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탐 해방 - 살찌지 않는 뇌를 만드는 21일 식습관 혁명
저드슨 브루어 지음, 김보은 옮김 / 푸른숲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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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내 느낌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해야 하는, 참으로 위대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매번, 매순간,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는 느낄지 모를 ‘배고픔’에 대한 신경과학적 고발서이자 마음 회복을 위한 안내서다.

‘가짜 배고픔’이라는 말을 안다.
배고프지 않은데도 배고픈... 도덕경에서 본 것 같지만, 실은 내 뇌가 매일 실천 중이다. 몸은 배고프지 않은데, 뇌는 배고픔으로 착각한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뇌가 과연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책은 배고픔 증상이 현대인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그걸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지를 사례를 들어 하나하나 설명한다. 그런데... 그 사례들, 내 얘기였다.

나는 원래 아몬드를 좋아한다. 그런데 일이 꼬이거나 생각할 게 많아질 때면, 자연스럽게 더 많이 손이 간다. 예전엔 아몬드만 따로 먹었는데, 하루견과로 바꾸면 덜 먹겠지 싶어서 소분 포장된 걸 샀다. 그런데 말이다 하루견과를 열흘치 한꺼번에 먹어 본 사람. 또 아몬드 먹고 배 나온 사람? 손?

뭐든 많이 먹으면 살찐다. 물도 많이 먹으면 살찌는데 아몬드도, 하루견과도, 예외는 없다.

‘“물만 먹는데 왜 살이 찔까 묻지 말고, 내가 뭘 물처럼 먹는지 생각하라”

하루견과를 물처럼 먹었나보다. 내 배... 다람쥐가 날씬한 건 조금만 먹어서 그렇다. 나는 너무 많이 먹어서, 결국 하루견과도 끊었다. 치워버렸다. 얼마나 먹었는지, 잇몸이 다 일어날 정도였다.

아몬드를 끊었더니 잇몸이 살아났다. 이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그 친구는 껌을 씹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턱관절이 망가져서 고기도 못 씹고, 야채도 못 씹고, 강제 다이어트 중이시란다. 슬프지만, 실제로 배가 고파서 그런 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문제를 이렇게 말한다.

“뇌의 생존 기전이 탈선하면서 생긴 파생물. 배고플 때 먹고, 배부르면 멈추도록 도와야 할 기전이 감정을 달래는 시도와 엉켜 꼬여버린 상태.”

그러니까, 스트레스받은 뇌가 식욕을 담당하는 기전과 겹쳐서, 스트레스를 ‘먹는 행위’로 해결하려 드는 것이다. 쉽게 말해, 감정 관리 실패가 식욕으로 이어지는 거다. 쳐묵쳐묵.

생각해보면 현대인은 많이 앉고, 많이 먹는다. 반면, 잠은 덜 자고, 움직임은 거의 없고, 감정은 많이 소모되지만 해소는 못 한다. 그렇게 쌓인 감정의 찌꺼기들이 ‘먹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대인은, 불쌍한 인간이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
내 책상엔 이제 아몬드는 없다. 아몬드를 잃고 잇몸을 얻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뱃살이 부푸는 것도 멈췄다. 부풀려진 건… 나중에 해결해볼게.

책은 이런 현대인의 심리적 고통을 ‘식욕 관리’라는 이름으로 ‘마음 관리’로 전환하려 한다. 다양한 방법이 나오는데, 그중 21일 플랜은 강추다.

얼마 전 다시 ‘운동 21일 플랜’을 나 혼자 실천하다가 중단했는데, 뇌가 ‘이건 내가 계속해야 할 일’이라고 인식하려면 최소 21일이 걸린단다.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하는 시간이 필요한 거다. 예전엔 운동 가스라이팅엔 성공했었지만, 기간이 짧았는지 오래 가지 않았다. 결국 습관화는 시간의 함수라는 이야기다.

먹는 습관이든, 운동이든, 공부든, 독서든…
가스라이팅은 최소 21일!

이 책을 통해 식욕보다 ‘나’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뭐가 그렇게 힘들었길래 그렇게 아몬드를 씹어댄 거니?” 🐰🐔🐰🐔
배가 고픈 게 아니라, 사실은 휴식이 고팠던 거였는데… 몰라줘서 미안해. 🐰🐔🐰🐔
이제는, 조용히 잠시 멍때리는 연습도 좀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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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위한 침묵 수업 - 소란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침묵의 뇌과학
미셸 르 방 키앵 지음, 이세진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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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소음 속에서 살아간다. 눈을 뜨면 스마트폰 알림이 울리고, (중략) 이처럼 외부 자극과 정보가 끊이지 않는 시대에, '침묵'은 잊혀진 개념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불편하고 낯선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뇌는, 아이러니하게도, 자극을 멈추었을 때 비로소 회복을 시작한다. 인간의 뇌는 자극을 처리하는 데 놀라운 능력을 가진 기관이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작동에는 대가가 따른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정리하고, 감정을 소화하고, 기억을 저장하고, 판단을 내리느라 뇌는 하루종일 분주하다. 시각적 자극은 눈을 감으면 되지만 귀는 귀꺼풀이 없으므로 자극을 막지 못한다. 뇌에게 쉬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요하다.

