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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비 이야기 ㅣ 비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평점 :
<5월의 어둠>
17자로 우주를 노래하고, 깊은 마음을 전할 수도 있으면서 감추고 싶던 진실을 잔혹하게 드러낼 수도 있는 ‘하이쿠’.
나오는 자살한 오빠가 남긴 하이쿠 시집의 해석을 의뢰하기 위해 은퇴한 국어 교사 사쿠토 노부호를 찾아간다. 그는 과거 그녀의 중학교 시절 담임이었으나, 이제는 치매로 기억을 점점 잃어가는 노인이다.
사쿠토는 백 편의 시 중 13편을 하나씩 해석해 나가며 오빠의 마음과 죽음의 이유를 추적한다.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되짚는 과정은 언어의 해석이자 인간의 내면을 파헤치는 일이다. 치매로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도 시의 불길함과 어둠은 그에게 선명히 다가온다.
시를 해석할수록, 그리고 여동생 나오의 또 다른 해석이 겹쳐질수록, 독자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잊힌 것인지 혼란에 빠진다. 사쿠토가 잊은 기억은 정말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감추고 싶었던 고통의 흔적일까?
언어의 조각을 통해 진실에 다가갈수록, 시는 점점 더 잔인하고 아름다운 무게로 다가온다.
p151 "선생님이 이 땅에서 숨 쉬고 있는 한, 계속 찾아오지 않을까요?".."과거에 선생님이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리게 하기 위해서요."
<보쿠토기담>
검은 나비의 꿈을 꾸는 남자. 그 나비는 죽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죄를 지은 자가 꾸는 저주의 꿈이라 했다.
그는 꿈임을 알면서도 그 화려하고 위험한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꿈속에서 깨어나도, 현실 속에서 다시 떠오르는 장면들.
그가 감추고 있는 죄는 무엇이며, 그 나비는 그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가.
꿈과 현실의 경계를 사이로 위험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결국 욕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 내는 모습은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준다.
p234 다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되돌아갈 마은은 들지 않았다. 몸의 깊은 안쪽에서 꿈틀거리는 충동은 모든 것에 우선했다. 그로 인해 목숨을 잃더라도, 욕망에 제동이 걸릴 때까지는 멈출 수 없었다.
<버섯>
아이 교육 문제로 다툰 부부. 아내는 아들과 함께 집을 떠나고, 2주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어느 날, 남편 스기히라는 마당에 피어난 붉은 버섯과 ‘페어리 링’을 발견한다. 이후 점점 버섯이 번져가며 그는 환영을 보기 시작한다.
정신과 의사인 친척 쓰루타는 그가 망상을 겪고 있다고 의심하지만, 스기히라에게는 그것이 단순한 환상이 아니다.
사진으로 찍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버섯들은 오히려 그의 눈앞에서만 생생하게 자라난다.
버섯과 링을 그림으로 남기려 하며,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전하려는 ‘메시지’임을 느낀다.
p353 산 자와 죽은 자의 진정한 이별은 산자가 죽은 자를 잊는 게 아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잊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서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고 여행을 떠나야 하는 것이리라.
세 단편 모두 ‘진실’과 ‘망각’, 그리고 인간의 내면을 비의 이미지와 함께 풀어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특히 「5월의 어둠」은 하이쿠라는 짧은 형식 안에서 ‘언어의 위대함’과 ‘해석의 다양성’을 느끼면서 언어의 해석이 곧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하이쿠 속 일본어의 언어 유희와 미묘한 뉘앙스는 따라가기 어려웠지만, 점점 이해하며 빠져드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일본 특유의 세계관인 모든 사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버섯, 나비, 비 등 일상의 존재들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잔혹함을 드러낸다.
이 단편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며,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마음의 어둠을 표현함으로 '암흑기담’이라는 부제가 꼭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비채서포터즈3기 #도서협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