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PIRO's Library (피로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4057178</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https://blog.naver.com/hellopiro</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ue, 09 Jun 2026 02:32:14 +0900</lastBuildDate><image><title>피로</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440571782428131.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44057178</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피로</description></image><item><author>피로</author><category>긴 서평</category><title>에세이 추천: 언제 어디서나 배웠다 - [언제 어디서나 배웠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2840</link><pubDate>Mon, 08 Jun 2026 07: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284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12032728&TPaperId=173228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97/97/coveroff/k01203272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12032728&TPaperId=1732284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언제 어디서나 배웠다</a><br/>신정일 지음 / 파람북 / 2025년 10월<br/></td></tr></table><br/>오늘 읽은 에세이 『언제 어디서나 배웠다』는, 읽으면서도 왜인지 낯설지가 않았다. 왜일까? 저자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동 저자의 다른 책을 몇 권 읽어본 적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읽었던 저자의 책들은 대게 문화유산 답사와 관련된 인문기행서였다. 그래서 그런가? 이 책을 받고나서, 기존과는 다른 장르라 살짝 놀란감도 없지 않았다.&nbsp;<br>​<br>하지만 역시는 역시! 이 에세이 『언제 어디나 배웠다』는 저자의 트레이드 마크인 인문기행의 ‘기행’만 빠졌을 뿐, ‘인문’은 그대로 가져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지면 곳곳에 배움에 관한 선현들의 말귀와 함께, 저자가 그동안 살면서 느끼고, 경험하고, 실천한 ‘배움’이 곳곳에서 묻어나온다.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 ‘배움’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이 에세이를 추천한다.<br>​&nbsp;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 앎이니라_공자<br>너 자신을 알라_소크라테스<br>마음이 텅 비어 있을 때 기억이 잘 스며들고, 집착에 얽매이면 기억이 흐트러진다_정이천<br>​나는 성공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성공에 고생할 만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_스펜서<br>​칭찬을 받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모욕을 당했다고 괴로워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라_마르크스<br><br><br>누구는 언어에 능하고, 누구는 숫자에 밝다. 누구는 길을 잘 찾고, 누구는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린다. 저마다 잘하는 공부가 있고, 못하는 공부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은 다 다르면서도 비슷비슷하다. 그게 자연스럽다. 그러니 배움의 길에 들어선 우리들은 서로의 부족함을 비난하지 말자. 다름을 이해하고 채워주는 공동체를 만들어보자. 그래야 진정한 배움이 숨 쉴 것이다. p 021<br>​<br>답은 간단하다. 공부가 즐거우려면, 내가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내 세계와 연결되는 것부터. 남들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 말고, 내가 궁금한 것부터. 노는 것처럼 배우고, 배우는 것 처럼 노는 것. 맹자가 말한 대로 즐거우면 생기가 나고, 생기가 나면 또 다른 앎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p 032<br>​<br>배움은 제도에 갇힌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서 솟아나는 것이어야 한다. 그 길은 누구에게는 정규일 수도 있고, 또 누구에네는 야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길을 얼마나 뜨겁게, 얼마나 진실하게 걸었는가이다. 