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 서울대학교 최고의 ‘죽음’ 강의 서가명강 시리즈 1
유성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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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TV를 못본지가 1년이 넘었지만,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만해도 나는 TV를 자주 봤다. 주로 시사, 교양, 다큐를 시청했다. 그러다보니 스브스에서 방영하는 《그것이 알고싶다(속칭 그알)》 라는 프로그램도 매주 본방사수했다. 그알에는 법의학자들이 자문을 위해 자주 출연한다. 자주 출연하는 법의학자 중 한 명인 유성호 교수님은 서울대에서 ‘죽음’과 과련된 교양과목을 강의하시는데, 이 과목이 워낙 인기가 많아서 수강 신청이 어렵다고 한다. 어떤 강의인지 정말 궁금했었는데, 한 예능에 출연한 유성호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야. 인기가 많을 수 밖에 없겠더라.




하지만 일개 직장인이자, 심지어 지금은 몸이 열개라도 부족한 워킹맘은 그런 강의를 들을 방법도 없을 뿐더러 애초에 시간도 없다. 그나마 유성호 교수님의 강의를 살짝 엿볼 수 있는 방법이라곤, 시간이 날 때마다 교수님이 쓰신 책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간다』를 읽는 정도다. 생각해보면 이 책을 산 지는 꽤 오래되었다. 신간 발매 당시 샀으니 어휴. 몇 년을 책장에 묵혀둔건지! TV를 못보고, 1분 1초라는 찰나의 시간마저 아쉬워하는 지금에서야 읽게되었다.



책을 읽고나니 알겠다. 왜 20대 대학생들이 유성호 교수님 강의를 듣고자 하는지!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싶지만, 여의치 않은 20대들이여!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간다』 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그알에서 얼핏 보았던 법의학자들. 그들이 하는 일은 정확히 무엇일까? 죽음을 맞이한 시신을 검시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과 사망 종류등을 정의한다. 무엇보다도 법의학자들이 시신 검시를 함에 있어서, 대다수는 검찰청, 경찰, 보험회사 등 여러 기관의 의뢰에 기인한 경우가 많다. 이들 기관이 의뢰하는 시신들은 대체로 사건, 사고에 휘말려있는 시신들이고, 그 시신들의 신원 확인이 필요하다거나 혹은 어떻게 죽었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해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법의학자로서 월요일마다 검시를 한다. (…) 검시란 시체에 대한 조사 행위를 총괄해서 이르는 말인데, 검시는 다시 검안과 부검으로 나뉜다. 검안은 그야말로 시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눈으로 확인해서는 사망 원인이나 사망 종류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부검이 필요한데, 부검은 해부를 통해 종합적으로 사인을 규명하는 작업을 말한다. 이러한 검시에서 가장 우선적인 일은 시신의 신원 확인이다. p 024



신원을 확인한 뒤 검시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사항은 ‘왜 죽었는가?’다. 즉 의학적인 사망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다. 의과대학에서 배운 수많은 질병명이 사망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다음으로는 ‘어떻게 죽었는가?’하는 죽움의 방식, 즉 사망 종류를 가려낸다.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던 ‘백남기 농민사건’에서 의학적인 사망 원인은 아마도 고칼륨혈증, 신장부전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전에 그러한 질환을 유발한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 어떻게 죽었는지를 살폈을 때 머리의 경막하출혈이 원사인으로 기재되었다면 외인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말이다. p 026



법적 및 의학적인 의미의 죽음은 사망 원인과 사망 종류를 통해 정의된다. 이 두가지는 분명 다른 것인데 일반인들은 이를 헷갈리기 쉽다. 우선 사망 원인은 의사의 진단명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암이다, 간암이다 하는 것은 사망 원인이다. 추락사로 사망했으면 그것이 사망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사망 종류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자연사, 즉 병사다. 두 번째는 외인사, 즉 외적 원인에 의한 사망이고, 여기에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한 불상이 포함된다. (…) 외인사는 크게 자살과 타살, 사고사로 구분하는데 한 사람의 죽음이 이 중 어디에 속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된다. p 028




생명의 시작, 인간의 시작 그리고 죽음



인간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자궁에서 정자와 난자가 만났을 때? 아니면 태아의 형태가 만들어졌을 때? 그도 아니면 온전한 팔, 다리등이 생성된 태아일때? 그도 아니면 엄마 뱃속에서 나왔을 때? 놀랍게도 인간의 시작에 대한 정의는 개인(또는 집단)의 가치관에 따라, 보는 시각에 따라 달랐다. 심지어 대한민국인이라면 지키고 따라야할 ‘법’에서 조차도, 어떤 법이냐에 따라 인간의 기준이 달랐다.



가톨릭교회 등에서는 사람의 시기를 수태된 때부터라고 보지만, 법적으로는 이와 다르다. 법적으로는 크게 민법과 형법이 있는데 형법에서 적용하는 대표적인 학설은 진통설이다. 형법은 어떠한 행위의 범죄 처벌 여부와 그 처분의 정도나 종류를 규정한 법으로, 진통이 있다면 그때부터 사람으로 보아 법을 정용할 수 있다. 만약 진통 전의 태아를 사망하게 하면 살인죄가 아닌 낙태죄를 적용하게 된다. 그러나 진통이란 여성의 자궁 경부가 열리면서 아기가 머리를 내밀기 전에 이미 시작된다. 따라서 만일 그 때 누군가가 아기를 살해했다면 살인죄가 되는 것이다. p 107



민법에서는 또 다르다. 민법은 사람의 권리와 의무를 지우는 법이다. 예를 들어 언제부터 내가 내 손자나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줄 수 있는지는 민법에 따라 결정한다. 민법에서는 아기가 자궁 경부를 통해 완전하게 신체를 노출했을 때부터를 사람으로 본다. 이처럼 민법과 형법에서 적용하는 학설은 약간 다르며 관련 학설 또한 진통설, 일부노출설, 전부노출설, 독립호흡설 등 여러가지다. p 108



수정된 정자와 난자의 움직임은 유튜브 영상으로도 확인해볼 수 있는데 일주일을 두고 자궁으로 천천히 움직이면서 2개, 4개, 8개, 이렇게 반반씩 쪼개지면서 수정란이 되고 그다음에 자궁에 딱 붙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자궁벽에 잘 붙지 못하고 그냥 쓰러지는 수정란이 절반이 넘는다. 이렇듯 임신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수정이 되어 자궁에 붙은 후에도 임신 초기에 자궁벽에서 떨어져 그냥 쓸려나가는 경우가 더 많다. 결국 임신 8주정도 까지는 유산 가능성이 높아서 여성 스스로도 임신한 줄 모르고 있다가 유산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생명은 사실상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난 것 자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p 109



인간을 시작을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를 떠나서, 일단 엄마 배속에서 무사히 자리를 잡고 열달 내 건강하게 있다가, 무사하게 세상 밖으로 태어나는 것 그 자체는 그야말로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나 임신 과정 내 어떠한 이벤트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고, 그로 인해 유산이 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한 번의 유산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 그럴까. 뿡뿡이가 내 뱃속에서 무사히 있다가, 건강하게 세상 밖으로 나와준 일이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지를 몸소 깨달았다.



TMI이긴 하지만, 이렇게 기적같이 태어난 아이들을 학대하는 인간들은 정말 쓰레기만도 못하다. 이 책에는 저자가 검시한 시신들의 여러 사례가 있었는데, 그 중에 유독 유아 살해 사건은 정말. 말 못하는 짐승들도 제새끼는 보호하는 세상인데, 어찌 그럴 수 있는지!



다들 알았으면 좋겠다. 무사히 태어나서, 지금까지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마저도 기적이라는 사실을.



배아상태는 분명 생명이기는 하지만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인 것과 같은 죄를 묻는다는 것이다. 황우석 박사 사태 당시에도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배아의 생명성이었다. 당시 연구팀은 건강한 여성의 난자와 정자를 합친 수정란을 만들어 스템셀이라고 부르는 줄기세포를 얻어냈다. 그들은 이를 어디에 쓰려고 했을까? (…) 만약 줄기세포로 장기를 키울 수 있다면, 그 장기를 이식할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것 아닌가. 내 몸에 맞춤한 장기를 쉽게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은 거의 기적의 의술이 되는 것이다. 만약 허리를 다쳐서 겆디 못하는 상태인 사람에게 줄기세포 이식을 하면 줄기세포는 엄마 배 속의 수정란처럼 무엇으로도 다 문화가 되므로 척추가 새로 자라나게 되며, 이로써 일어나서 걸을 수 있는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줄기세포 연구는 그러한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p 111



종교에서, 법에서 인간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인지 기준을 정했다. 그렇다면 인간과 생명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을까? 임신 8주 이전의 상태인 배아는 생명체이며, 인간이라 볼 수 있을까? 초음파 사진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임신 8주 이전은 아기집만 겨우 보일 뿐이다. 최소 2주 이후가 되야, 기껏해야 몇 mm 정도의 쥐콩만한 태아가 보인다. 배아, 임신 초기 태아, 중 후기 사람의 모습을 갖춘 태아. 어디서부터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반대로 이를 인간이 아니라고는 할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다.



무엇보다 지금은 의료기술 발달로 과거라면 죽었을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 밑바탕에는 수많은 연구가 있었다. 앞으로의 의료기술 발달은 어떻게 될까? 책에서 말하는 황우석 박사 사태는 엄청난 이슈였고,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사례중 하나다. 현재 의료기술 발달을 위한 연구를 보면 질병을 낫게하는 선을 넘어서 생명 복제, 유전자 편집 등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아주 당연히 인류를 위한다는 명목이다.



자, 그렇다면 인간은 인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어디까지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이며, 연구 범위에 있어서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연구를 위해서 인간은 생명의 기준을 어느 시점부터 잡아야하는걸까? 이는 지금까지도 명확한 해답이 나오지 않은 난제다.



죽음은 생명의 대척점에 있는 용어지만 그 실체를 설명하거나 입증하기는 어렵다. 여러 종교나 철학적 사유에서 이를테면 영혼 등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육체와 영혼의 결합과 분리, 즉 삶과 죽음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는 객관적으로 임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가설과 검증에 익숙한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따라서 죽움은 다만 살아 있지 않은 상태로 표현되거나 증명될 수밖에 없다. p 120



많은 경우 죽음은 보통 어떤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표현되나, 사실은 어느 기간에 발생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사회적으로나 법률적으로는 편의상 어느 순간, ‘몇 날 몇 시 몇 분’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한다. (…) 그리고 법의학자는 이러한 사람의 죽음을 세포사, 장기사, 개체사, 법적 사망의 단계로 분류한다. p 121



법의학 중 특히 법의병리학의 역할은 사망 원인과 사망 종류를 판단하는 것이다. 사망 원인이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질병, 병적 상태 또는 손상’이다. 세계보건기구는 1977년 죽음을 초래했거나 죽음에 기여한 모든 질병, 병적 상태 또는 손상, 그리고 그러한 손상을 일으킨 사고나 폭행을 사망원인으로 정의했다.


