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소철나무
도다 준코 지음, 이정민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덮고 난 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면서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라며 웃을 수 있었다.

이토록 먹먹함을 주는 소설이라니...

 

'소다 마사유키'는 서른두 살의 조경사다. 그는 젊은 나이임에도 머리는 새하얀 백발이고, 온몸에 화상 흉터가 남아 있고 화상 휴유증으로 제대로 몸을 쭉 펴지도 못한다.

그는 '시마모토 료헤이'가 갓난아기였을 12년전 부터 료헤이를 돌보고 먹이는 등 정성껏 보살펴 왔다. 마사유키는 료헤이의 할머니인 후미에로부터 인간 이하, 아니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했지만 과거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12년 동안 꾸준히 성실하게 그들 곁에서 돕고 살아왔다.

마사유키를 무척이나 잘 따르던 료헤이는, 7개월 전 마사유키의 과거를 알고 난 후 반항하며 엇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마사유키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7월 7일을 앞두고 새로운 꿈을 꾼다.

그런데... 7월 7일을 닷새 앞둔 7월 2일 밤, 갑작스럽게 후미에가 세상을 떠나고, 마사유키는 꿈꾸었던 미래를 접고 료헤이를 자신의 집에서 키우기로 결심한다.

 

- p. 51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13년간, 바보처럼 그날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 꿈은 사라졌다.

 

- p. 81

언젠가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그러나 먼 훗날의 일이다. 료헤이가 자라서 세상 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 후여야 한다. 과연 그때 료헤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마사유키는 지독하게 성실하고, 지독하게 우직하고, 지독하게 착한 남자다. 12년간 후미에가 지독하게 뿜어대는 악의와 인간 이하의 취급에도 자신의 잘못이라며 늘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다. 료헤이의 일에도 마찬가지다. 엇나가기 시작한 료헤이의 행동에 다른 이들에게 늘 사과하고 머리를 숙이는 건 마사유키였다. 료헤이의 부모를 죽음으로 내 몬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그는 그렇게 늘 자신을 낮추고 사과하며 살아왔다.

오로지 7월 7일, 그날을 기다리고 꿈꾸며 말이다.

 

- p. 192

계기는 당신 아버지가 사람을 죽인 거래.

그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마나베 마이코가 우리 엄마 아빠를 죽였대.

 

그래, 7월 7일은 마나베 마이코가 만기출소를 하는 날이었다. 오랫동안 그날만을, 마이코의 출소를 기다려온 마사유키는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기만을 꿈꿔왔던 것이다.

그러나 료헤이는 화가 났다. 자신에게 너무 잘해주었던, 그래서 자신이 너무도 좋아했던 마사유키가 자신의 부모를 죽게 한 여자 때문에 자신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 여자가 곧 세상에 나오고 마사유키가 그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났다.

그리고 그런 료헤이에게 마사유키는 긴 시간동안 말하지 못했던, 자신과 마이코, 부채집에 대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난봉꾼 집안에서 태어나 어머니 없이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자란 마사유키는, 한번도 그들에게서 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살아온 게 너무 당연해서 마사유키는 외롭다는 것조차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런 마사유키에게 마이코는 하나의 구원이었다. 그러나 마사유키는 마이코 속의 아픔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그리고 결핍되고 절망한 이들은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마사유키의 기억 속 조각 조각 등장했던 이야기들이 하나의 형체를 이루고, 사건의 진짜 전말이 등장하고, 그렇게 인물들의 상실과 절망, 아픔이 여과없이 드러나자 참 슬프고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이 우직하고 착한 사람 때문에 다행이었다. 참 다행이다 싶었다.

이 안도감 때문에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정말 굉장한 소설이었다. 한동안 백발의 마사유키가 떠오를 것 같다. 백발의 마사유키가 진정으로 행복해 하는 웃음이 오랫동안 내 마음 안에 머무를 것 같다.