 

최근 신경과학은 이 침묵의 시간이 뇌에 실제로 치유와 회복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뇌에는 글림프 시스템(Glymphatic System)’이라는 독특한 배수 시스템이 존재한다. 이는 림프와 글리아 세포(glia)의 합성어로, 뇌의 노폐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중략)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침묵은 단지 청각적 무음을 뜻하는 것일까?

(중략)‘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아무 자극도 받지 않음이 중요한 것이다. 이 침묵의 시간 속에서 뇌는 정보를 재배열하고, 쓸모없는 감각 잔재를 제거하며, 감정적 자극을 정리하고, 창의적 사고를 준비하는 공간을 만든다.

 

침묵은 단지 정서적인 평온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침묵은 생물학적으로도 뇌를 재정비하는 기회이다. 자극이 차단되었을 때 뇌는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을 중심으로 활동을 재구성한다. 이 부위는 자기 성찰, 창의성, 도덕적 판단, 복잡한 의사결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침묵의 상태에서 전전두엽이 활성화되며,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게 된다. 외부의 소음이 줄어들 때 비로소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고, 수많은 정보 속에 파묻혀 있던 고유의 관점이 떠오른다.

 

우리의 뇌가 혹시 쉬지못하는 것은 우리가 침묵을 두려워해서는 아닐까?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침묵이 흐르면 어색함을 느끼고, 혼자 있을 때 침묵이 이어지면 외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침묵은 고립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연결의 시작일 수 있다. 타인과 연결되기 이전에 자기 자신과의 연결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는 떠들썩한 환경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조용한 상태에서만, 내면의 질문과 기억, 욕망, 가치가 얼굴을 드러낸다. 침묵이란 단지 말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존재의 깊이를 회복하는 시간이다.

 

현대인의 삶은 빠르다. 너무 빠르다. 효율과 생산성, 연결성과 속도만이 강조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멈추는 법을 잃어버렸다. (중략) 중요한 것은 자극을 제거한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침묵은 사치가 아니다. (중략)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침묵을 견뎌낼 수 있느냐이다. 침묵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의 목소리와 자신의 진실 사이에서 균형을 찾을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속도나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더 깊은 침묵이다. 현대인의 삶은 외적으로는 점점 더 연결되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점점 더 분열되고 있다. 그 단절을 회복하는 길은 말이 아닌 침묵에 있다. 우리는 모두, 말이 아니라 침묵을 통해 비로소 제 자리를 찾는다. 침묵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다시 살아난다.

 

고요함

적막함

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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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잃어버린 심장
설레스트 잉 지음, 남명성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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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따옴표없음/현재형 동사/주요등장인물 5명

아이의 발걸음은 작고 조용하다. 그러나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 검열의 그늘 아래 가려진 진실이라면, 그 조용함은 더없이 큰 울림이 된다. 어떤 이야기는 말보다 침묵이 많고, 어떤 소설은 줄거리보다 여운이 오래 남는다.

사회가 ‘정상’을 규정하고, 그 정의 바깥에 선 존재들을 조용히 제거해 나갈 때, 그 속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건 이름이 아니라 목소리다. 작고 약한 존재부터, 말수가 적은 이들부터, 시와 기억과 진실이 은밀히 깃든 존재들부터. 그러나 아이는 그 사라진 목소리를 향해 걷는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상처였는지, 혹은 저항이었는지를 묻지도 않고, 다만 남겨진 단어와 풍경을 좇으며.

이 소설은 어떤 거대한 사건에 대한 '느낌'과 '기억'으로 구조화된 세계다. 모든 사건은 감정과 내면을 타고 흐른다. 아이가 맞닥뜨리는 현실은 명확하다기보다 흐릿하고, 그 흐릿함 속에서 더 분명한 것이 떠오른다. 가족은 무엇이고, 진실은 어떻게 억압되는가, 그리고 언어는 어떻게 금지가 되는가.

이 소설은 가깝고도 낯선 미래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PACT(Preserving American Culture and Traditions)'라는 법률이 시행되며, 정부는 '비미국적'이라 판단되는 언어·예술·사상을 검열하고, 그에 연루된 부모로부터 자녀를 분리시킨다.

주인공은 어머니가 실종된 채 남겨진 12살 소년 ‘버드(노아)’. 그는 어느 날 도착한 의문의 메시지를 계기로 사라진 어머니의 흔적을 따라 떠난다. 그리고 그 여정 끝에서, 어머니가 시인으로서 남긴 언어의 조각들(종이조각)을 통해 엄마의 세계를, 엄마를 통해 세계를 다시 읽어 나간다.