사망원인은 막연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생물학적 또는 의학적인 구체적 개념으로 의학적으로 검토되고 과학적으로 타당한 결정이어야 한다. 특히 법의학적으로는 사망 원인의 결정에 죽음에 대한 법적 책임의 유무 또는 책임의 경중 등이 걸려 있어 매우 중요하다. p 125



자연스러운 죽음은 무엇인가


내가 처음 마주했던 죽음은 7살인가 8살이었나? 꽤 어렸을적, 할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당시 부모님은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니 얼른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학교를 조퇴하고 시골에 내려갔다. 할아버지는 안방에 누워계셨고, 다른 어른들은 이미 와계셨던 걸로 기억한다. 노환에다, 지병도 있으셨다. 다들 할아버지의 죽음을 예견했고, 미리 준비했고, 그렇게 할아버지는 집에서 돌아가셨다. 이게 내가 처음 마주했던 죽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주한 ‘자연스러운’ 죽음이었다. 할아버지 장례도 시골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질병으로 인한 생의 ‘말기’적 증상에는 다음과 같은 신체적 징후가 수반된다. 당연히 통증이 이을 것이고, 피곤하고, 힘이 없고, 입이 마르고, 손발이 저리고, 가렵고, 어지러운 증상들을 겪게 된다. (…) 이외에도 환자가 사망하는 과정에서 가장 흔하게 겪는 일반적인 징후는 졸음이다. 굉장한 졸음 때문에 환자는 혼미한 그로기 상태에 빠져 깨워도 계속 존다. p 031



그런데 의학 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현대에는 죽음을 판단하고 대처하는 데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바로 연명의료다. 의학과 의료의 발전으로 그동안 생각하지도 않던 문제가 논쟁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중환자 의료의 발달로 치명적인 상황에 빠진 환자를 상당수 살려낼 수 있게 되었으나, 이면에는 더 이상의 의료가 소용없는 경우 이를 중지하고자 할 때 그 절차와 시기가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를 함께 가져왔다. 즉 이제는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가는 단계라고 보는 졸음의 단계, 혼수상태를 무한정 연장할 수 있다. p 033



할아버지 죽음 이후 마주한 두번째 죽음은 내가 성년이 된 이후다. 정정하셨던 외삼촌이 갑자기 급성 백혈병에 걸렸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돌아가셨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의 죽음과는 달리, 외삼촌의 죽음은 나에겐 꽤 무겁게 다가왔다. 젊었고, 건강했고, 무엇보다 외가에서 스타나 다름없던 다정했던 외삼촌이었다. 그런 외삼촌이 하루아침에 병을 얻게 되었고, 갑작스레 돌아가신거다.



이때 비로소 깨달았다. 태어남에는 순서가 있지만,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는 걸. 더군다나 이제는 죽음을 앞둔 사람과 인사하는게 어려워졌다는 걸.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죽음을 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의사인데, 의사만이 정확히 그 사람이 몇 시 몇 분에 사망했는지를 판정할 수 있다. 나 또한 죽음을 판정하고 시체 검안서를 작성할 때 가족에게 기일을 언제로 하면 좋을 지 여쭤본다. 왜냐하면 밤 12시 전후로 돌아가시면 날짜가 바뀌니 가족들이 원하는 날로 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당시 의사는 그 시간에 맞춰 마지막 숨을 불어넣었던 인공호흡기를 떼고 사망 진단을 했다. 그리고 그 즉시 여섯 명의 환자에게 최요삼 선수의 건강한 장기가 이식되었다. p 140



이 숭고한 미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의사가 1월 3일 0시 1분을 기다려 사망 진단을 했다는 것이다. 즉 의사가 마음만 먹었으면 1월 3일이 아니라 더 길게 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뇌사자의 심장을 한정 없이 계속 뛰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은 누구라도 뇌사를 인정하는 분위기다. 그리고 뇌사가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인정된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논쟁거리가 생명의 자기 결정권 문제다. 의사 조력자살 또는 의사조력사망 문제 등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현재 우리 사회의 첨예한 논쟁거리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p 141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땐 다들 죽음을 예견했고, 죽음을 앞두고 할아버지와 인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외삼촌의 죽음은 달랐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셨지만, 마지막 한 고비를 넘기시지 못했다. 호흡기를 달고 계셨고, 주로 눈을 감고 계셨다. 외삼촌과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진작에 사라진터였다. 그렇게 외삼촌은 돌아가셨고, 의사는 사망진단을 내렸다.



지금은 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노환으로, 지병으로 집에서 자연스레 생명을 다하는 경우는 없다. 무조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틀에 박힌듯 연계된(또는 계약된) 장례식장으로 시신을 옮기고 장례를 치룬다. 행여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남은 가족은 무조건 경찰을 불러야 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이 이렇게 바뀌어버린 건, 빠르게 발달한 의료기술과 최근 20여년 간 일어난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의료 법적 분쟁에 기인한다.



연명치료 거부라는게 있다. 2018년 연명의료결정법 시행으로 생겨난 제도다. 말그대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않고, 인간답게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이야기다. 이 역시 수많은 의료 법적 분쟁을 거쳐 시행된 제도다. 뇌사자 장기기증 역시 오랜 논쟁을 거쳐서 비교적 근래에 만들어진 제도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아마 이후로도 죽음과 관련된 여러 법정 분쟁이 생길 것이다.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탄생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죽음이니까. 오히려 이런 제도가 너무 늦게 마련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과거에는 죽음을 터부시하고, 언급하기를 꺼려했기에 어쩔수 없었겠지만. 그로인해 죽음을 대하는 제도 마련이 미진했고, 오랜기간 시행착오를 겪게 된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죽음의 형태는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그렇기에 지금이나마 죽음과 관련된 논쟁이 지속되고 제도가 생기는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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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셀프 트래블 - 2024~2025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24
송윤경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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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보는 여행책 시리즈 셀프트래블 신간이 나왔다. 이번 편은 서유럽 포르투갈이다. 셀프트래블 시리즈는 여행을 계획중인 사람이나 여행중인 사람에게 여행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전해주는 더할나위 없는 책이다. 심지어 주기적으로 개정판이 나오고, 최신 정보를 전달해주는 만큼 정말 믿고 볼 수 있는 여행책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셀프트래블 시리즈는 실제 여행을 가지 않고, 눈으로 간접여행을 하고 싶은 사람들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여행책이기도 하다. 특히 나처럼 육아로 인해(?) 장거리 해외여행을 못가는 사람들에겐 이만한 책이 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서유럽 포르투갈로 여행을 떠나본다♬

※셀프트래블 시리즈는 책 말미에 미니책자가 있어서, 여행시 휴대하기 편리하다.


포르투갈, 서유럽에 속한 나라이자 과거 대항해시대 포문을 연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15세기 아프리카/인도 항로를 개척하고 희망봉을 찍고 온 ‘바스코 다 가마’가 바로 포르투갈 사람이다. 또한 이 시기를 기점으로 19세기까지 아프리카, 아시아 일대가 유럽 식민지로 바뀌며, 식민지 무역이 활발해진 것 역시 포르투갈이 포문을 연 대항해시대에서 기인한다.

소금 가득한 바다여

얼마나 많은 그대의 소금이 포르투갈의 눈물인가.

그대를 건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아들들이 헛된 기도를 하고

어머니들이 눈물을 흘렸는가.

얼마나 많은 처녀들이 신부가 되길 기다리며 죽었는가.

그대가 우리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속에서, 바다여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만약 영혼이 작지 않다면 말이다.

곶 너머로 항해하려는 자라면

누구나 두 배는 슬퍼해야 한다. 도망칠 곳은 없으니.

위험과 심연은 신께서 바다에게 주신 것이니

그럼에도 바다를 천국의 거울로 만든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서사시 『메시지』 중에서



포르투갈 여행 Q&A

  1. 포르투갈 여행은 언제 떠나야 할까? 포르투갈은 지중해성 기후로 온화하고 사계절이 뚜렷하다. 세로로 길게 뻗은 지형으로 인해 날씨 차이가 있어서 여름에는 북부, 겨울에는 남부를 여행하면 좋다.

  2. 패키지와 자유여행,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일까? 패키지라면 역사나 음식, 패션, 소도시 투어 같은 특화된 여행사를 이용하자. 자유여행이라면 내가 짠 여행에 현지 패키지를 추가하면 좋다. 동네 이야기를 들려주는 워킹투어나, 전문가 동반 역사유적지 당일 투어도 많다.

  3. 포르투갈에는 소매치기가 많다는데, 어떻게 예방해야할까? 포르투갈 소매치기는 특히 리스본 트램에서 많이 발생한다. 트램이나 지하철에서 안전한 곳은 제일 뒤 칸 벽면이다. 벽면에 몸을 기대고 가방을 안고 있으면 가져가기 힘들고, 출입문과 떨어져 있는 것이 좋다.

  4. 소매치기를 당하면 어떻게 해야하나? 여행보험을 들었다면 보상받을 수 있다. 가까운 경찰서로 가서 폴리스 리포트를 작성한다. 여권 또는 여권 사본이 있다면 들고 가자. 경찰관의 사인, 도장을 찍고 사본을 받은 뒤 한국으로 돌아와 보험사에 제출하면 된다.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나라다. 뿐만 아니라 세계가 놀란 문화유산도 있고,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성지 ‘파티마’가 바로 포르투갈에 있다. 음식은 말해 뭐해! 일반적인 서유럽 음식과는 달리, 그 양이 아주 푸짐하다. 특히 와인 산지가 유명한 만큼, 포르투갈에서는 와인 한 모금도 필수!

포르투갈 식당 방문시 주의할 점이 있으니, 바로 ‘코우베르트’라는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문화다. 포르투갈은 우리나라와 달리 식전 사이드 음식이 유료다. 당연히 주는 거라 생각하고 먹었다가는, 추가요금이 나오니 주의! 원치 않으면 식전 음식을 빼준다고 하니, 직원에게 말하면 된다.


포우자다는 옛 성주들의 고성이나 수도원, 대부호의 저택을 국가에서 개조해 만든 국영 호텔이다. 포르투갈 내 35곳에 자리한 포우자다는 5성급 호텔 정도의 가격으로 비싼 편이나, 독특한 문화 체험 덕분에 항상 예약이 꽉 차있으므로 몇 달 전에 예약하는 것이 좋다. 성의 고전적인 인테리어는 그대로 두고 시설만 현대적으로 개조해 불편함이 없으며, 휴양에 딱 맞게 리조트처럼 꾸민 호텔도 있다. 비싼 숙박료가 부담스럽다면 식사만 즐기는 것도 좋다. 포르투갈 고유의 맛을 낸 전통요리와 현지 와인, 서비스 철학을 고수하고 있어 특별한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중세로 시간여행을 떠나 유럽 귀족이 되고 싶다면 하루 쯤 투자해보자. p 050

무려 포르투갈에 있는 고성이 국영호텔로 변모했단다. 심지어 내부는 현대적으로 개조해 사용에 불편함이 없다고! 어렸을 때 디즈니 만화를 보면서, 공주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나만 그랬나ㅋㅋㅋ). 포르투갈 포우자다에서 숙박하면, 어렸을 때 완전 드림스컴투르★. 실질적으로 내 인생 통틀어서 포르투갈 여행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_T.

