될 것이다. AI는 훌륭한 파트너이자 조언자일 뿐이다. 이 도구를 부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야기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도구의 편리함에 매몰되어 창작자의 영혼을 잃어버릴 것인지. 그 갈림길에서 이 책 『AI시대, 스토리텔링의 재탄생』은 '인간 창작자의 존엄'을 지키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해 준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36/94/cover150/k35213714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369445</link></image></item><item><author>피로</author><category>짧은 서평</category><title>세계사책 추천: 세계사를 만든 30개 수도이야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4645</link><pubDate>Tue, 09 Jun 2026 07: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4645</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92035582&TPaperId=173246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335/64/coveroff/k392035582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오늘 추천하는 세계사책은 『세계사를 만든 30개 수도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 세계 여러 나라의 ‘수도’를 살펴본다. 이 세계사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된다. ‘수도’의 역사=‘나라’의 역사라는 사실을.&nbsp;<br>​​수도는 이동하는 권력이다<br>​<br>​<br>일반적으로 역사는 ‘권력’의 흐름을 기준으로 써내려간다. 누가 왕이 되었는지, 왕이 어떤 일을 해왔는지 등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라의 수도를 결정하는 것 역시 권력을 지닌 왕이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동일하다. 그렇게 수도는 권력에 반응하며, 권력에 따라 이동한다.<br>​우리가 알고있는 나라의 수도들은 대부분 왕정시대에 설정되었다. 그렇다면 왕정시대에 수도를 어떻게 결정했는가? 단순하다. 최고 권력을 가진 왕이 거처하는 궁궐 위치에 따라 정해졌다.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사로 예를 들자면, 고려는 정궁이 있던 개경이 수도였고, 조선은 정궁(경복궁)이 있던 한성(현 서울)이 수도였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프랑스 수도는 파리지만, 역대 프랑스 왕들은 거처를 수시로 이동했다. 좋은 말로 하면 권력 분산을 막기위한 전국 순회라고 하겠다. 반대로 순회하지 않고 정착한 프랑스 왕 루이16세때는 어땠을까? 물론 수도는 파리였다. 하지만 루이16세는 안전을 이유로 파리가 아닌, 베르사유 궁에 정착했다. 결과적으로 오랜시간 프랑스 파리는 ‘왕이 없는 수도’ 였다.<br>​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도시 ‘수도’<br>​<br>한국은 서울, 일본은 도쿄, 프랑스는 파리 등 보통 수도는 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핵심도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간혹 수도로 오인받을 정도로 유명한 핵심도시가 여럿 있는 나라도 있다. 예컨데 미국의 수도는 워싱턴DC지만, 어떤 사람들은 뉴욕을 미국의 수도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하여, 이 책 저자는 수도를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br>​-중핵 수도: 역사적으로 불변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중심도시이자 핵심도시다. 로마, 파리, 런던 등이 해당된다.<br>-신중핵 수도: 중핵 수도가 있었으나, 여러 이유로 새로운 도시가 급부상하며 수도 자리를 꿰찬 경우다. 인도의 뉴델리가 대표적이다. 인도가 영국령이었을 무렵 수도는 콜카타였다. 영국은 인도를 수월하게 통치하기 위해 델리로 수도를 옮겼으나, 영 마뜩치가 않아서 델리 외곽에 신도시를 지어 수도로 삼았으니 바로 뉴델리다.&nbsp;<br>-이중핵 수도: 한 나라에 수도를 차지하기 위해 경합을 벌였던 두 개의 도시가 있는 경우다. 대표적으로 일본을 양끌이하는 도쿄와 교토, 러시아를 양끌이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가 있다.<br>-다중핵 수도: 한 나라에 수도와 맞먹는 핵심도시가 다수인 경우다. 독일은 긴 역사동안 여러 도시들이 돌아가며 수도가 되며 많은 핵심도시가 생겼다. 스위스도 수도 베른을 포함하여 취리히, 제네바 같은 여러 중핵도시들이 있다.&nbsp;<br>​<br><br>이 책이 두께가 얇은 편은 아니라, 선뜻 읽기를 주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펼치면 달라진다. 원하는 내용만 골라 읽으면 되기 때문이다. 보통 세계사책은 시간의 흐름대로 진행되다보니 중간만 골라서 읽기가 어렵지만, 이 책은 아니다.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시간대 순서로 구성되지 않았다. 대륙별로, 나라별로 구성되어있다. 언제든 원하는 나라 이야기만 골라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번외로 실린 한국의 수도 서울 이야기까지. 가볍게 읽을만한 세계사책 입문서로 충분히 추천할 만한 책이다.<br>​<br>​TMI이긴 한데, 번외편 한국의 수도 서울 이야기에 내 눈에 확 들어온 소제목이 있었다. 다름 아닌 ‘수도를 버리고 떠난 군주’ 이야기.<br>​저자는 수도를 버리고 떠난 군주 두 명을 이야기한다. 선조와 인조. 임진왜란 때 선조가 한양을 버렸고, 약 30여년 뒤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한양을 버렸다.&nbsp; 역사가 반복된다는 대 명제를 불과 30여년반에 증명한 것이다.&nbsp; 할아버지 선조와 손자 인조. 그들은 수도만 버린게 아니라 그 곳에 살고 있는 백성까지 버렸다.&nbsp;<br>​저자는 두 명을 거론했지만, 사실 조선에서 수도를 버린 군주는 한 명 더있다. 바로 고종이다. 혹자는 ‘고종이 한양을 떠난 적이 있었나?’라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맞다. 지리적으로는 한양을 떠난적이 없었다. 다만, 한약에 위치한 러시아 관할 건물로 떠났을뿐이다. 아관파천이다.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사실까지 이야기해보면, 고종은 아관파천을 비롯하여 미관파천, 영관파천까지 7회에 걸쳐서 타국가 관할 건물로 도망갔다. 그가 파천을 감행했던건 단 하나였다. 자신의 안전과 권력 유지를 위해.&nbsp;<br>​역사의 반복이 조선에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왕정시대가 종식되고 공화정시대에 이르러서도 수도를 버린 나라의 대표가 다시 나타났다. 언제? 한국전쟁 때.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선조, 인조, 고종보다 더했다. 겉으로는 수도 서울은 안전하니 서울을 지키라고 방송을하고, 본인은 몰래 부산으로 도망갔다. 그 뿐인가, 혹시나 자기 안전에 위협이 될까봐 한강철교를 폭파하여 자국민을 한강에 수장시켰다.<br>​<br>TMI는...여기까지! 끝!<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335/64/cover150/k39203558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3356433</link></image></item><item><author>피로</author><category>긴 서평</category><title>20대책 인문학책 추천: 인간명품 - [인간명품 - 사람이 명품이 되어가는 가장 고귀한 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4642</link><pubDate>Tue, 09 Jun 2026 07: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464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32032661&TPaperId=1732464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336/44/coveroff/k53203266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32032661&TPaperId=1732464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간명품 - 사람이 명품이 되어가는 가장 고귀한 길</a><br/>임하연 지음 / 블레어하우스 / 2026년 01월<br/></td></tr></table><br/>오늘날 보이지않는 계급으로 상대적인 박탈감에 좌절감을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인문학책 『인간명품』을 추천한다. 