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간 클래식 - 나는 클래식을 들으러 미술관에 간다 일상과 예술의 지평선 4
박소현 지음 / 믹스커피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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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장에는 미술관련책이 여러권 있다. 『혼자보는 미술관』, 『방구석 미술관 1,2』, 『기묘한 미술관』 등. 처음에는 화가가 그린 그림에 대한 비하인드가 궁금해서 보았고, 그 명화를 대중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궁금해서 보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위 책들에는 중복되는 명화&그림들이 워낙 많아서, 어느 순간부터는 미술관련 책들을 읽어도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연스레 미술관련책들도 잘 안읽게 되었달까. 





그런 내가 정말 오랜만에 미술관련 책을 읽었다. 왜? 새로웠으니까!


나에게 새로움을 준 이 책의 제목은 『미술관에 간 클래식』.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큐레이트한 명화를 보다보면, 정말 신기하게도 귓 가에서 클래식♬이 들려온다. 





이 책의 저자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비올리스트, 클래식 강연가. 한마디로 음악가다. 헌데 미술관을 정말 좋아한단다. 음악이나 미술, 전부 ‘예술’에 속하는 장르여서, 음악예술가인 저자가 미술예술가인 화가들을 좋아하고 그들이 그린 그림을 좋아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음악과 미술은 같은 예술이어도, 예술 문외한인 내가 봐도 확실히 그 결이 다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그토록 다른 음악과 미술이 어쩌면 비슷한 친구(?)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저자가 그렇게 귀뜸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저자는 총 30개의 챕터로 이 책을 구성하였고, 그 안에서 30점의 미술작품과 30점의 음악을 연결하였다. 여기서 꼭 말하고 넘어가야하는게, 위에서 말한 귓가에 ‘클래식이 들린다’ 라는 것이 환청이 아니라 진짜라는 사실. 정말로 이 책은 읽다보면 클래식이 들린다. 왜? 매 챕터마다 큐알코드가 있는데, 그 큐알코드를 찍으면 저자가 선정한 클래식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야기 하고 싶은 것. 이 책에는 일반인에게 조금은 생소한(?) 미술작품들도 대거 실려있다. 클래식이야 두 말하면 입 아프고.



지금까지 내가 읽어본 미술관련 책에서 소개하는 명화들은 중복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뭐, 화가 또는 그림이 워낙 유명해서 중복정도는 어쩔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중복되는 그림이 너무 많아서 자연스레 미술관련 책을 멀리하게 된 것도 있다. 솔직히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중복되는 명화들은 감안하고 보자!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건 뭐. 나에게는 정말 생소한 그림들이 너무 많았다. 물론 여러 미술관련 책에서 언급하는 그림들과 중복되는 게 없는 건 아니지만, 눈에 띌 만큼 있는건 아니다. 외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작품들이 훨씬 많다. 특히 유명한 서양화가 즐비한 상황에서, 우리가 국사책에서나 배웠던 고구려 벽화가 한 챕터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박수치고 싶은 느낌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큐레이팅한 고구려벽화 <강서대묘 사신도>와 작곡가 윤이상의 <영상> 챕터를 소개해본다. 



정말이지 나는 뼛속깊이까지 한국인인지, 아니면 역사더쿠 마인드가 내 뇌를 장악해서 그런지, 유독 이 챕터가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는 건 안 비밀!



고구려 벽화를 재현하는 음악 : <강서대묘 사신도> vs 윤이상 <영상>


고려 문신 김부식이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사기』, 고려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로 당시 고구려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중국 지린성에 가면 볼 수 있는 무용총을 비롯해 북한에 위치한 수렵총, 수산리 고분 등의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벽화들은 당시 고구려인의 복식, 악기와 사냥 도구나 방식, 풍습을 잘 알수 있는 뛰어난 미술 자료다. 특히 북한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는 <강서대묘 사신도>는 고구려의 강건한 성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p 095



사신은 동양에서 동서남북을 수호하고 사계절을 주관하는 네 마리의 환상 동물을 뜻한다. 동방은 청룡, 서방은 백호, 남방은 주작, 북방은 현무, 중앙은 호아룡이 수호하고 있다. 강서대표의 널방은 남쪽에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동쪽 벽에는 청룡도, 서쪽 벽에는 백호도, 북쪽 벽에는 현무도, 입구 좌우의 좁은 벽에는 주작이 한 마리식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황룡이 그려져 있었으나 침수로 사라졌다. p 095


고구려 벽화 <강서대묘 사신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자랑스런 우리 유산이자, ‘미술작품’이다. 솔직히 말하면 <강서대묘 사신도>는 ‘고구려’ 벽화로써만 배우다보니, ‘미술작품’보다는 ‘역사문화재’ 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미술작품’으로써 대접하는 책이 있다는게 새롭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무엇보다 <강서대묘 사신도>에게 잊혀졌던 ‘미술작품’이라는 정체성을 찾게 해준듯 하여 고맙기도 했다.



각설하고.



한창 전세계적으로 냉전시대였던 그 때, 남한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한창이던 그때 <강서대묘 사신도> 라는 작품에 반했던,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작곡가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음악에 <강서대묘 사신도>를 마주하고 느낀 감정과, 그 속에서 찾은 한국의 사상을 담아내어 그 어떤 찬사로도 부족한 음악 <영상>을 작곡하였다. 그의 고향은 대한민국 통영, 즉 자랑스런 우리 국민이었다. 그 작곡가의 이름은 바로 ‘윤이상’.



작곡가 윤이상은 <강서대묘 사신도>를 직접 보고, 대작 <영상>을 작곡한 뒤 죽을 때 까지 자신의 고향인 대한민국에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강서대묘 사신도>가 북한에 있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이 벽화를 직접 보기 위해 북한으로 향했다가 살아생전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위대한 작곡가가 있다. p 097



전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은 윤이상은,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는 등 현대음악 작곡가로서 매우 중요한 입지에 선다. (…) 어린시절 서당에서 배운 도교 사상을 음악에 넣으려 했다고 직접 밝히기도 했는데, 음약오행과도 연결되어 있다. 윤이상은 한국 정신의 실체를 만나기 위해서는 고구려 벽화를 직접 봐야한다는 생각을 키웠고,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한 친구도 만날 겸 북한에 방문해 <강서대묘 사신도>와 마주한다. p 098



그러나 1967년, 윤이상은 간첩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한국으로 불법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는다. 194명의 유학생과 교민들이 간첩으로 몰려 납치당하고 고문당한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p 098



이후 다시는 남한 땅을 밟지 못한 윤이상은 1979년부터 김일성의 초대로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하며 윤이상음악연구소와 관현악단을 지도했다. 사후에도 간첩이라는 오해로 명예가 더렵혀졌던 위대한 작곡가. 남북을 가르는 게 아니라 그저 조국을 방문했을 뿐이었다는 사실이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려졌다. p 099


윤이상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항일운동을 하며 수감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광복 이후에는 프랑스로 음악 유학을 갔고, 독일에서는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하여 대 성공한 명실공히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하지만 그는 박정희 정권에서 조작한 간접사건 ‘동백림 사건(동베를린 사건)’으로 인해, 죽을 때 까지 고향인 대한민국에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작곡가 윤이상이 연루되었던, 조작된 간첩사건 ‘동백림 사건’에 대해 부연설명 하자면..



동백림 사건은, 독일(당시에는 동독)에 체류중이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어느날 갑자기 납치되어, 한국으로 끌려와 간첩으로 몰리고 잔혹한 고문을 당한 사건이다. 작곡가 윤이상,현대화가 고암 이응로를 포함하여, 독일에 체류 중이던 수많은 유학생과 교민들이 연루된 사건이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휴전된 직후였다. 남한은 경제적으로 곤궁했고, 북한은 남한보다 조금 더 경제력이 나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상황이 그러하다보니, 여러나라에 있는 북한 대사관에서 남한 유학생들에게 밥 한끼를 먹여주는 것이 매우 일상적인 상황이었다. 마침 독일, 그러니까 당시 동독에도 북한대사관이 있었는데, 우리 교민들이 북한대사관을 자주 찾아가 밥을 얻어먹고는 했다. 



남한의 박정희 정권은 이를 좌시 하지 않았다. 독재로 인해 내부의 불만이 쌓인 상황이다보니,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는게 시급했다.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는 제일 좋은 방법은 다름 아닌 ‘간첩사건’. 그렇게 동독에 체류하던 남한 교민들은 전부 빨갱이가 되었고,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작곡가 윤이상은 <강서대묘 사신도>를 보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던 것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윤이상은 물고문을 받으며 죽기 직전까지 갔고, 결국 ‘북한에 봉사하는 공산주의자’라는 거짓 자백을 했다. 이렇게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많은 교민들이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받고, 거짓자백을 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거다. 당시 윤이상은 그냥 작곡가가 아니라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라는 점이다. 독일 정부는 윤이상이 무리하게 끌려가 수사를 받았다며 특별 사면을 요구했다. 당시 세계적인 음악가인 스트라빈스키, 카라얀 등을 포함한 전 세계 음악인 200여 명도 한국 정부에 공통 탄원서를 보내며 박정희 정권에 항의했다. 전 세계적으로 남한을 주시하자, 궁지에 몰린 박정희 정권은 결국 1969년 2월 25일에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윤이상을 풀어줬고, 독일로 추방시켰다. 이후 윤이상은 살아생전에 고국인 남한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죽은 지 23년이 흘러서야, 윤이상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윤이상의 유해는 고향 통영에 안장되었다.



윤이상은 차가운 감옥에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던 1968년, <강서대묘 사신도>를 토대로 한 작품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영상>을 완성한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나무의 속성을 지닌 동쪽에는 목관악기, 쇠의 속성을 지닌 서쪽에는 쇠붙이가 재료가 된 악기, 불과 붉은 빛을 상징하는 남쪽에는 현악기, 북쪽에는 타악기를 배치해야 한다. 윤이상은 동방청룡은 오보에, 남방주작은 바이올린을 배치한다. 앙상블을 생각해 서방백호는 첼로, 북방현무는 플루트를 배치한다. 오보에와 바이올린은 양, 첼로와 플루트는 음의 역할로 나눠 악보 위에서 힘차게 날아오르도록 했다. 


국악기의 소리나 주법을 서양악기로 구현하려고 했던 윤이상의 시도는 이 작품에서도 잘 느낄 수 있는데, 오보에는 피리가, 플루트는 대금이, 해금은 바이올린이, 아쟁은 첼로가 음색을 모방하고 있다. p 099~100



윤이상 음악의 본질을 알기 위해선 <강서대묘 사신도>를 봐야 한다는 말처럼 통영의 윤이상기념관 입구에는 사신도가 자리 잡고 있다. 상처받은 용, 윤이상이 미술적 상상력을 악보 위에 펼쳐낸 작품이 <영상>이다. p 100


전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작곡가 윤이상은 갑작스레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조국으로 끌려와 잔혹한 고문을 받고, 감옥에서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지도 모르는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상황이에도, 그는 작곡에 매진했다. 자신이 그토록 보고싶어했고 결국엔 보고야 말았던 <강서대묘 사신도>를 오선지 위에 옮겼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영상>이다.



책 속의 큐알코드를 찍고 윤이상의 <영상>을 듣고 있으면, 분명 서양의 악기로 연주된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분명 뼈대는 서양음악인데, 그 안에서 풍기는 느낌은 동양의 그것. 정말이지 신기한 기분이랄까?



내가 수많은 명화와 음악을 소개한 챕터 중에서 굳이 이 챕터를 소개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유명한 서양그림, 서양음악 전부 좋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동/서양의 문화차이가 괜히 있는게 아니니까. 헌데, 윤이상이 작곡한 <영상>은 분명 서양음악인데, 동양이 느껴진다. 주작이 날아오르고, 청룡의 울부짖음이 느껴진다. 윤이상이 괜히 <강서대묘 사신도>를 보고 온게 아니구나 싶고, 이런 감정이야말로 내가 한국인이기에 느낄 수 있는게 아닐까 싶다.