아래는 내 기준(!) 포르투갈 여행지 픽 이다.


바다를 향한 영원의 꿈

리스본 & 리스본 근교

리스본은 포르투갈의 수도라고 설명하기엔 한없이 모자라다. 화려하거나 세련된 건물이 없다. 사람들은 척박한 일곱 언덕에서 카페의 문을 열고 비카를 마시며 정어리를 손질하고 농담을 주고 받는다. 이 평범한 도시에 가면 설렌다. 그것은 이상향을 느낀다고 하는 애매모호한 것 처럼 분위기라는 알 수 없는 끌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리스본 사람들은 최고의 부를 경험했고, 바다로 나간 이를 그리워했으며, 최악의 재앙을 함께했다. 그들은 여행객을 영혼으로 대하고 숨겨 높은 미소를 내민다. 리스본은 포르투갈어로 ‘매혹적인 항구’라는 뜻. 당신은 홀린 듯이 리스본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p 055

일단 외국을 가면 그 나라 수도는 꼭 가봐야한다. 고로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은 무조건 가야된다는 것! 특히 리스본에 있는 성당 중 솔로를 위한 성당이 있다는 게 너무 매력적이다. 넘 반전이잖아?! 가톨릭 성인이 가난한 사람이나 고아, 임산부 수호하는 건 뭔가 당연한데, 거기에 더해 결혼을 장려하는 성인이라니. 반전매력이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리스본 외곽에 있는 헤갈레이라 별장도 눈여겨 볼만한 관광지다. 이 별장 주인이 ‘프리메이슨’ 단원이라고!!! 심지어 이 별장에서 프리메이슨 입단식이 열렸다고!!!! 아, 참고로 프리메이슨은 중세시대 비밀결사로도 유명한 비밀단체다. 헤갈레이라 별장에 있는 입회식 우물이 정원 상부 부터 지하까지 나선형 계단으로 9층까지 나있는데, 이곳 바닥에 프리메이슨 표식인 나침반이 있다고 한다. 여기가 프리메이슨 입단식이 열리는 장소. 거기다 나선형 계단 중간 층에 가짜 돌문이 있는데, 이 돌문을 빌면 원통형 탑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아 진짜 여긴 꼭 가고 싶다.


*산토 안토니우 성당

리스본 수호성인 안토니우가 태어난 지 3세기가 지난 뒤 지은 성당이다. 성인 안토니우는 가난한 사람과 고아, 임산부 그리고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리스본에서 소매치기당한 여행자들은 경찰서 다음으로 이곳을 찾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또한 결혼을 장려하는 성인으로 유명해 미혼 자식이 있는 집에선 안토니우 사진이 담긴 액자를 둔다고 한다. 신랑감 신붓감을 찾아준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p 084

*헤갈레이라 별장

포르투 상인 가문인 헤갈레이라 자작부인이 소유하던 별장이다. 1892년 브라질 커피 무역으로 거부가 된 카르빌류 몬테이루가 사서 여름 별장으로 재단장했다. 당시 화재가 된 건축 도안은 이탈리아 크레마 시립박물관에 있다. 무대 연출가를 겸한 루이지 마니니는 입구를 숨겨놓거나 비밀통로로 연결되는 등 장치를 설치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듯하다. p 158



대서양 입구의 영원한 항구

포르투

국명의 어원인 포르투는 부두를 뜻하는 ‘port’에서 유래되었다. 도우루 강 하구에 위치한 항구도시 포르투는 이웃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일찍이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항해시대를 연 엔리케 왕의 출생지이자 포르투갈의 오래된 도시로 다양한 건축양식의 진화를 살펴볼 수 있다.

낭만의 도시라 하면 프랑스에는 파리, 체코에는 프라하를 떠올리듯이 포르투갈에는 포르투가 있다. 동 루이스 1세 다리 아래로 도우루 강이 흐르고 그 위로 크루즈가 지나간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히베이라 지구의 건물은 파스텔 빛이 바랜 빈티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산지의 포도가 무르익으면 빌라 지 노바 가이아의 와이너리에서는 빈 오크통을 채운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클레리구스 탑의 종이 울리고 노을을 닮아 오렌지빛 지붕 위로 새가 날아 오른다. 당신만 있다면 이곳은 완벽한 포르투가 된다. p 171

‘포르투갈’ 이라는 국가 이름 어원이 된 도시 ‘포르투’. 국가 이름이 된 도시이니만큼 포르투도 꼭 들러봐야 하지않을까 싶다. 특히 ‘대항해시대’를 연 엔리케 왕의 흔적이 남아있는 도시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대항해시대고 뭐고, 오로지 렐루 서점!!!!! 해리포터 쳐돌이라면 무조건 가봐야 할 렐루 서점!!!!!!!!!!!!

*동 루이스 1세 다리

어느 도시에서나 지역을 나타내는 랜드마크가 있는데, 포르투는 동 루이스 1세 다리가 그렇다. 도우루 강 하류에 있는 6개 다리 중 하나로 포르투 올드타운과 와이너리가 즐비한 빌라 노바 지 가이아를 연결한다. 포르투 주요 명소인 만큼 평일과 주말 상관없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 ㅗ루 공원이나 세하 두 필라스 수도원에서 보는 노을과 야경도 좋지만, 북적대는 인파가 고민이라면 이곳으로 가자. 긴다이스 푸니쿨라 정류장 인근에 있는 두키 지 롤레 주차장이다. 세하 두 필라르 수도원과 마주한 절벽에 있어 시야가 확 트인다. 위치 상 해가 지는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일몰 분위기와 야경, 웅장한 수도원과 활기찬 모루 공원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p 185

*렐루 서점

종이냄새가 주는 편안함과 책이 주는 느긋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서점처럼 좋은 곳이 없다. 1881년 렐루 형제의 서점은 포르투의 일반 건축물에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해 아르누보 양식의 이국적인 외관으로 꾸며졌다. 렐루 서점은 ‘해리포터 서점’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지은 조앤 K.롤링 작가는 신혼을 포르투에서 보냈고 해리포터가 다니는 마법 학교의 계단을 렐루 서점의 계단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p 192



성모발현의 순례지

파티마

이탈리아 바티칸 시국 다음으로 많이 찾는 세계적인 가톨릭 순례지다. 1917년 성모 마리아가 세 명의 목동 앞에 나타난 곳이기 때무니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가톨릭을 믿는 포르투갈 대부분의 국민에게 희망을 주었다. 마음이 아픈 자와 몸이 고통받는 자들이 파티마로 찾아왔다. 나았다는 사람도, 안식을 찾았다는 사람도 있으나 분명한 건 이곳을 찾은 여행자는 무언가 깨달음을 마음에 담고 간다는 것이다.

성모발현일인 5월 13일이 되면 어마어마한 광장이 발 디딜틈도 없이 꽉 찬다. 이때 여행하게 된다면 저녁에 있는 촛불미사와 행렬이 장관을 이루니 놓치지 말자. p 266

‘파티마 기적’은 꽤 유명한 일화라 잘 알고 있는 내용이긴 했는데, 파티마가 포르투갈인지는 몰랐다. 분명 파티마가 포르투갈이라는 정보까지 같이 보았을 테지만, 일화 속 중요한 내용은 ‘성모 발현’과 ‘목동들’, ‘예언’ 그리고 발현 시점이 무려 꽤나 가까운 과거였던 1917년이다보니, 내 머리속에는 그닥 중요하지 않은 정보였던 ‘포르투갈’이라는 국가 이름은 사라졌었나보다.

아니 근데 진짜로 성모 발현이 1917년이라는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고대 사회야 뭐 전설이니 뭐니 하면서 이야기하겠다면, 1917년이면 너무 가까운 과거가 아닌가. 근데 심지어 마을 사람은 말해 뭐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7만명이 봤어! 와. 거기다 목동 중 한명인 루시아 수녀는 2005년에 선종. 이건 진짜.

난 종교는 없지만, 그럼에도 국내에 있는 역사적인 종교시설 답사를 주구장창 다녀온 사람으로써!! 파티마 만큼은 꼭 한번 가보고 싶다.


*파티마의 기적

1917년 5월 13일 파티마의 목동들 루시아와 프란치스쿠, 프란치스쿠의 동생이자 루시아의 사촌인 히야친타는 현재 망령들의 예배당 위치에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목격했다. 성모는 기도를 많이 하고, 매달 같은 날에 같은 곳으로 나오라고 했다. 목동들은 6월과 7월에 이를 행했으나 8월에는 그럴 수 없었다. 정부관리가 목동들을 감옥으로 데려가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다. 약속한 날의 6일 후 다른 곳에서 발현을 목격했고 9월이 지나 10월에는 약 7만 명의 사람들 앞에서 발현하는 기적을 보였다. 일명 ‘태양의 춤’이라 불리는 이 기적은 움직이며 굴곡이 지는 태양을 모든 사람들이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목동 중 프란치스쿠와 히야친타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으로 죽고 루시아는 수도원으로 들어가 수녀로 살았다. 성모는 파티마의 비밀 3가지를 루시아를 통해 전하였다. 토요일에 가톨릭 미사의 예식 중 하나인 성채를 하고 죄인을 위해 기도하며, 묵주기도를 계속하면 러시아는 회개하여 평화가 올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종교를 박해하고 교황은 고통받으리라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러시아는 공산주의에서 벗어났고 요한 바오르 2세는 암살에서 살아남았다. 몸에서 나온 총알은 파티마 성당 성모상 왕관에 봉헌하였다. 다음 해 요한 바오르 2세는 파티마로 순례를 왔고 이를 기념해 광장에는 그의 조각이 남아있다. p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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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파괴 - 군중에서 공중으로
윤동준 지음 / 파람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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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잘 읽지 않는 분야가 정치, 사회학책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불편하니까. 매일 듣는 뉴스에서도 듣기만 해도 불편한 사건, 사고가 나오는데, 내가 읽는 책에서까지 그런 불편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날 불편하게 하는 사회 인문학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었다. 왜? 이 땅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알아야 하는 불편함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회문제에 있어서 최소한 방관자는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나보다 한참 어리다. 나나 신랑이 우스갯소리로 “2000년에도 사람이 태어났어?” 하던 새천년둥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지금 한창 놀아야할 20대 청춘이다. 그 청춘이 사회 인문학책을 썼다. 수박 겉핥기로 쓴 책이 아니라, 깊은 식견을 가지고 쓴 책이었다.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그맘때 놀....지는 못지만, 그때도 지금처럼 열씸히 일하느라 바빴기에 사회문제에 관심이 1도 없었다. 나 먹고 살기도 바쁜데, 남이 어떻게 살든 내 알바 아니었으니까. 굳이 사회문제나, 떠올리기만해도 불편함을 야기하는 적폐들은 신경쓰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나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다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든 신경조차 쓰지 않던 방관자 중 하나였다. 그렇게 나 살기도 바쁘다는 이유로 많은 고통들을 무시했다. 남이 배를 곯든 맗든, 나와 내 가족 끼니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굳이 내가 신경쓰지 않아도 누군가 나서서 해결하려 할테니, 나서지않고 신경쓰지 않았으며, 그렇게 터져나오는 사회문제들을 무시했다.