(중략)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무엇보다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여백’이다. 어떤 대사는 들리지 않고, 어떤 감정은 표현되지 않지만, 느낌적으로 알수 있다. 그 말의 결락, 그 표정 없는 얼굴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것을.

🌊 특히 아이가 어머니의 흔적을 좇는 여정은 물리적 재회보다는 존재의 뿌리를 찾아가는 정서적 순례에 가깝게 읽혔다. 감정을 느끼게 하지 않고, 감정을 생각하게 한다. 작품은 친절하게 설명하는 대신,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감정의 구조와 윤리적 조건들을 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밀도있는 문학을 경험할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특징은
🌊따옴표가 생략된 대사는
생각과 말,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지워내고
🌊짧고 반복적인 리듬은
인물의 심리를 시처럼 그려낸다는 것이다.

따옴표가 없다는 것이 놀랍게도 훨씬 몰입도를 높인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확신보다, 무언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감정이 마지막 페이지에 남는다.

작품 속 어머니는 단순한 실종자를 넘어, 그녀는 시와 이야기, 침묵과 여백을 통해 언어와 저항의 뮤즈로 묘사된다.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그녀의 문장은 살아남는다.
아이는 그것을 읽고 이해하며, 🌊 다시 써내려간다. 이 방법은 이 작품이 택한 구원이자 회복이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상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실 이후를 견디는 언어를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이 작품은 바로 그 언어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이어지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 누군가의 침묵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고쳐 쓰는 일이다.
그것은 🌊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지켜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소리 없이 저항하는 이야기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어쩌면 무언가를 ‘찾았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신, 무언가를 '되살렸다‘는 느낌은 남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더 절실한 감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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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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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세계적인 영화감독이자 에세이스트로, 『어느 가족』, 『그리고 아버지가 된다』 등 가족과 기억, 사회적 경계를 다루는 작품들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자로도 잘 알려진 그는 감독이자 작가로서, 항상 '삶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해 사유해온 인물이다.

『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映画の生まれる場所で)』는 그가 프랑스에서 촬영한 영화 『진실(La Vérité)』의 제작 과정을 중심으로 쓰인 에세이이다. 단순한 제작 비화에 머무르지 않고, 언어의 장벽, 문화적 충돌, 창작을 둘러싼 협업의 모순까지 정직하게 고백한다. 일본과 프랑스라는 서로 다른 제작 환경 속에서, 그는 감독이자 인간으로서 흔들리고, 고민하고, 결정하는 순간들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중략)

아쉽게도 나는 그의 영화를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유독 눈길이 가는 건 고레에다 감독이 남긴 ‘메모’들이었다. 그것은 회의록도, 시나리오도, 일기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머릿속에서 막 태어난 이미지들—촬영을 앞두고 반복해 그려낸 장면 구성, 배우의 움직임, 프레임의 감정값까지—영화가 되기 전의 영화들이 그 속에 살아 있었다. 나는 그의 놀라운 꼼꼼함에 감탄했고, 단정한 손글씨에서 전해지는 진지함에 또 한 번 놀랐다.

“목소리는 그 사람의 또 다른 지문”이라는 말이 있다면, 글씨는 아마 그 사람의 정신세계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쓴다고 했지만, 그 정리된 생각은 하나의 독립된 예술 언어처럼 느껴졌다. 악필이지만 끊임없이 메모하는 나로서는, 그의 필체가, 그의 생각이, 그의 그림과 그것을 구성해내는 작은 상자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생각을 하나의 단어와 이미지로 정리하고, 그것을 순서대로 배열해 타인과 공유한다는 것은 내게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내가 아무리 사회화가 많이 되어도, 그건 참 버거운 과정이다. 그런데 그는 그 일을 무심한 듯 툭툭 해낸다. 솔직히 그의 다이어리를 훔치고 싶었다.
그런데… 나 일본어 모름. ^^;;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영화 『진실(La Vérité)』은 2019년 제76회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개막작(오프닝 상영작)으로 초청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일본에서는 『真実(しんじつ)』이라는 제목으로 정식 개봉되었다. (중략)특히 일본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제작 환경에서 만들어진 첫 외국어 영화라는 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게도 중요한 전환점이 된 작업이다.

이 책은 창작이라는 일이 어떻게 타인과의 충돌 속에서 다듬어지고, 작가 자신의 내면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어쩌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쓴 가장 조용하면서도 치열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종이 위에서 태어난 프레임들, 그것을 구성한 문장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놓인 메모들—우리는 그 메모의 자리에서, 영화가 태어나는 정확한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
세상에 없다고 믿어지는 것을, 내 머릿속에서 꺼내어 종이 위에 옮기고, 그것을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다시 그려지게 만든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닐까?