이 책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삶을 통해서, 명품을 온몸에 치렁치렁 두르며 무늬만 명품인 사람들이 아닌, 명품이 없어도 충분히 사람 자체로 명품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br>​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그녀는 대체 누구인가.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캐네디의 부인이자 당대 미국인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다. ‘올드머니룩’의 원조이자, 타고난 교양과 품격 그리고 풍부한 지식와 특유의 재치를 바탕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를 바꾼 사람이다. 그야말로 대체불가능한 여성이었다. 콧대높은 프랑스조차도 고개를 숙였던, 말그대로 걸어다니는 명품, ‘인간명품’이었던 그녀의 품격은 어디서 온 것인가.&nbsp;<br>​-재클린 사회학: 과거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거듭다는 것<br>-상속자 정신: 부모로부터만 오는 상속이 아닌, 부모를 뛰어넘어 사회로부터 받는 더 큰 상속<br>​어느시대나 계급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는 21세기, 신분을 나누는 계급은 없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하지만 사람들은 분명하게 계급을 나눈다. 옛날처럼 귀족과 양민을 뚜렷하게 가르던 계급사회도 아닌데 어떤 방식으로 계급을 나눌 수 있을까?&nbsp;<br>​<br>집으로 나누는 계급을 보자. 넓게 보면 일반적인 국민평형 아파트에 사는 사람과 타워팰리스에 사는 사람간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다. 좁게 들어가면, 같은 국민평형 아파트에 살고 있음에도 브랜드 아파트이냐 임대 아파트인지에 대한 차이가 또 다른 계급을 나눈다. 회사는 어떠한가? 공채를 뚫고 사원급으로 입사한 사람과, 오너일가의 한 사람으로 관리자로써 입사한 사람. 그들간에도 보이지않는 계급이 있다. 시작점이 다르기에, 그 끝도 다르다. 어른들 세계만 계급이 있을까? 아니다. 학교 내에도 계급이 있다. 고소득 직종에 종사한 부모를 둔 아이와, 하루벌어 하루 먹고사는 직종에 종사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간에도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다.<br>​<br>재클린 케네디 오아시스가 살았던 시대에도 계급이 있었다. 혹자들은 그녀 역시 태생부터 상류층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부유한 집안에서 상류층 교육을 받으며 자라지 않았느냐고.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녀의 유년시절 삶은 그렇게 풍족하지 않았으며, 가정사 역시 복잡했다. 21세기인 지금도 부모의 직업이 무엇이냐, 어떤집에 사느냐에 따라 아이들끼리도 계급이 갈리는 시대인데, 당대는 어떠했겠는가. 더군다나 이혼이 흠이 되던 시대이기도 했다. 특히나 상류층이라면 더더욱. 그런 시대에 재클린의 부모는 이혼했고, 재클린을 향한 모친의 핍박은 숨쉬듯 늘 있는 일이었다. 유년시절 그녀의 성장과정만 봤을 때, 세상이 알고있는 재클린과는 괴리감이 있을 정도다.&nbsp;<br>​<br>내편 하나 없는 그런 환경에서 그녀가 택한 길은 독서였다.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여자가 책을 가까이 한다는 사실은, 여자는 지성이 아닌 ‘미’를 가꾸고, 귀족 남자와 결혼을 해야한다는 당대 가치관에 대놓고 반기를 든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선택은 집안, 학교, 친구들 내에서 절대 인정받지 못한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독서’를 택했고, 그 안에서 진정한 ‘상속자 정신’을 깨우친다.<br>​<br><br>상속자 정신의 시작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배경, 재능, 노력 등)이 내게 속한 것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나온다. 누군가에게 전해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겸손해지고 겸손해지는 순간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상속자 정신을 되새기게 된다.<br>​<br>물질적인 상속과는 다르다. 재산, 경영권 승계 등 물질적인 상속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통제가 뒤따른다.&nbsp; 그 통제는 인생의 자율권을 막는다. 또한 특권의식에 젖어, 자신이 상속받은 것은 당연한 것인냥 받아들이며 ‘겸손’이라는 가치관에서 멀어진다.&nbsp;<br>​<br>자기 스스로 정한 것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면 인생의 자율권 승계는 안 한 겁니다. 재클린의 자신감은 상속자 정신의 비밀, 즉 인생의 자율권 승계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p 051<br>​재클린은 좌절을 힘들고 불행한 일로 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작은 성공으로 보았죠. 작은 성공들이 쌓여 큰 성공으로 이끈다고 믿었어요. 그리고 좌절된 꿈 위에 새로운 꿈을 얹었죠. 더불어 평생 발레를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발레리나가 될 수 없다면, 무대를 만드는 일에라도 참가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어쩌면 발레복이나 무대의상을 디자인하는 일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했어요. 그 꿈을 실현할 방법을 고안하느라 분주했습니다. 그리고 발레 관련 책을 수집해 자기 방 벽 한 면을 채웠어요. p 074<br>​모든 꿈은 계층 상승의 꿈이라 할 수 있죠. 물론 계층 상승이란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보다 나은 상태를 추구하려는 욕망이라고 풀이할 수 있어요. 바로 ‘향상심’이죠. 이는 상속자 정신의 근저에 흐르고 있습니다. 재클린은 자신과 케네디가 “평생 안주하지 않고 높게, 더 높게 오르려고 끝없이 노력했다”고 단언했으니까요. p 079<br>​가짜 상속자는 자신이 물려받은 것을 타인과 함께 성장시키는데 사용하지 않습니다. 외모와 사회적 배경이 좋다 하더라도 가짜 상속자에게는 감당할 수 없이 무거운 왕관의 무게일 뿐이죠. 그 무게에 짓눌려 자신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즉흥적이고 무책임합니다. p 086<br>​그렇게 깨우친 상속자 정신은, 물질적인 가짜 상속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가짜 상속자들은 물려받은 재산으로 인해 인생의 자율권이 제한된다. 심지어는 자신의 자율성이 제한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치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 뿐인가. 넘쳐나는 재산만을 믿고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한다.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니, 무책임해지고, 종국에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할 ‘겸손’, ‘배려’, ‘존중’ 같은 가치관을 모르는 삶을 살게 된다.&nbsp;<br>​<br>예컨데 물질적인 재산만을 쫓으며 최고의 권력자 부인이라는 자리에 심취하여 부정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불리고, 매관매직을 하면서도 자신이 행한 일이 범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전직 영부인이었던 김건희 처럼. 이게 바로 같은 영부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명품으로 추앙받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와 범죄자로 전락한 김건희의 차이다.<br>​모르는 척하기는 문제를 회피하거나 외면하는 것과 달라요. 자신이 알아야 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죠. 성공한 삶이란 내 인생에 집중할 것들에 대해 알아 가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것들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는 겁니다. 재클린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자신의 인생에 허용했어요. 원하지 않는 것은 무시해버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습니다. p 096<br>​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기에 대다수 사람들은 운명은 이미 태어나는 순간 결정된다고 믿어요. 