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 디어 마이 프랜드

 

                                                     엄 영 훈

 

 

하아이!

너를 맞으려고 대청소를 했어 마음 한 구석 숨은 거미줄도 있더군 너저분한 버릴 것이 그리도 많은지 생애를 톡 털어 대형 쓰레기봉투 몇 자루는 나갔어 어릴 때부터 모은 일기장이랑 편지들 신나를 뿌리고 태웠어 눈물 젖은 편지는 잘 타지도 않더군 한 생이 축축하게 연기가 되어 오르더군

 

하이! 디어 마이 프랜드

내 평생이 널 만나기 위한 삶이였다면 너도 기쁘지 내가 엄마 뱃속에 자리를 잡으면서 너를 만날 운영이었던 거야 모든 생은 너에게 진 채무를 청산하기 위해 사는 거라며 내 이승의 살비듬 한 조각까지 모다 너에게 주어서 평생 진 빚을 깨끗이 갚을 거다 지상에 털 한 올 남기지 못하게 할 거야

 

하이! 디어 마이 프랜드

넌 언제나 내 주변을 서성거렸지 네 감춰진 옷자락을 수도 없이 보았단다 열 살 무렵 홍수에 떠밀린 강심에서 안간힘을 다한 막막한 자맥질할 때 서늘함 기진한 가슴을 쓸어내렸을 때 그게 네 옷자락에서 풍긴다는 걸 알았어 아산병원 의사가 건조한 목소리로 너의 방문을 예고했을 때 아내의 눈물 바람으로 너를 마중 나갔는데 꼬리를 감추고 말았지 냄새의 꼬랑지만으로도 지금의 나를 키운 자양분이었어

 

하이! 디어 마이 프랜드

나는 오른 손바닥을 쫘악 펴서 높이 흔들며 너를 맞을 거야 잇몸 크게 드러내고 입꼬리는 솟아오르는 광대뼈를 향해 치켜 올릴 거야 내 생애 처음인 너털웃음이 될 거야 넌 기쁨에 떠는 내 목젖도 볼 수 있을 걸 웃음 넘치는 몸짓은 거울을 보며 혼자서 연습했어 아무도 없을 때

 

연습은 충분해

디어 마이 프랜드

미스터 안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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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바람 탓이 아니더라

 

                                         엄 영 훈

 

저놈의 바람 때문이다

깊이 중심을 내렸던 바다를 저놈의 바람이 뒤집어 놓았다

심해의 깊이로 숨겨 두었는데

저놈의 바람이 자꾸 보챈 탓이다

어쩌지 못할 것에 대한 어쩔 수도 없는 것을

온종일 뒤집어도 부질없는 것을

저놈의 바람은 새벽까지 휘젖고 있다

 

저놈의 바람은

어둠 내린 금진항 산비탈도 뒤집어 놓았다

바람에 흔들려 잠에서 깬 구절초

달빛 속에서 유령의 몸짓을 흉내 내고 있다

바위의 무게로 눌러 두었는데

목 길게 뽑은 풀줄기 끝에 흰 방울로 맺히더니

새벽까지 하염없는 몸짓으로 흔들리고 있다

 

저놈의 바람 때문이다

삭힐 수 없는 것

바람 불어 파도 뒤집힐 때마다

오래 묵혀두면 그만인 것

구절초 달빛에 흔들릴 때마다

울컥울컥 덩어리는

숨구멍 막으며 아프게 각진 것

다시 보지 말자 다짐했던 것

하염없이 게워 놓았다

 

바람결에 토한 것은 문장이 되지 못하는데

토할 때마다 맺히는 눈물은

바람 탓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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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뱃멀미를 겪으면서 어른이 되더라

 

                                엄 영 훈

 

제주 가는 밤배였다

뱃전을 치는 밤바다는 물귀신의 옷자락으로 펄럭였다

처녀 귀신은 총각만 부른다는데

열일곱 소년은 마지막 목숨줄인 양 난간을 움켜쥔 채 떨고 있었다

흰 옷자락을 펄럭이며 겨울 바다가 유혹하고 있었다

엄마 뱃속 같을 아늑한 잠

장막 뒤의 아득한 열락으로

일렁이는 노래로 재촉하고 있었다

난간을 잡은 빨간 손이 곧 부서져 쏟아질 유리창처럼 떨 때

울컥 올라왔다

 

