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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손이 ㅣ 웅진 모두의 그림책 58
정진호 지음 / 웅진주니어 / 2023년 12월
평점 :
고등학교 때 무척이나 존경하던 국어 선생님이 계셨다.
한참 어린 학생들에게 항상 경어를 사용해주시고
'존중받는다'는게 이런 거구나 느끼게 해주셨던 선생님.
스승의 날, 거창하지도 않지만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 담은 편지 하나 전해드렸는데
김춘수 시인의 시집을 답장으로 보내주셨다.
그때 처음 읽은 '꽃'이라는 시는
고등학교 소녀의 마음을 촉촉한 향기로 물들였다.
그리고 정진호 작가의 그림책 「금손이」를 읽는데
문득 이 시가 떠올랐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지금이야 반려견, 반려묘라는 개념이 일반적이고
키우는 집들도 워낙 많아서 특별하지 않지만
조선 궁궐에서 키우는 고양이라니,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김시민의 '금묘가(金猫歌)'와 이하곤의 '궁중의 고양이에 대해 쓰다(書宮猫事)'
라는 글 속에 등장하는 금손이는 숙종시절 궁중에 살았던 고양이라고 한다.
황금색 털을 가지고 있던 이 고양이를
숙종이 매우 아끼어 '금묘', '금손'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이 고양이는 궁궐 내에서 오직 숙종만을 따랐는데
임금의 그림자를 밟는 것조차 큰 죄가 되는 시대에에
임금 가까이에서 밥을 먹고 잠까지 잘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였다.
숙종 승하 후 금묘는 음식을 먹는 것도 거부하고
수십여 일 동안 내내 슬피 울기만 하다가 세상을 떠난 금손이,
비단옷에 싸여 숙종의 능인 명릉(明陵)가는 길 옆에 묻혔다.
왕실의 엄격한 법도와
사농공상의 위계질서가 존재했던 조선시대에
미천한 동물 한 마리에게 임금이 친히 이름을 붙여주고
곁에 두어 은택을 내리기까지 했다는 것은
기록으로 남겨둘 만큼 특별한 일이었을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서처럼
그저 이름없는 길고양이로 살다가
정해진 명대로 평범하게 살아갔을지도 모를 고양이는
황금색 털을 가진 '금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숙종에게로 가서 죽음까지도 함께하는
잊혀지지 않을 '꽃'이 되어 주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어린왕자는
작은 별에서 자신의 장미가 유일한 존재인줄 알았지만
지구로 와서 수백송이의 장미가 만발한 정원을 보고
자신의 장미는 그저 평범한 장미 한 송이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못견디도록 슬퍼 풀밭에 엎드려 운다.
그런 어린왕자의 모습을 보며 사막여우가 건넨 한마디,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게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거야."
길들인다는 것은 서로의 마음 속 공간을 내어주는 일이다.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고양이가 있지만
이름을 불러주고, 바라보고, 아껴주고,
그렇게 숙종에게 '길들여진' 금손이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었다.
자신을 알아봐주고 사랑해준 유일한 존재가
이 세상을 떠나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더이상 삶을 지속할 의미도, 의지도 상실해버린게 아닐까.
나 아닌 다른 존재와 진심을 나눈다는 것,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으로 불러준다는 것,
누군가에게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는 것,
숙종과 금손이의 이야기를 읽으며
아름답고 시린 이러한 삶의 의미들을
다시금 마음속에 가만히 떠올려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