이런 제한된 믿음은 주어진 상황과 계급에 순응하는 태도를 키우죠. 그리고 쉽게 ‘글쎄, 난 선택의 여지가 없어’ 또는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다’라고 생각하며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없애버려요. 그러나 역사와 독서는 운명의 선택지를 제공하는 풍부한 사례집이죠. 우리는 선물상자에서 사탕을 고르듯 삶을 창조하기 위해 그 선택지를 늘릴 수 있어요. p167<br>​보이지 않은 계급이 숨쉬는 21세기, 시작조차 못하고 포기부터 배우는 20대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눈 앞에 나타날 수도 있었던 일말의 가능성조차 포기하는 건, 미래의 본인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336/44/cover150/k53203266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3364421</link></image></item><item><author>피로</author><category>긴 서평</category><title>인문학책 추천: 단어가 품은 세계 - [단어가 품은 세계 - 삶의 품격을 올리고 어휘력을 높이는 국어 수업]</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4638</link><pubDate>Tue, 09 Jun 2026 06: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463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32934144&TPaperId=1732463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255/2/coveroff/k93293414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32934144&TPaperId=1732463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단어가 품은 세계 - 삶의 품격을 올리고 어휘력을 높이는 국어 수업</a><br/>황선엽 지음 / 빛의서가 / 2024년 11월<br/></td></tr></table><br/>역사를 좋아하다보니 자연스레 어원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마도 시작은 지금 쓰는 한국어 기원에 대한 궁금증이었던 것 같다. 문자야 ‘훈민정음’이라는 기원이 아주 완벽하게 남아있지만(킹갓세종대왕★), 지금 쓰고 있는 우리 ‘말’은 정확히 어느 시대부터 시작되었는지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여차저차 공부한 결과, 지금 우리말의 기원은 ‘신라어’라는 게 학계 정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 우리말의 시작인, 중세 한국어 시작점이 삼국을 통일한 ‘신라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아마도 고구려+백제어와 신라어가 양분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만 할 뿐, 자세한건 나도 모르니 패스!&nbsp;<br>​여튼 이러한 한국어 기원에 대한 궁금증은, 지금 사용하는 단어 어원에 대한 궁금증으로 확장되어 종종 단어의 어원을 찾아보곤 하였다. 물론 주로 찾아봤던 어원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에 한정되었지만.&nbsp;<br>​내가 궁금해서 찾아본 단어 중 하나를 꼽자면 ‘마누라’가 있다. ‘마누라’의 원형은 ‘마노라’이며, 15세기 조선에서 남/녀구분없이 윗사람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다가, 어느 시점에서 궁중 여성등에 한정한 존칭으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현재는 자신의 부인을 칭하는 말로 변모했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원래는 매우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을 부르는 존칭이었는데, 지금은 자기의 부인 또는 중년 여성을 낮춰부르는 단어로 바뀌었다는 사실이.​이런 식으로 단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의미가 축소되거나 확장되기도 하고, 언중의 외면에 사라지기도 한다. 그 뿐인가? 필요에 의해 새로운 단어가 생겨나기도 하니, 이 얼마나 흥미로운지!&nbsp;​<br>TMI가 길었지만, 이러한 이유로 나는 『단어가 품은 세계』라는 인문학책을 읽을 수 밖에 없었다.<br>​<br>&nbsp;<br><br>​<br>​<br>황소는 누런 소가 아닙니다<br><br>옛말로 ‘하다’는 ‘크다’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한쇼, 한새, 한숨, 한아비, 한어미 등의 단어가 만들어졌지요. 즉 한쇼란 의미적으로는 큰 소를 뜻하나, 결과적으로는 다 성장한 수소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고, 이 말이 변하여 황소란 어형이 된 것입니다. 황새 역시 같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큰 새라는 의미의 한새가 변화하여 황새가 되었습니다. 황새는 몸 전체가 흰색이고 다리는 붉은 색을 띄다보니 황새를 두고 누런 새라고 먼저 연상하는 경우는 잘 없지요. p 021<br>​<br>과거에 읽은 책 중에 ‘한’에 대한 어원을 읽은 적이 있다. ‘한’의 의미가 ‘크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고, 거기서 파생된 단어들이 한민족, 한겨레, 대한민국, 한어미, 한아비… 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중 한어미나 한아비 같은 어떤 단어들은 시간이 흐르며 구개음화나 시간 흐름에 따른 교정등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단어로 변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황소 역시 ‘한(큰)’에서 파생된 한소에서 시작되었다. 다만 ‘한소’는 다른 ‘한+’이 붙은 단어들과 달리, 단어가 변한게 아닌 의미가 변해버렸다.<br>​<br>많은 사람들은 ‘황소’ 라고 하면, 누런 소를 떠올린다.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나라는 한자문화권이다보니, ‘황’이라는 글자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누를 황(黃)자’를 연상시켜서 발생한 현상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황소’는 큰 소가 아닌 누런 소라는 의미가 대중화되었다.<br>​<br>이런 식으로 의미가 변해버린 단어는 생각보다 많다. 박목월 시인의 시를 동요로 만든 ‘얼룩 송아지’를 보자. 동요 가사속에 나오는 얼룩 소와 얼룩 송아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흰색 바탕의 흑색 무늬를 가진 젖소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 동요 속에 나오는 얼룩소는 젖소가 아닌, 얼룩무늬 칡소다. 우리나라 토종 소인 칡소. 칡소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만행으로 개체수가 급감했다. 그로 인해 대중들 인식에서 칡소가 사라졌고, 자연스레 그 자리를 젖소가 대신하면서 ‘얼룩 소’는 젖소가 되어버렸다.<br>​<br>​<br>​<br>단어는 기성세대의 당혹감에도 불구하고 변화한다<br>공갈에서 공(恐)은 ‘두렵다’라는 뜻이고 갈(喝)은 ‘윽박지른다’라는 의미이니 한자 그대로의 의미로는 ‘공포를 느낄정도로 위협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런 의미로 쓰이던 단어가 어느 순간 단순히 거짓말이란 의미로 쓰이게 되었을 때 이를 처음 접한 사람들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단어를 이렇게 쓰네’라고 느꼈을 당혹감과 거부감을 어느정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p 040<br>​<br>어떤 단어들은 기존 의미에서 축소되는 경우도 있다. 위의 ‘공갈’이 그렇고 ‘엽기’나 ‘마약’이 그렇다. 엽기와 마약의 사전적 의미 아래와 같다.<br>​<br>엽기: 비정상적이고 괴이한일이나 사물에 흥미를 느끼고 찾아다님, 현재는 다소 이상하거나 특이한 것을 상징<br>마약: 향정신성 및 중독성이 있는 의약품(매우 위험!!!), 현재는 맛있는 음식 앞에 붙는 매우 긍정적인 형용사로 쓰이기 시작(마약김밥, 마약떡볶이)&nbsp;<br>​<br>하지만 지금에 와서 엽기는 다소 이상하거나 특이한 것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 입에 담아서도 안되는 불온한 단어 마약은 또 어떠한가? 마약김밥이나 마약떡볶이처럼 맛있거나 중독성 있는 음식 어두에 붙으면서, 아주 맛있는 음식이라는 긍정적인 의미가 추가되었다.