아무도 깔아주지 않은 흙길, 바람 부는 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길, 그 길 위에서 나는 나의 선생들을 만나고, 나를 만난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야매의 품격이다. p 057<br><br>​<br>내가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부’는 중요하다. 얼마나 ‘공부’를 잘하느냐에 따라, 최상위권 대학 입학 여부가 갈리기 때문이다. 최상위권 대학만 가면 고소득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고, 상류층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넓어진다는게 그 이유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늘 자녀들에게 ‘공부’를 말한다.<br>​<br>이런 세상을 살면서 늘 궁금했다. 정말 사회에서 말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인가. 소위 학교 성적에 필요한 국/영/수/사/과 등에 한정되어 좋은 점수를 받는 게 공부일까. 국/영/수 등 이른바 정규 교육과정의 교과목이 아닌, 내가 정말 궁금해서 알고 싶은 분야를 공부하는 건 공부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을 제시하면 ‘네가 아직 어려서그래, 일단 좋은 성적을 받고나서 이야기하자’ 등의 어른들의 무마가 뒤따른다.<br>​<br>대다수의 아이들은 부모가 말하는 ‘공부’를 이해하고, 따른다. 어떤 아니는 정규 교육과정 자체가 좋아하서 공부를 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고, 부모의 말이니 어쩔수 없이 억지로 공부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억지로 공부하는 것. 과연 효과가 있을까? 물론 어느정도는 효과가 있겠지만, 일시적일뿐이다. 억지로 한 공부의 끝은 언제터질지 모를 활화산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다 무시하고, 책상에 앉혀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공부를 시키는 것. 이게 과연 정상적인 행동일까.&nbsp;<br>​<br>이런 물음에 대다수의 부모들은 할 말이 있다. 언제나 아이가 좋아하는 것만 하게 해주고 싶은데, 사회가 허용해주지 않는다고. 나는 이런 대답을 그저 어른들의 이기적인 변명이라 생각했는데, 아이를 키우며 깨달았다. 이들의 변명이 이기적인 변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말 사회가 아이들을 ‘성적 순’으로 길들이며 키우고 있었음을. 만약 이런 사회를 무시하고 정말 ‘아이’가 원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그 아이는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짝 벗어난 위치에 서있게 됨을 말이다. 예외적으로 극히 소수는 자본주의 정점에 설 수도 있지만.<br>​<br>사회가 원하는 게 아닌, 내 아이가 원하는 것을 마음 껏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날은 언제쯤 올런지!<br>​<br>자연은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우선 아이여야 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이 질서를 거슬러 억지로 성숙을 강요하면 우리는 설익고 맛없는, 곧 썩어버릴 과일을 얻게 될 것이다. 즉, 우리는 애늙은이들을 만들게 된다_루소<br>물오리가 날 때부터 헤엄을 치듯이, 어린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착한 일을 할 천성을 지니고 있다. 그 천성을 일일이 간섭하면 그것은 물오리에게 헤엄을 금하는 것과 같다_플로베르<br>현자는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남을 돕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가르친다. 존재들을 억지로 이끌지 않고, 스스로 살게 하며, 독립하지 않고 스스로 이루어지도록 둔다_노자<br><br><br>아이들을 다시 보니 정말 그랬다. 그들은 놀이를 통해 사회를 배우고, 몸을 움직이며 사고의 경계를 확장하며, 다른 존재들과 부딪히며 감각과 감정을 익히고 있었다. 놀이는 곧 삶이고, 삶은 곧 배움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어른들은 종종 망각하는데 말이다.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온전한 하나의 우주라고 칭해야 하지 않을까. 그 세계는 자율과 자유 속에서 피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른의 역할은 무엇이곘는가. 어른이 원하는 어떤 것을 어린이에게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율이 자생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 아닐까. p 097<br>​<br>시간이 흐르며 나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강요는 삶을 단순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삶의 깊이를 앗아가기도 한다는 것. 