 

- p. 420

처음으로 사람 앞에서 울었다. 개라서 다행이다, 바보라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1년 1월 22일 타계한 박완서 작가님의 9주기를 추모하며, 작가정신에서 그녀의 소설, 산문, 동화에 수록된 서문 및 발문 67편을 망라하여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사실 작가님의 성함이야 모를 수가 없을 만치 워낙 유명하시지만, 이상하게 책을 읽어본 기억은 없다. 방송에서 많이 소개되기도 하였지만, 워낙 자극적인 책을 좋아하던 나였던 터라 작가님의 책을 차일피일 미루지 않았을까 싶다.

 

우선 조금 놀랐다. '작가의 말'을 엮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훌륭한 한편의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각각의 글들은 마치 한 편의 에세이 같았다. 해당 책에 관한 이야기도 있지만, 작가로서 지향하고자 하는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아 더 마음이 따뜻해졌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 해방을 맞이하고, 또 6.25.전쟁 발발과 1.4. 후퇴까지... 그야말로 역사의 산증인인 작가님은 자신이 겪은 일을 혼자만의 기억이 아니라 밖으로 끄집어내어 우리가 생각하고 알아야 할 이야기로 만들어내셨다. 그리고 역사를 딛고 잘살게 된 우리가 추구했으면 하는 모습도 소설 속에 녹여 내셨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개정판 서문 작가의 말에서, "안일주의의 무자비한 '모르는 척' 등을 집요하게 드러내 보인 건 작가의 몫이었지만, 독자의 몫은 그것을 넘어서 정말 있어야 할 삶의 모습을 꿈꾸는 것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게 나의 꿈이다."라는 부분을 읽고, 작가와 독자의 몫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작가님이 쓴 동화에 대해서는 사실 알지 못했는데, 꽤 여러 편의 동화를 쓰셨더라. 작가님은 손자에게 들려 주려고 동화를 만들었다며 읽는 사람들에게 "어린 날에 받았던 사랑의 기억처럼 아련히 떠올라 위안과 용기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휘청거리는 오후> 부분을 읽다가 이 소설이 신문소설로 매회 독자로부터 상당한 간섭을 받았다는 걸 보고는 웃음도 났다. 요즘 드라마를 보고 네티즌들이 출격하는 모양새와 같이 예전에도 소설에 간섭하는 광팬, 아니 광독자들이 존재했구나 싶어 말이다.

 

하지만, 글들을 통해서 보여지는 박완서 작가님은 매사 겸손하고 따뜻했다. 책을 낼 때마다 출판사 직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책이 혹여나 활자 공해가 되지는 않을지, 출판사에 누를 끼치지는 않을지를 걱정한다.

그리고 소설 속에 삶을 대한 반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고 꿈꾸는 지극히 보수적인 이야기꾼이셨다.

 

"내가 쓴 글들은 내가 살아온 시대의 거울인 동시에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다. 거울이 있어서 나를 가다듬을 수 있으니 다행스럽고, 글을 쓸 수 있는 한 지루하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뿐이다.(p. 139)"라고 말했던 작가님.

이제는 그녀의 새로운 문장은 볼 수 없지만, 여전히 이렇듯 남아있는 문장으로부터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된다.

 

올해는 차근차근 박완서 작가님의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다. 그녀가 건네는 따뜻한 문학의 힘을 나도 느껴볼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랑낭자 뎐
이재인 지음 / 연담L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 재밌다. 로맨스도 있고, 판타지도 있고, 미스터리도 있다.

주인공들도 매력적이다. 제사를 주관하는 귀비의 아들로 천한 무당의 피를 이어받았다 하여 반쪽짜리 왕자로 불리는 비운의 왕자 무영과 정체를 알 수 없지만 갓난아기 때부터 무영이 돌보는 해랑이 좌포청 종사관 최주혁과 우포청 종사관 강수환과 함께 한양 내에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해결한다. 

 

새로운 왕 이광이 즉위하고, 궁에는 피바람이 몰아친다. 왕은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만든 후궁들을 죽이고 그 자식들은 유배보낸다. 그리고 삼년 전 궁을 떠난 자신의 이복형제인 무영을 궁으로 불러들인다.

무영은 선왕과 귀비의 아들로 사령을 볼 줄 알았다. 무영과 함께 온 해랑 역시 사령을 볼 줄 알았고, 사람들 역시 이들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고 얼마 후 광통교에서 여인의 시신이 떠올랐고, 시신을 검안한 검험의관 공씨는 그 날 이후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무영을 찾아와 하소연한다.