&nbsp;<br>​<br>시대의 흐름에 따라 단어의 의미가 축소되거나 확장되는건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범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단어에 긍정적인 의미가 생기는 건 ‘경각심’이 해이해지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런 건 지양해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br>​<br><br>​<br>양복이 있기 전에는 한복이 없었습니다<br><br>양복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나서 한복이라는 개념도 등장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남녀 정장은 물론 청바지나 티셔츠, 코트 등을 포함하여 서양 복식이 일상화되면서 이들을 더 이상 양복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냥 옷이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서양 복식을 의미하게 되고 전통 복식은 반드시 한복이라고 칭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양복은 더 이상 서양 복식 전체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남성 정장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착하였어요. p 049<br>​<br>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이야기가 있다. 위의 사례가 바로 그런 사례다.&nbsp;<br>​<br>19세기 서양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서양 문화와 우리나라 문화를 구분하기 위해 여러 단어들이 생겨났다. 기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옷은 치마/저고리/두루마기 였다. 헌데 서양 복식이 들어오면서, 이를 구분하기 위해 ‘양복’과 ‘한복’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시간이 흘러 ‘양복’이 일상복이 되면서, ‘양복’의 의미는 축소되다가 이제는 단어자체가 사라지는 추세다. 반면에 ‘한복’은 그대로 한복이다. 이제는 일상복이 서양 복식이다보니, 우리나라 전통 옷을 구분해야 했기 때문이다.&nbsp;<br>​<br>또 다른 사례로 양약과 한약이 있다. 서양 의학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에게 의료란 침과 뜸, 약재를 사용한 이른바 ‘한의학’이 전부였다. 하지만 개항기 때 서양의학이 들어오고, 한의학을 구분할 필요가 생겼다. 시간이 흘러 서양의학이 일반적인 의학기술이 됨에 따라, 치료받는 환자 입장에서 어떠한 의료기술을 고를 지 판단하기 위해 ‘한의학’을 구분해야할 필요가 생겼다. 이 외에도 양약과 국악도 이와 비슷한 사례다.&nbsp;<br>​<br>조금 더 넓은 개념인 ‘동양’과 ‘서양’도 그렇다. 개항기, 그러니까 서세동점 시기에 유럽인들이 아시아 지역에 들어온다. 유럽인들은 자기들과 아시아를 구분하기 위한 단어를 만들었다. 아시아가 유럽에 동쪽에 있으니 ‘동양’이 되었고, 자연스레 유럽은 ‘서양’이 되었다.&nbsp;<br>​<br>​<br>​<br>양지질은 어쩌다 양치질이 되었을까?<br>양지는 단순히 버드나무 가지가 아니라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이 닦는데 쓰이는 도구’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러한 풍습은 불교문화로부터 유래한 것이지요. (…) 즉, 음식물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해 버드나무 가지를 이용하였는 데 그 도구를 재료의 명칭인 양지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도구를 사용하는 행위를 양지질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야지질이라는 말이 이를 닦거나 헹구는 행위 전반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었고, 시간이 더 많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이 양지나 양지질이라는 말이 기원적으로 버드나무 가지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지요. p 078<br>​<br>위의 황소와 비슷한 사례다. 앞서 말했듯 한자문화권인 우리나라는 어떠한 단어를 들었을 때, 자주 사용한 한자를 떠올린다. 때마침 ‘양지’는 이를 닦는 도구인데다가, 한자에 ‘이 치(齒)’가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양지’라는 단어를 ‘양치’라는 단어로 받아들였다.&nbsp;<br>​<br>여기에서 파생된 이야기가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이쑤시개의 일본 ‘요지’다. 사실 ‘양지’라는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요지다. 위 책에서 말했듯 양지 문화는 불교 문화에서 유래된 것다보니, 불교 문화가 퍼져있는 나라에는 자연스레 이 문화가 있었다. 일본 역시 불교 문화권에 속하기에, 양지 문화가 있었다. 거기다 일본 역시 한자문화권이기도 했기에 ‘양지’라는 한자를 일본식으로 ‘요지’라고 읽었다. 문제는 일제강점기때 이 ‘요지’라는 단어가 그대로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꽤 오랫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쑤시개를 일본어 발음인 ‘요지’라고 불렀다. 지금이야 대다수가 이쑤시개라고 부르지만, 아직도 ‘요지’라는 단어를 쓰는 어르신들이 꽤 많다.<br>​<br>​<br>​<br>신라 시대 중엽 이전까지 널리 쓰이던 우리말 이름<br>신라시대 중엽 이전까지만 해도 이름은 모두 우리말식이었습니다. 김알지, 박혁거세, 이차돈, 거칠부 등 왕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이름은 모두 우리말이었습니다. 원효대사의 원효라는 이름도 으뜸 원, 새벽 효와 같이 한자로 쓰여 있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이를 원효라고 읽지 않고 ‘이른 새벽’이라는 뜻의 우리말로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당나라와의 밀접한 교류를 통해 한자 문화가 깊게 침투하면서 사람 이름도 성 한 자에 이름 두 자인 중국식으로 점차 바뀌었습니다. 이후 중국식 관행이 굳어지면서 한자 이름의 전통이 1300년 가량 이어져왔습니다. p 177<br>​<br>대다수의 사람들은 창씨개명이, 일제강점기 때 일어났던게 처음이라 생각한다. 틀렸다. 역사적으로 창씨개명은 최소 한 번 더 있었다. 우리나라 고대 국가 신라 때 다. 신라는 당나라와 교류를 하며, 이름을 중국식 성1자+이름2자로 짓기 시작했다.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 보통 이름이 4자였다. 그러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며, 중국식 이름짓기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이는 시대가 바뀌어도 지속되었다. 일종의 중국식 한자 사대주의다.&nbsp;<br>​<br>일제강점기에 이르러 한자 사대주의가 종료되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한자 사대주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공적 부문에서는 남아있는 순우리말 조차도 한자식으로 죄다 변경하였다. 예컨데 ‘노들나루’는 ‘노량진’이 되었고, ‘애오개’는 ‘아현’이 되었으며, ‘한밭’은 ‘대전’이 되었다. 이런식으로 순우리말로 남아있던 지명들이 죄다 한자식으로 변했다.<br>​<br>그러다 최근 십 여년 전후로 순우리말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순우리말로 짓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지역별로 순우리말로 된 지명을 되살려 관광 상품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새로 지은 지하철역 이름도 순우리말로 지었다. 특히 이미 지하철역이 있는 지역에 새로운 지하철이 생겼을 때, 주로 순우리말로 역이름을 만들었다.&nbsp;<br>​<br>대표적으로 ‘노량진역’ 주변에 ‘노들섬역’을 만든다거나, ‘아현역’ 주변에 ‘애오개역’을 만들고, ‘신천역’ 주변에 ‘잠실새내역’을 만들고, ‘대치역’ 주변에 ‘한티역’을 만들고, ‘신사역’ 주변에 ‘새절역’을 만든 게 있다. 이 역들의 이름은 한자와 순우리말의 차이일뿐, 실상 의미가 같다. 다만 동일한 역이름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순우리말을 차용하게 된 것이다.&nbsp;<br>​<br>물론 역 이름을 만들 때 새로운 이름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위상이 높아진 것도 순우리말을 사용에 어느정도 기여한게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의견을 끝으로 추천 인문학책 리뷰 끝!