애매한 상황일수록 자유를 허용할 줄 아는 유연함, 그것 또한 삶의 지혜라는 것을. p 132<br>​<br>너무 개입하지도, 완전히 방관하지도 않는 것.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 삶에 필요한 자세라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너무 가까우면 서로 상처받고, 너무 멀면 소통이 단절된다. 사랑도 적당한 긴장감이 있어야 더욱 잎어진다. p 143<br>​<br>내 아이가 원하는 것을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날. 그런 날이 오기 위해선 지금과 같은 극한의 자본주의(물질만능주의)가 사그러져야한다. 정규 과정에서 배우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야한다. 놀이터에서 놀면서 배우는게 있고, 흙을 밟으며 배우는게 있고, 나무를 만지며 배우는 게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br>​<br>과거야 빠른 성장이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자본주의라는 가치관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아니지않은가. 목표가 사라진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건, 낡아빠진 목표를 계속해서 밀어부쳐서 발생한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폐해일 뿐이다. 이런 낡아빠진 목표로 인해 내 아이가 ‘배움’의 기회를, 즐거움을, 성취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고, 미안할 따름이다.<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97/97/cover150/k01203272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4979705</link></image></item><item><author>피로</author><category>긴 서평</category><title>역사책 추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1 - 돈황과 하서주랑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 : 돈황과 하서주랑 - 명사산 명불허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2838</link><pubDate>Mon, 08 Jun 2026 07: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283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77129&TPaperId=1732283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8833/89/coveroff/893647712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77129&TPaperId=1732283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 : 돈황과 하서주랑 - 명사산 명불허전</a><br/>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04월<br/></td></tr></table><br/>오늘 리뷰하는 역사책은 현 국중박 관장이신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국편1』 이다.&nbsp;<br>전 권을 다 모으진 못했지만, 그래도 대략 70%는 책장에 꽂혀 있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 물론 다 읽지는 못했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한 권씩 읽는 정도? 중국편 역시 사두기만하고 안읽다가, 급 꽂혀서 읽기 시작!!<br>​<br>&nbsp;<br>​<br><br>어느 시대나 한 문화권에는 주도하는 중심부 문화가 있고 이를 따라가는 주변부 문화가 있다. 그것이 하나로 어울릴 때 그 문화권은 더욱 풍성한 모습을 갖게 된다. 에드윈 라이샤워가 말한 바대로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과 함께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중국의 불상, 한국의 불상, 일본의 불상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비슷한 것은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보편성이고, 다른 것은 각 민족의 특수성이다. p 014<br>​<br>&nbsp;『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국편1』&nbsp; 서두에 문화의 보편성과 민족의 특수성 이야기가 있어서 다시금 곱씹어 본다. 보통 전 세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유물을 문화의 보편성이라고 말하고, 보편적인 문화유산 속에서 보이는 각 국의 개성을 특수성이라고 한다. 문화의 보편성으로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고대 유물인 비너스상(또는 여인상)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발굴되는 여인상을 보면, 그 모습이 각기 다르다. 이게 바로 보편적인 유물에서 발견되는 각 나라의 특수성이다.