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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 없음 - 격동의 세계를 이해하는 세 가지 프레임
헬렌 톰슨 지음, 김승진 옮김 / 윌북 / 2025년 10월
평점 :

이 글은 윌북출판사의 도서제공으로 작성된 주관적 서평입니다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로 트럼프와 시진핑이 만나는 시점에, 정치경제서인 《질서없음》을 읽게 되어 더욱 흥미로웠습니다.30년 전 형성된 글로벌화의 시대가 마무리되고, 이제는 비슷한 목적을 가진 소규모 국가 그룹들이 뭉쳐 움직이는 흐름으로 세계 질서가 재편되고 있습니다.이런 변화는 나의 투자와 나의 직업, 생활 물가 등 개인의 일상적인 삶에도 깊이 영향을 미치겠죠. 두 정상의 만남의 결과가 궁금합니다.⸻
에너지–금융–정치의 세 축으로 보는 세계
저자 헬렌 톰슨은 케임브리지대 정치경제학 교수로,냉전 이후 세계에서 일어난 복잡한 사건들을 ‘에너지 자원’, ‘금융’, ‘정치(민주주의)’세 축의 긴 호흡 속 상호작용으로 풀어냅니다.책은 결코 친절하지 않습니다.그만큼 다루는 주제가 방대하고, 한 문단 안에 수십 년의 세계사가 압축되어 있거든요.그래서 저는 읽는 동안 ChatGPT를 활용해 역사적 사건의 맥락을 함께 찾아보며 읽었습니다.이 책은 너무 방대하여 한 번으로는 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시간을 두고 두세 번 읽을 가치가 충분한 책입니다.⸻가장 흥미로웠던 부분 — ‘금융’의 세계사
제가 현대 정치경제서를 읽는 이유는역사 속 돈의 흐름과 권력의 이동을 살펴보며그 통찰을 개인의 투자 판단에 적용하기 위함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질서없음》의 금융 파트, 특히2008년 금융위기와 그 이후 글로벌 금융질서의 변화를 정리한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톰슨은 “에너지 자원을 중심으로 금융과 정치가 함께 움직인다”는 관점을 제시하는데,이 시선이 참 신선했어요.⸻에너지의 역사 속에서 태어난 ‘질서’
1차 세계대전 이후 벌어진 각국의 분쟁은결국 에너지(석유·가스) 확보 경쟁에서 비롯되었습니다.유럽 제국주의 시대에 유라시아에 영향력이 약했던 미국은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유럽에 전쟁자금을 빌려주며 금융적 기반을 다졌고,전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개발권을 확보하면서‘석유를 달러로 결제하는 시스템(페트로달러)’ 을 구축했습니다.그 결과, 달러는 금보다 강력한 패권 통화로 자리 잡았죠.‘페트로달러’라는 익숙한 용어가 이렇게 거대한 지정학적 맥락에서 작동한다는 점은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명확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연준(Fed)은 어떻게 세계의 중앙은행이 되었는가
우리가 FOMC 결과에 이토록 민감한 이유를,이 책은 역사적으로 설명해 줍니다.2008년 위기 이후 연준이 유럽 중앙은행들과‘달러 스와프 라인’을 구축하며 사실상 세계 금융의 구제은행이 되었기 때문이죠.그때부터 연준은 단순히 미국의 중앙은행이 아니라‘세계 달러체계의 관리인’ 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미국은 금–달러, 석유–달러 체제를 거쳐지금은 신용–달러 체제(유로달러) 로 패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저는 개인적으로 앞으로 스테이블코인–달러 구조가이 패권의 다음 버전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민간이 발행 주체로 달러를 담보로 하는 코인이 과연 달러패권을 지지해줄까는여전히 의문으로 남습니다.⸻유럽의 지체된 통합과 ‘패자 동의’의 약화
유럽연합(EU)은 제가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존재했지만,그 내부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톰슨의 설명을 통해유럽이 왜 지금처럼 정치적으로 답보 상태에 있는지를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또 하나 인상 깊었던 개념은 ‘패자 동의(loser’s consent)’ 입니다.민주주의에서 패자는 승자의 정당성을 인정해야 정치적 통합이 가능하지만,글로벌화 이후 공동체적 유대가 약화되면서이 ‘패자 동의’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분석이었습니다.이는 오늘날의 정치 양극화를 이해하는 데 깊은 통찰을 줍니다.⸻결국 남는 건 ‘금융의 결속력’
에너지, 정치, 금융 중에서가장 단단하게 세계를 묶고 있는 것은 금융이라고 생각합니다.연준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금융 구조 속에서어느 나라든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란 쉽지 않죠.미국과 중국조차도 자본의 얽힘을 고려하면 완전한 분리가 어렵습니다.⸻마무리
《질서없음》은 단순한 정치경제서가 아닙니다.에너지·금융·정치가 어떻게 서로의 질서를 만들어왔는가를거시적이고 통합적인 시선으로 보여주는 책입니다.국제정세와 세계 경제의 ‘큰 판’을 이해하고 싶은 분,혹은 투자나 경제를 단순한 숫자가 아닌 역사적 흐름 속에서 보고 싶은 분께이 책을 강력히 추천드립니다.⸻“에너지가 권력을 만들고, 금융이 그 권력을 유지한다.”이 문장이야말로, 《질서없음》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