<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255/2/cover150/k93293414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2550264</link></image></item><item><author>피로</author><category>긴 서평</category><title>에세이 추천: 언제 어디서나 배웠다 - [언제 어디서나 배웠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2840</link><pubDate>Mon, 08 Jun 2026 07: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284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12032728&TPaperId=173228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97/97/coveroff/k01203272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12032728&TPaperId=1732284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언제 어디서나 배웠다</a><br/>신정일 지음 / 파람북 / 2025년 10월<br/></td></tr></table><br/>오늘 읽은 에세이 『언제 어디서나 배웠다』는, 읽으면서도 왜인지 낯설지가 않았다. 왜일까? 저자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동 저자의 다른 책을 몇 권 읽어본 적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읽었던 저자의 책들은 대게 문화유산 답사와 관련된 인문기행서였다. 그래서 그런가? 이 책을 받고나서, 기존과는 다른 장르라 살짝 놀란감도 없지 않았다.&nbsp;<br>​<br>하지만 역시는 역시! 이 에세이 『언제 어디나 배웠다』는 저자의 트레이드 마크인 인문기행의 ‘기행’만 빠졌을 뿐, ‘인문’은 그대로 가져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지면 곳곳에 배움에 관한 선현들의 말귀와 함께, 저자가 그동안 살면서 느끼고, 경험하고, 실천한 ‘배움’이 곳곳에서 묻어나온다.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 ‘배움’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이 에세이를 추천한다.<br>​&nbsp;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 앎이니라_공자<br>너 자신을 알라_소크라테스<br>마음이 텅 비어 있을 때 기억이 잘 스며들고, 집착에 얽매이면 기억이 흐트러진다_정이천<br>​나는 성공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성공에 고생할 만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_스펜서<br>​칭찬을 받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모욕을 당했다고 괴로워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라_마르크스<br><br><br>누구는 언어에 능하고, 누구는 숫자에 밝다. 누구는 길을 잘 찾고, 누구는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린다. 저마다 잘하는 공부가 있고, 못하는 공부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은 다 다르면서도 비슷비슷하다. 그게 자연스럽다. 그러니 배움의 길에 들어선 우리들은 서로의 부족함을 비난하지 말자. 다름을 이해하고 채워주는 공동체를 만들어보자. 그래야 진정한 배움이 숨 쉴 것이다. p 021<br>​<br>답은 간단하다. 공부가 즐거우려면, 내가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내 세계와 연결되는 것부터. 남들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 말고, 내가 궁금한 것부터. 노는 것처럼 배우고, 배우는 것 처럼 노는 것. 맹자가 말한 대로 즐거우면 생기가 나고, 생기가 나면 또 다른 앎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p 032<br>​<br>배움은 제도에 갇힌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서 솟아나는 것이어야 한다. 그 길은 누구에게는 정규일 수도 있고, 또 누구에네는 야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길을 얼마나 뜨겁게, 얼마나 진실하게 걸었는가이다. 아무도 깔아주지 않은 흙길, 바람 부는 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길, 그 길 위에서 나는 나의 선생들을 만나고, 나를 만난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야매의 품격이다. p 057<br><br>​<br>내가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부’는 중요하다. 얼마나 ‘공부’를 잘하느냐에 따라, 최상위권 대학 입학 여부가 갈리기 때문이다. 최상위권 대학만 가면 고소득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고, 상류층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넓어진다는게 그 이유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늘 자녀들에게 ‘공부’를 말한다.<br>​<br>이런 세상을 살면서 늘 궁금했다. 정말 사회에서 말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인가. 소위 학교 성적에 필요한 국/영/수/사/과 등에 한정되어 좋은 점수를 받는 게 공부일까. 국/영/수 등 이른바 정규 교육과정의 교과목이 아닌, 내가 정말 궁금해서 알고 싶은 분야를 공부하는 건 공부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을 제시하면 ‘네가 아직 어려서그래, 일단 좋은 성적을 받고나서 이야기하자’ 등의 어른들의 무마가 뒤따른다.<br>​<br>대다수의 아이들은 부모가 말하는 ‘공부’를 이해하고, 따른다. 어떤 아니는 정규 교육과정 자체가 좋아하서 공부를 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고, 부모의 말이니 어쩔수 없이 억지로 공부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억지로 공부하는 것. 과연 효과가 있을까? 물론 어느정도는 효과가 있겠지만, 일시적일뿐이다. 억지로 한 공부의 끝은 언제터질지 모를 활화산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다 무시하고, 책상에 앉혀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공부를 시키는 것. 이게 과연 정상적인 행동일까.&nbsp;<br>​<br>이런 물음에 대다수의 부모들은 할 말이 있다. 언제나 아이가 좋아하는 것만 하게 해주고 싶은데, 사회가 허용해주지 않는다고. 나는 이런 대답을 그저 어른들의 이기적인 변명이라 생각했는데, 아이를 키우며 깨달았다. 이들의 변명이 이기적인 변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말 사회가 아이들을 ‘성적 순’으로 길들이며 키우고 있었음을. 만약 이런 사회를 무시하고 정말 ‘아이’가 원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그 아이는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짝 벗어난 위치에 서있게 됨을 말이다. 예외적으로 극히 소수는 자본주의 정점에 설 수도 있지만.<br>​<br>사회가 원하는 게 아닌, 내 아이가 원하는 것을 마음 껏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날은 언제쯤 올런지!<br>​<br>자연은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우선 아이여야 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이 질서를 거슬러 억지로 성숙을 강요하면 우리는 설익고 맛없는, 곧 썩어버릴 과일을 얻게 될 것이다. 즉, 우리는 애늙은이들을 만들게 된다_루소<br>물오리가 날 때부터 헤엄을 치듯이, 어린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착한 일을 할 천성을 지니고 있다. 그 천성을 일일이 간섭하면 그것은 물오리에게 헤엄을 금하는 것과 같다_플로베르<br>현자는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남을 돕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가르친다. 존재들을 억지로 이끌지 않고, 스스로 살게 하며, 독립하지 않고 스스로 이루어지도록 둔다_노자<br><br><br>아이들을 다시 보니 정말 그랬다. 그들은 놀이를 통해 사회를 배우고, 몸을 움직이며 사고의 경계를 확장하며, 다른 존재들과 부딪히며 감각과 감정을 익히고 있었다. 놀이는 곧 삶이고, 삶은 곧 배움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어른들은 종종 망각하는데 말이다.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온전한 하나의 우주라고 칭해야 하지 않을까. 