광통교는 이 사건이 있기 전부터 귀신이 나오는 다리라고 하여 해가 지면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었고, 광통교 인근에 점포를 둔 상인들마저 겁을 먹고 무영을 찾아온다.

한편, 인근 동네에서는 부녀자 실종사건이 발생하고 결국 광통교에서 발견된 여인과 실종된 여인이 동일인물임이 밝혀진다.

피해자를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장마가 끝나고 찾아온 무더위, 많은 상인들이 물을 긷는 피마길 우물에서 죽은 사람이 둥둥 떠오른 채 발견된다. 이후 폐쇄된 우물물이 밤이면 붉은 빛으로 변하고 그때마다 근방에 피비린내가 진동한다는 흉흉한 소문도 떠돈다.

임금에게 사건 해결을 명 받은 무영은 해랑과 함께 우물을 찾아가고 그 곳에서 악귀가 된 피해자의 사령을 만난다. 혼이 남긴 흔적을 따라 조사를 시작하는 무영과 해랑, 그들은 범인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외에도 여러 기괴한 사건들이 발생하고 무영과 해랑은 좌포청 종사관인 주혁, 우포청 종사관인 수환을 도와 사건 해결을 돕는다.

 

이야기는 한양에서 일어나는 여러 미스터리하고 기괴한 일들의 배후에 한 사람을 지목하며 흥미를 더해간다.

거기에 무영이 한양을 떠나게 만들었던 사건과 관련한 숨겨진 진실과 배후까지 드러나며 점점 긴장감이 고조된다.

강렬한 카리스마를 지닌 방탕하고 심보 고약한 왕, 왕의 곁에서 비위를 맞추며 충성하는 듯 하지만 비밀을 지닌 응족 수장 민도식, 무영과 해랑에게 잘 해 주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셋째 왕자 진원대군까지 주인공에 대응하는 세력들은 막강한 힘을 지녔다.

무영을 물심양면 돕는 정 행수, 그와 함께 사건을 해결하며 배후에까지 다가가려는 주혁과 수환은 무척 믿음직스럽다.

 

로맨스 있다. 무영이 한양을 떠난 이유, 그럼에도 무영과 해랑 사이의 미묘한 마음들이 "제발 사랑하게 해 주세요..."를 마음 속으로 외치게 한다.

판타지 있다. 무영과 해랑이 사령을 볼 줄 안다는 것 외에도, 이 소설에는 '사람이 아닌 것'이 등장한다. 바로 민도식을 비롯한 응족, 그리고 호족이다. 민도식의 응족은 매, 호족은 호랑이가 본연의 모습이다.

미스터리 있다. 한양에 기괴한 사건들이 발생하고 그 사건을 해결하면서 그 뒤에 있는 큰 범인을 결국 잡는 이야기다. 그리고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무영, 해랑, 주혁, 수환은 오늘날과 비슷하게 검시 결과와 증거물 등을 토대로 범인을 추적해 나간다. 어떤 독자의 말처럼 조선판 CSI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역시나 재미있는 소설은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어떨까, 를 늘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 역시 그렇다.

남장 여자인 해랑(눈썰미 좋은 사람이라면 다들 여자인 줄 알지만... ^^ 실제 주혁과 수환도 이미 일찍 눈치챈 듯~), 비밀을 간직한 깊은 눈매를 지닌 비운의 왕자 무영, 그리고 우직한 주혁, 장난끼 많은 수환, 빼어난 외모를 지닌 셋째 왕자 진원대군, 강인한 인상에 카리스마 작렬한 왕 이광, 나쁜 놈 민도식, 뛰어난 검험의관 공씨 등등 매력적인 캐릭터도 한가득이다.

 

조금은 색다르면서도 익숙하고,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진지한 듯 하지만 흥미롭고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싶다면 <호랑낭자 뎐> 한 번 읽어보시길...

난 조만간 또 가상 캐스팅 하면서 이 책을 음미해 볼 듯 하다.^^

 

덧)

작가님의 작명 센스!! 책 속에서 '마음이 없는 자들'을 '사이고배수'라는 표현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바로 '사이코패스'를 저렇게 표현한 거였다.

