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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도무지 쓸데없는 이 길, 아무리 봐도 공칠 게 뻔한 하루, 아무리 봐도 헛된 희망. 이 모든 게 다 무슨 짓일까요?”

처음 읽은 카프카 소설. 읽기 전엔 가드를 잔뜩 올리고 있었다. 까뮈식의 문체나 내용이 아닐까? 나는 <페스트> 때처럼 읽다가 자게 되겠지?

그런데 웬걸. 굉장히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인물들의 성격을 잘 못 따라잡았다. 다들 좀 들떴고, 연극적인 제스처나 언행을 취했기 때문. 그래서 공감하며 읽는 게 아니라 뭔가의 상징성을 가진 개체로 대하며 거리를 두고 읽어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읽을 수록 인물들이 코믹하기까지 했다. 무겁고 지루할 수 있는 철학소설(그도 그럴 것이 카프카 하면 실존의 탐구란 말이 늘 따라오니)이겠거니 했던 것이 재미있는 풍자소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법 미스테리하다. K란 이니셜로만 표시된 주인공의 이름, 본인의 주장 외엔 이 사람이 토지측량사인지도 알 수 없는 정체성의 모호함, 마을을 장악하고 있지만 정작 모습은 한 번도 드러내지 않는 공포스러운 성, 그 성의 음울함에 짓눌려 히스테리컬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을 사람들.

아무튼 색다른 소설이었다. 희곡적 인물들의 행동과 말투, 관료제에 대한 내용은 풍자에서 오는 통쾌함과 재미, 못믿을 인물인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는 실존에 관한 고민, 작품의 얼개는 고딕 낭만주의.

다음 읽을 카프카 소설도 기대한다. 어쩐지 최애작가가 될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




*덧붙임
1. Kafka Steven Soderbergh youtu.be/JjI2a7g1ZXs - @YouTube 제레미 아이언스가 카프카로 나옴. 처음 볼 때 내 맘대로 독일 영화 아닐까 했는데 미제였음. 흥행은 말아먹었다고 하지만 꽤 재미있었다.

2. 검색하다 건진 평. “지극히 실질적인 기법으로 관념 세계의 상징적인 인간 존재의 정체와 그 실상을 파헤치고 있”다는 건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정체와 실상은 어떻게 다른 거지? 인간의 정체가 아니라 왜 상징적인 인간의 정체지? 그냥 인간 존재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 상징적인 기법을 사용했다는 말 아닌가..?

3. 미완. 게어슈테커의 어머니는 K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걸까. 프릳다, 페피와는 사이가 어떻게 될까. 이 마을에서 토지측량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모든 걸 영원히 모르게되..는 건 아니다. 역자해설에 보면, 작가가 죽기 전에 정해놓은 줄거리를 언급한다. 언뜻 새드엔딩인데 한편 K의 정체불명성을 생각하면 K입장에 몰입하여 줄거리를 따라갈 필요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4. 카프카 다음 거 읽고 싶다 카프카! 전집도 지르고 싶다 ㅠㅠ 하지만 나는 한동안 책을 사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것을.. 그리고 읽고 싶어도 망할 <비극의 탄생>을 다 읽고 난 후가 될 것이다.

5. 아직 ‘실존’이란 말을 잘 모르겠다. 실존을 다룬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삶의 양태를 보여준다는 뜻인지? 그럼 세상에 실존소설 아닌 게 어디 있지? ㅠ 방법은 실존소설로 분류된 작품들을 읽으며 감을 잡거나 실존철학 서적을 읽는 것 등이 있겠는데 나는 철학에 약간 알러지가 있는 거 같아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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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역시 나의 유일한 취미는 책 사기인가보다. 책을 고르고, 주문하고, 결제하고, 사은품을 고르는 과정 혹은 할인받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책이 올 때까지(혹은 서점에서 산 걸 집에 가져가기까지 혹은 패드나 폰에 이북을 다운받을 때까지) 설렘을 즐기고, 택배상자를 뜯거나 책에 둘러진 책띠를 풀면서 다운받으면서 기뻐한다.

산책 앱에 책을 등록하고, 제목을 보고 저자약력을 읽고 소개글 선전문 목차 찍어읽기를 하면서 왠지 책을 다 읽은 듯한 착각에 빠지고 그 책을 책꽂이에 꽂으며(꽂을 데가 없어 못 꽂는다. 겹쳐 쌓아둠. 주제별 분류는 애초에 불가능) 겨울양식을 모으는 다람쥐의 행복에 빠진다. 그리고 안 읽음 ㅇㅇ

정말, 사둔 책 다 읽기까지는 절대 책 사거나 빌리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을 했으면서도 방금 또 지르고 옴.. 손목을 끊어야 치료(?)가 되려나 그렇다 해도 발로 주문하겠지 ㅠ 단도박 모임처럼 단책구입모임 어디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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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6-06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람쥐는 종종 식량을 숨겨둔 위치를 못 찾는다고 해요. 책을 사놓고 아무데나 꽂아놓으면 나중에 찾기 힘들 때가 있어요. 어디에 보관했는지 잊어버리거든요.. ㅎㅎㅎ

