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전 원산서 이사할 때

해당화 한 그루 뒤뜰에 심었는데

어느새 줄맞추어 열 포기를 넘겼다

제 영역을 넓히는 해당화

일찍 가신 할아버지 추억 때문

없애지도 못하는데

매년 전지하기가 겁부터 났다

 

석면장갑에 토시도 끼고

철지난 두꺼운 덧옷으로 무장한 후에

가시 무성해 악어 입 같은 포기에 손을 넣어

묵은 가지부터 잘라낸다

다가가는 톱날에

가시 맞세워 온몸 흔들어 저항한다

쥘 곳도 마땅찮아 쓰러진 가지도 안아 나르기 무섭다

 

손주야

모든 것엔 가시가 있기 마련이니

움켜쥐지 말거라

한 아름씩 안으려 하니

사람이 먼저 가시에 찔리는 것 아니냐

 

얼굴에 상처 낸

일 서툰 손주 딱했나 보다

툇마루에서 해바라기 하시던

할머니 말씀

 

해당화 가시 앞에

내가 먼저 무장해제 했다

땀에 젖은 두꺼운 겉옷은 진작 벗었다

온 몸을 하얗게 날 세운 잘린 가지

소풍날 처음 풍선 들었던 마음으로

갓 부화한 노랑병아리 옮기듯

조그만큼 씩만 살포시살포시 나른다

 

아지랑이 피어올라

몸마저 근질거리는

봄 날 오후

초침마저 멈추려는듯 느리게 움직여

시름 하나 없이 바깥 일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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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순 2016-05-09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할머니는 떠나지 않으셨네요 손주의 삶 속에 항상 살아계시는 군요
손주의 일상의 삶속에서 언제나 손주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할머니가 보입니다
할머니를 통해 일상의 삶을 재 발견하고 할머니의 마음을 다시 헤아려 보고
그 속에서 자신을 다시 보는 손주는 할머니의 사랑을 통해 삶을 넉넉하고
따듯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를 읽는 내내 따듯함과 넉넉함이 때로는 슬픔과 애잔함이 함께 밀려오는
느낌입니다 아름다운 시 감사합니다
 

사변 직후 궁핍한 시절

왜 그리도 잔병치례가 심했는지

취학통지서도 아직 안 나온 손주는

장딴지 피부병이 손바닥만 해져야

할머니 손에 끌려 도립병원엘 갔다

손주를 꼭 잡고 있으라고 했을 때도 몰랐다

보랏빛마저 도는 새파란 물약

진물 난 상처에 바르자

처음 맛본 공포였다

꼭 피부를 벗겨 내는 따가움이었다

 

팔팔 뛰는 손주의 울부짖음에

우리 강아지 얼마나 아플꼬 얼마나 아플꼬

그렁그렁 눈물 가득한 손주는

의자 앞 쪼그려 제 두 무릎을 꼭 잡고

불이 난 상처

호호

불어주는 할머니 황망한 손을 보았다

 

숨마저 잊어버렸던 순간

제 몸의 통증과는 또 다른 통각 때문

놀란 손주는 울음을 삼켰다

그 후 할머니의 아픔은 내 눈물이 되지 못해

참으로 애달픈 기억이다

 

꼭 한 갑자의 시간이 흘렸다

그 기억 속의 나이만한 어린 손녀와 꽃씨를 뿌린다

엄지와 검지만으로도 다 집을 수 있을 것 같은

봉지 속 석죽씨앗

땅을 골라주고 뿌리라고 했더니

누구에게서 배웠을까

작고 통통한 제 손바닥에 꽃씨 모아 들고

호호

철모르는 여린 입김을 불어 넣는다

 

올 해부터

무더기무더기 핀 석죽 꽃을 보는 사람들

모두 다 행복할 것이다

석죽은 제 온몸을 감싼 다스한 입김을

모두의 가슴에 향기로

호호

불어 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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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순 2016-05-09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할머니와의 추억이 손주의 삶을 밀어가는 힘이 되는듯 합니다
힘겨웠던 시절은 어느새 따듯하고 아름다운 때로는 아프고 아련한
추억이 되어 손주의 삶을 빛나게 합니다
이 시를 읽는 짧은 시간 동안 내 할머니와의 수많은 추억이
한꺼번에 밀물 처럼 밀려옵니다 아름다운 시 한편에 삶이 촉촉해집니다

 

암으로 아버지 여의고

같은 병으로 6개월 만에 어머니도 뒤따랐다

외아들 홀로 키워낸 할머니는

황망한 손주를 대신해

아들 이어 며느리 장례까지 씩씩하게 지휘했다

연달은 흉사에 넋을 놓은 처연한 식구들

어머니마저 보내 비통한 손주에게

할머니는 더 큰 한을 비수로 던졌다

 

애미를 애비 곁에 보내고 나니,

이제야 내 맴이 터억 놓인다

고생고생 호강 한번 못한 며느리의 절통한 삶보다

먼저 간 아들의 외로움이 걱정이었던 할머니

저승을 불신하는 손주는 그저 통곡했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의 시간이 왔다

미음도 못 넘긴다는 전화에

생전 얼굴 한 번 뵐려고

칠백 리 다섯 번 버스 갈아타고 달려온 손주

할머니는 핀잔부터 주었다

고생스럽게 머하러 오나. 날도 꾸물꾸물하는데.....’