그의 글에는 욕지기가 나올 법한 순간들도 많다. 요즘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총’이고, 폭력성은 극대화된 시기다. 그런 나는 분명히 격하게 반응했을 상황들을, 그는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느긋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별거아닌 듯 담담하게 헤쳐 나간다. 뭔가 해탈한 느낌이랄까. 글이라 그런가?
그래서일까. 요동치던 내 마음이 그를 따라 잠잠해진다.

📌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영화 제작에 관심이 있는 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을 좋아하는 분
문화 간 협업과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이 있는 분
창작 과정에서의 고민과 성찰에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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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그것과 그리고 전부
스미노 요루 지음, 이소담 옮김 / ㈜소미미디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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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일본 청춘소설은 대부분 너무 친절하다. 다정한 서술, 아름답게 포장된 상실, 감정선의 예측 가능한 흐름. 죽음조차 하나의 성장 장치로 기능하며, 주인공들은 눈물 한 바가지 흘린 뒤 훌쩍 커버린다. 왜 그렇게 다들 성장시키려하는지. ‘아름다운 이별’은 하나의 장르가 되었고, 그것은 소비되기에 알맞다. 문학은 때로 감정의 안전지대를 제공해야 하기도 하지만, 생과 사의 경계를 다루는 작품이라면 그것이 갖춰야 할 윤리적 긴장감이 있다.

이번 작품은 그 흐름에서 살짝 비껴나 있다. 흔한 드라마틱함이나 플롯 중심의 반전 없이, 조용히 정적을 견디며 서사를 끌고 간다. 이야기의 배경은 그저 여름방학, 그 속의 짧은 여행. 중심 인물은 10대의 남녀, 겉보기엔 수많은 일본 청춘소설의 전형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이야기의 핵심이 관계의 진전이 아니라 소멸의 방식에 있다는 점이다.

작품은 죽음을 정면에서 마주하지 않는다. 병명은 언급되지 않고, 죽음의 예고도 감춰져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 점은 때로 답답하다. 명확히 알고 싶은 욕구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 침묵은 외면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주제를 감정적으로 낭비, 소비하지 않기 위한 선택으로 보인다. 주인공 사브레는 삶의 끝자락에 서 있지만, 그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녀의 말투, 눈빛, 기묘한 여정의 목적을 통해 삶의 피로와 소멸의 기미를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생사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매우 윤리적이다. 죽음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창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를 성찰하는 내면의 거울이다. 문학은 그 거울을 조심스럽게 비춰야 하며, 독자로 하여금 한 인간의 삶을 재단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작품은 그 지점을 정확히 지킨다. 감정은 절제되어 있고, 설명은 최소화된다. 그로 인해 오히려 더 강한 여운을 남긴다. 이것이 좀 답답하게 읽힐 수도 있다. 이건 뿌우연 안경을 끼고 있는 듯한 느낌, 혹은 실루엣만 보이는 그림자 영화를 보는 듯도 하다.

주인공 메메는 사랑을 품고 있지만 끝내 말하지 않는다. 사브레는 죽음을 준비하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지 못한 채 마무리된다. 그러나 바로 그 ‘말하지 않음’ 속에서, 사랑의 본질과 죽음의 품위는 오히려 또렷이 떠오른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이렇게 썼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침묵의 미덕이 아니다. 언어가 닿을 수 없는 지점에서, 침묵이야말로 유일한 표현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 작품 속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선택이다. 말하지 않는 대신, 곁에 머무르고, 눈빛을 건네고, 함께 걷는다. 그 모든 것이 언어보다 정직한 방식으로 감정을 전한다.

그래서 이 소설이 전하는 가장 깊은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말해지지 않은 것들 속에 존재한다. 말하지 않음이 곧 외면이 아니라, 사랑의 가장 조심스러운 형식이자, 죽음을 품위 있게 감당하는 마지막 태도인 것이다.

같은 작가의 전작, ‘췌장을 먹고 싶다’는 작품은 정반대의 전략을 취한다. 죽음을 전면에 내세우고, 감정을 적극적으로 연출하며, 사건을 통해 서사를 밀어붙인다. 물론 그 역시 의미 있는 시도였다. 그러나 눈물을 유도하는 구성은 독자로 하여금 죽음을 단지 ‘감동의 재료’로 소비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이번 작품은 그러한 위험을 피한다. 슬픔을 강요하지 않고, 교훈을 들이밀지 않는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작품이 죽음을 통과한 후 남겨진 자의 변화보다, 죽음을 준비하는 자의 존엄에 더 무게를 둔다는 사실이다. 흔히 청춘소설은 살아남은 자의 성장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오히려 "떠나려는 사람"의 선택을 조명한다. 그것은 매우 드문 시선이고, 현실적이며 동시에 문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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