조그만 메모수첩 2018-06-06 19:53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제가 산 책을 또 사고 또 사고 합지요...😩
 
[eBook]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2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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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 읽을 수록 좋은 <네 인생의 이야기>. 세 번째 읽었는데 헵타포드어와 그들의 목적론적 사고 방식이 두 번째 읽었을 때보다 좀더 이해되었다. 처음엔 그들의 운명론이 싫어서 소설을 제대로 이해할 생각을 못했는데 오늘 독서에선 그 거부감이 덜했다. 과거와 같은 의미를 같는 미래라는 시간, 그 시간을 따라감은 자유의지의 박탈이 아니라 삶의 목적을 과거만큼 명료하게 아는 자로서의 의무라는 사실은 미래를 공란으로 만들어두는 것만큼 개인에겐 의미가 있는 일이었던 것.

또한, 그렇게 정해진 세계관에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표현인 동시에 실행이기도 하다. 주인공 루이즈가 일러준 문제대로 미래를 알고 있는데 무슨 언어가 필요할까 싶지만 수행문의 경우 발화는 곧 실행이며, 헵타포드의 모든 문장들은 수행문의 역할을 한다는 것. 지구인의 문자언어가 아닌 ‘어의문자’ 체계를 디자인한 작가에게 존경을. 하지만 이것의 토대가 된 사피어-워프 가설의 조악함은 좋아질 수가 없다.

그리고 딸을 잃게 되는 루이즈의 미래도 미래지만 전쟁이나 재난, 범죄의 피해자나 가해자가 되는 미래를 의무로 살아낼 수 있을까? 종교적이기까지 한 목적론적 사고를 이전보다 이해를 하나 여전히 반감이 드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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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6-06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지구인의 90% 이상이 종교적이기까지 한 목적론 사고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조그만 메모수첩 2018-06-06 19:53   좋아요 1 | URL
저는 나머지 10%에 속하나? 싶다가 저도 신을 믿는 사람이라 크게는 목적론적 세계관에 속한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면서도 인과적 사고를 하니까 또 마음엔 안 들고.. 모순이네요 ㅎㅎ
 

에코 서거 2주기.. 시간 잘 가는구나. 장미의 이름 3회독 하기 좋은 날씨네.

https://t.co/J2RfiUZS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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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오 2018-06-06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의 이름 읽고 싶은데 아직 못 읽은 책이네요 ^

조그만 메모수첩 2018-06-06 12:00   좋아요 0 | URL
깨알같은 주석때문에 처음에 읽기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ㅎㅅㅎ
 

1980년, 냉전과 핵전쟁의 위협적 분위기 속에서 적힌 이 책은 인류가 이제까지 알아온 우주 진화의 역사를 밝히고 앞으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어리석은 전쟁이 불러일으킬 인류의 재앙에 대해 경고하고, 그 재앙을 일으킬 에너지를 생존과 발전의 에너지로 써야 한다는 주장이 책에 그득하다.

그렇기에 자연과학 교양서이지만 그 주제는 오히려 인문학적 통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어찌보면 당연한 말, 단순한 말 같은 책의 주제-바람직한 인류 발전의 길-에 이 책의 분량은 좀 많지 않나 싶지만, 주제로 도달하기 위해 예를 든 여러 사건들, 논지 전개방식, 작가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감성적인 문체는 책이 두껍다는 사실을 금방 잊게 만든다. 책이 주는 정보는 역설적이기도 하다. 우주를 탐사하면서 인류 우월주의는 한 풀씩 꺾이고, 인류는 겸손한 시야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한편 이 광활한 공간에 존재하는 생명으로서의 존엄성은 인류를 높은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가장 좋아하는 챕터는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을 중심으로 한, 이오니아의 자연과학자들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정교한 실험은 시대적 한계때문에 이뤄지지 못했지만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 등 훗날에 밝혀지게 될 어마어마한 진실들을 발굴한 그 시기를 상기시켜 주는 것엔 엄숙함이 깃들여 있다. 이후 도서관이 파괴되고 당시 이룬 과학적 발전이 중세로 접어들며 끊겨 버린다는 사실에 안타까워 하는 필자의 마음이 지면을 뚫고 올라온다. 그렇다고 이 시기를 무한정 찬양하는 것은 아니고 이 시기가 그럼에도 노예를 인정했다는 것, 그렇게 이루어진 지식이 사회변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도 짚어 균형을 이룬다.

동명의 다큐멘터리도 모두 시청하려 한다. 뭔가 느낀 점을 보태고 싶지만 책의 주제만도 충분히 감동적이어서 일단은 주제 테두리 바깥으로 떠나고 싶지 않다.

1980년대 시리즈
https://youtu.be/FT_nzxtgXEw

2014년 리부트 트레일러. 넷플릭스에서 전편을 다 볼 수 있다.
https://youtu.be/XFF2ECZ8m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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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3-19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오니아 자연과학자들이 진정한 과학자란 생각에 동감합나다.

겨울호랑이 2018-03-19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조그만메모수첩님 글을 읽고 나니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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