 

p. 495

어떤 일들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간혹, 너무 정교하게 쌓아 올린 것들은 미세한 틈만 생겨도 와르르 무너지기도 하는 법이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던 아주 사소한 것.

-

어떤 사건들은 아주 작은 단서에서부터 실마리를 잡게 된다. 튀어나온 조각들은 또다시 저들끼리 아귀를 맞추어 증거를 만들어내는 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연의 신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0
손보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디어 랄프 로렌>이라는 소설을 통해 손보미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담담하고 조용하지만, 마지막엔 따스한 느낌을 주는 그런 소설로 기억이 난다. 또 어디까지가 실제인지 허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는 것도...

그리고 핀시리즈로 다시 만나게 된 작가의 이번 이야기 역시 담담하고, 조용하게 흘러간다. 그렇게 마지막엔 기존의 성격에서 조금 변화된 주인공들로 인해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졌다. '조니 워커'에 대한 이야기가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허구인지 역시 궁금해졌고...

 

소설 속 중심인물은 '그'와 '그녀'다.

'그'는 경찰청에서 3년을 근무한 뒤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 민간조사원으로 직업을 바꾼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일도 유능하게 처리하는 그에게 많은 유능한 변호사들이 일을 맡기고 싶어한다.

그는 일을 처리하는 자신의 능력이 '포화 상태'에 이를 즈음이 되면 휴가를 떠나 거의 말을 하지 않는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그 날도 그는 방콕으로 휴가를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공항으로 향하기 전 그는 유명 법무법인 대표 변호사의 부탁으로 미국에서 온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 남자로부터 프랑스 리옹에 가서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마지막 '조니 워커' 화이트 라벨을 가져와 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다.    

 

'그녀'는 열여섯 살 때 아버지가 있는 프랑스로 왔다. 파리에서 대학을 다녔고, 지금은 뉴욕의 첼시에 있는 예술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그녀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그러나 친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괴롭히는 쪽에 속했던 한국계 알리샤가 죽었으며 알리샤가 그녀에게 유품을 남겼으니 그걸 가지러 와 달라는 편지를 받게 된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녀는 처음에는 유품을 받으러 갈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며칠 후 첼시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를 눈으로 직접 보고 겪고는 리옹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알아본다.

 

그가 화이트 라벨을 찾으러 가는 곳과 그녀가 유품을 받으러 가는 곳은 동일한 곳이다. 알리샤의 집.

원래는 전혀 계획에 없었던, 그래서 우연이라고 혹은 운명이라고 볼 수도 있을 법한 그들의 리옹행은, 당연하게도 그들을 서로 만나게 한다.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통제하며 살아왔던 그들은 순간의 우연한 결정으로 원래의 생활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게 된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일처리를 자랑하던 남자는 자꾸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과는 다른 행동을 하게 되고,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다.

 

<우연의 신>이란 그리스 신화의 티케(Tyche)로, 행운의 여신 또는 운명의 여신이라고 알려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티케가 관장하는 운명이란 '우연히' 찾아오는 행복이나 불행이라고 한다.

그 '우연'이 행복을 가져다 줄 지, 아니면 불행을 가져다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그녀가 만난 것처럼 기존 삶의 패턴을 벗어난 알 수 없는 우연들이 겹치고 겹쳐서 만나게 되는 그런 것.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될 지는 아무것도 알 수는 없지만, 이런 우연한 만남과 사건들로 그들은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 후 그들이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오고 원래의 패턴으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말이다.

- p. 169, 작품 해설 중

티케에 의하면 운명은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생 전체를 두고 봤을 때는 찰나에 불과한 어떤 사건, 즉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에 의해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연의 신'은 인간의 삶이 계속 불행하거나 반대로 계속 불행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이 우연의 신으로 인해 누구나가 겪는 행복이나 불행은 그것을 겪는 시점에서 제 인생 전체를 반추할 정도로 무겁게 느낄 일이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어떤 행복이나 불행도 끝없이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 더불어 그것이 일어난 데에는 누군가 단독으로 행한 일만이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 이 엄연한 삶의 진실들은 너무나 자주 잊히고 간혹 우연히 한 편의 소설에서 불현듯 다시 마주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지
임선경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십 대의 내가 꼭 챙겨 보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낯선 곳에서 회사 연수를 받았던 그 금요일에도, 서울로 회사를 옮긴 후 원룸에 이사를 했던 그 금요일에도, 나는 자리를 지키고 앉아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을 시청했다.

