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 시절 소설Q
금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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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라는 표현은 잠시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였을까,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옛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내용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천진했던 어린 시절'일 것이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랐지만 말이다.

 

주인공 '상아'는 남동생 금성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해에 와 있었다. 그녀는 어느 채팅방에 얼떨결에 초대되었는데, 그 곳에서 옛날 알고 지냈던 '정숙'이 먼저 말을 걸었고 만나자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상아는 정숙과의 만남을 앞두고 옛 기억들을 차례로 떠올린다. 자신이 태어났던 고향, 그리고 고향에서 만나 함께 천진으로 갔던 '무군'을...

 

- p. 51

정숙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어느 정도 그 일을 마쳐야 한다고, 무군과 그녀를 기억해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닦달하고 있었다.

어쩌면 상아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아니 상아를 짚고 넘어가야 할지도 몰랐다.

 

함께 고향을 떠나 천진으로 갔지만, 상아가 무군을 사랑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어떻게 정확한 의사 표현을 하기 전에, 함께 천진으로 가서 일하자는 무군을 제안을 받아들였고 고향에서도 천진에서도 이들은 약혼자로 받아들여졌다.

 

작은 방에서, 적은 보수로 그리 녹록치만은 않은 천진 생활이었지만 상아는 무군과의 생활에 적응해 나간다. 무군은 성실하고 착하고 상아를 너무도 사랑해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상아는 별다른 미래에 대한 포부도 없이 이 생활을 영위하는 무군이 답답하다.

그러던 중 공장에서 만난 정숙과 그녀의 애인 희철을 알게 되고, 이들 네 명은 친하게 지내게 된다.

하지만 그녀들에 대한 사랑 외에는 별다른 비전이 보이지 않는 이들을 그녀들은 떠난다. 그들의 곁이 아닌 새로운 곳에서 이들은 자신만의 꿈을 꾸고자 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한때 그 시절을 함께 보내었던 정숙과 상아는 서로를 보며 과거 천진 시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만약을 묻는 상아에게 정숙은 말한다.

"아니, 후회하지 않을 거 같아. 다시 한번 선택하라고 해도 그렇게 살았을 거야."라고.

 

가만히 '시절'이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려 본다.

좋았던 기억도, 슬펐던 기억도 있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세상이 여전히 나를 편하게 한다거나 나에게 관대한 것은 아니라서 굳이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가끔 불현듯 떠올라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이 있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라거나, "그때 그렇게 말하고 행동한 게 후회되지?"라는... 아니면, 그저 단순하게 "아, 이런 일도 있었지."라거나...

 

그때가 떠오르고, 그때를 아무리 고민해도 해답은 없다. 우리 인생은 그냥 계속 앞만 향해서 나아가고만 있으니.

다만 문득 떠오른 그때를 이제는 편안하게 돌아볼 수는 있다. 어쩌면 지독히도 떨쳐 버리고 싶었던 슬픈 일이었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 p. 83

모든 익숙한 것들이 전부 사라지고서야 홀연히 내가 한번도 그것들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과거는 과거의 시제 속에 격리되어 있음을.

 

- p. 160

어떤 의미에서 사랑은 음식에 가해진 '알맞게 뜨거운 열기'였다. 사랑이 떠나면서 가지고 간 그 열기는 음식을 냉랭하게, 더이상은 맛없는 요리로 만들어버렸다.

 

- p. 175

만약이라는 게 없다는 거 아는데, 그래도 다시 한번 그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떨 것 같아요?

- 글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아니, 후회하지 않을 거 같아. 다시 한번 선택하라고 해도 그렇게 살았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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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시간 오늘의 젊은 작가 5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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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란 자꾸 변한다. 새로운 것이 생기기도 하고, 또 없어지기도 한다. 소설의 제목인 <도시의 시간>이란 건, 이렇게 도시가 변해가고 새로워져 가는 시간 속에 한때 발 딛고 살았던 어떤 시절의 이야기이긴 걸까?

사실 나는 내용에 대한 어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책을 펼쳤다.