군중은 사회와 자신의 내면에서 절대시되는 낡은 가치들 곧 우상을 파괴함으로써 공중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정의한 우상은 영웅을 숭배하는, 고통을 방관하는, 승자독식주의를 추구하는, 자유를 보장하는 규칙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그러한 행동이 축적된 집단은 적자생존을 보장하는 교육, 보편적 윤리를 무시하는 부족주의적 공감, 책임을 방임하는 신념윤리, 교양을 파괴하는 전문가주의, 다원주의를 간과하는 상대주의, 허무감을 발생시키는 이기주의, 이성을 얕보는 직관이 뿌리를 두는 전근대적 사회를 조장합니다.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진보하며 과학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발전한다는 것은 불문율입니다. 이는 곧 하나의 전제는 미래의 새로운 전제의 토양에 불과할 뿐, 절대시 될 수 없는 가치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낡은 우상들은 새로운 토양을 가꾸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파괴되어야만 합니다. p 014



점점 나이를 먹고, 아이를 낳고 나니 내가 좀 바뀌었나보다. 아이와 관련된 사회문제에 신경쓰이고, 생계가 어려운 아이들을 보며 마음이 아리기 시작했고, 학대받는 아이들을 보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사회문제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멀게는 바다 건너 아직도 깨끗한 물 한모금 마시기가 어려운 사람들. 의료, 교육, 문화생활은 커녕 등 기초적인 생활조차 어려운 사람들. 더 슬픈 건, 이렇게 최소한의 의식주가 보장되지 않는 삶은 바다 건너에만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도 기본적인 삶이 어려운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회 문제를 방관했을 때,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전 세계적으로 문명, 과학이 발달하여 살기 편해졌다는 말을. 하지만 실상을 보면 아직도 최소한의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이 내가 사는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 곳곳에 있다. 이말은 전 세계적으로 살기 편해졌다는 말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 따르면(정확히는 저자가 읽었던 수많은 명사들의 책을 인용했지만) ‘세계 인구의 1퍼센트가 전 세계 재산 총액의 40%를 차지하고 있으며, 가장 부유한 상위 10%가 전체 자산 가치의 85%를 독점’ 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전 세계에서 10명 중 7명이 하루 10달러도 못 번다고 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1970년대 이후 소득 분포 하위 50%의 노동자들의 물가 상승률을 고려한 실질 임금은 같거나 하락했지만, 소득 분포 상위 1퍼센트의 실질 소득은 4배 이상 증가했고 상위 0.1퍼센트의 소득은 그보다 훨씬 많이 증가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능력주의가 아닌 승자독식주의이며, 그 어떠한 이념으로도 정당화하지 못하는 현상입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두는 나름의 수고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도 극소수의 몇몇 인간만 그들보다 수억 배나 생산적으로 일하고 있었을까요? p 061



즉 세계 인구 하위 90%가 남은 자산 가치 15%를 나눠가지는데, 적어도 이 중 20%는 나처럼 최소한 의식주가 해결되는, 하루 10달러(한화로 대략 1만 4천원) 이상은 벌 수 있는 서민들이다. 이 20%까지 제외하면, 결국 전 세계에서 70%의 인구에게 분배되는 자산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으며, 이들은 최소한의 의식주조차 해결이 어려운 빈곤층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 바로 우상을 숭배하는 군중들에 기인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우상이란 1)영웅을 숭배하는, 2)고통을 방관하는, 3)승자독식주의를 추구하는, 4)자유를 보장하는 규칙을 무시하는 행동 등이다.



군중은 ‘내가 아무것도 안 하더라도 다 잘 될 것이다’라는 낭만적인 믿음을 가집니다. 공적 가치와 제3세계 구제와 공교육에 무관심하면서도 진보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은 언제나 실패하지 안고 발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군중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일할 수 있고 직장 상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나 다른 일자리를 찾을 권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식의 부조리가 아직도 만연한 줄 알면서도 모든 개인이 똑같이 존엄하고 평등함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릅니다. p 033



롤 모델의 부재가 빈곤층의 부족한 의지와 실행력의 일부 외부적 요인을 설명하지만, 근본적으로 빈곤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자유롭게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합니다. 왜냐면 롤 모델을 가진 소수의 빈곤층이 자신 스스로 성공하고자 노력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도전할 수 없는 환경에서는 그것 자체가 불가능한 꿈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은 빈곤의 원인으로 ‘자유의 부재’를 제시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국이 분쟁 중이거나 기후변화로 재앙이 불어 닥쳤거나 특정 배경의 인종을 차별하는 문화가 뿌리 깊다면 그곳의 사람들은 빈곤에 빠질 확률이 높을 수 밖에 없습니다. p 050



나 역시 지금 당장 내 삶에 위해가 가해지는건 없기에, 내 주변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여러 문제에 눈을 감았다. 누군가 앞장서길 바라며, 정작 나는 편하게 인터넷 기사를 보며 좋아요, 또는 싫어요 누르는 행위로 나는 내 의견을 표시했다고 만족했다. 난 방관자였고, 누군가가 앞장서길 바랐던 수많은 군중 중 하나다.



철학자 오르테가는 학교가 대중들에게 오로지 현대적인 삶의 기술만을 가르쳤을 뿐 계몽시키지는 못했다고, 대중들에게 열심히 생존 수단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위대한 역사적 사명감을 심어주지는 못했다고, 그들에게 현대적인 도구의 힘과 긍지를 허겁지겁 전해주었지만, 그 정신을 심어주지는 못했다고 무참하게 비판했습니다. (…) 기술의 습득을 목표로 교육받은 현대의 군중은 같은 일만 반복하는 단순 무식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판단력이나 도덕 감각을 자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해 자신의 한계에 만족하는 폐쇄적인 인간이 되기 쉽습니다. p 093



저자는 이렇게 대다수의 사람들이 방관하는 군중으로 만든 우상 중에는 아이를 한 사람의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밑교육을 도맡아온 ‘학교’도 해당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지금의 학교교육 현실을 보자. 그저 전문교육을 가르치고, 좋은 대학을 보내고, 대기업 취업이 가능한 전문가를 배출하기 위해 사활을 건다. 어린 학생들에게 경쟁을 부추기며, 서로를 밟고 올라가게 한다. 학교는 어린 학생들에게 어른들이 말하는 이상향(우상)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그 우상을 위해 어른들이 주는대로 따라가게 만들고 있다.



이런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부조리한 문제를 마주했을 때, 과연 대처가 가능할까? 비판적인 사고는 커녕 문제의식 조차 가지지 못할 것이며, 그저 앞 사람 의견에 동조하는 삶을 살거나, 방관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지금보다 조금 더 미래가 되면, 차라리 이정도면 그나마 제대로 된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왜? 이미 우리는 학교교육의 실패를 목도했기 때문이다. 이미 수많은 청소년 범죄들을 비롯하여, 나이로는 이제 갓 성인이 된 미성숙한 어른의 범죄가 매일 연이어 뉴스에 보도되고 있지 않은가.



학교는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소양과 교양을 가르쳐야 한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삶의 나침반 찾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학교는 오로지 우상을 추구하는 교육에 매몰되어 버렸다.



인류를 야만에서 벗어나게 해준 ‘협력’은 서로에게 약간의 희생이 요구될지라도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큰 발전을 이루어낸다는 ‘공통의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p 108



그러한 ‘공통의 인식’은 미국의 도덕철학자 샘 해리스의 말대로 핵확산, 집단학살, 에너지 안보, 기후변화, 빈곤, 그리고 실패하는 학교 등의 근본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면 자신만의 도덕적 기준을 내세우며 독단의 함정에 빠지면 모든 것이 낭비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은 문란한 성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오히려 동성애자를 비정상인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논쟁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도그마에 빠진 자의 시간 낭비입니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의 말대로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고 하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p 111



우리가 직면한 대다수의 사회문제는 거대한 악, 즉 빌런에 의해 발생되는게 아니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무관심, 방관 속에서 생겨난다. 내 자유가 중요하다면, 마찬가지로 타인의 자유도 중요하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라는데 앞장서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인식’하고 있느냐, 아니냐. 거기서부터 시작이지 않을까?



그래서다. 20대가 쓴 이 사회 인문학책을, 저자와 동년배인 20대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기본적인 교양, 소양교육이 사라진 학교에서 교육받은 20대들에게 말이다. 이미 앞서 있은 어른들보다도, 훨씬 더 나은 어른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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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 인문학 - 음식 다양성의 한식, 과학으로 노래하다
권대영 지음 / 헬스레터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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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전래되었다.’ 라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다. 심지어 우리 신랑도 이 사실을 정설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깊게 생각해보면 ‘이게 정말이야? 아닌거 같은데?’ 싶을 정도로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에는 여러 모순이 보인다. 


예컨데 우리나라에는 고추를 메인으로 한 음식들이 있는 반면, 일본에는 고추를 메인으로 한 음식이 없다. 무엇보다 고추가 임진왜란 당시 전래되었다는 것 치고는, 한반도에서 대중화된 시기가 너무 빠르다.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전래되서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서 발효식품인 고추장이 되고, 갈아서 사용하는 고추가루가 되고, 고추가루를 이용해 만든 발효식품 김치가 된다는 건 불가능하다. 외국에서 들어온 식자재가 그 나라의 환경에 맞춰 적응하고, 토착화되고, 전국적으로 퍼지고, 그로 인한 음식이 만들어지는데는 지난한 시간이 걸리니까. 그걸 백년도 안되서 해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된다.


하지만 소위 지식인,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어떠한 시점을 기준으로 고추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전래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고추를 이용하여 만든 수많은 한식들 역사까지 축소시켰다. 고추를 즐겨먹는 한국인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한식을 깎아내리려는 중국과 일본에선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한식 역사 왜곡에 참전한다. 중국은 파오차이, 일본은 기무치 같은 배추 짱아찌들을 들먹이며, 자신들이 김치 원조라고 나서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볼 때 ‘고추가 일본으로부터 전래되었다’는 설에는 의문점들이 많았다. 일본에는 고추로 만든 음식이 없는데 임진왜란 때 무슨 이유로 우리나라에 갖고 들어왔을까? 유럽에서 중남미 고추인 아히가 들어왔다면, 그 당시 함께 들어왔다는 토마토, 타바코처럼 적어도 ‘아히’ 아니면 ‘피망’같은 유럽식 이름의 흔적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순 우리말 ‘고추’만 남아있고 심지어 ‘당초’, ‘번초’, ‘만초’ 등 순전히 중국식 이름이 붙어졌을까? 고추는 일본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도 없고, 따로 용도가 없을 때인데도 어떻게 전국으로 퍼졌을까? 어떻게 고추가 들어오자마자 김치와 고추장이 동시에 만들어 질 수 있었을까? 식품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가능한’ 가설, 즉 있을 수 없는 주장이다. 인문학자라도 조금만 더 세심하게 바라보면 합리적 의구심이 들었을 것이다. p 051


소위 지식인,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에서 발견된 모순을 검증하지 않았다. 그저 ‘관심’에 받는 것에 기뻐했다. 대중매체도 여기에 합류했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 식품과학자가 나타났다. 바로 이 역사책의 저자다.