할머니 저승은 이승과 다름없는 참 견고한 세상이었다

 

언문을 읽을 수 있었던 신부에게

부모가 정해준 짝은 경성에서 전문대 마친 하이칼라였다

친구랑 기생 불러 집에서 자주 풍악도 잡혔다

아궁이 앞에서 쭈그려 듣는 대청 지화자 소리도 자랑스러웠다

몇 년 병수발한 아내에게

임종할 때 손 꼭 잡고 눈물로 한 말씀했다

자네 고생만 시켜 내 죄가 크네

 

청상은 물일 밭일 가리질 않았다

목이 휘도록 혼자 이어야 했던

식구들 목줄인 함지도

물동이에 얹힌 바가지처럼 가벼웠다

밤새 졸음으로 묶어

새벽 장에 내던 삼단 같은 채소 단

머리털이 성겨 비녀를 꽂을 수가 없었다

 

탱목 같은 할머니에게도 큰 걱정이 딱 한 가지 있었다

저승서 할아버지가 알아나 볼까?‘

할머니가 꺼내 보는 사진 속 할아버지는

동그란 금태 안경에 뽀얀 얼굴이 가름한 젊은이였다

세월이 비껴간 할아버지 젊은 저승만은 미심쩍었다

식솔이 늘어 새벽잠을 줄여야 하는 만큼

걱정도 점점 굵어지는 삭정이 손마디였다

 

할머니의 젊음을 뺏어먹고 머리가 커진 손주는

궁리 끝에 기특한 거짓말을 했다

할머이 그런 걱정 마

사람은 죽으면 가장 행복했던 모습으로 바뀌어 산다던데

 

아무 걱정 없이 황천 건너 서방님을 만나리라

사공에게 건넬 뱃삵도 쌈지에 꼭 챙겼다

벼르고 별러 장만한 안동포 수의

쓰다듬을 때마다 보풀이 일어도 마음은

혼례 비단옷 매만지며 초행 기다리는

떨리던 고운 손이었다

 

폭설 예보 눈발처럼 날려 황황한 손주

뒷목은 차마 떠나지 못하고 돌아보니

문지방에 허깨비 하나 상체 반 넘어 걸쳐

대문께 내다보고 있었다

한 손으로 대청마루 집고 다른 손

손등으로 어여 가라고 떠미는 몸짓으로

당신의 먼 저승길보다 손주의 눈길이 더 걱정인 할머니

손주의 비통을 대문 밖으로 내몰고 있었다

 

사진처럼 각인된 이승의 마지막

피골이 상접한 검버섯 얼굴과

방안의 기물이

너무나도 밝고 또렷해

누가 환하게 등을 켰나

순간

착각을 했다

 

발길 다그치는 칠백 리 길

올려다본 궁창은 저승같이 아득히 깊은데

함박눈이 목젖까지 뜨겁게 젖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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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순 2016-05-09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할머니의 인생이 한 편의 영화 처럼 제 눈앞에 펼쳐져 보이는듯 합니다
이 시 속에 먼저가신 제 할머니의 모습이 겹쳐져 보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한편의 시로 가슴을 적시며 이 하루를 시작합니다
감사합니다
 

갓난 동생에게 엄마 품 빼앗기고

할머니 방으로 이사를 했다

어린 손주는 방이 설어 울었나 보다 아니면

엄마 찾는 잠투정을 했을까

 

우리 강아지

할미가 옛이야기 한 커리 해 줄까

옛날 옛날에

아들이 엄마 품을 떠나

다른 방에서 떨어져 자게 되었지 뭐냐

엄마는 저쪽 안방

아들은 이쪽 사랑방

깜깜한 한밤중에 보니까

하얀 안개 같기도 하고 연기 같기도 한 것이

엄마 자는 방에서 뭉게뭉게 피어나더니

아들 자는 방으로 기척도 없이 스며들지 뭐냐

옛 사람이 이상해 문틈으로 들여다보았더니

그 안개 아들을 솜이불처럼 덮어주더란다

다음 날 꼭두새벽

안방으로 슬그머니 사라지더래

 