&nbsp;<br>​<br>이번엔 동아시아 3국을 봐보자. 한국, 중국, 일본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화 유산이 정말 많다. 위에서 말한 불교 문화가 그렇고, 도자기 문화가 그렇고, 정원 문화가 그렇다.&nbsp;<br>​<br>불교문화는 중국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왔고,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전파하였다. 민간신앙과 쉽게 융합되는 불교 특성상, 세 나라 모두 불교가 민생 깊숙히 파고들었다. 그 결과 세 나라에서 모두 불교 문화유산이 많이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게 절과 불상이다. 한국, 중국, 일본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는게 절과 불상. 이것들이 문화의 보편성에 속하는 대표적인 사례다.&nbsp;<br>​<br>중국이라는 나라에서 한반도로, 그리고 일본열도로. 시작점은 한 곳이니 삼세 나라의 불교문화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놀랍게도 각국의 절과 불상은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민족의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다.<br>​<br>예컨데 한국의 절은 ‘산사(또는 사찰)’라고 해서, 예로부터 녹음이 푸르른 산에 지어졌다. 자연경광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자연과 어우러지도록 지어진게 바로 우리네 사찰이다. 반면에 중국은 아주 거대한 규모로 산과 바위를 파고, 깎고, 다듬어가며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 손을 거쳐서 만들었다. 거대한 막고굴 같은 석굴사원이 대표적이다. 일본 사찰은 주로 마을 한켠에 있다.&nbsp;<br>&nbsp;<br>세 국가의 정원문화도 그렇다. 한국 정원은 창덕궁 정원처럼 언제나 자연을 중심에 두고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연과 조화로움을 생각했으며, 중국은 이화원 같이 인공적이고 거대한 정원을 만들었고, 일본은 라쿠스이엔이나 료안지처럼 돌과 연못등을 이용하여 절제된 환경의 정원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불상이나, 도자기 같은 문화유산도 세 나라 모두에서 보이는 보편적인 문화유산이지만, 각 나라의 특수성이 반영되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br>​<br>유홍준 교수님이 굳이굳이 문화의 보편성을 이야기한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중국 편’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중국과 뗄레야 뗄수 없고, 수많은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 그렇다보니 중국에 있는 문화유산과 비슷한 문화유산이 한국에 있을 때, 그 둘을 무의식적으로 비교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기에, 그런 사람들을 위해 굳이굳이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이야기한게 아닐까?&nbsp;<br>​​<br>자 이제 본격적으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국편1』로 들어가보자.<br>​<br><br><br>진나라의 수도 함양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진시황의 아방궁이다. 아방궁이 하도 유명해서 사람들은 진시황이 짓고 살던 호화로운 황궁의 이름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아방궁은 미완성 상태에서 불타버렸고 궁궐의 이름도 아니다. 진나라의 궁궐은 함양궁이었다.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 35년 조에는 이 사실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br>아방궁은 끝내 완성되지 않았다. 완성되면 이름을 선택하여 다시 명명하려고 했다. 아방에 궁전을 지었기 때문에 천하가 그것을 아방궁이라고 했다. p 037<br>​<br>이것이 미완성으로 끝난 아방궁 마스터플랜의 앞부분이다. 한때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이 설계한 ‘지붕 낮은 집’인 고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집을 아방궁이라고 헐뜯은 것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헛소리였다. 또 전하기를 관중에 300채, 함곡관 동쪽에다 400여채의 궁전을 지었드며 또 진시황이 지배한 한, 위, 조, 제, 초, 연 6국의 부호 12만 호를 이곳으로 이주시키고 각국의 궁전을 모방한 건물을 짓게 하고 그들이 데려온 비빈과 미녀들이 미를 겨루게 하는 「삼십육궁의 봄」을 공연하게 했다고 한다. 이것이 전설적인 아방궁의 실상이다. p 039<br>​<br>​<br>난 아방궁이 진짜 호화스러운 궁을 말하는 줄 알았더니만, 웬걸! 미완성에다가 심지어 ‘아방’이라는 한자 뜻이 근방(가까울 아, 곁 방)! 아방궁 전설은 결국 ‘의자왕 삼천궁녀’ 마냥 문학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였다는 이야기.