미술과 음악을 한데 엮어서 본다는 건 단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이 책 『미술관에 간 클래식』 덕분에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박수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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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역사 6 - 흔적 : 보잘것없되 있어야 할 땅의 역사 6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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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 !!!!!!!!!!!!!!!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6권이 나왔다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정말로 얼마나 기다린 『땅의 역사』 시리즈인가?!!! 정말 진짜 이대로 완전 장기연재 가주세요, 기자님...흐어어허엏엏






자타공인 역사더쿠인 내가 다음 권을 기다리는 역사책인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물론 기자님이 매주 올리시는 신문기사를 봐도 되고, 기자이 진행하는 땅의 역사 유튜브를 봐도 되지만... 내 습성과 환경상(?) 그게 잘 안된다. 역시 (회사에서ㅋㅋㅋ)책으로 봐야 제맛인듯!!



흠흠.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오랜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다. 우리는 그 역사를 학교에서 배우고, 매체를 통해서 배운다. 헌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배웠던 역사는 생각보다 단조로웠다. 언제나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라던가, 뭔가 치욕스럽고 오점이 될 역사 같은데 이상하게 정신승리해서 결국 좋은 식으로 이야기한 역사였다. 뚜렷한 ‘공/과’가 있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서는 주로 ‘공’에 대해서만 배웠다. 



아주 유명한 역사적 인물의 뚜렷한 ‘과’를 이야기 하거나, 우리에게 치욕스런 역사에 대해 돌직구로 말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우리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매국노로 취급받는다. 물론 요즘은 과거에 비하면 이런 분위기가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런 분위기가 남아있다. 이처럼 매번 좋은 말만 이야기하는데, 이보다 단조로운 역사교육이 또 있을까 싶다. 이러니 매번 나라가 위기를 맞이해도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그걸 계속 반복하는게 아닌가.



이런식으로 영광스런 역사, 정신승리하는 역사만 배웠을 때 사회적으로 어떤 부작용이 일어났는지는, 우리 역사만 돌아봐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제일 많이 알고, 제일 많이 배우는 6백년의 기간. 그러니까 조선까지의 역사적 사건만 역으로 나열해보자.




▶광복 이후 군부독재 시절 → 일제강점기 → 조선 후기 서구열강의 침입 → 조선 병자호란 → 조선 임진왜란 등등.




위 역사들은 우리 역사에서 꽤나 굵직한 사건들이고, 우리도 학창시절 분명하게 배웠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게 맞을까? 적어도 내가 학교에서 배웠을 땐 저런 치욕스런 사건들이 일어난 대부분의 이유를 ‘외부’에서 찾았다. 이 땅을 침입한 놈들이 나쁜놈이고, 독재를 한 인간들은 시대상황에 따라 어쩔수 없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근데 정말 과연 그럴까? 모든 이유는 외부에만 있었던 걸까?



조선 전기 내 평화에만 찌들어 외세 침입에 대한 대비는 등한시 했던 조선 정부. 일본보다 더 빠른 시점에 조총이 국내에 들어왔음에도, 그걸 개발하기는 커녕 외려 녹여서 사찰의 동종을 제조한 조선 정부. 거기다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무시했던 조선 정부. 일본이 쳐들어오자 누구보다 먼저, 발 빠르게 도망간 조선의 왕!! 그것도 목적지는 조선 땅이 아닌, 조선을 벗어난 명나라. 모르긴 몰라도, 명나라에서 입국거부만 하지 않았어도, 조선은 임진왜란 중에 명나라의 속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뭐 이건 시작일 뿐이고, 임진왜란/정유재란 기간 내내 조선 정부의 문제는 너무 많아서 각설.



그렇게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고 30년도 채 안되서 일어난 정묘호란/병자호란은 또 어떤가. 임진왜란의 문제를 외부에서만 찾는게 아닌, ‘내부’에서 찾은 서애 류성룡이 《징비록》. 하지만 조선의 위정자들은 징비록을 외면했다. 그 결과,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 발발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아주 문제적 상황에 있었고, 결국 정묘/병자호란이 터졌다. 더 슬픈 건 그 이후에도 변하지않았고 계속해서 치욕스런 역사는 반복되었다. 그 어떤 반성 하나 없이, 지금까지 말이다. 



치욕스런 역사에 대한 반성이 없었기에, 우리 근대사를 비롯해 현대사도 문제가 많았고, 지금도 문제가 많다. 말그대로 현재진행형! 이게 얼마나 심각하냐면, 고종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전제하에 수많은 미디어 매체가 나왔고(덕혜옹주도 그렇고), 정부기관에서도 이에 동조했다. 관련 관광산업까지 꾸려가면서 말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뿐.



그나마 다행인건! 그 누군가가 나서서 치욕스런 역사를 아무리 미화하고 정신승리를 한다고 해도, 절대 바꿀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흔적들이 아직 이 땅에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흔적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져가고, 사람들 기억속에서도 잊혀지고 있지만.



새삼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박종인 기자님처럼 역사의 진실이 담겨있는 흔적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았다는게T_T.



조선의 국립대학총장과 서울시장 평균 재임 기간은 3개월?!


오늘 날로 치면 국립대학총장에 준하는 성균관대사성과 서울시장에 준하는 한성판윤. 매우 중요한 직책이자, 권력이 있던 자리이며, 유능한 사람들은 한 번씩 거쳐갔던 직책이다. 헌데 정말 놀랍게도 조선 오백년간 그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고작 3개월이었다. 3개월이면 요즘 말로 수습기간아닌가? 과연 일은 제대로 할 수나 있었을까? 조선 오백년간 성균관은 어떻게 운영되었고, 수도였던 한성(서울)은 어떻게 굴러갔을까?



조선을 함께 설계한 정도전은 그 설계도인 ‘조선경국전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학교는 교화의 근본이다. 여기에서 인륜을 밝히고 여기에서 인재를 양성한다.’

땅의역사 6권 p 076



1) 오늘날의 국립대학총장, 성균관대사성


유학의 나라 조선. 조선이 건국되면서 유학을 가르치는 성균관도 당연히 존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균관은 유학이 들어온 고려말부터 존재했다. 역사가 깊은 교육기관인 것이다. 성균관은 공자를 포함한 역대 중국 성인을 배향한 대성전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명륜당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가르치는 과목은 당연히 유학, 즉 성리학! 지금도 성균관 명륜당 건물이 서울 한복판에 남아있고, 성균관 이름을 딴 대학교가 있을정도로 ‘성균관’ 이라는 이름은 조선을 대표하는 ‘국립교육기관’ 이었다.




대학 운영 전반에 걸친 최고 책임자가 대학총장이듯이,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는 성균관 대사성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탱하는 유학자들을 양성하는 만큼, 조선 정부에서도 성균관을 향한 지원은 대단했다. 성균관 출신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는 것은 기본이기도 하고. 여튼 그렇게 중요한 성균관이고, 그런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가 성균관대사성이니, 그 임무가 얼마나 막중했겠는가.



대사성은 성균관을 책임지는 기관장이요 지금으로 치면 국립대 총장이다. 품계는 정3품으로 여섯 판서보다 낮지만 성리학 교육 수장으로서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래 1910년 이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518년 동안 이 명예와 책임을 입은 대사성은 몇이나 될까. ‘2,101명’이다, 이백 명이 아니다. 이천백한 명이다. 평균 재임기간은 ‘3개월’이다. 3년이 아니라 석 달이다. 세종 때 최고 27.9개월이었던 대사성 재임기간은 갈수록 줄어들어서 ‘학문을 사랑한 군주’ 정조 때는 1.2개월로 급감했다. 고종 때는 1.3개월이었다. p 075



태조부터 연산군까지 1,425개월 동안 모두 96명이 대사성으로 근무했다. 평균 재직 기간은 14.8개월, 즉 1년 3개월이었다. 충분히 명예와 무게를 견디고 책임을 수행할 만한 기간이었다. 그런데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중종 때 대사성 평균 재임기간이 7.5개월로 급감한다. 중종 472개월 동안 대사성이 63명이나 바뀌었다는 뜻이다. 연산군까지 평균 14.8개월이던 대사성 재임 기간은 중종 이후 순종 때까지 2.5개월로 추락했다. 중종~순종 4,987개월 동안 대사성 숫자는 무려 2,005명 이었다. p 078



막중한 임무와 책임을 가진 성균관대사성의 평균 재임기간이 3개월이란다. 3년도 아닌 3개월. 요즘 회사 신입사원도 입사후 3개월? 신입 티도 못 벗고 업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런데 성균관대사성 평균 재임기간이 3개월!!!!!





실록을 비롯한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망나니 연산군때까지만 해도 평균 재임기간이 1년이 넘었었다. 그런데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 때부터 성균관 대사성 평균 재임기간이 폭락한다. 성균관대사성 자리는 아주 수시로 교체되었다. 조금 아이러니하다. 중종반정을 주도한 세력은 다름아닌 성리학을 맹신하는 사림세력이 아닌가. 성리학 교육을 대폭적으로 늘리고 지지해도 이상하지 않을판인데, 대체 왜 대사성 평균 재임기간이 뚝 떨어졌는가.



사림은 연산군 때 ‘도의’를 외치다 각종 사화로 절멸된 뒤 초야에 묻혀 있던 세력이다. 그 사림 눈에 정부가 주도하는 관학인 성균관은 가치가 없었다. 철학과 고담준론과 명분을 가르쳐야 할 성균관이 공무원 입시 학원과 같은 경서 암기 학교로 전락해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종 때는 성균관에 등교하는 학생이 없고 과거시험장에만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기도 했다. 무늬만 학교인 그 성균관이 연산군 때는 기생파티장으로 추락하더니 중종 때는 마침내 텅 빈 교정이 소를 잡아먹는 도살장으로 변해버렸다. 사림은 이를 세력을 확대할 명분으로 삼았다. “성균관이 도살장으로 변했다”는 보고는 국가가 망쳐놓은 성리학 교율을 자기들이 하겠다는 암시였다. p 080



사림이 만들었던 서원은 당쟁소굴이 됐다. 서원 철폐령이 수시로 떨어지더니 흥선대원군은 아예 400개가 넘는 서원을 40여 개로 정리해버렸다. 대사성 권이 또한 자유 낙하했다. 왕권이 강력하던 숙종 때는 567개월 동안 208명이 갈려나갔다. ‘학문을 숭상하고’ 자칭 ‘만천명월주인옹’이었던 정조 때는 최악이었다. 300개월 동안 대사성이 된 사람은 251명으로 평균 임기는 1.2개월에 불과했다. 심지어 정조 때는 하루에 대사성이 세 번 갈리기도 했다. p 081



알고보니 사림세력은 성균관을 버린 것이었다. 교육기관으로서는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 성균관은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림세력이 선택한 것이 바로 ‘서원’.



사림은 지방 곳곳에 서원을 만들고, 일명 ‘사액’을 받아서 그 힘을 키웠다. 그 시작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웠던 백운동 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사액한 것. 그렇게 지방 곳곳의 서원들이 조선의 유학자 양성을 도맡게 되었다. 그럼 성균관은? 이름만 남은 허수아비일뿐. 



자, 그렇다면.. 지방 곳곳에 설립된 사액서원들은 제대로 굴러갔을까? 성리학교육을 제대로 했을까? 일단 그들이 교육한 성리학은, 엄밀히 따지만 ‘주자학’이었다. 주자학의 병폐야 뭐 말해 뭐해. 몸집이 커져버린 서원들은 수많은 폐단을 일으켰다. 그 결과가 훗날 일어나는 서원철폐! 무엇보다 이런 서원에서 교육받은 사림세력들, 조선후기 정권을 잡은 그들은 조선을 갉아먹고 또 갉아먹었다.



고종시대 533개월에는 한 달 아흐레에 한 번씩 자그마치 398명이 대사성 벼슬을 달고 나갔다. 세도정치 주역 가문인 안동 김씨 대사성, 풍양 조씨가 배출한 대사성은 각각 74.1%, 68.3%가 세도정치시대와 고종시대에 몰려 있다. 고총 외척 여흥 민씨는 모두 31명이다. 조선왕조 전체를 통들어 여흥 민씨 대사성 5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고종 때 사람들이었다. 거기에 소년 대사성 민영익 또한 이름을 올린 것이다. p 083



수시로 교체되는 성균관 대사성에는 무려 만 18세 소년도 있었다. 그의 이름은 민영익. 바로 민비의 조카다. 민영익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춘계시험 삼일제를 치루고, 왕과 왕비의 빽으로 중간 시험은 모두 생략(^^)하고, 바로 마지막 시험인 전시를 통과한 인물이다. 그렇게 등과한 만 18세 소년 민영익은 최연소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만 18세가 서울대학교 총장이 되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



“1395년 임명된 초대 서울시장(판한성부사)부터 

1907년 대한제국 마지막 서울시장(경성부윤)까지

512년 동안 서울 시장은 모두 2,012명이었다. 

