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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추얼의 종말 - 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ㅣ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1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일어 ‘Ritual[리추얼]’은 ‘예전’, ‘의식’ ‘잔치’, ‘축제’ 등의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 말로, 한국 도서에서는 주로 ‘반복적으로 행해져 마음의 안정과 생활의 리듬감을 불러일으키는 개인의 일상적 습관’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한병철은 리추얼을 ‘집단적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윤리로서, 지속적이고 거주 가능한 삶의 양식’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현대 사회에서 그러한 리추얼이 사라져간 역사를 조명하고, 지금과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의 리추얼을 제안한다. 공동체의 소멸과 집단적 나르시시즘이 현대사회의 문제점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은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한 점으로 귀결된다.
필자가 이해하기로, ‘리추얼’은 놀이다. 리추얼은 자기를 벗어나 세계를 인지하게 함으로써 자기 착취로부터 보호 장치의 역할을 한다. 현재 무너진 형식의 우위를 복원함으로써 회복 가능하고, 그 회복 과정은 신자유주의의 체제에서 자연스레 이뤄지는 흐름에 반(反)하는 의식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외의 설명도 많았지만, 필자는 이 책에서 ‘리추얼’의 핵심을 이 정도로 파악했다.
책을 읽으며 동의하는 부분도,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자아가 너무 강화된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우울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점을 지적하는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다. 필자도 ‘자유의지와 열정으로 자기를 착취하여 결국 붕괴’되는 번아웃에 빠져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너무 집중하다보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지우고, 자신 밖의 영향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게 된다는 걸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에 이제는 본인에게도 집중하되 사회 속에서의 본인의 삶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리추얼이 규정하는 사회에서는 우울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주장에는 의문이 들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그러므로 공동체와 개인주의에 대한 지향을 균등하게 유지해야만 ‘함께 잘 사는 개인의 삶’이 유지되리라 생각한다.
책 전반에서 리추얼을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고, 매 꼭지마다 상징적인 개념이 등장해 한 번에 이해하기는 조금 힘들 수 있다. 하지만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펜데믹으로 인해 개개인이 더욱 고립되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문제를 다루기에, 어렵지만 읽어보면 좋을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진정으로 온전한 개인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책의 궁극적인 메시지가, 흐려지던 우리의 눈을 깨우는 중요한 가르침이 될 것이다. 덧붙여 200쪽 안 되는 분량에 가벼운 마음으로 선뜻 책을 집어 들었다가 내용이 어려워 당황하게 된다면, 부록으로 실린 <엘문도>와 <엘파이스> 인터뷰를 먼저 참고하기를 추천한다. 책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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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의 바탕에 놓여 있는 것은 너무 빡빡하게 조여진 자기관련이다. 우울에 빠진 사람은 자기에게서 벗어나 세계로 건너갈 능력을 완전히 잃고 자기 안에 은둔한다. 세계는 사라진다. 고통스러운 공허감 속에서 그는 고작 자기 주위를 맴돌 뿐이다. 반면에 리추얼은 자아가 자기라는 짐을 내려놓게 해준다. 리추얼은 자아를 탈심리화하고 탈내면화한다. (25-26p)
-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장애들이 증가하는 것은 우리가 자아의 경계 바깥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위한 감각을 점점 더 잃어가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적 ‘호모 프시콜로기쿠스(심리적 인간)’는 자기 안에, 자신의 뒤틀린 내면성 안에 갇혀 있다. 그의 세계 결핍은 그를 고작 자기 주위만 맴돌게 한다. 그리하여 그는 우울에 빠진다. (35p)
- 삶의 솜씨란 심리를 죽이고 자기로부터 헤어나와, 또한 다른 개인들과 더불어, 어떤 이름도 없는 본질들, 관련들, 질들(Qualitänten)을 산출하기다. 이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삶은 살 가치가 없다. (73p)
- 오늘날 삶이란 그저 생산하기일 따름이다. 모든 것이 놀이의 영역에서 생산의 영역으로 옮겨 간다. 건강과 최적화와 성과의 독재에 굴종하는 삶은 한낱 생존과 다를 바 없다. 그 삶은 어떤 찬란함도, 어떤 주권도, 어떤 집약성(강렬함)도 없다. 로마의 풍자 시인 유베 날리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매우 적절하게 표현했다. “Et propter vitam vivendi perdere. 삶에 머물이 위하여 삶의 의미를 포기하기.” (73-7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