<br>​<br>​<br>한사군은 한반도 북서쪽 요동지방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보다 10여 년 앞서 한무제는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하서 지방의 흉노를 정벌하고 한사군을 설치했다. 이를 ‘하서사군’ 또는 ‘하서 한사군’이라고 한다. 하서는 황하의 서쪽이라는 뜻이며, 하서사군은 무위, 장액, 주천, 돈황 네 도시이다. (…) 역사적으로 보면 한족들이 세운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등 역대 왕조들은 한사군과 한구군의 울타리 안쪽을 강역으로 삼았다. 오늘날 중국의 영토가 그때보다 3배나 더 넓어진 것은 아주 예외적이고 최근 일이다. 이는 만주족의 청나라가 한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변강민족과의 동질성을 내세우며 티베트를 흡수하고 위구르 지역에 신강성을 설치한 것을 중화민국이 그대로 계승한 결과이다. p 050<br>​<br>한족의 위치에서 보면 우리도 변강민족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변강민족의 삶은 염두에 두지 않고 한족의 입장에서 중국사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훗날 동쪽의 한사군은 400년 뒤 고구려가 되찾았고, 900년 뒤 남쪽의 한구군 중 하노이 지역을 베트남이 차지했다. 그러나 하서의 한사군 땅은 원래의 유목민족인 흉노와 치열하게 일진일퇴의 쟁탈전을 벌였다. 결국 흉노가 망하고 한나라 차지가 되었지만 한나라가 망한 뒤 이 땅은 다시 유목민족의 차지가 되어, 이들이 세운 단명 국가가 명멸하는 오호십육국시대(304~420)의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p 051<br>​<br>한반도 북서쪽에 있는 한사군이 아닌, 하서지방의 한사군. 이렇게 또 한나라 역사 지식 +1이 되었다.&nbsp;<br>​<br>1949년 주원에서 정식으로 많은 청동기 구덩이가 발굴되었고 서주시대 궁궐터도 발견되었다.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에는 주나라 왕의 책봉을 받고 파견된 일, 제후가 전쟁에 참여한 일, 왕이 하사한 것, 토지의 교환/소송 판결등의 정치/경제/문화 각 방면이 언급되어 있다. 300개에 달하는 갑골문도 발견되었다. 특히 2003년 미현 양가촌에서는 문왕과 무왕을 받들어 주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단공의 후손 집 구덩이에서 아름답고 희귀한 청동제기가 다량으로 발견되어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p 060<br>​<br>주나라의 성립과정을 보면 시조는 후직이고 (…). 고공단보의 손자인 창이 서백이라는 벼슬을 하고 있던 시절에 상나라의 폭군 주왕이 주지육림에서 애첩 달기와 온갖 못된 짓을 하며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을 때 그를 폐위시키고 주나라를 세웠다. 훗날 문왕으로 추대된 서백은 낚시하던 강태공을 태공망이라 부르며 재상으로 맞이해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중국 사상의 처음과 끝이라고 할 『주역』도 문왕이 감옥살이하던 시절에 64괘를 만들었고 주공(문왕子)이 여기에 괘사를 붙인 것이다. 이것이 이상적인 봉건국가 주나라의 탄생과정이다. p 064<br>​<br>‘하은주~’로 외웠던 고대 중국 역사. 일단 하/은(상)나라는 제쳐두고, 주나라 유물이 그렇게나 많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놀랍기 그지 없없다. 심지어 정치/사회와 관련된 여러 문건까지. 놀랍기도 놀라웠지만 부럽기도 엄청 부러웠다. 동시대를 살았던, 한반도 고대국가 유물들도 이정도까지는 없는데.&nbsp;<br>​<br>우리나라 고대국가들은 기원전은 당연하고, 그나마 기원후인 고구려/백제/신라와 관련된 문건들도 대게 당대 기록은 유실되고 후대에 기록된 것들이 대다수다. 그나마 당대 기록이라고 남은 것들이 광개토대왕릉비나 진흥왕순수비 등이 남아있으나 오랜시간 외부에 있으면서 문자들이 유실되기도 하고, 설상가상 광개토대왕릉비는 중국에 있고. 부럽다 부러워!!<br>​<br>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천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저 많은 유물들이 어떻게 온전히 남아있을 수 있지? 싶었는데 왠걸. 기원전 771년 주나라가 유목민 침입을 받을때, 주나라 백성들이 다 들고 도망갈 수는 없으니 땅에 파묻고 도망간 모양이다. 그렇게 파묻힌 청동기들에 이천년이 지나 현대에 와서 발굴! 약간 뭐랄까.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백제가 함락될 때, 백제인이 땅속에 묻은 백제금동대향로와 비슷한 느낌이랄까.<br>​<br>한무제는 사마천의 진언에 분노하였고 이듬해에는 사마천을 파면시키고 감옥에 가두었다. (…) 사람들은 결국 궁형이 사마천으로 하여금 『사기』를 저술케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오히려 인생의 자산으로 삼은 이들을 이야기할 때면 꼭 사마천을 빼놓지 않고 말해왔다.