각 시장 평균 재직 기간은 3개월이었다.” 

땅의 역사 6권 p 085




2) 오늘날의 서울 시장, 한성판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서울시장격인 조선시대 한성판윤은 어땠을까? 정말 놀랍게도 조선의 서울시장 평균 재임기간도 3개월이었다. 짜고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어쩜 이럴수가 있는지! 


‘조선시대 한성부 판윤으로서 유명한 인물은 주로 조선 전기에 많았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학문적 업적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한성부 판윤으로서의 행정 실적은 별로 기록된 내용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박경룡, 『한성부연구』 국학자료원, 2000)’



‘(조선 후기) 한성판윤은 사회가 혼란하고 정치가 안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단적인 예다. (류시원, 『조선시대 서울시장은 어떤 일을 하였을까』 한국문원, 1997)’



한성판윤은 품계가 종2품으로 장관급 고위직이다. 한 나라 수도 행정을 책임지는 최고위 공직자다. 그런데 전기에는 행정실적 기록이 없고 후기에는 불안정한 사회와 정치의 상징이라고 한다. 왜 이런 평가가 나올까. p 085



자타공인 기록의 나라 조선이다. 임금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인물들이 업적이 기록으로 증명된다. 그런데 어찌하여 수도 한성을 책임지는, 한성판윤의 업무 기록은 없는걸까? 놀랍게도 그 이유는 《경국대전》이 규정한 한성판윤의 업무에 있었다.


※『경국대전』이 규정한 한성판윤 업무※

1. 호적, 시장, 가옥, 전답, 임야, 도로, 교량, 하천, 세금 등에 관한 세무

2. 민간 빚 문제(부채), 폭력(투구), 살인사건 검시권을 가짐

3. 어전회의 출석 및 대중국 외교관



1번 항목은 행정가가 당연이 해야할 업무이다. 2번 업무는 지금이야 사법부가 분리되었으나, 조선에선 수령의 업무였다. 문제는 3번!!! 한성판윤은 수시로 개최되는 어전회의 참석자 중 하나였고, 빈번하게 들락날락하는 대중국 외교관이었다. 



막중하고 폭넓은 업무를 역대 한성판균은 제대로 수행했을까? 못했다. 왜? ‘서울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직을 거듭했으니까’. 게다가 한성부 공식 업무는 ‘판윤이 좌기(출근해 업무를 시작함)한 뒤라야’ 하급 관리들이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성판윤은 수시로 어전회의에 출석해 국정을 논하고 중국 사신이 오면 의전을 맡아 자리를 비웠다. 그러니 조선국 한성판윤은 시정 장악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직책이었다. 그나마 석달밖에 근무하지 않고 전근을 가곤 하는 시장. p 087



무엇보다 조선왕국 사대부들은 소위 ‘9경’ 경력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 9경은 정2품 의정부 좌우참찬, 육조판서와 한성판윤이다. 하지만 경력 관리 차원에서 한성판윤을 받아들였을 뿐, 실질적인 서울 행정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명목상 시장이 주는 행정 공백을 막기 위해 조선 정부는 장기 근무를 원칙으로 하는 ‘구임관’을 두었다. 한성판윤 자리가 수시로 바뀐다는 전제를 깔고 마련한 정규직이다. p 088



1864년 고종 등극 이듬해부터 1907년 고종 퇴위 직전까지 한성판윤은 모두 429명이었다. 43년 사이 한 해 열 명이 넘는 시장이 한성 행정을 책임졌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1890년에는 한 해 동안 모두 29명이 한성판윤 사무실에 짐을 풀고 짐을 쌌다. 그해 판윤 평균 재직 날수는 12.3일이었다. p 090



어전회의 참석과 대중국외교관. 이 두 가지만으로도 한성판윤은 본래 자신의 업무인 한성의 행정업무를 할 수가 없었던 거다. 한성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교량은 몇개인지, 인구는 몇이나 되는지 알아볼 시간조차 없었던 거다. 문제는 한성의 최고책임자가 매번 자리를 비우니, 한성의 하급 관리들도 당연히 행정업무를 할 수가 없었다. 한성의 하급 관리들은 ‘판윤이 출근해야’ 업무를 할 수 있었으니까. 



결국 한성판윤도 성균관대사성 처럼 허울뿐인 자리였다. 



헌종 때는 1848년 11월 30일 형조판서 이돈영이 1618대 한성판윤에 임명됐다. 그런데 그날 마침 이돈영이 지방에 출장 중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자 헌종은 즉시 한 해 전 판윤을 지냈던 김영순을 판윤으로 임명했다. 이돈영은 하루살이 판윤이 됐다. 1799년 9월 27일 1293대 판윤에 임명된 서유대는 다음 날 무관직인 금위대장으로 전보되고 판윤은 이의필로 교체됐다. 이유는 불명이다. 이렇게 하루 혹은 하룻밤 만에 시장직에서 내려앉은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다. 역대 판윤 2,012명 가운데 153명이 열흘 만에 자리에서 나갔다. 


세도정치시대엔 헌종과 철종 때 한성판율을 지낸 이가우 별명은 ‘판윤대감’이었다. 이가우는 10년 동안 모두 열 번 판율을 지냈다. 그런데 그가 판윤직을 수행한 기간은 총 1년 3개월에 불과했다. p 088



한성을 제외한 지방관을 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지방관은 『경국대전』과 『대전통편』에 임기가 정해져있다. 관찰사는 360일, 중급 수령은 900일, 하급수령은 1,800일이다. 하지만 이 임기를 제대로 채운 수령은 단 한명도 없었다. 1746년 제정된 『속대전』의 변방 수령은 1년으로 임기가 짧았다. 1506~1894년 부산 동래 각급 수령 인사를 기록한 「동래관안」에 따르면 388년 동안 임기를 만료하고 교체된 수령은 전체 280명 가운데 25명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동래관안」에는 교체 이유도 명백하게 기록돼 있지 않은 인사도 7%나 됐다. p 089



수도 한성이 그러할진데 다른 지방들은 어땠을까? 조선이 망하지 않고 오백년을 굴러간게 놀라울 정도다. 진작에 망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백성들의 힘으로나마 허울뿐인 조선이 유지될 수 있었던거다.



그렇게 허울뿐인 책임자 자리를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다.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니, 그저 자리만 오고갔으면 좋으련만, 때마다 의전행사가 진행되었다. 옛 사람 보내고, 새 사람 반기고. 그때마다 세금이 낭비되고,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위민하는 책임자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이게 조선 5백년의 속살이다.



정체는 숨겼지만, 이건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료다?


우리나라 곳곳을 다니다보면 역사적인 흔적을 알리는 표석이 정말 많이 알려져있다. 근데 그 표석들을 잘 보면, 이상하게 자랑스러운 역사만 새겨져 있거나, 알고보니 만들어진 역사가 새겨져 있는 곳도 많았다. 예컨데 북촌한옥마을. 현재 우리가 아는 북촌 한옥마을은 고관대작이 살기는 개뿔, 조선시대만해도 바위산이었던 곳이다. 구한말기에 독립운동가 정세권님이 일제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조선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그걸 조선의 고관대작이 살았던 곳이라고 서울시는 몇년째 홍보하고 있다.



또 다른 사례22 로는 역시나 서울 인사동에 있는 경인미술관. 지금은 겁나 감성돋는 카페로 유명하지만, 실상은 민씨 척족이자 거부 친일파 민영휘의 저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내가 갔을 때만해도,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도 지금도 없을듯? 참고로 그 자손들은 나미나라공화국(일명 남이섬^^)으로 많은 돈을 쓸어 모으는 중. 



또 다른 사례 333 으로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곳곳에 세워졌던 신사의 흔적들이 있다. 내 특성상(?) 어두운 역사가 남아있는 장소를 자주 찾아다니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일제 신사(사찰) 터다. 대부분 눈에 띄는 흔적은 사라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배의 흔적인 계단이나 석물들이 남아있는 경우가 꽤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언제부터, 왜, 이곳에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 단 한곳, 광주광역시의 광주공원빼고. 광주시는 광주공원은 일제 신사의 흔적에 대해 정확하게 안내하고, 일제의 잔재라는 것 또한 안내하고 있었다. 반대로 포항이나 목포, 경주는 그런 안내는 커녕 오히려 관광지 홍보용으로, 한마디로 치욕적인 역사는 없애고 홍보하고 있었다. 아예 일언반구 없던 지자체도 있었고. 뭐 지금은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여튼 뭐 이런 식이다. 어두운 역사는 뒤로 숨기고, 빛나는 역사만 조명하거나 혹은 빛나는 것처럼 역사를 만들어서 광고하거나. 이 책에서 소개하는 정독도서관 부지 내에 있는 ‘역사적 사료’라고 하는, 커다란 돌덩이도 그렇다.


서울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본관 건물 뒤편, 정독독서실 건물 앞 철책 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있다. 돌에는 한자 24글자가 새겨져 있다. 뜻은 이러하다.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 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매립돼 흔적이 없고 돌만 우뚝하다. 광무4년(1900년) 겨울 평재(平齋)가 적다.’


옆에 안내판이 있는데 이렇게 적혀있다.


‘이 우물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한 결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료라 여겨져 현재와 같이 관리하게 되었다. 2000년 8월 1일 정독도서관장’


앞 글을 적은 사람 ‘평재’는 1905년 대한제국 외부대신 자격으로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었던 평재 박제순이다. 우물돌이 남아 있는 바로 이 자리는 박제순이 살던 집터다. p 181



그렇다. 정독도서관은 부지 내에 있는 커다란 돌덩이가 있는데, 이게 ‘역사적의로 의미있는 사료’라고 판단하여 보존한다는 것이다.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 단 한마디도 없이. 하지만 정독도서관이 말하는 역사적 의미, 한자를 읽고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면 바로 캐치할 수 있다. 왜? 정독도서관이 보존한다는 그 돌덩이에, 대놓고 한자로 쓰여있으니까. 심지어 그 한자를 세긴 이가 누구인지도. 



그는 다름아닌 바로 평재 박제순. 을사오적이다. 아주 대표적인 친일파 거물이다.




 



즉, 아주아주 넓은 정독도서관 부지 중에서 저 돌덩이가 있는 저 곳은 을사오적 박제순이 살던 집 터 였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현재 정독도서관 부지는 친일파 박제순을 포함하여 조선 말 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꽤 많은 역사를 담고 있다.



1884년 양력 12월 4일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만 46신 만에 실패로 끝났다. 주모자들은 망명하고, 망명하지 못한 자들은 거리에서 죽었다. 가족은 연좌해 처형되거나 자살했다. 그리고 재산은 파가저택, 집을 부수고 못을 만들어 흔적을 없애버렸다. 1894년 3월 28일 고종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청나라 상해에서 암살된 김옥균은 4월 14일 한성 양화진에서 ‘조선왕조 최후의’ 사후 능지처참이자 부관참시를 당했다. 5월 31일 고종은 역적 처형을 축하하는 대사면령을 발표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조선에 갑오개혁 정부가 서자 고종은 이듬해 1월 22일 김옥균의 관작 회복 칙령을 내렸다. p 183



1884년 갑신정변 주모자였던 김옥균의 저택도 그 곳에 있었다. 김옥균 옆집에는 갑신정변을 같이 주도했던 서재필도 살고 있었다. 역시나 현재 ‘정독도서관’ 부지에 속해있다. 하지만 갑신정변 실패, 주모자들의 처형 및 망명 등으로 인해 갑신정변 주도자들의 집과 땅은 헐리고 팔리고 그렇게 사라졌다. 갑신정변 주모자들에 대한 고종의 분노는 끈질기고 집요했다는건 안비밀. 뭐, 이에 대해서 할말은 많으나, 생략하고!



1899년 개혁을 원했던 그들이 살던 그 땅에 관립중학교가 개교했다. 그 한 켠에 거부 친일파 평재 박제순의 집이 있었다. 이후 1910년 한일병탄조약으로 나라는 사라졌고, 관립중학교는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다. 박제순이 죽은 뒤, 박제순 저택이 있는 부지까지 ‘경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되었다. 