결혼, 연애, 시월드, 고부갈등, 장서갈등 등 삶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사랑과 전쟁'을 통해 익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ㅋ

내가 애정해 마지 않던 프로그램의 작가였던 분의 에세이라니, "이건 꼭 봐야 해!"를 외치며 책을 펼쳐 들었다.

 

<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지>라는 제목처럼, 작가는 갱년기의 한복판에 서 있지만 그녀의 문장 안에 슬픔이나 좌절 같은 건 없다. 오히려 작가는 갱년기가 "각종 사회적 의무와 양육의 부담, 여성성의 멍에를 조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와 독립의 시기"라고 말한다.

 

작가에 의하면, 한해 한해 나이가 들수록 말하는 능력과 집중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지만, 그렇기 때문에 말을 거들어주는 조력자가 필요하고 사람들은 대화에 한꺼번에 참여하게 되는 등 어느 한 명이 대화를 독점하지 않는 '대화의 민주화'가 이루어진다. 아줌마들의 대화는 평등하고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 인터랙티브한 대화, 그래서 즐거운 수다라고 말이다.   

 

작가의 문장들이 많은 부분 공감되었는데(근데, 나는 아직 공감되면 안 되는 나이이긴 한데...ㅋㅋㅋ), 자녀와의 관계에 대한 문장들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보는 주변의 부모들은 대부분 자녀들에게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다. 아직 세상에 내놓을 만큼 아이들이 큰 것이 아니니 그럴 수도 있겠다만은, 가끔은 아이에 대한 과한 애정과 과한 보살핌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때도 있었다.

한 에피소드의 제목은 "나는 옛사랑과 한집에 산다"였다.

이야기인 즉슨,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에는 엄마와 아이의 관계는 엄청나게 가깝고 서로만을 바라본다. 그러나 아이가 조금씩 커갈수록 특히 사춘기에 직면해 갈수록 아이는 엄마의 손길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가 버린다.

그렇게 아이의 전부였던 엄마는 아이의 인생에서 구석자리로 몰린다. 늘 눈앞에서 알짱알짱 다니지만 자신에 대한 살뜰한 애정은 거두어간 옛 애인... ㅋㅋㅋ

처음에는 이런 변화가 슬프고 힘들기도 했지만, 이제 작가는 커 버린 아이들을 두고 친구들과 여행도 가고 자신만의 시간도 즐긴다.

 

얼핏 나이를 먹는 일이란 참으로 슬프고 우울한 일처럼 느껴졌다. 더이상 젊지 않고, 몸도 예전같지 않게 무겁고, 내 마음도 예전같지 않게 힘이 쭉 빠진다.

그런데 사실 더이상 젊진 않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남은 인생은 길다. 늙었어, 라는 불평이나 후회를 할 바엔 뭐라도 인생에 재미있는 일들을 하는 게 낫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요즘 제2의 인생을 즐기시는 어르신들이 참 많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충분히 유투버, 모델, 화가도 될 수 있다. 지금껏 못 해본 여러 운동을 시작해 볼 수도 있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볼 수도 있다.     

 

느긋하게 내 나이를 받아들이고, 여유있게 천천히 일상을 둘러보는 것도 좋지 싶다. 그렇게 재미있고 우아한 멋쟁이 할머니가 되는 것도 너무 좋은 미래의 모습이니까.

 

- p. 138

'언젠가'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 '언젠가'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언젠가에 대한 기대가 있는 삶과 없는 삶은 다를 것이다.

중요한 건 믿음이다. 훗날을 믿지 못하면 훗날을 상상할 수도 없다.

 

- p. 139

나이가 든다 해도 쇠락과 비움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롭게 채워지는 내일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내일을 믿으며 오늘을 산다. 연습이란 그런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