공업고등학교 마치고 낯선 서울

답십리 공장으로 떠나는 날

밤 한 시 완행열차 타는 아들 위해

새물내 나는 옷가지 꾸린 가방 뺏어 머리에 이고

어머니는 역까지 따라 나섰다

집 떠나는 이제 열아홉 아들

줄일 수 없는 오백 리 서울은 너무도 아득했을까

달빛 뿌연 신작로 이십 리 길 내내

모자는 말없이 바쁜 듯 길만 잡았다

 

쥐기 좋게 가방끈 모아 아들 손에 건네주는

어머니 저 눈길

사랑방에서 여태까지 다습게 잔 것은

한 마디 내색 않던

구들 아랫목 같은 온기 때문이었구나

 

아들 태운 기차 떠나면 되짚을 이십 리 길

근심처럼 불거지는 돌부리에 채어

추운 밤 홀로 어찌 걸을까

집 앞 철길 기적 울릴 때마다

김매던 호미 멈추고

긴 날숨으로 다스릴 텐데

 

음력 2월 밤공기는 옷깃 파고 드는데

뗏목 띄워 한강 다니던 동강 어라연에서

하얀 안개 진하게 피어올라

고향 밤을 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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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순 2016-04-19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월을 되짚어 가면 우리네 삶속에 이 시 처럼 서로를 위하는 따듯했던 마음들이
차고 넘쳤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진것이 없어 서럽고 아팠던 그때는
이 시속에 엄마와 아들 처럼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위햐는 마음으로 참 넉넉했던것 같습니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있었고 엄마의 애틋한 사랑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가난해도 마음 넉넉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것이 풍요롭고 차고 넘쳐나는 오늘 이건만
우리들은 점점 더 물질문명의 이기속에서 고독해져만 갑니다
말없이 이십리길을 바삐 걸어가는 모자처럼 침묵속에서도
따듯한 사랑을 주고 받았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립습니다
선생님 마음 따듯한 시 한편 잘 읽고 갑니다

ㄱㅎㅇ 2016-04-20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 때 그 곳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느낄 수는 있을 듯 합니다. 머리를 깨우며 앉은 자세를 곧추세우는 구절이 있는가 하면, 가슴을 데우며 지난날에 잠시 손을 놓게 만드는 구절이 있는데... 이 시는 후자에 탁월함이 있어 보입니다. 할머니가 된 엄마는 흰 무명저고리를 입고 밤길을 걸었을 것만 같네요.

chr_TOPGUN 2016-04-20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들을 품었던 하얀 안개가 마지막 고향 마을까지 품었으나 시의 처음에서 눈물을 흘리던 손주까지 따뜻하게 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손주까지 따뜻하게 품었다면 뭉근하면서도 아득한 모성애가 동강처럼 세대를 흐르고 있음이 더욱 잘 드러났을 것 같습니다.

스당 2016-04-20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십대에 집 떠나 객지서만 살다보니 와 닿은 부분이 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지영 2016-04-21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릴적 기억을 더듬어보게하는 글이네요 넉넉하고 가슴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토토로 2016-05-02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목과 첫 구절을 읽고 할머니에 대한 시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머니에 대한 시였군요.
객지 생활을 하러 어린 시절 부모님을 떠나오던 그 날의 그 느낌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이제 살아온 날보다 떠날 날이 더 가깝다. 어느덧 종심의 시간.

돌아보면 짧고 덧없는 삶이었지만 많은 깨달음의 순간이 있었다. 가슴에 새겨진 만남도 있었다. 내 삶의 지주가 되었던 함옹, 나에게 말을 걸어왔던 고1 봄날 교정을 잊을 수가 없다. 평생을 간직한 윤동주 시집. 루이제 린저, 레마르크 등등. 그 기쁨, 고통, 환희, 고뇌가 나를 성장시켜 주었다. 지금까지 나를 키워준 그 깨달음과 만남을 형상화하려고 한다.

퇴직 후에야 글을 쓸 여유가 생겼다. 종심의 나이에 걸음마 하듯 시쓰기를 배운다. 평생 함께 했던 시인들, 간직했던 시집들. 내가 좋아하던 시인들의 시만큼 남이 내 시를 좋아할까 두려움뿐이다.

나를 감동시켰고 그래서 나를 성장시켜준 만남들이 나의 서툰 시를 통해 타인에게 전달될까. 부디 내가 느낀 감동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되기를 꿈꾼다. 그 감동으로 내가 성장했듯이 독자도 성장하기를 소망한다.

나의 서툴고 수줍은 글쓰기. 이 시를 통한 독자와의 만남도 나를 부단히 성장시키는 힘이 될 것이다.

떠나는 순간까지 나는 성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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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시케 2016-04-11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살아낼 시간이 적은 시대를 살아가는 나이든 사람으로 새로 시작하신 일에 부러움을 느낍니다. 경험을 토해내어 나누고 그것을 함께 긍정하게 되길 기대합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