갑신정변 주모자 김옥균과 서재필. 그리고 을사오적 친일파 박제순. 현재 정독도서관 부지가 담고 있는 역사다. 하지만 정독도서관은 이 모든 내용중에서 일부만 선별하여, 나머지는 숨겼다. 그리하여 친일파 박제순은 사라지고 위에서 언급했던 ‘역사적 사료’라는 우물돌이 남았다. 김옥균의 집터를 알리는 비석이 있지만, 서재필의 집터를 알리는 비석은 없다. 




고종, 나라가 사라졌지만 나는 사랑을 하련다.


조선 역대 왕 중에서 나라와 백성를 버리고 도망간 왕이 셋 있다. 이미 모두에게도 유명한 선조와 인조, 그리고 고종이다. 선조와 인조의 몽진은 정말 유명한데, 고종의 몽진은 생각보다 인식하는 사람이 적다. 참으로 이상하다. 우리는 분명 고종의 ‘아관파천’을 배웠는데 말이다. 분명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갔는데, 그 누구도 이걸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인식하지 않는다. 아마도... 최근 20년간 일어난, 그것도 지자체와 각종 미디어에서 주도한 고종 미화(예컨데 독립운동 지원이라는 개소리)에 대한 부작용이 아닐까 싶다.



제 기득권과 권력,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팔아넘긴, 고작 무당 한 명에게 의지하여 수많은 재산을 갖다받친, 못 살겠다고 들고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개틀링건으로 쏴죽인, 바로 그 사람 고종을 말이다.



‘갑신정변 주역인 김옥균과 박영효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던 고종은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낸 적이 없었다. 을사조약과 합방으로 을사오적이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더 황실은 편안한 일상을 보냈다. 식민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분명하다. 고종이 뛰어난 지략가로 외세를 잘 이용하고 나라의 근대화를 위해 절치부심하고 굶주리는 백성을 위해 눈물로 베갯잇을 적셨다고 해도 그 책임은 면할 수 없다.’



2004년 김윤희, 이욱, 홍준화라는 세 역사학자가 쓴 『조선의 최후』에 나오는 글이다. (…) 일본은 40년 넘도록 그 나라를 이끌었던 이 황제를 죽이거나 신분을 떨어뜨려 모멸감을 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본은 고종과 그 가족을 천황 황명으로 조선왕과 조선공에 책봉해 식민시대 내내 우대했다. p 238



고종은 갑신정변 주모자들을 증오했다. 자객을 보낼정도로. 부관참시를 할 정도로. 왜 그정도로 증오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갑신정변은 근대국가로 가기 위한 개혁이었고, 이는 즉 전제왕권의 몰락이었다. 왕권을 매우 중요시한 고종에게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세계가 공화국으로 가고 있을때도, 이 작은 땅 한반도에서 왕을 하던 고종은 시대에 역행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던 인물이다. 대한제국 헌법만 봐도 전부 ‘대황제께옵서~’로 시작한다. 일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여러 조약을 맺을 때도, 참 이상하리만치 조선 왕족의 처우만은 유지했다. 심지어 일본의 황족에 준하게. 뭐 이정도면 말 다한거 아닌가.





그런 고종이다.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는 사람이니 일제가 우리 백성들을 어떻게 희생시키던, 신경조차 안썼을 위인이다. 그러니 계속 후궁이 늘어났겠지?


1897년 10월 20일 상궁 엄씨가 아들을 낳았다. 제국을 선포하고 일주일이 지난 날이었다. 이 아들이 영친왕 이은이다. 아들이 태어나고 이틀 뒤 고종은 엄 상궁을 후궁인 귀인으로 승격시켰다. 3년 뒤인 1900년 8월 3일 고종은 또 다른 후궁 귀빈 이씨를 정2품 후궁 소의로 봉했다. 소의 이씨 또한 일찍 딸을 낳았는데 요절했다. p 242



‘고종이 전 상궁 엄씨를 불러 계비로 입궁시켰다. 민 왕후가 생존해 있을 때는 고종이 두려워하여 감히 그와 만나지 못하였다. 10년 전 고종은 우연히 엄씨와 정을 맺었는데, 민후가 크게 노하여 죽이려 했지만 고종의 간곡한 만류로 목숨을 부지하여 밖으로 쫓겨났다가 이때 그를 부른 것이다. 시해 사건이 발생한 지 겨우 5일 째 되던 날이었다.’ (황현, 『매천야록』)


넉 달 뒤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달아난 ‘아관파천’도 엄상궁이 주도한 일이었고,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8개월 뒤 영친왕이 태어났으니 이은은 그 러시아공사관에서 잉태된 아들이었다. 을사조약 직전인 1905년 10월 5일 황제 고종은 황귀비 엄씨에게 서봉대수훈장을 수여했다. 서봉장은 1904년 3월 신설한 여자 전용 훈장이며 황귀비는 그 첫 수훈자였다. p 243



조선의 마지막 옹주, 고종의 막내딸이라는 덕혜옹주. 과연 고종의 자식은 덕혜가 끝이었나? 땡. 답은 아니다. 덕혜가 막내딸은 맞으나, 그 뒤로도 고종의 자식이 둘 이나 더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죽었지만.



1911년 7월 20일, 식민화 이후 ‘황귀비’에서 ‘태왕비’로 명칭이 바뀐 엄씨가 죽었다. 장례는 8월 20일 치러졌다. 1912년 고종에게 딸이 태어났다. 이 딸이 고종이 아꼈던 외동딸 덕혜옹주다. 어머니는 궁녀 양춘기였다. 덕혜옹주가 태어난 날은 양력 5월 25일이었다. 열 달 회임 기간을 역산하면, 엄비 장례 기간에 덕혜가 잉태된 것이다. 1852년생인 고종은 그해 환갑을 넘겼고 양씨는 서른 살이었다. 창덕궁에 살던 고종의 맏아들 순종은 38세였다. p 244



덕혜가 고종에게 막내딸은 맞지만 막내 자식은 아니었다. 덕혜가 태어나고 2년이 지난 1914년 7월 3일 밤 고종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을 낳은 여자는 궁녀 이완덕이었다. 나이 열 셋세 세수간 궁녀로 입궐했던 이씨는 스물여덟살에 승은을 입고 이듬애 아들을 낳고 광화당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고종은 예순두 살이었다. (…) 한 해가 지난 1915년 8월 20일 예순셋 먹은 고종에게 또 아들이 태어났다. 친모는 서른세 살 먹은 궁녀 정씨였다. 정씨는 보현당이라는 당호를 받고 후궁이 되었다. (…) 고종은 또 김옥기라는 또 다른 궁녀를 후궁으로 들였는데 자식을 낳지 못해 후궁지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훗날 순종이 그녀에게 삼축당이라는 당호를 내렸다. 이들 후궁은 모두 고종 생전부터 급료를 받았다. p 246 ~ 247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갔던 그 때 엄상궁을 품에 안고, 엄상궁은 영친왕 이은을 임신했다. 엄황귀비가 된 엄상궁. 1911년 엄황귀비가 죽었다. 이때는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진뒤다. 조선은 사라졌지만, 조선왕족은 호의호식하던 그 때다. 뭐 여튼. 고종은 엄황귀비 장례기간에 양씨 궁녀를 품에 안았고, 양씨는 덕혜를 임신했다. 덕혜가 태어나고 2년뒤, 이번에 고종은 이씨 궁녀를 안았고 역시나 아들을 임신했다. 또 2년 뒤 고종은 정씨 궁녀를 안았고, 아들을 임신했다. 그리고 또 김씨 궁녀를 안았다. 



요약하자면 일제의 침략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라졌고, 조선의 백성들은 일제의 수탈로 수십, 수백, 수천이 죽어나갔다. 또 누군가는 독립운동을 하는 힘든 삶을 선택했다. 그런 상황에서 고종을 비롯한 조선왕족은 일본 황족에 준하는 위치를 보장받고, 호의호식하며, 매해 새로운 후궁을 들였다. 이 후궁들은 당연히 급료를 받았다. 조선왕족들에게 지급되는 급료는 당연히 조선 백성들의 고혈로 이루어진 세금이었다.



진짜 제발 고종, 순종, 덕혜옹주 기타 등등 독립운동을 했다더라,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더라, 하는 거짓뉴스좀 그만하자. 뭐, 조선왕족의 피를 이는 누군가는 독립운동 지원을 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저들은 하지않았다. 심지어 망해가는 나라의 마지막 왕족이라고 동정도 필요없다. 뭐 덕혜야 동정을 안할래야 안할수 없긴 한데, 적어도 고종이나 순종은 동정 조차도 필요 없지 않나? 



적어도 고종은 아버지에게 권력을 빼앗은 시점부터, 민비와 그 척족들에게 온갖 뇌물을 받으며, 백성들의 피눈물에는 꿈쩍않던 사람이니.



대구시가 말하는 시대상황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은 대체 무엇인가


이번엔 위에서 말한, 일본 황족에 준하는 위치를 보장받는 조선 왕족 순종의 이야기. 


1907년 7월 20일 헤이그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아무제 고종을 퇴위시킨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바로 그해 12월 고종과 엄귀비 사이 아들 영친왕 이은을 도쿄로 보낸다. 영친왕은 순종에 이어 조선 왕위를 물려받을 왕세자였다. 그리고 히로부미는 갓 황제가 된 순종을 통감 자격으로 배종해 1909년 1월과 2월 두 차례에 걸려 북쪽과 남쪽으로 순행시켰다. 


왕세자 영친왕 유학은 명목상 권력자인 전주 이씨 왕실을 식민체제에 정신세계부터 길들이려는 조치였다. 이왕 순행은 조선왕조 내내 대중이 한 번도 보지못한 군주를 대면시켜 식민 조선인에게 자발적은 복종을 유도하려는 계획이었다. 천황 메이지를 일본 전국에 여행시켜 ‘근대화 방법을 놓고 분열돼있던 여론을 집켤시키고 중앙정부 중심의 정치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던’ 메이지유신 경험을 그대로 써먹은 작업이었다. 


1909년 1월 4일 융희제 순종이 이렇게 선언했다.


“임금 자리에 오른 뒤 도탄에 빠진 백성 생활을 구원할 일념뿐이었다. 하여 직접 지방 형편을 시찰하고 그 고통을 알아보려고 한다. 통감인 공작 이토 히로부미에게 특별히 배종할 것을 명한다.” (『순종실록』) p 251



일본으로서는 대한제국 황실의 위엄을 빌어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통감부는 관보를 통해 구체적인 일정을 공개했다. 사진가 2명을 따로 고용해 전 일정을 모두 사진으로 남겼다. 남순행과 서순행 전 일정에 거쳐 통감부와 일본에 거칠게 저항하는 민심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구시대 권위를 상징하던 황제를 앞세운 선전극은 성공적이었다. p 252



순종이 일제의 허수아비였는 사실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순종이 행한 모든 일은 일제의 계획하에 일어난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일제와 순종의 행보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세금 74억원을 투입한 지자체가 있다. 바로. 대구광역시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7년이 지났다. (…) 5월 15일 열차 편으로 서울로 복귀한 순종은 6월 8일 다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일본 도쿄로 향했다.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죽었을 때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도쿄 참배를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내 그 동상 계획이 구체화된 것이다. 모든 일정은 총독부가 일본 궁내성과 함께 기획했고, 순종은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순종은 일본 육군대장 정장을 입었고, 가는 곳마다 황족에 준하는 예포 21발로 환영받았다. p 253



9일 순종 일행은 부산에서 황족 깃발을 게양한 일본 군함 히젠함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효고현 마이코에서는 방직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조선 여공 120명이 나와 환영했다. 나고야에서는 동생 영친왕을 만났다. 6월 13일 도쿄에 도착한 순종은 다음날 오전 천황 다이쇼를 만났다. 배석했던 곤도 시로스케에 따르면 ‘덕담이 오가고 이왕 전화는 다시 절을 하고 물러났다.’ 옛 황제의 권위와 식민 권력의 권위를 중첩시켜 식민 조선 백성들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려는 거대하고 정교한 이벤트였다. p 254



2017년 4월 대구 중구청은 순종이 걸었던 달성공원 앞 도로를 ‘순종황제 남순행로’로 조성하고 순종 동상을 세웠다. 국비 35억 원 포함해 74억 원이 투입됐다. 동상 앞에는 ‘시대상황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이라고 적혀있다. p 255



A부터 Z까지 일제의 계획 하에 진행된 순종의 남순행. 이토 히로부미와 모든 일정을 같이한 남순행. 거기다 아주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남순행. 



