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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29
알베르 카뮈 지음, 최윤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평점 :
이 책을 읽기 전 편견이 있었다. 질병으로 인한 재난을 소재로 한 소설이니까, 영웅적인 주인공의 스펙터클한 이야기, 혼자 살기 위해 남을 해치는 비열한 인물들, 질병과 싸우는 사람들의 신파, 결국 질병을 이겨낸 사람들의 승리 등을 다룰 줄 알았다. 이런 편견 때문에 책 읽기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 일체의 과장없이 영웅주의 없이 담담하고 건조하게 이야기를 진행하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 건조한 문체 속에는 인간에 관한 통찰이 깊게 스며들어 있어 한 문장 한 문장을 주의깊게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알제리에 위치한 프랑스 도청소재지 오랑. 194x년 이 도시에 페스트가 돌고, 사람들은 죽어나간다. 도시는 폐쇄되고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번지며 도시는 절망에 빠진다. 그 가운데 의사 리유는 환자를 치료하며 자신의 투쟁을 전개하고, 타루를 비롯한 뜻있는 사람들은 ‘위생 보건대’를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환자들을 돕는다. 까뮈는 소설적 재미를 위해서 위생 보건대를 좀 더 극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글은 쓰지 않는다. 서술자는 그들을 영웅으로 과장하지 않을 것이라 못박아 적는다. 그런데 여기서 소설의 위대함이 두드러진다. 영웅주의 소설로 갔다면 이 소설은 그저 그런 통속소설이 되어버릴 뻔 했을 것이다. 이런 과장 없음은 오히려 인간의 모습을 보다 솔직히 보여주며, 우리에게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말이죠, 나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많은 연대 의식을 느낍니다. 나는 영웅주의라든가 성스러움 따위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신앙의 난제, 왜 신은 죄없는 사람에게 비극적 재난을 무차별로 가하는가, 에 대한 생각을 볼 수 있었다. 파늘루 신부의 강론 장면은 그 생각을 보여준다.
“죄 없는 자가 두 눈을 잃었을 때, 기독교 신자라면 신앙을 잃거나 혹은 두 눈을 잃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죠. 파늘루는 신앙을 잃고 싶지 않은 거고, 그는 끝까지 갈 겁니다.”
재난과 사고로 이유없이 죽는 사람들에 대한 신의 뜻. 제도로서, 과학의 발전으로서 재난을 막기 위한 인간의 선한 노력은 끝없이 추구하되 나머지는 신의 믿음에 맡겨야 한다는 것. 신의 사랑은 인간이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리고 그 불행의 당사자는 둘 중 하나을 택해야 한다. 신을 택하거나, 버리거나.
또한 페스트는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 것 같다.
1. 오랑시에 퍼진 질병으로서의 페스트. 이걸 일선에서 최선을 다해 치료하는 사람은 의사 리유.
2. 신의 경계. 인간은 극한 상황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말아야 함. 이걸 강조하는 사람은 파늘루 신부.
3. 인간의 악한 본능. 특히 살인 본능. 이걸 이겨내려고 하는 사람이 타루.
작가는 실제 페스트든 비유적 페스트든 그것을 이겨내고 받아들이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형상화하고 있다. 절망 속에서, 신도, 절대적 가치도 갖지 못한 채 무의미하게 허우적 대는 현대인들이 어떻게 서로 결속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라 본다.
* 역자 해설에 이런 내용이 있다.
“카뮈는 <알제리 해안에 위치한 그저 그런 프랑스의 도청 소재지에 불과한> 도시 오랑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점령하에 탄압받았던 프랑스를 상징하며, 등장인물 타루와 리유를 주축으로 하는 보건대는 레지스탕스 운동, 즉 항독 저항 운동을 의미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