그 세계는 자율과 자유 속에서 피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른의 역할은 무엇이곘는가. 어른이 원하는 어떤 것을 어린이에게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율이 자생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 아닐까. p 097<br>​<br>시간이 흐르며 나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강요는 삶을 단순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삶의 깊이를 앗아가기도 한다는 것. 애매한 상황일수록 자유를 허용할 줄 아는 유연함, 그것 또한 삶의 지혜라는 것을. p 132<br>​<br>너무 개입하지도, 완전히 방관하지도 않는 것.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 삶에 필요한 자세라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너무 가까우면 서로 상처받고, 너무 멀면 소통이 단절된다. 사랑도 적당한 긴장감이 있어야 더욱 잎어진다. p 143<br>​<br>내 아이가 원하는 것을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날. 그런 날이 오기 위해선 지금과 같은 극한의 자본주의(물질만능주의)가 사그러져야한다. 정규 과정에서 배우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야한다. 놀이터에서 놀면서 배우는게 있고, 흙을 밟으며 배우는게 있고, 나무를 만지며 배우는 게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br>​<br>과거야 빠른 성장이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자본주의라는 가치관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아니지않은가. 목표가 사라진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건, 낡아빠진 목표를 계속해서 밀어부쳐서 발생한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폐해일 뿐이다. 이런 낡아빠진 목표로 인해 내 아이가 ‘배움’의 기회를, 즐거움을, 성취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고, 미안할 따름이다.<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97/97/cover150/k01203272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4979705</link></image></item><item><author>피로</author><category>긴 서평</category><title>역사책 추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1 - 돈황과 하서주랑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 : 돈황과 하서주랑 - 명사산 명불허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2838</link><pubDate>Mon, 08 Jun 2026 07: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283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77129&TPaperId=1732283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8833/89/coveroff/893647712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77129&TPaperId=1732283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 : 돈황과 하서주랑 - 명사산 명불허전</a><br/>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04월<br/></td></tr></table><br/>오늘 리뷰하는 역사책은 현 국중박 관장이신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국편1』 이다.&nbsp;<br>전 권을 다 모으진 못했지만, 그래도 대략 70%는 책장에 꽂혀 있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 물론 다 읽지는 못했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한 권씩 읽는 정도? 중국편 역시 사두기만하고 안읽다가, 급 꽂혀서 읽기 시작!!<br>​<br>&nbsp;<br>​<br><br>어느 시대나 한 문화권에는 주도하는 중심부 문화가 있고 이를 따라가는 주변부 문화가 있다. 그것이 하나로 어울릴 때 그 문화권은 더욱 풍성한 모습을 갖게 된다. 에드윈 라이샤워가 말한 바대로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과 함께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중국의 불상, 한국의 불상, 일본의 불상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비슷한 것은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보편성이고, 다른 것은 각 민족의 특수성이다. p 014<br>​<br>&nbsp;『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국편1』&nbsp; 서두에 문화의 보편성과 민족의 특수성 이야기가 있어서 다시금 곱씹어 본다. 보통 전 세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유물을 문화의 보편성이라고 말하고, 보편적인 문화유산 속에서 보이는 각 국의 개성을 특수성이라고 한다. 문화의 보편성으로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고대 유물인 비너스상(또는 여인상)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발굴되는 여인상을 보면, 그 모습이 각기 다르다. 이게 바로 보편적인 유물에서 발견되는 각 나라의 특수성이다.&nbsp;<br>​<br>이번엔 동아시아 3국을 봐보자. 한국, 중국, 일본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화 유산이 정말 많다. 위에서 말한 불교 문화가 그렇고, 도자기 문화가 그렇고, 정원 문화가 그렇다.&nbsp;<br>​<br>불교문화는 중국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왔고,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전파하였다. 민간신앙과 쉽게 융합되는 불교 특성상, 세 나라 모두 불교가 민생 깊숙히 파고들었다. 그 결과 세 나라에서 모두 불교 문화유산이 많이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게 절과 불상이다. 한국, 중국, 일본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는게 절과 불상. 이것들이 문화의 보편성에 속하는 대표적인 사례다.&nbsp;<br>​<br>중국이라는 나라에서 한반도로, 그리고 일본열도로. 시작점은 한 곳이니 삼세 나라의 불교문화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놀랍게도 각국의 절과 불상은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민족의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다.<br>​<br>예컨데 한국의 절은 ‘산사(또는 사찰)’라고 해서, 예로부터 녹음이 푸르른 산에 지어졌다. 자연경광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자연과 어우러지도록 지어진게 바로 우리네 사찰이다. 반면에 중국은 아주 거대한 규모로 산과 바위를 파고, 깎고, 다듬어가며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 손을 거쳐서 만들었다. 거대한 막고굴 같은 석굴사원이 대표적이다. 일본 사찰은 주로 마을 한켠에 있다.&nbsp;<br>&nbsp;<br>세 국가의 정원문화도 그렇다. 한국 정원은 창덕궁 정원처럼 언제나 자연을 중심에 두고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연과 조화로움을 생각했으며, 중국은 이화원 같이 인공적이고 거대한 정원을 만들었고, 일본은 라쿠스이엔이나 료안지처럼 돌과 연못등을 이용하여 절제된 환경의 정원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불상이나, 도자기 같은 문화유산도 세 나라 모두에서 보이는 보편적인 문화유산이지만, 각 나라의 특수성이 반영되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br>​<br>유홍준 교수님이 굳이굳이 문화의 보편성을 이야기한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중국 편’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중국과 뗄레야 뗄수 없고, 수많은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 그렇다보니 중국에 있는 문화유산과 비슷한 문화유산이 한국에 있을 때, 그 둘을 무의식적으로 비교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기에, 그런 사람들을 위해 굳이굳이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이야기한게 아닐까?