본투비 순수 자연과학자이자 식품과학자인 저자는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과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검증해서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을 박살내는데 앞장섰다. 한국학 박사 출신인 배우자 도움을 받아 오롯이 1차 원문(고문서 등)을 기준으로 연구했고, 본인 전공인 자연과학을 십분 활용했다. 무엇보다 저자는 고추장으로 유명한 순창 출신이다. 태조 이성계도 그 맛에 반해 진상하라고 했다는 ‘순창 고추장’을 만드는 그 순창이다. 태조 이성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도 한~~~~~참 전, 조선을 건국했던 사람이다.


결정적으로 1990년 일본을 방문하였을 당시, 일본 《식품원료학》이라는 책에서 ‘고추는 조선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가 가지고 들어왔다’는 내용을 접하고 나서 고추의 일본 전래설에 문제가 있다는 과학적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고추의 전래에 대해 연구를 시작하였다. p 052


결정적으로 저자가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을 파헤치기 시작한 또 다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 고추가 전래된 시점을 확인하고 나서다. 우리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고추가 전래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고추가 전래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고추가 전래된 역사를 파헤치는 건 이 책의 백미다. 덧붙여 고추로 이용한 한식의 역사를 비롯하여, 과거 한자 사대주의자들로 인해 왜곡되어버린 한식의 역사도 알려준다. 순 우리말인 닭도리탕이 일본어 잔재라는 이상한 논리를 앞세우며, ‘닭볶음탕’이라고 창씨개명한건 대표 사례라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음식 이름을 지을 때 음식의 주재료, 요리방법, 종류를 의미하는 말을 붙여서 이름을 지었다. 닭을 고아서 만든 탕은 ‘닭곰탕’, 김치를 넣어서 끓인 찌개는 ‘김치찌개’, 닭을 기름에 볶으면 ‘닭볶음’, 닭을 찌면 ‘닭찜’, 닭을 도리쳐서 만든 탕은 ‘닭도리탕’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놈의 한자 사대주의자들이 우리말 ‘도리치다’는 생각치 않고, 고스톱의 ‘고도리’만 생각하며 ‘닭도리탕’을 일본어 잔재라고 몰아세웠다. 그런 한자 사대주의자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도리치다’라는 말은 칼 등으로 돌려가며 거칠게 쳐내는 요리 방법이란 걸.


요즘은 한자 사대주의를 넘어 영어 사대주의가 기승이다. 해외에서 소개하는 한식 이름을 보면 물음표가 머릿속을 떠다닌다. 그냥 한식 명 그대로 영어로 쓰면 될껄, 굳이굳이 한식을 영어로 번역하는 정성을 들이니 외국인들이 ‘피쉬케이크’라는 단어를 보고 기겁을 하지. 심지어는 외국 요리 이름을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다. 김치를 소개할 때 중국 배추요리인 파오차이를 사용하기도, 일본 배추 요리인 기무치를 사용하기도 한다. 청국장은? 코리아 낫토라고 소개한다. 두부는? 일본 발음인 토후로 소개한다. 그저 웃을뿐!



고추 역사왜곡! 고추는 임진왜란 전래설

‘고추 일본 유래설’이 시작된 시기는 1980년대 들어서다. 한양대 이성우 교수가 1984년 《고추의 역사와 품질평가에 관한 연구》에서 ‘1492년 콜롬버스에 의해 고추가 서인도 제도에서 포르투갈로 들어갔다가 100년 동안 인도 등을 거쳐 일본을 통하여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위 ‘고추의 일본 도입설’을 주장하면서다. (…) 이러한 주장이 기존 관념을 깨는 현대의 학문으로 인식되어 국민적 반향을 일으킨 것인지는 모르겠다. 가장 의아스러운 점은 음식 역사나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 전문가들이 이런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다는 점이다. 자연과학자들도 이러한 주장에 대해 과학적으로 검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방치한 셈이다. ‘고추 일본 도입설’은 여러 가지 반증의 문헌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나 후학들을 통해 어떤 결정적인 근거도 확보되지 못한 채 철통같은 방어 논리로 이후 다른 문헌과 책을 통해, 반복 또는 확대 재생산 되었고 어느새 정설로 굳어져 버렸다. p 085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은 명문대 식품사학과 교수 논문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 교수 역시 나름대로 검증과 연구를 했겠지만, 그 검증이 과학적인 검증으로 이어지지 않았기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게 아닐까. 더 아쉬운건 이 논문을 다시 연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가공 재생산하는 일부 지식인들과 전문가들이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그들로 인해 한식의 역사가 대폭 축소 및 왜곡되었으니까.


고추가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대표적인 근거로 드는 것이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다. 


‘남만초에는 독이 있다. 일본에서 건너 온 것이라 그 이름을 왜개자라고 한다. 소주에 타서 팔기도 하는데 이것을 마시다 죽는 자가 다수 있었다.’


이 고서에 등장하는 남만초에 대한 설명이 바로 고추가 일본을 통해 건너 온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봉유설에 적힌 남만초는 말 그대로 남만초다. 품종학적으로 지금의 태국, 인도네시아 등 당시 중국에서 보면 남쪽 지방 오랑캐들이 먹었던 고추로, 우리 고추와는 종과 속이 완전히 다르다. 무엇보다 남만초가 언급된 글의 맥락을 살펴보자. 남만초를 술에 타 먹다가 죽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평소 술에 고추를 타 먹는 문화가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대로 해석하면 남만초가 얼마나 매운지, 독성이나 효능에 대해 잘 모르고 평소 우리 고추처럼 술에 타 먹듯이 했다가 사람이 죽었다는 내용이다. p 080


옛 문헌을 보면 조선시대 초기에 김종서가 북벌 당시 고뿔이 나거나 맹추위를 견뎌야 할 때면 우리 고추를 술에 타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으로 보면 우리 고추와 다른 남만초를 우리 고추처럼 술에 타 먹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p 122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내세운 조선시대 저서 《지봉유설》, 《오주연문장전산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근거는 파괴되었다. 앞뒤 맥락없이 근거라고 내세웠다가, 역풍을 맞게된거다. 심지어 내용을 찬찬히 살펴본 결과 우리나라에도 이미 고추가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주는 증거가 되었다. 



고추가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문헌은 전혀 없다. 이들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들어 일본 전래설을 뒷받침하려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그 문헌에 우리 고추가 있었다는 문구가 발견되어 역풍을 맞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보면 ‘고추의 종류인 번초 또는 남만초가 들어왔으며, 담배, 토마토도 임진왜란 전후에 들어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 눈 여겨 볼 것은 이 책에서 사람이 죽을 정도로 매운 번초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바로 뒤에 ‘아초’라고 하여 우리나라 고추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명한 고추장이라고 한다. 순창군 천안군에 나오는데, 한 나라에 이름이 났다. - 중략 - 요사이 ‘우리 고추’는 품질이 좋아 왜관에 팔면 심히 이익이 난다.’ p 082


고추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땅에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 시기 많은 문헌에 이미 고추장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식료찬요(1460년)》, 《향약집성방(1433년)》, 《의방유취(1477년)》 등에서 다양하게 발견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비위나 위가 약해 몸이 허해질 때, 닭이나 꿩을 도리쳐서 고추장을 넣고 끓여 먹거나 찍어 먹으면 밥맛이나 얼굴색이 좋아진다’고 하여 주로 식치의 개념으로 많이 쓰인 음식으로 소개되었다. p 091


고추가 이미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있었다는 기록은 꽤 많이 발견된다. 적어도 임진왜란 이후에 들어온건 절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계속 재배해왔던 우리의 두가지 전통 고추를 유전자 분석한 결과, 이미 47만 년 전에 분화된 두 품종으로 밝혀졌다. 하나는 김치와 고추장을 담그는 데 쓰이는 우리 고추이고, 다른 하나는 약간 매운 고추로 국과 탕에 맛을 내는 고추, 그러니까 청양고추의 원조로 보면 된다. 지금도 일부 지방에는 좀 매운 고추를 ‘땡초’라고 이야기 한다. 많은 사람들이 청양고추가 최근에 남만초인 태국 고추와 우리 고추의 교잡종이라고 생각하는데, 식물유전학자로 세계적인 전문가인 최도일 교수는 청양고추의 뿌리는 우리나라 약간 매운 고추를 근간으로 종자 개령한 것이라고 한다. p 103



심지어 고추를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니, 이 땅에 이미 우리나라 고추가 자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콜롬버스가 들여온 고추와 우리 고추는 품종이 다르다. 완전 다르다. 동남아 고추랑 우리나라 고추랑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나? 있다면 그사람 시각과 미각, 후각에 문제가 있는 듯.


아주 박박 우겨서 콜롬버스가 가지고 온 고추가 포르투갈을 지나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왔다고 치자. 당시 콜롬버스 고추가 우리가 먹는 고추로, 진화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알고는 있는지 묻고 싶다. 100~200년이라는 시간으로는 불가능하다. 본디 생물이란 n만년, n천년이라는 오랜 기간, 아주 천천히 환경에 적응하고 변화하며 진화한다. 본투비 문과인 나도 이건 아는데,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은 왜 안해봤나몰라.


또 다른 한식 역사 왜곡: 김치, 고추장, 비빔밥, 떡볶이

고추의 역사를 왜곡했으니, 그에 따른 부차적인 한식 역사 왜곡도 당연이 줄을 이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중국과 일본이 김치를 자기네거라고 우기지!


이 잘못된 설을 무리하게 합리화하고 꿰맞추려 하다 보니 임진왜란 이전 옛 문헌에 나오는 모든 한차 초(椒)를 일률적으로 후추, 산초 등으로 번역하고, 임진왜란 전의 문헌에 나오는 김치는 모두 백김치라 주장하고, ‘순창 고추장’도 흑색의 후추고추장이라는 주장까지 하게 된다. p 085

김치를 장아찌와 짠지의 후손으로 폄하나는 이들도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떤 학자는 김치는 원래 배추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로 만들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우리 김치에 고추가 들어가지 않은 김치였다는 잘못된 논리에 빠져, 근거 없이 김치의 원조가 일본의 츠케모노, 중국의 파오차이라고 한다 보니, 김치의 원조가 장아찌와 짠지라는 말을 무리하게 끌어들인 것에 불과하다. p 160


김치와 고추장은 엄연한 과학이다. 발효과학이라고 들어는 봤나? 그것도 아주 고급 발효과학이다. 