 

책의 시작, 1954년에 태어나 1976년 '돌핀(Dolphin)'이라는 음반을 발표한 후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한 채 잊혀졌다가 2000년대 초입 음반이 재발매된 "제니 준 스미스"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대구에서 만난 네 명의 청춘, '배정', '나', '우나', '우미'가 등장한다. 대구에서 태어나 자란 사수생 배정, 배정과 같은 학원에 다니는 고등학교 중퇴생 '나', 그리고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한국으로 오게 된 '우나'와 '우미'는 나이는 좀 달랐지만 친구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배정은 우미를 좋아하고, 나는 우나와 친하게 지낸다. 물론 서로서로 다 친하긴 하다.

우나와 우미는 자매지만 성격은 조금 다르다. 우나는 집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만 우미는 밖으로 많이 나간다. 그래서 아는 사람도 많고 아는 장소도 많다.

우나는 책의 시작에 등장했던 '제니 준 스미스'를 좋아한다. 그녀에 대해 남겨진 정보가 크게 없음에도 여러 방법을 통해 준에게 더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공부한다.

우나에게 처음 준의 음악을 알게 해 준 건, 바로 그녀의 아버지 '송주영'이었다. 음악을 즐겨 듣던 송주영은 준의 음반을 우나에게 들려 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집을 나간 후 행방불명된 상태였다가 놀이터에서 얼어 죽은 채로 발견된다.

 

- p. 103

송주영은 우나에게 준을 남기고 갔다. 남기려고 애를 쓴 것은 아니다. 오래 함께 살면 무얼 남기려고 하지 않아도 많은 것들이 붙어 섞여 묻어 있게 될 것이다.

우나가 아는 준은 모두 송주영이 주고 간 것이다. 우나는 그걸 마음에 품은 채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한다.

 

우나는 자신이 어릴 때 생을 마감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혹은 뭐라 명칭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준'의 음악을 매일 듣고, '준'을 매일매일 생각하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건가?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고 사실은 추억 속에 빠진 채로...?

반면 우미는 조금 더 현실에 발붙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곳을 가는 걸까? 우미 역시 불안정해 보이긴 했지만...?

 

솔직하게 줄거리조차도 쉽게 적어지지가 않는 소설이었다. 내가 태어나 자란 도시 '대구'가 배경이었음에도, 네 사람의 나이가 나랑 비슷한 걸로 보였음에도, 그들의 주고받는 언어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도시의 시간은 흘러갔다. 도시에는 계속해서 아파트가 생겨나고, 한때 새로 개장해서 인파가 몰렸던 쇼핑몰은 이제 파리만 날린다.

도시의 시간은 흘러서, 한때는 늘 함께 붙어 다녔던 그들은 그 시절을 지나서 나이가 들었고, 지금은 함께 있지 않다.

 

- p. 79

나는 지금이 너무 선명하고 아깝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그림자처럼 벽에 붙어 있어도 모든 것이 선명해.

선명하게 슬프고 아프고 행복하고 즐거워.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지금뿐이었다.

 

작품 해설을 읽고도 제대로 이해가 안 되다니... 아직 난 멀었나 보다.

다만, 나는 그냥 이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새로 생기거나 혹은 있던 것을 없애 버리거나... 그렇게 도시의 시간은 흐르지만, 그 도시에서 나의 청춘을 함께 하고 내 마음의 모든 것을 붙잡았던 그 시절 느꼈던 선명한 아픔과 행복, 그리고 즐거움은 그 곳에 박제되어 내 마음 속 한 켠에 있을 거라고.

비록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떠나고, 그래서 앞으로 두번 다시 볼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이 소설은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이다.  

 

덧)) 이런 저런 말들을 적었지만, 또 생각해봐도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진 못한 것 같다.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읽어보면 그땐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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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소철나무
도다 준코 지음, 이정민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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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난 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면서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라며 웃을 수 있었다.

이토록 먹먹함을 주는 소설이라니...

 

'소다 마사유키'는 서른두 살의 조경사다. 그는 젊은 나이임에도 머리는 새하얀 백발이고, 온몸에 화상 흉터가 남아 있고 화상 휴유증으로 제대로 몸을 쭉 펴지도 못한다.