<br>주나라 문왕은 구금 중에 『주역』의 64괘를 풀이하였고, 공자는 진과 채 사이에서 액을 당하고 『춘추』를 펴냈고, 굴원은 방축되고 『이소』를 지었고, 손빈은 다리가 잘리고 『손자병법』을 썼고, 쿠마라지바는 18년간의 유폐 중 한문을 배워 불경을 번역했고,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고 『사기』를 펴냈다. p 082<br>​<br>표면적으론 한무제가 이겼지만, 역사적으론 사마천이 이겼다. 왜? 기록을 남긴자가 승자이니까.&nbsp;<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8833/89/cover150/893647712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88338924</link></image></item><item><author>피로</author><category>긴 서평</category><title>심리학책 추천: 말하지 않고 말하기 - [말하지 않고 말하기 - 마음을 움직이는 소통의 심리학]</title><link>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2836</link><pubDate>Mon, 08 Jun 2026 06: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44057178/1732283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02138679&TPaperId=1732283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82/60/coveroff/k70213867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02138679&TPaperId=1732283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말하지 않고 말하기 - 마음을 움직이는 소통의 심리학</a><br/>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26년 05월<br/></td></tr></table><br/>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믿었던 언어의 성벽이 인공지능에 의해 허물어지고 있다. 기계가 인간보다 더 매끄러운 문장을 구사하는 시대,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소통의 빈곤을 겪는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말하지 않고 말하기』를 통해 대화의 본질이 화려한 수사가 아닌, '몸의 언어'와 '정서적 조율'에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기계적 데이터가 인간의 자리를 찬탈해버린 오늘날, 이 책이 분석하는 터치와 눈맞춤의 메커니즘은 우리가 잃어버린 소통의 원형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br>​<br>​<br><br>&nbsp;<br>인간의 감정은 지극히 상호적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남의 정서를 공유하도록 프로그램이 짜여 있습니다. 그래서 정서를 공유하지 못할 때, 외로워 집니다. 외로움의 본질은 내 감정을 남과 공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슬픔은 더 슬프게 느껴지고, 기쁨도 슬픔으로 변합니다. 웃을 때, 옆 사람을 살짝 때리거나 건드리는 이유는 기쁨과 즐거움을 공유하자는 무의식적인 메시지 입니다. 혼자 기뻐야 아무 의미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감정 전염’ 이라고 표현합니다. ‘터치’는 감정 공유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입니다. p 026<br>​<br>아기가 태어나서 경험하는 상호작용의 구체적 내용은 ‘터치’와 ‘눈맞춤’입니다. 이 두가지는 다음 파트에서 설명할 ‘정서 조율’과 더불어 자아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상호주관적 경험’ 입니다. 아기와 엄마 중, 그 누구에게도 환원할 수 없는 ‘공동의 경험’이라는 뜻입니다. 엄마와 아기가 ‘같은 몸’이었던 태아 때의 신체적 관계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터치의 경우 엄마가 손으로 아기를 만지지만, 아기는 자신의 몸으로 엄마의 손을 만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p 061<br><br>​<br>김정운의 &lt;말하지 않고 말하기&gt;는 ‘감각의 교차편집이 곧 자아 탄생이자 창조의 본질’임을 역설한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비약적으로 발전한 현대의 AI가 과연 인간과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가에 대해 우리는 단호히 "아니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AI와 대화하며 소통을 체감한다고 믿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보와 논리의 교환인 ‘일차원적 대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br>​<br>​<br>소통의 가장 원초적인 도구는 ‘터치’다. 물론 우리는 매일 스마트 기기를 터치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서를 공유하는 비언어적 도구로서의 터치가 아니라, 기계적 입력을 위한 ‘접촉’일 뿐이다. 본래 스마트폰을 터치했던 이유는 그 기기 너머에 있는 ‘누군가’와 연결되기 위해서였다. 