인류는 발효기술을 터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 음식을 오래 보관하면 기본적으로 음식은 부패한다. 부패한 음식을 먹으면 복통을 일으키거나, 심하면 사망한다. 그렇게 몇 천년 간 인류는 부패한 음식을 먹고 아프거나 죽었다. 하지만 어떤 부패한 음식은 오히려 맛이 좋고 건강에도 좋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오랜 기간에 걸친 깨달음으로 먹어도 되는 부패한 음식을 가려낼 수 있게되었고, 심지어 손수 부패한 음식을 만들게 되었을 것이다. 그게 ‘발효’라는 과학적인 기술이란건 나중에야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게 우리나라에서는 김치나 고추장, 된장, 삭힌 홍어 등이다.


고급 발효과학이 들어간 김치는 일본 장아찌나 중국 파오차이와는 그 결이 다르다. 아주 다르다. 걔들은 발효식품이 아니라, 절임식품이다. 장아찌와 짠지 같은 절임식품은 미생물의 성장과 부패를 막기 위해 수분활성도를 줄이는 방식으로 소금을 쓰거나, 식초를 사용한다. 즉 부패를 막아야 먹을 수 있고, 부패하면 못 먹는다. 미생물의 성장을 도와 발효시키는 발효식품과는 그 원리가 다르다. 태생부터 완전 다르다.


아, 이 책에 따르면 또 다른 소위 지식인들이 주장하길 우리나라엔 결구배추가 없어서, 최초 김치는 무김치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먹는 결구배추는 호배추(중국배추)라고 해서, 결구배추는 중국에서 들어온지 1백여년 밖에 안되었다는게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최초 한반도에는 결구배추가 없었고, 기록에 나오는 모든 김치는 무김치라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저자는 또 한번 강력한 역공을 펼쳤다. 《고려사절요》, 《삼국사기》에 이미 찢어먹는 통배추 김치 비유 기록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배추와 배추김치를 나타내는 표현은 우리의 오래된 고문헌에 승(㮱), 추승, 승저, 승제, 침승제 등으로 다양하게 나온다. 조선 전기부터 중기까지 남아있는 기록물만해도 서거정의 《사가집(1488년)》, 김창업 《연행일기(1712년)》 등에 배추김치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이 나온다. 그런데도 고추가 임진왜란 이후에 들어왔다고? 고추가 없는 배추김치는 있을 수 없으니, 임진왜란 이전에는 무로 만든 김치만 먹었다고? 아유, ㅈ랄도 이정도면 정성이다.


아,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호배추 말고도, 이미 옛날부터 우리나라 전통배추가 있었다. 조금은 작지만, 알찬 조선배추가.


고추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도입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비빔밥이란 기록이 1890년경 쓰인 《시의전서》에 처음 등장한다며, 그 이전 비빔밥의 기록이나 역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면서 그 역사를 축소한다. 고추장의 역사를 짧게 할 수 밖에 없으니 고추장을 이용한 비빔밥의 역사도 짧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당연한 논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p 113


일반적으로 음식이 옛 문헌에 기록으로 등장한다면, 그로부터 수 백 년전, 수천 년 전에 이미 백성들이 먹고 있던 음식일 가능성이 높다. 《시의전서》에 ‘비빔밥’이 처음 등장했다고 하더라도 그 역사를 100년으로 확언할 수는 없다. 당연히 비빔밥은 이미 16세기 말엽 박동량의 《기재잡기》에 ‘혼돈반’으로, 1724년 권상일이 쓴 《청대일기》에 ‘골동반’으로 한자로 쓴 명칭이 수록되어 있다. 《명물기략》에서는 소리를 빌려와 ‘부비반’으로 표기하였다. 이는 《시의전서》보다 300여 년 앞선 문헌 기록이다. 비빔밥의 한글 명칭도 1819년 《몽유편》에 ‘브뷔음’으로 한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의전서》보다 100여 년 전에 비빔밥을 한글로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p 114



고추 전래시기를 축소하니 각종 한식의 역사가 축소되고 왜곡되었다. 비빔밥 역사까지 왜곡되었을 줄 누가 알았나. 뜬금없이 왠 비빔밥이냐고 할 수 있다. 비빔밥을 잘 생각해보자. 비빔밥의 백미는 고추장이다!


간장으로 만든 떡볶이는 궁중떡볶이고 고추장으로 만든 떡볶이는 일반 떡볶이라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고추로 만든 음식은 서민음식이고, 고추장을 넣지 않은 음식은 궁중 음식이라는 것도 잘못됐다. 꼭 집어서 말하자면, 고추나 고추장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은 ‘궁중 음식’이 아니라 ‘제사 음식’이었다. (…) 일반사람이나 군왕이 평소에 먹는 떡볶이는 오늘날의 떡볶이와 같이 고추장 등으로 양념한 떡볶이였다. 《승정원일기》 등에 떡볶이가 나오는 걸로 보아 떡복이가 왕이 좋아한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대부가의 남인 이익의 문집 《성호집》에도 떡볶이 기록이 있어, 사대부가에서도 떡볶이는 즐겨 먹었던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식의식감》이나 《규곤요람》 등을 보면 서민들은 고추장을 중심으로 양념을 한 떡볶이를 즐겨 먹었다. 궁중이나 사대부가들은 전복, 해삼, 쇠고기, 돼지고기 등 서민들이 구하기 어려운 귀한 식재료를 사용한 떡볶이를 즐겨 먹었다. p 118


이제는 떡볶이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빨간 고추장 떡볶이도 옛날부터 즐겨 먹었다는거. 이 내용이 생소한 당신, 당신도 한식 역사 왜곡에 세뇌된 사람이다. 이 책을 읽기전 까지는 나역시 그랬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시중에 파는 떡볶이가 대중화 된건 1960년대 이후다. 밀가루 수입과 기계를 이용한 밀떡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다.



고추 일본 전래설, 부침개와 주파수의 상관관계 외에도 일본 말이라고는 고스톱 판의 ‘고도리’ 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닭도리탕이 일본 말이다’라고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치는가 하면, 여기에 몇몇 언어학자까지 가세해 어느순간 ‘닭도리탕’이 ‘닭볶음탕’으로 뒤바끼기도 했다. 일부 전문가들의 그릇된 연구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가는 잘못된 식품 정보에 의해 우리 음식 역사가 왜곡되고 때로는 누군가 선의의 피해를 겪기도 한다. p 061



한식은 자랑스런 우리 음식이다. 빛내지는 못할망정, 제발 까내리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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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섬 제주 유산 - 아는 만큼 보이는 제주의 역사·문화·자연 이야기
고진숙 지음 / 블랙피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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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제주 역사·문화에 꽤 관심이 많은 편이다. 왜? 제주도는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섬 하나에 고대부터 현대까지 굵직한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반도 본토 역사를 축소하면 제주 역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수많은 국내 여행지 중에서도 유독 제주를 아꼈다. 여행지로써 제주를 아낀만큼, 제주여행을 할때마다 ‘답사’를 기반으로 제주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때로는 제주 고대사와 관련된 지역을, 때로는 근·현대사와 관련된 지역을 찾아다니곤 했다. 심지어 어떤 지역은 고대사부터 중세를 지나 근·현대를 거쳐, 모든 시간대에서 일어났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담고있기도 했다.

이런 내 여행 기질은 남들과는 조금 다른, 답사 개념의 제주여행이다보니 어디를 가든 배경지식이 꼭 필요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시중에 출간된 제주여행 관련 여행책, 여행에세이, 답사기행문, 제주신화 등을 자주 읽었다. 각각의 책들은 모두 영양가가 높았지만, 그만큼 아쉬운점이 있었다. 이런 책들은 기본적으로 제주 여행과 제주 역사, 제주 문화, 제주 풍속 등을 한데 엮어놓은 책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은 ‘여행’을 중점으로 쓴 여행책인반면, 어떤 책은 제주의 ‘신화’를 담은 역사서, 또 어떤 책은 제주의 근현대사를 담고 있는 역사서 등등. 오롯이 하나의 카테고리 기준으로 쓰여진 책들이었다. 즉, 내가 원하는 제주 여행지, 역사 유적지, 제주 문화나 풍속 등을 전부 알고자 한다면, 이 모든 책들을 전부 읽어야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많은 책들을 읽었기도 했고. 앞으로도 더 읽을 예정이기도 했고.

그런데, 존버는 승리한다고 했던가! 이번에 제주 여행과 제주 역사, 제주 문화, 제주 풍속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제주 여행책이 나왔다. 음 여행책이라고 하기엔 교양서 개념이 더 강하니, 제주 여행 에세이라고 해야하나?

감히 말하건데 이 책은 명실공히 제주 백과사전이다.

극찬을 해도 부족하지 않을 이 책의 이름은 『신비 섬 제주 유산』이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는 조금 놀랐었다. 두께가 솔찬히 있었으니까. 두께만 보면 약간 벽돌책 느낌이랄까? 시중에 출간된 일반 제주여행책이나 여행에세이, 제주 신화 역사책 등이랑 비교해봐도 이 책만큼 두께가 두꺼운 책은 흔치 않을 것 같다. 아 그렇다고 범접하기 어려운 책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글 자체가 읽기 쉽게 쓰여져있으니까.

아! 갑자기 떠올랐는데, 이 책의 저자 ‘고진숙’님은 초면이 아니다. 저자의 저서 중 하나인 『제주 4.3을 묻는 십대에게(서해문집)』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렵다면 어려운 현대사, 그것도 현재 진행형인 제주4.3사건을 청소년에게 알려주는 책을 썼다는 건, 저자가 쓰는 글은 읽기 쉬운 글이자, 이해하기 쉬운 글이라는 이야기다.

다시 『신비 섬 제주 유산』으로 돌아와서. 저자의 전작들은 대체로 제주와 관련된 책들이다. 그 이유를 단순하게 찾자면 저자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고씨 성을 가진 저자. 제주 고씨. 제주 역사속에 오랜 기간 있었던 탐라국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삼을나를 떠올리면 쉽다. 삼을나는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 사람을 말하며, 탐라국을 건국한 시조로 보면 된다. 한마디로 제주 고씨, 제주 양씨, 제주 부씨의 시조들. 저자는 이런 역사를 지닌 제주 고씨다.

이쯤에서 제주 역사를 들여다보면 아래와 같다. 짧게 요약한다고 요약했지만, 그럼에도 길다면 길다.

제주 역사 타임라인

주호국

3세기 무렵 쓰여진 진수의 『삼국지』에는 제주를 ‘주호’라 불렀다. 탐라국이 1세기 무렵 세워졌으니, ‘주호’는 탐라 초기 이름이라 할 수 있다.