&nbsp;<br>​​<br>자 이제 본격적으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국편1』로 들어가보자.<br>​<br><br><br>진나라의 수도 함양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진시황의 아방궁이다. 아방궁이 하도 유명해서 사람들은 진시황이 짓고 살던 호화로운 황궁의 이름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아방궁은 미완성 상태에서 불타버렸고 궁궐의 이름도 아니다. 진나라의 궁궐은 함양궁이었다.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 35년 조에는 이 사실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br>아방궁은 끝내 완성되지 않았다. 완성되면 이름을 선택하여 다시 명명하려고 했다. 아방에 궁전을 지었기 때문에 천하가 그것을 아방궁이라고 했다. p 037<br>​<br>이것이 미완성으로 끝난 아방궁 마스터플랜의 앞부분이다. 한때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이 설계한 ‘지붕 낮은 집’인 고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집을 아방궁이라고 헐뜯은 것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헛소리였다. 또 전하기를 관중에 300채, 함곡관 동쪽에다 400여채의 궁전을 지었드며 또 진시황이 지배한 한, 위, 조, 제, 초, 연 6국의 부호 12만 호를 이곳으로 이주시키고 각국의 궁전을 모방한 건물을 짓게 하고 그들이 데려온 비빈과 미녀들이 미를 겨루게 하는 「삼십육궁의 봄」을 공연하게 했다고 한다. 이것이 전설적인 아방궁의 실상이다. p 039<br>​<br>​<br>난 아방궁이 진짜 호화스러운 궁을 말하는 줄 알았더니만, 웬걸! 미완성에다가 심지어 ‘아방’이라는 한자 뜻이 근방(가까울 아, 곁 방)! 아방궁 전설은 결국 ‘의자왕 삼천궁녀’ 마냥 문학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였다는 이야기.<br>​<br>​<br>한사군은 한반도 북서쪽 요동지방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보다 10여 년 앞서 한무제는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하서 지방의 흉노를 정벌하고 한사군을 설치했다. 이를 ‘하서사군’ 또는 ‘하서 한사군’이라고 한다. 하서는 황하의 서쪽이라는 뜻이며, 하서사군은 무위, 장액, 주천, 돈황 네 도시이다. (…) 역사적으로 보면 한족들이 세운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등 역대 왕조들은 한사군과 한구군의 울타리 안쪽을 강역으로 삼았다. 오늘날 중국의 영토가 그때보다 3배나 더 넓어진 것은 아주 예외적이고 최근 일이다. 이는 만주족의 청나라가 한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변강민족과의 동질성을 내세우며 티베트를 흡수하고 위구르 지역에 신강성을 설치한 것을 중화민국이 그대로 계승한 결과이다. p 050<br>​<br>한족의 위치에서 보면 우리도 변강민족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변강민족의 삶은 염두에 두지 않고 한족의 입장에서 중국사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훗날 동쪽의 한사군은 400년 뒤 고구려가 되찾았고, 900년 뒤 남쪽의 한구군 중 하노이 지역을 베트남이 차지했다. 그러나 하서의 한사군 땅은 원래의 유목민족인 흉노와 치열하게 일진일퇴의 쟁탈전을 벌였다. 결국 흉노가 망하고 한나라 차지가 되었지만 한나라가 망한 뒤 이 땅은 다시 유목민족의 차지가 되어, 이들이 세운 단명 국가가 명멸하는 오호십육국시대(304~420)의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p 051<br>​<br>한반도 북서쪽에 있는 한사군이 아닌, 하서지방의 한사군. 이렇게 또 한나라 역사 지식 +1이 되었다.&nbsp;<br>​<br>1949년 주원에서 정식으로 많은 청동기 구덩이가 발굴되었고 서주시대 궁궐터도 발견되었다.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에는 주나라 왕의 책봉을 받고 파견된 일, 제후가 전쟁에 참여한 일, 왕이 하사한 것, 토지의 교환/소송 판결등의 정치/경제/문화 각 방면이 언급되어 있다. 300개에 달하는 갑골문도 발견되었다. 특히 2003년 미현 양가촌에서는 문왕과 무왕을 받들어 주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단공의 후손 집 구덩이에서 아름답고 희귀한 청동제기가 다량으로 발견되어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p 060<br>​<br>주나라의 성립과정을 보면 시조는 후직이고 (…). 고공단보의 손자인 창이 서백이라는 벼슬을 하고 있던 시절에 상나라의 폭군 주왕이 주지육림에서 애첩 달기와 온갖 못된 짓을 하며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을 때 그를 폐위시키고 주나라를 세웠다. 훗날 문왕으로 추대된 서백은 낚시하던 강태공을 태공망이라 부르며 재상으로 맞이해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중국 사상의 처음과 끝이라고 할 『주역』도 문왕이 감옥살이하던 시절에 64괘를 만들었고 주공(문왕子)이 여기에 괘사를 붙인 것이다. 이것이 이상적인 봉건국가 주나라의 탄생과정이다. p 064<br>​<br>‘하은주~’로 외웠던 고대 중국 역사. 일단 하/은(상)나라는 제쳐두고, 주나라 유물이 그렇게나 많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놀랍기 그지 없없다. 심지어 정치/사회와 관련된 여러 문건까지. 놀랍기도 놀라웠지만 부럽기도 엄청 부러웠다. 동시대를 살았던, 한반도 고대국가 유물들도 이정도까지는 없는데.&nbsp;<br>​<br>우리나라 고대국가들은 기원전은 당연하고, 그나마 기원후인 고구려/백제/신라와 관련된 문건들도 대게 당대 기록은 유실되고 후대에 기록된 것들이 대다수다. 그나마 당대 기록이라고 남은 것들이 광개토대왕릉비나 진흥왕순수비 등이 남아있으나 오랜시간 외부에 있으면서 문자들이 유실되기도 하고, 설상가상 광개토대왕릉비는 중국에 있고. 부럽다 부러워!!<br>​<br>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천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저 많은 유물들이 어떻게 온전히 남아있을 수 있지? 싶었는데 왠걸. 기원전 771년 주나라가 유목민 침입을 받을때, 주나라 백성들이 다 들고 도망갈 수는 없으니 땅에 파묻고 도망간 모양이다. 그렇게 파묻힌 청동기들에 이천년이 지나 현대에 와서 발굴! 약간 뭐랄까.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백제가 함락될 때, 백제인이 땅속에 묻은 백제금동대향로와 비슷한 느낌이랄까.<br>​<br>한무제는 사마천의 진언에 분노하였고 이듬해에는 사마천을 파면시키고 감옥에 가두었다. (…) 사람들은 결국 궁형이 사마천으로 하여금 『사기』를 저술케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오히려 인생의 자산으로 삼은 이들을 이야기할 때면 꼭 사마천을 빼놓지 않고 말해왔다.<br>주나라 문왕은 구금 중에 『주역』의 64괘를 풀이하였고, 공자는 진과 채 사이에서 액을 당하고 『춘추』를 펴냈고, 굴원은 방축되고 『이소』를 지었고, 손빈은 다리가 잘리고 『손자병법』을 썼고, 쿠마라지바는 18년간의 유폐 중 한문을 배워 불경을 번역했고,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고 『사기』를 펴냈다. p 082<br>​<br>표면적으론 한무제가 이겼지만, 역사적으론 사마천이 이겼다. 왜? 기록을 남긴자가 승자이니까.&nbsp;<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8833/89/cover150/893647712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88338924</link></image></item><item><author>피로</author><category>긴 서평</category><title>심리학책 추천: 말하지 않고 말하기 - [말하지 않고 말하기 - 마음을 움직이는 소통의 심리학]</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2836</link><pubDate>Mon, 08 Jun 2026 06: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283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02138679&TPaperId=1732283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82/60/coveroff/k70213867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02138679&TPaperId=1732283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말하지 않고 말하기 - 마음을 움직이는 소통의 심리학</a><br/>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26년 05월<br/></td></tr></table><br/>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믿었던 언어의 성벽이 인공지능에 의해 허물어지고 있다. 