대구광역시는 이런 순종의 남순행을 ‘시대상황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이라고 드높이고, 세금 74억원을 들여 순종의 동상을 조성했다. 대구시가 말하는 ‘민족정신’이 대체 무엇인지, 누가 나한테 좀 알려줬으면 좋겠네? 세금 74억원을 들일만큼 위대한 민족정신이 대체 뭔지 정말 궁금하네. 아 너무 궁금하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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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의 용이 울 때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 2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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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어령 선생의 유작,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 두번째 편이 나왔다. 책 제목은 「땅 속의 용이 울때」 (첫번째 편은 「별의 지도」).




첫번째 편인 「별의 지도」를 읽은 뒤, 진정한 인문학책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두번째 편 「땅 속의 용이 울 때」  역시도 읽기 전부터 기대가 한가득이었다. 보통 기대가 크면 클 수록 실망도 큰 법인데, 역시는 역시일까?! 이 책을 읽고보니, 이어령 선생의 책은 그 어떤 책을 읽어도 절대 실망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되면 베스트셀러인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도 한 번 읽어볼까 싶은? 



아니 뭐, 생각해보면 내가 읽고 있는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야말로, 진정한 이어령선생의 마지막 수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 제목인 「땅 속의 용이 울 때」 를 보면서, 땅 속의 용은 무엇을 빗댄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 시리즈가 ‘한국인’ 이야기이니, 땅 속의 용은 분명 한국인을 비유한 것일텐데... 뭐랄까, 용과 한국인? 딱히 와닿는 게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어릴 적 꼬부랑 할머니를 자처하며, 흙먼지를 풀풀 풍기는 우리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주던 이어령 선생인데, 그런 그의 입에서 ‘용’의 이야기가 나온다는게 좀 의아했다.



그렇지 않나? 흔히들 우리 땅은 오천년의 역사를 담고 있다는데, 실상 그 속의 이야기를 들춰보면 용처럼 불을 내뿜는 강인한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땅에 나는 풀 한포기에도 감사함을 잊지않는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니 말이다. 그런데! 내 이런 의문은 순식간에 풀렸다. 그것도 이 책의 첫 챕터를 읽자마자.



흙 속에 숨은 작은 영웅, 지렁이



우리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라는게 있어요. 그 많은 벌레 중에 왜 하필 지렁이였을까요? 실제로 벌레 중 먹이사슬의 제일 밑바닥이 지렁이예요. 지렁이는 눈도 없어요. 그래도 몸으로, 피부로 빛을 느껴서 그 감각으로 빛을 피해 땅속으로 들어가죠. 지렁이는 암컷 수컷도 없어요. 한 몸에 암수가 다 있어요. 그리고 지렁이는 모든 동물의 밥이에요. 하늘을 나는 새부터 바닷속 물고기까지. 우리가 낚시할 때 낚싯밥으로 지렁이 쓰잖아요. 그러니까 먹이사슬의 제일 하층에 있죠. p 023



참 한국 사람들 대단하지요. 지렁이는 한자어 지룡(地龍)에서 파생된 말이에요. 그 하찮아 보이는 지렁이를, 햇빛 나면 그냥 말라비틀어질 뿐인 그 약한 지룡이를 ‘저것은 지룡(地龍)이다, 땅속의 용(龍)이다’하고 생각했어요. 용이라는게 뭐에요. 중국에서는 황제를 상징할 만큼 신령스러운 동물, 하늘을 날아다니고 자연현상을 관장하는 존재 아닙니까. 자연현상은 인간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요소에요. 그러니까 용은 인간에게 가장 두렵고도 소중한 존재이지요. 그러니까 결국 지렁이를 알아준 사람은 한국인, 그중에서도 지렁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들이에요. 다윈보다도 먼저 말이죠. 땅속의 용인 지렁이가 환상 속의 용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울지 못하는 지렁이의 울음을 들어준 우리 선조들이에요. p 046



옛날 사람들은 깊은 땅속에서 지렁이가 운다고 생각했어요. 지렁이는 울지도 않고, 소리 낼 방법도 없는데 왜 우리 농촌에서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었을까요? 저 알수 없는 지렁이 울음을 듣고 싶은 간절함. 깊은 땅속 흙의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겠어요? 우리 농촌의 저 땅, 혹은 흙 아래에서 울려오는 소리, 숲에서 울려오는 것도,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도 아닌, 땅속에서 울어 나오는 저 소리, 그게 지렁이 울음이에요. p 033



땅 속의 용, 지룡은.....지렁이였다. 가끔 햇볕이 쨍한 날 땅 위에서 말라 비틀어져 있는 그 지렁이. 먹이 사슬 최하층의 지렁이. 모두에게 짓밟히는 지렁이. 처음엔 이름 한자 없었을, 하찮디 하찮은 생명체가 어느 순간에 ‘땅 속의 용’이라는 아주 거창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이름을 붙여준 건 다름아닌 우리 조상들이었고.



우리 조상들은 지렁이의 본질을 알았던 것이다. 지렁이는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존재이지만, 그 존재로 인해 모든 생명들이 이 땅에서 살아 갈 수 있게 해주는, 이 땅에서 제일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 조상들은 지렁이를 ‘땅속의 ‘용’으로 보았다.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였으나, 우리 조상들로 인해 땅 속의 ‘용’이 된 지렁이. 우리 조상들은 땅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땅속에 사는 용이 우는 소리라 칭했다.



그렇게 이름없는 하찮은 존재가, 땅 속에서 울부짖는 위대한 용이 되었다.



지렁이는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 덕(德)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요.


첫째, 지구의 땅은 지렁이 덕분에 유지되고 있습니다. 흙 속의 유기물을 먹고, 배출하는 과정에서 토양을 비옥하게 하며, 질감도 좋게 만들어요.


둘째, 지렁이들은 뭐든 다 먹어 치웁니다. 부식한 것, 짐승이 절대로 먹지 않는 썩은 것도 먹어서 나쁜 균은 전부 자신의 장으로 걸러내고 좋은 미생물만 쏟아내죠. 또 지렁이의 배설은 다른 생물에 유익하고, 미생물이 먹어 치워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지렁이가 오줌을 누면 딱딱하게 변해서 그게 칼슘 같은 것이 되어 흙이 된다고 해요. 지렁이가 죽으면 미생물들이 또 먹습니다. 그래서 퇴비가 되죠. 나서 죽을 때까지 지렁이 신세를 지고 인간은 살아갑니다.


셋째, 먹이사슬의 최하층답게 방어 수단은 일절 없지만, 상위 포식자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어 생태계가 유지되도록 돕습니다. 지렁이의 천적은 두더지, 개구리, 두꺼비 같은 양서류, 새, 설치류, 육식성 거머리, 그리고 딱정벌레, 지네, 여치, 사마귀 같은 육식성 곤충등이 있지요.


넷째, 약재와 식용으로도 쓰입니다. 뉴질랜드나 아프리카 등지에는 아예 식용으로 쓰는 굵고 커다란 녀석이 있다고 해요. 우리나라도 토룡탕이라는 것을 먹는데 그냥 먹는 게 아니라 지렁이를 고아서 만든 국입니다.


다섯째, 지렁이는 강력한 생명력의 소유자입니다. 원폭이 떨어져도 산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리고 자신뿐만이 아니라 지구의 다른 생명의 삶까지 책임지는 존재입니다. p 026~027



생각해보면 그렇다. 현대인들은 지렁이를 그저 지렁이로 대할 뿐, 지렁이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아! 식집사들은 예외일지도. 적어도 식집사들은 지렁이들이 만들어주는 흙, 일명 ‘지렁이 분변토’를 돈주고 사온다. 간혹 화분에서 지렁이가 나온다면? 그 순간 지렁이는 지렁이‘님’이 되어 박멸이 아닌, 귀빈 모시듯 다시 고이 화분 속 흙으로 보내준다. 왜? 지렁이가 내 화분 속의 흙을 더 좋게 만들어주고, 그 좋은 흙 덕분에 식물들이 더 많은 영양을 얻을 테니 말이다. 



일개 화분에서 발견된 지렁이도 이렇듯 귀빈 모시듯 하는데, 과거 농업이 주가 되었던 이 땅의 조상들은 땅 속에서 발견된 지렁이들이 얼마나 이뻤을까? 그러니 지렁이를 땅속의 ‘용’으로 대접하지 않았을까. 



하찮지만 귀한 존재 지렁이. 이어령 선생이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이제서야 깨달았다. 어째서 한국인 이야기에 ‘땅 속의 용’을 빗대었는지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난 늘 이야기를 해요. 한국 사람이 자랑할 것이 별로 없다고요. 세계적으로 지금 우리보다 잘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국민소득으로 따져도 잘 해봐야 우리는 세계 10위에서 13위를 왔다 갔다 하니까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들이 10개 나라도 넘는거에요. 그 나라들보다 우리가 못살고, 노벨평화상 하나를 빼고는 학술 분야에서 노벨상을 탄 사람도 없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남의 민족 눈에서 피눈물나게 하고 그 가슴에 못질한 적도 없어요. 남을 침해하지 않은 민족 가운데 우리만큼 사는 민족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 정말이에요. p 125



우리는 남을 정복하기는커녕, 우리 고향에서도 내쫓기던 민족이었어요. 그래도 남의 눈에 피눈물 안 나게, 남의 가슴에 못 안 박고 올바르게 살았기에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만큼, 아니 우리보다 더 잘사는 다른 사람들, 다른 민족들은 다 전과자에요. 어디 가서 이야기하면 바로 “너희 몇 년에, 몇 세기 때 우리에게 와서 착취했던 나쁜 사람들이야”라고 지탄받지만 우리는 그게 없잖아요. p 126 



지금이야 K문화가 하나의 장르가 되었을 만큼, ‘대한민국’ 전 세계에서 그 위상이 드높다. 하지만, 불과 백년 전...아니 백년도 채 안되는 시간 전까지만해도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쳐들어오는 외세로 인해 이리저리 휘둘려 살았다. 우리 역사에서 굵직한 외세침략을 꼽아보면 일제강점기, 임진왜란, 병자호란, 귀주대첩, 원간섭기, 살수대첩 등. 정말 역사의 매 시간대마다 외세의 침략이 있어왔다. 뭐,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어쩔수 없다면, 어쩔수 없는 것이긴 해도. 이렇듯 언제나 외세에 짓밟히던 한반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바로 여기서 대한민국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지금 세계에 위상을 드높이는 여러 나라들을 보면, 전부 수많은 식민지를 거스렸던 나라들이다. 오로지 한 나라의 식민지였던, 대한민국을 제외하고 말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을 제외한, 잘산다고 하는 10여개의 나라들은 불과 백여년 전 온 나라가 더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기 위해 눈에 불을 켰던 그 시기에, 식민지에서 약탈해온 것들을 토대로 부를 쌓아 올렸다는 이야기다. 



뭐, 조금 더 따지고 들어간다면 우리도 월남전에, 베트남 민간인들 눈에 피눈물 나게 한 역사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돈받고 파병한 것이며, 어디까지나 미국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이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 국군이 베트남 민간인들 학살한 것이나, 베트남에서 버려진 라이따이한 등 안면볼수 한 사건들에는 절대로 면죄부를 주면 안되지만 말이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래?” 라고 묻는다면 “나 지렁이처럼 한 번 살아 볼래”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사실 지렁이처럼 살면 밟힙니다. 하지만 우리 역사는 ‘밝은 자’의 역사가 아니라 ‘밟힌 자’의 역사예요.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밟힌 지렁이’가 없었으면 어떻게 초목이 나오고 어떻게 나뭇잎이 다시 살아나는 봄이 옵니까? 우리의 모든 역사는 ‘밟힌 자들의 역사’이기에 영웅이 생겨나고 지도자가 있어온 것이 아니겠어요? 그게 없었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많은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앞에서 이야기한 암흑의 영웅, 무명의 영웅, 밟히면 꿈틀한다는 먹이사슬 최하위에 있는 지렁이의 울음을 들어야 합니다. 저 땅속에서 울리는, 사실은 울지도 못하는 지렁이의 울음을 들었다고 고집해야 합니다. 실제로는 땅강아지의 울음이라고 해도 그걸 지렁이 울음이라고 합시다. p 228




이어령 선생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가장 하찮은 지렁이가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듯, 외세에 침략을 받던 한반도가 지금은 전 세계에 K문화를 선도시키듯,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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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지기 전에
권용석.노지향 지음 / 파람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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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첫장부터 눈물흘리기가 쉽지 않은데, 이 에세이 『꽃 지기 전에』가 그것을 성공해냈다. 