탐라국(~통일신라)

‘탐라’라는 이름이 역사 속에서 등장한 건 5세기 무렵 쓰여진 『삼국사기』다. 백제 제후국으로 등장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신라 조공국이 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만해도 ‘탐라’는 신라를 괴롭히는 9대 오랑캐 중 하나였다(황룡사 9층 목탑). 탐라가 신라 조공국이 된 후, 신라는 정식으로 ‘탐라’라는 국호를 내린다. 뿐만 아니라 탐라를 지배하는 직위인 ‘성주’와 ‘왕자’도 신라 귀족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성주 및 왕자 가문은 제주 고씨가 세습하고 있었다.


고려(~무신정권)

신라 멸망 후 고려가 건국되었다. 탐라는 이 때도 고려에 조공하며 제후국이 되었다. 하지만 1105년 고려 숙종 때 탐라는 고려에 강제 합병되며 ‘탐라군’이 되어버렸다. 고려 행정구역이 되면서, 중앙정부 지방관도 파견되었다. 단, 고려 중앙정부도 탐라의 ‘성주’와 ‘왕자’ 직위를 인정한다. 탐라민들을 수탈하는 지배계층이 성주와 왕자에 이어 지방관(고려정부)도 포함되었다. 무신정권 시기 제주 고씨가 세습하던 ‘왕자’ 직위가 제주 양씨에게 넘어간다. 1223년 고려는 ‘탐라’를 ‘제주’라는 이름으로 승격시켰다.


고려 후기(~원 간섭기)

1270년 대몽항쟁이 시작되었다. 여몽연합군에 밀린 삼별초군은 밀리고 밀려서 제주에 도착했다. 친원파였던 제주 양씨가 삼별초에 의해 몰락했다. 본토에서 온 문벌귀족 문씨 가문이 제주 고씨 가문과 결혼동맹을 맺고, ‘왕자’직위를 세습하기 시작했다. 원은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제주를 원나라 직할시로 만든 뒤 말 목장 등을 직접 관리한다. 1295년 원은 제주를 간접지배방식으로 바꾼다. 제주민들을 수탈하는 지배계층이 어느새 고려정부, 성주 및 왕자 가문에 원나라까지 포함되었다. 원나라가 망한 뒤, 고려 말에 일어난 ‘목호의 난’은 원의 철수를 반대한, 친원 목장주들이 일으킨 난이다. 최영장군이 진압했다.


조선(~중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했다. 조선은 제주를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이라는 3개의 행정구역으로 분리했다. 제주 성주 및 왕자 가문도 폐지했다. 1445년 제주에는 중앙정부를 제외한 기득권층이 사라졌다. 기득권층이 사라졌다고 해서 제주민 삶이 나아지진 않았다. 중앙정부는 제주에 토지세를 면제해주는 대신 과도한 진상을 요구했다. 중앙정부가 요구한 대표적인 진상품으로는 말, 귤, 전복등이 있었다. 과도한 진상으로 인해 제주 남자들이 제주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제주에 여성 노동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제주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반토막나자, 인조 때 이르러 제주에 ‘출륙 금지’ 시행령이 반포되었다. 이는 약 200년간 지속된다.


조선(~후기)

출륙금지령이 지속된 상황에서 엄청난 기후변화로 인해 제주사람들이 굶어죽시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사태의 시급성을 인정하고, 제주에서 상업을 허용했다. 이때 나타난 이가 거상 김만덕이다. 뿐만 아니다. 제주는 고려말 부터 유배지 핫플레이스(!)였다. 특히 조선 중기이후부터는 격화된 당쟁으로 수많은 유학자 및 왕족들이 제주로 유배를 왔다. 당시 제주는 여성 노동이 중심인 사회였고, 따라서 제사권과 재산권도 여성이 중심이었다. 본토와는 매우 이질적인 다른 문화를 지닌 섬이였다. 하지만 유배온 유학자들로 인해 유교가 전파되었고, 이는 제주에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특히 남아선호사상 등 여성차별을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근현대

일제강점기는 제주를 수탈하는 지배계층이 일제로 바뀌었을 뿐, 제주 사람들의 삶이 크게 달라진건 없었다. 탐라, 조선, 고려 모든 시기가 제주민들에겐 수탈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제주 당시 제주 해녀들은 항일운동 및 노동운동을 진행하며 일제에 저항했다. 그렇게 한반도가 해방되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생겼다. 하지만 제주는 그때도 제대로된 독립을 맞지 못했다. 그들을 기다린건 대다수의 제주인이 학살된, 제주4.3 사건이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월별로 추천하는 제주 여행지와 관련된 역사 및 문화 등을 소개한다. 제주 역사·문화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나였것만, 그럼에도 초면인 내용들이 나와서 포스팅에 옮겨본다.



2월: 신들의 교대 기간, ‘신구간’에 이사하는 이유

제주에는 1만 8천 신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 그 흔적이 바로 ‘신구간’이다. 일정 기간 동안 신이 이 땅에 없으니, 어떤 일을 해도 동티날일이 없다. 그러니 이사를 간다면 이때 가라. 뭐 이런 느낌이다. 이 내용은 분명 초면인데, 이상하게도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일본사에도 관심이 많은 터라, 일본 역사 문화에도 조금 많이 알고 있는 편인데, 일본에서도 제주 신구간과 비슷한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신구간은 절기상 대한 후 5일째부터 입춘 3일 전까지 7~8일 동안 이어지는 구간이다. 대략 1월 25일부터 2월 1일까지가 신구간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신들의 교대 기간이라서 세상에 신들이 없다고 한다. 신구간이란 ‘신의 교대 구간’이라는 말의 줄임말 쯤된다. p 071

자연재해가 많고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 인간들은 모든 재앙과 생로병사를 신이 주관한다고 믿었다. 신들은 결코 관대하지 않다. 신들의 땅인 제주에선 더욱 신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두려워해서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사람이 사는 집 또한 온갖 신들의 영역이었다. 만일 잘못해서 인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노하게 되면 동티가 난다. 이 두려운 통이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제주 사람들을 구원한 시나리오가 ‘신구간’이다. p 072

옆 나라 일본은 음력 10월을 ‘신없는 달(칸나즈키)’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일본 팔백만 신들은 음력 10월에 ‘이즈모 타이샤’에 모여서 이른바 회합을 한다. 해서 이즈모 지역을 제외한 일본 전역은 음력 10월을 ‘신없는 달(칸나즈키)’라고 부르는 반면, 팔백만 신이 모이는 이즈모에선 ‘신있는 달(카미아리즈키)’ 라고 부른다.

 

과학적으로 신구간은 증명 가능한 신의 부재기간, 엄밀하게 말하면 동티를 피할 수 있는 시기이다. 제주학 연구자인 제주대학교 윤용택 교수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 평균 기온이 5~20℃ 이상이면 여름, 5℃ 미만이면 겨울이라는 계절분류를 가지고 1971년부터 (…). 분석결과 제주에는 일평균 기온 5℃ 이하인 날이 한 해 8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지금 우리가 부르는 신구간과 거의 일치하는 8일이었다. 기온이 5℃ 밑으로 내려가면 세균들이 활동을 할 수 없다. 그런데 5℃ 이상이면 세균이 활개를 펴 사람들을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게 하고 (…).” - 제주도 ‘신구간’ 풍속에 대한 기후 환경의 이해, 탐라문화 29호

p 073

촘촘하고 단단하고 납작한 초가지붕인 데다 온도와 습도가 다른 지역보다 높기 때문에 제주의 가옥은 온갖 세균과 벌레가 살기 좋은 환경이다. 게다가 집집마다 통시라고 하는 돼지우리 겸 화장실을 두고 살았다. 통시에서 나오는 거름을 쌓아 두었다가 늦가을에 보리 파종을 할 때 썼다. 이렇게 쌓은 낟가리를 ‘눌’이라고 하는데, 제주 사람에겐 이것 또한 두려운 존재라 제주에는 눌굽지신이 살고 있다. 이런 가옥 구조 때문에 제주에선 신구간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던 거이다. 제주 사람들이 ‘신들의 교대 시간’을 알아낸 것은 그야말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p 076

어떤 신화든 그냥 신화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그 신화속에는 과거의 현재가 들어있다. 예컨데 건국신화가 만들어진 이유는 건국의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다. 제주의 신구간도 그렇다. 변화무쌍한 제주 날씨 속에서 별 탈 없이(이른바 동티나지않게) 일을 할 수 있는 기간을 보다 빠르게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우리 조상들은 신화를 만드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4월: 삼별초여, 애기업개 말도 들어라 (부제: 탐라 왕자?!)

난 개인적으로 삼별초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고려 중앙정부가 원과 강화교섭한 이후의 삼별초 행보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권력을 놓지 못한, 무신정권의 잔재라고 본다. 이런 삼별초를 드높게 평가했던게, 과거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 출신 박정희 정권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뭐. 무엇보다 제주도로 간 삼별초가, 제주 사람들에게까지 버림받은 점만 봐도 삼별초는 민초들의 대몽항쟁이 아닌, 권력을 놓지 못한 무신들의 발악이라 볼 수 있다.

김통정 신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애기 업개 이야기는 왜 삼별초가 제주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망했는지 보여준다. 신화에 의하면 고려 정부군 김방경 부대가 항파두리성에 들이닥치자 성문을 닫았는데 그만 애기업개를 들여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화가난 애기업개는 김방경 부대에게 성문을 열 방법을 알려 주고 김통정의 탈출 통로와 그를 생포할 방법도 알려 준다. 결국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에 패배하고 만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에겐 이런 말이 있다. “애기업개 말도 들어라.”. p 139


김통정 신화에 나오는 “애기업개 말도 들어라”라는 대목이 의미심장하다. ‘애기업개’는 아기를 업은 사람, 아기를 돌보는 사람, 나이도 어리고 어리숙한 사람 등을 지칭한다. 즉 일반 민초다. 당시 제주에 진을 쳤던 삼별초는 제주 민초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제주에 남아있는 항파두리성 같은 삼별초 진지를 건설할 때 제주 민초들을 이용했으면서, 정작 삼별초는 제주 민초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거다. 원나라는 자신과 강화를 맺은 나라는 대우를 해주지만,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나라는 잔혹하게 짓밟는다는 것을. 고려조정은 원나라와 강화협상을 하면서 일명 〈세조구제(불개토풍)〉이라는 약속을 받아내고, 원나라 황실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제주도는 달랐다. 원나라 입장에서 제주도민은 삼별초를 도운 반역세력이다. 그렇게 여몽연합군(고려조정+원나라) 토벌대상에는 삼별초를 비롯해 제주도민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삼별초는 제주도민을 이용만하고 보호하지 않았으니, 과연 삼별초를 대몽항쟁의 상징이라고 부르는게 맞을까?