그는 '시마모토 료헤이'가 갓난아기였을 12년전 부터 료헤이를 돌보고 먹이는 등 정성껏 보살펴 왔다. 마사유키는 료헤이의 할머니인 후미에로부터 인간 이하, 아니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했지만 과거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12년 동안 꾸준히 성실하게 그들 곁에서 돕고 살아왔다.

마사유키를 무척이나 잘 따르던 료헤이는, 7개월 전 마사유키의 과거를 알고 난 후 반항하며 엇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마사유키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7월 7일을 앞두고 새로운 꿈을 꾼다.

그런데... 7월 7일을 닷새 앞둔 7월 2일 밤, 갑작스럽게 후미에가 세상을 떠나고, 마사유키는 꿈꾸었던 미래를 접고 료헤이를 자신의 집에서 키우기로 결심한다.

 

- p. 51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13년간, 바보처럼 그날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 꿈은 사라졌다.

 

- p. 81

언젠가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그러나 먼 훗날의 일이다. 료헤이가 자라서 세상 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 후여야 한다. 과연 그때 료헤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마사유키는 지독하게 성실하고, 지독하게 우직하고, 지독하게 착한 남자다. 12년간 후미에가 지독하게 뿜어대는 악의와 인간 이하의 취급에도 자신의 잘못이라며 늘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다. 료헤이의 일에도 마찬가지다. 엇나가기 시작한 료헤이의 행동에 다른 이들에게 늘 사과하고 머리를 숙이는 건 마사유키였다. 료헤이의 부모를 죽음으로 내 몬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그는 그렇게 늘 자신을 낮추고 사과하며 살아왔다.

오로지 7월 7일, 그날을 기다리고 꿈꾸며 말이다.

 

- p. 192

계기는 당신 아버지가 사람을 죽인 거래.

그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마나베 마이코가 우리 엄마 아빠를 죽였대.

 

그래, 7월 7일은 마나베 마이코가 만기출소를 하는 날이었다. 오랫동안 그날만을, 마이코의 출소를 기다려온 마사유키는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기만을 꿈꿔왔던 것이다.

그러나 료헤이는 화가 났다. 자신에게 너무 잘해주었던, 그래서 자신이 너무도 좋아했던 마사유키가 자신의 부모를 죽게 한 여자 때문에 자신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 여자가 곧 세상에 나오고 마사유키가 그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났다.

그리고 그런 료헤이에게 마사유키는 긴 시간동안 말하지 못했던, 자신과 마이코, 부채집에 대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난봉꾼 집안에서 태어나 어머니 없이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자란 마사유키는, 한번도 그들에게서 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살아온 게 너무 당연해서 마사유키는 외롭다는 것조차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런 마사유키에게 마이코는 하나의 구원이었다. 그러나 마사유키는 마이코 속의 아픔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그리고 결핍되고 절망한 이들은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마사유키의 기억 속 조각 조각 등장했던 이야기들이 하나의 형체를 이루고, 사건의 진짜 전말이 등장하고, 그렇게 인물들의 상실과 절망, 아픔이 여과없이 드러나자 참 슬프고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이 우직하고 착한 사람 때문에 다행이었다. 참 다행이다 싶었다.

이 안도감 때문에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정말 굉장한 소설이었다. 한동안 백발의 마사유키가 떠오를 것 같다. 백발의 마사유키가 진정으로 행복해 하는 웃음이 오랫동안 내 마음 안에 머무를 것 같다.

 

- p. 420

처음으로 사람 앞에서 울었다. 개라서 다행이다, 바보라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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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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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22일 타계한 박완서 작가님의 9주기를 추모하며, 작가정신에서 그녀의 소설, 산문, 동화에 수록된 서문 및 발문 67편을 망라하여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사실 작가님의 성함이야 모를 수가 없을 만치 워낙 유명하시지만, 이상하게 책을 읽어본 기억은 없다. 방송에서 많이 소개되기도 하였지만, 워낙 자극적인 책을 좋아하던 나였던 터라 작가님의 책을 차일피일 미루지 않았을까 싶다.