전화, SNS는 소통을 돕는 매개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주객이 전도되었다. 굴러온 돌인 스마트 기기가 박힌 돌인 인간 관계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꿰차버린 것이다. 감정을 공유하고 상호작용해야 할 ‘사람’은 사라지고, 오직 일방적으로 두드리는 유리 액정과의 상호작용만 남았다.<br>​<br>​<br>터치와 더불어 인간 소통의 핵심 기제인 ‘눈맞춤’ 역시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일부 동물이 눈을 맞추기도 하지만, 이는 대개 위협이나 탐색 등 극히 제한된 생존 본능에 한정된다. 반면 인간의 눈맞춤은 대화 없이도 서로의 존재를 승인하고 정서를 조율하는 고도의 사회적 행위다. 하지만 소통의 자리를 기계가 대신하면서 이 눈맞춤의 규칙도 붕괴하기 시작했다. 눈을 맞추며 서로의 반응을 살피던 ‘상호주관적 브레이크’가 사라진 것이다. 시선을 매개로 한 상호작용이 사라진 자리에 사람들은 기계 속 콘텐츠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br>​<br>​<br>시선과 터치가 거세된 익명의 사이버 공간은 그 누구의 감시도, 수치심도 작동하지 않다. 김정운 교수가 지적하듯, 수백 년간 인류가 쌓아온 ‘문명화된 행동 규범’은 온라인에서 무력해진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통제 장치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악플, 마녀사냥,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에 매몰되며 점점 더 폭력적이고 원시적인 감정 표출에 익숙해지고 있다.<br>​<br>​<br>결국, AI와 스마트 기기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그것은 인간의 고유한 소통 영역인 ‘정서 조율’을 대신할 수 없다. 우리가 기계와 대화할수록 더 큰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그곳에 내 정서를 거울처럼 비춰줄 ‘온기 있는 타인’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br>​<br>심리학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처럼 절제된 행동, 즉 문명화된 행동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바로 ‘타인의 시선’ 입니다. 식탁의 사례처럼, 개인 공간이 다양한 방식으로 확보되면서, 사람들은 직접적인 신체 접촉을 ‘날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직접적인 신체 접촉은 분노나 적개심 같은 원초적 감정 표출과 쉽게 연계되기 때문이지요. 그 대신 ‘시선으로 매개되는 상호작용’이 중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p 079<br>​<br>엘리아스가 주장한 ‘문명화 과정’의 산물인 눈맞춤, 시선, 신체적 접촉의 원칙 등이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습니다. 수백 년에 걸쳐 강력하게 작동하는 수치와 부끄러움, 예의와 품격 같은 행동 규범이 온라인에서는 약화되거나 무력화됩니다. 익명과 비대면의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문명화 과정을 통해 구성된 ‘책임지는 개인’은 단번에 해체됩니다. 오프라인에서는 당연히 억제되었떤 언어폭력, 비아냥, 조리돌림, 집단 따돌림이 온라인에서는 수시로 발생합니다. 원시적 분노와 적개심의 표출은 더 이상 부끄러운 행동이 아닙니다. 그 결과 이제까지 공동체를 유지해왔떤 상호작용의 원칙들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사회적 신뢰도 붕괴됩니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일어나는 자기 통제의 붕괴, 상호존중의 약화 같은 현상을 학자들은 ‘탈문명화’로 설명합니다. p 090<br>​<br>​<br><br>​<br>​<br>결국 소통의 본질은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며 각자의 ‘자아’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과정에 있다. 기술이 인간의 언어를 완벽히 흉내 낼지라도, 눈맞춤이 주는 정서적 조율과 터치가 만드는 상호주관적 경험은 기계가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다. 우리가 스마트 기기의 매끄러운 유리 액정 대신 거칠고 투박한 타인의 손을 다시 잡아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디지털의 파도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은 화려한 알고리즘이 아니라, 내 감정에 진심으로 반응해 주는 살아있는 존재와의 감각적 공유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도구 뒤에 숨겨진 인간의 얼굴을 다시 마주해야 할 때다.<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82/60/cover150/k70213867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826086</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