탐라 왕자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다면 탐라국 왕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할 것이다. 보통 우리가 아는 왕자란 그렇다. 그러나 탐라국에서 왕자는 왕의 아들이란 뜻이 아니라 2인자란 뜻이자 공동 지배자란 뜻이기도 하다. 제주는 보통 고, 양, 부 세개의 성씨가 탐라국을 만들어 다스려 왔다고 했으니 이들이 성주, 왕자 자리를 나눠 가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보다 복작하다. 확실한 것은 마지막 왕자 가문은 문씨 가문이란 것이다. 그 후손들은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 383번지에 탐라 왕자 기념탑을 만들고 제주 입도조인 문착을 비롯해어 탐라국 왕자들을 봉안하였다. p 127

제주에서 성씨를 가진 가문은 고, 양, 부 즉 탐라 건국 씨족을 제외하곤 없었다. 문씨 가문이 제주에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성주 가문이 중앙 정부에 줄을 대기 위해 끈질긴 노력 끝아 찾아낸 문벌귀족이었다. 제주에 들어와 일가를 이룬 사람들을 입도조라고 하는데, 탐라국 지배 가문 외에 성씨를 가진 첫 번째 입도조가 바로 이들이다. p 139

성주 가문과 왕자 가문은 고려, 원, 삼별초가 제주를 무대로 벌인 세계사의 격동 속에서 아슬아슬 줄타기에 성공했다. 원, 고려, 탐라국 성주, 왕자까지 가세한 층층시하 핍박으로 탐라국 사람들은 다시 고통속에 빠졌다. p 140

삼별초와는 별건으로 ‘탐라왕자’ 이야기는 오우, 놀라운 내용이다. 제주에 탐라왕자 묘소가 있다는 건 알았으나, 진짜 탐라국 왕자(대충 고려 병합 전) 묘소라고 생각했는데! 애초에 탐라왕자의 ‘왕자’는 일반적인 개념의 왕자가 아니었다. 무려 지배계급 직위였다. 심지어 조선 초까지 인정되었던....! 이야 이거 참. 우와. 심지어 세습된 직위였다는 거에 놀랐고, 세습한 성씨가 삼을나를 시조로 둔 고씨, 양씨에 이어 바다 건너 들어온 문벌귀족인 문씨까지 이어질 줄이야. 진짜 제주 역사는 새롭고 짜릿해★




4월: 백비는 일어날 수 있을까_제주4.3

제주의 4월은 더없이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제주에서 믿기지 않는 비극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4월에는 동백꽃이 진다. 그 모습이 마치 그날 하염없이 쓰러져 간 제주 사람을 닮았다 해서 제주 4.3의 상징 꽃이다. 당시 학살이 벌어졌던 장소로는 절벽, 폭포, 계곡, 바닷가나 움푹한 웅덩이가 많다. 시체가 쌓여도 치우지 않고 대량 학살이 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시체들이 바다에 버려졌다. 그 시기 제주 사람들은 갈치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p 162

제주 4.3의 시작은 미군정 시대였지만 정작 대학살의 시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였으니 놀랍게도 제헌헌법이 제정된 이후였다. 헌법은 ‘인간의 존엄한 권리’가 어떤 이유로도 침해될 수 없다는 것을 성문화한 것이다. 오로지 법류에 의해서만 이 권리를 제한할 수 있으며, 개인은 재팬받을 권리와 변호사로부터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1948년 대한민국은 제주 사람을 재판없이 처형했다. 그리고 학살에 살아남아 재판에 넘겨진 사람들에 대한 절차 역시 법률을 따르지 않았다. 어떻게 군인이 국민을 향해 ‘초토화 작전’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국가가 국민을 단지 무장대와 내통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피난처를 구해 주지도 않고 삶의 터전을 불태워 없애고, 젊은 사람이란 이유로 처형한단 말인가. 어떻게 국가가 어린아이와 노인, 임산부 등 노약자와 비무장 민간인을 단지 무서워서 숨었단 이유로 처형한단 말인가. 헌법을 위반한 것은 국가였다. p 169

평화공원에 있는 ‘비설’이라는 모녀상은 대대적인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던 1949년 1월 6일, 두 살배기 딸을 안고 눈 덮인 거친오름 쪽으로 피신 도중 희생당해 눈 더미 속에서 발견된 엄마와 아이를 기리고자 설치된 조형물이다. 차디란 겨울, 더 이상 오를 데도 없이 산으로 올라야 하는 절박함,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아이를 안은 엄마의 절망이 오롯이 느껴진다. 엄마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준단 말인가. 그저 자장가를 불러 주는 게 고작이었으리라. p 172

 

제주 4.3 사건 관련해서 많은 포스팅을 해왔으니, 여기서는 가타부타 하지 않기로.




몽골이 남긴 제주 유산

원 간섭기 당시 고려와 원은 서로의 풍습이나 문화 등 여러방면으로 교류를 했다. 그 흔적이 알게모르게 우리 일상에 많이 스며들었다. 그런데! 제주는 더했다. 원 간섭기 당시 제주는 본토와는 달리 원나라 직할 행정구역이었다. 그러다보니, 제주는 본토보다 원나라의 영향력이 더 강했고, 강했던 만큼 원나라의 풍습이 제주어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제주에 남아있는 몽고의 흔적은 대부분 초면이라, 여기도 정말 놀랍고 새롭고 짜릿하고★

메밀의 원산지는 타타르족의 주 무대였던 동아시아 북부 바이칼호, 만주, 아무르 강변 일대에 걸친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그래서 메밀은 타타르 메밀이라 불리기도 하고 씨앗의 형태가 삼각형이라 삼각형쌀이라 불리기도 한다. 메밀 원산지에서 아주 먼 제주로 메밀 씨앗을 들고 온 이들은 몽골인들이다. 물론 메밀만이 아니라 한국에 가장 많은 외래 식물이 들어온 때가 원 간섭기였다. 전해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몽골인들이 탐라총관부를 설치한 이후 탐라 사람들의 기질을 억누르기 위해 메밀농사를 장려헀다고 한다. p 199

비록 몽골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메밀을 전했든 간에 제주 사람들에게 메밀은 아주 고마운 음식이다. 쌀농사가 불가능한 제주에서는 보리농사가 흉년이면 재앙이나 다름없다. 그런 제주 사람들을 구한 것이 메밀이다. 메밀은 아무렇게나 둬도 잘 자라고 특별히 거름이 필요하지 않으며 병충해에도 강하고 생육기간도 석 달이면 충분하다. 가을에 수확한 메밀로 보릿고개를 넘겼다. p 200

메밀음식 말고도 제주 음식 문화에서 몽골의 유산은 꽤 많다. 제사 음식중에 상애떡이란 것이 있는데,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서 찐 빵이다. 상애떡은 쌍화점이란 고려가요에서 나오는 상화라는 중국식 만두가 제주에서 변형되어 만들어진 떡이다. (…) 제주의 음료 중에 쉰다리라는 것이 있다. 먹다 남은 밥을 발효시켜 먹는 음료로 몽골의 타라크에서 나왔다. 수애(순대)는 몽골 군인들의 야전식량인 게데스에서 나온 것이다. 몸국과 같은 탕도 슐랭이라고 하는 몽골 음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p 202

특히 제주 조랑말 역사는 정말 와우. 결과적으로 제주 토종말은 원간섭기 이후로 사라졌고, 현재 남아있는 제주말은 제주 토종마+원나라 말이 교잡종이라는게 참. 이런 제주 조랑말이 조선시대에는 주요 진상품이라, 제주민들 수탈하는 또 하나의 족쇄였다는 사실에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확실한 역사 기록으로는 1073년과 1258년 탐라에서 고려 정부에 제주마를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원나라가 말 목장을 제주에 만들면서 몽골의 말이 들어왔지만 그 말은 엄격하게 관리되었기 때문에 제주 말과 섞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목호의 난으로 제주의 말 목장은 사실상 방치되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목호의 난이 벌어진 지 불과 50년도 못되어서 말을 관리하는 기관인 병조에서 “제주 목장의 말이 날로 키가 짧고 작아진다”고 우는 소리를 한다. (…) 목호들이 전부 사라진 후 말들은 방치되었고, 제주 전통 말과 섞이면서 유전적으로도 다른 말이 나타났다. 이 말이 조랑말이다. p 329

조랑말은 ‘조르모르’라고 하는 몽골말에서 나온 것인데, 조르모르는 기동력을 얻기 위해 어릴 때부터 말의 다리를 묶어서 훈련시키는 기법이다. 제주 조랑말은 이런 흔적을 갖고 있지만 훨씬 왜소하다. 제주 전통 말은 과하마 또는 토마라고 하였다. 과하마란 몸집이 작아서 과수나무 밑을 갈 수 있는 말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는데 고구려에서 유민이 들어오면서 같이 온 것을 보인다. 이 말이 제주에서 몽골 말과 교잡이 이뤄지면서 조선 초 조랑말로 새롭게 등장한 듯하다. p 329

말은 제일 먼저 제주에서 선정된 진상품이었다. 매해 200필은 기본으로 바쳐야 했고 임금이 탈 말도 20필 씩 매해 바쳐야 했다. 무슨 제사는 그리 많은지 그때에 맞춰 바쳐야 했고, 혹시 날이 날지 모르니 여분의 말도 있어야 했다. (…) 제주 말 목장의 총 책임자는 목사와 그 아래 층층시하 관리들이었지만 실제 말을 기르는 사람은 목자였다. 이 목자를 제주에선 테우리라고 한다. 테우리는 목자란 뜻의 몽골어이다. 테우리는 나라에서 정한 책임을 벗을 수가 없다. 벗고 싶으면 다른 사람에게 그 역할을 넘겨야 한다. 하지만 워낙 일이 고되어서 제주에서도 가장 천한 일로 여겨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았다. p 332

 

고렴(조문), 고적(부조떡), 구덕(바구니), 복닥(껍질, 모자), 허벅(동이), 호랑(처마), 술(줄), 살래(찬장), 눌(낟가리), 촐래(반찬) 같은 제주어는 몽골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안채와 바깥채를 제주에서는 안거리, 밖거리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쓰이는 ‘거리’도 몽골 전통 천막인 ‘게르’에서 빌려 온 말이다. ‘웡이자랑’도 몽골의 자장가였다고 한다. 몽골어 ‘모르’는 제주어 ‘ ’로 정착된다. ‘혼저’도 ‘빨리’라는 몽골어에서 유래했고, 아기, 마누라 등도 몽골어라고 한다. p 374

정말 제주민들은 섬 내 지배계급에 치이고, 본토 사람들에 치이고, 외세에 치이고. 다시금 느끼지만 제주민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탈의 역사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모진 수탈과 핍박을 견뎌가며, 제주 역사·문화를 지켜온 제주도민들이다. 물론 출륙금지령이라는 대외적인 요소로 인해 제주를 나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어떤 이유로든, 자의든 타의든 본토와는 다른 제주 역사·문화를 만들어온 것은 제주도민들이며다. 본토와는 다른 문화로 제주는 본토 사람들에게 여행지로 각광받게 되었고,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행지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 제주에 외지인이 많이 유입되면서, 제주의 역사·문화가 사라져가고 있다. 지자체에서도 꽤 오랜기간 경제를 부흥시키고자 외지인 유입에 혈안을 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요즘 제주 곳곳에서 그들의 문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불씨가 보인다는 점이랄까? 부디 제주가 제주답게 있을 수 있기를.

올 겨울에는...뿡뿡이와 동백꽃보러 제주여행에 도전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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