보통 책을 읽을 땐 서문을 꼭 읽는지라, 이 에세이를 읽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정말 가볍게 책을 열고 읽었는데, 왠걸. 방심했다. 서문에 쓰여있던 글은 이 책의 공동 저자 권용석님이 아내이자 또 다른 저자 노지향님에게 받치는 글이었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 자신의 끝을 함께 해줄 이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 그리움이 담긴 글이었다. 분명 담백하고 짧은 글이었음에도, 순식간에 저자에게 이입이 된건지 눈물이 나와서 조금 당황했다. 하필 책을 읽은 공간이 회사였기에, 더 당황했다면 당황했달까. 하하.


나의 남편 권용석은 1963년 태어났고 1988년에 결혼, 10년은 검사로 그 후 15년은 변호사로 살았다. 2009년 사단법인 행복공장을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지내다가 2022년 5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 책에 실린 글은 그가 가기 4, 5년 전 부터 쓴 것들이다. p 015


담백하면서도 슬픈 서문을 읽고 난 뒤 알게된 사실은, 이 글을 썼으며 이 책을 공동으로 집필한 권용석님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은 권용석 님의 유고집이다. 권용석님이 살아오면서 써온 글과 시를 모아서, 아내인 노지향님이 책으로 엮어서 낸 것이다. 



사실상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끝은 죽음이다. 어찌보면 죽기 위해 살아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한번 뿐인 인생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이 가깝지 않다고,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정작 중요한 일은 뒷전에 둔 채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다 갑자기 죽음을 선고 받고 나서야,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어쩌면 삶이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닌데, 내가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해야 할 것과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해서 해야 할 것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으면 되는데, 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해야 하는데’ 하면서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면서 미루어 왔던 일들이 지금 내가 할 일이고,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면서 계속 했던 일들이 내금 내가 그만두어야 할 일입니다. 남은 삶 동안이라도 쉽게, 단순하게 살겠습니다. p 028


그동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죽음이 구체적인 가능성으로 다가 왔습니다. 왜 그리 걱정하고 안달하며 살았을까? 뭐가 그렇게 못마땅해서 미워했을까? 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습니다. 만일 시간이 좀 더 주어진다면 훨씬 기쁘고 생생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p 037



주 저자인 권용석님은 검사로, 변호사로 치열하게 살았다. 그러다 모든 직을 내려놓고 ‘행복공장’을 설립해 오롯이 자기 자신의 뜻을 펼치려고 해던 찰나에 암 선고를 받았다. 그것도 완치가 어려운 암. 그렇게 젊다면 젊은 나이에 그는 시한부가 되었다. 언젠가 죽는다가 아닌, 곧 죽을 것이다라는 선고를 받게 된 그의 삶과 시간은 기존과는 조금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 역시 죽음을 선고받기 전 자신의 삶을 후회했다. 남은 시간을 어찌 살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저 이 에세이로나마 그의 삶을 잠시 엿본 나로써는, 죽음을 선고 받기 전의 그의 삶은 찬양받아 마땅한 것 같아 보이는데도, 그는 자신의 삶을 후회했다. 이 책에 추천사를 써준 분들의 글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남들은 선뜻 살 수 없는, 타인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온 그였으니까. 착한 사람은 하늘이 빨리 데려간다는 말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그의 삶은 선하고 또 선했다. 이렇게 선한 사람이 검사생활을 어떻게 했으며, 검사생활을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지 눈에 보일정도로.


그렇게 바쁘게 검사, 변호사 생활을 하며 매일을 치이고 치이는 삶을 살았던 그에게는 ‘쉼’이 필요했다.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홀로 성찰 할 수 있는 독방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행복공장’을 설립한 공장장이 되었다. 나만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모두가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다. 선한사람은 죽음을 앞두었다 한들 달라지지 않나보다. 그는 오히려 자기 자신보다 휴식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의 남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한결 같을 수 있는지.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무엇인가? 살인, 강간, 강도보다 더 큰 죄가 있다. 그것은 자신에게 함부로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귀한지를 모르고, 자신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는 사람은 남이 얼마나 귀한지도 모르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함부로 하게 된다. 여러분이 이곳에 온 이유는 여러분 자신이 얼마나 귀한지 알지 못해서 자신에게 함부로 했기 때문이다. 여러분을 가둔 것은 경찰이나 판사, 검사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가장 좋은 것을 나에게 주라. 여러분은 당당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을 것이다. 구속보다는 자유를, 불행보다는 행복을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의 길을, 자유의 길을, 행복의 길을 가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고위 공직자들과 엄청난 돈을 가진 재벌들이 다른 길을 걷다가 수감되거나 불행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신에게 함부로 하면서 남이 나를 존중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지 못하여 자신에게 함부로 하는것으로부터 모든 죄가 시작된다.”

제 말이 학생들의 마음에 닿아서 학생들이 자신을 소중히 생각할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p 072


자기 자신에게 함부로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라. 비행을 저지른 청소년들에게 그가 한 말이다. 대게 자신들을 비난만 하는 어른들을 만나왔을 비행 청소년들은 당황했을 것이다. 그저 입발린 ‘나쁜짓 하지마라, 너네가 그러면 그렇지’ 라는 이야기를 하는 어른들만 보았을테니 말이다. ‘비행’ 청소년이라는 딱지가 붙기 전에, 이런 어른을 먼저 만났더라면 그 아이들의 인생에 ‘비행’이라는 딱지가 붙을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라. 




이 에세이를 읽다보면 유독 자아 성찰에 대한 글들이 많이 보인다. 


뉴스나 댓글을 보면서 ‘나는 천사인가, 악마인가? 선한사람인가, 악한사람인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돌팔매질 당하는 사람에게 내 모습이 보이 기 때문인지 돌팔매집이 가혹하게 느껴지고, 환호받는 사람에게서 내 모습이 보이기 때문인지, 환호가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 ) 사실 내가 살아오면서 했던 수많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모두 드러난다면, 아마도 나는 이 땅에서 고개를 들고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누구에나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데, 우리는 한쪽 면만 보면서 욕하고 박수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빛을 사랑하는 거은 좋지만, 빛 속에 숨어있는 어둠과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도 충분히 경계했으면 좋겠습니다. p 091


돌이켜보면 남을 위한 일이나 남이 시킨 일은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을 위한 일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소홀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은 열심히 들으면서 내 목소리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남들에게는 정성을 다하면서 나 자신에게는 정성스럽지 못했습니다. 남들로부터는 인정받으려 애쓸 뿐, 나 자신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많은 시간을 돈을 벌고, 돈을 쓰는데 허비했습니다. 남들 살아가는 모습 구경하다가 내 삶이 떠내려가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p 103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오점을 떠올리며 반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물론 죽음을 앞두면 삶에 대한 후회가 많아질테지만, 그 후회가 과연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는냐는 다른 이야기니까. 그래서 그럴까.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는 죽음을 선고받게될 날이 올텐데, 그 때가 된다면, 난 내 삶을 어떤식으로 후회를 할게될까? 후회가 반성으로 이어질까, 아니면 무언가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이기적인 욕심으로 이어질까. 부디 전자였으면 좋겠다.


끝으로 그가 남긴 감동적인시 두 편을 소개한다.



행복공장


행복공장을 왜 하냐구요?

제가 행복하지 않아서.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들 수심이 가득해 보여서.

행복하지 않은 내가 너를 물들일 것 같아서.

행복하지 않는 너에게 내가 물들 것 같아서.

행복으로 물들이는 너와 내가 되고 싶어서.

그래서 오늘도 행복공장을 합니다. 



꽃 지기 전에


“곧 보자” 했던 이의

‘부고’ 문자 받아들고

하늘을 본다.


보고 싶으면

정말 보고 싶으면

지금 보자.

꽃 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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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귀신이 되다
전혜진 지음 / 현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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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읽은 「여성, 귀신이 되다」 라는 책, 정말 흥미롭다. 분류를 역사책으로 묶어야 할지, 고전소설로 묶어야할지 약간 애매하긴한데. 일단 성리학적 사상이 바탕이 된 조선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여러 고전이나 설화, 필기, 야담집을 인용하긴 했으나 결국 조선이라는 역사적인 배경 아래서 기록된 이야기들이니. 역사책으로 분류를 해볼까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우리가 으레 알듯 성리학적 사상, 흔히 말하는 유교사상을 토대로 세워진 나라다. 무엇보다 그놈의 유교는 ‘사농공상’을 이야기하며, 학문을 하는 선비를 중요시 했다.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할 부분이있으니, 사농공상의 주체는 바로 남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우리 모두가 알듯,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여성은 남성가 달리 권리가 없으며 가부장제도 안에서 보호되어야 할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보호’다. 생각보다 많은 조선의 여성들이 가부장제도 안에서 ‘보호’받지 못했고, 성리학적 사상에 짓밟혀야만 했다.



조선시대 여성에게 권리는 없었고 의무만 있었다는 사실은 현대를 사는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만 봐도 여성의 존재가 어떤 모습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빗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매체에서 그려진 조선의 여성들은 대부분 가부장적 제도안에서 큰 사고 없이 사는 극히 일부의 조선 여성들의 모습만 그려졌으니까. 물론 그 안에서도 아주 당연하게 남녀차별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이 책은 그런 매체에서는 그리지 않았던, 조선에서 바라는 ‘정상적인’ 여성상을 살지 못하고 죽은 여성들의 삶을 보여준다. 당대 사대부들이 썼던 필기, 야담집의 이야기를 통하여. 여기서 함정은 필기, 야담집을 쓰고 읽었던 사람들은 당연히 성리학을 공부하던 선비들, 즉 사대부 남성들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귀신이야기에서, 죽은 사람이 조상이 되는지 원귀가 되는지는 그 사람이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에 달려 있지 않다. 그 사람이 이승에서 각종 통과의례를 별 탈 없이 거치고 살아왔는지, 얼마나 정상적으로 죽었는지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p 015



성리학적 문화권, 유교 문화권에서는 조상, 성현에게 지내는 제사가 참 중요하다. 어느집이든 4대조 조상까지 제사를 지내고, 조상이 업적을 드높이면 조정에서는 그 조상을 불천지위 대상으로 지정하여, 대대손손 제사를 지내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제사를 받는 대상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사망한 ‘남성’이다. 물론 사망한 여성도 제사를 받기는 한다. 제사를 받는 남성의 배우자이면서, 대를 이을 자손을 낳고, 그 자손이 문제없이 대를 이을경우에 한하여. 즉 조선에서 말하는 각종 정상적인 통과의례를 거친 여성만이 사망후에 제삿밥을 먹을 수 있었단 이야기다.



조선의 여성들에게 필요한 정상적인 통과의례는 한 가정에 태어난 후, 정상적인 집안에 본처로 시집을 간 뒤, 그 집에서 자손을 낳고, 그 자손이 정상적으로 대를 이었을 경우를 말한다. 



※성리학적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귀신들※

어려서 죽은 이들은 부모 가슴에 못 박고 죽은 불효자식이라고, 제사는 고사하고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젊은 사람이 결혼하지 못하고 죽으면 강한 원한을 품어 세상에 해코지를 하는 처녀귀신이나 손각시, 몽달귀신이 된다고 믿었다. 이들 역시 제대로 묘를 쓰지 못했다. 함부로 세상에 나와 돌아다니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뭇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길 한복판에 묻기도 했다. 혼인을 했어도 자식 없이 죽은 사람, 혹은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식 없이 죽은 사람은 누군가의 조상이 될 수 없으니 제사를 받지 못하고, 제사를 받지 못하니 원귀가 된다고 생각했다. 자식이 있다고 해서 모두 조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식은 있으되 아들이 없어도 원귀가 되었고, 집에서 죽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죽은 사람은 객사한 원귀, 소위 객귀가 되어 떠돈다고 믿었다. p 016



※성리학적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귀신들을 위한 의례※

그래서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성리학적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별도의 의례들을 마련했다. 죽은 사람에게 굳이 양자를 들여 제사를 잇게 하고, 결혼하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위해 사후 혼사굿을 했다. 객사한 이들이나 재해로 죽은 이들을 조상으로 안주시키기 위한 굿도 있었다. 그조차도 여의치 않아 결코 조상이 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무속과 불교의 의례를 동원했다. p 016



물론 조선의 남성들도 정상적인 통과의례를 거치지 못하고 죽었다면, 제삿상을 받지 못했다. 예컨데 단명, 비명횡사, 자손없음 등 말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통과의례를 거치지 못했더라도, 사망한 그 남성이 좋은 가문 사람이었다거나 종친이었다면 양자를 들여서 제사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죽은 뒤 제삿상 받기가 이렇게나 힘들다. 