 

우선 조금 놀랐다. '작가의 말'을 엮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훌륭한 한편의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각각의 글들은 마치 한 편의 에세이 같았다. 해당 책에 관한 이야기도 있지만, 작가로서 지향하고자 하는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아 더 마음이 따뜻해졌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 해방을 맞이하고, 또 6.25.전쟁 발발과 1.4. 후퇴까지... 그야말로 역사의 산증인인 작가님은 자신이 겪은 일을 혼자만의 기억이 아니라 밖으로 끄집어내어 우리가 생각하고 알아야 할 이야기로 만들어내셨다. 그리고 역사를 딛고 잘살게 된 우리가 추구했으면 하는 모습도 소설 속에 녹여 내셨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개정판 서문 작가의 말에서, "안일주의의 무자비한 '모르는 척' 등을 집요하게 드러내 보인 건 작가의 몫이었지만, 독자의 몫은 그것을 넘어서 정말 있어야 할 삶의 모습을 꿈꾸는 것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게 나의 꿈이다."라는 부분을 읽고, 작가와 독자의 몫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작가님이 쓴 동화에 대해서는 사실 알지 못했는데, 꽤 여러 편의 동화를 쓰셨더라. 작가님은 손자에게 들려 주려고 동화를 만들었다며 읽는 사람들에게 "어린 날에 받았던 사랑의 기억처럼 아련히 떠올라 위안과 용기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휘청거리는 오후> 부분을 읽다가 이 소설이 신문소설로 매회 독자로부터 상당한 간섭을 받았다는 걸 보고는 웃음도 났다. 요즘 드라마를 보고 네티즌들이 출격하는 모양새와 같이 예전에도 소설에 간섭하는 광팬, 아니 광독자들이 존재했구나 싶어 말이다.

 

하지만, 글들을 통해서 보여지는 박완서 작가님은 매사 겸손하고 따뜻했다. 책을 낼 때마다 출판사 직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책이 혹여나 활자 공해가 되지는 않을지, 출판사에 누를 끼치지는 않을지를 걱정한다.

그리고 소설 속에 삶을 대한 반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고 꿈꾸는 지극히 보수적인 이야기꾼이셨다.

 

"내가 쓴 글들은 내가 살아온 시대의 거울인 동시에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다. 거울이 있어서 나를 가다듬을 수 있으니 다행스럽고, 글을 쓸 수 있는 한 지루하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뿐이다.(p. 139)"라고 말했던 작가님.

이제는 그녀의 새로운 문장은 볼 수 없지만, 여전히 이렇듯 남아있는 문장으로부터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된다.

 

올해는 차근차근 박완서 작가님의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다. 그녀가 건네는 따뜻한 문학의 힘을 나도 느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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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낭자 뎐
이재인 지음 / 연담L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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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재밌다. 로맨스도 있고, 판타지도 있고, 미스터리도 있다.

주인공들도 매력적이다. 제사를 주관하는 귀비의 아들로 천한 무당의 피를 이어받았다 하여 반쪽짜리 왕자로 불리는 비운의 왕자 무영과 정체를 알 수 없지만 갓난아기 때부터 무영이 돌보는 해랑이 좌포청 종사관 최주혁과 우포청 종사관 강수환과 함께 한양 내에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해결한다. 

 

새로운 왕 이광이 즉위하고, 궁에는 피바람이 몰아친다. 왕은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만든 후궁들을 죽이고 그 자식들은 유배보낸다. 그리고 삼년 전 궁을 떠난 자신의 이복형제인 무영을 궁으로 불러들인다.

무영은 선왕과 귀비의 아들로 사령을 볼 줄 알았다. 무영과 함께 온 해랑 역시 사령을 볼 줄 알았고, 사람들 역시 이들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고 얼마 후 광통교에서 여인의 시신이 떠올랐고, 시신을 검안한 검험의관 공씨는 그 날 이후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무영을 찾아와 하소연한다.

광통교는 이 사건이 있기 전부터 귀신이 나오는 다리라고 하여 해가 지면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었고, 광통교 인근에 점포를 둔 상인들마저 겁을 먹고 무영을 찾아온다.

한편, 인근 동네에서는 부녀자 실종사건이 발생하고 결국 광통교에서 발견된 여인과 실종된 여인이 동일인물임이 밝혀진다.