기계가 인간보다 더 매끄러운 문장을 구사하는 시대,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소통의 빈곤을 겪는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말하지 않고 말하기』를 통해 대화의 본질이 화려한 수사가 아닌, '몸의 언어'와 '정서적 조율'에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기계적 데이터가 인간의 자리를 찬탈해버린 오늘날, 이 책이 분석하는 터치와 눈맞춤의 메커니즘은 우리가 잃어버린 소통의 원형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br>​<br>​<br><br>&nbsp;<br>인간의 감정은 지극히 상호적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남의 정서를 공유하도록 프로그램이 짜여 있습니다. 그래서 정서를 공유하지 못할 때, 외로워 집니다. 외로움의 본질은 내 감정을 남과 공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슬픔은 더 슬프게 느껴지고, 기쁨도 슬픔으로 변합니다. 웃을 때, 옆 사람을 살짝 때리거나 건드리는 이유는 기쁨과 즐거움을 공유하자는 무의식적인 메시지 입니다. 혼자 기뻐야 아무 의미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감정 전염’ 이라고 표현합니다. ‘터치’는 감정 공유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입니다. p 026<br>​<br>아기가 태어나서 경험하는 상호작용의 구체적 내용은 ‘터치’와 ‘눈맞춤’입니다. 이 두가지는 다음 파트에서 설명할 ‘정서 조율’과 더불어 자아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상호주관적 경험’ 입니다. 아기와 엄마 중, 그 누구에게도 환원할 수 없는 ‘공동의 경험’이라는 뜻입니다. 엄마와 아기가 ‘같은 몸’이었던 태아 때의 신체적 관계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터치의 경우 엄마가 손으로 아기를 만지지만, 아기는 자신의 몸으로 엄마의 손을 만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p 061<br><br>​<br>김정운의 &lt;말하지 않고 말하기&gt;는 ‘감각의 교차편집이 곧 자아 탄생이자 창조의 본질’임을 역설한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비약적으로 발전한 현대의 AI가 과연 인간과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가에 대해 우리는 단호히 "아니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AI와 대화하며 소통을 체감한다고 믿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보와 논리의 교환인 ‘일차원적 대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br>​<br>​<br>소통의 가장 원초적인 도구는 ‘터치’다. 물론 우리는 매일 스마트 기기를 터치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서를 공유하는 비언어적 도구로서의 터치가 아니라, 기계적 입력을 위한 ‘접촉’일 뿐이다. 본래 스마트폰을 터치했던 이유는 그 기기 너머에 있는 ‘누군가’와 연결되기 위해서였다. 전화, SNS는 소통을 돕는 매개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주객이 전도되었다. 굴러온 돌인 스마트 기기가 박힌 돌인 인간 관계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꿰차버린 것이다. 감정을 공유하고 상호작용해야 할 ‘사람’은 사라지고, 오직 일방적으로 두드리는 유리 액정과의 상호작용만 남았다.<br>​<br>​<br>터치와 더불어 인간 소통의 핵심 기제인 ‘눈맞춤’ 역시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일부 동물이 눈을 맞추기도 하지만, 이는 대개 위협이나 탐색 등 극히 제한된 생존 본능에 한정된다. 반면 인간의 눈맞춤은 대화 없이도 서로의 존재를 승인하고 정서를 조율하는 고도의 사회적 행위다. 하지만 소통의 자리를 기계가 대신하면서 이 눈맞춤의 규칙도 붕괴하기 시작했다. 눈을 맞추며 서로의 반응을 살피던 ‘상호주관적 브레이크’가 사라진 것이다. 시선을 매개로 한 상호작용이 사라진 자리에 사람들은 기계 속 콘텐츠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br>​<br>​<br>시선과 터치가 거세된 익명의 사이버 공간은 그 누구의 감시도, 수치심도 작동하지 않다. 김정운 교수가 지적하듯, 수백 년간 인류가 쌓아온 ‘문명화된 행동 규범’은 온라인에서 무력해진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통제 장치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악플, 마녀사냥,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에 매몰되며 점점 더 폭력적이고 원시적인 감정 표출에 익숙해지고 있다.<br>​<br>​<br>결국, AI와 스마트 기기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그것은 인간의 고유한 소통 영역인 ‘정서 조율’을 대신할 수 없다. 우리가 기계와 대화할수록 더 큰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그곳에 내 정서를 거울처럼 비춰줄 ‘온기 있는 타인’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br>​<br>심리학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처럼 절제된 행동, 즉 문명화된 행동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바로 ‘타인의 시선’ 입니다. 식탁의 사례처럼, 개인 공간이 다양한 방식으로 확보되면서, 사람들은 직접적인 신체 접촉을 ‘날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직접적인 신체 접촉은 분노나 적개심 같은 원초적 감정 표출과 쉽게 연계되기 때문이지요. 그 대신 ‘시선으로 매개되는 상호작용’이 중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p 079<br>​<br>엘리아스가 주장한 ‘문명화 과정’의 산물인 눈맞춤, 시선, 신체적 접촉의 원칙 등이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습니다. 수백 년에 걸쳐 강력하게 작동하는 수치와 부끄러움, 예의와 품격 같은 행동 규범이 온라인에서는 약화되거나 무력화됩니다. 익명과 비대면의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문명화 과정을 통해 구성된 ‘책임지는 개인’은 단번에 해체됩니다. 오프라인에서는 당연히 억제되었떤 언어폭력, 비아냥, 조리돌림, 집단 따돌림이 온라인에서는 수시로 발생합니다. 원시적 분노와 적개심의 표출은 더 이상 부끄러운 행동이 아닙니다. 그 결과 이제까지 공동체를 유지해왔떤 상호작용의 원칙들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사회적 신뢰도 붕괴됩니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일어나는 자기 통제의 붕괴, 상호존중의 약화 같은 현상을 학자들은 ‘탈문명화’로 설명합니다. p 090<br>​<br>​<br><br>​<br>​<br>결국 소통의 본질은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며 각자의 ‘자아’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과정에 있다. 기술이 인간의 언어를 완벽히 흉내 낼지라도, 눈맞춤이 주는 정서적 조율과 터치가 만드는 상호주관적 경험은 기계가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다. 우리가 스마트 기기의 매끄러운 유리 액정 대신 거칠고 투박한 타인의 손을 다시 잡아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디지털의 파도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은 화려한 알고리즘이 아니라, 내 감정에 진심으로 반응해 주는 살아있는 존재와의 감각적 공유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도구 뒤에 숨겨진 인간의 얼굴을 다시 마주해야 할 때다.<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82/60/cover150/k70213867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826086</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