뭐, 여기까지는 대충 기본 배경이고... 이 책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범죄에 희생되고, 성리학에 또 다시 희생된 우리네 조상, 여성들의 이야기다.


사또, 억울하옵니다.


‘처녀귀신’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이야기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아랑설화」와 「장화홍련전」이랄까? 특히 이 두 이야기는 TV드라마나 영화로도 각색될 정도로 유명한 조선시대 처녀귀신 이야기이기도 하다. 요즘은 방영하지 않지만 꽤 오랫동안 여름마다 안방을 찾았던 TV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도 수많은 처녀귀신 이야기가 나왔다. 헌데 그 모든 처녀귀신 이야기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분명 서로 다른 처녀귀신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구조가 비슷하달까? 



비참하게 죽은 여성이, 죽었을 당시의 모습으로 원님 앞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원님이 억울함을 풀여주면, 처녀귀신이 말끔한 모습으로 바뀌면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하직인사를 올리며 사라지는 것. 대부분의 처녀귀신 이야기가 이런 플롯을 가지고 있다. 대체 왜그럴까?


「아랑설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전형적인 처녀 귀신 이야기다. 흰 소복에 머리는 길게 풀어헤친 귀신이 바람과 함께, 때로는 찢어지는 듯한 귀곡성과 함께 원님 앞에 나타난다. (…) 아랑 이야기는 이렇게 원님을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야기의 전형이 되었다. 여성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잘못된 소문으로 고통받는 것은 가해자의 잘못이지, 피해를 입은 여성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의 여성들은 이런 억울한 일을 겪고 어디다 호소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과거에만 그랬을까. 현대에도 여성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면 사람들은 어두운 밤거리를 돌아다녀서, 외진 곳에 혼자 있어서, 옷을 단정하게 입지 않아서 등 범죄의 원인을 손쉽게 여성에게 돌려버린다. p 029



이야기 속에서 여성 원귀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상은 남성 사대부이다. 그 남성 사대부는 대부분 고을의 원님이나 어사나 무변과 같은 사법권을 쥔 관리였다. 피해자는 젊은 여성, 특히 어머니가 없는 젊은 처녀나 기생, 비구니, 여종처럼 약자의 입장에 놓인 이들, 억울함을 직접 말하기 어려운 이들이었다. 특히 아랑처럼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면 피해 사실을 직접 말하지 못하고 단서만을 주기도 한다. 이런 경우 여성의 이야기는 범행 내용 외에는 흐릿해진다. 이야기는 여성의 억울한 죽음이 아닌, 사대부들의 유능함을 과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셈이다. p 032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처녀귀신 이야기들은 정말 놀랍게도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대부 남성들이 기록하고 향유했던 이야깃거리였다. 애초에 처녀귀신 이야기들이 실려있는 조선시대 수많은 기록들인 『ㅇㅇ필기』, 『ㅇㅇ야담』 등은 기록하는 주체가 남성 사대부였고, 읽는 사람 역시도 남성 사대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처녀귀신 이야기 플롯은 언제나 현명한 원님이 나타나고, 현명한 원님이 처녀귀신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우리가 알고 있는 처녀귀신 이야기들을 더듬어 본다. 대부분의 처녀귀신 이야기에는 희생된 여성들의 억울한 사연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거기다 그 여성이 범죄에 희생되는 동안, 여성을 보호했어야 할 가부장제도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예컨에 희생된 여성의 아버지의 보호와 책임등을 말이다. 



적어도 현존하는 필기, 야담집에 수록된 처녀귀신들의 이야기 속의 그녀들은 가부장제도 안에서 정상적으로 보호받지 못했다. 대표적인게 바로 「아랑설화」다. 아랑의 부친은 사대부, 그것도 귄위있는 사대부 밀양부사였다. 하지만 아랑의 부친은 아랑이 사라지자 딸을 잘못 가르쳤다며, 사라진 딸을 찾을 생각도 하지않고, 혹시나 범죄에 희생된 건 아닐까 생각해보지도 않고 무책임하게 밀양을 떠나버렸다. 「장화홍련전」은 또 어떠한가. 장화, 홍련의 부친인 배 좌수는 계모의 부추김에 손쉽게 넘어가서 자신의 딸들을 의심하고 죽음에 이르게 방조했다. 처녀귀신 이야기는 아니지만, 「콩쥐팥쥐전」의 콩쥐 부친은 아예 언급도 없다(원전에서는 콩쥐가 일단 자신의 몸을 잃기도 했으니). 어머니를 여읜 여성들에게 유일한 보호막은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이 아버지들은 딸을 보호하지 않았다. 



처녀귀신 이야기를 향유하는 사대부 입장에서 이러한 가부장제도의 허점은, 가부장제도를 뒤흔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희생된 여성들을 보호하지 못한 아버지에 대해서는 침묵을 택한 것이다. 대신 처녀귀신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현명한 원님에 초점을 맞추어, 사대부라는 존재가 얼마나 학식이 높고, 약자를 못 본체 하지 않으며, 용기가 있고, 완벽하고 유능한 존재라는 사실에 만족한다.



그러니 사실 여성 원귀들의 이야기는, 귀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원님의 이야기다. 원님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귀신들을 정상성 안에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그들을 평화롭게 내쫓은 뒤 현실을 복원하고 가부장적 세계의 평화를 되찾는다.  현실에서 약자들이 받는 억압은 바뀐게 없고, 아버지는 처벌받지 않으며, 권력자인 원님은 명관이 된다. 이 얼마나 체제 수호적이면서도 당대의 사대부들에게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을까. p 045



어쩌면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왜 희생된 여성들은 귀신의 모습으로 가해자가 아닌 원님을 찾아간걸까? 


놀랍게도 이 역시 이런 기록을 남긴게 남성 사대부이기 때문이다. 희생된 여성들 입장에서 가해자는 1차 피해를 입힌 남성 가해자와 자신의 피해를 방관한 남성인 아버지다. 만약 처녀귀신이 가해자들을 찾아간다면, 남성이 우월하고 가부장제도가 당연시되었던 조선의 근간을 뿌리채 흔들 수 있으며, 동시에 사대부를 드높이는 기록이 남겨질 수 없으므로 당연히 처녀귀신은 원님을 찾아갈 수 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이런 처녀귀신들은 이미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존재다. 따라서 성리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그녀들은 당연히 아버지 보다 더 위에 있는 아버지. 조선의 만 백성이 섬기는 ‘큰’ 아버지를 찾아갈 수 밖에 없다. 조선의 만 백성이 섬겨야 할 아버지는 당연히 임금이다. 하지만 한낱 여성이, 그것도 원귀가 된 여성이 지엄한 임금을 찾아갈 순 없으니 임금 대신 마을에 파견된 행정관인 원님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해야만 성리학적 사상과 사대부를 드높일 수 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말이다.


원귀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해준 사대부에게 반하지 않는다. 억울함을 밝히고 깨끗하게 다시 매장되고 나면 대부분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들은 간혹 원님이 위급한 일을 당했을 때 「원님의 목숨을 구해준 처녀」처럼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고, 「이원지와 재상의 딸」처럼 자신의 가족들을 찾아가 현실적인 보답을 받게 하기도 한다. 감사를 표한 뒤에는 더는 미련도 원한도 없다는 듯이 정말로 사라진다. 영명함은 과시하고 싶지만 귀신과 오래 얽히고 싶지는 않았을 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편리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p 034



사대부들은 기본적으로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는다. (…) 하지만 공자가 괴력난신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살아 있는 다른 사람들은 죽음과 영혼의 문제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성리학자들은 삶과 죽음, 그리고 영혼의 문제를 이기론을 이용해 해명하려 했다. 이들은 필기, 야담과 같은 문집에서 자신들의 흥미와 관심 분야를 드러내며 귀신 이야기를 다루었다. 자신들의 흥미를 느끼는 대목들만을 골라서. 필기, 야담의 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대부들은 이상정인 모습에 가깝다. p037



그래서 처녀귀신 이야기의 결말은 언제나 깔끔하다. 가해자들의 처벌에 대한 내용도 없고, 이런 범죄 피해에 대한 재발방지에 대한 내용도 없다. 그저 처녀귀신의 시신을 찾아 곱게 묻어주고, 처녀귀신은 원님께 감사인사를 하고 떠난다.



우리는 이런 처녀귀신 이야기를 단지 조선시대 억압받던 여성들의 이야기로 한정 지을 수 있을까?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는 하나 21세기인 지금도, 자신의 범죄 피해와 억울함을 밝히지 못한 피해자들이 많다. 어떤 이들은 하늘의 별이 되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피해를 꼭꼭 숨긴채 오래도록 마음의 병을 키우기도 한다. 그들에게 범죄피해를 밝히는건 예나 지금이나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왜? 범죄피해를 밝히고 가해자들을 신고한다 한들, 가해자들이 받는 처벌은 미미하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현대판 나랏님들은 재발방지를 위한 법안을 만든다고는 하지만 유명무실하기 그지없다.



처녀귀신 이야기는 아니지만, 조선 성종 대 어우동과 그녀와 만났던 수 많은 남자들의 처벌을 돌이켜보자. 어우동이 우리가 아는 어우동이 되기 이전에, 그녀는 남편이 있는 부인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다른 여자가 좋다며 어우동을 버렸다. 조선 초기까지는 고려의 영향으로 여성의 자율성이 어느정도 있었기에, 어우동은 이혼을 원하였지만, 당시 왕이었던 성종은 그녀의 이혼을 금지시켰다. 왜? 성종은 그의 모친 인수대비와 함께 조선에 남녀가 유별하다는 성리학을 완벽하게 뿌리내리고자 했던 임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가 아는 어우동이 탄생했다. 그렇다면 어우동, 어우동과 간통한 남자들의 처벌수위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우동은 사형된 반면, 그녀와 간통한 수 많은 남자들은 한마디로 무죄였다. 



21세기 대한민국, 성범죄 피해자와 가해자들. 피해자들 보호는 여전히 잘 되지 않고, 가해자들의 처벌 수위는 여전히 낮다.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우리는 정말 처녀귀신 이야기를 조선시대 이야기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안채도, 규방도 안식처는 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조선의 일처다부제 속에서 희생된 여성들의 이야기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한 명의 부인을 맞았다. 납채, 문명, 납길, 납폐, 청기, 친영의 여섯 절차인 육례를 치르고 어엿하게 맞이한 부인의 소생의 가무의 대를 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첩을 들였다. 부인은 맞는다면, 첩은 들이는 것이었다. 예물 대신 예전 명목으로 첩의 친정에 돈을 보내기는 했으나, 부인을 맞을 때처럼 정성스레 육례를 갖추지는 않았다. 자신이 정실이고, 자신의 자식이 가문의 대를 이을 것이라 하나, 남편의 사랑을 다른 여성에게 빼앗긴 부인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첩 역시 마찬가지다. 자식을 낳아봤자 서자에 불과하고, 평생 부인의 위세에 눌려 있어야 하는데다, 대게는 친정도 부인의 친정보다 신분이 낮거나 가난하니 난편 밖에는 기댈 곳이 없다. 이런 그들이 서로 갈등하고 때로는 미워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사대부는 제 정욕 때문에, 혹은 본가를 떠나 한성에서 지낼 때 제 수발을 들 사람이 필요해서 첩을 들이지만, 그 뒤에 벌어지는 가정에서의 갈등은 책임지지 않았다. 고통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p 150



조선의 사대부는 공식적으로 1명의 부인과 여러 명의 첩을 둘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 말이다. 사대부들이 여러 여자를 취하는 건 정말 당연한 일이었다. 사대부들은 자기들의 욕정, 또는 필요로 인해 첩을 두었으나 그로 인해 일어난 수많은 문제들에는 눈을 돌렸다. 대신 그 문제들을 일명 ‘처첩갈등’, 그저 ‘여자’들의 문제라 타자화하며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득옥 이야기는 『성호사설』을 비롯해, 『해동기화』, 『이순록』, 『국당배어』, 『기문총화』, 『풍암집화』 등 여러 필기, 야담집에 실려있다. 경신환국이라는 사건과 대군 가문의 몰락을 배경으로, 사대부 가문에서 벌어지는 축첩 문제와 처첩간의 갈등, 여성들의 질투와 증오라는 문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의 기본적인 틀은 간단하다. 인평대군이 득옥이라는 기녀 출신의 첩을 들였고, 인평대군 부인이 투기해 득옥을 죽였는데, 득옥의 원귀가 집안을 망하게 했다는 것이다. p 153



사대부들은 외려 이런 이야기를 기록하고 향유하면서, ‘여성’ 이라는 존재에 대해 더욱 왜곡된 시선을 가졌을 것이다. 그렇게 뿌리깊게 조선 오백년간 뿌리깊게 내려진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은, 기백년이 흐른 지금까지 일부 사람들에게 여전히 남아있다(예컨데 성범죄범이나, 가정폭력범이라던가?).