피해자를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장마가 끝나고 찾아온 무더위, 많은 상인들이 물을 긷는 피마길 우물에서 죽은 사람이 둥둥 떠오른 채 발견된다. 이후 폐쇄된 우물물이 밤이면 붉은 빛으로 변하고 그때마다 근방에 피비린내가 진동한다는 흉흉한 소문도 떠돈다.

임금에게 사건 해결을 명 받은 무영은 해랑과 함께 우물을 찾아가고 그 곳에서 악귀가 된 피해자의 사령을 만난다. 혼이 남긴 흔적을 따라 조사를 시작하는 무영과 해랑, 그들은 범인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외에도 여러 기괴한 사건들이 발생하고 무영과 해랑은 좌포청 종사관인 주혁, 우포청 종사관인 수환을 도와 사건 해결을 돕는다.

 

이야기는 한양에서 일어나는 여러 미스터리하고 기괴한 일들의 배후에 한 사람을 지목하며 흥미를 더해간다.

거기에 무영이 한양을 떠나게 만들었던 사건과 관련한 숨겨진 진실과 배후까지 드러나며 점점 긴장감이 고조된다.

강렬한 카리스마를 지닌 방탕하고 심보 고약한 왕, 왕의 곁에서 비위를 맞추며 충성하는 듯 하지만 비밀을 지닌 응족 수장 민도식, 무영과 해랑에게 잘 해 주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셋째 왕자 진원대군까지 주인공에 대응하는 세력들은 막강한 힘을 지녔다.

무영을 물심양면 돕는 정 행수, 그와 함께 사건을 해결하며 배후에까지 다가가려는 주혁과 수환은 무척 믿음직스럽다.

 

로맨스 있다. 무영이 한양을 떠난 이유, 그럼에도 무영과 해랑 사이의 미묘한 마음들이 "제발 사랑하게 해 주세요..."를 마음 속으로 외치게 한다.

판타지 있다. 무영과 해랑이 사령을 볼 줄 안다는 것 외에도, 이 소설에는 '사람이 아닌 것'이 등장한다. 바로 민도식을 비롯한 응족, 그리고 호족이다. 민도식의 응족은 매, 호족은 호랑이가 본연의 모습이다.

미스터리 있다. 한양에 기괴한 사건들이 발생하고 그 사건을 해결하면서 그 뒤에 있는 큰 범인을 결국 잡는 이야기다. 그리고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무영, 해랑, 주혁, 수환은 오늘날과 비슷하게 검시 결과와 증거물 등을 토대로 범인을 추적해 나간다. 어떤 독자의 말처럼 조선판 CSI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역시나 재미있는 소설은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어떨까, 를 늘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 역시 그렇다.

남장 여자인 해랑(눈썰미 좋은 사람이라면 다들 여자인 줄 알지만... ^^ 실제 주혁과 수환도 이미 일찍 눈치챈 듯~), 비밀을 간직한 깊은 눈매를 지닌 비운의 왕자 무영, 그리고 우직한 주혁, 장난끼 많은 수환, 빼어난 외모를 지닌 셋째 왕자 진원대군, 강인한 인상에 카리스마 작렬한 왕 이광, 나쁜 놈 민도식, 뛰어난 검험의관 공씨 등등 매력적인 캐릭터도 한가득이다.

 

조금은 색다르면서도 익숙하고,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진지한 듯 하지만 흥미롭고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싶다면 <호랑낭자 뎐> 한 번 읽어보시길...

난 조만간 또 가상 캐스팅 하면서 이 책을 음미해 볼 듯 하다.^^

 

덧)

작가님의 작명 센스!! 책 속에서 '마음이 없는 자들'을 '사이고배수'라는 표현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바로 '사이코패스'를 저렇게 표현한 거였다.

 

p. 495

어떤 일들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간혹, 너무 정교하게 쌓아 올린 것들은 미세한 틈만 생겨도 와르르 무너지기도 하는 법이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던 아주 사소한 것.

-

어떤 사건들은 아주 작은 단서에서부터 실마리를 잡게 된다. 튀어나온 조각들은 또다시 저들끼리 아귀를 맞추어 증거를 만들어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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