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몰려온다

지상에 서 있는 모든 것이 고난이다

부러질 듯 휘었다가 다시 선다

낙엽의 비명만큼 또 휘어진다

살아가는 것들의 소란스런 가벼움이다

 

지상이 시련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땅 속에 심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상은 살아가며 쌓인 어둠을 모두 뿌리로 보냈다

뿌리는 지상의 무거움을 모두 받아 내렸다

흙 속에 한 삶의 중심이 만들어 진 것이다

뿌리는 고요 속에서 무게의 어둠을 만끽한다

 

곧은 뿌리, 수간(樹幹) 높이만큼 맞춰 내렸다

녹음의 무게와 똑같은 붉은 추()의 고요한 깊이에

지상은

태풍을 살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지상의 힘은 뿌리에 담긴 어둠의 무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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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록 2017-05-29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뿌리...

뿌리는 지상의 무거움을 모두 받아 내렸다....
태풍을 살아 견딜수 있는 것이다...

힘의 근원인가요?

2017-06-10 0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어주어서 고마워
시를 쓰지만 해석과 감상을 읽는 사람의 몫이지
다만 뿌리가 지니는 여러 뜻을 생각하기를
 

여린 마음으로는

여울진 세상 살기가 어려웠어라

언제부턴가 짊어진 두꺼운 갑옷

더듬이 내밀었다가 상처 받으면

돌아가려 마련한 안식처다

 

험한 물살에 떠밀려

잠시도 한 곳에 머물지 못했다

구르고 구르며 떠내려 온 세월

골뱅이는 온 몸이 푸르게

짙푸른 멍 자국으로만 남았다

 

강물이 푸른 것은

찐득한 울혈 죽음으로 토해

강심에 켜켜이 쌓아 놓은거라

도도한 흙탕 큰물로도

씻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평창강 행정나루터

서산말 청춘들이 담력으로 멱감는 냉골(陰谷)

오늘 또 몸을 던졌다

여자들은 마지막 가는 길 어째서

강을 택할까

 

강물이 푸르도록 몸뚱어리 희게 풀어놓고

모래에 묻히는 골뱅이 빈껍데기

자갈밭엔

주인 없는 신발 한 짝

 

강물이 깊을수록 끝도 모르게

쌓아 내려뜨린 물색의 무게

장막 두꺼운 침묵의 사연들

검푸른 나락에서 울부짖는 소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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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저 강 좀 봐

긴 여정에 아우성치던 심장

도닥도닥 재우고선 이제는

유유히 흐르는 저 강물 좀 봐

 

풀어질 줄은 알지 깨어질 줄 몰라

산그늘 노송 품고

구름도 슬쩍 불러

산수화 구도를 맞추는 저 강물 좀 봐

 

바람 불면

별과 잠깐 놀아주다

설레던 은빛 촉수

안으로 잠글 줄 아는 저 강물을 좀 봐

 

멈춘 듯 느린 걸음

불 꺼진 마을 지나

돌아보지도 않고 덤덤히 가는

한스럽게 깊푸른 저 강물을 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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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시간을 설거지 하듯

계절의 잔해가 모인다

살아온 죄로 허리가 잘려

나란히 포개 층층이 눕는다

 

퇴비장은 무덤

삶과의 거리는 꼭 한 길 높이다

내년 봄

과일 나무 밑에서 부활할 수 있을까

 

2

백년은 지난 고분이 되었다

누그러진 날을 잡아 뒤집어 준다

마지막 호흡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수직 콧대 세웠던 풀줄기

오만한 심을 녹이는 오체투지 중이다

너무 서두르는 걸음은 뒤섞어

발맞추라 한다

목마른 육신들 마지막 한 잔은

물뿌리개로 촉촉한 음복

 

검은 비닐 제단에서 올리는 번제

육신을 태우는 뜨거운 김이 오른다

향유 없이 소신공양하는데 필요한 온도는

섭씨 600

 

3

푹 삭은 거름은

낮의 무지개를 품은 밤의 색

복추, 추희, 초하, 은풍

홍로에서 양광까지

생명을 잉태한 마법의 재료다

 

4

이승을 살아온 시간은

편도가 아니고 항상 왕복이다

귀향의 포실한 맨발을

쇠스랑으로 삼태기에 옮긴다

 

난향이

찰나 가슴에 스친다

 

5

과일 향이 왜 달콤한지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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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빈 운동장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떠난 빈자리엔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면 비로소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네는 빈자리로 기다리고 있었다

 

열려있는 교문에 이끌려 한 소녀가 운동장에 들어왔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그네에 앉았다 소녀는 무심히 앉았지만 기다리며 늘어진 줄만큼 그네는 출렁였다 운동장에 차오르는 어둠에 발이 젖어서일까 땅을 차던 소녀는 신발 끝으로 밀어 조금 물러났다

 

발끝 쐐기를 풀자 그네는 출렁이며 직선 같은 짧은 호()에 소녀의 무게를 허공으로 실었다 조그만 출렁임에 소녀의 눈에 물기가 출렁 넘쳐 한 방울 굴러 떨어졌다 소녀는 고개를 묻었다 그네도 호의 가장 낮은 한 점에 동작을 멈추고 말았지만 소녀의 가슴에서 오는 파동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그네 줄은 진동을 멈추었다

 

소녀는 다시 발끝으로 그네를 뒤로 밀었다 이번에는 까치발 끝이 닿는 힘껏 밀어 추진력을 모았다 그네 줄은 팽팽한 반동으로 소녀를 밀어 올렸다 소녀는 한 손을 빼 줄을 잡았다 소녀는 그네의 활공에 고개를 들더니 두 손 다 줄을 잡았다 소녀는 땅을 차던 발끝을  가슴으로 힘껏 잡아당겨 그네에 힘을 실었다 그네는 예각을 벌리며 호를 긋더니 이내 둔각으로 솟아올랐다 소녀가 가벼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밤의 무게를 벗어나 비상했던 소녀는 그네에서 폴짝 뛰어 내려 손수건을 꺼냈다 안경을 벗고 마른 눈물자국을 꼼꼼하게 지웠다 무심한 별빛을 바라보더니 옷매무새를 만진 후 거리로 나섰다

 

그네는 소녀가 떨구고 간 눈물의 무게 때문에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람이 불어와 눈물을 날려 보낸 후에야 비로소 가벼워 질 수 있었다 텅 빈 운동장에는 심해처럼 어둠이 엉기고 빈 그네는 수초처럼 혼자 몸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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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일 2017-04-01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쉬면서 다시 읽어보고 있습니다.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