「강생의 전처와 후처」 이야기를 읽으면 필기, 야담이 어디까지나 남성 사대부가 기록한 글이라는 한계가 뼈저리게 느껴진다. 젊고 건강한 후처의 몸에 성품이 어질고 부지런한 전처의 영혼을 집어넣는다는 발상부터가 지독하게 남성 중심적이다. 그런데다 후처가 왜 사나울 수 밖에 없었는지, 왜 살림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비겁할 정도로 입을 다물고 있다. 후처는 첩이 아니다. 전처가 죽은 다음 다시 정식으로 혼인한 부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후처를 전처보다 낮잡아 보았고, 첩으로 오해하는 일도 잦았다. p 159



「귀신이 지은 시를 알아본 김정국」 이야기는 첩이 시가 사람들의 변덕에 따라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불안정한 신분이었음을 보여준다. 글공부가 부족하고 풍류를 좇던 송생이 재주 많은 여성을 만나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들, 그 공은 송생의 공일 뿐이다. 여성은 함부로 재주를 내비치니 겸손하지 못하고 요망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현실이었다. 송생의 첩은 귀신이었던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재주 많은 여성을 핍박해 끝내 죽음으로 몰아 낙수의 물귀신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p 165



「일월당 황씨부인 유래」에서는 가난한 집안에 시집 와 아홉 번이나 출산을 한 며느리를, 시어머니는 모질게 시집살이를 시키고 괴롭힌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 특히 젖먹이 어린 딸을 두고 세상을 떠날 만큼 심한 학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황씨 부인의 서글픈 인생은 시집살이로 고통받던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황씨부인당에는 따로 제사를 지내는 날이 없다. 대신 여성들이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 재수가 없을 때 찾아와 촛불을 켜고 쌀과 과일을 두고 치성을 드리곤 한다. 구박받던 황씨 부인은 그렇게 이 지역 여성들의 수호신이요, 토지신으로 좌정했다. 그 모든 서러움과 슬픔을 담은채로. p 171



시집을 간 여성들에게 처첩갈등만 있을까? 본처와 후처에 대한 이야기, 시집살이 문제도 고스란히 그녀들의 몫이었다. 후처 자리에 들어간 여성은 이미 죽은 본처와 비교를 당하며 살아야 한다. 만약 본처의 자식들이 대를 잇는다면, 후처의 입지는 더더욱 작아질 수 밖에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조선의 악명높은 시집살이도 문제였다. 조선 초기까지만해도 고려의 영향을 받아 남자가 여자집으로 장가를 가는 경우가 많았으나, 성종대 이후부터 강력한 ‘유교사상’ 확산으로 여자가 남자집으로 시집을 가는 것이 당연해졌다. 그렇게 여성들의 고된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시집간 여성들이 이 모든 일을 겪는동안 많은 사대부 남성들은 무엇을 했을까? 자신의 배우자가 겪는 어려움을 그저 강 건너 물 보듯 했다.



위의 「귀신이 지은 시를 알아본 김정국」의 일화는 그저 첩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있으니, 바로 초당 허엽의 딸이자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이다. 초당 허엽만 봐도 알 수 있듯 허난설헌은 유력 명문가의 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다른 형제들처럼 시/서화에 재능이 있었다. 심지어 부친인 허엽도 그녀의 재능을 아꼈다. 하지만 그녀가 시집을 간 뒤, 그 재능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독이 되고 말았다. 허난설헌의 남편은 그녀의 재능을 시기했으며, 같은 이유로 시댁 어른들 역시 그녀를 어여삐 보지 않았다. 거기다 자녀들도 일찍 죽어버리자, 의지할 곳 하나 없는 허난설헌은 결국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만다. 당시 유력한 명문가의 딸이었던 허난설헌의 일생도 이러했는데, 한미한 집안의 재능있는 여성들은 삶은 어땠을까? 신사임당의 가족같은, 유니콘 같은 친정/시댁을 만나지 않고서야, 재능있는 여성이 조선에서 행복하게 살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처/첩 이를 것 없이 재능있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족들의 핍박을 받는게 바로 조선의 여성들이었다. 위에서도 말했듯 신사임당은 친정/시댁이 모두 유니콘(?) 같았기에 그녀의 재능이 꽃피웠고, 지금도 신사임당의 그림들이 널리 알려져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명한 아들(율곡 이이)을 둔 덕이 크다. 한마디로 신사임당은 재능있는 여성으로써 이름이 알려진게 아니라, 천재적인 아들 율곡 이이을 키워낸 현모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결국 재능있는 여성이 좋은 가족을 만나서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해도, 자식을 잘 둬야 그나마 후세에 작품 및 당호라도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비극적이게 삶을 마감한 허난설헌의 경우, 동생인 허균 덕택에 작품과 당호 및 이름 ‘허초희’가 알려질 수 있었던것이고.



왜 조선은 이토록 여성을 억압할 수 밖에 없었을까? 유교/성리학을 창조한 공자, 맹자는 진실로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을까? 현자로 일컬어지는 공자, 맹자가 여성을 억압하라고 말하진 않았을텐데.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의 여성을 옭아매던 ‘칠거지악’은 공자의 제자들이 집필한 『공자가어』에 실려있다. 물론 당시 칠거지악이란, 적어도 공맹과 그들의 제자들은 정상적인 며느리와 정상적인 시댁을 떠올리며 남긴 공맹의 자산이었을 것이다. 후대 사람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그 성질이 비틀어지고, 조선의 여성들을 그토록 옭아메는 악법이 되었을뿐.




칠거지악 그리고 삼불거, 내훈


그렇게 조선에서는 ‘칠거지악’과 더불어, 인수대비가 집필한 ‘내훈’을 들이밀며 조선의 여성들을 옭아메기 시작했다. 물론 여성들에게 방패가 되는 ‘삼불거’라는 규범이 있긴 했다. 하지만 남성 사대부들은 이 삼불거조차도 교묘하게 비틀어버렸기에, 실제로 삼불거가 여성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조선의 보조 법전인 『대명률』에 기록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권리, ‘칠거지악’.

시부모를 잘 모시지 못하거나

아들을 낳지 못하고

음행을 저지르거나

남편이 사랑하는 다른 여자를 질투하고

치료가 되지 않거나 자손에 유전되는 병이 있거나

말이 많거나

도둑질을 할 경우 


여기서 (7)도둑질은 범죄이고 지금도 이혼 사유가 되기에 이해가 되는 사유이다. 하지만 그 외의 사유들은 여성들에겐 너무나 불공평한 사유가 된다. 특히나 (5) 음행의 경우 역시나 지금도 이혼 사유이나, 당대 조선에서는 남성은 첩을 두고 기생방을 가기도 했다. 즉 남성은 합법이나, 여성은 불법이라는 이중잣대란 이야기. (4)투기도 (5)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남성의 일처다부제를 옹호하는 내용이다. (1)과 (6)의 정상적인 해석은 시부모에게 잘하라는 이야기인데,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 시부모가 시집살이를 시켜도 복종하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시집살이를 할 때는 눈 감고 삼 년, 귀 막고 삼 년, 입을 막고 삼 년 지내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볼 수 있다. (2) 아들을 낳지 못하고는 요즘 시대에서는 당연히 씨를 잘못 준 남성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여자탓을 하는 시부모가 있으니 뭐. (5)도 (2)의 아들을 낳는 것에 대한 연장선이다. 건강한 아들을 낳기 위하여 있는 조항이다. 남성에게 유전병이 있는건 침묵하되, 여성에게 유전병이 있는건 있을 수 없는 조선이었다.



한마디로 조선 사대부들이 생각한 칠거지악은 조악한(!) 시부모를 만나더라도 침묵하고 효성을 다해야하며, 남편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침묵하고 남편을 사랑해야하며, 남편에게 유전병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건강한 아들을 낳아서 대를 잇게 해야한다는, 시가의 화목과 안정/평화를 위해야한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으면 이 칠거지악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조선의 여성들은 이혼을 당했다.



물론 여성에게도 원치않는 이혼을 막을 수 있는 방패, ‘삼불거’ 라는 규범이 있었다. 


아내가 의지할 곳이 없거나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뤘거나

혼인할 때는 가난했다가 나중에 부자가 된 경우


언뜻 보기에는 불합리하게 규정된 칠거지악에 대항하는 규범이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삼불거 조차도 혼인한 여성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사대부들은 ‘불량한’ 부인까지 삼불거 규범을 허용하면, 사회적으로 불미한 결과를 남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인이 아무리 삼불거를 들이밀어도, 사대부가 부인을 ‘불량한 처’라고 매도하면 여성은 이혼을 막을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 조선 왕실에서더 ‘내훈’이라는 규범을 집필하여, 조선의 여성들을 옭아매는 데 박차를 가했다.



<내훈>


-제1장 언행에서는 부녀자가 말과 행실에서 주의할 점 및 준수사항을 서술하였다.  현모양처의 교육적 인간상을 그리면서 부덕(婦德)·부언(婦言)·부용(婦容)·부공(婦功)의 여유사행(女有四行)이 있음을 밝혔다. 


-제2장 효친은 어버이에 대한 올바른 효도방법이 무엇인가를 밝혔다. 친가의 부모뿐 아니라 시가 부모를 모시는 법, 부모가 살아 있을 때와 죽은 뒤의 효도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제3장 혼례는 혼인의 예절을 밝힌 부분으로, 혼례의 뜻과 혼수감에 대한 기본자세, 혼인 뒤의 마음가짐 등을 설명하였다. 


-제4장 부부는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힌 부분으로, 부부의 도를 음양의 이치로써 설명하고, 남편에 대한 예의와 마음가짐 등을 정의한 뒤 역사적인 사실을 특별히 많이 인용하여 아내의 도리를 강조하고 있다. 


-제5장 모의는 어머니로서의 예의범절을 밝힌 부분이다. 유모의 선택에서부터 자식의 연령에 따른 교육방법, 시어머니로서의 마음가짐과 며느리에 대한 교육 등을 설명하였다. 


-제6장 돈목은 정애(情愛)와 화목에 대한 것으로서 동서 또는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방법을 밝혔다. 


-제7장 염검은 청렴과 검소의 정신으로 어떻게 생활하고 손님을 대접하며, 관직에 있는 남편을 어떻게 보필할 것인가 등을 밝히고 있다. 



옛날엔 남존여비가 당연했어, 그 시절엔 어쩔 수 없었어. 현재의 가치관으로 파악하지 마.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 이전, 고려는 달랐다. 물론 고려에서도 남성이 여성에 비해 그 위치가 높기는 했으나, 적어도 고려의 여성들은 조선의 여성에 비하면 더욱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그 이전 시대로 올라가면 더 자유로웠고. 그래도 남존여비가 당연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점은 지금이 21세기라는 점이다. 아주 뚜렷하게 남녀차별이 사라지고 있다. 완벽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상생활에서 ‘큰’ 불편함은 없을 정도로 사라졌다. 부디 내 딸이 장성해서, 스스로 삶을 영유하는 시대에는 작은 불편함 조차도 사라진 세상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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