몸이 울컥울컥 토하고 있었다

맛나던 목포의 저녁이 시큼한 콧구멍으로 올라왔다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샛노란 위액 한 방울까지 다 쥐어짜도 질책은 멈추지를 않았다

제 육신에 담긴 소년을 척추를 접으며 토사물 위에 무릎 꿇렸다

뒤채는 바다와 흔들리는 여객선과 더 사나운 악몽에서

몸이 먼저 깨어나 샛노란 경고장을 날렸다

인생이란 항해는 본디 흔들리는 것이고

사납게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시선만은 멀리

저 멀리 수평선의 소실점을 바라보라고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봐야겠다*

 

기착지의 등대가 깜박이고 있다

고향 집도 식구가 돌아올 때까지 밤을 새워 졸고 있을 게다

미몽(迷夢)의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고 있었다

갓 벼려낸 호미의 색깔로

이빨 맞부딪치는 몸의 소리로

 

*남진우 <로트레아몽백작이 방황과 좌절에 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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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일 2017-12-12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讚根頌 37 뿌리의 침묵

 

                                             엄 영 훈

 

뿌리는 항상 침묵한다 침묵에는 서릿발의 무게가 스며 있다

 

지상이 소란스러울 때가 있다 잎새들 잔망스러울 때도 가지 찢어지는 아픈 소리를 낼 때에도 땅 속에선 반응하지 않는다 뿌리는 모든 소리를 안으로 재울 줄 안다

 

벌목꾼이 허리를 자를 때조차 뿌리는 침묵한다 등뼈를 파고드는 쇳소리 중심이 무너지며 땅을 구르는 충격 그럴 때조차 침묵은 북면한 겨울 바위다

 

침묵하는 아픔이 더 독해 죽음마저 다스릴 수 있다 이윽고 찐득한 눈물로 풀린다 혼자 남은 자에게 묽은 눈물이란 없다

 

소나무 뿌리는 허리 잘린 밑동에서 송진 뿜을지언정 결코 새순을 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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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학야구 유망주였다 프로구단 입단을 앞 둔 해에 부상으로 꿈을 접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막상 없었다 소도시 하루 사납금 채우기 급급한 택시기사가 되었다 화려한 야간조명의 프로구장에 한 번 서보지 못했지만 야구를 잊지 못한다 매주 토요일 오후 한 시가 되면 어김없이 운동장으로 달려간다 영업택시 세워 둔 채 야구를 한다 테니스공으로 야구하는 리틀야구단 무료코치다 그가 입은 야구복은 누렇게 흙물이 빠지지 않았다 대학배번이 들어간 야구복을 입으면 전성기 그 때처럼 활기가 넘친다 오후 여름 햇빛과 맨땅 구장 흙먼지는 구단 스카우터 앞에서 실전 연습하던 것처럼 흙땀 범벅으로 만든다 연습이 끝나면 어린 선수들 둥근 원 만들게 하고 라인에 같이 서서 훈련을 평가한다 허리에 닿을 정도의 꼬마 선수들 사이에서 그는 우람한 거인이 되어있다 진지하기는 꼭 승부에 목숨 줄 달린 프로구단 감독 같다 손뼉 치며 파이팅을 외치고 모자를 벗고 빈 중심을 향해 90도로 허리 굽히며 목청껏 격려한다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복창이 끝나고야 아이들은 기다리는 부모에게 달려간다 먼저 사람이 되야죠 뿌리를 키우는 일이에요 야구에 인생을 걸었던 퇴물선수의 제 유니폼 같은 개똥철학이다

 

오늘도 구장은 만석이다 10억 연봉 선수가 돈값을 하느라 만루 홈런을 쳤다 관중이 발을 구르며 환호하고 영웅의 주제가가 울려 퍼진다 살아 있는 전설은 천천히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오며 전율을 만끽한다

 

치악산 녹음이 우거졌다 아름답게 푸르러진 영광의 힘은 흙 속에 갇힌 무수한 뿌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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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일 2017-12-12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시가 좋네요~